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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u Khan
생몰년: 1205년 ~ 1255년
재위기간: 1242년 ~ 1255년
1. 개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의 차남이었으며, 오고타이 칸의 조카로 훗날 킵차크 칸국을 세운 인물이었다. 바투는 13세기 몽골의 세계정복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몽골인들은 바투[2]를 생 칸(Сайн хаан)이라고 불렀는데, 좋은 황제[3]라는 의미였다.2. 생애
1205년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서 칭기즈 칸의 손자였다.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땅을 장자가 물려받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가장 먼 곳인 러시아의 초원 지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주치가 숨을 거두자 칭기즈 칸은 주치 울루스의 영지를 그의 아들들이 물려받도록 조치했는데 첫째인 오르다가 몸이 약해서 둘째인 바투가 통치권을 물려 받게 되었다.바투의 영토는 세메이와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오랄, 아다지, 옛 호라즘 왕조의 본토를 포함했고, 또한 킵차크 지역으로부터 볼가강 서쪽의 정복지이자 베수드 제베와 우량카이 수부타이의 서방 원정으로 손에 넣은 드넓은 초원 지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즉 몽골 제국의 서북쪽 끝으로 유럽과 가장 가까웠던 유목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27년 7월 칭기즈 칸이 붕어했을 당시, 주치 울루스는 몽골 제국의 서북부 지역인 볼가강 유역을 끼고 있었으며 휘하에 약 4,000명의 군대를 두고 있었다. 이 주치 울루스는 주치의 장남인 오르다[4]와 차남인 바투[5]에게 이어졌다. 제2대 오고타이 칸의 치세 초반, 바투는 주로 대금 전선에서 싸웠으며,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서방 원정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 되었다.[6] 1235년 주치 가문의 바투, 오고타이 가문의 귀위크, 툴루이 가문의 몽케, 4구 중의 한 명으로 명장이었던 우량카이 수부타이 등이 이끄는 150,000명 이상의 대규모 몽골군이 서방 정복을 위해 집결한 후, 1236년 볼가강을 넘어 키예프 루시의 제공국들을 향해 진격했다. 이 서방 원정군은 러시아에 난립하고 있었던 류리크 왕가 계통의 공국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7]
러시아를 침공하던 도중 주치의 혈통 문제(메르키트 콤 플렉스)가 뇌관으로 작용하면서 칭기즈 칸의 다른 손자들[8]과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단, 함께 왕따를 당하던 툴루이 가문과는 꽤 친했다. 결국 사촌들[9]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격노해서 숙부인 오고타이 칸에게 그대로 고했다. 바투의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 칸도 격노해서 귀위크 등을 소환한 뒤 씨족 간에 분쟁을 일으킨 죄를 물어 갈궜다.
한편 러시아의 생존자들인 튀르크계 쿠만족 40,000명이 아르파드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던 헝가리 왕국의 국왕 벨러 4세에게 도망쳐서 몸을 의탁했는데, 바투는 이들을 추격하는 동시에 갈 수 있는 한 서쪽 끝까지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몽골군은 폴란드, 헝가리를 넘어 오스트리아까지 정찰을 한 뒤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동유럽을 침공했다. 바투의 형 오르다(Orda)와 차가타이의 아들 바이다르(Baidar), 오고타이 칸의 차남 카단(Kadan)이 이끄는 북로군은 곧장 피아스트 왕가 계통의 공작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폴란드의 제공국들을 습격하여 레그니차 전투를 치렀고, 바투와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베레츠키 고개를 넘었다. 한편 남동부로 향한 남로군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약탈한 뒤, 다뉴브 강을 따라 헝가리 평원까지 진출하여 모히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바투는 1242년까지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을 공격했다가 퇴각했다.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붕어로 인해 몽골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한 이후, 수부타이 등은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몽골 초원으로 바로 돌아갔지만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남아 미적거렸다.[10] 이 때문에 귀위크는 1246년이 되어서야 제3대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11] 대칸 귀위크와는 사이가 계속 안 좋아서 바투는 몽골 제국 본대와는 따로 놀면서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12] 이때 바투의 영지는 러시아, 이란, 캅카스 등을 망라했다.
귀위크 칸과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되었는데, 결국 귀위크는 바투가 이란과 캅카스에 임명한 지방관을 자기 사람으로 바꾸는 한편, 1248년 바투를 몽골 초원으로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귀위크 칸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던 바투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서서히 몽골 초원쪽으로 동진했고, 이에 질세라 귀위크 칸 역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귀위크 칸이 급사하면서(1248년, 4월) 내전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귀위크 칸 사후 바투는 칭기즈 칸 일족의 큰 어르신으로, 제국의 차기 대칸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비록 정통성은 오고타이 가문에 있었지만 바투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1250년 바투는 자신의 영토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해 자신과 사이가 좋고, 몽골 제국 내에서 세력이 미약했던 툴루이 가문의 몽케를 제4대 대칸으로 옹립했다. 그리고 저항하는 오고타이계와 차가타이계를 힘으로 찍어눌러버리면서 대칸 옹립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3] 몽케도 대칸이 된 이후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바투의 독립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뒤 바투는 서쪽에 대한 정복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칸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다졌다.[14][15]
3. 평가
몽골의 전승에서는 현명하고 온화했던 칸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러시아의 전승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무자비한 폭군으로 등장한다.[16] 유럽 원정을 책임진 장수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실제 당시 동유럽에서 몽골군의 악명은 자자했는데, 일례로 바투가 한 러시아 귀족의 아들을 잡고 금발벽안의 모습에 반해 어루만졌는데, 그가 바투의 손을 치자 분노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당대의 러시아 시문학에서는 우리는 열심히 싸웠는데 하느님의 군대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군사적인 능력은 시원찮은 면이 많았다. 기실 원정군에서 바투는 바지사장 격이었고, 실제로 부대를 지휘한 건 칭기즈 칸 이래의 개국공신이자 백전노장이었던 수부타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토르조크 전투에서는 2주나 허비하고도 이기지 못해서 수부타이를 불러와 겨우 제압했고[17] 코젤스크 전투에서는 7주를 허비하고 병력도 4,000명이나 잃었는데, 그런데도 못 이겨서 다른 부하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이겼다. 지옥에서 올라온 공포의 대왕...이 아니라 허당(?) 바투 아예 나중에는 바투 자신도 순전히 수부타이 덕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인정했으니 자타공인 시원찮은 군사령관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헝가리군과의 모히 전투에서는 수부타이가 세운 작전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섰다가 바카투(팔합독)라는 본인이 신임하는 장수가 전사하는 일까지 겪게 되었다.[18] 본인에게도 이 일이 엄청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를 구하러 온 수부타이에게 졌으니 돌아가자고 했다가 수부타이의 단호한 모습에 포기하고, 수부타이 덕에 어찌저찌 이긴 뒤에는 분했는지, 괜히 수부타이에게 "니가 늦게 와서 이렇게 된 거잖아!"라고 화풀이했다. 이에 수부타이도 참지 못했는지 바투에게 "대왕께서 제 말 안 들어서 이런 건데 왜 제 탓입니까?" 라고 반문했는데 바투도 할 말이 없었는지 수부타이 덕분에 이긴 것이 맞다고 인정한 후 데꿀멍했다. 그러면서도 수부타이는 바투의 패배를 미끼로 삼아 헝가리군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군사적 측면에서는 빈 말로도 명장으로 불러 줄 수 없는 편이었다.
특히 바투의 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귀위크는 심지어 바투에게,
"바투는 화살통을 들고 다니는 늙은 여자일 뿐"
이라고 조롱했다(...) 몽골군의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바투는 격분했고, 둘 사이의 갈등이 격해지자 오고타이 칸이 아들 귀위크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다만 바투가 군사적인 능력은 딸려도 총사령관으로서의 상황 판단력만큼은 좋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원균처럼 답없는 내부의 적 수준까진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도 본인의 역량 부족을 인정하고, 지휘권을 사실상 수부타이에게 넘겼기 때문이었다.[19] 별 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전근대에서 능력에 하자가 있었던 군주들 중 이것조차도 못해서 패가망신한 군주가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당시 몽골군은 큰 패배를 당한 기록도 그다지 없었고, 동유럽까지 진출하며 세계 최강의 명성을 쌓아올렸다.
실제 바투의 경우, 군사적 능력보단 정치적 능력을 더 주목해야 하는데, 생 칸(Сайн хаан)이라는 별명이나 귀위크 칸 사후 후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몽골 제국 내에서 주치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한 점, 킵차크 초원에서 몽골 제국의 지배권을 굳게 다진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정치력이 상당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 바투와 이후 그의 후손들의 행적을 보면 바투는 꽤 성공한 편이었다. 그가 세운 킵차크 칸국도 다른 칸국들처럼 혼란이 좀 있기는 했지만 오고타이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일 칸국이 각각 14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것에 비해[20] 무려 1502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신 국가들은 대부분 16세기 중반에 무너졌지만 크림반도에 자리잡은 크림 칸국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으니 어찌보면 최후의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본가도 몽골 제국 - 원나라 - 북원 등으로 이어지다가 17세기에 결국 대칸 자리가 청나라에 넘어간 것과 비교하면 참 질기게도 살아남은 셈이었다. 거기다가 킵차크 칸국의 존속 시기는 러시아에게는 몽골-타타르의 멍에이기도 해서, 그 여파가 굉장히 오래 이어진 걸 감안하면[21]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 바투는 악몽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바투가 정치력으로 자신만의 세력권을 굳게 다져나간 것은 반대로 말하면 몽골 제국의 단합력을 약화시켰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보면 다얀 칸과 알탄 칸이 떠오르게 되는 대목이다.[22]
다만 바투가 악명이 높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자비한 학살 및 약탈과 같은 전쟁범죄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부타이와는 달리 잘 싸우지는 못했지만 바투는 꼭 정복한 곳[23]에서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것만 놓고 보면 확실히 칭기즈 칸의 손자가 맞았다.[24] 칭기즈 칸이 자식과 손자들에게 항상 "동정의 열매는 후회"라고 가르쳤다는 설이 주류이다. 그러므로 일단 정복을 하면 군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인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사실 이건 바투만의 문제가 아니라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들은 극소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기록상 다 그랬다. 칭기즈 칸의 가족들을 봐도, 온화하다고 기록된 이복형제인 벨구테이조차 딱 한번, 어머니인 소치겔을 납치한 메르키트족을 상대로 대량학살을 벌인 바 있었다.[25][26]
4.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영화 <퓨리어스>에서 등장한다. <300>의 크세르크세스처럼 이상한 중국식 복장으로 등장한다. 거기다가 몽골족은 하지 않은 중국식 상투를 하고 있다. 아마 위의 중국화에서 크나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이 때문에 황장군과 상당히 유사해졌다. 배우는 고려인 출신인 알렉산드르 루돌포비치 초이였다.
국내 온라인 게임인 <천하제일상 거상>에 바투의 이름을 딴 바투세트라는 아이템이 존재한다. 거상 내 몽골 지역 내의 왕의 무덤이라는 던전에서 드랍하는 아이템이며, 민첩성의 스탯을 어마어마하게 올려주는 아이템이다.
[1] 의상을 보면 알겠지만 명나라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2] '용감하여 상대가 없는 사나이'라는 뜻의 몽골어라는데, 용사라는 뜻을 가진 '바가투르/바토르'와 동일한 듯하다.[3] 몽골어에서 생(Сайн)은 '좋은', '잘', 'Good'이라는 뜻이다. 몽골어로 첫 인사인 "Сайн байна уу"도 "잘 지내시죠?"라는 뜻이다. 서양 군주풍의 별명으로 치면 '선량왕'(善良王, the good)을 들 수 있다.[4] 흰색 올다.[5] 황금 올다(졸로타야 올다, 金帳, Golden Horde) - 칭기즈 칸의 씨족들은 황금씨족으로 불렸는데, 그중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계승자인 바투의 올다를 황금 올다라고 불렀다.[6] 사실 바투는 명목상의 총사령관이었고, 실제로는 '4구' 중의 한 명인 우량카이 수부타이가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았다.[7] 그나마 가장 북쪽에 있었던 노브고로드 공국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나, 이들 역시 몽골군 앞에서 버로우을 타며 깨갱해야 했고, 겨우 살아남은 것도 바투의 큰 실책때문이었다.[8] 귀위크로 대표되는 오고타이 가문 및 차가타이 가문[9] 그 중에서도 특히 오고타이의 장남이었던 귀위크와 사이가 가장 나빴다. 일반적으로 사촌들이 혈통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바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추측되나, 김호동 교수는 서방 원정 중에 바투가 보여준 무능함에 사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원정 이전부터 귀위크 등 오고타이계 및 차가타이계 사촌들과는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분쟁에서 오고타이 칸이 바투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의 무능력을 옹호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10] 바투와 그의 부관들은 유럽 원정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수부타이는 바투에게 다소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까지 귀환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철수를 선택했다. 대신 타협책으로 귀환길을 발칸 반도를 경유하는 길로 잡아 약탈전을 계속 수행했다. 추측이지만 바투가 원정을 더 계속하고자 한 이유는 자신의 기반을 더 만들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11] 귀위크가 대칸에 오를 때, 바투는 형제들을 보내 주치 일족을 대표하도록 했다.[12] 바투도 귀위크 칸의 시대에는 데꿀멍 중이었고, 몽케 칸 이후의 일이라 믿어진다. 다만, 바투의 생전에는 주치 울루스 내부에서만 칸을 자칭했고, 외부에서는 아카(aqa, 장자)를 칭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원정부대를 복귀시키지 않고, 자신의 통솔권 아래에 두었기에 사실상 독립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13] 오고타이 칸 사후 황금일족의 연장자는 차남 차가타이였다. 주치와 사이가 나빴던 차가타이의 지원하에 귀위크는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가 사망한 이후 귀위크 칸까지 급사하자 칭기즈 칸의 손자들 중에서 바투가 가장 연장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한편 차가타이가 사망했을 때 귀위크 칸이 숙부인 차가타이가 지명한 후계자를 무시한채,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올리면서 차가타이 가문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또한 칭기즈 칸이 붕어했을 때 몽골 초원과 대부분의 몽골인들을 상속받은 툴루이는 형 오고타이 칸의 압박 속에 사실상 이러한 권리들을 대부분 강제로 빼앗겼었으며, 툴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 베키는 오고타이 칸의 아들 귀위크와의 결혼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오고타이 가문에서 다음 대칸 지위를 계속 차지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공공의 적[14] 칭기즈 칸이 분배한 영역에 따르면 원래 서아시아 정복의 경우 차가타이 칸국이 맡아야 했지만, 몽케 칸은 동생인 훌라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정복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들의 몫을 강탈해 버렸다.[15] 앞서 바투도 오고타이 칸이 파견한 오고타이/차가타이/툴루이 가문의 군대를 통째로 수중에 넣었는데, 훌라구도 몽케 칸 사후 지휘했던 타 가문의 부대들을 자기 휘하에 예속시켰다.[16] 헌데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이 딱히 이상한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도 막상 전쟁이나 정치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한 면을 보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일생에 걸쳐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던 항우와 조조는 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인간적이었다. 항우는 아픈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조조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들을 잃고 아내에게 이혼당한 뒤 그 아내에게 재결합해달라고 싹싹 빌었다가 퇴짜맞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17] 정작 수부타이는 그걸 3일만에 해냈다.(...) 사실 2주 동안 공격한 것때문에 데미지가 축적되어 쉽게 공략했다카더라[18] 다만 수부타이와의 합동 작전 자체의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바투는 수부타이의 명령을 무시한 원균 수준의 막장까지는 아니었고, 돌격 타이밍을 단순히 잘못 잡은 것이었으며, 따라서 바투의 졸전을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19] 사실 수부타이는 몽골군에서 소위 레전드 그 자체로 여겨졌으니 바투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기도 했다.[20] 오고타이 칸국이 1310년에 무너졌고, 일 칸국도 1355년에 멸망했다. 그나마 14세기 중반까지 살아 남았던 차가타이 칸국 또한 1370년에 역사속으로 사라지면서 몽골계 칸국들 중 킵차크 칸국을 빼면 15세기까지 이어지지 못했다.[21] 본디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인해 서유럽보다도 문화가 발달했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그 모든 것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몽골-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까지 250년 정도가 걸렸다. 이후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여 서유럽을 따라잡기까지 300년은 더 걸렸으니 무려 500년 동안 러시아는 몽골-타타르의 지배와 그 여파로 인해 서유럽보다 발전이 뒤처졌다. 심지어 표트르 대제조차도 서유럽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해서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의 황족과 귀족들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 물론 프랑스어가 러시아만이 아니고, 전유럽의 상류층에게는 공용어 수준이긴 했지만 한때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 선진국 중 하나였던 나라가 남의 나라 언어를 공용어로 쓸 지경이 되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도 몽골-타타르에 의해 날아간 국력으로 인해 러시아는 서쪽이 아니라 만만한 동쪽(시베리아)를 공략해야 했고 민족적으로도 본디 동슬라브 계통의 루스는 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걸친 국가였는데 몽골 지배의 여파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몽골-타타르의 지배는 농노제 같은 악습을 더 강화시키는데 일조해서 오늘날까지도 억압적인 러시아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다. 다만 농노제 같은 악습은 몽골-타타르의 멍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관점도 있긴 하다.[22] 다얀 칸은 북원 멸망 이후 혼란하기 그지없었던 몽골 일대를 다시 한번 규합한 인물이었지만 그 손자인 알탄 칸은 몽골 휘하 튀메드부의 칸이면서도 당시 몽골 대칸보다도 힘이 커져서 결국 다시 분열되었다.[23] 대표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24] 칭기즈 칸도 몽골인에게는 성군급이지만 칭기즈 칸에게 짓밟힌 러시아, 서아시아에서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욕먹을 수 있다...[25] 표현에 따르면 납치범들의 경우, 그 친척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도륙했고 그들의 여자란 여자는 취할 수 있는대로 다 취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26] 일단 유목민들은 농경민보다 잔인할 확률이 높았다. 농경민보다 더 험난한 삶을 사는 만큼 내가 배고프면 남을 털고 사는게 국가 단위로도 일어나다 보니 농경민을 털어먹기도, 만만한 이웃 부족을 털어먹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대로 보복의 강도는 매우 잔인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니들 우리에게 까불지 마라?' 라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었으니... 예시로 몽골에서 말은 엄청 귀중했기에 말도둑은 무조건 죽였으며, 칭기즈 칸 역시 자무카와의 사이가 벌어진 것도 자무카의 동생이 그의 말을 도둑질했을 때 죽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의형제고, 절친이라고 해도 사이가 벌어질지언정 말도둑을 죽여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