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0:04:14

야율초재


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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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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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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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권 「영종기(寧宗紀)」 38·39·40·41·42·43·44·45·46·47권 「순제기(順帝紀)」
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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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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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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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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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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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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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만들어진 흉상

파일:attachment/000bcdb95f1709b84b173f(1).jpg
현대 중국에서 소설의 삽화로 사용된 그림

1. 개요2. 생애3. 일화4. 야율초재 과대평가설
4.1. 몽골인 교화4.2. 기타 인물의 평가
5. 저서6. 창작물에서7. 가족관계

1. 개요

耶律楚材
(1190 ~ 1244)

몽골 제국의 정치가. 중국어 발음은 예뤼 추차이(Yélǜ Chǔcái).[1]

자는 진경(晋卿)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호는 잠연거사(湛然居士). 별명으론 옥천노인,[2] 우르투 사칼투[3] 등이 있다.

야율초재는 한문으로 기록된 여러 사서에 그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유목국가에 불과한 몽골을 세계제국으로 발돋움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일본의 중앙아시아사 전공자였던 스기야마가 그의 활약상이 한문 자료에만 나올 뿐, 다른 언어로 기록된 자료들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며, 과대평가되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4]

2. 생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율씨, 즉 요나라(거란) 황족 출신이다. 하지만 거란은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지배층은 대부분 한화(즉 중국화) 되었고, 마찬가지로 야율초재도 한화된 거란인이었다. 즉, 거란인이라기보다는 중국인의 정체성이 더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요나라는 1125년 금나라, 남송의 협공에 멸망하였고, 거란인들 다수는 금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고, 나머지는 뿔뿔히 흩어져 여러 후계국을 세웠다. 야율초재의 집안은 요나라의 황족 출신이지만 이렇게 금나라에 출사하고 있었다. 조부와 아버지는 모두 금나라의 고위 관리였고, 야율초재도 금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상서성의 하급관리로 임관했다.

1214년 금나라의 중도(베이징시)은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야율초재는 금나라가 개봉으로 수도를 옮겨가자 중도에 남은 그는 야인이 되었는데, 야인시절 몇년간 불교를 공부했다고 한다. 1218년부터 칭기즈 칸은 그를 참모로 삼았고, 이어 1219년의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에도 같이 종군했다. 이 원정에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에게 여러 계책을 냈고, 그 계책으로 몽골군은 연전전승하면서 칭기즈 칸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다.

1227년 8월 25일 칭기즈 칸이 붕어했고, 4남 툴루이가 2년간 임시 대칸을 하다가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이 때 (중국어 사료에서는) 오고타이를 대칸으로 선출되게 한 것은 야율초재의 업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의 대칸 등극을 도운 신임을 바탕으로 몽골 제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오고타이 칸 (태종) 3년, 원나라는 당나라를 모방해 중서성을 세웠고, 야율초재는 재상격인 중서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야율초재는 여러 개혁안을 냈다. 이는 모두 원사에 기록된 것이다.
  • 절하는 법을 확립하고 군신관계를 분명히 할 것 (確立跪禮,制訂君臣之儀)
  • 유교를 진흥하고 문인을 등용해 나라를 다스릴 것(興科崇儒,發展文人治國)
  • 학살을 자제하고, 백성과 그 재산을 보호할 것 (改變屠城傳統,著重富國保民)
  • 관리를 바로 임용하고, 고리대를 폐지할 것 (整頓吏治,廢除羊羔兒利[5])
  • 천하를 공정하게 다스릴 것. (剛正不阿,以為天下表率)

오고타이칸이 붕어하고, 황후 퇴레게네가 섭정을 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의 충신들을 내쫓고 자신의 측근들로 몽골제국의 지도부를 구성했는데, 이때문에 야율초재는 실각했고, 그 이후 실망으로 중병에 들었다고 한다.

124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들 야율주(耶律鑄)는 쿠빌라이 칸 아래에서 재상으로 일했다.

원나라 문종은 야율초재가 원나라의 기틀을 확립한 업적을 기려 그에게 광녕왕(廣寧王)이라는 작위와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베이징에는 그의 사당이 있었으나, 명나라 시기에 원나라 청산 작업을 일환으로 파괴되었다. 이어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다시 파괴되었다.

3. 일화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 영입된 과정도 흥미롭다. 당시 야율초재는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도시에 몽골군이 몰려오자 초재의 두 형은 도망갔지만 야율초재는 태연한 얼굴로 독서를 하거나 좌선을 했고, 심지어 도시가 몽골군에게 함락된 후에도 전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이어갔다. 이 소문을 들은 칭기즈 칸은 그에게 흥미가 생겨 데려오도록 명령한 것이다. 정복된 자들의 입장에선 가히 마왕이라 부를 만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칭기즈 칸에게 늘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다니 인물은 인물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칭기즈 칸이 '나를 따르면 요의 원수를 확실히 갚아주겠소'라고 말했을 때 '제 조상이 다 금에서 벼슬을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원수랍시고 주군을 물어뜯겠습니까?'라고 꼿꼿하게 뻗댄 사람이니 알 만하지만.

이처럼 깐깐한 데가 있고 철저하여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근거도 없는 모함을 받아 포박당해 오고타이에게 끌려왔을 때 그게 당치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칸이 그걸 풀어주려고 했으나,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잡혀왔을 것인데, 아무 해명도 없이 풀어주면 원칙이 바로 서지 않는다"며 고집스레 그대로 묶여 있었다. 어명보다 원칙이었던 것이다.

당시 몽골족들은 전쟁과 정복에는 탁월하였지만 통치의 기술이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야율초재가 세운 업적은 지대한 것이었다. 많은 업적이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업적은 금나라 수도 변경 함락 시, 그간의 몽골족 원정 원칙을 뒤집어 엎은 것.

호라즘 왕국의 건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은 원정 중에 저항한 적에 대해서 일체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6] 하지만 야율초재는 칸에게 모든 항복하지 않은 자를 죽여 없애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간언하여 그걸 관철시켰다. 덕분에 몽골은 금나라의 문물과 군사기술을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고, 이는 후의 남송 정벌 때 양양성 공방전 등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문화나 학술 발달에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못 하는 학문이 없었으며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죽었을 때 집에 가 보니 취미삼아 수집한 돌이랑 글, 책들 외에 금은보화 같은 것들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후 유목민에게 맞지 않고 한족에게 맞는 정책을 편 것이 문제가 되어 그가 주장했던 개혁들은 거의 대부분 묻혔다. 어쨌든 이 사람이 임관하기 전에는 몽골은 세금도 안 거뒀다. 나중에 아득바득 조세 제도를 확립하고, 자연스레 산더미처럼 들어오는 재물들을 보고 황제가 턱이 빠질만큼 놀랐을 정도.[7]

그리고 사실 그가『중국인을 구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게, 몽골군의 계획 중에는 「중국을 정복하면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몽골 항목에서 발췌) 이걸 안 막았다면 지금 중국은….

명언과 일화로는 오고타이 칸과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와,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이 유명하다.
오고타이: "아버지께서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대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야율초재: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새로운 제도로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것을 제거하십시오."

칭기즈칸에게 등용된 후 몽골 사람도 아닌 외부 인사인 야율초재가 하루아침에 칭기즈 칸에 중용받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활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은 늘 자기 솜씨를 뽐내었는데 어느 날 야율초재에게 "학문이 있는지 모르지만 무엇이건 만들어낼 줄 모르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다."라 헐뜯었다. 이에 초재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활을 만드는 데는 활 만드는 사람이 있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오."로 역관광 시켰고 이에 말문이 막힌 그 사람은 물러나야 했다.

4. 야율초재 과대평가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8]는 기존의 야율초재에 대한 인식을 전면 부정하는 《야율초재와 그의 시대》(원제:耶律楚材とその時代)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위와 같은 야율초재의 생애를 부정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그가 제시한 근거는 야율초재의 존재나 행적이 원사(元史)에만 나타나고, 일 칸국의 기록,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아타 말릭 주와이니(Ata Malik Juvaini)의 <세계 정복의 역사> 등 주요 역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야율초재는 자신의 활약을 과대 포장한[9] 회고록을 작성했고, 중국인과 한화된 몽골인들[10]이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 중화 문명을 구한 인물로 칭송받은 것이다.

당대 몽골인들 중에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몽골 제국에서는 한인, 발해인, 고려인, 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등용되어 기록이나 서적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상관들이 기록에 관심 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공적과 업적을 부풀려 기록했다는 것. 그런 한자 기록을 읽을 수 있는 한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심히 포장하고 허세를 부렸다는 이야기이며, 다른 문화권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과대 포장이나 허세가 먹히지 않고 야율초재에 대해 알지도 못하니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몽골 제국에서 상업과 행정면에서 활약하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도 야율초재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야율초재가 속해있던 몽골 제국 서기국(書記局)의 친카이(鎭海)[11]는 페르시아, 중국, 심지어 로마 교황청 사절의 기록에서도 중요 인물로서 등장하지만, 야율초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정말 세계 제국의 이름난 재상이었다면 친카이처럼 기록이 남아야 정상이다.

스기야마는 야율초재가 칭한 재상이라는 직위에도 어폐가 있다고 주장했다. 몽골 제국에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재상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의 중국 지방에서만 활동했었고 여러 민족의 인사들과 함께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이 행정 관료들은 권한이든 직책이든 재상이라 하기 어렵지만, 페르시아와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하던 바지르와 재상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율초재를 '대제국의 명재상'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단순히 행정 관료 중의 한 명이었던 사람을 어떻게 재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당시의 문화권 차이 때문에 타 문화권에 야율초재의 명성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야율초재는 외국과 교류할 때마다 겸손하게 행동했는데, 당시의 다른 문화권(유럽, 중동, 서아시아 등)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덕분에 야율초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야율초재 자신이 몽골 제국의 재상이었다면, 명성과는 별개로 각 지방에 이름이나 직위가 알려졌을 것이다. 야율초재 자신이 주장하는대로 몽골 제국의 점령지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 또한 명성과는 상관 없이 이에 대한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제국의 정책 변경과 이를 알리는 과정은 칸의 인장이 찍혀 제국 전체에 퍼지는 것이며 이것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면 아무리 겸손을 떤다고 해도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술한대로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야율초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겸손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학설 중의 하나로는, 야율초재는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재상이 아니라, 행정 관료로서 간간히 칸과 주요 인사들을 만나 조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있다. 이게 상당히 그럴싸한 것이, 출신을 따지고 자기 부족끼리 뭉치는 몽골 출신 인물들 사이에서 이방인인 그가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다면, 목숨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수 있다. [12]

다만, 스기야마는 일본에서 몽골 제국의 역사를 한문 사료를 기반으로만 해석하던 것에 반발해 본격적으로 중동 및 중앙아시아의 사료를 인용하기 시작했던 학자인 만큼, 야율초재에 관한 기존의 해석을 다소 과격하게 비판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한문 사료와 중동 및 중앙아시아 사료가 각각의 입장에 따라 야율초재에 대한 해석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보니, 수정주의에 입각하다보면 한문 사료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야율초재 인물상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원 왕조에서 2번째 계급에 속했던 색목인들이 3계급, 4계급에 속했던 한인, 남인들과 대립하던 관계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원나라의 권신 아흐마드 파나카티가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원나라의 행정 체계를 확립한 명재상으로 기록된 반면, 원사에서는 희대의 탐관오리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 기록에는 진영 논리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비교할 만한 사례로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의 선구자였던 존 스미스의 사례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존 스미스는 자신의 자서전에 갖가지 황당무계한 허풍들[13]을 늘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 뉴잉글랜드 식민지 개척에 공헌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자서전이 소실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야율초재 관련한 기록에 다소 황당한 과장과 오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야율초재가 중국 문화를 보존하는데 공헌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원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록이 남았다 해석할 수 있다.

4.1. 몽골인 교화

야율초재가 인류를 구했다거나 지금의 중국을 있게 했다는 말은 과장이다. 그는 몽골인들의 잔악한 '풍습'을 교화하지 못했다. 야율초재가 등용된 후에도 몽골 제국은 항복한 자에게는 관용을, 저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는 기존의 원칙을 계속 유지했다.

야율초재의 주요 활동 지역인 중국의 화북 지방에서 벌어진 몽골 - 금 전쟁에서 몽골군은 이 원칙대로 항복한 지역에는 관용을 베풀고 항복한 관료와 군인들은 지위를 보장하고 그대로 임용했으며 협력한 군벌과 호족들은 세력을 인정해 주었다. 또한 몽골군은 금과의 전쟁 중에 지역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전략을 버리고 점령지에 병력을 주둔시켜 질서를 회복하고 통치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반대로 저항하는 지역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무덤의 관이 말먹이 통으로 쓰인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짓밟았다. 그래서 금이 지배한 화북 지역은 몽골과의 전쟁과 사회적 혼란, 자연재해, 전염병으로 상당히 황폐화되었다. 중국인을, 나아가 인류를 구원한 야율초재 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의 점령지 정책을 바꾸지 못했다.

또한 몽골 제국이 세금을 걷지 않았고, 칭기즈칸이 야율초재를 만나기 전에는 통치의 기술이 없었다는 윗 문단의 글은 몽골 제국에 대한 기초조차 모르는 말로서 테무진은 칸으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부족민들에게서 쿱추르를 징수해 가축을 세금으로 받았고 즉위한 해에는 행정와 세제, 칙령의 문서화를 이뤄 호적과 세금 대장, 판례를 관리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원정 때부터는 점령지에 다루가치를 파견해서 세금을 걷고 물자와 인력을 확보했다.

몽골 제국은 항복한 지역이든 초토화시킨 지역이든 다루가치를 비롯한 칸의 대리인들을 파견해 지배력을 확보하고 지역의 재건과 세금, 인력 수취에 힘쓰는 통치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호라즘 전쟁에서 초토화되었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의 재건은 칭기즈칸 당대에도 이뤄지던 일이었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역 역시 소련 시기에 이뤄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몽골 제국의 침공이 지역에 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야율초재와 가장 접점이 많은 우구데이 칸의 경우, 형제인 차가타이와 상의하여 쿱추르의 세금 제도를 정비했다.

따라서 야율초재는 몽골인들을 '교화'했다고 볼 수 없다. 굳이 '교화'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중앙아시아의 도시를 파괴하던 칭기즈칸 앞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탄원한 마흐무드 부자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들은 칭기즈칸에게 도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정복지를 재건할 것을 진언해 칭기즈칸의 동의를 얻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최초의 다루가치가 되어 지역을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이후에는 더욱 중용받아 제국의 대신으로 출세했다.

4.2. 기타 인물의 평가

스기야마와 마찬가지로 한문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에 능했던 일본의 역사저술가 진순신은 야율초재의 전기를 쓴바 있다. 진순신도 스기야마가 근거로 든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몽골계 문헌에 야율초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했지만, 이를 두고 진순신은 "야율초재는 유교와 불교에 기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미 이슬람화된 서방 몽골방계 제국의 역사가가 높이평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다르게 해석했다.

5. 저서

몽골군에 의한 파괴와 혼란의 시대에 그는 여러 글을 남겼다. 그의 글들은 금나라를 정복한 초기 몽골제국의 북중국 통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사료로 간주되고 있지만, 스기야마는 보잘것 없는 관리가 자신을 과장한 기록을 많이 남겨 후에 재상의 반열로 추앙받는다고 셈이라고 그 가치를 깎아 내렸다.
* 잠연거사문집(湛然居士文集) 굉장히 방대한 양이며,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
* 서유록 (西遊錄) -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1219-1224)에 종군하면서 남긴 기록
* 편의십팔사 - 몽골제국의 초기법전
* 현풍경회록 (玄風慶會錄) - 칭기즈 칸과 도교 도사인 구처기(丘處機)의 대담을 기록한 것.
* 담연거사집 (湛然居士集) #

6. 창작물에서

파일:attachment/야율초재/야율초재.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시기를 다룬 코에이의 게임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징기스칸 4에도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 A, 전투력 E. 지도력 B, 매력 B로 전투력을 제외하고는 준수한 능력치로 나온다. 시나리오 2에서는 시작시 칭기스칸의 정치 고문이 무카리로 되어있기에 요동을 먼저 공략해 야율초재를 등용해 정치 고문을 야율초재로 교체하면 전투 능력이 좋은 무카리를 장수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100·지모 93·전투 34에 모든 내정 특기를 소유한 최강의 정치가로 등장한다. 특히 몽골 장수들은 원정을 떠나 때려부수는 역할을 하는 전투광, 전투기계들만 득실득실 하기에(사준사구) 그의 존재는 빛이 된다. 병과 적성은 보병 D, 궁병 D, 기병 D, 수군 E로 철저한 문관형.
시나리오 1에서 재야로 지내는 야율초재를 등용하고 야율초재와 같이 연회를 열고 초재에게 말을 걸면 술이 항아리도 부식시킨다며 오래 살려면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조언을 하는데 수락하면 군주의 수명이 늘어난다. 다만 파킷 시나리오 3에서 오고타이 칸의 신하로 나올 때는 술꾼인 오고타이를 섬기다 지쳤는지 이런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향 출신이라 플레이어가 금, 남송, 고려을 조종할 때 장유, 사천택과 함께 간첩 유닛으로 빼내기 수월하다. 원조비사에는 시나리오 2에서는 이미 등용되어 있다.
파일:야율초재14.jpg
삼국지 12, 14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

김용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몽골의 재상이자 야율주, 야율제, 야율연 남매의 아버지로 설정되어있다. 양과육무쌍이막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야율주의 관사에 숨어들어 군관으로 위장했을 때 등장하는데, 이때 완안평이 금나라가 멸망하여 자기 가문이 몰락한 데 원한을 품고 야율초재를 암살하려 하지만 야율제에게 저지당해 실패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몽골에서 숙청당해 야율주와 함께 처형당했고, 이때 살아남은 야율제 남매는 남송에 의탁하여 각각 곽부, 무돈유와 결혼하여 곽가에 편입, 양양에서 곽정을 도와 몽고와 싸우는 데 앞장선다.

7. 가족관계

  • 야율희량: 야율초재의 손자이다.

[1] 거란어는 현재 복원이 힘들 정도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발음은 불명이다. 일단 야율은 '예루드(Yeruud)'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초재는 거란어로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거의 한화된 거란인이라 거란 발음을 복원하는 것 자체는 사실 의미없다. 본인이 음차된 중국어 성을 자신의 성으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2] 말년에 옥천산(玉泉山. 베이징 서북쪽의 산)에 기거해서 생긴 별명이다. 도교에 일가견이 있었다.[3] ᠤᠷᠲᠤ ᠰᠠᠬᠠᠯᠲᠤ(Urtu saqaltu) / Урт сахалт 오르트 사할트, 몽골어로 '수염 긴 남자'. 그의 외모에서 따서 칭기즈 칸이 붙여준 이름이다. 칭기즈 칸은 항상 야율초재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4] 유사사례로 아합마(阿合馬; Ahmad Panakati)를 들 수 있다. 명대 중국인들이 저술한 원사에는 최악의 탐관오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페르시아 유대인 출신 역사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는 아합마가 원나라의 행정체계를 확립한 유능한 재상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서는 그가 엄청난 부자에 아들만 25명이라고 기록되었다.[5] 양고아리는 원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고금리를 말한다.[6]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물론 호라즘은 지들이 자초한 바가 크지만.[7] 이때 이후 몽골인들은 세금에 환장해서(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중동 지방과 중앙 아시아에서는 세금을 엄청나게 매겨서 현지인들이 고통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무역로를 장악해서 실리를 챙기려 했다.[8] (1952~2022) 중앙아시아사 전공이며, 교토대학교에 재직한 정통 역사학자이다. 그는 원나라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서방 세계나 중국의 사료 대신에 중앙아시아 사료를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학자였다. 저서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몽골 세계제국> 등이 한국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9] 스기야마는 야율초재의 인격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주장은 허풍쟁이가 남긴 자화자찬에 후세 역사가들이 모두 속았다고 요약할 수 있다.[10] 쿠빌라이 칸 이후의 원 황제들과 몽골인 고관들은 모두 한문에 능했다.[11] 한국에서는 '진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래 위구르인으로 칭기즈 칸에게 등용되었고 칭기즈 칸이 가장 어려운 시절부터 그를 섬겨서 '발주나의 흙탕물'을 마셨던 19명의 창업 공신 중 한 명이다. 오고타이 시대에는 서기국의 필두로 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야율초재의 상관이자 일반적으로 흔히 연상하는 '재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며, 그 외 색목인 출신인 야라와치, 마흐무드 역시 야율초재처럼 서기국에서 일한 관료들이다.[12] # 이 링크의 글쓴이는 야율초재가 서기국에 근무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야율초재는 중서령을 맡았고, 이는 공식 정사인 원사에 나온 이야기이다. 게다가 글쓴이가 주장하는 "서기국"이란 것은 원의 관제에 존재하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13] 13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음에도 불구, 어려서부터 모험을 좋아하여 네덜란드군과 종군하여 스페인 가톨릭교도들을 쳐부수고, 1604년경 헝가리에서 병사로 종군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침입을 직접 봉화를 울려 저지하였으며,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만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자신을 포로로 잡은 오스만 군인의 머리통을 부순 후 러시아와 프랑스, 모로코를 거쳐 탈출하였고, 모로코에서 직접 사략선을 지휘하여 스페인 함선을 격퇴한 바 있으며, 마키아벨리와 플라톤을 탐독하여 마스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