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3:54:54

가거정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賈居貞, 1218~1280
원나라의 관원으로 자는 중명(仲明)이고, 호는 녹천(鹿泉)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하북성 진정부 획록현(獲鹿縣) 사람이다.

2. 생애

가거정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행대를 하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쿠빌라이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는데, 그를 불러 개평성을 축조하는 것을 감축하게 했다.

1260년 중서좌우사낭중(中書左右司郞中)을 지냈고 쿠빌라이 칸의 북정 중 쿠빌라이 칸에게 자치통감을 설명하였다.

1264년 중서성 참의로 승진하였다. 1268년에는 중서랑중(中書郞中)을 거쳐 사중(事中)으로 임명되고 승상 사천택(史天澤)과 함께 국사를 편찬하였다. 1273년에는 양양로총관에 임명되었다.

1274년 선무사로서 백안이 이끄는 대군과 함께 남송을 정벌하는 길에 나선다. 1275년에는 아릭카야가 원나라 군대의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
"강릉의 요지는 송제 장군의 중병들이 주둔하는 곳이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이주한 백성들이 도시에 가득했고, 다시 질병이 발생했고, 보잘것없는 봉급 때문에 두문은 감히 나무를 심을 수 없었습니다. 틈을 타서 먼저 취하지 않으면 봄철에 물이 불어나서 상류에서 저쪽으로 올라타면 악이 위태로워질까 두렵사옵니다."
그 뒤 가거정은 아릭카야의 명을 받고 악주를 수비하였고[2], 이때 그는 곡식을 풀어 유민들을 구제하였다.

1277년에는 호북선위사(湖北宣慰使)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강서행성참지정사로 임명되었다.

1280년 백성들의 생활의 피폐해짐이 반란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쿠빌라이에게 일본 침공을 그만둘 것을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병으로 사망하였고 정국공(定國公)에 추봉된다.

3. 가족관계

  • 가균(賈鈞): 가거정의 아들이다.


[1] 바얀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타 동진할 때, 고세걸이 후방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아릭카야가 쿠빌라이 칸에게 강릉을 안정시켜야 한 뒤, 쿠빌라이는 호북제치부사 고달에게 항복하라는 조서를 보내었고 아릭카야는 원나라 군대의 후방 안정을 위해 출전한 것이었다.[2] 이후 아릭카야는 고세걸을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추격하여 고세걸을 투항시킨 뒤, 고세걸에게 악주(호남성 악양시) 수장 맹지소를 투항하도록 하였고, 이에 맹지소가 투항했다. 고세걸은 이후 아릭카야에게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