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22:56

유정(원나라)


원사(元史)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de3f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color: #181818"
1권 「태조기(太祖紀)」 2권 「태종·정종기(太宗定宗紀)」 3권 「헌종기(憲宗紀)」
패아지근 철목진 패아지근 와활태 · 패아지근 귀유 패아지근 몽가
4·5·6·7·8·9·10·11·12·13·14·15·16·17권 「세조기(世祖紀)」 18·19·20·21권 「성종기(成宗紀)」 22·23권 「무종기(武宗紀)」
패아지근 홀필렬 패아지근 철목이 패아지근 해산
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패아지근 애육려발육팔달 패아지근 석덕팔랄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31권 「명종기(明宗紀)」 32·33·34·35·36권 「문종기(文宗紀)」
패아지근 화세랄 패아지근 도첩목이
37권 「영종기(寧宗紀)」 38·39·40·41·42·43·44·45·46·47권 「순제기(順帝紀)」
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4db1> 114·116권 「후비전(后妃傳)」 ||
광헌익성황후 · 소자황후 · 흠숙황후 · 정절황후 · 소예순성황후 · 남부이 · 정자정의황후 · 불루칸 · 선자혜성황후 · 수케시리 · 장의자성황후 · 장정의성황후 · 바부칸 · 정유휘성황후 · 바부샤 · 부다시리 · 다리예테미쉬 · 다나시리 · 백안홀도 · 보현숙성황후 · 현의장성황후 · 휘인유성황후 · 선의숙성황후 · 소헌원성황후
115권 「예종등전(睿宗等傳)」 117권 「별리고태등전(別里古台等傳)」
타뢰 · 진금 · 감마랄 · 답랄마팔랄 별리고태 · 출적 · 독랄 · 아홀도 · 관철보화 · 첩목아불화
118권 「특설선등전(特薛禪等傳)」 119권 「목화려등전(木華黎等傳)」
특설선 · 패독 · 아랄올사척길홀리 목화려 · 박로출 · 박이홀
120권 「찰한등전(察罕等傳)」 121권 「속불태등전(速不台等傳)」
찰한 · 찰팔아화자 · 출적태 · 진해 · 초내태 · 오야이 · 갈사맥리 속불태(1) · 안축이 · 외답아 · 박라환 · 초사
122권 「파이출아이특적근등전(巴而朮阿而忒的斤等傳)」
파이출아이특적근 · 철매적 · 안찰아 · 암목해 · 풍숙안 · 석리검부 · 삭직돌로화 · 석아길사 · 합산납
123권 「포지아등전(布智兒等傳)」
포지아 · 소열태초올아 · 활활불화 · 배연팔도로 · 아술로 · 소고아 · 아랄와이사 · 초아 · 야포감복 · 조아가반 · 순지해 · 점철발도아 · 겁겁리 · 탑불이아 · 직탈아 · 월리마사 · 날고랄 · 아아사란 · 합팔아독 · 애모
124권 「탑본등전(塔本等傳)」
탑본 · 합랄역합적북로 · 탑탑통아 · 악린첩목이 · 이정(李楨) · 겁렬속가 · 망가산아 · 맹사속
125권 「새전적섬사정등전(賽典赤贍思丁等傳)」 126권 「안동등전(安童等傳)」
새전적섬사정 · 포로해아 · 고지요 · 철가 안동 · 염희헌
127권 「백안전(伯顏等傳)」 128권 「아추등전(阿朮等傳)」
팔린백안 아출 · 아리해아 · 상위 · 토토흡
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내아팔적 · 뉴린 · 아랄한 · 아탑해 · 사도 · 이항 연지길태철리 · 불홀목 · 토별연완택 · 아로휘살리
131권 「속가등전(速哥等傳)」
속가 · 낭가알 · 망올태 · 오로적 · 완자도(2) · 백첩목아 · 회도 · 역흑미실 · 배항
132권 「항홀사등전(杭忽思等傳)」
아속항홀사 · 보로합답 · 옥와실 · 맥리 · 탐마적 · 발도아 · 앙길아 · 합랄태 · 사전 · 첩목아불화
133권 「탑출등전(塔出等傳)」
탑출 · 배연 · 야한적근 · 엽선내 · 탈력세관 · 홀날출 · 중희 · 단지아 · 찰랄아태탈환 · 실리백 · 패란해 · 겁렬 · 암백 · 야속태아 · 석도아
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철길사 · 월합내 · 석반 · 철련 · 애설 · 활활 · 독홀로 · 당인조 · 타아적 · 화상 · 유용 · 가로납답사 · 활리길사 · 소운석탈홀련 · 알라사 · 타라태 · 야선불화
135권 「철가술등전(鐵哥朮等傳)」
철가술 · 탑출 · 탑리적 · 탑해첩목아 · 구아길 · 홀도 · 패아속 · 월거련적해아 · 아답적 · 명안 · 홀림실 · 실랄발도아 · 아속철리 · 갈랄 · 걸태 · 탈인납 · 내만태화상
136권 「합랄합손등전(哈剌哈孫等傳)」 137권 「백찰한등전(伯察罕等傳)」
합랄합손 · 아사불화 · 배주 백찰한 · 곡추 · 아례해아 · 혁혁저아이정 · 탈열해아
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강리탈탈 · 연철목아 · 멸아길태백안 · 마찰아태 · 탈탈 내만태 · 타아지 · 타이직반 · 아로도 · 뉴적해
140권 「별아겁불화등전(別兒怯不花等傳)」 141권 「태불화등전(太不花等傳)」
별아겁불화 · 하유일 · 철목아탑식 · 달식첩목이 태불화(太不花) · 찰한첩목아
142권 「답실팔도로등전(答失八都魯等傳)」 143권 「마조상등전(馬祖常等傳)」
답실팔도로 · 경동 · 야속 · 철리첩목아 · 납린 마조상 · 노노 · 자당 · 아영 · 소운석해애 · 태불화(泰不華) · 여궐
144권 「답리마등전(答里麻等傳)」 145권 「역련진반등전(亦憐真班等傳)」
답리마 · 월로첩목아 · 복안철목아 · 성길 · 복수 · 도동 역련진반 · 염혜산해아 · 월로불화 · 달례마식리
146권 「야율초재등전(耶律楚材等傳)」 147권 「장유등전(張柔等傳)」
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148권 「동준등전(董俊等傳)」 149권 「야율유가등전(耶律留哥等傳)」
동준 · 엄실 야율유가 · 유백림 · 곽보옥 · 석천응 · 야율독화 · 왕순(王珣)
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석말야선(3) · 하백상 · 이수현 · 야율아해 · 하실 · 학화상발도 · 조진 · 석말명안 · 장영 · 유형안
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설탑랄해 · 고요아 · 왕의(王義) · 왕옥 · 조적 · 저순 · 왕선 · 두풍 · 석말패질아 · 가타라콘 · 오돈세영 · 전웅 · 장발도 · 장영
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157권 「유병충등전(劉秉忠等傳)」 158권 「요추등전(姚樞等傳)」 159권 「송자정전(宋子貞等傳)」
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177권 「장사명등전(張思明等傳)」 178권 「양증등전(梁曾等傳)」 179권 「하승등전(賀勝等傳)」
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4db1><tablebgcolor=#004db1> ||
}}}}}} ||


1. 개요2. 생애
2.1. 남송에 투항2.2. 원에 투항하다2.3. 양양 전투2.4. 울분이 치밀어 죽다
3. 평가4. 기타

1. 개요

劉整
(1212 ~ 1275)

자는 무중(武仲), 등주 양성[1] 출신으로 송말원초의 장수이자 원나라 수군의 창시자. 금나라 말기 남송으로 귀순하여 남송의 명신 조방 휘하에 속하였고, 이후에는 명장 맹공의 수하로 활약했다.

이후 1261년 여문덕으로부터 무시 및 모함을 받아 몽골에 투항하고, 쿠빌라이 칸에게 "남송을 멸망시키려면 양양을 선취하자"는 핵심 전략을 내세웠으며, 관직은 표기위장군, 행중서좌승에 이르렀고, 용호위장군, 중서우승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남송 공략 와중에 분사한다. 시호는 무민.

2. 생애

2.1. 남송에 투항

그는 본래 금나라 출신의 한인 출신으로, 이후 남송에 투항하여 조방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침착하고 의연하며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탔다고 한다. 조방은 죽기 전 아들 조규에게 유정을 경계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조규는 듣지 않았다.

그는 이후 남송의 명장 맹공의 밑에서 금나라의 신양(信陽)을 공격했고, 그는 선봉으로 용맹한 12명을 이끌고 도참을 넘어 성을 올라 함락시켰다. 맹공은 크게 놀라워하여, 오대 후당 시기 명장 이존효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존효가 18기로 낙양을 함락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정이 통솔하는 군이 더 적어 신양을 취하였다고 해서 새존효라고 불렀다.

2.2. 원에 투항하다

보우 2년(1254년) 이증백을 따라 촉에 입성해 장수로 선발돼 전공을 쌓았다. 경정 원년(1261년) 4월, 노주지부 겸 동천로안무부사로 승진하였다. 본래 북방 사람인 유정은 무공으로 승진을 했는데, 남쪽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 밑에서 나와 여문덕[2]의 질시를 받았고, 유정이 계책을 내도 여문덕에게 이를 부정당하고, 공로가 있으면 여문덕이 숨기는 등 여문덕에게 무시당하였고, 여문덕은 유정과 갈등하던 유흥을 사천제치사에 앉혀 유정을 견제하게 했다.

여문덕은 유흥과 결탁하여 유정을 박해한다고 무고하려 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놀란 가슴을 졸이며 임안에 사람을 보내 조정에 상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상사벽[3]과 조세웅[4]가사도에 의해 죽는 것을 보고[5] 부득이하게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게 된다.[6]

원 중통 2년(1261년) 6월, 유정은 몽골에 의해 기로행성(氣路行省) 겸 선무사(善務使)로 임명되었다.

유정이 투항하기 앞서, 그는 문무장교를 소집해 항복을 선언했다. 이조 한 명이 강력히 반대하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중경에서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신비성에 파견된 관리도 죽였다. 그리고 문채가 좋은 허표손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문고를 작성하게 했으나 허표손은 단호히 거절한다.
손목은 부러질 수 있지만 붓은 쓸 수 없습니다.
이에 허표손이 자결하고, 허표손의 일가족들은 도망치려 하였으나 추격병들에 의해 모두 죽는다.

송 이종은 유정이 몽골에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었다.
노남의 변은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오.
송계삼조정요

남송 왕조의 명령에 따라 사천제치사 유흥이 이끄는 군대는 장강 상류인 가주(嘉州, 지금의 낙산)에서 성야(星夜)로 달려가 신비성(神臂城)[7]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공격했다.

유정은 송군의 기세가 사나운 것을 보고, 성이 무너지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재산을 병졸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기를 북돋우려고 했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 영화를 구하려는 유정은 인심을 얻지 못하고 초전에 패하여 한편으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성도를 떠나 성도에 도움을 청했다. 유흥은 증원하러 온 몽골군을 발견하고 둔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라고 명령했다. 성 밖에서 전투가 치열해지자, 유정은 지원군이 도착했음을 알고 비밀 통로로 쳐들어와 안팎으로 호응하여 송군을 포위하고 죽였다. 시체가 온 땅에 널려 피가 흘러내렸다. 유흥은 겹겹이 포위를 뚫고 배 한 척을 빼앗아 중경으로 도망쳤다. 둔달은 말을 타고 거친 강물에 뛰어들어 말꼬리를 꽉 잡고 남쪽 해안까지 헤엄쳤다. 그 후 반군은 송군 병사의 시신을 강가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대충 묻어버려 무덤 모양의 돌을 만들었다. 현지인들은 이를 만인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몽골군은 노주를 기지로 사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사천 지역의 60개 이상의 현은 대부분 몽골의 군용에 속하였으며, 남송 왕조는 사천 지역에 20개 이상의 현을 보유하고 있으며, 소위 20개 이상의 현은 황폐하거나 한 주에 현 또는 한 현에 향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흥은 유정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유정에게 패배한다. 패보가 전해지자 남송 조정은 여문덕을 급파하여 중경에서 군대를 이끌고 노주를 공격하여 퇴세를 구했다. 여문덕은 유흥이 전멸한 것을 교훈 삼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륙으로 병진하여, 비와 눈으로 뒤덮여 성을 압박하기 위해 성을 쌓거나, 강을 돌며 오향을 호위하거나, 기습적으로 곡식을 불태우거나, 예봉을 진격하여 원군을 토벌해야 한다.
유극장 '후촌선생대전집' 권53, '수복노주상유선제 양장군수조서'

송군의 여러 공격으로 몽골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식량이 많지 않아 군대의 마음이 흩어졌다.유정은 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 밤을 틈타 심복 병사 몇 명을 데리고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1262년 정월, 여문덕은 노주를 수복하고 공로로 개봉의동삼사에 임명된다. 비록 노주는 성공적으로 수복되었지만, 유정의 투항은 남송에 가져온 손실은 헤아릴 수 없었다.[8]

중통 3년(1262년)에 순례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나 성도로·동천로에 머물렀으나 여전히 도원수를 겸하고 있던 중서성(中書省)의 동료가 유정의 공로를 질투하여 모함하려 하자 두려운 나머지 동천 분수를 청하였다. 7월에는 동천도원수로 자리를 옮겼다.

중통 4년(1263년) 5월 송의 고달[9]이 온건으로 성도에 접근하자 유정이 명을 받고 달려들었고, 송군은 이에 놀라 도주하여 동천을 공격하려다 패했다.

지원(至元) 3년(1266년) 6월,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 남경로(南京路) 선무사(宣務使)로 옮긴다.

지원(至元) 4년(1267년) 11월, 입조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양양을 점령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2.3. 양양 전투

지원(至元) 5년(1268년) 7월, 상장군(上將軍), 도원수(都元首)가 되었다. 9월, 도원수 아술과 함께 제군을 독촉하여 양양을 포위 공격하고,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연강 제군을 습격하여 송의 군민 8만을 사로잡는다.

지원 6년(1269년) 6월, 도통 당영견[10]을 사로잡고, 1270년까지 5천 척을 건조하고 수군 7만 명을 훈련시켰다.

지원(至元) 8년(1271년) 5월, 범문호가 장순(張順)·장귀(張貴)를 이끌고 배를 타고 양양에 의갑(衣甲)을 보내자, 그 틈을 타 송군을 요격하여 장순을 참살하였다. 9월에 참지하남행중서성사가 되었다.

지정(至正) 9년(1272년) 정월, 한군도원수(漢軍都元首)가 되었다. 수장 여문환은 성에 올라 적을 바라보았고, 유정은 말초대에 뛰어들어 여문환의 복노에 명중하였다. 3월에 번성 외곽을 무너뜨리고, 2천 급을 참수하고, 비장을 16세까지 사로잡는다. 9월, 성곽에서 원조를 구하는 장귀는 결국 죽었다. 11월에 수군 4만 호를 통솔하였다. 경호제치사[11] 이정지는 유정을 이간질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유정은 바얀에게 양양을 취하려면 번성을 먼저 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정정 10년(1273년) 정월, 마침내 번성을 부수고 도살하였다. 여문환은 고립무원이 되어 성을 바쳐 투항하였다. 이후 남송의 대세는 기울었다.

2.4. 울분이 치밀어 죽다

유정은 수군을 이끌고 승승장구하여 장강 일선을 장악하고 회서추밀원사로 바뀌어 정양에 머물 것을 건의하였다.

지정 11년(1274년)에는 표기위장군, 행중서좌승(行中書左僧)으로 올라 하귀가 이끄는 수군을 대인주(大人洲)에서 대패시켰다.

지정 12년(1275년) 정월, 유정은 군사를 이끌고 회남으로 출격하여 중로 주력의 공격을 동익으로부터 엄호하였다. 유정은 승승장구하며 중앙의 전선과 격돌하려다 바얀에게 가로막힌다. 나중에 바얀이 강을 건너 악주에 들어왔다는 승전보를 듣고, 그날 밤 안휘 무위성 아래에서 분사했다.

3. 평가

유정이 금나라에서 남송으로 투항하였을 때, 조방은 그의 아들 조규에게 유정을 죽이라고 했지만 아들 조규는 듣지 않았다.
유정은 재기가 있으니, 너희 대에 쓸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환이 될 것이다.

후대의 사학자들은 송원전쟁 후기의 핵심 결정자는 바얀이 아니라 항장 유정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송사 연구 전문가인 왕증유는 유정이 몽송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킨 핵심 인물이라고 하였다.
후기 몽송전쟁의 핵심 결정인물은 바얀이 아니라 유정이다. 바로 유정이 원나라로 하여금 중대한 전략을 조정하여 강남을 공략하였으며, 150여 년간 유지해온 남송도 결국 원나라의 전략변화로 멸망하였다.

4. 기타

신원사》가 편찬되었을 때 범문호, 하귀, 양대연, 여문환, 주환[12], 진혁 등 남송 항장들과 같은 반열에 놓였다.[13]

사천성 노주시에 신비성유적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유정을 풍자하기 위해 신비성의 절벽에 '유정항원(劉整降元)'이라고 새겼다. 또한 유정 옆에 허표손[14]의 조각상이 있다고 한다.
[1] 오늘날의 허난성 덩저우 시[2] 남송의 명장이었으나 가사도에게 결탁했고 가사도는 고달, 상사벽, 조세웅 등 변방의 장수들을 배척했다.[3] 진사 출신의 남송 무장으로, 우량카다이의 군대를 담주(호남성 장사시)에서 악전고투 끝에 막아낸다.[4] 조세웅은 부릉에서 다리를 끊고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5] 가사도가 실행한 타산법으로 인해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받았다.[6] 이때 유흑마가 그의 투항을 받았다.[7] 사천성 노주시에 위치한 성이다.[8] 그의 투항으로 인해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다.[9] 송의 명장 중 하나이나 나중에 원에 투항한다.[10] 이후 전황이 불리해진 양양에서 여문환에게 항복을 권하는 그 당영견 맞다.[11] 양양 지역의 방어를 통솔하는 사령관 직책이다.[12] 삼국시대 손오의 용장 주환과 동명이인이다.[13] 신원사 권 177 열전 74[14] 허혁의 아들로, 본래 사천제치사의 참모관이었다. 1261년 유정이 노주를 바치고 몽골군에 항복할 때 그에게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자결한다. 사후 그의 일가족들이 죽게 된다. 이후 개절(開節)이라는 시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