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0:13:35

몽골-남송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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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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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남송 전쟁
宋元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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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ece5b6> 시기 1차: 1235년 (이종 2년) ~ 1241년 (이종 8년)
2차: 1258년 (이종 25년) ~ 1259년 (이종 26년)
3차: 1267년 (도종 6년) ~ 1279년 (소제 2년)
장소남송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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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원군: 600,000 여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몽골의 승리
- 남송의 멸망
영향 몽골 제국의 중국 전역 지배 시작

1. 개요2. 전쟁의 서막, 단평의 입락(1234~1235)3. 오고타이의 침공(1235~1241)4. 제1전간기(1242~1257)5. 몽케 칸의 침공(1258~1259)
5.1. 몽케 칸의 상황5.2. 쿠빌라이 측 상황5.3. 우량카다이 측 상황
6. 제2전간기(1260~1266)7. 쿠빌라이 칸의 침공(1267~1279)
7.1. 양양 공방전(1267~1273)7.2. 양쯔강을 유린한 몽골군(1273~1276)7.3. 남송 최후의 불꽃, 애산 전투(1279)
8. 결과 및 영향9. 기타

[clearfix]

1. 개요

몽송전쟁은 송원교체기몽골 제국남송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3]

세계를 정복한 최강의 제국, 여기에 맞서던 지상 최대의 장벽[4]

2. 전쟁의 서막, 단평의 입락(1234~1235)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송나라는 하남성 동부 지역을 받았지만, 송나라는 북송 시절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 지역을 공격했고[5],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송나라의 침입을 격퇴한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송나라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한다.

3. 오고타이의 침공(1235~1241)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8136394083c5915f35cb281847758ed.jpg

처음엔 몽골이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초반 조우문이 양평관[6]에서 항전하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군이 몰살당한 뒤 이어 12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황주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명장 맹공이 전황을 완전히 바꿨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왕세현[7][8]이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 지역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하며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다. 그리고 양회 지역에서는 두고여문덕, 하귀와 여개가 몽골군을 격파했다. 결국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다.

4. 제1전간기(1242~1257)

몽골에서 귀위크 칸이 왕위에 올랐으나 서방 전선에 집중하느라 남송을 신경 쓰지 못했고, 1247년에 몽골의 장유가 사주를 공격했지만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그 이후 왕위에 오른 몽케 칸은 자신의 기반이 매우 약했기에 오고타이계를 숙청했고 이 때문에 몽골 내부가 뒤집어졌다.

한편 남송강남 특유의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9]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 방어 체제였다. 이전 양회 전선에서 공을 세웠던 신임 사천제치사 여개의 주도 하에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방어하려 하였다. 특히 그는 염진과 염박 형제의 건의로 합주에 조어성을 쌓았다. 안 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 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다. 송나라는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 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다. 특히 양양 지역의 방어력은 실로 강대했으며, 후술하듯이 이곳은 송나라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나오는 형주의 중요성이 역시 컸던 셈이다.

사실 형주 문서에 나오듯이 양양 지역은 중국 대륙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10]. 사천성 지역은 양양보다 더욱 지형이 험하여서 진격이 어려웠고, 회수 하류에서 강남(중국)으로 곧바로 공격하기엔 곳곳에 있는 하천과 호수, 습지 등으로 인해 몽골군의 장점인 기병의 활용이 대단히 어려웠다. 즉 몽골군의 입장에선 이 양양을 반드시 확보해야 양쯔강으로 진격해서 남송의 수도인 임안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손오 정권 시절 육항은 형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후 사미원의 조카였던 사숭지는 일찍이 양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양을 효율적으로 경영했다.

이후 이증백은 양양성의 수비를 강화하였다.[11]

이후 사천 지역에서는 여개의 군대와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여개의 명을 받고 흥원을 수복했다. 1254년 여개 사후 왕견이 사천 방어를 담당했는데, 왕덕신이 이끄는 몽골군과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합주 조어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였다.

5. 몽케 칸의 침공(1258~1259)

5.1. 몽케 칸의 상황

파일:합주 조어성.png 파일:조어성 중국 1.jpg
왼쪽은 합주 조어성의 지도상 위치이고, 후자는 합주 조어성의 사진이다

1258년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당시 운남에 있던 대리국을 점령하여 송나라를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송나라를 멸망시킬 작정을 했다.[12]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으며, 타차르와 이단은 강회 지역을 공격하였다.

북쪽에선 쿠빌라이가 강릉을 점령하고 장사까지 치고 나갔고, 남서쪽의 우량카다이는 광서(오늘날의 광서성)와 귀주(오늘날의 귀주성)을 초토화시킨다. 북서쪽의 몽케는 사천성도를 함락시킨 뒤[13] 곧이어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여기는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14]과 그 부장 장각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이후 사천제치부사 여문덕이 이끄는 구원군이 사천택에게 격퇴당해 중경으로 퇴각하였음에도 왕견과 장각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15] 왕덕신이 남송군을 도발하나, 남송군에게 돌 세례를 맞고 진운산의 절에서 죽는 등 악재가 발발하였고, 몽골군 진영에 돈 전염병[16]에 걸려 죽었다.[17][18]

이 합주 조어성 전투는 본의 아니게 남송 정권을 20년이나 더 연장시켰다. 더 나아가 몽골 제국군의 서아시아 정복전을 멈추게 하였는데, 몽케가 죽자 몽골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훌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다. 훌라구는 일부 병력을 지금의 팔레스타인 근처에 두었는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부대가 이 몽골군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 키트부카를 처형하면서, 끝도 없을 것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되었다. 어쨌거나 대칸마저 죽은 이상 몽골군은 두번째 대규모 원정도 실패하여 모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5.2. 쿠빌라이 측 상황

그러나 쿠빌라이가 이끄는 군대는 악주에서 남송군을 공격하고 있었다.[19] 이때 악주에서는 장승이 이끄는 군대만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송군은 사천 방면을 원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문신은 몽골군의 장영실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사하고 말았다. 쿠빌라이는 장승의 항복을 유도했다. 장승은 이에 동의하는 척했고, 몽골군이 철수한 뒤 장승은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 인근 민가와 상점을 불태우고 몽골군이 성을 공격하는 요새를 파괴했다. 쿠빌라이는 다시 돌아와 맹공을 계속했지만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달이 강릉에서 군대를 이끌고 증원하러 왔고, 쿠빌라이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공언휘[20]가 성을 공격하였지만 고달은 복병을 배치하였고 일부러 후퇴한 뒤 공언휘를 주살한다. 악주가 위급해지자 송 이종은 가사도를 우승상 겸 추밀사로 삼아 악주를 지원하게 하였고, 중경에 주둔하고 있던 사천제치부사 여문덕도 악주로 향하였다. 쿠빌라이는 악주를 맹공하였는데, 가사도는 전군을 악주로 집중시켜 쿠빌라이의 공격을 막아냈다.[21] 2달간의 공방전 뒤 남송군은 총 사상자가 1만 3천 명에 달하였고 우량카다이의 군대가 대리국 지역을 거쳐 광서 지역부터 담주를 거쳐 북상하고 있었으며, 전투 초기 맹활약했던 장승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엄청난 것 등 상황이 악화되었고, 몽골군도 역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후 쿠빌라이는 가사도와 문제의 화약[22]을 맺고 가한 자리를 다투기 위해 북상한다.

5.3. 우량카다이 측 상황

한편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군대는 운남에서 출발하여 광서 전동, 빈양, 내빈, 이주를 공략하였고 정강부로 향하였으나 광서안무사 이증백에게 가로막혀 정강부의 공략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량카다이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이를 무시한 채 전주로 북상한다.

악주를 공격하고 있는 쿠빌라이는 우량카다이가 이미 담주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흥분했고 몽골군의 발도아가 이끄는 군대[23]가 다시 나타나 우량카다이의 북상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이후 이증백은 우량카다이가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량카다이와의 대전에서 이증백이 이끄는 군대가 악양의 요충지를 점령한다.

발도아가 쿠빌라이의 지시로 악양을 함락한 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담주[24]에서 우량카다이를 접대했고 일시적인 전쟁의 형세는 남송에 불리해진다.

우량카다이와 발도아가 이끄는 군대가 잇따라 호남으로 들어오면서, 이어서 전쟁이 다시 호남 전체에서 타오른다.

호남 지역의 수비군이 우량카다이의 몽골군이 호남성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수비군이 남쪽으로 내려가 상강으로 북상하는 우량카다이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상북의 방어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리고 몽골군의 발도아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담주성 아래에 군사를 배치한다.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북상 중이었고 발도아는 담주성에서 남송의 상사벽[25]과 대치하고 있었다. 발도아는 이후 쿠빌라이의 지시로 악주로 북상했다.

또한 몽골군의 정정은 강서성 일대를 공격했다. 그 와중 우량카다이의 아들 아술이 담주성에 먼저 도착했다.

아술이 아직 담주성 아래로 진군하지 않았을 때, 상사벽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한밤중에 성을 나와 아술의 몽골군을 급습한다. 이에 우량카다이는 아술이 이끄는 군대가 담주성 아래에서 송군에게 포위되어 섬멸되는 것을 보고, 직접 후군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자 아술은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송군에 반격을 가했고 우량카다이와 아술 부자의 앞뒤 협공으로 담주성 아래 송군은 다시 몽골군의 포위 속에 빠졌다.

담주성 아래의 송군이 포위되는 것을 보고, 상사벽은 친히 담주 수비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송군을 구하려고 하나 실패한다. 상사벽의 지휘 아래 송군은 담주성 안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아술은 이를 틈타 계속 송군을 몰살한다. 결국 상사벽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후퇴했고 송군의 대부분은 담주성 아래에서 전사했다. 상사벽은 즉시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고 몽골군이 수십일 동안 담주성을 공략하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 뒤 쿠빌라이가 가사도와 화의를 체결한 뒤 북상하자,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가 이끄는 군대를 맞이하여 북으로 귀환한다.

6. 제2전간기(1260~1266)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26]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고[27], 특히 송나라의 마지막 재상이 된 충신 문천상을 박해한 것 때문에 더욱 욕먹었다.

또한 남송의 또 다른 명장인 유정여문덕[28]에게 무시당하였다.[29] 여문덕이 유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을 사천제치사에 임명하였고, 그렇잖아도 상사벽과 조세웅[30]이 죽자 불안해하던 유정은 그가 지키던 노주를 몽골에 바친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도는 아무 조치가 없었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이 올랐지만 친동생인 아리크부카와의 쟁탈전으로 4년 동안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32] 게다가 1262년 이단 등 한족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들이 남송과 같이 동맹을 맺어서 배신할 것을 우려했고, 이는 남송을 토벌하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그리고 1264년 쿠빌라이 칸이 마침내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후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하귀 등이 이끄는 군대가 이단의 난을 이용해 북진하여 영토를 되찾으나, 곧 곽간[33]과 장홍략, 한세안 등이 이끄는 몽골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고 만다. 또한 청양몽염의 군대는 산동까지 북상하나, 몽골군의 기세가 강한 것을 보고 물러나고 말았다. 하귀가 점령지의 민심을 얻지 못한 채 남송군과 합류하려 하였던 것이 남송군의 가장 큰 패착이었고 결국 쿠빌라이는 남송군이 점령한 영토를 탈환한다. 또한 남송 정권은 무수한 돈과 식량을 소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쿠빌라이의 앞에 양회[34] 방어선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제멋대로 지키고 공격하지 않으며, 송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할 수 있는 통군 대장이 없다는 것은 남송 후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이는 남송 멸망 시기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사천 전선이 위기에 처하자[35], 하귀가 이끄는 군대는 몽골군과 전투를 지속했다.

7. 쿠빌라이 칸의 침공(1267~1279)

7.1. 양양 공방전(1267~1273)

파일:1497260622847.jpg
양양-번성의 위치
1267년 쿠빌라이 칸은 다시 남송을 침공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이전의 두번의 패배를 교훈을 삼아, 이전처럼 사천, 회수 남쪽의 튼튼한 요새들을 나누어서 공략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거점지역인 양양-번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한다.[36] 양양 공성전은 대량의 식량을 준비해서 10만 대군이나 되는 대병력으로[37][38]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 동안 이어졌다. 물론 송나라도 쿠빌라이 칸이 이 거점지역을 타격하는 걸 알았기에 6년치의 식량을 비축하고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등 많은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몽골군의 작전은 지난 두 번의 침공과는 전략이 완전 달랐는데, 직접적으로 양양성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 주위의 남송군을 궤멸시키는 데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양양성과 주위의 번성을 둘러싸는 환성을 건설했고, 그 길이는 무려 100km에 달했다. 남송군은 이 토목 사업을 멈추게 하려고 군사를 바깥으로 내보냈지만 번번히 궤멸되었다.

거기에다가 그 내부의 수로를 장악해서 남송군의 보급을 막고 양양성을 말려죽이려고 했다. 특히 이는 수군의 훈련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몽골군 입장에선 일거양득 그 자체인 것이다. 이에 남송군은 수차례나 대규모로 하귀, 범문호, 장세걸, 이정지 등이 이끄는 수군을 내보냈지만, 약 4,000여 척에 다다른 몽골 제국군에게 궤멸당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송군은 특공대를 침투시켜서 어느 정도 물자를 보급에 성공하였지만 이것도 몽골이 쇠말뚝을 박아서 차단을 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노주, 중경, 가정 등을 공략해 남송군이 양양을 지원하는 것을 견제했다.

그리고 남송군 내부에서도 문제가 심했다. 여문환은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여,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걸 꺼리고 상황이 불리하면서도 유리한 전황이라고 허위 보고했다. 게다가 경호제치사였던 이정지범문호[39]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범문호는 가사도에게 이정지의 명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명령을 듣고, 가사도에 의해 전전부지휘사로 임명되어 매일마다 예쁜 첩을 거느리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이정지가 출병을 독촉하나, 범문호는 어쩌다 몽골군의 순찰 부대를 막는 등 매일 핑계대며 놀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식량을 많이 배급하고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등 많은 준비를 한데다, 주위가 습지인 까닭에 몽골군의 이점인 기병의 운용이 쉽지 않았고, 거기에 번성이 괴롭히기도 했기에 양양성은 5년이나 견뎠고, 결국 몽골군은 주위에 있는 번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몽골군은 이슬람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형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로 번성을 공격하였다. 결국 1273년 1월 몽골군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번성을 지키던 수비 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고,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라며 목을 메어 죽었다.

번성을 지키던 또 다른 장수인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적병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같이 양양을 포격했으며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몽골군 역시 송나라 사정에 능통한 여문환의 항복을 권했다. 결국 성 내부에서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의견에 따라서 1274년 3월 6년을 버틴 수비 대장 여문환이 항복해 양양이 함락되고야 만다. 이 양양의 함락으로 남송의 대몽골 방어선은 사실상 무너졌다.

여담으로 무협 소설인 신조협려에서 주연인 곽정이 참전하여 전사한 전투가 바로 이 양양 공성전이다. 물론 소설의 특성상 양양 공성전의 공로는 모두 곽정에게 돌아가고, 여문환, 여문덕 형제는 곽정에게 의지하는 범부로 등장한다.

7.2. 양쯔강을 유린한 몽골군(1273~1276)

양양이 함락된 이후 몽골군은 거침없이 송나라 남부 영토를 향해 진격하여 악주, 한양, 양라보 등 남송군의 요충지를 무너트렸다. 이때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 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같은해 6월엔 20만 대군이 강주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남송은 13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 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왕견, 여개[40], 두고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 건 간신 가사도였다. 결국 정가주에서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다. 이후 원나라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고 상주와 평강부가 원에 투항한다. 이에 왕안절[41]이 바얀의 군대와 맞서지만 상주는 함락당하고 왕안절은 포로로 잡혀 항복을 거부하고 처형당한다. 1276년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었다.

여기서 남송 출신 항장 유정은 바얀이 장강의 방어선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위성에서 급사하고 만다.

1275년 초, 바얀이 십여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였을 때, 아릭카야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악주를 지킨다. 2월 20일, 원 조정은 활출에게 명하여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호 지역으로 와서 아릭카야의 통일된 지휘를 맡기고, 남송 이후 새로 귀부한 군대와 백성을 그의 관할하에 두었다.

바얀의 대군이 장강에 도착하기 전 한양 지역 주민들은 모두 대홍산으로 피신했다. 한양 지역의 전투가 끝난 뒤 쿠빌라이는 백성들을 한양으로 이주시키고 농사를 다시 짓도록 조서를 내렸다.

2월 24일, 아릭카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강 상류에 위치한 강릉은 송나라의 중요한 도시이며, 이곳에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만약 우리 군이 파죽지세의 기세를 몰아 그를 함락하지 않았다면, 강물이 범람했을 때 송군이 총출동하면 악주와 한양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아릭카야의 제안에 동의하고 호북제치부사 고달이 지키는 강릉에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도 백술과 당영견 등을 보내 1000명의 중갑기병을 영주로 보내 투항하게 했다.

3월, 아릭카야가 강릉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기 전 악주에 주둔하고 있던 호북안무사 고세걸은 영주, 복주, 악주, 그리고 장강 상류 주둔군을 집결시켜 총 2만 병력과 1,600척의 전선을 악주 북서쪽 15리 형강구에 주둔시키고 악주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42]

이전에 복주의 장수 집귀가 원군에 투항했다가 원군이 떠난 후 다시 남송에 복속했다. 게다가, 당시 집귀의 가족은 모두 고세걸의 수중에 있었고, 집귀도 고세걸의 지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릭카야는 소식을 듣고 자거정에게 악주를 지키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수사를 이끌고 장강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세걸과 싸우러 갔다. 3월 21일, 아릭카야는 형강구 동쪽 해안에 주둔했다. 한밤중에 고세걸은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고, 아릭카야는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다음날 아침, 양측은 동정호 입구에서 만났다.

아릭카야는 진을 치고 만호 장영실에게 군사를 이끌고 고세걸의 중군을 직접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또 만호 해여노 등에게 좌우에서 송군의 양쪽 날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송군은 패배하고 도망쳤고, 아릭카야는 송군의 잔존 부대를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계속 추격했다.

아릭카야는 장정을 보내 항복을 권했고, 고세걸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결국 잔부를 이끌고 원군에 항복했다. 그 후 고세걸은 아릭카야의 명을 받아 악주[43]에 남아 있던 송장 맹지소를 불러들여 그가 이끄는 악주 수비군도 원군에게 항복하게 했다. 그 이후 고세걸은 아릭카야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아릭카야는 장강을 따라 공안까지 계속 전진하여 원래 계획대로 강릉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4월 초, 아릭카야는 군대를 이끌고 강릉부 동남쪽 15리의 사시진을 공격했다. 때마침 장강의 수위가 갑자기 낮아져 사시진 남쪽 강에 많은 모래톱이 노출되었다. 아릭카야는 이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모래톱에 올라 사시진의 성루와 나무 울타리에 불을 질렀다.

남송군의 정문량은 마두안(馬頭岸)에서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고 결국 투항했다. 원군은 사시진에 쳐들어와 송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4월 5일, 원군이 사시진을 점령하자 아릭카야는 도성을 명령했다. 송군 도통 맹사는 혼전 중에 죽었고, 감진 사마몽구[44]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5일 후 장강의 수위가 다시 상승하여 사시진의 남쪽 해안의 노출된 모래톱이 강물에 잠겼다. 원군이 사시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강릉의 사천, 경호선무사 주사손과 호북제치부사 고달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마침내 사시진이 도성되는 것을 지켜봤다.

4월 7일, 아릭카야는 장정을 강릉으로 보내 투항을 권했다.[45] 동정호와 사시진 전쟁 이후 호북성 송군의 정예는 고갈되었다. 고달은 청양몽염과 함께 원나라에 항복했다.[46] 주사손은 독약을 먹고 자결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결국 원군에게 투항했다.

강릉이 항복한 후, 아릭카야는 사람을 보내 인근 주현에 투항하게 하였고, 협주, 귀주, 상덕, 복주, 영주 등의 성이 잇달아 원군에 투항했다. 이전에 영주에 주둔한 장세걸은 이미 경근왕에 임명되었고, 4월 20일 영주 유수 조맹도 원군에 투항했다.

5월 1일, 아릭카야는 명령을 받고 악주로 돌아갔다. 5월 11일이 되자 진주, 수주, 균주, 정주, 방주, 완주 등지의 송군도 속속 원군에 항복했다.

《원사》에 따르면, 아릭카야가 출정을 한 2개월 동안 원나라의 군대는 총 3개 부, 11개 주, 4개 군, 57개 현, 총 80만 3,415가구, 114만 3,860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로써 경서(京西)와 호북(湖北) 지역은 거의 모두 원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승전보가 원 조정에 전해지자 쿠빌라이는 3일간의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1276년에는 이불(李芾)의 군대가 담주에서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담주가 함락되고 이불은 자결한다. 뒤이어 호남성 지역 상당수가 아릭카야의 군대에 투항하였고 아릭카야의 군대는 광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1276년 남송 정부가 투항한 뒤 회서 지역을 지키던 하귀[47]도 원에 투항하였지만, 이정지강재가 양주 지역에서 원의 군대와 분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고[48], 마지막 재상들인 진의중,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49]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1278년 2월 결국 복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 잔존 세력에는 옛 후주의 황실 가문이자 송 태조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도 끝까지 참여했다.

7.3. 남송 최후의 불꽃, 애산 전투(1279)

결국 1279년, 쿠빌라이 칸원나라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남송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한다. 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의 비극적인 전투와 마지막 송의 군대는 육군은 내륙, 나머지 해군은 800척 정도의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수십 만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었다. 최후의 결전에서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보였지만,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 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 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다. 수백 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이미 포로로 잡혔던 문천상도 몽골 군영 내에 있었는데 남은 송나라군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장홍범이 종용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소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에 뛰어들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 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7살의 마지막 황제와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해버린다. 몽골 기록에 다음 날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장세걸은 전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양 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닥쳤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세상의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점령되지 않아 남아있던 마지막 송나라의 잔류 병력들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심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끝내 최후의 구심점 문천상까지 처형되어 부흥 운동도 중단된다.

남송이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이후 몽골은 하도 저항이 심해서 깊이 빡친 나머지 전쟁이 끝난 후 송나라인들을 모조리 사실상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저항이 적었던 여타 국가의 백성들은 2급 시민 취급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결국 이 지역은 몽골에 강한 저항 정신을 가져 후일 원나라가 붕괴하자 한족 반격의 중심지가 되었다.[50]

남송과 원나라의 전투는 물론 중간 중간 소강 상태도 있었고, 44년 동안 내내 싸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있었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도 늘 서로 전쟁에 대비하며 준비하고 있던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위대한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文天祥)이나,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린 바얀(伯顔)이 태어난 해는 모두 1236년이다.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40살도 훌쩍 넘어 그 당시 기준이라면 슬슬 황혼기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다.[51]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대 전부를 소진했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송나라는 역대 중국사의 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최약체 이미지가 강하고, 수많은 송군의 굴욕적인 역사 일화가 조롱거리로 언급되는 등등 송나라 사람들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외울 줄 알지 '상무 정신'이 없어서 칼들고 싸울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더 장렬하게 순국하고 끝까지 뜻을 꺾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북송 문서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문약한 송나라'의 이미지 자체가 일정 부분은 합리적인 근거를 두고 있지만[52]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편견인 측면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송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이렇게 평했다.
송나라가 망할 징조는 이미 하루가 아니었다. 지난 세월은 돌아가고 진정한 군주가 천하를 다스렸지만, 송나라의 유신들이 충성스럽게 두 왕을 받들어 해상으로 달아났으니 천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노라. 그러나 신하들의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이 정도이니 이 또한 참으로 슬프도다!

청나라의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진정의 《중국 과거 문화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8. 결과 및 영향

몽골 제국은 남송을 멸망시키면서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자 정복왕조가 되었다.

몽골-남송 전쟁은 몽골 제국의 대외 원정 중 마지막으로 완료된 대외 원정이며 가장 오랜 시간 끌었던 원정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몽골은 남송에서 가장 고전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럽러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고려까지 다 갈리던[53][54] 이 시기에도 몽골의 앞마당 지역인 남송이 존재했었고, 그래서 북송의 군대는 전형적인 당나라 군대의 예시로써 형편없었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남송인 경우는 군사력도 괜찮았다 같은 재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한편 남송이 무려 44년 동안 버텼기에[55], 몽골은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를 건국할 때 남송에 사는 남인을 최하위 등급인 4등급으로 두고 많은 차별을 행했다.[56]

그리고 애산 전투의 한 생존자의 손자 중 한명은 몽골이 약해진 틈을 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쫒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9. 기타

남송의 장수들 중 일부는 에 항복하였는데, 조정의 간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성 안의 백성들이 몽골에 도성당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어떤 장수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배반했다. 원나라는 남송의 항장들을 중용하면서도 경멸하였다. 또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먼저, 쿠빌라이 칸이 남송의 항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왜 그렇게 쉽게 투항했는가?
남송의 항장들이 말하였다.
남송의 가사도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문신을 중시하고 무인들은 하대하였사옵니다. 이에 신 등이 불화가 쌓이고 마음이 멀어져서 투항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몽골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동문충이 통역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자면, 가사도가 그대들을 경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리고 강재가 양주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회서를 바치고 원나라에 투항한, 하귀가 강재에게 다가오자 강재는 이를 갈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를 보면 차라리 죽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한 양양 전투에서 투항하였던 여문환문천상에게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문천상이 포로가 되었을 때 여문환을 욕하자, 바린 바얀 또한 항복한 여문환이 아닌 문천상 쪽을 더 높게 평가했다.
여문환: 승상께선 어찌해 환(여문환)을 도적이라고 욕하는 겁니까?

문천상: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는 그대가 장본인이니 그대가 난신적자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삼척동자도 모두 너를 욕하는데 어찌 나 뿐이랴!

여문환: 양양을 6년이나 지켰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문천상: 힘이 다하여 지원이 끊어지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 너는 몸을 아끼고 아들만 사랑했으니 나라를 져버렸을 뿐 아니라 가문의 명성도 없앤 것이다. 이제 온 백성을 거슬렀으니 만세의 적신이다!

바얀: 승상께서 잘 꾸짖으셨소.

(문천상이 임안으로 돌려보낼 것을 완강하게 청했으나 바얀은 웃으면서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정붕비의 아버지 정총이 부주에서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히자 장덕윤이 정총을 가마에 싣고 돌아오며 말하였다.
"당신의 아들 정붕비[57]는 이미 참의를 지냈으니 당신 부자가 다시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포로가 되었지만 그는 항복하였으니 내 아들이 아니오.
이처럼 남송의 항장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원 조정에서도 경멸당했음을 알 수 있다.

[1] 본래는 북방 한인 출신의 남송 무장이었으나, 여문덕의 무시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임명되자 이에 위험을 느껴 노주를 바치고 원에 투항한다.[2] 1276년에 송나라의 부흥은 더 이상 없다. 라고 판단하여 참파로 도망을 갔다.[3] 여담 이지만 이전에 남송은 금나라와 100년 이상 전쟁을 하였다. 그리고 몽골빨로 이겼..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전쟁 후반에 그판에 들어온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것이었다.[4] 같은 사람이 작성한 글이나 댓글에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어 양쪽 글을 모두 덧붙인다.[5] 사실 이전에 북송 영토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6] 삼국지에 나오는 양평관보다는 더 서남쪽에 존재했다. 송나라의 양평관은 정촉전에 나오는 관성, 즉 양안관이었다.[7] 몽골 왕고부족 출신으로, 초기에는 금의 인물이었다.[8] 조우문의 군대와 맞섰는데, 조우문을 포함한 조우문의 군대가 몰살당하자 조우문을 극찬했다.[9] 특히 사천 분지 일대는 남송 정권의 세금을 담당하는 중요 지역이기도 했다.[10]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발원지인 우한시가 바로 형주 지역에 있다.[11] 이때는 고달이 이증백의 수하였던 시기였다.[12] 한편 이때 몽골은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기도 했다.[13] 여기서 왕덕신이 선봉으로 활약한다.[14] 맹공 사후 여개의 수하에 있었고, 흥원(한중)을 수복한다.[15]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산 위에 있는 요새인 데다 방어까지 철저했으니 천하의 몽골군 입장에서도 당연히 뚫지 못한 것이다.[16] 몽케 본인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17] 참고로 이 조어성은 1279년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버티다가 항복한다.[18] 왕견의 부장 장각은 조어성 전투 이후 중경 지역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막다가 조어성이 투항하고, 또 중경이 함락되는 등 악재가 발생하자 강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나 실패하고, 1280년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 측간에서 활시위를 끊어 활시위로 목을 매 자결하고 만다.[19] 그 이전 타차르가 형호 방면으로 진군하였는데, 양양에서 고달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몽케는 타차르를 경질시켰다.[20] 원나라의 명장 장유의 부장이었다.[21] 악주는 양번 지역과 함께 남송 정권에 있어 또 하나의 요충지였다. 서쪽으로는 사천 지역을 지원할 수 있고, 동쪽으로는 양회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일전에 악비가 중원 회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던 적이 있었다.[22] 대부분 역사서에는 가사도가 악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화의를 제의했다고 한다. 장강을 국경으로 하고, 매년 세폐를 바치며 몽골에 신하의 예를 갖추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가사도는 이 일로 남송을 망친 매국노로 찍혀 후대 중국 왕조들은 물론 조선에까지 그 악명이 높았으며, 누구를 가사도라고 부르는 말은 욕설과 같았다.[23] 발도아는 이전 호남성 악양으로 가서 여문덕을 요격했다.[24] 오늘날 호남성 장사시[25] 진사 출신의 남송 무장이다. 담주에서 우량카다이의 군대와 전투를 치르기 전 사비를 털어 왕견이 지키던 조어성을 지원했다.[26] 말이 전쟁 영웅이지 실제로는 짜고친 고스톱이었는데, 자세한 건 가사도 항목을 참고하시면 된다.[27] 상사벽, 조세웅, 고달이 가사도에게 배척당하였고, 상사벽과 조세웅은 죽고 만다. 여기서 고달은 악주 전투 당시, 가사도에게 무례하게 굴었다.[28] 남송의 명장 중 하나이나, 가사도에게 결탁했다.[29] 유정은 여문덕에게 계책을 올려도 무시당하고, 공을 세워도 여문덕이 이를 가로챈다.[30] 사천 방면에서 활동한 장수들이다. 특히 상사벽은 진사 출신으로, 몽골군이 조어성을 공격하자 사비를 털어 조어성을 지원하였으며, 이후에는 담주(호남성 장사시)에서 우량카다이의 군대를 악전고투 끝에 막아낸다.[31] 이듬해 노주는 여문덕이 재빨리 반격을 가한 덕분에 수복되지만, 유정이 원에 투항함으로써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남송 정권에 큰 손실을 주게 되었다.[32] 1261년 배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학경을 사신으로 보내나, 학경은 진주에서 억류당했다.[33] 당 명장 곽자의의 후손이다.[34] 회하 남쪽과 북쪽을 합칭한다.[35] 몽케 칸의 침공 당시 양대연이 몽골에 투항하자 양대연은 몽골군의 사천성 공격에 앞장서게 된다.[36] 이는 유정이 헌책했던 것이었다.[37] 참고로 동유럽 원정을 나갔을 때 몽골 병력이 15만이였다. 즉 이에 2/3이나 되는 병력을 단 한 나라를 위해 쏟아부은 것이다.[38] 여문덕은 이를 방치하였고 결국 거점이 완성된 이후에 병사한다.[39] 가사도의 사위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문덕의 사위이고, 가사도의 조카이다.[40] 사천 지역에 산성을 구축함으로써 몽골군과의 장기 항전에 기여하였지만 참언을 믿은 조정으로 인해 사천에서 급사했다.[41] 왕견의 아들이다.[42] 양라보 전투 이후 형호 전력과 회서 전력이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형호 지역의 전력은 상당한 상황이었다.[43] 호남성 악양시[44] 사마광의 7세손이다.[45] 아릭카야의 소속이었던 백아오태화상이 고달이 지키던 강릉에 항복을 권유한다.[46] 고달이 원나라에 투항한 뒤, 고달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참지정사로 임명되고, 이후 원나라가 농업을 시작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47] 정가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가사도에게 어가를 모시라고 하고 자신은 회서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겠다며 회서로 도주했으나, 하귀 본인은 원과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48]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양주가 함락된다. 양주성을 지키던 주환이 성문을 열어 원나라의 군대를 맞이했다.[49] 진의중은 1276년에 송나라가 더이상 일어설 힘은 없다고 결론을 짓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사실상 문천상 혼자서 고전을 한 것이다.[50] 이후 강남(중국)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과 강남을 회복한다. 그리고 명나라는 이런 모습을 보고 반란이나 이민족의 공격에 대비해 강남의 남경에 많은 물자를 대비하게 한다.[51] 국가를 막론하고 전근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대체로 현대인들에 비해 짧았음을 감안하면, 당시의 60대를 21세기의 60대와 동일선상에 두어서는 안 된다.[52] 실제로 송은 문치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송의 군사력은 다른 왕조에 비해 허약한 구석이 많았다. 물론 이는 과거 당이 망한 선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었다. 당은 지방에 절도사를 두어 외침은 막았지만 그 절도사가 군벌화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기 때문에 내란에 시달려야 했다.[53] 삼별초 토벌도 1273년의 일이었다(!)[54] 다만 고려는 남송과는 달리 멸망하지는 않고 국체를 보존하기는 했다.[55] 참고로 여몽전쟁의 끝이 1259년이고, 삼별초 토벌이 끝날 때가 1273년이고 1차 일본 원정베트남 원정이 각각 1274년, 1257년이다. 즉, 고려, 러시아, 폴란드,헝가리, 이란, 이라크, 중앙아시아 지역, 베트남 북부, 규슈 서부 지역이 몽골의 정복 전쟁의 전장이 되었을 때도 버틴 것이다.[56] 금나라 영토에 살던 한족과 여진족, 그리고 고려인도 피지배층이긴 했지만 남인보다 높은 3등급이었다.[57] 1274년 악주에서 원나라의 군대와 악전고투하지만 양라보가 함락되자 하귀가 도망치고, 바얀의 군대에 악주를 바치고 투항했다. 이후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에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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