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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난


{{{#fff 이단의 난
李璮之亂(李璮之納) }}}
시기 1262년 음력 2월 3일 ~ 동년 음력 7월 20일
장소 허난성, 산둥성, 안후이성, 장쑤성, 허베이성 일대
교전 반란군(남송군) 토벌군
지휘관 강회대도독 이단
경동초무사 하귀(남송)
청양몽염(남송)
양태위(남송)
화로분(남송)
이정지(남송)
제왕 합필적
중서우승상 사천택
숙위장군 아술[1]
산동동로선위사 동문병
강한대도독부이문관 곽간
빈체로안무사 한세안
정행만호 사추[2]
제남만호 장굉
행군총관 장홍범[3]

1. 개요2. 배경3. 경과
3.1. 2월3.2. 3월3.3. 4월3.4. 5월3.5. 6월3.6. 최후
4. 영향
4.1. 몽골 제국4.2.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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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동(山東) 일대를 다스리던 몽골 제국한인(漢人) 세후(世候; 제후) 이단(李璮)이 남송과 내통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이단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송에 투항했기 때문에 남송에서는 이단의 투항(李璮之納)으로 칭하였다. 처음에는 남송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단의 반란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이후에 토벌군에게 전세가 기울게 되었고,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토벌되었다.

2. 배경

이단은 산동을 30여 년 동안 다스리면서 몽골 조정에 의견을 주청한 것만 수십 번에 달했으나, 대부분 무시당하거나 의심을 사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었었다. 그는 남송의 공격을 방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끌어모았고, 서방과 북방에서 벌어지는 원정을 위해 병사를 징집하거나 장교를 파견하는 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로써 병력의 손실을 철저히 막은 이단은 산동에서 다른 제후들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갖추게 되었고, 그는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게 된다.

3. 경과

3.1. 2월

2월 3일, 몽골 제국에서 강회대도독(江淮大都督)을 지내던 이단은 경사(京師)에 볼모로 보냈었던 그의 아들 이언간(李彥簡)이 경사를 탈출하여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자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던 연주(漣州)[4], 해주(海州) 지역의 모든 성들을 모두 남송에 바치며 투항하였고, 그 일대를 지키던 몽골의 수비군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그런 뒤에 이단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익도(益都)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한편 소식을 들은 남송의 황제 이종(理宗)은 조서(詔)를 내려서 이단을 보신군(保信軍), 무녕군(寧武軍)의 두 군을 거느리는 절도사(節度使)로 삼고 경동(京東), 하북(河北)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또 그를 제군왕(齊郡王)에 봉(封)하고 그의 부친인 이전(李全)의 관직을 복구시켰으며, 연수군(漣水軍)을 안동주(安東州)로 개칭하였다.

한편 이단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전(前) 산동선무부사(山東宣撫副使) 왕반(王磐)은 익도에서 탈출하여 제남(濟南)으로 달아났다.

2월 4일, 남송의 경동초무사(京東招撫使) 하귀(夏貴)가 신채(新蔡)[5]를 공격하였다.

2월 8일, 이단이 익도에 입성하였다. 그는 익도의 관청과 창고를 털어서 맛있는 음식들을 장만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에게 그 음식들을 베풀면서 잔치를 벌였다.

2월 15일, 이단이 기병들을 보내서 포대(蒲臺)를 약탈하였다.

2월 17일, 세조(世祖)가 조서를 내려서 장수들에게 병사를 내어 이단을 토벌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조벽(趙璧)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삼고 그에게 심(深), 기(冀), 남궁(南宮), 조강(棗強)의 네 성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2월 18일, 세조가 조서(詔)를 공포하여 모든 몽골군과 한군(漢軍)에게 이단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군만호(水軍萬戶) 해성(解成)과 장영실(張榮實)[6], 대명만호(大名萬戶) 왕문한(王文幹)과 동평만호(東平萬戶) 엄충범(嚴忠範)은 모두 동평(東平)[7]으로 모이게 하였으며, 제남만호(濟南萬戶) 장굉(張宏), 귀덕만호(歸德萬戶) 저협(邸浹), 무위군포수원수(武衞軍礮手元帥) 설군승(薛軍勝) 등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빈주(濱州), 체주(棣州)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세조는 또 조서를 내려서 장굉과 빈체로안무사(濱棣路安撫使) 한세안(韓世安)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성과 보루들을 각각 수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관내(管內)의 백성들을 모두 병사로 징발하여 이단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채국공(蔡國公) 장유(張柔)와 그의 아들 장홍범(弘範)을 소환하여 그들에게 군사 2천 명을 이끌고 경사를 지키러 오게 하였다.

2월 20일, 세조는 제왕(諸王) 합필적(合必赤)에게 명령하여 산동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단을 토벌하게 하였다.
또한 부지애불한(不只愛不干)과 조벽을 산동행중서성사(山東行中書省事)로 삼고 산동에 부임시켜서 반란 진압을 지원하도록 하였으며, 송자정(宋子貞)은 참의행중서성사(參議行中書省事), 동원(董源)과 고일민(高逸民)을 각각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으로 삼으면서 산동의 일을 편의대로 처결토록 하였다.

진정(真定), 순천(順天), 하간(河間)[8], 평난(平灤)[9], 대명(大名), 형주(邢州), 하남(河南)의 제(諸路)에 주둔한 병사들은 모두 제남으로 집결하게 하였으며, 중서좌승(中書左丞) 활활(闊闊)과 상서(尚書) 겁렬문(怯烈門), 선무사(宣撫使) 유현(游顯)의 세 사람은 임시로 선위사(宣慰司)의 업무까지 맡게 하여 대명, 명자(洺磁)[10], 회맹(懷孟)[11], 창덕(彰德), 위휘(衞輝)[12] 및 하남의 동서 양로(兩路)를 모두 관할하게 하였다.

2월 23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왕문통(王文統)은 이단과 공모하였으므로 세조가 그를 연좌시켜서 복주(伏誅)하였으며, 조서를 내려서 조정 내외의 신하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2월 26일, 이단이 제남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세조는 장굉에게 제남을 지키고 다른 군대들을 제남으로 집결시키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지만 조서가 제남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단이 먼저 제남을 습격해와서 포위하였다. 이때 제남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천 명도 되지 않았으므로 장굉의 부장(部將)은 장굉에게 승산이 없음을 말하였고, 이에 장굉은 그의 할아버지인 제남공(濟南公) 장영(張榮)을 모시고 경사로 달아났다. 결국 이단은 제남성을 무너뜨렸고, 그곳을 새 본거지로 삼아서 웅거(雄據)하였다.

2월 27일, 제남이 함락되자 세조가 조서를 내려서 대명, 명자, 창덕, 위휘, 하남, 회맹, 진정, 형주, 순천, 하간, 평난의 제로에 소속된 병사들에게 원래의 소속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날, 남송군이 등주(滕州)[13]를 공격하였다.

2월 30일, 세조가 조서를 내려서 발도말태(拔都抹台)에게 식주(息州)[14]의 수비병들을 이끌고 제남으로 가게 하였으며, 식주의 백성들은 모두 채주(蔡州)로 옮기게 하였다.
엄충범에게는 숙주(宿州)와 기현(蘄縣)[15]에 군대를 남기고 두 곳을 지키게 하였으며, 남은 군대로 동평을 수비하게 하였다.

3.2. 3월

3월 17일, 세조가 숙위장군(宿衛將軍) 아술(阿術)과 정행만호(征行萬戶) 사추(史樞)에게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제남으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아술은 이단과 조우하게 되자 그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니 이때 얻은 반란군의 수급만 4천 개에 달하였다. 이단은 제남으로 달아났다.

3월 19일, 하귀가 부이(符離)[16]를 공격하였다.

3월 22일, 한세안이 진무(鎮撫) 마흥(馬興), 천호(千戶) 장제민(張濟民) 등을 이끌고 고원(高苑)[17]에서 이단을 크게 깨뜨렸으며, 그의 권부(權府) 부규(傅珪)를 붙잡았다.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세조는 장제민과 마흥에게 금부(金符)를 하사하였고, 조서를 내려서 이단의 패배를 알리고 여러 로(路)들을 위로하면서 백성들이 사사롭게 병장기를 숨기는 행위를 금지하게 하였다.

3월 29일, 하귀가 기현을 공격하였다.

3.3. 4월

4월 1일, 관군이 구덩이를 파고 목책을 세워서 제남성을 포위하였다.

4월 11일, 남송의 장수 화로분(華路分)과 양태위(湯太尉)가 서주(徐州)와 비주(邳州)를 공격해왔다.
세조는 장유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가 이끌고 있는 경사의 수비군 2천 명 중 절반을 나누어서 박주(亳州)를 지키도록 하였다.

4월 15일, 강한대도독(江漢大都督) 사권(史權)이 그의 부하장교이던 백호(百戶) 조(趙)씨를 참수하였다. 조씨는 서주와 비주를 공격해온 남송군의 기세가 강하자 탈영하여 달아났다가 공격이 잠잠해지자 부대로 복귀하였는데, 이에 사권이 그를 처형한 것이다.

4월 18일, 하귀가 박주를 공격하였다.

4월 22일, 이단이 그의 부하 시우아(柴牛兒)를 보내서 그의 부민(部民)인 노광(盧廣)을 회유하려고 하였는데, 노광이 시우아를 붙잡아서 조정에 바치니 세조가 시우아를 주살하였다. 세조는 노광의 공을 논하여 그를 권위주판관(權威州軍判)에 제수(除授)하고 포도관(捕盜官)을 겸직하게 하였다.

4월 30일, 하남로의 백성 왕활자(王豁子), 장무승(張無僧), 두신(杜信) 등이 남송에 붙으려고 모의하였으므로 세조가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다.
세조가 조서를 내려서 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 사천택(史天澤)에게 제남으로 가서 이단을 토벌하게 하였으며, 토벌군의 모든 장수들이 그의 통제를 따르게 하였다.

이달에 제남성이 포위되자 이단은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서 토벌군의 여러 장수들을 공격하였으나 행군총관(行軍總管) 장홍범의 영(營)은 험한 지형에 위치한데다 군대가 적었으므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홍범이 긴 보루를 쌓으니 이단은 군대를 보내서 장홍범의 영을 공격하였는데, 장홍범의 영이 있는 언덕에 이르기도 전에 다리가 끊어졌고, 이로 인해 반란군의 대부분은 장홍범이 밤중에 몰래 파두었던 해자에 빠지게 되었다. 장홍범의 보루는 동쪽 문이 열려져 있었는데, 해자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동쪽 문을 향하여 돌격하였으나 장홍범의 복병에 당하여 전멸되었다.

3.4. 5월

5월 3일, 하귀가 숙주와 기현을 함락시키고 숙주의 수장(守將) 권만호(權萬戶) 이의(李義), 기현의 수장 천호(千戶) 장호고(張好古)를 모두 죽였다.

5월 5일, 사천택이 제남성을 둘러싸는 환성(環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2주 후에 환성이 완공되자 이단은 두 번 다시 제남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5월 8일, 사권이 조정에 글을 올려서 서비총관(徐邳總管) 이고가(李杲哥)가 비주성을 완전히 복구하였다고 알려오니,세조가 조서를 내려서 이고가와 그 이하 장교들의 죄를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이고가가 하귀에게 완전히 항복한 것이었고,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성을 복구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하귀는 숙주와 기현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서주와 비주를 연달아 공격해왔었는데, 두 곳을 다스리던 이고가는 성 밖으로 나와서 하귀에게 투항하였다. 하귀가 떠나자 이고가는 자신이 다스리던 성들을 온전히 복구하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하귀가 물러나고 비주성이 복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권은 이고가가 하귀를 물리친 뒤 다른 남송군을 방비하기 위해 성을 복구한 것으로 착각하여 조정에 잘못된 정보를 알리게 되었고, 이에 세조도 잘못된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5월 9일, 남송군이 이진현(利津縣)[18]을 공격하였다.

5월 22일, 토벌군이 서주를 탈환하니 이고가 등이 복주되었고, 세조는 사천택에게 새로운 서비총관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3.5. 6월

6월 1일, 남송군이 각각 창주(滄州), 아주(雅州), 노산(瀘山)[19]을 공격해오니 백성들이 투항과 배반을 반복하였다. 세조는 그들 중 난리를 일으킨 주모자 7명만을 주살하고 나머지는 안심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6월 4일, 한세안이 빈주의 정하구(丁河口)에서 남송군을 패배시켰다.

6월 5일, 세조가 탑찰아(塔察兒)를 파견하여 하북(河北)에까지 올라온 남송군을 공격하게 하면서 빈해(瀕海) 지역에 거주하는 군민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6월 19일, 태원총관(太原總管) 이의가노(李毅奴哥)와 달로화적(達魯花赤) 재곡설(戴曲薛) 등은 이단이 거짓으로 꾸며낸 격문을 받았었는데, 그들은 이단을 믿고 그에게 붙기 위하여 그들이 다스리는 고을들에 이단의 격문을 널리 뿌렸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그 일이 발각되었고, 두 사람은 모두 주살되었다.

이달에, 이단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종은 익도의 관청에 은 5만 냥을 하사하고 그 돈으로 병사들을 먹이게 하였으며, 청양몽염(靑陽夢炎)[20]에게 군대를 이끌고 이단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양몽염은 산동에 이르렀을 때 토벌군의 기세가 강한 것을 보고는 그대로 귀환하였다.

한편 하귀는 한세안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끊기게 되자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포로로 잡았던 몽골의 군민들을 남송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는데, 그가 숙천현(宿遷縣)에 이르렀을 때 몽골군의 장수 곽간(郭侃)이 하귀를 습격하여 군민 만여 명을 구출하였다. 하귀는 이고가의 동생 이여마(李驢馬)와 함께 3만의 남송군을 이끌고 곽간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곽간은 그들을 패배시키고 남송군 1천여 명의 수급을 얻었으며, 전투선 2백여 척을 탈취하였다.

3.6. 최후

7월, 토벌군의 포위 하에 제남성의 식량이 고갈되니 반란군은 인육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들의 투지도 무너져서 몰래 성 밖으로 줄을 대고 빠져나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토벌군의 장수 동문병(董文炳)[21]은 제남성의 아래로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이단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은 내게로 오면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
이때 바로 앞에서 동문병을 보고 있던 이단의 심복 도수(都帥) 전(田)씨는 줄을 타고 성 밖으로 빠져나와서 토벌군에 투항하였다.

7월 20일, 제남성이 무너지려 하자 이단은 애첩을 베어 죽이고 대명호(大明湖)로 몸을 던졌으나 수심이 얕아 죽지 않았고, 성이 함락되자 토벌군이 들이닥쳤다. 이단은 토벌군에 붙잡힌 뒤 몽골인 군관 낭가(囊家)와 함께 복주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사지가 찢긴 뒤에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4. 영향

4.1. 몽골 제국

세조는 남송의 재상 가사도(賈似道)와 화의를 맺음으로써 자신이 북방에서 아리불가(阿里不哥)와 싸울 동안 남쪽 국경에서라도 평화를 도모하는 전략을 취했었지만 이단의 반란으로 인해 그러한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이단의 반란은 한인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불신이 커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단은 산동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군벌이었던 데다 그의 장인인 왕문통 또한 세조의 신임을 받는 조정의 중신이었으므로 비록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더라도 세조에게는 뼈아픈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단의 반란 직후에 조정에서는 한인 출신 관리들의 입지가 약해지게 되었고, 특히 한인 제후들의 경우 조정의 견제 대상이 되어서 불이익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한인 세후를 견제하기 위해 그 자제들의 관직을 박탈하였는데, 이는 이단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천택은 이단을 토벌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족 17명이 병권을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장홍략(張弘略), 장홍범 형제 또한 각각 남송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그들의 아버지인 장유가 한인 세후인 까닭에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관직을 잃게 된다.[22]

4.2. 남송

또한 남송 정권도 무수한 돈과 식량을 소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쿠빌라이의 앞에 양회 방어선이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제멋대로 지키고 공격하지 않으며, 송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할 수 있는 통군 대장이 없다는 것은 남송 후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이는 남송 멸망 시기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1] 수부타이의 손자이자 우량카다이의 아들이다.[2] 사천택의 조카이다.[3] 훗날 애산 전투를 지휘하여 남송을 멸망시킨다.[4]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화이안시(淮安市) 롄수이현(漣水縣)[5]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주마뎬시(駐馬店市) 신차이현(新蔡縣)[6] 악주 전투에서 남송군의 여문신을 참살하고, 1275년에는 아리해아의 밑에서 활동한다.[7]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타이안시(泰安市) 둥핑현(東平縣)[8] 오늘날의 허베이성(河北省) 허젠시(河間市)[9] 오늘날의 허베이성 롼저우시(灤州市)[10] 오늘날의 허베이성 한단시(邯鄲市) 츠현(磁縣)[11]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친양시(沁陽市)[12] 오늘날의 허난성 웨이후이시(衞輝市)[13] 오늘날의 산둥성 텅저우시(滕州市)[14] 오늘날의 허난성 신양시(信陽市) 시현(息縣)[15]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쑤저우시(宿州市) 융차오구(埇橋區) 치현진(蘄縣鎭)[16] 오늘날의 안후이성 쑤저우시 융차오구 푸리진(符離鎭)[17] 오늘날의 산둥성 쯔보시(淄博市) 가오칭현(高青县) 가오칭진(高青鎭)[18] 오늘날의 산둥성 둥잉시(東營市) 리진현(利津縣)[19] 쓰촨성(四川城) 시창시(西昌市)에 있는 산이다.[20] 청양몽염은 이후 1275년 호북제치부사 고달과 함께 강릉을 바치고 아릭카야가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에 투항한다.[21] 동준의 아들이자 동문위의 형이다.[22] 그러나 동문병은 예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