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9:14:47

다루가치

1. 개요2. 역사 속의 다루가치
2.1. 기타
3.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다루가치4. 같이보기

1. 개요

ᠳᠠᠷᠦᠭᠠᠼᠢ(Daruγači/даругачи)

몽골 제국 관직명의 하나. 중세 튀르크-몽골어로 '속주(屬州)' 또는 '점령지'를 의미하는 말이자 천호제에서 자우트(Jagut; 백호)와 아르반(Arban; 십호)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인 "다루가"(Darugha)[1]에 복수형 접미사 '치(-chi)'[2]를 결합한 것이다.[3] 진수자(鎭守者)·단사관(斷事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부족 시절의 몽골은 잦은 약탈과 영토 사업으로 행정과 군대가 일원화된 군사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특유의 광대한 영토 때문에 지방에 미치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속주의 지휘관에게 행정권을 부여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이것이 다루가치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다루가치 제도는 복속 지역의 환경에 맞게 변용되었다. 특히 중원 왕조의 전통적인 중앙 집권적인 관료 제도와 결합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직능에 따라 군직(軍職), 민직(民職), 잡직(雜職)으로 분류되는데, 그중 민직은 대개 지방 군현에 설치되어 현지민을 직접 다스렸다.

이후 다루가치의 권력이 성장함에 따라 종내에는 지방 통치뿐만이 아닌 국가의 행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근대의 총독이나 계엄사령관 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고려에서는 한자로 達魯花赤(달로화적)이라고 표기했다.[4]

청나라 학자 조익(趙翼)의 저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5]에 따르면 다루가치는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의 장을 총칭하는 자리로 문관,무관을 가리지 않고,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자리는 아니며, 지방 행정을 보는 관청에는 모든 행정단위에 다루가치 관직이 있었다고 한다. 원사(元史) 백관지에는 고급관청에는 다루가치를 두지 않고, 예하 관청에 다루가치를 두었다고 하며, 지방 관청에서는 작은 행정단위인 현까지도 다루가치를 두었다고 한다. 다루가치가 특정한 지위가 아닌 사무를 관리하는 장의 총칭으로 갈수록 그 직명도 세분화되었다고 하며, 다루가치가 총독, 지사 의미로도 널리 쓰였기 때문에 쌍성 총관도 번역하면 다루가치로 볼 수 있다.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를 자칭한 무굴 제국에도 다로가(Daroga 혹은 Darogha)라는 관직이 있었다. 무굴 제국의 다로가는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2. 역사 속의 다루가치

1231년 고려에 대한 몽골의 1차 침입은 고종과 살리타이의 강화로 일단락되었다. 강화 조약에서 몽골은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72명의 다루가치를 고려에 파견했으며, 이를 통하여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최우에 의해 모조리 학살당했고, 고려출신 홍복원이 살아남아 도주하면서[6] 2차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후 1278년, 충렬왕 때 쿠빌라이 칸과의 교섭 결과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과 다루가치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고려인 출신 다루가치 가문 또한 계속 존재하였는데 바로 동북면의 이성계 가문이 대대로 '다루가치'와 '천호(밍간)'직을 세습하던 고려 출신 다루가치 가문이었다.

2.1. 기타

몽골과 중국은 고려가 1232년에 다루가치를 몰살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실제로 살해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살해 모의만이 나와 있다.
다루가치 살해사건 참조
내시 윤복창을 북계의 여러 성에 보내어 다루가치의 궁시(弓矢)를 빼앗게 했는데, 선주에서 다루가치가 그를 사살하였다.
8월 초하루 기유일에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대장군(大將軍) 민희(閔曦)가 사록(司錄) 최자온(崔滋溫)과 함께 비밀리에 장교들을 시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기로 했다. 서경(西京)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렇게 하면 서경(西京)이 평주(平州)와 같이 몽고(蒙古) 군사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임술일에 최자온(崔滋溫)을 잡아 가두었고, 유수(留守) 최임수(崔林壽)와 판관(判官), 분대어사(分臺御史), 6조(六曹) 관속들은 다 저도(楮島)로 도망갔다.
고려사
8월 서경에서 난이 일어나 사신을 보내어 안무하였다.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대장군(大將軍) 민희(閔曦)가 사록(司錄) 최자온(崔滋溫)이 달로화적을 모살하자 서경(西京) 사람들이 듣고 말하기를, "이같이 한다면 서경(西京)이 평주(平州)와 같이 된다." 하고는 마침내 난을 일으켜 자온을 잡아 가두었고, 유수(留守) 최임수 등은 도망하여 저도로 숨었는데,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안무한 것이다.
동사강목》 제10하. 임진년 고종 19년(송 이종 소정 5, 금 애종 천흥 원년, 몽고 태종 4, 1232)

그러나 중국 측 사서에서는 다루가치들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나라(고려)가 반역하여 각 현에 주둔해 있는 다루가치를 죽였다.
《원고려기사》
조정이 배치해 놓은 다루가치 72인을 모두 죽였다.
태종 4년 6월 왕철(고려 고종)이 다루가치를 모조리 죽이고, 서울과 모든 고을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들어갔다.
원사

이처럼 우리 측 기록과 중국 측 기록을 비교해 볼 때, 다루가치들 모두가 죽지는 않았지만 다루가치들의 대부분이 주살당했다는 걸 시사한다.

3.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다루가치

이름 파견지 파견 기간
쿠르구즈 호라산 1235년 ~ 1242년
이안사 한반도 동북면 1252년 ~ 1274년
톡토르 고려 1270년 ~ 1271년
석말천구 고려 1275년 ~ 1278년
이행리 한반도 동북면(쌍성) 1300년 ~ ?
라마단 광서도 용주 육천현 1349년
이자춘 한반도 동북면(쌍성) 1343년 ~ 1356년

4. 같이보기



[1] 다루(Daru)는 '점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다루가란 장악하고 지배하기 위해 임명한 관리로, 후일 전통적인 고위 귀족 신분을 가리키던 노얀(Noyan)을 밀어내고 몽골 제국의 지배층을 가리키게 되었다.[2] 한자어로는 '적(赤)'이라 표현하는데, 복수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한국어의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 같은 '-치' 역시 같은 뜻인데, 몽골어뿐만 아니라 퉁구스계 언어와 튀르크계 언어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치'라는 말은 아마 고대 유목민족의 언어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어도 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신라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서도 보이듯이, 이미 한국어에는 고대부터 '-돌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는 '~을/를 하는 남성'의 뜻으로, '-치'와 유사하여, 두 단어 사이의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중국어의 '子'와 '者'의 발음 또한 이 -치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3] Britnell, R.H. (1997). Pragmatic literacy, East and West, 1200-1330. The Boydell Press. p. 223. ISBN 978-0-85115-695-8. Retrieved June 13, 2011.[4] 원나라 시기의 중국어 음에 따른 음차 표기.[5]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가 제자들과 11년에 걸쳐서 번역할 만큼 중국 고증사학의 명저로 꼽힌다[6] 이는 드라마 무신에서의 창작이고, <고려사>에는 윤복창이 다루가치들의 무기들을 회수하다가 선주에서 다루가치들의 활에 맞아 죽었고 또 서경에서 민희와 최자온이 다루가치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서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최자온이 억류되고 최임수가 저도로 도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민희와 최자온이 다루가치들을 모살하다가 서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다. 반면 <원사>에서는 다루가치들이 전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와 고려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다루가치들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