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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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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هندوستان
मुग़ल साम्राज्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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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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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의 최대 판도
1526년 ~ 1857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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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1763년 카나틱 전쟁[4]
1759년~1765년 벵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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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델리 함락, 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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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인도 아대륙,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수도 아그라 (1526~1530, 1560~1571, 1598~1648)
델리 (1530~1540, 1554~1556, 1639~1857)
파테푸르 시크리 (1571~1585)
라호르 (1586~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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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추산)
1600년 115,000,000명
1700년 158,400,000명 참조
민족 차가타이 튀르크인, 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파슈툰인
공용어 페르시아어 (궁정어)
우르두어 (지배계급의 언어)
힌디어 (사실상의 공용어)
아랍어 (제례 언어)
차가타이어 (초기 군대 언어)
그 외 인도계 방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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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슬람[5]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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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526~1719)
과두정[6] (1719~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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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황제 20명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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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바부르 (1526~1530)
제3대 악바르 (1556~1605)
제5대 샤 자한 (1628~1658)
제6대 아우랑제브 (1658~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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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통화 루피[7], 타카, 댐
언어별 명칭
페르시아어 هندوستان (Hendustân)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Mug̱liyah Salṭanat) / ہندوستان (Hindustān)
힌디어 मुग़ल साम्राज्य (Muġal Sāmrājya) / भारत (Bhārat)
영어 Mughal Empire / India
한자 莫臥爾[8] / 應帝亞[9]

1. 개요2. 상세3. 국호4. 왕사5. 국기6. 역사7. 영토8. 인구9. 군대10. 경제
10.1. 직물업10.2. 조선업
11. 문화
11.1. 건축11.2. 기술11.3. 문학11.4. 회화11.5. 복식
12. 평가13. 기타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Mughal Empire[10])은 1526년에 건국되어 1857년 멸망할 때까지 약 330여 년 동안 인도 반도에 존재했던 몽골-튀르크계 왕조이다. 후술되어있지만 몽골계 국가임을 자처하면서 이슬람 왕조를 내세운 인도 지역의 제국으로 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나라였다.

2. 상세

마우리아 왕조 이래 인도에 존재했던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대제국이었으며 전성기 시절에는 인도 아대륙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며 국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 출신의 바부르가 건국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막강한 화기를 바탕으로 델리 술탄국, 아프가니스탄, 라지푸트 주 등을 꺾고 빠른 속도로 인도 북부의 패권국으로 떠올랐다. 이후 바부르의 손자인 악바르 대제의 재위기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으며, 샤 자한 황제의 재위기에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명청교체기라는 중원의 혼란기 동안 명나라를 대신하여 30~40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고,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룩하면서 약 2,000여 년만에 인도 대륙 대부분을 통일한 제국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다만 이토록 강대했던 무굴 제국도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반란들로 크게 약화되었다. 1700년대 초중반에 아프샤르 왕조나디르 샤에게 결정적인 치명타를 맞고 이후 남부의 마라타 동맹과 인근 국가들에게 보호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대제국의 면모를 잃어버렸다.[11] 무굴의 황제들은 심지어 반란군을 피해서 델리를 버리고 도망을 갈 정도로 처지가 비참해졌고, 인도의 황제라는 칭호는 간신히 유지했지만 황제의 격에 맞게 대우해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마라타 동맹이 약화된 후에는 1803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종속되어 식민지 신세가 되어버렸으며 수도인 델리와 그 주변 일대 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수준으로 몰락하였다.[12] 이후 약 50여 년간 사실상 영국의 괴뢰국으로 남았으며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난 후에 공식적으로 멸망당했다.[13] 무굴 제국 멸망 후의 인도에는 대신 인도 제국이 세워졌으며, 영국 국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무굴의 황제를 대신하여 '인도의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14]

무굴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팽창한 국가였으나 악바르 대제 시기에 제대로 된 제도들을 정비하고 공권력 확충에 힘썼으며 지방의 엘리트 기득권 계급들을 편입시키는 등 내정에 신경쓰면서 몇 백년 간 지속될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무굴 제국은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으며 전체 세입의 절반 이상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 들였다. 인도는 17세기를 통틀어 무굴 제국의 통치 하에 상대적인 평화기를 맞았으며, 이덕분에 인도 전역에서 경제 활성화와 무역의 진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 유럽의 상인들에게는 비단과 향신료, 사치품 등을 팔았으며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입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예술을 크게 후원했던 샤 자한의 재위기에는 직조업, 문학, 건축, 회화 등이 크게 발전했으며, 이 덕분에 타지마할, 붉은 요새, 아그라 요새, 라호르 요새 등 인도 건축의 걸작들이 지어지기도 했다.

3. 국호

오늘날 이 제국의 통칭인 '무굴'은 '몽골'이 인도-페르시아식 발음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럽인들이 처음 무굴 제국을 접했을 때, 인도 현지인들이 제국의 지배 집단을 무굴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무굴 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 최초의 공식 사신은 무굴 제국의 지배 계층이 무굴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였으며, 반세기 후 인도를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무굴 황제들이 스스로 칭기스 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무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인도인들은 차가타이 칸국, 티무르 제국으로 이어지며 소위 '차가타이인'이라고 통칭되던 중앙아시아 출신 튀르크-몽골계 기마집단을 무굴이라고 불렀다. 특히 무굴 제국 이전 델리 술탄국을 지배하던 맘루크 집단이나 아프간 부족 군벌 출신 지배층들 역시 페르시아화된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차가타이인들과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로 오랫동안 대립해 왔기 때문에 이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인도 역사가 피리슈타(Firishta)가 집필한 인도의 이슬람 왕조사에서도 바부르를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후손으로 기술하는 동시에 이들을 모두 몽골인(무굴인)으로 지칭했다. 이후 아우랑제브 황제 치세의 무굴 제국 역사가 카피 칸(Khafi Khan)도 진정한 무굴인이란 칭기즈 칸훌레구, 차가타이, 그리고 티무르의 후손들이라고 썼다.

무굴 황족들은 오랫동안 이웃한 힌두, 이란계 왕족들과 통혼하여 외모 면에서는 몽골 선조들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몽골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무굴 제국의 공식 역사서인 <악바르나마 (Akbarnama)>에서는 무굴 황제와 티무르의 선조들을 '몽골 민족 (ulus-i Mughul)[15]'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무굴 제국 당대에 지배종족이 아닌 국호, 즉 나라의 이름에 가장 가까운 말은 페르시아어로 인도를 가리키는 힌두스탄(هِندوستان, Hindustān)이었다. 페르시아어는 티무르 제국 시대부터 무굴 제국 시대까지 쭉 정부와 궁정의 공식 언어였으므로 그냥 지명을 그대로 국명으로 삼은 셈이다. 바부르가 델리를 처음 정복했을 때 쿠트바(이슬람 금요 예배 설교)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운 군주의 직함도 '힌두스탄의 황제'였고, <악바르나마> 등의 공식 역사서나 각종 외교문서 등에서도 국호로 힌두스탄을 썼다.

구르칸 왕조(페르시아어 گورکانیان, Gurkāniyān)라는 표현도 쓰였는데, 이는 국호가 아니라 황실 티무르 가문을 가리킨다. 구르칸은 부마라는 뜻으로, 티무르가 칭기스 칸의 혈통적 권위를 빌리기 위해 내세운 이름이다. 무굴 제국 황실의 관점에서 볼 때 티무르 가문은 티무르부터 무굴 제국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이 쭉 이어졌고,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 역시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단지 구르칸 왕조의 지배 영역이 이동한 것일 뿐이었다. 아미르 티무르가 몽골 제국 황금씨족의 구르칸이자 마와라안나흐르의 지배자로서 왕조를 연 이래 확장기에는 투란술탄(Karsakpay 비문),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에는 이란과 투란의 황제,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바부르 시대에 잠시 카불의 왕이었다가 델리를 정복하여 힌두스탄의 황제가 되었고 그 이후로 쭉 힌두스탄의 황제 자리를 지킨 것이다.

4. 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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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1세 자한기르 샤 자한 1세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아우랑제브 무함마드 아잠 샤 바하두르 샤 1세 자한다르 샤 파루크시야르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라피 웃 다라자트 샤 자한 2세 무함마드 샤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알람기르 2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샤 자한 3세 샤 알람 2세 샤 자한 4세 악바르 2세 바하두르 샤 2세 자파르
티무르 제국 · 무굴
공통: 무굴 이전 · 무굴 · 인도 제국
인도: 자치령 · 대통령 파키스탄: 자치령 ·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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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부르
2. 후마윤
3. 악바르 (1세)
4. 자한기르
5. 샤 자한 (1세)
6. 아우랑제브
(알람기르 1세)
8. 바하두르 샤 1세
(샤 알람 1세)
7. 무함마드 아잠 샤 무함마드 캄 바크쉬
9. 자한다르 샤 아짐 우쉬 샨 라피 우쉬 샨 자한 샤 무히 우스 순낫
15. 알람기르 2세 10. 파루크시야르 11. 라피 웃 다라자트 12. 샤 자한 2세 13. 무함마드 샤 16. 샤 자한 3세
17. 샤 알람 2세 14.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19. 악바르 2세 18. 샤 자한 4세
20. 바하두르 샤 2세

5. 국기

무굴 제국 국기
파일:mughalalam.svg 파일:mughalwarflag.png 파일:Fictional_flag_of_the_Mughal_Empire.svg.png
국기 전쟁기 214번 깃발
무굴 제국은 여러 종류의 깃발을 사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깃발이 위의 왼쪽 깃발로 '알람(علم)'이라고 불렀다. 국기로는 흔치않은 삼각형 모양이었으며 연둣빛 바탕에 태양을 그려넣은 디자인이다. 알람은 티무르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유서깊은 깃발로 원래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깃발이었고 무굴 제국은 스스로가 이 깃발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중간 깃발은 무굴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에 쓰던 군기(軍旗)로 상대적으로 더 진한 녹색이며 사자와 떠오르는 태양이 겹쳐 그려져 있다. 이 깃발은 황제가 원정을 벌일 때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갔으며, 최소 5개 이상을 황제의 병영에 내걸었다. 주로 최고급 비단으로 만들었고 중앙의 사자와 태양은 황금실을 박아 만들었으며 황제가 타고 다니는 코끼리에 걸어놓기도 했다. 맨 마지막 깃발도 무굴 제국이 즐겨쓰던 깃발들 중 하나다. 뾰족뾰족한 모습에 붉은색 테두리를 더했다는 게 특징으로 인도 고고학계에서는 '214번 깃발'이라고 따로 분류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무굴 제국의 깃발들이 이 외에도 꽤나 많은데, 이렇게 깃발들이 많은 이유는 당시 무굴 제국이 맨 위의 알람 외에도 수많은 군기와 깃발들을 썼기 때문이다. 애초에 국기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근대 이전의 비서구에 이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6.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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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토

파일:mughalprovince.jpg
파일:mughalearth.jpg
1707년의 최대 판도[16] 위성사진에 대입해본 무굴 제국의 영토[17]
전성기의 무굴 제국은 심지어 현대 인도보다도 넓었다. 현재 인도 공화국의 영토가 약 3,287,263km²인 것에 비하여 무굴 제국 최대 강역의 영토는 4,000,000km²에 달했고, 비록 남부 일부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드넓은 파키스탄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네팔부탄의 일부까지 장악하면서 현재 인도 영토의 약 122% 정도라는 무지막지한 영토 크기를 자랑했다.[18]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무굴 제국은 단일 수도 체제가 아니었고, 델리아그라, 라호르 등 대도시들을 황제가 오가면서 통치하는 다중 수도 체제를 채택한 제국이었다. 이때문에 수도 도시들 간의 정치적 경쟁도 매우 심한 편이었으며 악바르 황제의 경우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일부러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또다른 수도를 지어 살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에 황제의 권력이 강할 때에는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처럼 말그대로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다. 덕분에 한창 전쟁이 많이 일어날 때에는 황제가 있는 막사가 수도처럼 여겨졌으며, 악바르나 아우랑제브 등 정복 황제들은 전쟁에 나갈 때 행정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하여 궁정의 관료 대부분을 함께 끌고 나가기도 했다. 아니면 아예 황제가 친림한 장소에 새로운 수도를 지어버리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아우랑제브 황제가 데칸 정벌을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에 데칸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우랑가바드'를 수도로 썼다. 한편 제국이 완벽히 몰락한 18세기 중후반부부터는 다중 수도 따위를 유지할 여력도 없었고, 무굴의 황제는 오직 델리 한 곳에만 반강제적으로 틀어박히면서 사실상 델리가 무굴 제국의 고정된 수도로 자리하게 된다.

제국의 행정 체계를 개편한 악바르 황제는 제국 영토를 '수바(صوبہ)'라는 이름의 행정단위로 나누었다. 현재의 주 정도에 해당하는 거대 행정구역이었으며, 각 수바는 '수바다르'라고 하는 일종의 주지사와 비슷한 관리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렸다. 처음 만들어질 때는 12개의 수바가 있었으나 악바르가 정복 활동을 펼치면서 그가 죽을 즈음에는 총 15개의 수바가 있었고 아우랑제브 시대에는 이보다도 훨씬 많아진다. 이 수바들은 하위 행정구역으로 구에 대응되는 '사르카'로 나뉘었고 이 사르카는 읍과 면 정도에 해당하는 '파르가나'와 '마할'로 또 나뉘었다고 한다. 18세기에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자 지방의 수바들은 사실상의 독립국처럼 행세했다. 각각 따로놀던 수바들은 결국 하나씩하나씩 영국이나 마라타 동맹에게 잡아먹히면서 사라졌다. 참고로 가장 대표적인 수바에는 아그라 수바, 벵골 수바, 델리 수바, 구자라트 수바, 카불 수바, 비하르 수바 등이 있었다.

무굴 제국에는 나와브(نواب)라고 하는 직급이 있었다. 나와브란 지방의 반독립적인 태수나 토후들에게 하사한 직책으로, 봉신국의 이나 총독 정도에 해당되는 최고위 직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세 인도사를 공부하다보면 꽤나 흔하게 접할 호칭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었던 무굴 제국이 모든 행정구역 하나하나를 통치할 수 없었으니 일단 지역을 정복한 후 그 곳을 다스리던 가문에게 나와브직을 하사한 것. 나와브들에게는 무굴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와 힌두교도들의 반란을 억누를 의무가 있었다. 주로 해안지대나 국경지대의 태수들이 나와브를 맡았는데 대표적으로 구자라트데칸 지방에 나와브들이 많이 존재했다. 나중에 무굴 제국의 힘이 약해지는 18세기에 독립한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더 독립성이 강한 니잠[19]의 칭호를 칭하면서 거의 자주국으로 행세하기도 한다. 나와브 역시 19세기 들어서는 모두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무릎을 꿇고 복속되었지만 나와브라는 칭호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고 20세기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영국인들은 20세기에 인도에서 벼락출세해 막대한 부를 쌓은 백인 졸부들을 경멸조로 '나보브(nabob)'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20][21]

8. 인구

무굴 제국의 전성기인 17세기에는 전 인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면서 인도에서 지난 몇 천년간 끊이지 않았던 전란들이 한시적으로나마 잠잠해졌고, 이를 통하여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이 안정되면서 인구 폭발 현상이 발생했다. 덕분에 무굴 제국의 통치기인 1500년대에서 1700년대 사이에 인도의 인구는 최소로 잡아도 60%, 최대는 253%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인도의 인구는 말그대로 폭증했다. 악바르 재위기인 1600년에는 무굴 제국에 120여 개의 대도시와 3,200여 개의 중소 규모 도시들이 번성하고 있었으며, 상당수가 25만 명이나 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복잡한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무굴 제국의 도시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교외까지 합치면 아그라에는 80만 명, 라호르에 70만 명, 다카에 1백만 명이 넘게 살았으며 델리에는 60만 명 정도가 살았다.[22] 무굴 제국의 전성기 말기인 아우랑제브의 시기인 1700년, 무굴 제국에는 총 455,698개의 마을과 도시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1억 5,840만 명에 달하면서 당시 인도 인구의 99% 가량을 홀로 독차지했고 전세계 인구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참고로 이때부터 약 100년 전인 1600년에도 이미 무굴 제국은 인도 전체 인구의 89%를 다스리고 있었고 세계 인구의 20% 가량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전성기 시절, 인구 급증과 함께 흔히 나타나는 현상들 중 하나인 급격한 도시화 현상이 함께 일어났다. 1600년 무굴 제국에서는 대략 전체 인구의 15% 가량이 도시에 몰려 살았으며 이는 동시대 유럽은 물론 몇 백년 후의 인도 제국 시기보다도 높은 비율이었다. 심지어 100년 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서도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이 13%에 채 미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무굴 제국의 도시화는 정말 엄청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다. 1700년에 무굴 제국은 총 2,300만 명이 도시에 거주했으나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전통적인 면방직 산업이 초토화되면서 대거 탈도시화 현상이 발생, 1800년에는 13%만이 도시 지역에 살았으며 1881년에는 더욱 하락하여 오직 9% 정도만이 겨우 도시에 거주했다.

9.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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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타고 라호르로 입성하는 황제와 그를 뒤따르는 기병들.[23]

무굴 제국군은 16세기에 처음으로 창설되었으며, 18세기 초에 가장 강대했다. 무굴 군대는 기본적으로 기동성이 좋은 기병 중심의 중앙아시아식의 군대였으며, 악바르 대제 시기에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제국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16세기 내내 명실상부한 인도 최강의 군대였다. 다만 타 국가들처럼 군의 지휘권이 황제에게 일원화되어있지가 않은게 큰 문제였다. '만사브'라고 불렸던 지방의 귀족들과 토후들이 스스로 모집한 군대를 끌고 올라와 황제 밑에서 종군하며 알아서 자신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방식이었기에 유럽이나 중국의 군대에 비하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굴의 상비군은 유일하게 황제 직속의 군대였으며, '아하디스'라고 불렸고 오직 황제의 측근들이나 친족들에게서만 뽑았으며 상당한 정예군이었다. 독자적인 규율과 지휘체계가 존재했으며 웬만한 엘리트 기병들보다도 봉급이 높아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하디스들은 보통 장교로 취급되어 행정 업무를 보면서 궁정이나 전장 사령부에만 머물렀고, 설사 실무를 본다고 해도 황제의 친위대나 궁정 경비대 등으로 주로 후방에서만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참고로 황제들은 이들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각기 개인용 말과 하인들을 부리게 해주었고 특권까지 주는 등 대우를 많이 해줬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상비군이 1억이 넘는 인구를 다스렸던 대제국치고는 그 수가 엄청나게 적은 편으로, 고작해봐야 수천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대규모 군대를 이끄는 원정을 할때에는 상비군이 아니라 지방의 토후들이 보내준 군사들을 동원해서 이들을 주력으로 삼고 전략을 짰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천밖에 안되는 상비군으로 지나칠 정도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말그대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악바르 재위기에 '만사브다르'라는 새로운 군사 정책을 도입하게 된다. '만사브다르'란 지방의 권력자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황제가 있는 곳까지 올라와 황제의 밑에서 싸우게 한 방식으로, 그들의 계급은 모집해서 끌고온 군대, 그중에서도 특히 기병의 규모에 달려있었다. 최소 10명부터 장교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며 최대 5,000명까지 군대를 끌고 올라오는 것이 가능했다. 5,000명 이상의 군대를 가지고 올 경우에는 지나치게 목소리가 강해져 황제의 명령이 잘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아예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참고로 황제가 그나마 믿을만했던 친족과 왕자들은 각자 25,000명씩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 장교들은 기병과 말의 비율을 1:2 정도로 항상 맞추어놓아 언제나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고, 특히 아라비아 품종의 말들이 인기가 많았다. 또한 코끼리나 소, 낙타처럼 운송용 가축들도 항상 대기시켜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병사들에게는 봉급을 은화로 받을 것인지 아니면 봉토를 하사받을 것인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당시 제국의 산업에서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터라 보통 병사들의 과반수 이상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선택했다.

무굴 제국군은 크게 4개의 병종으로 나뉘었다. 최정예이자 핵심 병력이었던 기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주력인 보병, 뒤에서 군사들을 엄호하는 포병, 그리고 마지막이 해군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병종 별로 통일된 단위였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고, 기병은 기병별로, 보병은 보병대로 각자 군대를 지휘하는 만사브(지방 권력자)들에게 각자 분배되었다. 덕분에 만사브들은 자신의 부대 내에 모든 종류의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전략들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반대로 전체적으로 보면 군대가 기능별로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험도 존재했다. 다만 오직 다루는 데에 많은 기술이 필요한 포병만은 예외였는데, 이들은 따로 부대를 만들어서 아예 하나의 사령관에게 맡겨버렸다. 전반적으로 군대의 핵심 전략은 포병이 대포로 적의 사기를 뒤흔든 다음, 기병이 달려가 혼란에 빠진 적들을 흩어놓고 보병들이 나머지들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아무래도 초대 황제인 바부르가 말을 중시했고 유목 생활이 강한 중앙아시아에서 넘어온 무굴 제국이다보니 기병이 가장 우대받는 경향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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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시기 무굴 제국의 기병. 무굴 군대는 군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황실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델리의 모스크로 향하는 악바르 2세

특히 기병은 주로 귀족층이나 만사브들의 측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보병이나 포병에 비해서 봉급도 더 좋았다. 당시 무굴 기병은 최소 2마리의 말과 1인의 시종을 데리고 다녔고 각기 부족을 상징하는 옷차림을 했다. 이덕에 무굴 군대의 군장이 통일되지 못했다고 한다. 주로 칼과 창, 방패를 들고 다녔고 가죽이나 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 유명한 코끼리 부대도 기병에 속했는데, 코끼리가 다루기도 힘들고 비싸다보니 오직 장군 정도는 되어야 코끼리를 전장에서 타고 다닐 수 있었다.[24] 이 코끼리들은 온몸에 쇠로 만든 칼날을 다는 등 중무장을 했고, 그 거대한 크기와 속도 때문에 데칸 지역의 저항 세력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줄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또한 행군 중에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포를 운반하는 등 요긴하게 쓰였다. 그 외에 사막에서 온 부족들은 낙타 부대도 운용했다고 한다.

반면 보병들은 황제 직속군이 아닌 이상 대우가 영 좋지 못했다. 이들은 규율도 떨어졌으며 장비도 기병에 비해서 너덜너덜했다. 사용하는 무기도 총부터 활, 창, 검까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구성원들도 용병들에서부터 시종과 예술가까지 지나치게 다원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보병은 기병과는 달리 보통 갑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사실상의 고기방패 취급을 받았다. 그나마 보병에서 전력이 될 만한 것이 바로 '반두치크'라고 불리던 총병이었다. 수도 가장 많았으며 근접전을 대비해서 총 외에도 칼이나 창을 항시 구비하고 다녔다. 총병외에도 활을 쏘는 궁병들도 운용했다. 물론 기병에 비해서 어중이떠중이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여서 목수나 솜 뽑는 사람, 청소부 등 온갖 직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사령관들도 이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대우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굴 제국 시기 전쟁에 관한 기록들 중 이들에 대한 큰 언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간혹 있다고 해도 큰 전과를 세운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보조해주던 것이 용병들과 전문 칼잡이들로 구성된 특수병종인 '샴셰르바즈'였다. 샴셰르바즈는 무장을 제대로 갖춘 중무장 보병이었으며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 보병들을 지휘하는 장교역을 맡았다. 일부는 황궁 경비를 맡거나 귀족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 전투 능력 하나만큼은 무굴 군대 내에서도 인정받았다. 대략 1만 명 정도가 있었으며 전장에서는 포병이 성벽을 두들겨 파괴해놓으면 그 곳으로 달려가 저항하는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핵심 임무였다. 참고로 대부분의 샴셰르바즈들은 수피즘 신도였다.

포병들은 전투 개전 직후 멀리서 적들을 두들겨서 사기를 꺾어놓는 역할을 맡았다. 나름 특수병종이었고 키우는 데에 돈도 많이 들어갔기에 대우가 보병보다는 좋았다. 다만 대포가 워낙 거대해서 코끼리들이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기동성은 꽝이었고, 열악한 대포 기술 탓에 대포알 장전 도중 터져버리는 등 인명 사고도 굉장히 많았다. 주로 거대한 헤비캐논과 조그만 소형 대포들을 다루었는데, 헤비캐논은 지나치게 커서 적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투 초반 몇 번 빼면 거의 쓸 데가 없었고 대신 말들도 끌 수 있는 소형 대포들을 중심으로 포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훨씬 우수한 대포를 가진 유럽 군대를 접하며 이들 역시 밀려나기 시작했고, 1700년대 중후반부터는 무굴 제국이 포병을 운용할 자금과 병력도 없었기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한편 무굴 해군은 4개의 병종들 중 최약체였고 주로 군수품을 운반하는 역할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제대로 된 군함은 한 척도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 해적들을 단속한 게 주요 공적일 정도?

한편 4개의 병종들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무굴 군사력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던 것이 바로 '체라'라고 불렀던 노예 병사들이다. 주로 전쟁에 참가하는 상인들이 사들여 데리고 왔으며, 사기도 높지는 않았으며 실력은 주인별로 천차만별이었다. 이들의 주 목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군사령관의 말보다 주인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기근에 시달리는 가정들에서 어린아이들을 싸게 사들인 상인들이 자비를 들여서 이들을 어릴 때부터 먹이고 재우며 훈련시킨, 일종의 사병이었으며 이들에게는 같은 처지의 노예들을 제외하면 집도 형제도 없는 처지였다. 절대다수가 힌두교도였으며 사령부에서는 체라들을 반쯤 소모품 취급했다. 전투력이 썩 그닥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앞장세우지도 않았고,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킬 생각도 없었다. 대신 군수품 운송이나 막사 건설 등 막노동에나 간간히 써먹었다고 한다.

10. 경제

샤 자한 재위기의 무굴 제국은 당시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1위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당대 중국은 한창 명청교체기로 인하여 경제가 파탄난 상황이었고,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던 반면에 무굴 제국은 샤 자한 사후 경제가 퇴보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2위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굴 제국은 여전히 강성했으며, 1638년부터 1672년까지 약 30년에서 40년 정도는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마우리아 왕조 이래 약 2,000여 년만에 전 인도를 정벌한 무굴 제국은 인도 전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낼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인도 대륙의 경제 성장률은 수직상승했다. 1600년 당시 무굴 제국의 경제규모는 전세계의 22% 정도를 차지하면서 중국의 명나라와 근소한 격차로 2위의 대국으로 남았으나 1600년대 중반에 들어 자한기르와 샤 자한의 재위기에 본격적인 경제 진흥 정책들을 피면서 1630년대에는 마침내 제 1의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으며 1700년까지도 전세계 GDP의 24%나 되는 비율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18세기 내내 전세계의 공업 생산량의 25%를 생산해내고 있었으니, 일부 경제학자들은 무굴 제국의 이 시기를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유럽의 경제 구조와 상당히 유사했을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무굴 제국은 셰르 샤 수르 시기에 그가 도입했던 화폐들을 그대로 이어서 도입하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은화인 루피(rupee)를 사용했으며, 동화인 댐(dam)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던 화폐는 댐이었으며, 악바르 초기에는 1루피가 약 48댐 정도였다. 그러다가 점차 대포 주조 등 구리의 수요량이 많아지면서 댐의 가치가 상승했고, 1580년대에는 1루피가 38댐 정도로 환산되었다. 이후 제국 정부에서 은화인 루피를 대거 발행하면서 나중에는 댐 대신 루피가 가장 대중적인 통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반면 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자한기르의 재위기에는 1루피가 28댐 정도였으며 1660년대에는 16루피 수준으로 그 가치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한편 무굴 제국의 동화는 그 순도가 매우 높아서 순도가 96% 밑으로 잘 떨어진 적이 없었으며 1720년대까지도 질적 저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

무굴 제국은 도로 확충을 통한 상업 장려 정책을 펴기는 했지만 일단 근본적으로 완벽한 농업 국가였다. 무굴 제국의 세수 75% 가까이가 농민들에게서 걷혔으며 이때문에 역대 황제들도 농업에 많은 신경을 썼다. 주로 밀과 쌀, 보리 같은 기본 주식용 곡물들이 가장 많이 재배되었으며, 목화와 인디고[25], 마약 겸 약재로 쓰였던 아편 등 상품 작물들도 많이 길러 팔았다. 또한 17세기 중반에는 북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담배옥수수 등도 기르기 시작했다. 무굴 제국은 샤 수르의 정책을 본받아 농지 개혁을 실시했고 농민 공동체를 만들어 수확량에 따라서 정부에서 성과급을 지급하게 하는 등 농민들의 효율화에 애썼다. 또한 수로망을 확충하여 전국에 저수지와 관개도를 파내었고, 덕분에 인도의 토지 생산성은 이전의 몇 배로 폭증할 수 있었다. 특히 악바르 대제는 이전까지 인도에서 흔한 조세 방식이었던 공납과 공물을 폐지하고 대신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로 세금을 내도록 하는 개혁을 펼쳤고, 사탕수수, 아편, 솜 등 수익성이 높은 생산물에 대한 세금을 일부 감면해주면서 공급량을 늘리고자 하기도 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들을 재측량하였으며 황무지를 개간한 농부들에게는 일정 기간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새로운 농지 개발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같은 농업 장려 정책을 통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최소한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까지 쭉 이어졌으며 덕분에 인구도 크게 늘 수 있었다.

당대 무굴의 농부들은 동시대의 타국 농부들에 비하여 농업 기술도 뛰어났다. 기본적으로 파종 기술이 심지어 동시대의 유럽 농노들보다도 더 우위에 있었고, 동아시아나 유럽에서는 한 사람이 보통 하나의 작물만을 길렀던 것에 반하여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작물들을 동시에 기르기도 했다. 게다가 담배나 옥수수와 같은 새로운 작물들을 해외에서 수입하여 빠른 속도로 개량, 확산시키는 등 신품종에 대한 적응력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던 농부들의 막강한 생산력 덕에 전성기 시절 무굴 제국의 식량 가격은 타국에 비하여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고, 식량 걱정이 없어지자 직물 산업 같은 부가적 산업들이 번창하고[26]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 임마누엘 왈러스타인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 시절 전성기의 무굴 제국의 농업 생산성은 이미 타 아시아 국가들과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기근과 약탈로 인해서 생산력이 크게 떨어졌던 인도 제국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 덕분에 당시 남인도 지방의 밀 값은 영국과 비교했을 때에 절반 수준이었고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방의 밀값은 3분의 1도 안됐다. 이는 인도 면직물들의 저렴한 가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27] 무굴 제국의 면직물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28]

이러한 수공업 경제에는 인도의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도 어느정도 기여했다. 영국식 4단계가 아니라 전통적 카스트는 정교한 사회적 분업체계인데,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어릴때부터 그 기술만 갈고닦으니 수공업 장인들의 기술력이 사회적 분업과 맞물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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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벵골의 시가지 1700년 델리의 개선식 모습
무굴 제국 전체에서 가장 부유했던 곳은 바로 벵골 지방을 다스리는 벵골 수바였다. 벵골 지방은 무굴 군대가 1590년대에 정복한 이후 1757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최고의 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며 한때는 홀로 제국의 세수 절반을 감당하기도 했다. 쌀, 비단, 면직물 등 온갖 상품들을 쏟아내었으며, 유럽으로는 질산칼륨, 인도네시아로는 아편, 일본과 네덜란드에는 비단을 수출했고, 그 외에도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방과도 활발히 거래를 트고 번영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특히 악바르 황제가 벵골 지역의 정글들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바꾸고 수피즘 신자들을 데려와 이를 가꾸도록 하면서 식량 생산량이 폭증하면서 벵골은 완벽한 제국의 경제 중심지로 변모할 수 있었다.

벵골 지역에서는 소금, 과일, 술과 같은 식료품 생산도 꾸준하게 이루어졌으며, 왕실에 납품하는 용도의 최고급 카펫이나 태피스트리들도 바로 이 곳에서 만들어냈다. 벵골 지방은 이같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황제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벵골의 나와브[29]가 독자적으로 서양의 거래소와 무역소들을 연이어 개설하면서 서구와 엄청난 양의 교역을 하며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다만 영국이 인도를 장악한 이후 지나친 수탈을 벌이며 경제력이 급강하했고 벵골 대기근 등 역사에 기록될 만한 재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벵골의 경제력 위상 역시 추락하였다.

참고로 무굴 제국의 1600년 기준 1인당 GDP는 1990년대 달러화 기준으로 약 682달러 정도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무굴 제국의 규모가 최대였던 1650년대에는 오히려 1인당 GDP가 638달러로 하락하였으며, 이후 무굴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파탄났던 1750년대에는 573달러까지 하락했다. 이후 인도의 GDP는 무굴 멸망 직전인 1801년에는 569달러까지 하락했고 영국의 식민지배 초기에는 510달러까지 추락하는 등 난맥상을 보이다가 1870년대에야 겨우 520달러대를 회복하는 등 처참한 지수를 내었다. 참고로 영국의 1600년 기준 1인당 GDP는 1,123달러였고, 1750년에는 무려 1,710달러로 훌쩍 뛰어오른다. 그리고 산업 혁명이 본격화된 이후인 1870년에는 3,657달러를 찍어버리는 등 인도를 완전히 압도하게 된다. 다만 이를 그대로 믿으면 안되는 것이, 이건 그냥 명목상으로 환산한 것일뿐 PPP기준으로 재환산하면 무굴 제국의 GDP가 조금 더 올라가기는 할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에 영국보다 전반적으로 빈곤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10.1. 직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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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최대의 산업은 직물 제조업, 그 중에서도 목화를 이용한 을 주로 만들어냈다. 세계 최고급의 원단들을 만들어냈으며, 옥양목이나 흰 무명, 무슬린부터 시작해서 고운 비단까지 온갖 종류의 옷감들을 생산하여 전세계에 수출하곤 했다. 인도는 18세기 초에 전세계 면직물의 25%를 생산해내는 세계 최대의 면직물 대국이었으며 인도산 옷감들은 17세기와 18세기 이래 북아메리카에서부터 일본까지 세계적인 고급 사치품이자 인기 상품이었다. 특히 무굴 제국에서 가장 번영하던 벵골 수바 지방을 중심으로 직물 산업이 발전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벵골의 주도였던 다카는 이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황금과 재물이 넘쳐나는 도시라는 명성을 얻기도 할 정도였다.

벵골에서는 당시 네덜란드가 아시아에서 실어나르던 직물들의 50%, 비단의 80%를 단독으로 생산해내고 있었다. 특히 유럽 상류층들에게서 인도산 옷감들을 사용한 옷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인도의 면화물들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무굴 제국은 이 인기를 노려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인도산 직물들은 인도양 무역의 최고 중심 상품이었고 대서양 무역에서도 빠질 수 없었던 필수품이었으며 심지어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무역까지 장악할 정도로 그 가치가 높았다. 인도 옷감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700년대 초에는 영국이 남유럽 지방에서 거래한 품목들 중 20%가 모두 인도산 비단과 면화물일 정도였으니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무굴 황제들은 델리 술탄국 시절 발명된 인도식 물레를 제국 전역에 보급하면서 면직물의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고, 적극적인 생산 장려책을 펼치면서 방직 산업은 인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30]

10.2. 조선업

참고로 이 벵골 지방은 직물업 뿐 아니라 조선업 등으로도 굉장한 돈을 벌어들였다. 이 시기만 해도 오히려 인도의 조선 기술이 유럽을 능가하기도 했고, 유럽의 조선기술을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갑판 기술이나 발달된 용골 기술들을 통하여 유럽식 배보다도 성능이 좋았다. 덕분에 영국은 인도 정복 후 이 기술들을 차용하여 자국의 상품들을 실어나를 무역선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마하라슈트라 지방에 있던 와이다 사를 예로 들 수 있다. 파르시 출신의 노지 누스루완지 와이다를 창업주로 하는 와이다 사는 1736년부터 봄베이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함선을 납품하며 성장했고, 1750년에는 아시아의 첫번째 드라이 독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봄베이 조선소는 영국 식민제국의 주요 조선소 중 하나로서 미영전쟁 당시 프랜시스 스콧 키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미국의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HMS 민덴 함, 아편 전쟁 당시 난징 조약이 체결된 전열함 HMS 콘월리스 함이나 블랙프린스급 전열함 HMS 웰즐리 함[31] 등의 수많은 영국 해군 함선들을 건조했다. 그리고 와이다 가문이 제작한 선박의 진수식에서는 설계자가 은제 못 하나를 함선의 용골에 직접 박아 넣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는 배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들의 의식이었다. 당시 건설된 뭄바이 조선소의 드라이 독 또한 일부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11. 문화

현재의 서아시아 일부와 중앙아시아 지방에서부터 인도까지 드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무굴 제국 시기, 인도에서는 전통적인 북인도 문화와 남인도 문화, 페르시아 문화부터 투르크계 문화까지 뒤섞이면서 가히 인도의 예술적 르네상스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한 문화 발전을 이룩해낸다. 특히 악바르 대제부터 시작하여 자한기르 황제와 샤 자한 황제는 예술계에 막대한 양의 후원금을 퍼부었고 그의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 황제도 정복 활동 때문에 빛이 바랬다 뿐이지 실제로 동시대의 타 군주들에 비하면 훨씬 많은 비율의 자금을 예술 진흥에 투입하면서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인도 전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면서 사람들과 도시들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먹고살만해지자 자연스레 문화예술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고, 무굴 제국이 약 100여 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기에 오랜 기간 동안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이 발전했던 것이 바로 건축 분야였다. 건축에 미쳐있다시피 했던 샤 자한 황제가 타지마할이나 아그라 성, 라호르 요새 등 대규모 공공건물들을 축조하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인하여 살짝 정체되어 있던 인도의 건축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1.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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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타지마할의 전경 델리붉은 요새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32]
가히 인도 역사상 최고의 발전을 이루어낸 분야이다. 무굴 제국 시기 들어서 인도의 건축 양식과 페르시아, 그리고 아랍에서 들여온 이슬람 건축 양식이 짬뽕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무굴 건축의 주요 특징으로는 백색 대리석과 적색 사암의 빈번한 사용,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극히 화려한 기하학적 문양의 사용, 4면으로 거대한 정원으로 둘러싸인 모스크들과 궁전들, 주 건물 앞에 세워놓은 압도적인 크기의 정문, '차트리(Chhatri)'라고 하는 지붕 모서리 등에 세워졌던 높게 솟은 돔 형태의 건축물들, 건물 벽면에 돌출된 폐쇄형 발코니를 의미하는 '자로카(Jharokha)' 등이 있었다. 또한 타지마할 등에서도 사용되었듯이 이중식 양파형 돔을 지어내는 등 건축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으며 '잘리'라고 부르는 극도로 정교한 석재를 깎아 만든 창문을 달기도 하는 등 현대인이 봐도 경탄할 만한 기술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무굴 제국의 건축가들은 건물 못지 않게 이를 둘러싸고 있는 정원을 매우 중요시했다. 당시 이슬람식 정원에는 크게 3개의 풍조가 있었는데, 모래로 뒤덮인 사막 속에서 정원을 휴식공간으로 여겼던 아랍의 전통, 정원을 4개로 나누고 도보 등을 설치하여 사색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페르시아의 전통, 정원을 휴식과 야영의 공간으로 보고 그 한가운데에 텐트 등을 설치했던 투르크의 전통이 모두 무굴의 정원에 녹아들어갔다. 덕분에 이 시기에 정원의 조경법과 배치법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를 '차르바그'라고 하여 '무굴식 정원'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는 천국에는 이를 둘러싼 4개의 정원이 각방위에 하나씩 존재한다고 나와있다. 또한 4개의 정원들이 서로 만나는 경계에는 생명의 상징인 물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들이 서로 만나는 중심지가 바로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며 축복의 근원이라고 여긴다. 이슬람을 신봉하던 무굴의 건축가들은 천국을 지상 위에 재현하겠다는 의미로 4개의 정원들을 핵심 건축물 주변에 동서남북 방향으로 1개씩 짓고 물길을 내었던 것이다.[33] 특히 초대 황제인 바부르는 습하고 더운 인도에 거주하면서 시원한 장소를 찾고자 했다. 바부르는 녹음을 가장 찾기 쉬운 정원을 도피처로 삼으면서 정복지 곳곳에 정원의 건설을 장려하였으며 샤 자한 대에는 폭포나 물길을 터서 심미적인 효과를 함께 내는 등 정원의 중요성이 더더욱 부각되었다.

무굴 건축의 정점을 알리는 건축물이 바로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샤 자한 황제가 자신의 사별한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중앙의 돔의 크기만 높이 35m, 지름 18m의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면서 동시대 유럽인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타 왕국과 영국에게 모든 것이 털려버린 현재와는 달리 제국의 전성기에는 건물 곳곳에 에메랄드루비, 다이아몬드 등 값비싼 보석들이 수도 없이 박혀있었고,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등 그 호화로움도 이전의 건축물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백색 대리석에 홈을 파낸 후에 그 홈 사이에 검은색이나 적색 대리석을 똑같이 깎아 채워넣는 등 섬세한 기법들을 사용했고, 앞서 언급한 잘리 기법을 활용하여 울타리나 창문들을 현대인들이 봐도 놀라울 정도의 정교함으로 깎아내는 등 무굴 건축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거대한 황궁인 델리의 붉은 요새와 아그라 요새 등이 지어지기도 했으며 후마윤악바르의 묘 역시 그 아름다움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샤 자한이 세웠던 샬리마르 정원, 아우랑제브 재위기에 만들어진 바드샤히 모스크 등은 세계유산에 지정되기도 했을 정도이다.

11.2.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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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경 주조된 금속 천구 모형[34] 대포를 발사하는 무굴의 포병 무굴 제국의 다연발 기관포 모형
무굴 제국 시기 인도에서는 아랍의 뛰어난 이슬람 학문들과 인도의 진보한 수학 체계가 활발하게 뒤섞이면서 학문적, 기술적 발전이 많이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자신들을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했던 무굴 초기의 황제들은 하늘의 뜻을 살핀다는 이유로 천문학과 점성학에 관심이 많았다. 후마윤은 델리 근교에 개인용 천문대를 만들어 별들을 관찰하기도 했고, 자한기르샤 자한 역시 따로 천문대를 지으려 하였으나 예산이 부족해서 못지을 정도로 천문학에 관심이 지대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무굴 천문대들은 대부분 아랍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설계에다가 인도의 계산 방식을 적용해서 쓰고 있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아랍 천문학자들이 천문의 운행을 관찰해왔고, 인도의 정교한 산술법이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내다보니 오히려 동시대 유럽보다도 일진보한 면이 있었다고. 참고로 이시기의 저명한 천문학자 알리 카시미리 이븐 루크만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천구 모형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900년대 중반까지도 이 천구 모형이 만들어진 것처럼 이음매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속이 빈 구를 금속으로 주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극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35] 무굴 제국의 천문학자들은 악바르 시대의 역사서인 '악바르나마'에 1577년에 관측한 대혜성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도 했고,[36] 1618년에도 대혜성 C/1618 V1과 혜성 C/1618 W2를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기록하는 등 천문학적인 성과도 다수 남겼다.

악바르 시기의 공학자이자 발명가였던 파툴라 시라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관포를 처음으로 발명한 인물이다. 이전의 그리스와 중국에서 사용되던 자동식 화살 발사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기관포로, 화약으로 찬 통을 회전시켜가면서 다연발 포탄을 쉬지 않고 쏘아댈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신무기의 성능을 단번에 알아본 악바르 대제는 이 기관포를 싣고 다닐 수 있는 수레를 만들어 인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때에 유용하게 써먹었고, 이 신무기는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던 마이소르 왕국의 기록에도 남아있을 정도로 전장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이소르 왕국은 무굴 제국과 싸웠던 시절의 경험을 잊지 않고 이 기술들을 어느 정도 보존하는 데에 성공해서 강철로 만들어진 실린더에 화약 등을 넣은 원시적인 형태의 로켓포를 만들어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도 사용했다. 다만 그때는 이미 서양의 발달한 화포들과 무기들이 너무 많이 유입되어 있었고, 결정적으로 화력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보니 이전만큼의 효과는 뽑아내지 못했던 모양.

한편 화학 분야에서도 나름 선구자들이 등장했다. 화학자 세이크 딘 마호메드는 염기와 알칼리 물질들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서 초기 형태의 샴푸를 만들어 황제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그 명성이 서양까지 퍼져서 영국의 조지 4세윌리엄 4세에게까지 직접 만든 샴푸를 올릴 정도로 효능이 좋았다고 한다.

11.3.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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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은 책 속에 글과 함께 삽화를 넣었다 페르시아어 시집
인도의 문학은 무굴 제국 시기에 들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최고의 힌디어 고전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툴시다스(तुलसीदास)'가 바로 이 무굴 제국 시기에 활동했다. 툴시다스는 힌두교 신자로서 비슈누의 화신인 라마찬드라의 일대기를 정리하여 재집필하고 산스크리트어와 아와디어로 종교적인 시들을 짓는 등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무굴 제국이 궁정어로 페르시아어를 채택하고 이를 장려하면서 페르시아 문학이 큰 발전을 이루었고, 사람들에게 문학작품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기 다른 지방언어들로 씌어졌던 작품들을 모두 페르시아어힌디어로 번역하여 전역에 퍼뜨림으로써 인도 문학의 확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당시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문학과 시에 능통한 것이 엘리트층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궁정의 대신들과 황제들은 너나할것 없이 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다. 덕분에 페르시아어 문학은 예술을 사랑했던 악바르 황제의 시기에 그 정점을 찍었고, 무굴 제국의 행정체계를 기록한 '아인 아이 악바리', 인도의 무슬림 역사를 다룬 '문타캅 울 타와리크' 등 페르시아어로 작성된 서적들이 여러 권 편찬되기도 했다. 또한 후대의 자한기르 황제가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라마야나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라즈마나'를 편찬했고, '바부르마나'와 '악바르마나'와 같이 선황들의 일대기를 담아 미화한 역사책들도 대거 찍어내었으며 샤 자한 황제와 아우랑제브 역시 악바르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여전히 문학에 많은 관심을 들였다.

한편 산스크리트어는 힌두교의 제례에 사용되던 유서깊은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을 믿었던 무굴 제국 시기에 상대적으로 문학적으로 큰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다만 이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을 뿐이지 여전히 힌두교를 신봉하던 인도 동부와 남부의 영주들은 산스크리트어 문학가들을 계속 후원하였으며 덕분에 '시링가 다르판', '히어 슈바감' 등의 시집들이 등장하였으며 '파르시 프라카시'라는 이름의 산스크리트-페르시아어 사전이 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어려운 산스크리트어 앞에서 쩔쩔매던 타 문화권을 사람들도 산스크리트 문학을 한층 더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13대 황제인 무함마드 샤우르두어 시인을 자신의 궁정에 초대하여 시를 듣기도 했고, 이후 북인도 지방에 우르두어가 널리 퍼지면서 우르두 문학 역시 번성한다. 무굴 제국의 시기에 지어진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가사와 운율이 한결 더 정형화되어 있었으며 시와 문학작품들의 일반적인 길이도 더 길어졌다고 한다.

11.4.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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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알현하는 황제 샤 자한뭄타즈 마할[37] 붉은 요새의 알현실과 공작좌
무굴의 회화는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로 페르시아 회화를 기반으로 인도 전통 회화가 혼합되어 있었다. 무굴 황제들은 당시 문맹이 많았던 인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회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덕분에 무굴의 회화는 단순히 인도 북부에만 머물지 않고 상대적으로 제국의 영향력이 약했던 남인도 지방까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무굴 멸망 후의 인도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굴 제국 시기 회화는 라지푸트 양식의[38] 영향을 받아 페르시아의 그림들보다 훨씬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그림 뿐만 아니라 그 주변 테두리 부분에 엄청나게 화려한 장식들을 넣어 그림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궁정 사회, 사냥, 전투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의 풍경들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내었다. 특히 인물의 초상화의 경우 서양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전보다 사람의 표정이나 세세한 부분들을 더욱 자세히 묘사하기 시작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얼굴은 옆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몸은 절반쯤 감상자 쪽으로 약간 틀고 있는 자세를 해서 많이 그렸다.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주로 고위 관료나 황제들이었다. 여성들이 초상화를 의뢰하는 경우는 황궁의 지체높은 여성이나 귀부인들이 아니면 매우 드문 편이었다. 특히 악바르 대제가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이 그림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언을 받고 있는 듯한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후대의 황제들도 이같은 전통을 본받아 자신의 머리 주위에 후광을 그려넣는 등 스스로의 신성화에 써먹었으며 자기자신을 알라의 대리자로 묘사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특히 발코니 아래에 모인 군중들을 바라보거나 그들에게 은혜를 내리는 듯한 구도가 많이 차용되었다.

무굴 제국 시기의 유명한 화가들에는 후마윤의 재위기에 활동했던 아브드 알-사마드와 미르 사이드 알리, 악바르 대제 때 활동했던 파루크 베그와 다스완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궁정화가들로, 주로 황제를 찬양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으며 황제가 후궁들과 함께 노니는 모습까지 그리기도 했다. 참고로 무굴의 궁정화가들은 3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함께 활동했다. 1그룹의 고참 화가가 1차로 주제와 구도, 색감 등 기본적인 것을 정하고 나면 2번째 그룹의 화가들이 옷과 배경의 색 등을 칠했고, 마지막으로 가장 실력이 뛰어났던 3그룹의 화가들이 그림의 인물의 얼굴과 표정들을 따로따로 그려넣었다고 한다. 이같은 제작기법은 무굴 제국에서 '바부르나마'나 '악바르나마'와 같이 대규모로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이에 들어갈 삽화들을 그릴 때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11.5.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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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황궁 여인의 복식 겉옷 '자마'를 걸친 부자의 모습[39] 후궁의 초상화
무굴 제국의 사람들은 당대 인도가 세계적인 옷감의 생산지였던만큼 기본적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무슬린, 실크, 벨벳 등으로 옷을 만들었으며 곤충이나 , 안티모니 등에서 추출해낸 염료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색을 넣은 다음 점무늬, 줄무늬, 전통문양 등으로 다양하게 장식을 넣어 꾸미기도 했다. 남성들은 손목에 띠가 있어 손목을 조이는 형태의 의복인 '파트카'를 입은 후 그 위에 겉옷인 '자마'를 걸치는 것이 보통이었고,[40] 자마 아래에는 '파이자마'라고 하는 바지를 입었으며[41] 머리에 터번을 둘러 마무리했다.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사리를 입고 다녔으며, 그 외에 손목과 허리가 연결되어 있는 '샬와르', 좁은 바지인 '츄리다스', 후드가 달린 외출복인 '가라라' 등을 입고 다니며 보석이나 장신구로 호화롭게 치장하고 다녔다.

당시 여성들의 복식 유행은 황실에서 주도했다. 황궁의 여인들은 무려 16단계에 걸치는 미용 관리를 받았으며 '카잘'이라고 부르는 석탄으로 만든 마스카라를 칠하고 치아를 하얗게 표백하고 다녔다. 코에는 '나스'라고 부르는 피어싱을 달아 그 위에 다이아몬드 등 값비싼 보석들을 달았고[42] 베틀후추를 갈아 입술에 발라서 입술을 붉게 만들뿐만 아니라 입에서 향긋한 향이 나도록 했다. 공주들은 매일 공들여 그린 붉은색 헤나로 손과 발을 물들이고 다녔다.[43]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는 보석 세공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상류층의 여성들이 보석들을 이용해서 몸을 꾸미고 다녔다. 당시 부유한 여성에게는 최소 8종류의 장신구가 있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할 정도로 사치를 즐겼다. 인기있던 장신구들 중에는 주로 팔꿈치 위쪽까지 올려서 차는 팔찌, 진주로 만들어진 3겹의 목걸이, 반지, 그리고 조그만 태양이나 별, 달의 형상으로 세공하여 이마 앞쪽으로 내려뜨려 달고 다니게 만든 보석류 등이 있었다.

터번에 화려한 보석을 장식하는 것은 오직 황제의 특권이었다. 때문에 황제들마다 취향에 따라 터번을 각기 다르게 장식했는데, 악바르 대제의 경우 페르시아식으로 터번의 이마쪽 부분에 큰 깃털 하나와 보석류들을 다는 게 취향이었고, 자한기르 황제는 거대한 깃털과 함께 진주를 다는 것을 좋아했다. 한편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검소함을 지향했던 아우랑제브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의 터번에 장신구 하나만 얹는 정도에 만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남성들도 터번을 장식하고 다녔고 '지그하'나 '사르파티', '투라'나 '칼랑기' 등 다양한 장식물들을 이용해서 터번들을 각기 취향에 맞게 꾸몄다. 여성들도 머리 장식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마찬가지라서 머리에 얇은 실크 천을 두르고 그 천을 화려한 자수로 장식한다든가 루비에메랄드, 황금 등으로 돋보이게 하는 등 머리장식에 엄청나게 신경을 많이 쏟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목걸이나 귀걸이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이 하고 다녔고, 다만 코걸이만은 오직 여성만이 하고 다녔다.[44]

무굴 제국 초기 궁정 여성들은 이슬람 율법으로 인하여 궁궐에 갇혀 살았다. 이때문에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유행을 탈 여유가 없었기에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페르시아 복식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점차 무굴 제국이 확장하면서 라지푸트나 지역 등 인도의 타 지역들과도 교류가 잦아지고 여성들의 사회 출입이 어느 정도 용인되면서 이들의 옷차림 역시 바뀌기 시작했다. 바부르후마윤의 궁정에 살던 여성들은 통이 넓은 바지에 목 부분이 조이거나 V자 모양의 헐겁고 얇은 상의를 입고 다녔고, 기다란 소매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악바르 시절에는 본격적으로 힌두교식 의상들이 전래되면서 무슬림 여성이나 힌두교 여성이나 너나할것 없이 비슷한 옷을 입고 다녔다. 이 시기에는 주로 얇은 옷들을 겹겹이 둘렀으며 상체에 딱 붙는 옷들을 입었고 한때 남성들만 입던 상의인 페샤와즈를 여성들도 입기 시작했다. 옷들은 대부분 무릎이나 그 아래까지 내려왔고, 발목 부분은 타이트하게 조여 입었으며 목라인은 V자 모양이었다. 다만 무슬림 여성들은 바지를, 힌두교 여성들은 치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둘다 진주나 황금 등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다녔다. 게다가 옷감은 오직 최고급 비단과 벨벳만을 사용했기에, 거의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다고 하며 황금으로 만들 실로 자수를 넣어 다녔다고 한다.

12. 평가

무굴 제국에 대한 평가는 꽤나 상반되는 편이다. 일단 긍정적으로는 거의 2,000년 만에 인도를 재통일한 대제국이며 1600년대에 걸쳐 상당히 오랜 전성기를 누린 제국이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존속 기간 절반 가까운 세월을 허수아비로 보내고 결국 영국에게 멸망한 정권에다가 지나친 이슬람 우월주의로 타 종교인들을 탄압한 제국이라는[45] 시각도 존재한다.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무굴 제국의 인도 통합을 제일의 업적으로 꼽으며 마우리아 왕조 이래 수없이 분열되고 갈라져 반목을 거듭했던 인도를 통일, 전성기 시절에 경제적으로 막대한 발전을 이루어낸 점을 부각한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이슬람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전반부 내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힌두교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특히 악바르 대제 시절에는 종교의 관용을 펼치면서 하나된 제국을 형성하려 들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자한기르샤 자한 등 명군들이 예술에 막대한 후원을 퍼부으면서 현대까지도 인도가 자랑하는 전통 건축물들과 미술품, 공예품들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좋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무굴 제국이 대대적인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친 것은 오직 악바르 대제 시절 한정이었으며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 등 후임 황제들은 타 종교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등 지나친 이슬람 우월주의를 내세우면서 제국의 분열을 자초했다. 사실상 이게 무굴 제국이 인도의 무슬림들을 제외한 후대 인도인들에게 욕을 가장 많이 들어먹는 이유다. 게다가 지나친 팽창정책으로 인해서 기껏 얻어낸 영토들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들이 끊이지 않았기에 단순히 지도에 표시된 거대한 영토를 보고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이나 청나라처럼 그 땅이 온전히 황제의 통치력이 미쳤던 곳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46][47] 그 외에 무질서한 제위 계승을 통하여 국력을 스스로 깎아먹은 것도 무굴 제국이 비판받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장자계승원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굴 제국에서 역대 황제들은 모두 즉위할 때에 형제들이나 친척들의 반란을 겪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같은 끊임없는 내전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에 제살 깎아먹기였을 뿐이었다.

무굴 제국의 무능함 역시 비판적인 요소로 꼽힌다. 1750년대 이후의 무굴 제국은 망해가는 것을 간신히 간판만 부여잡고 있는 수준으로 추락한 상황이었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 외세가 침략하는 도중에도 인도의 중앙정부로서 근대화나 산업화에 제대로 나서지는 못할 망정 제 앞가림을 하기에도 급급했다. 그 와중에 제위에 대한 반란이나 궁정 암투는 끝이 없었고 이미 다 망해가는 18세기 후반에도 황제들이 갈아치워지고 델리의 귀족들이 사사로이 외국과 결탁하는 등 무굴 제국 말기의 모습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이건 당시 인도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무굴 정부는 이미 1720년대 즈음에 인도 전역에 대한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주변의 군벌에게 떠밀려다닐 정도로 망한 상태라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는 않았던 상태였다.

인도 사람들의 평가는 지역과 황제들에 따라 큰 폭으로 갈린다. 예를 들어 수도였던 델리 주변의 사람들은 무굴의 수도이자 제국의 중심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반면, 무굴 제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인도 남부 지방의 주들에 사는 인도인들은 반대로 자신의 선조들이 무굴에 굴하지 않고 독립을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품는다. 또한 힌두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의 특성 때문에 황제들에 따라서도 평가가 나뉜다.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악바르 대제는 인도의 교과서에도 긴 분량이 실릴 정도로 호평이 많고, 가히 인도 역사상 아소카 대왕과 함께 최고의 명군들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그 평가가 대단히 후하다. 그러나 악바르에 비하여 힌두교를 탄압한 후대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자한기르는 아편 중독자로[48] 술과 여자에 탐닉한 황제로 묘사되며, 샤 자한타지마할 등 아름다운 건물들을 후대에 남기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부들을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정을 파탄낸 황제로 취급한다. 특히 아우랑제브에 대한 평가가 말 그대로 최악이다. 아우랑제브가 힌두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인지 영토 확장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도 내에서는 완벽한 폭군 취급을 당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를 악마화한 조각상이 인도 시내에 전시되어 사람들의 욕을 들어먹을 정도이니 인도인들이 아우랑제브를 얼마나 혹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49] 한편 아우랑제브 이후의 황제들은 웬만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별 관심도 없다. 그나마 최후의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정도가 유약하고 무능한 허수아비 정도의 인상으로 남아있다.

반대로 파키스탄 사람들은 무굴 제국에 대하여 꽤나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슬람교가 국교인 파키스탄인만큼 무굴 제국이 힌두교도들을 탄압했다고 해서 딱히 이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오히려 인도와 앙숙인 만큼 이같은 힌두교 탄압 정책을 좋아하기까지 한다.[50] 그리고 무굴 제국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고 약화됨에 따라 인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영국 등 식민 열강들에게 패망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아우랑제브가 당시 인도 남부의 힌두교를 믿는 소왕국들을 더 효과적으로 밀어붙였어야 한다고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덕분에 파키스탄 역사 교과서에는 당당하게 무굴 제국이 자한기르나 샤 자한 시기에 대대적인 문화 진흥을 이루었던 파키스탄-인도 지역의 황금기라고 기재되어 있고, 바부르 미사일이나 압달리 미사일 등 무굴 황제들의 이름을 자국의 신형 미사일에 붙일 정도로 무굴 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파키스탄 사람들처럼 이슬람교가 주류 종교이지만 조상의 나라인 벵골 술탄국이 무굴 제국에 합병되어 멸망한 것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방글라데시에서 무굴 제국을 좋게 평가하는 이들도 대부분 소수의 무하지르, 비하르인, 펀자브인, 신드인이고 주류 민족인 벵골인[51]과 불교가 주류 종교인 줌머족은 무굴 제국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 게다가 훗날 서파키스탄(파키스탄의 전신이자 무굴 제국의 후신)이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의 전신이자 벵골 술탄국의 후신)의 벵골 문화를 심하게 탄압한 점 또한 방글라데시의 벵골인이 무굴 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 영향을 줬다. 물론 무굴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별개로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가 영국에 저항한 것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무굴 제국과 무관했던 인도문화권 국가인 네팔, 스리랑카, 몰디브에서는 무굴 제국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네팔의 경우 일부 영토가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긴 하나 그 영토조차 무굴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저 변방일 뿐이었고, 문화적 측면에서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와 같은 수준으로 무굴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도 아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티무르 제국을 자신들의 전신으로 여기고[52] 무굴 제국이 티무르 제국의 망명 왕조인 만큼 무굴 제국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다. 다만 우즈베키스탄이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세속주의 성향이 강해서[53] 아우랑제브의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13. 기타

  • 동시대에 명나라청나라가 무굴 제국의 북동쪽으로 영토를 뻗었는데, 만약 두 국가가 붙었다면 전쟁사 중 세기의 대결로 평가받았겠지만, 그 영토 사이에 거대한 히말라야산맥이 사이에 있어[55] 별다른 영토분쟁 없이 그냥 무역만 하고 지냈다. 현대의 중국과 인도 사이에 영토분쟁이 극심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
  • 무굴 제국은 몽골 제국과의 혈연성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었고, 실제로 시조 바부르의 5대조인 티무르차가타이 계통[57]이었으며, 티무르 제국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 아래에 있었다. 티무르 제국의 명목상 군주 ''의 칭호를 취하고 있었고, 여타 다른 몽골 계승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칸'은 오로지 몽골의 황금씨족(칭기즈 칸의 직계 남자 후손들)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티무르' 제국에서 티무르는 '칸'이 되지 못했으며 티무르의 정치적 지위와 그 정당성은 칭기스 일족(황금씨족)의 부마(사위, güregen)라는 점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티무르는 이슬람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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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미권에서는 중국의 황제가 앉는 왕좌를 '용좌(Dragon Throne)', 조선의 왕이 앉던 옥좌를 '봉황좌(Pheonix Throne)'이라고 부르듯이, 무굴 제국의 황제가 앉던 왕좌는 위쪽에 사파이어로 만든 2마리의 공작이 장식되어 있던 것에서 따와 '공작좌(Peacock Throne)'라고 불렀다.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왕좌와는 달리 앞으로는 계단이 없었고 뒤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 한가운데에 있는 방석에 앉아 신하들을 알현했다. 공작좌의 몸체는 1,150kg에 달하는 순금과 230kg의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황제 위의 천장은 12개의 에메랄드로 만든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으며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나디르 샤의 침략과 영국군들의 약탈로 인해 현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가치로 추산하면 그 금액이 무려 9,648억 원에 이를 정도로 눈 돌아가게 값비쌌다고.
  • 참고로 독일의 루트비히 2세는 같은 건축광답게 샤 자한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했고, 이 때문에 무굴 제국을 방문한 여행가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인도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루트비히 2세는 여행가들에게 무굴 궁정에 있는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공작좌'에 대해 듣고 완전히 그 매력에 빠져버렸으며, 자신도 이를 모티브로 한 공작좌를 하나 만들고자 했다. 건축과 예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던 왕은 값비싼 색유리와 금을 이용해서 3마리의 공작으로 이루어진 왕좌를 만들었다.[58] 그는 이 왕좌를 화려한 인도식 방에 놓은 후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현재 이 공작좌는 린더호프 궁전에 보관되어 있고, 매년 130만 명 이상이 이 왕좌를 보러 온다고 한다. 완벽한 3마리의 공작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굴 제국의 오리지널보다 '공작좌'라는 이름에 더 걸맞아 보인다는 평이 많다.


[1]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국기로, 독특하게 삼각형 모양의 국기이다. 이외에도 전시에는 녹색 바탕에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하기도 했다.[2] 무굴 황제의 국장이다. 태양을 상징하고 있으며, 일본 황실의 문장과 닮았다. 항상 황제의 뒷편에 걸려 있었다.[3] 무굴 제국의 영토 변천사, 위에서부터 1530년, 1605년, 1707년의 영토다.[4] 영국과 프랑스, 벵골 연합군 등이 인도의 패권을 두고 벌인 대전쟁[5] 제국의 공식 국교였다. 수니파가 다수였지만 시아파수피즘도 있었다.[6] 황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대귀족들과 외국 세력들이 제국을 좌지우지했다.[7] 무굴 시기의 대표적인 은화[8] '무굴'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 중국식으로 읽으면 'Mò wò er'로 발음하며, 한국식으로 읽으면 '막와이'가 된다.[9] 인디아의 음차.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1609) 표기로, 한국식으로 읽으면 '응제아'가 된다.[10] mogul 혹은 moghul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해당 단어는 남아시아의 "거부", "장자"라는 의미로도 쓰이기에 mughal이라는 표기를 주로 사용한다.[11] 참고로 마라타 동맹은 아우랑제브 황제의 광폭 정벌 활동으로 위협을 느낀 인도 남부의 마라타인들이 힌두 영웅 시바지 본슬레 밑에 모여 창설한 남인도의 국가연맹으로, 초기에는 무굴 군대에게 밀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이 흔들리면서 인도 최강 세력으로 발전하였다.[12] 다만 영국은 무굴의 황제를 타 인도 토후들처럼 대하지는 않았고, 명목상으로는 '인도의 황제'로 대우해주었다.[13] 당시 저항하는 인도인들은 무굴 황제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이에 무굴 제국의 상징성에 두려움을 느낀 영국 동인도회사는 아예 무굴 제국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14] 빅토리아 여왕대영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황제를 칭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이 없었다.(애당초 잉글랜드의 유래가 기존 로만 브리튼인을 몰아낸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과 중세 시기 들어온 바이킹 계통의 혼합인지라 로마와 연관이 있을수가 없다.) 이때문에 서양의 황제는 될 수 없었으니 대신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인도의 황제를 칭해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서구 열강들이 유럽 바깥의 황제 칭호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했기에(관심이 없었기에) 가능했다.[15] Abu'l Fazl, The History of Akbar, Volume I, ed. and trans. Wheeler M. Thackston(Cambridge, Mass.: Harvard Univercity Press, 2015),pp.198,200,212 (text), 199,201,213 (trans).[16]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의 최대 강역이다. 다만 아우랑제브 사후 반란이 수도없이 일어나면서 이처럼 거대한 대제국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17] 사실상 인도 대륙 전체를 장악했음을 볼 수 있다. 위쪽의 황갈빛 땅은 티베트이고, 사이로 흰색 선처럼 보이는 히말라야산맥이 티베트와 인도를 서로 갈라놓고 있다.[18] 이만한 영토는 인도 역사상 마우리아 왕조 외에는 없었다.[19] '영역의 통치자'라는 뜻의 니잠 울물크의 약칭으로, 하이데라바드 왕국창업군주아사프 자흐 1세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니잠이라는 칭호를 칭하였는데, 이후에는 하이데라바드 왕국 군주의 호칭으로 굳어졌다.[20] '나와브'에서 따온 명칭이다. 인도에서 재화를 수탈해 100여 명에 달하는 인도인 하인들을 부리는 등 마치 왕처럼 행세하며 꼴값을 떤다고 비하하는 말이었다.[21] 의외로 nabob이라는 단어는 디즈니의 영화 알라딘 속 노래 'Friend Like Me'에도 등장한다. # 2분 13초 쯤에 nabob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22] 동시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인구가 10만여 명 정도였고, 런던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 밖에 안됐다.[23] 뒤에 바드샤히 모스크가 보인다.[24] 이는 인도뿐만 아니라 코끼리 부대를 운용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25] 청색 염료의 재료가 되는 식물[26] 벵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직물 산업은 당시 무굴 제국 최대의 산업이었다.[27] 식량 가격이 워낙 싸지면서 사회가 안정되자 이전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면직물들을 팔아도 먹고 살 수 있었다.[28] 물론 이는 산업 혁명 이전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다. 산업 혁명 이후로는 인도 역시 영국의 방직 기계들이 뽑아내는 엄청난 양의 면직물들을 감당하지 못했다.[29] 무굴의 총독 비슷한 관직[30] 당시 무굴의 황제들이 얼마나 목화를 중시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악바르 황제 시절, 황제가 신하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을 때, 모두가 연꽃이나 장미 등을 말할 때 한 신하가 '목화솜꽃'이라 답했다고 한다. 의아해한 황제가 그 이유를 물어보자, 그 신하는 '목화솜꽃으로 만든 우리의 직물들이 바다 너머로 수출되어 폐하의 제국을 방방곡곡에 알리고 있으니, 이는 가히 장미와 연꽃의 향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화솜꽃이 제일 아름답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일화가 조선의 영조 관련해서도 있는데, 어느 쪽이 먼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31]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침몰한 것으로 유명하다.[32] 라호르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모스크로, 완공 당시에는 세계 최대규모의 모스크였다.[33] 타지마할의 경우 북쪽에는 정원이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타지마할 뒤쪽으로 흘러가는 강과 그 일대를 아예 하나의 정원으로 삼아버린 것이다.[34] 별자리들의 위치가 정확할 뿐만 아니라 표면에 이음매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유명하며, 속은 비어있다.[35] 연구진들이 조사한 결과 왁스로 통을 만들어서 금속을 부어 아예 통짜로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왔다.[36] 참고로 이 혜성은 1577년에 지구 근처를 스쳐간 혜성 C/1577 V1으로, 튀코 브라헤 등을 포함한 유럽인들에게도 관측되었다.[37] 저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38] 라지푸트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로 인도 전통의 회화 기법이다.[39] 카르나타카의 나와브 '아짐 웃다울라'와 그의 아들 아잠 샤의 모습이다. 1800년대 초반에 영국인 화가 토마스 히키(Thomas Hickey, 1741-1824)가 그린 초상화.[40] 이 '자마(جام)'는 무굴 제국 시대 남성들의 보편적인 겉옷이었다. 소매와 몸통은 타이트하지만 무릎 쪽으로 내려갈수록 스커트처럼 품이 넓어지며 벌어지는게 특징.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 자마를 즐겨 입었지만 자마를 고정하는 끈을 묶을 때 힌두교도는 몸의 왼쪽에, 무슬림은 오른쪽에 묶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훗날 인도 제국 시기 자마는 점점 길이가 짧아지며 나중에는 거의 조끼 수준으로 모습이 변한다.[41] 영단어 'pajama'가 바로 이 파이자마에서 유래했다.[42] 보통 이 피어싱과 보석은 남편이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여인의 피어싱을 보면 남편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43] 참고로 이 헤나는 당시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고, 웬만한 황실 여성이 아니면 꿈도 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44] 인도의 코걸이 장식은 16세기 말 무굴 제국의 상류층 계급에서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45] 다만 악바르 대제 때처럼 관용주의를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이후부터 이슬람 우월주의가 점점 강해진다.[46] 특히 아우랑제브가 얻어낸 인도 남부 지역은 그냥 반란지대였다. 말만 무굴의 영토였을 뿐이지.[47] 사실 조선이나 청나라는 군주가 지방세력 및 특권계층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상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다. 이런 나라들이야 영토 안에 있는 백성, 재산은 모두 중앙 정부(=군주)의 소유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여타 일반적인 국가들은 그 통치력이 지도에 표시된 영토만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들이 가장 친숙해 하는 왕조가 하필이면 가장 최근에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 왕조와 조선 왕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명,청 제국이어서 '영토 = 그 국가의 온전한 세력권'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을 뿐이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봉건제의 영향이 강했던 무사정권(특히 전국시대에도 시대) 시절의 역사 때문에 그런 인식이 약한 편이다.[48] 자한기르는 실제로 대단한 아편쟁이였다.[49] 물론 아우랑제브를 싫어하는 이들도 그의 군사적 업적만큼은 인정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그의 용맹과 지휘능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특히 인도 내 무슬림들은 아우랑제브에 대한 평가가 파키스탄 사람들만큼은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편이며, 이들은 아우랑제브를 비판하더라도 비무슬림 탄압을 비판하기보다는 지나친 정복전쟁을 비판하는 편이다.[50] 다만 문제는 현재 파키스탄은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각한 국가이기에 힌두교 탄압 정책을 좋아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51] 벵골인 중에서도 로힝야족은 민족 정체성 형성이 무굴 제국 멸망으로부터 한참 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굴 제국과 무관한 민족으로 여기며, 그에 따라 후술할 네팔과 스리랑카 그리고 몰디브처럼 무굴 제국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52] 티무르 제국을 무너뜨린 우즈베크족이 티무르 제국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기원이 되었다.[53] 윗동네 카자흐스탄에 비하면 보수적인 편이지만 아랍권이나 인도 문화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슬람 문화를 가지고 있다.[54] 심지어 지배층이 유목민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55] 사실 히말라야 뿐만이 아니라 중화 지역 자체가 티베트 고원, 타림 분지, 쿤룬 산맥, 톈산 산맥, 준가르 분지, 몽골 고원과 같은 삭막하거나 험준한 지형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어서 대국의 침략을 받을 일이 매우 적었다. 중국은 몽골 제국을 제외하고는 딱 두 번 서역과 군사적 갈등이 있었는데, 첫번째가 당나라아바스 왕조와 충돌했던 탈라스 전투이고, 두번째는 티무르 제국티무르몽골 제국의 복수를 하겠다고 영락제가 다스리던 명나라 원정을 대대적으로 준비하다가 원정길 도중 급사하는 일이 있었다.[56] 다만 아우랑제브강희제의 치세는 대략 일치한다.[57] 이건 그의 조상 중에 차가타이의 부마가 있어서 자처했던 건데 몽골 제국은 원칙적으로 부계 상속만을 인정한다. 다만 부계로만 따져도 칭기즈 칸 8촌 형제(사준사구 쿠빌라이의 동생 카라차르)의 현손이니 남남은 아닌 셈.[58] 파일:germanpeacockthron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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