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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다 𑀫𑀕𑀥 Magadha | ||
존속기간 | 기원전 185년 ~ 기원전 75년 | |
왕조 | 슝가 왕조(शुङ्गराज्यम्) | |
수도 | 파탈리푸트라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푸시야미트라 슝가(기원전 185 ~ 기원전 149) | |
언어 | 산스크리트어 마가다 프라크리트어 | |
종교 | 브라만교, 불교, 자이나교 | |
종족 | 인도 아리아인 | |
성립 이전 | 마우리아 왕조 | |
멸망 이후 | 칸바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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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장군이었던 푸시야미트라 슝가가 왕을 죽이고 세운 왕조로 북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국가이다.2. 역사
기존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은 법과 도덕으로 제국을 하나로 묶고자 했으나, 그러기에는 영토가 너무 넓었고, 각 지역의 상황들도 달랐다. 거대한 관료 조직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곳곳에 세워진 사원과 공공시설을 운영하는 데에도 아주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두자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소카 대왕이 승하하자 마우리아 왕조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작은 나라들이 독립을 선언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이민족들이 국경에 나타나 약탈을 일삼았다.결국 기원전 185년경 브라만 출신의 장군이었던 푸시야미트라 슝가가 마우리아의 국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니 마우리아 왕조는 완전히 무너지고, 슝가 왕조가 북인도에 자리잡게 되었다.
슝가가 새 왕조를 여는 데에는 브라만의 역할이 컸다. 이에 왕은 브라만교의 제사 의식을 부활시키고, 브라만의 특권들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인도 그리스 왕국,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왕국, 월지 등 여러 이민족들이 북서부로 쳐들어왔고, 이러한 잦은 침공들로 인해 국력을 키우기에는 힘들었기에 슝가 왕조는 이전 마우리아 왕조만큼의 힘을 가지는 것이 무리였다. 결국 남인도의 지배권은 물론이고, 북서부의 지배권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이런 혼란속에서 결국 기원전 75년 대신이었던 바수데바가 슝가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데바부티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슝가 왕조는 멸망하게 되고 칸바 왕조가 이를 이어받게 되었다.
3. 문화
바르후트
이 슝가 왕조는 지배 범위에 있어 갠지스 강 유역을 넘지 못했다. 고로 정치적인 부분에서 따져본다면, 마우리아 왕조의 뒤를 이은 반동적인 측면이 강해서 안정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문화적으로 따져 보면 오히려 훌륭했다고 한다. 오늘날 인도에 남아 있는 불교 유적 가운데 최고인 산치나 바르후트의 우수한 건축과 조각이 이 슝가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유명한 문법가 파탄잘리도 왕조의 개창자인 푸시야미트라 슝가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슝가 왕조를 주도한 브라만 계급은 산스크리트어의 부흥을 주도하고, 마우리아 왕조 시절 널리 퍼진 팔리어와 그리스어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그 영향으로 이 시대 이후 대승 불교 경전은 팔리어 대신 산스크리트어로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