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07 23:29:53

시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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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 제국
امپراطوری سیک
ਸਿੱਖ ਖਾਲਸਾ ਰਾਜ

Sarkar-i Khals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7px-Sikh_Empire_tri-lingual.jpg
1799년 ~ 1849년
위치 펀자브, 카슈미르
수도 라호르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마하라자
주요 군주 란지트 싱(1801~1839)
언어 페르시아어, 펀자브어
종교 시크교
종족 펀자브인
성립 이전 시크 연방
두라니 왕조
마라타 제국
멸망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
1. 개요2. 역사

1. 개요

이슬람힌두교를 접목시킨 시크교는 당시 수백여년간 이어지던 펀자브 지역을 포함한 북인도 지역의 피지배층이 내놓은 절충안이었다. 이슬람의 평등 사상과 힌두교의 윤회 사상 등이 합쳐진 시크교는 악바르 대제 시기와 자한기르, 샤 자한으로 이어지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 내내 존중받아 무굴 제국에 헌신했다.

그러나 이슬람 제일주의를 앞세운 독실한 무슬림 광신도 아우랑제브는 시크교, 힌두교를 포함한 종교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행하였고, 그에 대한 반발은 거세었다. 특히 지즈야 (종교 인두세)의 부활과 무리한 남인도원정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지즈야를 인상한 사건은 그 분노를 가중시켰다. 그 결과, 18세기 초, 아우랑제브의 사망 직전부터 무굴제국의 분열은 명약관화해 보였고, 1707년 그가 사망하자 북부의 시크 교도들과 남부의 힌두교도들은 억눌려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18세기 내내 힌두교도의 마라타 동맹과 시크교도의 세력은 양면에서 무굴제국을 위협하며 그 해체를 가속화시켰다.[1]

2. 역사

이전부터 무굴 제국이슬람 제국임을 내세웠지만, 타종교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극단주의 무슬림 광신자 아우랑제브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관용정책들이 탄압정책으로 뒤바뀌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인도 서북부 지역은 펀자브를 중심으로 힌두교이슬람을 접합시킨 새로운 종교 시크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역시나 아우랑제브는 이러한 이교도들의 행태를 눈꼴 시러웠는지 지켜보지만 않았고 계속해서 탄압해온다. 결국 1675년에 아우랑제브시크교구루[2] 테지 바하두르를 처형시키는데[3] 이것이 시크교도들의 반란에 크나큰 발단이 된다. 결국 시크교도들은 평범한 종교 집단에서 군사적 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을 펀자브카슈미르에서 날뛰게 되는데, 광폭한 아우랑제브와는 성향이 매우 다른 아들 바하두르 샤 1세[4]가 이들을 무찌르면서 다시금 무굴 제국에게 굴복하고 만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고, 관용정책을 베풀었기에 시크교도들은 이 시기에는 조용히 지낸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가 사망한 뒤 무굴 제국이 다시금 혼란에 빠지면서 18세기 후반 그들은 란지트 싱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군대 달 칼사[5]라는 것을 조직하여 제국으로부터 저항하기 시작한다(1799). 결국 그들은 독립에 성공하게 되고 1801년에는 스스로 대왕[6]을 칭하고 시크 왕국을 개편해 나간다. 이후 란지트 싱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베테랑 출신 프랑스 장교들을 군사 교관으로 영입해 서구식 군대를 조직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이 결과 서구식 친위대가 5,500명, 그 외 서구식 정규군이 약 60,000명에 이르렀다.[7] 이 당시 수틀레지 강을 경계로 동인도 회사와 국경의 합의가 이루어졌기에, 인도 본토로의 진출이 저지된 대신 아프간, 카슈미르 방면으로 활발한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이 와중에 청과 충돌한 적도 있고, 네팔 구르카족과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란지트 싱이 왕국을 다스릴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가 사망한 뒤 시크 왕국은 정치적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당시 영국이 신드 지방을 막 합병하고 펀자브에 눈길을 돌린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1845년 이러한 영국의 야욕을 막고자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으나, 당시 시크 왕국 군대 자체의 내부 분열도 상당했었기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소브라온 전투(Battle of Sobraon)에서 패배하여 라호르 조약이라는 불평등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이 조약으로 카슈미르 지방을 아예 영국한테 뺏기고 말았으며, 정치적으로도 영국의 반속국이나 다를바 없는 상태가 된다. 이에 1848년 시크교도들은 다시 힘을 모아 영국에게 대항한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영국-시크 전쟁에서도 내부 분열이 발생하였고 이전의 전쟁에서 교훈을 못 얻은 듯. 영국군은 역시나 막강했기에 패배하고 만다. 결국 영국은 시크 왕국의 마지막 왕 두레프 싱을 폐위시키고 이 지역을 직접 통치로 전환하니 그대로 멸망하게 된다.


[1] 다만 시크교도 세력은 주로 인도 내부로 확장하기보다는 근거지 펀자브를 위협하는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18세기 중반이면 무굴 제국이 이미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마라타의 보호국 처지가 되고, 시크교도는 주로 아프간족의 두라니 제국 등과 대립하게 된다. 사실 시크교도 세력은 1715년의 무굴과의 패배한 전쟁 이후에는, 마라타와 달리 세력이 부족해 무굴과 직접 군사적으로 대립하지는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한다.[2] 인도계 종교들의 선지자를 뜻한다.[3] 테지 바하두르가 처형된 사연은 이렇다. 시크교도들이 많은 펀자브 지역 근방에 힌두교도들이 많이 살았고, 교리상 타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고수하도록 하는 시크교의 특성 덕택에 힌두교인들과 시크교인들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던 아우랑제브가 이곳의 힌두교인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자, 힌두교인들은 이 문제를 상의하고자, 테지 바하두르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자 테지 바하두르는 직접 아우랑제브를 만나서 힌두교 신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개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는데, 이 말을 가소롭게 여긴 아우랑제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지 바하두르를 처형하라고 했다. 이로써 시크교 신자들은 테지 바하두르를 일개 종교의 지도자로서 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고 추앙해 마지않았고, 얼마 뒤에 힌두교 신자들과 연합해서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4]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였던 아우랑제브와는 정반대로 이전 황제들과 같은 관용정책의 노선을 걷는다. 하지만 노환 때문에 재위 5년만에 세상을 뜬다.[5] 세례(암리트 산차르)받은 시크교도는 "싱(남, 사자)/카우르(여, 공주)"의 이름을 받고 "칼사(또는 할사)"라는 시크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이는 원래 "순결한 자"라는 의미의 펀자브어 단어로, 구루 고빈드 싱이 모든 세례받은 시크교도에게 준 이름이다. 칼사는 원래 어느 정도 군사적인 성격이 있는데, 칼사에 속한 자의 의무 중 하나는 약자와 억압받는 이를 지키기 위해 무기와 승마를 숙련하는 것이다. 달 칼사는 "칼사 군대"라는 뜻으로, 단순히 정치적인 성격의 시크교도 모임부터 진짜 군대까지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나 단순히 배경설명 없이 "달 칼사"라고 하면 18세기 중반 활동한 시크교도 세력의 자원군(1747-1780)을 지칭하는 것으로, 펀자브에서 시크교도가 두라니 제국과 86년에 걸쳐 벌인 전쟁(1751-1837)에서 초기(1751-1765) 시크교도의 주력군이었다.[6] 이들의 언어로 마하라자[7] 서구식 훈련을 거부한 전통 방식의 정규군 역시 약 50,000명에 달해 총병력은 약 12만 명 가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