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03:50:59

쓰촨성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사천성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마작패를 제거하는 게임에 대한 내용은 상하이(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중국 국기.png 중국의 제1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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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행정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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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川省
쓰촨성 | Sìchuān Shě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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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소재지 청두시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지역 시난
면적 485,000km²
하위 행정구역 18 지급시, 3 자치주, 52 시할구, 17 현급시, 110 현, 4 자치현
인구 83,020,000명
인구밀도 198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펑칭화(彭清华)
성장 인리(尹力)
HDI 0.711(2017)
GRDP $6,147억 2,500만(2018)
1인당 GRDP $7,387(2018)
행정구역 한자 약칭
ISO 3166-2 CN-SC

중국어: 四川省
영어: Sichuan Province 시추안[1]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한 ~ 삼국시대2.3. 남북조2.4. 수당2.5. 송2.6. 원2.7. 명2.8. 청2.9. 중화민국2.10. 중화인민공화국
3. 지리와 기후4. 요리5. 관광6. 비단7. 여담8. 행정 구역
8.1. 면양(綿陽)8.2. 남충8.3. 낙산8.4. 수녕8.5. 아바 티베트-강족 자치주8.6.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8.7. 량산 이족 자치주
9. 출신인물
9.1. 고대, 중세9.2. 근대9.3. 현대(1949년 ~)


1. 개요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川 '하늘의 곳간'
쓰촨성은 중국 중남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사천성이라고 부른다. 중국 전토를 보았을 때 이 성은 중국의 딱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 과거의 익주라고 불리던 곳은 쓰촨성의 영역을 포함한다. 성도청두시. 성도가 성도다!

중국 내에서 쓰이는 약칭은 천(川) 혹은 옛부터 이 일대를 가리키던 명칭인 촉(蜀). 쓰촨(四川)이라는 이름은 성 내에 장강, 민강, 타강, 가릉강 이 4개의 강이 흐른다고 해서 이런 명칭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천(川)이란 선비족이 말 달리며 불렀다는 칙륵가에 나오는 칙륵천(敕勒川)이나 고국천왕의 '천(川)'처럼 강이 아니라 '평원' 혹은 '땅'의 뜻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사천은 처음부터 사천이 아니라 양천(兩川), 삼천(三川)을 거쳐 사천(四川)이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지역을 파군과 촉군으로 양분하며 양천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당 대종 시기에 검남동도, 검남서도, 산남서도의 세 곳으로 나뉘면서 삼천이 되었다. 송나라 진종 시기에 익, 재, 이, 기 등의 4주를 둠으로써 '사천'이 처음 등장했다. 이렇듯 쓰촨(四川)은 송대 행정구역인 천협사로(川陝四路)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원나라 때 정식 성(省)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름이 지어지고 보니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陀江), 가릉강(嘉陵江)의 4개의 큰 강이 이곳에서 발원한다는 해석이 그럴듯해서 상식으로 퍼져서 중국인들도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

파일:1563044745 (1).jpg
현대 중국의 인구 밀도, 상하이-남경 일대, 화북지역의 인구밀도에 필적할 만한 중국의 다른 지역은 사천성-충칭시를 아우르는 넓은 사천분지 지역이나 푸젠성 극히 일부 지역, 홍콩에 인접한 광둥성 일부 지역밖에 없다.

인구는 81,100,000명인데 위로는 광둥성, 허난성, 산둥성에 이은 4위이며 1997년 성 동부가 충칭시로 독립하기 이전까진 유일하게 성 인구가 1억을 넘겨 압도적인 1위였고 지금도 한반도 인구를 넘는다. 면적도 485,000 km2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면적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 농업공업이 매우 번성한 성 중 하나이다.

2. 역사

2.1. 고대

원래 이곳은 황하 문명의 발흥지인 황허 유역과는 진링 산맥, 다바 산맥 등의 험한 산맥 지형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인데다가 황하 문명을 세운 한족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주 거주민이었기에 황하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장강을 비롯한 4개의 강을 끼고 있는, 거대하고 비옥한 분지 지형으로 인해 높은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삼성퇴 청동기 유적으로 대표되는 황하 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이 쓰촨 분지 내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사천 문명은 (고)촉나라를 낳는다. 또 사천의 주목할 만한 나라에는 파나라도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은 말한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

촉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청동상은 중원보다는 오히려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촉의 국력은 중원을 능가할 정도였고, 독창적 문명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총과 어부,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사만팔천 년 동안 진나라와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 이백의 노래가 과장되기는 했지만, 촉이 독자적인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중원을 제패하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황하 문명으로 대표되는 한족 문화가 주변의 이민족 영역으로 퍼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쓰촨 또한 이 흐름을 피할 순 없었고, 진나라에게 밀리게 된다.

비록 중원의 중심이 아닌 이민족이 우글거리는 변방 이미지였지만 쓰촨 분지의 높은 경제력 그리고 침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으로 이 일대의 제후국들은 평화로우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자 천하 제패를 노리는 주변의 강대국들, 특히 관중의 진이 이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진은 험난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파나라와 촉나라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정복 자체에 크나큰 애를 먹었다. 그러나 어찌어찌 이 둘을 정복한 이후부터는 180도 달라져 진나라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6국을 국력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파촉 일대를 정복하여 관중의 경제력에 파촉의 경제력이 합쳐진 시기였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쓰촨 문명 또한 중원의 한족 문화에 흡수되었다.

아무튼 파촉을 위시로 한 쓰촨 분지의 경제력은 관중과 더불어 진이 최초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진이 항우에 의해 멸망한 이후 파촉은 이 일대를 분봉 받은 한왕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관중을 정복할 때 이 일대는 관중 정복을 위한 후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진하여 천하를 재통일하고 한을 세울 때까지 관중과 더불어 배후지로서 기능하였다. 이는 장안전한의 수도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이미 한나라 건국기부터 수백년간 꾸준히 개발된 덕분에 나중에 삼국시대에도 촉한이 비록 땅은 나머지 둘에 비해 한참 작지만 위나라에 비해서 질적(생산량, 인구밀도)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특히 옆동네 오나라 늪지대에 비하면 많이 개발된 땅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익주 하나만 가지고도 오랫동안 위, 오와 대치구도가 가능했다.

2.2. 한 ~ 삼국시대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이 곳에 익주 자사부가 설치되었고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 할거 시대가 펼쳐지면서 익주유장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제갈량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를 지배하던 유비가 유장을 축출하고 익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유비는 이 곳에 삼국지 팬들에게 익숙한 바로 그 나라, 촉한을 세운다.[2] 이곳의 성도(省都)가 바로 삼국지 팬들에게 성도(成都)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청두시'. 제갈공명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한중 공방전 초반 장합과 격돌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 '한나라 장군 장비가 정예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괴인 장합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멈추고 글을 새기노라.(漢將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張合于八蒙, 立馬勒銘)'라는 친필이 류징현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때 발견되어 지금까지 관광지가 되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인물인 제갈량은 현재까지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쓰촨인들이 실속을 중시하는 것과 제갈량 사랑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천재 전략가 이전에 명재상이었다. 도강언과 각종 수리시설을 보강하고 세워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제갈량은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상을 줘도 시기하는 이가 없고 벌을 받아도 억울해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량이 군사 천재이기만 했다면 결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쓰촨 사람들은 제갈량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무려 1800년간 제갈량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라고 했다.

2.3. 남북조

촉한이 산악인 등애종회의 공격으로 에게 멸망하고 다시 위가 서진에게 멸망하고 서진이 천하를 재통일하나 팔왕의 난 이후 주변의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밀고 들어와 각자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대혼란이 펼쳐진다. 익주 또한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저족의 족장 이특이 익주 일대를 점거하여 성한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가 서진 황실이 강남으로 도망가 다시 세운 동진에 의해 멸망하고 이민족들이 날뛰던 중원 일대가 하나의 왕조로 재편되고 천하가 남북으로 갈린 남북조 시대 속에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주에게 빼앗길 때까지 이곳은 줄곧 남조의 영역에 속했다.

2.4. 수당

이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 당 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수 대에는 양주, 당 대에는 검남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당 대 중엽 안사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당 조정이 이 곳으로 옮겨가 10년 가까이 임시 수도로서 기능한 적도 있었고 당 대 말엽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자 또다시 당 조정이 이곳으로 옮겨간 적도 있었다.

2.5.

당이 멸망한 이후 중원은 다시 오대십국시대라는 혼란에 빠지는데 이 일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전촉, 후촉이라는 지방 정권이 잠시 들어선다. 하지만 얼마 못가 더 강대한 세력에게 멸망하는 지방 정권 특성상 곧 중원 통일에 나선 조광윤의 송(북송)으로 편입된다. 북송 대에는 이주로, 성도부로 등의 행정 구역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정강의 변화북 전역을 점령한 이후 강남으로 도망간 송 황실이 재건한 송(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강남으로 침공할 때 이 지역도 금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남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금이 철수하면서 이 지역은 송의 지배 하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2.6.

몽골 제국이 중국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오고타이 칸 때 금을 멸망시키고 뭉케 칸 때 남송으로 밀고 내려올 당시 이 지역은 뭉케 칸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군 정예 부대가 침공해 왔다. 하지만 뭉케 칸의 몽골군은 이 곳의 조어성(충칭)에서 6개월이나 가로막혀 정복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뭉케 칸 본인도 조어성 공략 도중 병사한다. 하지만 후임인 쿠빌라이 칸은 기어이 남송을 멸망시켜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중국의 몽골 울루스가 재편되어 세워진 왕조 은 이 일대에 사천행중서성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는데 바로 이 사천행중서성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이 일대의 행정 구역인 쓰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2.7.

몽골족이 중원에서 고비 사막 너머로 쫒겨난 이후 쓰촨은 명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 지금의 쓰촨성이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다. 명나라 말 북방에서 만주족이 세운 이 내려오고 각지에서 농민군이 일어나 명 사회가 혼란해질 무렵 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헌충이 쓰촨을 정복하고 지방 정권인 서를 세우나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대순을 격파하고 중원으로 내려온 청에 의해 간단히 멸망한다. 이때 장헌충이 쓰촨 원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해, 쓰촨을 장악한 청 조정은 북부지방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쓰촨 땅을 채울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8.

중원을 정복한 청은 이전 왕조인 명의 행정 구역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켜 쓰촨성이라는 행정 구역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 당시엔 오삼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으나 곧 탈환되었다. 건륭제 통치 당시에는 티베트 정복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가경제 통치 당시에는 비밀 결사인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백련교도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었고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강남의 태평천국에 호응해 쓰촨에서도 태평천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 또한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쳐 충칭, 청두 등의 도시가 개항되어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1년 우창 봉기로 인해 촉발된 신해혁명 발발 당시 강남의 여러 성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쓰촨 또한 독립을 선언해 중화민국에 가담했으며 중화민국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하는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터진 곳 역시 이 곳, 쓰촨성이었다.

2.9. 중화민국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 각 지방이 사실상의 독립 정권으로 전락할 때 쓰촨에서도 여러 군벌들이 세운 독립 정권들이 난립했었다. 그러다 장제스의 북벌로 중화민국이 형식상 재통일되어 모든 지역이 장제스난징 국민정부 아래로 들어오자 쓰촨의 군벌들 또한 형식상 국민 정부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다 장제스에 대항해 군벌 연합 세력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쓰촨 또한 군벌 연합에 가담했으며 중원 대전이 국민 정부의 승리로 끝나자 쓰촨은 다시 국민 정부에 충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국민 정부 아래로 다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쓰촨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던 자는 국민 정부가 아닌 토착 군벌 세력들이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동년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한커우로 옮기고 이듬해 8월 한커우마저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일본군에 대해 결사 항전한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 쓰촨의 대도시 충칭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으며 쓰촨은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은 중화민국 서남부, 이른바 '대후방'의 핵심 지역으로서 전쟁 기간 내내 항일 전선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충칭 대공습과 같은 참혹한 전쟁범죄도 있었다.

중일 전쟁은 일본의 항복으로 중화민국의 승리로 종결되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일 전쟁 이전부터 지겹도록 싸워댄 두 세력,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마오쩌둥중국 공산당 간에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국공 내전 말엽 중국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 1949년 4월 수도 난징이 공산군 손에 떨어지고 임시 수도 광저우마저 동년 10월 공산군이 화남을 석권하면서 함락되자 장제스는 중일전쟁 당시처럼 정부를 쓰촨으로 옮겨 계속 저항할 생각이었으나 쓰촨 내부의 토착 군벌들이 장제스를 배신하고 공산군 측에 붙자 쓰촨마저 포기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떠났다. 11월 충칭, 12월 청두가 공산군에게 넘어가고 1950년 4월 쓰촨성 시창의 국부군 잔존 세력마저 완전 소탕된 뒤 쓰촨은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통제 하에 든다.

2.10.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엔 1950년대대약진운동의 피해가 매우 큰 지역이었다.

195 ~ 60년대 중소결렬로 소련과의 사이가 나빠지고 전쟁 위기가 닥치자, 중국 정부는 이곳에 쳐박혀 지구전을 펼쳐 끝내 승리한 중일 전쟁의 전훈에 따라 이곳에 엄청난 수의 산업 지대를 건설해 놓았다. 그리하여 항공 회사 (청두 항공 [3]), 및 철강 및 금속 회사, 우주 기지 (시창 우주 기지)도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까지는 이곳의 공업 성장율이 중국의 상위권이었다.

1980년대부터 중국 공산당이 개혁 개방 정책을 펴면서 동남 임해 지역은 크게 발전하지만 서부 내륙 지역이던 쓰촨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는데 동서 간의 경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서부 대개발 정책이 시작, 1996년 성 동부가 충칭 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한다. 2010년대 들어 성도인 청두(成都)는 인구가 1200만명으로 매년 13% ~ 15%대의 고성장을 이어가 서부 내륙의 성장 엔진으로 불린다.

2008년 이래로 쓰촨성 대지진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2017년 6월 24일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한 마을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7년 8월 8일에 또 다시 규모 7.0 지진이 발생했다. 19명이 사망하고 300여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2019년 6월 17일 오후 10시 55분 이빈(宜賓)시에서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했다.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산사태로 고속도로가 소실되었고 72개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12개 건물은 크게 파손됐다.#

3. 지리와 기후

대체로 서쪽이 해발 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인데, 서부는 티베트 고원의 동부에 해당되고 중부, 동부는 분지 지형이며, 동북쪽으로는 산시성(陕西省)과 접해 있는데 산시성과의 경계를 또 산맥이 가로지르는 형태라서 쓰촨성 밖에서 쓰촨성 안의 동부 분지로 들어오려면 서쪽과 북쪽의 산맥, 산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윈난성과 이웃해 있는데 쓰촨 성 대부분의 분지 지역보다 윈난성 중북부가 해발고도가 더 높다. 그래서 고대부터 쓰촨성 지역을 오가려면 한중 지역을 통과하거나, 장강 중류의 험준한 계곡인 '장강 삼협'을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 외에는 사실상 길이 없다.

파일:pdwqBXe.jpg
가운데 동그란 모양의 분지가 바로 삼국지에서 "파촉"으로 불리는 지역. 현재의 충칭시청두시 인근을 포함하는 부근이다. 한국에서는 함경도쯤에서나 볼 수 있는 해발 1500m ~ 2500m대의 험준한 산맥이 동그란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가운데 양쯔강(장강)이 관통하며 넓은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초한 전쟁기나 삼국지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세력'으로 묘사되기에 첩첩산중에 있는 조그마한 촌구석인 이미지지만 현실은 남한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거대한 분지(16.5만 평방킬로미터)다. 연의에서 서촉을 정복하겠다고 온 주유가 돌아가자 제갈량이 보낸 편지에서 '그곳 사람들은 굳세고 요새는 바위와 같은데 어찌 정벌하시려 하시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실제로 유비는 이곳을 정복하는데 애를 많이 먹어야 했다. 아래에 언급할 이백의 시 '촉도난'에서는 '촉으로 가는 길이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于上靑天)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촉으로 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함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라시아 판과 인도 판이 충돌하는 지역이라 지진이 잦다. 중국 지질연구소는 관측이 시작된 지난 백 년간 진도 5.0 규모 이상 지진만 150회 이상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리히터 규모 8.0 이상의 초 거대 지진이 바로 2007년 있었다.(원촨 대지진) 공식 피해액만 27조원에 달했다. 셴수이허 단층대가 깨어난 것으로 중국 당국은 파악하고 있으며 진도 6.0 이상의 대지진이 1년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중이다.

기후는 습하고 더운 편이며, 지구온난화가 많이 진행된 지금에는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일 정도로 온화하다.[4] 일조량이 중국에서 가장 적은 지방이다. 청두의 일조 시간은 연간 1,000시간 정도로 런던은 물론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서울과 비교했을때 우기인 7월 ~ 8월에는 일조 시간이 비슷하지만 가을에서 봄까지는 거의 서울의 1/3일 수준이다. 분지라는 지리 조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는데 더운 공기들이 사천성 쪽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올때 차가운 산맥을 거치면서 쉽게 구름이 되어 버리는 것.

4. 요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천 요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픽션이긴 해도 요리왕 비룡이 이곳 출신. 사천 요리는 호남 요리와 더불어 매운 것으로 유명한데, 원래 중국은 더워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지만 사천은 습하게 더운 편이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매운 요리가 발달했다. 마파두부도 사천에서 기원한 음식. 그래서인지 쓰촨성 20대 이상 성인 70%가 대장염 초기 증세를 보인다는 카더라도 있다. 2018년 이후 마라탕, 마라샹궈 등이 한국에서도 유행중이다.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이 곳간을 내려준 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쓰촨성은 농업이 발전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1999년에는 을 포함한 곡물의 생산량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사탕수수, 고구마, 복숭아, 포도 등도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돼지고기 생산량이 매우 많았다. 소, 양과 달리 돼지는 인간의 먹고남은 것을 줘야 한다. 쓰촨의 풍요로움을 대변하는 대목. 이러다보니 음식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었다. 외식 문화도 중국 내 타지역에 비해 빨리 발전했다.

한국에서 마파두부가 유명하다보니 사천 요리를 친숙한 맛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칼칼하고 얼큰한 매운 맛은 후난 요리에 가깝고(라, 辣), 사천 요리는 고추는 물론 산초를 비롯한 향신료의 얼얼한 매운 맛이기 때문에(마, 麻)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가 많다. 마파두부가 이닌 마라탕(麻辣烫)의 맛이 사천 요리다. 현재까지 한국의 '사천 XXX' 라고 이름을 붙여 파는 음식들을 대부분 그저 한국식으로 맵게한 음식일 뿐이다. 대부분의 한국 마파두부에도 "마"한 매운맛은 별로 없고 그냥 한국인에게 익숙한 "라"한 매운 맛만 있는 상황. "마"한 맛은 주로 화자오, 마자오를 먹었을때 오는데 한국에서 둘 다 잘 안쓰는 재료로, 추어탕에 그나마 화자오와 비슷한 초피가 들어가나 이마저도 보관문제로 향과 맛이 다 사라진 상태로 들어가는게 대부분.

전통 음식 중에 파오차이라는 김치와 유사한 발효 음식이 있다. 사실 김치가 중국에 수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파오차이는 중국 전체에서 보면 거의 듣보잡에 가까운 향토 음식이었는데, 사쓰 이후 김치를 수출하면서 우리 나라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자, 사천에서는 김치는 파오차이를 베낀 것이라며 파오차이가 원조이며 더 우수하다는 주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료에서도 심지어 중국의 사서에서조차도, 김치가 중국에서 넘어간 요리, 혹은 영향을 받은 요리라는 서술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파오차이 = 김치란 주장은 무리수였지만, 중국은 금새 파오차이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위생법을 제정, 적용하면서 김치를 비위생적인(?) 식품으로 규정하여 수출이 막히고, 파오차이가 김치가 개척했던 시장을 천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근래들어 중국 - 일본의 관계 악화로 인해 반사적으로 한중간의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치를 포함한 한국으로터 수입하는 물품들에 대한 견제가 크게 완화되어 곧 다시 수출이 가능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파오차이(泡菜)는 특정한 음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 말 그대로 절인 채소라는 뜻으로, 채소를 염장해 보관하는 것들을 통칭하는 김치라는 용어와 기본적인 의미상으로는 같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은 딴지가 가능했던 것. 그냥 어느 채소절임이라도 파오차이 중국인들은 김치를 항궈파오차이 (韩国泡菜, 한국절임채소) 라고 따로 부른다.

쓰촨성의 술 역시 구이저우성과 함께 유명한 편인데 백주 우량예(五粮液), 수이징방(수정방, 水井坊)등의 술이 유명하다. 중국 10대 명주 중 4개 ~ 5개가 이곳에 있는데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좋은 술들이 나오는 이유는 중국에서도 중국 농산물 생산량 1위를 차지할 만큼 토지도 비옥한데다가 수질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윈난 성의 보이차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차도 유명한 편이다.

5. 관광

중국에서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 경관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적도 상당한 편.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을 5개나 지닐 만큼 풍광 또한 빼어나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동네 여기저기에 삼국지 관련 관광지가 있다. 방통이 최후를 맞은 낙봉파 같은 정사하고는 상관 없는 유적지도 있는데 당연히 관광용이다. 국내 여행사들 단체 투어 상품 가운데는 아예 삼국지 관광 투어로 청두부터 검각까지 둘러볼 수 있는 코스도 있으니 잘 찾아보고 가는게 좋다.

청두 여행 팁을 쓰자면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이 매일 밤 8시에 출발하고 청두에서는 새벽 0시 30분(한국시간 1시 30분) 출발해 3시간 30분 ~ 4시간 걸린다. 다른 항공은 가격은 싸지만 갈아타는 게 많아 최장 17시간이나 걸린다. 청두 여행은 날씨가 덥기도 하지만 현지인들이 몰리는 시간에 가면 인파에 밀려 관광하기가 힘들어진다. 될 수 있으면 아침 일찍 시작하거나 오후 늦게 움직이고 더울 땐 쉬는 게 상책이다. 중요 관광지 입장이나 열차를 타려면 여권을 보여줘야 해 늘 소지하는 게 편하다.

그리고 겉모습이 귀여운 판다의 주 서식지이기도 하다. 판다 공원 같은 곳에서 직접 관람도 가능하다. 청두 도심에서 북쪽으로 40분 ~ 1시간 정도 거리에 청두판다생태공원(成都大熊猫繁育硏究基地)이 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17만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면 새끼 판다들을 직접 안은채 사진도 찍을수 있다 카더라... 이곳에는 덩치 큰 자이언트 판다뿐만 아니라 붉은색 레드 판다들이 서식한다. 특히나 이곳에 일부 구역은 레드판다들이 사람들 다니는 계단 옆을 지나다니는 모습까지 바로 옆에서 관찰 할 수 있다., 자이언트 판다와 레드 판다들이 대나무를 먹는 모습과 재롱을 볼 수 있는데 크기별로 방을 분류해 놓은 게 이채롭다. 이 공원에선 백학, 고니, 원앙새, 공작들도 볼 수 있다. 판다의 서식지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대나무 숲이 많은데 촉남죽해(蜀南竹海)라고 해서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있다. 또 흥문석해(興文石海)라고 하여 웅장한 암석과 동굴 그리고 카르스트 지형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관광지도 있다. 촉금이라고 불리는 비단이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누에 고치가 활발하게 생산되어 비단을 직조하고 있는 만큼 가서 구경하다가 비단 제품을 쇼핑할 수도 있다.

보통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는 유비의 무덤이 있는 무후사같은 삼국지 관련 유적이나 무후사바로 옆에 있는 인사동 거리 같은 금리거리 곳 외에도 다른 자연경관이나 고적들도 적당히 있는 편이다. 기원전 2000년경의 삼성퇴 유적에서는 커다란 크기의 기괴한 인물상들이 수없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유적이다. 청두에서 버스 타고 가기 쉬우니 한번 쯤 가볼만 하다. 시성 두보가 머물던 두보초당이나 도강언도 가서 볼만하고 낙산대불도 유명하다. 려산대불(樂山大佛·낙산대불)은 청두의 남쪽에 위치해 민강(岷江)과 다두하(大渡河)와 칭이강(靑衣江)이 합류하는 강변에 있다. 링윈산(凌云山·능운산) 서쪽 암벽을 통째로 깎아 새긴 마애석불로 713년 창건된 링윈사의 본존 미륵 보살이다. 불상의 규모는 높이 71m, 머리 너비 10m, 어깨 너비 28m, 귀 길이 6.72m, 코 길이 5.33m다. 당나라 때 승려 해통(海通)이 배가 안전하게 지나다니기를 기원해 조각을 시작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앤난(劍南)의 절도사 위고(韋皐)가 9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조각 당시에는 금빛과 화려한 빛깔로 장식했고, 13층 목조 누각으로 덮어 보호했으나 누각은 명나라 말기에 불 타 없어졌다. 1994년 아미산과 함께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링윈산은 멀리서 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형상이어서 신기함을 더한다. 대불 앞에 100여명 정도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링윈사에서 대불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길은 한 사람 정도만 통행할 수 있을 만큼 비좁고 경사가 심하다. 성도 역에서 출발하면 낙산대불이나 도강언까지 사천 분지 안에 촘촘히 깔린 고속 철도를 타고 몹시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자연 경관은 구채구 및 황룡이 유명한데 청두에서 버스타고 8시간 ~ 10시간 거리에 있다. 다만 6월 ~ 8월 사이엔 비가 많이 오는데 지형이 거의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라 산사태나 낙석 사고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데다가 모기 등 벌레가 많으니 주의. 툭하면 통행이 안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나 구채구와 황룡은 정말 가볼만 한 곳이다. 그리고 구채구 볼땐 장해 - 오채지 먼저 가는 코스랑 원시 삼림으로 가는 2가지 코스가 있는데 장해 - 오채지 코스는 제일 마지막 코스로 두는게 좋다. 오채지 먼저보고 나면 원시 삼림에서부터 내려오는 코스가 굉장히 심심해진다.

어메이산(峨眉山·아미산)은 중국의 4대 불교 명산 중의 하나로 보현 보살의 도량으로 일컬어진다. 여인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졌다. 산꼭대기에 있는 만불정(万佛頂)은 백두산보다 355m가 높아 3099m다. 바로 아래에 있는 금정(金頂)은 3077m로 그 다음이다. 금정에서 어메이산의 4대 절경인 운해와 일출, 성등(聖燈), 불광(佛光) 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년 중 250일 정도 비가 오고 산정은 늘 안개에 휩싸여 일출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분지보다 약 2500m나 솟아 있어 예전에는 산 아래서 꼭대기까지 50여km를 걸어 올라야 했다.

먹거리에 관해 말하자면 사천 요리산둥 요리, 광둥 요리, 강소 요리와 더불어 중국의 4대 요리로 꼽히며, 매운 요리의 대명사인 훠궈(火鍋)로 유명하다. 시내 식당에서 파는 퓨전 훠궈는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전통 훠궈는 매워서 먹지 못할 정도다.

베이징에서 경극(京劇)이 유명하다면 쓰촨에서는 천극(川劇)이 이름값을 한다. '천부촉운(天付蜀韻)'은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적벽대전이 중심인 이야기다. 역시 승상님빠 도시 많은 출연진과 함께 화려한 무대를 통해 춤과 무예를 보여준다. 한글로 자막도 나온다. 청두를 대표하는 '천극'인 '천부촉운'은 아주 화려하기 때문에 보지 않으면 후회한다.

쓰촨은 중국 한시계의 2대 네임드인 이백, 두보와도 연관이 깊은 고장이다. 이백은 쓰촨성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했고[5] 여러 대표작 중 하나인 '촉도난'도 촉 지방으로 넘어가는 벼랑길을 소재로 쓴 시이다. 두보는 청두에 산 적이 있으며 이때 살았던 곳이 완화 초당(두보 초당).[6] 지금도 청두 시에서는 두보 초당을 관광 자원으로 잘 써먹고 있다.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가져서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구채구 (주자이거우)는 안타깝게도 2017년 쓰촨성 대지진으로 상당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진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만큼 완전히 망가진 수준까진 아닌듯하며중국 신문망 번역 기사,상당 부분은 어느정도 보존된 모양이다. 다만 규모 7.0의 지진이 일어난 곳이니 만큼 해당 지역의 안전 상황을 보아 관광 산업이 위축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

6. 비단

위에서 나왔듯이 사천의 특산품 비단 - 촉금(蜀錦)이 굉장히 유명하다. 촉금(성도촉금, 成都蜀锦)은 남경의 운금(南京云锦), 소주의 송금(苏州宋锦), 광서의 장금(广西壮锦) 등 중국 4대 비단으로 하나로 중국에서 유명한데 이 중에서도 촉금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고 가장 오래 명성을 떨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00년 역사를 가진 촉금은 일찍이 서한(西漢)시대부터 짜기 시작하여 촉한(蜀漢) 시대에는 쓰촨을 대표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촉한 정부는 비단을 매우 중요시 여겨 승상 제갈량의 지휘하에 촉금의 생산과 질을 높여 촉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촉금은 쓰촨산(四川産) 꽃무늬 비단이라고도 하는데 전부 수공으로 만들고 그 공예가 복잡하며 높은 기교를 가지고 있다.

당나라 때 와서는 그 당시 가장 좋은 비단으로 소문났으며 당태종 이세민은 사천 비단을 무조건 황실에 보내야 한다고 명했다. 또한 사천 비단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에까지 팔려나갔으며, 남으로는 일본에도 나갔다. 하여 일본 사람들은 이 비단을 "촉강금"(蜀江錦) 라 불렀는데 지금도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호류지(法隆寺)에서는 당나라 때 보낸 촉금을 보관하고 있다.

사천 지역은 날씨가 온화하고 따스해서 누에를 기르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씨로 근래에 와서 이 전통적인 촉금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성도시 정부는 이에 관한 전문 인재를 배양하고 투자하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방방금(方方錦), 월화금(月花錦), 우사금(雨絲錦), 완화금(浣花錦) 같은 촉금은 가장 많은 내외 고객이 애용하는 품종이다.

옷감의 질이 좋은만큼 자수(刺繡) 역시 유명하다. 이는 바늘로 각종 색상의 실을 꿰매어 미리 설계한 무늬와 색갈에 따라 화려한 도안을 수놓는 것이다. 사천 자수를 촉수(蜀繡)라 부르는데 중국 4대자수인 소수(蘇繡), 호남의 상수(湘繡), 광동의 월수 중의 하나이다. 한나라 말기 삼국 시기 때 촉금(蜀锦)의 발전과 함께 촉수(蜀繡)는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고 이것으로 북방의 전마(戰馬) 등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였으며 촉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 되었다. 당나라 시기와서 이름이 더 날렸는데 각 지역 소수 민족 두령들도 모두 촉수로 자기 몸을 장식했으며 송나라때는 하늘 아래 최고의 품질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1831년, 청나라 도광제 시기에 자수업이 더욱 발전했는데 조정에서 자수업을 직접 관리하고 크게 지원했다. 이로서 더 많은 자수예인 (艺人)들이 모여서 작업소가 60여개나 되어 인재만 천여명이 되였으며 생산한 품종이 다양하고 공예의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에 와서는 촉수(蜀繡)가 더 높은 수준에 올라 1915년에 파나마에서 열린 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으며 관련 상품이 멀리 유럽, 미국, 인도, 호주 등 여러 곳에까지 팔려나갔다.

모든 중국 다 전통 문화가 그랬듯이 문혁 때 이것도 된서리를 맞았으나 1971년에 와서 저우언라이의 관심하에 예인들이 다시 복귀해 촉수(蜀繡) 생산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1982년 중국 공예품 회의에서 사천 촉수(蜀繡)는 2등상을 받으면서 다시 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1985년 프랑스 전시회 때도 우수 상품으로 평가받아 지금도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다. 현재의 베이징 인민 대회당 내 제 4회 의청에 "부용 잉어" 라는 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사천의 150명 수공들이 18일 동안 만든 촉수(蜀繡)라 한다.

현대에도 이 비단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해서, 고우영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를 방문했을 때 청두의 관광 안내도에는 실크로드를 장안이 아닌 청두로 연장해서 그린 그림을 올려놨다고 한다. (고우영 십팔사략 후한편)

7. 여담

한글로 쓴 '쓰촨성'의 발음이 매우 기묘하다. /s˭ɯ.t͡ɕʰʁ̞ʷɐn.sʌŋ/으로 발음하는데, 특히 촨(/t͡ɕʰʁ̞ʷɐn/) 부분이 매우 기묘해서 보통 원 발음인 '추안', 따라서 "쓰추안성"으로 발음하는 편.

'사천성'이라고 하면 중국의 지명보다 마작패를 일정한 룰 이내에서 짝맞춰 지우는 이른바 '상하이'류 마작 솔리테어 게임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사천성(게임) 참조. 한때 이런 마작 솔리테어를 기반으로 한 비디오 게임들 중 90년대 초 PC로 나오면서 잘 알려진 게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한 대만산 마작 솔리테어 게임이었기 때문. 스테이지를 깨면 므흣한 사진이 나오기도 한다 이후 개발된 이 게임의 룰을 차용한 건전한 마작 솔리테어류 게임도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쓰는 경우가 있어서(ex. 한게임 사천성) 은근히 대명사화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현시창 희곡 '사천의 착한 사람(Der gute Mensch von Sezuan; 번역에 따라 '사천의 선인', '사천 사는 착한 사람')'에서는 신들조차 GG치는 헬게이트 지역으로 나온다. gg친 신들이 '그래도 아직 착한 사람이 있도다'이라며 정신 승리를 하려 사천에 와서 천사표 윤락녀 셴테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중국의 티베트 문제가 불거질 때 서쪽의 티베트 자치구, 칭하이 성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지역인데, 쓰촨 성 서부가 전통적인 티베트의 세 영역[7] 중 하나라서 티베트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인들과 라오스인, 미얀마인들도 원래는 쓰촨성 일대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타이족과 라오족, 버마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한게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이들이 북쪽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명의 도시로 대한민국 경상남도 사천시가 있다. 다만 한자는 '泗川'으로 다르다. 종종 "사천에서 왔다"고 하면 "중국?"이라고 하는 개그를 들을 수 있다.

중국 미녀를 뽑을때 장쑤성 쑤저우, 저장성 항저우에도 미인이 많다(杭出美女)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나 여행객들이 꼽는 미녀가 많은 지역엔 쓰촨성과 충칭 시도 포함된다.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지위가 낮음을 알게 되고, 청두에 가면 자신이 너무 일찍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는 말도 있다. 쓰촨성 미인들은 피부가 깨끗하고 하얗다고 하는데 햇빛에 노출되기 어려운 기후 조건과 좋은 물이 영향을 주어서라는 얘기도 있다.

청두 사람들은 느긋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밑 윈난이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생활이 힘들땐 떠나요~ 운남성~ 하는 노래도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라면, 청두는 특유의 여유 있는 삶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여유' 하면 쓰촨을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여행해 본 결과 그 악명 높은 중국에서 그나마 친절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젊어서는 사천에 들어가지 말고 늙어서는 촉에서 나오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젊어서는 산전수전 겪어봐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안일한 삶은 피해야 하며, 반대로 늙은이들은 여기에서 편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쓰촨인들은 매우 평온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산이 천하의 난리를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인은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교적, 외향적, 낙천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고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편이다.

2017년 11월 말 청두에서 시안까지 가는 고속 철도가 개통됐다. 시안까지 3시간, 베이징까지 8시간이면 간다.

사천성 출신들은 타지역 출신들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다. 사천성 광안 출신의 덩샤오핑이 가장 좋은 예. 그래서 타지역 출신들은 쓰촨성 출신들을 먀오쯔(苗子, 땅콩보다 훨씬 더 작은 종자)라고 부른다.

2019년 3월 쓰촨성 네이장(內江)과 즈공(自貢) 일대에서 셰일가스 1247억㎥가 매장된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10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100년 이상 쓸 수 있는 양이라고 추산된다.#

8.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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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省都)는 청두/성도(成都)이다. 티베트족, 창족, 이족 등의 자치주가 있다.

8.1. 면양(綿陽)

본래 광한군 변두리에 해당하던 지역이었지만, 촉한이 최종방위요새인 면죽관을 세운 이래 장안과 성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조건까지 잘 써먹으면서 성도의 위성도시+사천성 두번째 최대도시로 잘 나갔었다. 세계테마기행 찍으면서 여기 간적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여기에 있는 '저수'라는 마을에 무슨 거대한 다리를 밟고 지나가면서 액운떨쳐내고 한해의 평안을 기원한다고 다리에 돈 뿌리고 입다버린 옷을 뿌리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몇백년 전통의 오래된 축제라고 함.) 이 축제가 외국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축제라 사천성 사람들만 오는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륙이라고 사람이 많아서 끼어들기도 못하는 수준이다. 이때 관광객들이 냅다버린 액운이 가득한 돈과 옷들은 가난한 이들이 들고 간다.

8.2. 남충

南充

사천성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사천성 동부에 있다. 본래 파서군의 일부지역이었다. 이지역에 속현인 낭중시(廊中市)는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게 거의 방법을 당하지 않아 전통이 잘 유지되어있는 '중국 4대고성'중 하나로 꼽힌다. 덕분에 낭중의 전통덕분에 뽕을 지대로 벌어먹고 있다.

장비가 파서태수로 있었던 경력이 있어서 이지역엔 '장비우육'이라는 소고기요리가 있다.

8.3. 낙산

乐山

도교의 성지로 꼽히는 아미산(峨眉山)이 있다. 심지어 아미산시(峨眉山市)도 있다. 아미산이 도교의 성지이지만 불교에서도 중요한 지역인지 거대한 낙산대불이 있다. 그 유명한 마라탕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과거 가정(嘉定)이라고 불렸으나 청나라때부터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8.4. 수녕

遂寧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고 난 뒤 이곳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수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 스타로 올라온 쥐징이가 태어난 곳이다.

8.5. 아바 티베트-강족 자치주

고대에 중국인들이 아직 점령하지못했던 간쯔와는 달리 한나라가 일부를 촉군으로 두고 있었다. 본래 오호십육국때 성한을 세웠던 저족이 살던 곳이었지만 저족은 동화되고 현재는 훗날에 강제이주로 들어온 강족들과 토번 이후 들어온 티베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8.6.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티베트에서 캄이라고 말하던 지역. 역사적으로 이지역은 대대로 티베트의 영토였고 토번의 전성기였던 송첸캄포 시절 중국당나라를 침공하는 주요 길목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북양정부시절에 티베트가 점령했던 적이 있다. 1953년 중국의 티베트침공당시 티베트합병과 동시에 쓰촨성에 편입되었다.

8.7. 량산 이족 자치주

한대부터 서남이라 불리던 남방민족들이 많이 살았는데 티베트가 한때 여길 병탄하면서 티베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덕에 티베트인들도 많이 살고 있다. 중화민국시기 신설된 서강성의 성도였던 캉딩은 이곳의 도시.

9. 출신인물

9.1. 고대, 중세

9.2. 근대

9.3. 현대(1949년 ~)



[1] 한어 병음 표기가 저래서 영어로는 정말로 쓰추안이 아닌 시추안으로 발음한다.[2] 작중 옥야천리(沃野千里),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평가된다.[3] J-10, J-20을 만드는 회사다.[4] 많이 높은건 아니고 영상 1도 정도라고 한다.[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히는 3세쯤에 집안이 촉 지방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6] 이때 24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7] 캄, 우창, 암도. 이중 캄지방의 동부가 쓰촨성 서부다.[8] 지금의 충칭출신, 출생 당시 사천 - 중경 행정 구역 분할 전이라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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