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7:45:59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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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춘추 전국 시대의 영역.jpg
춘추전국시대의 연대와 영역

1. 개요2. 역사와 구분3. 양상과 의의
3.1. 중국의 정체성 확립3.2. 문화적 발전3.3. 사상의 탄생
4. 여담5. 매체
5.1. 창작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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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경 주나라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한 뒤(동주시대)부터 기원전 221년 (秦)에 의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 건국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1]

2. 역사와 구분

춘추전국시대는 크게 춘추시대전국시대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진나라(晉)한나라위나라조나라3국으로 나누어진 때' 또는 '제나라에서 역성혁명이 일어난 때' 혹은 '월나라오나라를 멸한 때'를 경계로 삼아 구분한다.[2] 이렇듯 경계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공화 원년으로부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서기전 221년까지를 동주시대로 칭하기도 한다.

2.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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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동주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제후들이 많았고 전반적으로 서주 시대에서 시작된 왕 - 제후 - 대부 - 사 - 서민의 봉건제 질서도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가 패자로, 천자에 의해 주도되던 군사적 동맹인 회맹 등을 자신이 주도하며 중국의 세력가로 떠오른다. 기반 계층은 대부(大夫)였다. 그런데 고사성어를 배운 사람들은 알 수 있듯 사회 윤리적으로 무시무시한 생지옥이었다. 당나라 시대 이후의 사건들과 춘추전국시대의 사건들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엄청나다.[3]

2.2.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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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는 그저 피로 피를 씻는 배틀로얄의 향연이었다. 하극상이 난무하여 실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였고, 이 때문에 주나라의 봉건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신 전국칠웅들이 각지에서 변법을 통해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면서 군현제적 질서 및 편호 제민 지배 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20부. 전국시대 통일 전쟁

결과적으로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제자백가의 수많은 사상들이 대두된다.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에는 정치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 한자 문화권의 학문의 발달 방향 자체를 라틴어 문화권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놓은 시기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렇게 사상이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었다는 것은 각지에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다양한 인재들이 대두되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회의 유동성이 큰 시대였던 만큼 사(士) 계층이 정치 참여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 양상과 의의

7개 내외의 국가와 그 외의 수많은 소국들이 천하를 두고 쟁패했던 군웅할거의 시기로, 부족 및 도시국가 수준의 문명이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며 사회 각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겪고 중앙집권국가로 변모한 시기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역동적 사회의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사상적, 학문적 변화 역시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이념과 제도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했던 시기로, 이 시기 동안 축적된 문명적 진보와 변화는 이후 진한시대를 거치며 확립된 대략적인 중화권, 더 나아가 한자문화권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사의 기반이 되었다. 이에 '중국을 형성한 시대'라고도 불린다. 이 시대에 다져진 것들이 진한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중국이라는 문명의 정체성으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이전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전설로 여겨지는 하나라를 제외하고도 상나라(은나라), 주나라의 경우 시대적 구분으로는 단일국가로 구분되고 있지만 이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중국과는 성격 다소 다르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성읍국가 수준에 머물렀고, 이들의 힘과 영향력을 인정해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한 국가들은 있었으나, 이들 국가도 자치권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독립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에는 주도권을 잡던 패권국이라고 해도 커다란 영토를 바탕으로 한 국가라기보다는 도시국가의 형태에 보다 가까운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상, 주는 이후의 통일 왕조와 같이 확고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고 후대의 삼한이나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명목상 영토의 일부분만을 직할 통치하는 형태였다.[4] 이런 점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발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영역의 측면에서도 춘추전국시대는 장강 이남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상, 주 시기에는 이 지역이 중국 문화권에 포함되었다고 하기 어려웠지만,[5] 이 시기는 장강 이남의 제후국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문명권의 영역 확장이 발생한 시기였다.

3.1. 중국의 정체성 확립

상주 시대에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중심 국가였던 즉 , 의 수도와 그 인근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의미 그대로 가운데(中)에 있는 나라(國)라는 뜻. 자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지만, 주나라 대에는 천자가 자신의 제후들을 영토 외곽에 위치시켜 외적으로부터의 방파제로 삼는다는 관념이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지금은 명백히 '중화'의 영역에 포함되는 중국 내륙의 제후국을 번국(藩國)이나 번병(藩屛)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관계는 이후 한반도나 베트남 등의 주변 국가들과의 조공 관계에 쓰인 개념이었다. 바꿔 말하면 제후국을 조선이나 베트남, 일본 같은 '외국'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가 지속되면서 중국의 범주가 천하(天下)로 전환되어 넓어졌다. 그 결과 본래는 황하 인근의 '중화'와는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던 이민족 국가 , , , 등도 스스로를 '중국'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여 중화의 테두리 안으로 활발히 진입했다. 이러한 하나의 세계관이 형성되자 '중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나타나기 시작해, 마침내 진의 통일로 발현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정립된 이 헤게모니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 개념이 무너질 때까지 2000년 넘게 지속되어 중국에서 '천하통일'이란 춘추전국시대에 정립된 '중화'의 영역을 다 차지하면 완료된 것으로 보았다. 대륙 끄트머리에 아무리 많은 이민족들이 잔존해 있어도 일단 중화의 각 지역을 모두 손에 넣으면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반대로 아무리 많은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여러 땅을 차지했어도 중화의 영역에 남은 세력이 있으면 통일이 완료되지 않은 분열의 시기로 여겼다.

중국의 경우 중화사상, 통일 관념중국 신화의 역사화(역사 공정과 연결) 등 논란있는 개념을 남겼다.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주나라의 수많은 제후국들 중, 춘추 시대까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던 나라들의 이름은 이후 중국사에 명멸하는 수많은 국명들의 기원이 되었으며, 혹은 그 나라들이 있던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면 산동성 일대를 노(魯), 산서성 일대를 진(晉), 섬서성 일대를 진(秦)이라고 하는 것이다.

3.2. 문화적 발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가장 뒤늦게 나타난 중화 문명이 급속도로 근, 중동의 문명을 따라잡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철기 시대 및 기마술(전차가 아닌 개인 기마술)의 도입이 오리엔트 권역에서 대체로 기원전 12세기~9세기에 걸쳐 보급되었던 반면, 중국은 춘추시대에 들어서 수입되기 시작하여서 전국시대에 중국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즈음 되어서는 동원되는 인력의 규모나 대도시의 규모,[6] 생산력 등에서 오리엔트권의 제국에 밀리지 않거나, 특정한 분야에서는 이를 능가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때문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이 시기의 중국을 가리켜 강력한 근대국가의 원형이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군사적 차원에서 총력전의 원시적인 형태가 등장하였다고 평가받는데 귀족들만이 참여했던 전차 중심의 전쟁 양상을 탈피하기 시작하여, 백병전이 전쟁의 주요 양상이 되었으며,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로 진입하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 차원에서도 철제 농기구가 미흡하나마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은 전국시대 무렵에 인류 최초로 주조 제철 기법을 발명하였고 덕분에 철기를 손쉽게 대량으로 생산 할수 있었다. 이는 고온의 화력에 도달할수 있는 피스톤식 풀무, 용광로와 고온환원법 덕분인데 유럽이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는것은 천수백년 뒤이다. 경제사의 측면에서도 도전, 포전, 원전 등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고 전국적으로 물류와 유통이 활발해져 후일 진나라,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광대한 중국이 하나의 단일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는 기초가 된다.

중국으로 편입된 이민족 외에도 동아시아 문명을 형성하게 될 주변 이민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을 미흡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는 첫 시점이 전국시대이고, 고대 중국의 숙적 흉노 또한 이설이 많으나 전국시대 후기에는 그 세력이 완연히 두각을 나타냈다.

3.3. 사상의 탄생

제자백가
농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병가 유가 음양가 잡가 종횡가 소설가

사상적인 문제는 애초에 쉽게 우열을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 다양성 측면에서는 제자백가라는 표현이 드러내듯 근대 이전 중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사 내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의 창발적 다양성을 능가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오리엔트권에서 주로 인격신 개념이나 군주의 신격화에 사상 경향이 집중된 것과 달리,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는 탈신화적이고 실용적인 경향을 띠었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도 시간적 거리와 지역차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권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시대의 철학적 동향이 주로 서양고대 그리스에 비견되지만, 그 둘을 비교하면 춘추전국시대는 훨씬 더 정치적, 실용적이었으며 인간의 현실적 삶과 국가의 문제에 집중한 경향이 강한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논리 영역과 연역 추리 분야가 발달하였다. 물론 양 쪽 모두 그러한 문제만 독점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에도 명가는 논리 철학에 집중하였고 장자는 주관적 시선에서의 탈피, 역설 제시 등에 기여하였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에서 이상 국가의 건설이라는 문제를 공을 들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두 지역의 정치 현실이 달랐기 때문에 관심 분야 또한 달랐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이때 중국의 사상적 경향은 인본주의, 현실주의 정치론 성향을 강하게 띠며, 이는 대체로 후대의 중국에도 계승되었다.

유가, 묵가, 법가 등 대부분의 주류 사상과 관리 계급에서[7] 탈주술화가 일어났으며 유물론 비슷한 개념이 형성된 점도 특기할 만 하다.
  • 순자는 천인분이론을 말하며 기근도 하늘의 재앙이 아니며 사람이 준비하면 대비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를 계승한 법가는 현대보다 합리적[8]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유가묵가을 인정하기는 했다. 하지만 유가에서는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 정당성 셔틀에다 가끔씩 제사나 올리는 정도였으며 기복적인 요소는 많이 퇴색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전체로 본다면 초기에 활동했던 공자부터가[9]괴력난신을 부정하고 삶을 모르는데 죽음(귀신)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고 했다. 묵가는 운명을 부정했으며 천을 사람이 선행을 하면 복을, 악행을 하면 벌을 내리는 자판기 취급했다.
  • 종횡가에서는 초자연적 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현실국가 간의 역학관계에만 집중한다. 도가의 도마저 애니미즘/토테미즘적인 인격신이 아니라 근대 서양 철학자들도 주장했던 범신론적 신이다. 물론 후대 도교에서는 기복적인 요소가 추가되지만 이는 도교가 민간신앙에 도가 사상을 합쳐서 만들었기 때문으로 도교의 기복적인 요소는 민간신앙에서 온 것이다.
  • 음양가에서는 음양오행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은나라 때는 사소한 일도 갑골문 점에 의존하고 순장도 했지만 점점 더 인간 중심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춘추시대만 해도 점을 쳤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인본주의라는 측면에서는 르네상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초나라소왕이 병에 걸렸는데 복인(卜人)이 하급자를 죽이고 푸닥거리를 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하지 않고 죽었다. 이에 공자는 대체(大體)를 안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고가 현실주의화, 체계화되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비교적일뿐 현대에 비하면 전근대적 한계가 엄연히 존재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고대 그리스에서 이성(logos)을 중시하며 발달했던 연역 추리 분야는 중국에서는 발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근대식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논리적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상에 대한 경험적 근거에 의한 대처만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초나라 소왕의 일화 또한, 반대로 보면 초나라의 왕 근처에 복인(卜人)이라는, 속되게 말하면 점쟁이가 있으면서 국정에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인 것이다.[10] 또한 현재는 한의학 같은 특수 분야를 제외하면 상술했듯이 성명학에서나 볼 수 있는 음양오행설이 법가적 현실주의가 극한에 달했던 전국시대 말기에 성립한 것이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에 걸쳐서 여전히 널리 유통된 주역은 최대한 철학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점술 문헌으로 널리 쓰였으며 그 때문에 이후 시대에도 분서갱유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4. 여담

  • 각지의 국가가 성장하여 대두되고 일원적인 패권이 없어 치고 받는 싸움이 계속된 시기라는 의미에서, 붕괴 후 혼란기난세나 대국의 멸망과 수많은 소국들의 난립, 헬게이트 어떤 분야에 수많은 사람 혹은 팀들이 나타나 무한히 경쟁하는 시기를 비유하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 중국 민주화 운동의 일파로 춘추전국시대 중국 통일 이전 분권화된 질서에 영감을 받아 현 중국의 해체와 각 지역의 분리 독립을 통해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제하주의라는 급진적인 사상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지지를 얻기 어려운것이 중국인 대다수가 미국에 버금가는 자국의 영향력이 내려가는것을 원치 않을뿐더러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기까지의 혼란기(길게보면 문화대혁명 시기까지의) 중국이 쇠락했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교육과정에서 배우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제재가 없어도 현실에서 말했다가는 매국노, 잘해봐야 철없는놈이 지껄이는 헛소리라는 딱지가 붙기 좋다.

5. 매체

  • 춘추전국시대라는 제목의 게임이 출시된 바 있다.
  • 대중매체에선 춘추시대보단 전국시대. 그 중에서도 진시황의 통일시기를 제일 많이 볼 수 있다.

5.1. 창작물 목록



[1] 따라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일부에 해당하기도 한다.[2]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다들 주나라와 관계, 특히 인척관계나 군신관계가 없거나 사라졌다는 점이다. 즉, 전국시대의 기원은 주나라와 상관없는 국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다만 초나라 같은 경우 그 왕가가 처음부터 주나라와 관련 없긴 했다.[3] 공자가 인과 예를 내세우고 괴력난신을 금하는 내용을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공자는 이른바 계급제도를 옹호하는 식의 이론을 세웠다고 비판받지만 이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거고 당시에는 정말로 엉망진창이라 군주라는 놈이 자기 여동생붙어먹기 위해 매부를 죽이고 군주와 신하들이 모여서 한 여자구멍동서가 되는 등 윤리 도덕적 난맥이 심각한 상태였다. 심지어 공자의 가장 아끼던 친구이자 제자인 자로도 이런 일에 말려들어서 죽고 그 시체는 젓갈이 되었을 정도였다.[4]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의 개념을 만들고 본격적인 통일 중화제국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기존의 도시 국가의 할거와는 기본적인 정치적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5] 이때는 장강 이남에 오스트로네시아족(고대 말레이인이나 필리핀인들의 원류)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고대 크메르인 계통의 집단), 묘족을 비롯한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수많은 종족들이 주거하고 있었고, 크라다이어족태국인이나 라오인, 같은 중국티베트어족이지만 티베트버마어파로 어파가 다른 버마인들도 이 시기에는 중국 남부지역에 주거했었다.[6] 전국칠웅중 상대적으로 변방에 있던 연나라만 하더라도 주요 도시였던 연하도의 면적이 31제곱킬로미터에 달했었고 전통의 강호였던 제나라의 수도 임치는 성벽둘레가 20km에 도로의 폭이 17미터에서 20미터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최대규모의 도시이다. 통일된 국가도 아닌데 체급이 이 정도 였다는 것.[7] 물론 민중들은 기복신앙을 유지했을 것이다. 진승·오광의 난 때 물고기에게 글귀를 먹이고 주작하는 사례에서나 유방이 뱀을 죽였다는 얘기를 퍼뜨려 아우라를 얻었다는 사례에서나 민중들은 신화적인 것에 쉽게 혹한 것을 볼 수 있다.[8] 다른 말로 하면 빡빡한 것이기도 하지만.[9] 사실 공자가 공부와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문치(文治)와 탈주술화의 신호탄을 알린 면이 있다. 사실상 지역을 점령하고 개간해서 세금을 뜯는 조폭과 다를 것 없는 제후에게 쓰던 군자라는 말을 수양한 사람에게 확대한 것만 봐도 그렇다.[10] 이후 시대에도 초나라는 점복이 몹시 발달한 나라였다. 사마천사기 일자열전(日者列傳)에서 점술가(蔔人)로 언급한 유일한 인물인 사마계주(司馬季主) 또한 초나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