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6:41:57

진(남조)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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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 | Chen Dynasty
파일:북제-남진.png
지도의 분홍색 부분 (557년 기준)
557년 ~ 589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소량
별칭 남진(南陳), 진진(陳陳)
위치 중국 화남, 베트남 북부
수도 건강(建康)
면적 1,330,000km² (572년 기준)
인구 2,000,000명[1](15,000,000명[2] 추정) (589년 기준)
민족 한족
언어 중세 남방 중국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화폐 태화육수(太貨六銖)[3]
정치체계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영천 진씨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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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무황제 (557년 ~ 559년)
세조 문황제 (559년 ~ 566년)
고종 선황제 (569년 ~ 582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상세3. 멸망 이유4. 역대 황제5. 추존 황제

[clearfix]

1. 개요

557년에 건국했다가 589년에 멸망한 중국 남북조 시대 왕조로 육조시대의 마지막 왕조다. 남진(南陳), 진진(陳陳)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사에서 한나라 이후로는 드물게 국호와 국성이 같은 왕조다.[4]

2. 상세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은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군인 출신으로 양나라 시대 후경의 난을 진압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적국 북제에 동조한 동료 왕승변을 죽이고 후속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양나라의 대권을 장악했다가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것은 좋았지만 남조는 북조에 비해 지나치게 잦은 왕조교체와 연이은 혼란기로 국력 자체가 크게 떨어져있는 상태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천 전체와 강릉을 비롯한 장강 중류의 강 북쪽 지역은 북주후량의 손에 넘어갔고,[5] 장강 이북 지방은 북제에게 넘어갔으며 그나마 장강 중하류를 두고 북제와 계속 공방전을 벌이는 상태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국가가 창건할 때는 사실상 수도인 건강 주변만 장악한 상태라 양나라의 다른 지역에 웅거한 지방 군벌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었고, 나머지 강남 지역을 통일한 것도 몇년 뒤인 문제(진천)의 시대 말에나 가능했다. 그래서 사실상 양나라 때보다도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이는 양나라 말기의 대규모 내전으로 인해 건강과 그 주변이 황폐화한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양나라 말기 때보다는 오히려 내부적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과거 남조의 주요 왕조들은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귀족 계층은 그대로 존속할 뿐더러, 귀족이 되고 안되고는 귀족들이 스스로 결정하지 황제도 간섭하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특히 양나라 시절에는 문벌귀족의 타락과 무력화가 매우 심각했는데 양나라 말기의 대규모 내전이 이걸 싹 깨버린 것이다. 실무 능력도 없는 주제에 헛소리만 늘어놓던 위나라 이래의 귀족 집단이 극소수만 남긴 채 죄다 날아간 상태가 되어 있었고, 한인(寒人)이라고 불리며 천대를 받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정계의 주역으로 당당하게 등장해 있었으며 양무제를 절망시켰던 극심한 빈부격차도 역설적으로 대단히 많이 해소되어 있었다. 또한 양나라 말기에 등장한 각종 양아치 집단들이 진패선의 적극적인 정리 사업 끝에 모조리 다 정리되는 결말을 맞는다. 게다가 삼국시대의 오나라보다도 면적이 작긴 했으나, 육조시대 내내 강남이 개발된 덕에 인구나 경제력은 오나라보다 훨씬 컸다.

즉 영토는 많이 줄었지만 사회의 응집력이나 건전한 활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고, 마침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왕조마다 대부분은 암군이나 폭군이었던 남조의 전통(?)이 일시적으로 끊겨 진패선도 그 이후도 한동안 괜찮게 통치를 했다. 덕택에 선제(진욱) 시절에 북제가 막장테크를 탄 틈을 타서 회수 이남을 일시 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제를 병합한 북주의 관롱집단을 상대하기엔 여러모로 역부족이어서 선제의 당대에 장강 이북을 4년만에 다시 빼앗겼고, 망한 북주를 대신해서 나타난 건 희대의 명군 수 문제의 수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치에 능한 군주가 등장해서 어떻게든 이런 유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국력을 끌어올렸다면 남북조가 어찌 유지되었을진 모르지만, 하필 당대 군주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진숙보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나라는 진왕 양광(훗날의 수양제)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하약필, 한금호를 선봉으로 강을 건너 건강을 함락시키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400년에 걸쳐 분열되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양견은 진나라 일족과 양나라 일족 전부를 숙청하였다. 숙청을 피한 나머지 진나라와 양나라 일족들은 서쪽에 이주시켰다. 하지만 몇년 후에 양견은 서쪽에 이주시킨 남진과 양나라의 일족들 대부분을 노비로 삼았고 남은 일부는 전부 숙청하였다.

3. 멸망 이유

사실 남진이 망한 것은 회남 상실 + 강릉을 수복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먼저 진 선제는 북제와 북위 간 전쟁을 벌이던 틈을 타 북제가 차지하고 있던 회남지역을 공격해 575년 회남 전역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군은 579년 남진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남진은 회남 지역을 전부 북주한테 빼앗겼다. 결과적으로 진나라가 회남 일부를 유지했었다면 588년 수나라군이 장강을 도하해 남진의 수도 건강으로 바로 직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강릉을 미수복한 점에 있다. 사실 이쪽이 더 심각한 문제인게, 원래 강릉은 남조 방어선의 마지노선 같은 존재로 손오가 이곳을 처음 점거하면서 동진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모범답안을 처음 제시한 바 있었고 후대의 남송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맹공이 몽골에게 역공을 가하며 방어선을 수복한 전례가 있었다.

문제는 남진의 경우엔 건국 당시부터 강릉이 북주의 괴뢰정권 후량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이를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진은 방어선의 부재에다 혼군인 진숙보로 인해 건국 32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사천지역의 상실도 컸다. 삼국시대 말기 오나라는 촉한이 멸망하면서 조위-서진과의 국경이 장강에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이어져 부담이 커졌는데 남진 시기의 남북조 구도가 이와 유사했다. 그나마 북제가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북주도 남진 뿐 아니라 북제에도 신경써야 했으니 어떻게 무사했고 북제가 망한 뒤로도 북주가 곧장 무너지고 수나라가 들어섰기에 꽤 오래 멸망을 늦출 수 있었지만[6] 이러는 과정에서 남진을 멸망시키는데 방해될 요소가 사라지며[7] 결국 수나라가 남진을 침공했을 때 아무 방해를 맏지 않고 남진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4. 역대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1대 진 고조(陳高祖) 무황제(武皇帝) 진패선(陳覇先) 영정(永定)557 ~ 559 557 ~ 559 만안릉(萬安陵)
2대 진 세조(陳世祖) 문황제(文皇帝) 진천(陳蒨) 천가(天嘉) 560 ~ 566
천강(天康) 566
559 ~ 566 영녕릉(永寧陵)
3대 - -
,<폐황제(廢皇帝)>,
,<임해왕(臨海王)>,
진백종(陳伯宗) 광대(光大) 567 ~ 568 566 ~ 568 -
4대 진 고종(陳高宗) 효선황제(孝宣皇帝) 진욱(陳頊) 태건(太建) 569 ~ 582 569 ~ 582 현녕릉(顯寧陵)
5대 - 장성양공(長城煬公)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지덕(至德) 583 ~ 586
정명(禎明) 587 ~ 589
582년 ~ 589 -

5. 추존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rowcolor=#ECE5B6> 제호 미헌상 추존자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 - 보병부군(步兵府君) 진정(陳鼎) - - -
- - 정원부군(正員府君) 진고(陳高) - - -
- - 회안부군(懷安府君) 진영(陳咏) - - -
- - 안성부군(安成府君) 진맹공(陳猛公) - - -
<rowcolor=#ECE5B6> 제호 헌상 추존자
<제호 미헌상 추존자와 동격배향(同格配享)>
- - 효황조(孝皇祖)[8] 진도거(陳道巨) - - 수릉(壽陵)
- 진 태조(陳太祖)[9] 경황제(景皇帝) 진문찬(陳文讚) - - 서릉(瑞陵)
- - 소열황고(昭烈皇考)[10] 진도담(陳道譚) - - -


[1] 至後主滅亡之時,隋家所收戶五十萬,口二百萬. <通典>, 食货七 기록[2] 589년 기준[3] 579년 효선제 진욱 때 주조 시작[4] 사실 주나라봉건제를 시행할 때 각지에 배치된 제후들 상당수가 지명을 씨로 채택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국호와 국성이 일치하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은(殷)·주(周)·송(宋)·노(魯)·오(吳)·진(晉)·진(秦)·정(鄭)·채(蔡)·심(沈)·양(梁)·우(虞) 같은 성씨는 현대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당장 여기 나오는 진씨도 진(陳)에서 기원한 것이고.[5] 정확히 말하면 두 지역 모두 진패선이 선양받기 전에, 사천은 진패선이 집권하기도 전에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6] 북주의 멸망에서 남진의 멸망까지 12년이나 걸렸다. 짧아보이지만 그래도 남진 존속기간의 1/3을 넘는 기간일 뿐더러 황제도 한 번 교체되었다.[7] 북제가 무너지고 그 잔존세력까지 괴멸당했다. 그렇다고 진나라가 타국에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돌궐은 힘은 있으나 너무 먼데다 그마저도 분열되어 약해진 채 동돌궐은 수나라에게 복속되었고 고구려는 힘이 있지만 수나라를 쳐들어가 이길 정도는 아니라 백제와 신라는 말할 것도 없다.[8] 진 무제 추존.[9] 진 무제 추존.[10] 진 문제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