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7:14:04

명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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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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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청(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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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1. 23. ~ 1644. 4. 22.
(276년 2개월 30일)
1616. 2. 17[1] ~ 1912. 2. 12.
(295년 11개월 26일)
총 554년 19일

1. 개요2. 상세3. 역사4. 특징
4.1. 제도4.2. 외교4.3. 의복
5. 외국에 끼친 영향
5.1. 한국
6. 미디어에서

[clearfix]

1. 개요

明淸時代(明清时代)

명나라청나라 두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명청대() 혹은 명청제국()이라고도 한다. 1368년 1월 23일 명이 건국된 시점부터 1912년 2월 12일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기까지 총 544년 19일의 기간을 말한다. 중국사에서는 근세~근대 초기를 아우르는 시대이다.

명 태조 주원장부터 청 선통제 애신각라부의까지 28명의 황제가 다스렸다.[2]

2. 상세

한국사에서는 한 왕조의 존속기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두 왕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서 보기가 힘들다. 당장 고려 시대조선 시대를 합쳐서 보자면 918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1000년에 가까운 시대가 된다. 게다가 그 왕조 안에서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기 때문에 흔히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두 개 이상의 왕조를 한 시대로 묶어서 보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단 명청시대 뿐이 아니라 한 왕조의 수명이 짧은 중국 역대 왕조 특성상 진한제국, 위진남북조 시대수당시대 등 여러 왕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서 보고 있다. 다만 수당시대는 수나라가 너무 단명을 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 흡수된 것 뿐이며[3], 수나라와 당나라는 건국 세력 자체가 같은 관롱집단이었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더욱 힘든 부분이 있다.[4]

명나라한족 국가, 청나라만주족 국가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차이가 있었고, 그만큼 언어의식주, 문화의 차이도 크다. 명이 만 276년, 청이 만 295년을 존속했으니 둘 다 중국사에서는 상당히 장수한 왕조이기도 하다. 위의 사례들처럼 왕조가 짧은 경우면 몰라도 명청시대는 한 시대로 묶기에는 꽤 긴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명청시대로 한 데 묶어서 부르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적으로 근세(近世)라는 역사적 시간 구분을 대략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기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근세라는 시간적 범위 안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근세란, 중세근대의 사이, 그러니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인데, 동양에서는 몽골 제국의 붕괴를 보통 중세의 끝자락으로 보며, 이 근세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도래하고 신문물이 들어오는 시기에 끝이 난다. 근대 자체는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이 무너지고 급격히 서구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명확히 구분된다는 특징이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근세가 시작되는 시점인 14세기 초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되며 농작물의 흉년이 들고 민심이 이반되어 많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다. 특히 무지성으로 확장을 해대던 몽골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흉년은 드는데 다스려야 할 영토는 너무 넓고 백성들은 많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홍건적의 난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가 건국되기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 역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졌으며,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지는 등 전세계적인 혼란과 정권 교체가 발생했다. 동양 3국의 근세 국가는 이렇게 정립되었다.

이 시기 국가의 특징은 기존에 남아 있던 봉건제의 요소가 완전히 무너지고 완고한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강력한 공권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행정체계는 관료제 성향이 특히 강하였고, 청나라 역시 명의 제도를 이어 받아 관료제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는 동 시대에 존재했던 조선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특성이다. 즉, 문화나 다른 것은 몰라도 명나라와 청나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틀 자체는 같은 시대로 묶을 만큼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분열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던 중국 역사에서 거의 고스란히 통일제국을 인수받은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에도 명의 잔존 세력들은 남명을 만들어 약 18년 간 버티긴 했지만 그마저도 실질적으로 유지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특히 청나라는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명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례적으로 궁궐도 새로 짓지 않고 명나라 때 쓰던 자금성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청이 명을 계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청 또한 근본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므로 명의 제도나 정책 등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 받아 보완하며 사용하기도 했다.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졌던 제도는 훗날에 더 보완이 되거나 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청이 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을 존속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원명교체기와 대비되는 점은,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 올라갔어도 거의 명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살아 있었고, 원이 망해서 한족들이 정권을 인수받은 것이 아니라, 이민족이 물러가고 다시 한족의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원나라와 명나라는 같은 시대에 묶일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동안에 한족과 몽골족의 동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골족은 철저한 계급제를 시행하며 아예 한족과 몽골족이 섞일 만한 여지를 원천봉쇄를 해버렸고, 명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또 중국에 남아 있던 몽골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 이런 이유로 원과 명은 서로 다른 시대라는 느낌이 강하며, 이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나라와 명나라 두 왕조는 보통 원명시대로 묶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청나라는, 비록 명목상이라고는 하나 공식적으로는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게 아니라,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으며 이자성순나라를 참칭한 반역자라고 규정해 명목상 이자성 처단과 명나라 계승을 표방해 그 정권을 거의 인수받다시피 해서, 그 과정에서 분열의 시기도 짧았고 원나라만큼 철저한 분리주의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동화가 빨리 될 수 있었다. '명목상'인 이유는 실제로는 본인들도 명나라의 멸망에 지속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한족 백성들에게 만주족의 의복이나 변발 등을 강요하면서도, 반대로 한족의 제도나 문화 중 본받을 것은 본받으며 본인들 스스로도 한족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청말로 가면 현재는 만주어가 거의 사어화되었을 만큼 아예 한족에 동화가 되어버렸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는 만주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300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한족과 만주족은 거의 구별 없이 한 국민 집단으로 융화되었으며, 명청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문화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명나라와 청나라는 하나의 시대로 묶이게 되었다.

3. 역사

3.1. 원말명초

13세기 후반, 14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소빙하기가 시작되며 흉년이 이어졌고, 대규모로 민심이 이반되며 원나라는 급격히 중국에 대한 통제를 잃어 갔다. 또한 한족은 원나라의 지배 하에 굉장한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심이 대단했다.

이런 와중인 1351년, 황하가 물길이 바뀌자 원나라의 승상이었던 토크토아가 물길을 원래대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다른 강도 아니고 황하의 물길을 바꾸는 것인만큼 백성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상황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중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은 마침내 지금이 때라고 생각하고, 농민 출신이었던 유복통과 손을 잡아 자신이 새로운 중국의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산동은 자신이 송 휘종의 8세손이라는 선전을 하고 송나라의 재건을 선언하며 드디어 홍건적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한산동은 낌새를 눈치 챈 수령에 의하여 살해 당하고, 홍건군은 동계홍건군과 서계홍건군으로 분열되었다. 동계홍건군의 수장이었던 유복통은 송나라의 후신을 자처하며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소명제(小明帝)로 옹립하였다. 서계홍건군은 천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 수장인 서수휘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그들은 1357년 북벌을 단행하여 원나라의 여름수도였던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맹)까지 진격해 중원을 거의 다 수복할 정도였지만, 곧바로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자 고려까지 밀려 들어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1363년 2월에 유복통이 전사하면서 동계홍건군은 곽자흥이 이끌게 되었으나, 끝내 곽자흥 또한 전사하면서 1366년에 이르러서는 동계홍건군의 송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앞선 1361년에는 서계홍건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진우량이 수장이었던 서수휘가 살해 당하며 천완국도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서수휘를 살해한 진우량이 (진한)을 건국하였고, 명옥진하나라(명하)를 세웠으며 그 밖에 홍건적에 속하지 않은 방국진, 장사성, 진우정 등의 세력이 일어나 서로 싸우며 중원은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한족 국가의 재건은 무위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곽자흥의 수하였던 주원장이 소명제 한림아를 데리고 탈출하여 舊 동계홍건군 세력을 흡수하였고 지도자로 추대된다. 이후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오왕(吳王)이 되어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였고, 1367년에는 원나라의 위협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침몰 사고를 일으켜 한림아를 익사시키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투항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

이윽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로 즉위하고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명청시대 544년의 서막이 올랐다. 명나라는 건국 직후 이후에도 북벌을 단행하며 군벌들을 계속해서 흡수해 갔고, 명군이 원의 수도였던 대도를 함락시키며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로써 잠시간의 혼란기가 끝나고 중원이 통일된 것이다. 명나라는 이 무렵 수도를 난징으로 정하였다. 이후 홍무제는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명나라의 기틀을 닦았고, 홍무제가 사망한 후 홍무제의 손자인 어린 건문제가 명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홍무제의 4남 연왕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건문제는 실종되고 주체가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명나라의 제3대 황제, 영락제였다.

그는 명청시대에서 훗날 청나라강희제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한국사로 따지면 조선의 기틀을 닦은 태종이나 세종에 대응하고, 강희제는 조선의 중흥을 이끈 영조정조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영락제는 아버지 주원장처럼 신하들을 대거 숙청하며 폭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북방 영토를 확장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제도를 정비하며 지방 통치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제도가 청말까지 계승되며 명청시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그는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인물로 영락제 시절에 만들어진 자금성은 명청시대의 궁궐로 500년 간 사용되었다. 하지만 외적으로 빛난 이 치세는 환관 발호의 씨앗이 뿌려지고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는 등 어두운 측면 또한 분명히 있다.

3.2. 번영과 쇠퇴

명나라는 약 2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안정적으로 중원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시기 10만명 가량의 공신을 숙청하면서 황제/재상의 티키타카는 멸종해버렸고 황제의 개인기로 나라가 돌아가는 체제로 바뀌게 된다. 다행히 앞의 영락제에 이어 5대 선덕제까지는 유능한 편이어서 외정 상 안정적인 전성기(인선지치)를 이어왔다. 허나 이는 정치 체제를 암군에 취약하게 만든 명의 치명적 결점으로 자리잡았고, 더 나아가 정화의 원정 이후 해금정책을 펼치면서 명은 중화문명이 서양에 과학 기술과 헤게모니를 뒤쳐지게 만든 시초 국가의 오명을 쓰고 만다.

그리고 6대 정통제 때 들어 환관 왕진으로 인해 내정이 망가지다 끊임없이 북방의 위협을 받았고, 토목보의 변으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납치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 잠시 혼란기에 빠졌던 적도 있다. 하지만 성화제홍치제 시절에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며, 특히 후자는 한족 최후의 명군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정치를 이행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홍치제 이후로는 이른바 명 4대 암군의 치세가 약 110년 가까이 이어지며 명나라는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는다. 먼저 정덕제는 그나마 후대 황제들보다 정치는 잘 했다만, 환관 유근에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놀러 다니다 물에 빠져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함으로 인해 이후 역대급 암군 러쉬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특히 월경혈로 단약을 만들고 궁녀를 혹사한 헛짓거리로 유명한 그 가정제 시기 즈음(16세기 중반)부터는 변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국가 치안이 북로남왜로 인해 완전히 파탄난다. 그나마 융경제 ~ 장거정의 실권 시기 15년 동안 일조편법 등 국가 개혁을 통해 가정제 시절의 폐해는 어느 정도 해결되나, 이후 등장한 왕조 최강의 암군 만력제가 제위 기간 중 32년이나 파업을 하고 주색잡기에 열중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명나라는 회복 불능 상태에 접어든다. 특히 임진왜란을 비롯한 만력 3대정이나 궁궐 암투 명말 3대 의안은 나라 재정과 황실의 권위를 막장으로 몰았고, 결국 태자 태창제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안 그래도 아팠던 태손 천계제가 문맹이 되는 스노우볼로 이어진다.

이런 4대 암군 시대의 연이은 실정은 명이 국제질서를 리드하긴 커녕 백성들을 못 살게 구는 반란천지 불량국가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고, 다음 왕조인 청나라의 전신이 되는 여진족누르하치의 통일로 말미암아 세력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3.3. 명말청초

건주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는 이미 거대한 세력으로 커진 뒤였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제안하는 등 명나라와 조선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가 요동 지역의 군대(북병)를 조선으로 파병하고, 내부의 반란 진압(만력 3대정)에 정신이 없던 사이에 숙적인 해서여진을 장악하는 등 점차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졌다. 이후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1618년 명나라에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군사적으로 사르후 전투에서 청에 완패하여 요동을 영구적으로 빼앗겼고, 내정 부문에서도 천고일환 위충현과 유모 객씨의 패악질로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며 1620-30년에 걸쳐 몽골 차하르부 정복, 정묘호란병자호란을 통한 조선 복속을 이뤄낸다. 같은 시기에 명 장수들의 투항도 받아 홍이포, 수군도 수중에 넣게 된다.

게다가 명은 요동 방어를 훌륭하게 수행하거나 영원성 전투를 대승한 웅정필, 원숭환을 자기 손으로 능지처참하는 미친 짓을 해버렸고, 마침 숭정제는 근세 소빙하기 기근에 들고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고 있던 홍승주송산 전투로 돌렸다가 모든 정예병력을 상실해버렸다. 결국 1644년 이자성에게 자금성이 함락당하고 그는 뒷산 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하여 명나라는 멸망.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던 오삼계는 반란군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청나라에 투항하는 쪽을 택했다. 1644년 5월 27일, 곧바로 입관도르곤의 청군과 오삼계의 연합군은 일편석 대전에서 이자성군을 대파하고 이후 청은 잔존세력을 정리하면서 화북을 순식간에 제패했다. 그 후에도 분열되어 있었던 남명 정권을 하나하나씩 제거하여 차츰차츰 중국 전토를 정복해나갔다. 남명 잔존 세력은 이전에 있었던 강남(중국) 망명 정권인 동진남송과는 달리 하나의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기에 서로간의 내분으로 단합하지 못했고 결국 1662년 강희제가 보낸 오삼계가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

이후 오삼계의 삼번의 난, 그리고 마지막 반청 기반으로 자리잡은 정성공대만 동녕 왕국의 멸망을 계기로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명나라의 한족 잔당들을 일소하고 중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권의 피아 식별과 정체성 유지를 위해 변발을 강요한 것이 남부 지방의 반발을 일으켰고, 이에 만주족은 양주십일 같이 반청 한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일으키며 그들을 굴복시켰다.

3.4. 강건성세

청은 4대 황제 강희제 시대부터 황무지 개관 지원, 인두세 고정의 여파로 통계에 잡히는 백성 수가 늘며 국력의 절정기로 달려간다. 이후 아들과 손자인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총 135년에 걸쳐서 청은 문화, 민생, 경제, 무역 등의 여러 방면에서 많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농업, 상공업 등의 생산 및 기술력 등 상업 분야가 대폭 발달되고 다양한 종류의 상품, 문물들이 대상인과 상점을 통해 유통되어 경제가 발달하였다.

우선 내정 측면에서 굉장한 안정이 왔는데, 여기엔 옹정제의 역할이 주요했다. 그는 점점 심해지던 관리들의 부정부패 단속을 위해 모선귀공(耗羨歸公)과 양렴은(養廉銀) 제도를 실시해 청나라의 청렴도와 재정 흑자를 크게 개선했다. 또한 관리를 감시하는 밀접 제도, 황위 계승 분쟁에 경쟁 요소를 더하면서도 권력 다툼은 줄이는 비밀건저제(秘密建儲制)를 청에 자리잡게 하였다.

또 청나라는 이 시기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실행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티베트(1720년)와 위구르를(1755년), 북쪽으로는 몽골을 장악하여 현재의 연해주 일대를 제외한 오늘날 중국 영토의 원형을 확정시켰다. 이미 러시아의 위협은 네르친스크 조약, 캬흐타 조약 등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키며 일소하였고, 훗날 건륭제 시기 때는 1470만 km2에 달하는 역대 최대 강역을 달성하며 황제 자신이 '원정 열 번을 모두 승리한 노인'이라는 뜻으로 십전노인(十全老人)를 별호를 사용하며 군사 업적을 칭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상 식민 지배를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한족들에게 이 시대는 마냥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특히 세 황제 시대에 문자의 옥으로 9족이 멸족당한 사건이 꽤 있고, 시대가 갈수록 사소한 이유로도 자결시키는 사건이 잦아졌다. 이 피의 시기 때문에 중국 인민들의 DNA에 정치적 무관심이 생존의 비결로 새겨져버렸고, 학자들이 고증학에 몰두하며 현재를 멀리하는 폐해가 자라나게 된다.

게다가 건륭제 때부터 내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잦은 전쟁과 남방 순회 사치 탓에 국력 또한 빛이 크게 바래가고 있었다. 치세 후반부에는 니오후루 허션이라는 간신배를 국정에 끌여들여 나라가 기울어갔고,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며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악화됐으며, 소규모 자작농들의 삶은 비참했고 곳곳에서 백련교도의 난 등 민란이 발호했다. 외적으로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제국이었으나 속으로는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며,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청나라는 결국 가경제 연간부터 본격적인 쇠락의 길을 타고 만다.

3.5. 청말민초

가경제는 나름 평범한 군주였고 개혁을 시도해 본 황제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전대부터 쌓인 고관대작들의 부정부패, 모랄 해저드, 중화사상(월클병)은 도저히 후진적 체제에서 황제의 개인기로 고칠 수 없는 레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노동력 착취로 해결해오던 그들에게 맬서스 트랩이 찾아오나, 그와 아들 도광제는 이걸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강경하지 못했다.

한편 같은 시기 영국이 대청 무역 적자를 해결하려 팔아제끼는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보다 못한 도광제는 1839년 흠차대신 임칙서를 광저우로 파견했다.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양광총독 등녕진(鄧寧進), 광둥 수군 제독 관천발(關泉發) 등과 힘을 합쳐 해안 방비를 정비하고 아편 상인들을 강경히 단속했다. 그렇게 벌어진 호문 아편 소각 사건 및 수군이 상선 2척에 대패한 사건은 영국의 1차 아편전쟁 개전을 촉진하였고, 결국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자 결국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왕조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전쟁은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이 이미 늙어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으로, 향후 백년국치의 서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850년대 들어 태평천국 운동으로 수천만명이 죽고 강남(중국) 농업지대가 초토화되었으며, 2차 아편전쟁 때는 아예 베이징이 따인다. 원명원이 불타며 베이징 조약 체결하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뺏기는 등 청은 동네북 아Q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하필 이 시기에 열하로 튄 고명천자 함풍제가 죽고 정변으로 서태후가 섭정 형태로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 길로 청은 회생불능 로드를 타기 시작하는데, 중화사상과 황실을 포기하지 못해 진행한 양무운동의 결과로 청프전쟁청일전쟁의 패배로 베트남, 조선, 대만의 종주권을 상실하였다. 슬프게도 그 패배는 군자금이 서태후의 사치 비용으로 새어 나간 점도 한 몫 했다.

그나마 암군 라인의 함풍제, 매독으로 요절한 동치제와 달리 서태후의 감시를 받는 유소년 황제임에도 광서제는 나약했을지언정 꽤 영민하고 비전이 있었으며, 그래서 성인이 되자 체제까지 개혁하는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나라의 마지막 중흥을 이끄나 했다. 하지만 원세개의 배신으로 폐위만 면한 채 유폐되다 결국 최후엔 독살당했고, 청 최후의 희망 100일 천하는 그렇게 헛꿈으로 날아가 버리고야 말았다.

마침 서태후와 보수파는 괜히 반 서양 폭력단체 의화단 운동을 지원하며 8개 연합국에 선전포고했다가 베이징이 유린당하고, 신축조약을 통해 그 유명한 청나라 피자처럼 나라의 방위 주권조차 지킬 수 없는 반식민지의 단계까지 떨어지고 만다. 결과적으로 희대의 트롤러 서태후가 죽은 지 2-3년만에 철도 국유화 반대 불씨로부터 시작된 1911년 우창 봉기, 그리고 이어진 신해혁명으로 뒤집어 엎어졌다.

흥미롭게도 청 조정은 1911년 10월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원세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11월에는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세웠지만 정작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위협했고, 결국 1912년 2월 7살짜리 선통제를 퇴위시켜 버림으로써 청은 한족의 배신으로 흥하였다 한족의 배신으로 망하는 아이러니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4. 특징

청나라는 300년에 걸쳐 한족을 동화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청대 내내 한족들은 반청복명 운동을 일으켰고, 때로는 유화책으로, 때로는 강경책으로 한족들을 달랬다. 그만큼 명나라의 색채를 지우기란 청나라에게 두고두고 숙제와도 같은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상당 부분 한족의 문화 전반에 만주족의 문화 요소를 침투시키고 원래 한족의 문화를 대체하기는 하였으나, 청말까지도 명나라의 물을 완전히 빼지는 못 하고 도리어 본인들이 한족에 동화가 되어버렸다.

명대에 생겨난 신사(紳士)라는 지식인 계층은 조선사대부처럼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기도 했다. 이 신사 계층은 한족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대에 가서도 청나라가 기본적으로 유교 제도로 운영됨에 따라 그대로 청을 떠받치는 집단으로 계속되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이 신사 계층은 사라지지 않다가 문혁 시대에 와서야 자취를 감춘다.

4.1. 제도

이 시대부터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라고 하여 한 황제의 치세 동안은 한 번 정한 연호를 바꾸지 못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한 황제의 치세 동안에도 연호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연호가 바뀌는 이유는 국가에 재앙이 닥치는 데에 나쁜 연호가 영향을 끼쳤다는 다소 주관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황제 마음대로 바꾸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도 불편하고, 국가적으로도 행정력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국의 연호는 중국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은 주변국들도 사용하는 것이었으니, 주변국들까지 싹 다 연호를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일세일원제가 시행되어 이 시대의 황제들은 현대에 와서 연호로 통칭되고 있다. 예를 들면 홍무(洪武)라는 연호를 사용한 황제는 홍무제(洪武帝)라고 불리는 식. 이는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단, 현대의 통칭일 뿐 실제 그 시대에는 황제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냥 황상 폐하, 사망 후에는 묘호+시호(강희제를 성조 인황제로 부르는 식)로 불렀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일세일원제를 채택해오고 있지만 일본에서 연호를 붙여 메이지 덴노쇼와 덴노라고 부르는 것은 생전의 연호를 시호로 올린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홍무제, 강희제 식의 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죽은 덴노에게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생존해 있는 아키히토나루히토에게는 헤이세이 덴노, 레이와 덴노라 부르지 않는다.

4.2. 외교

영락제 때까지만 해도 정화가 멀리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하고 올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동양의 기존 조공국들과의 관계만 유지할 뿐, 먼 국가와는 통교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조는 주변 조공국들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일본도 자연스럽게 서양과는 무역을 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유일하게 서양에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누에바에스파냐였다. 마카오포르투갈에게 조차하여 서로 교역을 하였다.

쇄국은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러 서구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동양으로 침략해 왔다. 기를 쓰고 나라의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겪은 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고 말았다.

4.3. 의복

명나라가 세워지며 다시 송나라 때의 한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이미 상당 부분 호복(胡服)의 영향을 받아 송나라 때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고, 고려양이 가미되어 한복과 외양이 비슷해지기도 했다. 고려양은 명이 건국되고 한참이 지난 홍치제 대에 가서야 원래 중국의 의복이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청나라 대에는 현대 치파오의 원형이 되는 만주족의 호복을 강제하면서 한푸가 거의 잊히게 되었다. 다만 황제가 입는 곤룡포는 명나라 황제의 곤룡포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

5. 외국에 끼친 영향

명청교체기 이후 많은 수의 한족들이 동남아조선 등으로 피난을 갔다. 보트 피플의 원조인 셈이다. 동남아로 이주한 사람들은 현대의 화교가 되었으며 동남아 일대의 경제를 꽉 쥐고 있는 상류층이 되었다. 특히 현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화교의 세가 가장 강한 국가들이다.

명나라의 학자들은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의 의복을 보고 "이것이 선왕의 법복이다"라며 울기도 했다고 한다.

5.1. 한국

명청시대 때 한국은 대략 조선 시대였다. 대략 조선 전기가 명나라, 조선 후기가 청나라에 대응된다.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되었고, 그보다 약 24년 뒤인 1392년조선이 건국되었으니 대충 명청시대와 조선시대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 지원의 여파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종전 후 급격하게 쇠퇴했고, 조선 역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조선 전기의 끝을 대략 임진왜란의 종전 이후로 보는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 청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지 46년 후에는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니 전기와 후기의 구분도 얼추 맞는 것이다.

조선은 건국하면서부터 명과 사대관계를 맺었고, 그건 중원을 청나라가 차지하고 나서도 사대관계는 청나라로 계승되어 계속되었다. 특히 조선왕조는 청나라보다는 명나라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대명률을 참고하여 법을 시행했고, 이 시기 중국으로부터 곤룡포를 하사 받기도 했다.

명청교체기에도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어 했으나 중원의 패권을 노리던 후금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을 자신들의 우방으로 삼고 싶어 했다. 광해군 때부터 이러한 압박은 계속되었지만, 조선은 이중외교 노선을 취하며 번번히 무마시켰다.

명나라를 치기 전, 후금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후금 입장에서는 조선을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명나라를 칠 수가 없었다. 행여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후방에서 공격하면 후금으로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후금의 목적대로 병자호란은 후금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명이 정말 망해버려 명에 대한 의리는 영영 지킬 수 없게 된다.

후금은 조선이 기존에 명의 연호를 쓰던 것을 폐지하고, 후금의 연호를 쓰게 하였으나, 조선은 후금에 보내는 문서에만 후금의 연호를 쓰고, 국내 문서에서는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였던 숭정(崇禎)을 계속 사용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숭정후(崇禎後) 234년으로 쓰는 기상천외한 일도 벌어졌다.

1910년대한제국한일강제병합 조약을 맺게 되어 결국 멸망하게 되고, 청나라는 이보다 1년 반 늦은 1912년 2월에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끝나는 무렵도 얼추 맞게 되었다.

6. 미디어에서

한국 사극에서 現 대한민국의 바로 앞 시대인 조선 시대를 많이 다루는 것처럼, 중국 사극에서도 이 시대를 특히 많이 다룬다. 그것도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많이 나오는데, 남자 배우들의 경우는 비주얼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변발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명나라 대를 다룬 사극의 경우, 당시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한푸가 등장하여 중국인들은 한복이 한푸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고려양 문서만 봐도 알겠지만, 명 대의 한푸는 오히려 한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청나라 이래 오랜 시간 만주족의 전통의상을 입느라 한푸가 낯설어졌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 1616년 누르하치가 나라를 건국했을때 초기 국호는 후금이었으며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1636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변경[2] 동시기에 존재했던 조선왕조 역시 여기에 거의 근접하는 총 27명의 국왕이 재위했다.[3] 진한제국 또한 마찬가지다. 체제적으로도 진시황이 시작한 중앙집권제, 황제 독재 및 기타 한족 문화의 토대를 한나라가 완성했으므로 두 왕조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4] 당장 수 문제의 황후였던 문헌황후부터가 당 고조의 이모였고, 수 양제와는 사촌지간일 정도로 인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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