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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AA65> 영락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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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락통보(永樂通寶)는 명나라 영락제 재위기에 중국에서 발행되었던 명나라의 대표적인 동전 중 하나이다.명 영락 6년(1408년)부터 주조되었다.
2. 상세
명나라는 홍무 8년(1875년)부터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라는 지폐를 주류 화폐로서 유통하였고 홍무통보(洪武通寶)라는 동전이 이를 보조하고 있었으나 동전 보급은 지폐 보초에 비해 크게 부족하였다.[1]그러다 영락제가 즉위한 후 명나라는 대규모 개방 정책을 펼치게 되고 대외 무역에 사용할 대금과 화폐 수요가 증가하자 중국 각지에서 영락통보를 대량으로 주조하게 하여 화폐를 보충하였다.
여담으로 조선 세종의 조선통보 발행도 영락통보 발행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1440년경부터 명나라에서는 지폐 남발[2]로 인한 화폐 전체의 신뢰 추락으로 화폐 경제의 침체가 일어났고[3]
중국 화폐를 지속적으로 수입하여 쓰고 있던 일본으로 영락통보가 다량 반출되었는데, 일본은 영락통보를 모든 화폐의 표준으로 쓸 정도로 많이 사용한 반면[4], 명나라에서는 화폐경제의 쇠퇴와 다량 반출로 오히려 발견되는 물량이 많지 않다.
3. 같이보기
[1] 보초의 액면은 동전 100문, 200문, 300문, 400문, 1000문(1관) 같은 고액이었고 남발한 이상 동전으로 이를 보조하기는 크게 어려웠다.[2] 조선의 저화와 비슷하게 지폐를 다량 발행하면서도 중앙에서는 거의 받지 않았다.[3] 선덕제 때의 선덕통보(宣德通寶 : 1433년~1435년) 주조 이후 명나라는 68년 동안이나 동전을 만들지 않았다. 홍치제 재위 후반기인 1503년에서야 홍치통보(弘治通寶)를 주조했으니, 이렇듯 15세기 중후반은 중국 화폐 역사상 최대 침체기가 아닐 수 없다.[4] 가몬에 쓰인 사례도 몇 보인다. 당장 오다 노부나가의 가몬 중에서도 영락통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