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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파일:20201209_상평통보.jpg
<colbgcolor=#C5AA65> 상평통보
1. 개요2. 역사
2.1. 조선 전기의 상업과 화폐2.2. 17세기의 화폐 유통 시도와 혼란2.3. 상평통보의 유통과 우여곡절
3. 의의와 한계4. 후기 역사와 폐지
4.1. 일제 강점기의 상평통보4.2. 현대의 상평통보
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9-6호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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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평통보()는 인조 대인 1633년(인조 11년) 최초로 시험 주조되고, 숙종 대인 1678년 1월 23일부터 유통되기 시작한 조선화폐이다. '조선통보', '십전통보'와 함께 개항 이전 조선의 국가 공인 화폐로, 전근대 한반도에서 전국적으로 통용되었던 화폐 가운데 지속적으로 통화로서 기능했던 유일한 화폐였다.[1]

'상평(常平)'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준말로 유통 가치에 항상 등가를 유지하려는, 즉 물가 안정을 꾀하는 의도와 노력을 반영한 표현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동전(銅錢)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간에서는 엽전(葉錢)이라 불렀는데, 이는 동전을 세는 단위가 ‘닢’(동전 한 닢, 두 닢 하는 식. 나무에 달린 그 의 고어)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상평통보를 주물로 제조하는 과정에서 상평통보들이 마치 가지에 달린 잎처럼 생겨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파일:attachment/yupjun.jpg
<colbgcolor=#C5AA65> 엽전을 만드는 틀

2. 역사

2.1. 조선 전기의 상업과 화폐

조선 초기의 화폐 제작은 시장의 물류 유통을 원활히 하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국가의 이권을 국가에서 보증하는 화폐 아래에 꽉 잡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이를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이라고 한다. 부수적으로는 당시 민간에서 사용되던 면포이 중간 유통 과정에서 부패, 마모 등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명나라에게 조공품으로 지정되어 확보에 큰 고난을 겪고 있던 , 이나 왜구에 맞설 화포무기 등에 사용되던 , 을 함부로 빼낼 수 없었다.

1401년(태종 원년) 이후 저화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당시 재래시장에서 유통되던 5승포 1필과 쌀 2말에 상응하는 가치로 상환하라고 결정했다. 이는 원나라 대까지 중국의 교초가 널리 유통되어 국내에서도 사용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저화를 처음 배포할 때 쌀을 받아 각지 관아의 군량미가 채워지자 쌀로 태환해 주기를 그대로 중지했다. 그러다가 세종조에 다시 저화를 유통시키려 시도하며 금, 은이나 그 외 품목 등을 저화로 태환해 주는 정책을 내세웠으나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환해 줄 물건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 태환을 중지했다. 또 당초에 몇몇 세금 품목을 저화로 받기로 결의했으나, 그 세금 품목이 형벌에 대한 환속이나 상인들에 대한 상세 등 극히 한정적인 품목이었거니와, 이조차도 현장에서는 저화 가치에 해당하는 현물로 받았다.

조선 정부의 모든 정책은 저화의 가치를 전혀 지키지 못했다. 이렇게 저화는 민간의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는 정책이 되어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였고,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다. 한양개성 등지에서 저화를 실물로 교환해 주면서 신뢰를 얻으려 애쓰고 면포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면서까지 저화를 유통하려 해보기도 하였으나 백성들은 이런 화폐보다는 쌀이나 면포 같은 현물 거래를 선호했다. 따라서 조선 초기 화폐 정책은 경제적 목적을 위한 화폐 정책이라기보다는 재정 정책이라고 평가되는데,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명과 마찰을 빚으며 언제 전면충돌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태조 시절엔 텅텅 빈 군자곡을 채우는 용도에 가까웠다.[2]

동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저화를 보완하자는 의미에서였다. 동전은 실물 가치를 어느 정도 보증하므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서 세종 5년(1423년) 조선통보를 발행했다. 이 결과 일각의 우려대로 저화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말았고, 그나마 동전마저 신뢰를 얻지 못했다. 동전 1푼은 쌀 1되로 규정하였으나 실제 가치는 동전 9.7푼에 쌀 1되 수준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종 7년(1425년) 5월 시점에서는 동전 3푼이 쌀 1되 정도 가치로 유통되었다.

이에 민간에서 포화(布貨)의 사용을 금지하자 큰 원성이 일어나 세종 8년(1426년) 포화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정부 정책을 더욱 불신하여 세종 9년(1427) 1월에는 동전 8푼~9푼이 쌀 1되로, 9월에는 12푼~13푼이 쌀 1되로 평가되었다. 동전에 들어가는 동보다도 동전의 가격이 낮아지자 동전은 아예 구리를 뽑아내기 위해 녹여지거나 해외에 밀수출되기까지 했다. 이 결과 동전의 가격은 동 가격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시중에서 유통되는 동전 양은 더욱 줄었고, 정부에서는 발행 비용을 생각할 때 더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세종 20년(1438년) 철전 논의마저 좌절되자 세종 27년(1445년) 조선통보 발행을 중단했다.

동전 발행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화폐 사용 경험의 부족과 화폐 불신 등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동전, 철전 등의 발행이 시도되었으나 동전이 조금 돌았던 것을 빼면 나머지는 정부 관할 상점 정도에서나 유통되어 실질적으로 화폐 유통이 폐기된 상태였다. 외국 화폐로는 저화가 유통되었으나 저화의 신용도는 송나라, 원나라라는 외국 정부의 보증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지 조선 정부의 수준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의 신용과 보증'이라는 것은 다른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세금을 돈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원래 화폐 유통 체제의 정착 초기에는 세금을 화폐로 받는 것이 화폐(특히 금속 주화나 지폐 등 물건으로서 직접적인 사용처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화폐) 정착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화폐로 세금을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최소한의 사용처가 보장되고, 더 나아가 세금을 내기 위한 화폐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가진 상품이나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하게 됨으로써 화폐의 유통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예로, 1960년대 농촌에서는 '쌀 팔아 돈 사 온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화폐의 발행 주체조차 자신들이 발행한 화폐가 아닌 상품을 세금으로 받음으로써 일반인들에게는 감정적으로(그리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화폐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생길 뿐 아니라 조정이 그나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에서조차 화폐 유통 체제가 시작될 계기를 제공하지 않은 것. 발행자조차 신뢰하지 않는 화폐를 누가 써 주겠는가? 세종 시대 조선 조정은 지방 시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주된 이유 중 하나지만 화폐로 세금을 받지 않는 구조에서는 화폐 가치의 출발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시장이 있었어도 도입 불가했을 것이다.

사실 15세기는 화폐 유통이 전 세계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다. 유럽 지역도 16세기 후반 포토시 같은 남아메리카은광 로또가 터지지 전까지는 , 의 공급 부족으로 곤란을 겪어서 그레샴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이 나오던 시기였고, 중국도 원나라 말기 교초의 남발이 후임 명나라의 화폐 경제를 크게 침체시켰고, 동아시아의 은광 역할을 하던 일본도 16세기 연은 분리법으로 은광 로또가 터지기 전이라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도 자체적인 화폐를 전혀 발행하지 못한 채 송, 원, 명 등 중국 화폐에 의존하여 교역을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상 백성들은 동전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나마 태종 때 저화를 발행하면서 세액 납부를 일부 저화로 대체 가능하게 하고 녹봉도 저화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역시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 유통의 실효성은 적었다. 게다가 화폐의 발행량도 적었다. 쌀 1되가 조선통보 4문(4개) 정도의 가치였는데, 조선통보의 총발행량이 전체 미곡 거래의 5% 미만이었으니 화폐의 사용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이 결과 세종 27년(1445) 발행 시의 손해가 심각한 동전은 발행을 중단하고 저화를 재발행하였으며, 공정 시세는 저화 1장에 동전 50푼, 쌀 1말로 정해졌으나 저화 유통은 기피되었다. 세조 4년(1458) 결국 포화의 사용이 재허용되었고, 이후에도 세조전폐를 유통시키거나 성종이 저화를 재발행하려는 노력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2.2. 17세기의 화폐 유통 시도와 혼란

1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전 세계적으로 유통 및 무역권이 형성되어, 서민 사회 내에서도 점차 화폐 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명은 15세기 후반 이후 화폐 경제의 부활 이래 1565년 처음 시행되어 1570년대 전국에 확산된 일조편법을 통해 은 경제를 확립시켰고, 일본에서도 1530년대 조선에서 회취법이 건너간 이후 이와미 은광 등 금 · 은광의 채굴이 활발하여 동아시아의 은 펌프 역할을 했다. 1570년대에는 동아시아권까지 진출해 있던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수은 아말감법이 개발되어 은 생산의 획기적인 전기를 불러왔다.

조선에서도 15세기 초 회취법의 개발 이래 단천은광 등이 활성화되고, 1540년대 이후에는 왜은(倭銀)이 들어와 국내에서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나 서민 사회에 보급될 정도로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특히 조선 초에 100여 년 간 시달리며 조공품을 금, 은에서 면포와 로 바꿔놓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공으로 뜯길 것을 우려하여 은광 개발을 국가 차원에서 활성화시키지는 못했고, 은 유통은 대중국 무역에서 지불되거나 정부에서 확보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와 조선 사신의 중국 사행 경비로 쓰는 것이 주된 용도였다.

이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 들어온 명군이 은화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고 해도 물건의 매매불가능상황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쟁 상황임을 감안해도,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은 사용도 격차는 상당히 컸다. 어쩔 수 없이 인부부역으로 중국에서 쌀을 날라왔으나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화폐의 유통을 요구하는 상황에 치달았다. 이에 명나라처럼 화폐를 찍거나 아예 명의 은화를 들여와서 편의를 도모해 보자는 의견이 올라왔으나 선조의 반응은...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전을 주조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 중에 혹자는 '이렇게 재정이 바닥난 때에는 통화(通貨) 증식 정책으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시험해 보았다가 중지하더라도 큰 해는 없을 것이니, 시험 삼아 실시해 보는 것도 무방하다.' 하고, 혹자는 '우리 나라는 풍속이 중국과는 달라 조종조에서도 시행했다가 금방 폐지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렇게 쉽게 할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경리가 그것을 꼭 실시해 보려는 생각이 있어 중국에 주본을 올려 만력통보(萬曆通寶)를 주조할 것을 청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시험 삼아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틀림없이 시행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선조 31년(1598) 4월 2일 자 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동철은 애당초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지금 수천만 관의 동전을 주조하려면 반드시 허다한 공력이 소비될 것이며, 과연 등통(鄧通)의 산과 같이 많은 구리가 없습니다. … 성상이 염려하시는 것이 사실 공연한 걱정이 아닙니다. 신들도 어찌 그러한 곡절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경리가 한번 적극 시험해 보기 위하여 주본을 올리라고까지 독촉하니, 아무래도 그만둘 수는 없는 형세인 것 같아 매우 민망스럽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왕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이라면 그 유통 계책을 강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 만약 운용을 적절히 하고 내고 들이는 데도 일정한 방법을 둔다면, 유통 과정에 과연 폐단이 없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쓸모없는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래 와서 고기 · 두포(豆泡)·염장(鹽醬)·시초(柴草) 등의 소소한 값들은 모두 은자(銀子)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외의 백성들이 오히려 그 덕으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합니다. …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만력통보를 만들어 중국인과 매매할 때 서로 있고 없는 것을 교환하게 한다면, 사람마다 교환하기를 원하여 지금 은자를 쓰는 것과 같이 즐겨 사용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 하니.
전교하기를,
"동전과 은자는 다르다. 지금 그렇게라도 마련하여 혹 시행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나로서는 그 일이 반드시 시행이 안 되리라고 본다. 지금 초기(草記)를 보면 또 한 가지 큰 일을 추가하려고 하는데, 이는 까닭 없이 일을 만드는 것으로써 일 하나 만드는 것이 일 하나를 더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러한 일을 한단 말인가. 내 뜻은 그러하니 다시 비변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라."
선조 31년(1598년) 4월 8일 자 기사

결국 화폐 유통은 좌절되었으나, 어찌 되었건 임진왜란은 어떻게든 은의 유통 경험 등을 쌓는 결과를 낳았고, 조정에 본격적으로 화폐 유통 논의가 올라왔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에 힘입어 1603년에는 호조에서 주전사목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구리가 부족해 찍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리의 주요 수입처였던 일본과 교역이 단절된 상황이었으니 구리를 구할 곳이 없었다.

전환점이 된 것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대동법은 중간 과정에서 공납가가 팍팍 올라가는 폐단이 컸던 이전의 공납 제도를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대동미를 거둬 그것을 공인에게 주어서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동미를 직접 들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려니 불편한 점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새 화폐 제조 논의에 불을 댕겼다. 특히 김육은 대동법과 화폐의 사용 모두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로, 총체적인 경제 계획에 혜안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정상화되면서 무역을 통한 구리와 은의 수입도 재개되었다.

이에 인조 3년(1625년) 조선통보[3] 60만 개를 주조했지만, 주전량 부족 등으로 곤란을 겪다가 정묘호란을 맞아 중단했다. 인조 11년(1633년) 김신국김육이 건의하여 물가 안정을 임무로 하는 상평청을 설치하고 조선통보(팔분서체)를 주조 유통했으나, 불과 몇 년 뒤에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화폐 주조는 중단되었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폐 유통 논의가 일어났고 김육은 효종 원년(1650년) 청나라사신으로 다녀오면서 15만 문 상당의 청나라 동전을 사비로 사 와서(!) 평양안주평안도 일대에서 유통을 시도했다. 김육은 대동법을 함께 추진하면서 화폐세 납부와 대동법의 시행을 연동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효종 2년(1651년)에는 행전사목이 실시되어 동전 사용을 북돋았고, 효종 4년(1653년)에는 평안도에 행전 별장을 파견하여 행전을 독촉하였으나 강압적 추진과 모리 행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효종 6년(1655)에는 은화 1냥을 동전 6냥과 쌀 1섬에 대응시켜 실물 가치와 화폐의 연동을 꾀했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동전 유통은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나갔으나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조정 내에서 화폐에 대해서 불신하는 의견도 아직 컸지만, 현실적으로도 구리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고, 당시에는 일본산 은의 유통이 활발하던 시절이라 '동전이 은보다 나은 게 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17세기 후반까지 매매 문기는 지역 차는 있으나 동전보다는 은이 유통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시중에서 일본 은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정작 그 은조차 농촌을 비롯한 지방에서는 유통되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김육은 뚜렷한 신념하게 화폐 유통책을 말 그대로 우직하게 밀어붙였고, 효종한테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고 까이기도 했다.
상이 이르기를, "전화(錢貨)를 시행한 지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 경들과 상의하여 혁파하려 한다." 하자,

이시방이 아뢰기를, "전화를 시행하기 어려움에 대해서는 김육도 깨닫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육의 고집스럽고 막힌 병통은 죽은 뒤에야 그만둘 터이므로 마음이 흔들릴 리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전화 사용하는 법을 1년 동안 혁파하지 않으면 1년 동안의 폐단만 있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전화를 사용하게 한 것은 오로지 재화의 유통을 위해서였다. 10년 동안 시행하였지만 조금의 효과도 없으니 어찌 혁파하지 않겠는가. 통행(通行)하는 화폐로는 백금(白金, 은)만 한 것이 없는데 시골에서조차 사용되지 않으니, 하물며 전문(錢文)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 효종 7년(1656) 9월 25일 자 기사

그러나 효종의 말과 달리 의견의 주류는 화폐 유통의 진척도에 호의를 보였다. 다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므로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주장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그랬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 그리고 전화(錢貨)를 통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재화를 넉넉하게 하기 위한 방도이니, 만일 사방에 잘 유포하여 온 나라가 힘입을 수 있게끔 한다면 어찌 이 백성들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나라는 본디 구리가 나는 산이 없어서 오로지 바다 밖의 공봉(貢奉)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돈을 주조하여 통행시키는 것이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기필코 통행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돈을 일단 많이 주조한 다음 점진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이 이롭고 해가 없다는 것을 조금 알게 한 연후에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급박하게 독촉하여 신뢰감을 갖기도 전에 강요한다면 아마도 재화가 넉넉해지기도 전에 백성이 먼저 고달프게 될 것입니다. …" 하였다.
- 효종 4년(1653) 3월 4일 자 기사

김육의 장남은 김좌명이었는데 대를 이어 화폐 발행 지지 세력의 거두였다. 그런데 현종 시기 경신대기근이 닥쳤다. 이때는 심지어 왕족들이나 사대부들까지 죽음에 이르를 정도였다. 이즈음인 1671년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좌명이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이 화폐 발행을 늦추었다. 경술년 말에 김좌명이 국가 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다각도로 제시했었다. 돈이 천하에 통행되는데 유독 조선에서만 유통되지 않는다며 동전을 주조하자고 건의했다. 물론 그 당시 보편적인 생각처럼 그도 동전 주조를 주장한 의도는 상업 진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수입 확보에 있었다. 아무튼 일본에서 구리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주조가 불가능하지 않았다. 임금도 허락했지만, 이듬해 3월에 김좌명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4] 그래서 상평통보는 숙종 때가 되어서야 발행되었는데, 기근으로 인한 재정 악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3. 상평통보의 유통과 우여곡절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제조 유통 되기 시작된 때는 숙종 4년(1678) 1월 23일로, 허적이 새 화폐 제조와 유통을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주조되었다. 이때의 통용책은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세심해져서, 동전을 쌀 · 무명 · 은화와 연결시키고 세금 일부의 납부와 녹봉의 일부 지급에 동전을 이용하여 사회 심리적으로 동전의 안정성을 보증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동전의 확산에는 일본의 은 수출 제한도 영향을 미쳤다. 1681년까지 대만동녕국에 대항해 해금령을 실시하고 해안의 거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등 완전한 해상 봉쇄 정책을 폈던 청나라가 대만 세력을 몰아붙이고 해금을 해제하면서, 일본으로 쇄도하는 중국 상선이 늘어났다. 이에 일본에서는 1685년 내항하는 중국 상선의 머릿수를 제한하여 은 유출을 줄였고, 1695년에는 은화를 은 함량 80%의 게이초 은에서 은 함량 64%의 겐로쿠 은으로 전환하였다.

조선은 이에 대해서 인삼을 무기 삼아 인삼에 한해서 80% 은을 계속 뜯어낼 수 있었지만, 이전의 중국산 생사 · 비단 무역은 타격을 받아 은의 유입량이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한편으로 은을 구리로 대체하려 노력하였고, 이에 171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은보다 구리의 공급이 원활해졌다. 이에 힘입어 조선에서는 상평통보를 유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평통보의 초기 유통에서 조선 정부는 또다시 화폐 운용의 미숙으로 인한 여러 곤란을 겪어야 했다. 1695년부터 1697년까지 을병대기근으로 인해 구휼을 위한 재정이 긴박해지자 정부는 지나치게 화폐 주조를 통한 이익에 집착하였고,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각 관에서 마음대로 찍는 데다 사주조도 활발하여 동전의 질도 들쭉날쭉했다.
어영청에서 10삭(朔)에 한하여 주전(鑄錢)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이때에 흉년들어 재물이 궁핍하니, 호조 및 각 군문(軍門)이 날로 주전하여 재용을 늘리는 길로 삼고, 민생이 이로 인하여 더욱 곤궁하여짐을 생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근심하였다.
숙종 21년(1695) 12월 10일 자 기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희무가 상주하기를,
“전폐(錢幣)는 곧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입니다. 전화(錢貨)는 크고 작음이 각각 그 제도가 있는데, 근래에 점점 잡스럽고 뒤섞여 당초의 모양과 비교하여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는 단지 관에서 주조한 것도 처음과 같지 못할 뿐 아니라, 반드시 민간에서 몰래 주조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엄중히 금지 단속하면 거의 값이 떨어지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며, 또 법을 범하는 것을 막는 방법도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주(私鑄)가 매우 많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잡스럽고 뒤섞임이 날로 더 심해지고 가치가 더욱 떨어졌으므로, 이희무가 마침내 엄금하기를 청한 것이다.
숙종 24년(1698) 5월 6일 자 기사

이 결과 동전의 폐단에 대한 상소가 잇달아, 1698년(숙종 24년)부터 동전의 주조가 중단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1731년까지, 33년 동안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동전의 가치가 계속 상승하고 1710년대부터는 동전이 부의 축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시장에서 돈이 마르는 전황(錢荒)이 발생하였다. 몇십 년 사이에 화폐 가치가 들쭉날쭉한 상황을 겪으면서 화폐의 신인도는 하락하였고, 성호 이익 등은 아예 동전을 폐지해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731년(영조 7년)부터 비로소 동전의 주조가 재개되어 전황에는 다소 숨통이 트였으나, 1820년대까지 전황 국면은 계속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1710년대부터 일본이 구리의 수출도 제한하기 시작하면서 구리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동전의 크기를 줄이거나 아연 등을 섞어 원가 절감을 노렸으나 이 결과 동전이 쉽게 부스러져 시장 내 유통 기한이 짧아졌고 돈이 줄어들었다. 또한 시장의 규모가 확산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류 유통이 팽창했던 것도 작용했다.

그러나 18세기 토지 매매, 임금 지불 등의 문기에서 거래는 대부분 동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상평통보가 제법 보편화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동남아시아 구리, 스웨덴 구리 등의 유입으로 동아시아 내에서 구리의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구리 가격이 내렸고 전황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1829년부터 1832년까지 152만 냥을 찍어 유통시키는 등 1809년부터 1857년까지 600만 냥이 보급되어 완전히 정착하였다.

3. 의의와 한계

상평통보의 유통은 조선 후기 시장의 발전을 나타내지만, 이를 두고 완전히 물물 교환 경제에서 탈피했다는 식의 과장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상평통보의 기능은 제한적이었으며, 조선의 화폐 경제는 한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가공된 통계는 대중적인 인식도에 비해 당대 조선 사회에 상평통보의 유통이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상평통보가 시장 내에서 어떤 한계를 가졌는가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일부 단락을 인용하면 다음와 같다.
… 1860년경의 동전량은 1400만 냥 내외이고, 그것으로 미곡 생산량의 13%에 해당하는 200만 섬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국내 총생산의 3% 정도에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렇게 화폐 경제가 성장하였지만, 19세기까지는 자급자족의 영역이 지배적이었고 무명과 쌀의 화폐 기능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다. 19세기에도 농가 생산물의 상품 화율은 20%~30%로 추정된다. 아직 시장 경제가 미성숙하고 동전의 공급이 풍부하지 않는 19세기 전반 이전에는, 제값을 받고 손쉽게 팔 수 있고 옷감과 식량으로 늘 수요되고 있고 조세 부과의 대상인 쌀과 무명은 여전히 화폐로서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

… 서울 등 도시에서는 화폐의 사용이 활성화된 반면, 일반 농촌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남공철(南公轍, 1760년~1840년)은 서울에서는 돈으로 살아가고 지방에서는 곡식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장시에서 물물 교환이 활발하다고 외국인은 보고하였다. …

동전은 국가 지불 수단으로서 위상을 신장하였으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세를 동전으로 납부하는 추세는 진전되다가 18세기 말부터 법정 조세의 전납화 추세는 정체하여, 경지세의 전납화율은 19세기 중엽에도 25% 정도에 머물렀다. …
국사편찬위원회,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 82쪽~85쪽에서 부분 인용, 두산 동아, 2006년

조선 후기의 경제 사정은 여러 측면에서 이를 화폐 경제라 부르기 어렵고, 여러 통계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쌀과 포를 이용한 물물 교환에서 동전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화폐에 대한 개념이 성숙하는 것은 매우 늦었다. 정부에서는 화폐 주조 차익을 노려 주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조나 성호 이익 같은 사람은 화폐를 사치의 근본으로 여겨 고깝게 여겼다. 실제로 영조는 재위 초기에 화폐를 찍지 않으려다가 실패했고, 이익은 폐전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사그라든 것은 화폐 본연의 운용 가치를 인정했다기보다는 화폐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사회에 큰 부담을 지우게 된 상황을 자각한 것 때문이지, '사치를 억제해서 민생을 안정하게 하자'를 넘어서서 중상주의와 같은 적극적 화폐관이 보편화되는 것은 더욱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화폐 유통의 촉진 노력이 이렇듯 저조했던 데에는 18세기 이후 구리의 원가가 올라가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부담이 커졌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제임스 팔레의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282쪽~283쪽)에 따르면 원유한은 화폐 주조를 통해 얻는 이익이 1679년 50%에서 1814년 10%로 줄었다고 주장했고, 제임스 팔레는 실제로는 1829년 37.6%와 1830년 31.4%에 달했다고 수정했다(단 19세기 중반의 구리 공급 완화를 고려한 것인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17세기 유럽의 금화와 은화 주조 비용은 액면가의 5%와 25%에 불과한 반면 조선의 상평통보는 1825년 92%, 1829년 73%, 1830년 73%였다고 한다. 즉 유럽에 비해 화폐를 찍을 동기가 잘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상평통보에는 2전 이상의 화폐가 없었다. 정조 이후 5전과 10전의 유통 계획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시안만 제시되고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인플레이션과 도적의 횡행, 사치와 부정 축재 등이었는데, 이해할 만하지만 고액권이 없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우려가 심했다. 말 그대로 100냥짜리 거래를 하려면 100냥을 지고 가야 했고, 1000냥짜리 거래를 하려면 1000냥을 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6]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이 인도의 목화와 영국의 기계로 대량 생산해 낸 옥양목이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면서 상평통보와 함께 기축 통화로 작용하던 면포의 가치가 크게 폭락해 버려 화폐 가치를 거의 상실하면서 실물 경제에서 점점 더 상평통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곡물, 직물, 동전으로 예산을 돌리다가 갑자기 쌓아둔 직물값이 폭락하며 조선 정부의 예산은 폭파되었고, 쌀, 보리, 콩 등으로 굴리던 예산에 도토리(...)와 밤까지 넣어가며 발버둥쳐야 했다. 문제는 통화량을 늘리고 싶어도 화폐의 원료인 구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부족한 통화량을 보충하기 위해 원가가 쌌던 청의 동전을 유입시켜 이익을 누려보자는 의견이나 은화를 발행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한동안 기각되었다. 청전의 유입은 화폐의 자주권을 상실할 우려 때문이었고, 은화를 찍어내기에는 조선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귀금속의 양이 적었다. 당장 일본과의 은 교역도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청으로의 은 유출을 틀어막아야 했던 상황상 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고액권 유통의 논의가 활발해졌으나....

4. 후기 역사와 폐지

고액권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당오전, 당십전 정도를 발행하여 천천히 고액권을 인식시켜 나가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실제로 상평통보의 가치는 제조에 들어가는 구리의 가격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과 그 주변 인물들은 안이한 판단을 했다. 소액권보다는 고액권이 국가 재정에 이익이 되니 일단 찍어보자는 것이었다. 기초적인 경제학 원론만 알고 있었어도 그런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 당시에는 국고채, 재정 정책, 통화 정책에 대한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고 특히 근대적인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등 재정학은 서구에서조차 막 태동한 따끈따끈한 학문[7]이었다. 서구도 그런 지경인데 상업이 미발달하고 천시됐던 19세기 중반의 조선 팔도에 그런 걸 아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 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 3년(1866) 10월 30일 자 기사
좁은 소견이 아니라 나라 절딴내자는 소리지.
그 결과 한국 전근대 화폐사 최악의 오판으로 평가받는 당백전이 발행되어 기존의 화폐 가치를 완전히 뭉개놓았다. 실제 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6배밖에 인정받지 못한 당백전을 100배 가격으로 인정하라는 압력을 받자 저항이 속출했다. 이때 찍어낸 당백전의 명목상 금액은 상평통보 유통량 전체보다 더 컸다. 한순간에 돌고 있던 화폐 총량의 2배도 넘어버린 셈이다. 이러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물가가 6개월 만에 5배~6배로 뛰어오르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수익도 거의 없다! 더구나 조세를 거둘 때는 당백전을 받지 않고 상평통보만 받으니 당백전을 불신하는 풍조는 하늘을 찔렀다. 조정이 발행해 놓고 조정도 안 받는 화폐를 누가 믿겠는가? 유생들은 이전부터 대립각을 세워왔다고 하더라도 민생 파탄의 책임론은 대원군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이에 대원군은 청전을 투입하여 물가를 잡아보려고 했다. 청전은 말 그대로 청나라 동전으로, 이것도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도 없는 악화이다. 원래 이 청전은 당백전이 발행되자 관리들이 환 투기를 하기 위해서 청나라 동전을 밀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백전의 문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청전의 유통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당백전이 주조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중단, 유통된 지는 2년 만에 유통이 금지되면서 청전 유통은 아예 공식화되었다. 더구나 조정은 당백전의 유통을 금지시킨 다음에, 당백전을 거둬들여서 청전 1냥과 교환해 주는 형태로 없애 버렸고 당백전은 녹여서 구리를 만들었다. 문제는 청전이 당백전에 비해서나 양화이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평통보에 대해서는 악화라는 것이다. 새로운 돈의 투입은 당백전 폐지 이후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던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청전은 전체 화폐 유통량의 40%를 넘겼다. 청전은 당백전보다 화폐 경제를 부식시켰다. 인플레이션과 화폐 불신도 당백전보다는 느렸지만 그 진행은 꾸준했다. 문제는 이 속도가 느리다는 것 때문에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는 그 순간까지 청전의 유통을 금지하지 않았고, 누적되었던 모든 문제에 더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더해졌다. 대원군을 밀어낸 고종은 청전을 그제서야 폐지했는데, 이는 당연히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조선 조정은 결국 이미 올라버린 물가로 인해서 세수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1880년대 조선에서는 당오전, 평양전을 발행하여 상평통보를 대체하려 노력하였으며, 1894년 상평통보의 발행은 중단되고 1892년부터 발행된 백동화로 그 역할이 대체되었다. 이러한 화폐의 혼란상 속에서 갑오개혁으로 인해 100% 조세 금납화[8]가 강요되자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게다가 당오전은 실제로는 2푼~3푼의 가치로 유통되었고, 백동화는 차익을 노린 주조가 과도한 데다 곳곳에서 밀주되어 그 가치가 나날이 폭락했다. 이 결과 오히려 구릿값이라도 제대로 유지되는 상평통보가 계속 유통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으며, 러일 전쟁으로 구릿값이 올라가자 더욱 심했다.

이렇게 상평통보 유통이 유지된 지역은 주로 남도 지역[9]이었는데, 1905년 시행된 화폐 정리 사업 과정에서 이를 빼놓을 수 없었다. 화폐 정리 사업 이후 조세율은 1결당 신화폐 80원이었는데, 타 지역에서는 엽전 8푼으로 대체한 반면 경상도전라도에서는 12푼으로 내도록 했다. 이 지역에서는 따라서 엽전을 보유하면 4푼어치만큼 손해를 본 것이다. 또한 당시 엽전 1냥은 신화폐 6.7냥 정도 가치라 엽전 1냥으로 신화폐 10냥을 대체할 수 있는 타 지역에서는 조세로 내면 이익을 보았다. 이 결과 엽전은 조세로 회수될 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지리멸렬해졌고, 파란만장했던 상평통보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4.1. 일제 강점기의 상평통보

비록 상평통보의 주조는 1894년에 중단되었지만 특히 북부에 비해 근대 인프라가 지지부진했던 경상권과 호남권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기까지도 상평통보가 꾸준히 통용되었다. 상평통보의 유통을 중단시키고 발행한 백동화는 실제 금속 가치에 비해 상당히 액면가가 높은 악화였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백동화 주조 기술을 제공한 일본에서 제조된 사주전(위조 동전)이 마구 유통된 것도 있고, 화폐 발행권을 중앙은행이 아니라 조정의 유력자들이 쥔 탓에 이들이 마구잡이로 악화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 정부의 화폐 정책을 불신하는 풍조는 계속되었다. 백동화 발행 당시 조선 정부는 상평통보 200전을 신화폐 1냥으로 교환해 주었고[10] 지속적으로 상평통보를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혁은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난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평통보로 거래하는 풍조가 잔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기존의 발행한 구 한국은행권 주화들은 1925년 말까지 일제가 발행한 조선은행권과 병행해서 쓰이다가 유통이 중단되었는데, 이때 상평통보는 여전히 보조 화폐로 쓰였고, 1925년 말 구한국 화폐의 유통 중지령에도 상평통보는 제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당시 상평통보는 보조 화폐 용도가 강했다. 일단 당일전이든, 당이전이든, 당오전이든, 당백전이든 가리지 않고 한 푼으로 쳤으며[11], 10푼이 모여서 1돈이 되고, 10돈이 모여 1냥이 되고, 구한국 시절에 엽전 닷 냥을 1원으로 바꿔서 계산했으므로 일제 시대에 상평통보는 닷 냥(=500개)이 조선은행권 1원(당시 조선 엔)으로 통용되었다. 즉 상평통보 닷 푼이 조선은행권 1전(당시 조선 센)과 동등한 가치로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경상도전라도 지방에서는 해방 직전까지도 통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오래된 시골집에선 먼지 뒤집어쓰고 굴러다니는 상평통보가 발견되곤 하며 금속 탐지기 들고 산에 올라 땅 파보면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인을 가리켜 엽전이라고 비하하는 표현도 이 시절 끝까지 엽전만을 고집하던 조선인들을 두고 만들어진 표현이다.

4.2. 현대의 상평통보

이렇게 수백 년 넘게 널리 쓰여왔고 발행량도 많았던 탓에 너무 흔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다시피 하다. 그저 양반 집이나 오래된 집에서 좀 뒤져도 나오는 경우가 많고 길거리나 해변가에 떨어진 상평통보를 발굴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도 하다. 실제로 지방의 소도시 민속촌에만 가도 상평통보가 전시되어 있고 유튜브금속 탐지기로 상평통보를 발굴하는 영상이 많이 업로드되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상평통보는 그다지 희귀한 물품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취급을 안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며, 아예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태에 따라 3만 원대부터 2500원까지도 팔린다. 참고 영상 1 참고 영상 2 문화재라기보다는 그냥 옛날 돈, 그것도 유독 많이 찍힌 연도의 그것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

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9-6호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259-5호 259-6호 260호
일본봉래문경 상평통보 경국사 지장시왕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9-6호
상평통보
常平通寶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504
(우이동 264))
분류 유물
수량 / 면적 1点
지정 연도 2008년 5월 8일
시대 조선 시대
관리자
(관리 단체)
도선사
파일:청담기념관-066_도선사_상평통보_1.jpg
<colbgcolor=#C5AA65> 도선사에서 발견한 상평통보[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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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 도선사에서 청담대종사의 사리탑을 건립하려 그 부지를 공사하는 도중 출토된 여러 유물 중 하나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 도선사 청동 종 및 일괄 유물 (道詵寺 靑銅 鐘 및 一括遺物)
1972년에 청담대종사의 사리탑 및 사리탑비·사적비 등을 조성하기 위해 사리탑 부지를 터파기할 때 고려 범종 1점을 비롯한 청동시(靑銅匙) 5점, 청동저(靑銅箸) 1짝, 청동국자 2점, 동경 1점, 동전 1점이 일괄로 출토되었으며, 현재 청담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출토지가 분명한 이 유물들은 전형적인 고려 시대 금속 공예품과 조선 시대 상평통보(常平通寶), 그리고 일본 에도 시대 동경이 서로 섞여 있는데 이는 사리탑 부지가 오랜 기간 존속된 건물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6. 같이 보기



[1] 더 이전 시대의 조선통보, 십전통보나 고려 시대의 건원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의 전명(錢名)을 지닌 화폐들은 전국적으로 통용되지 못하고 대도시에서만 조금 도는 수준에 그쳤다.[2] 명과 조선이 관계는 황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었고, 명과 조선 사이가 개선되는 건 태종 시기가 아닌 조선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정통제(세종 18년 즉위) 시기이며 완전히 안정화되는 건 조선 성종 재위기부터다. 수렵 좋아하고 대외원정 활발하게 진행한 영락제, 선덕제 재위기에는 진지하게 명과의 무력 충돌을 고려해야 했고 여진족이 차지한 북방 영토 문제도 있어 태종때부터 악착같은 군비 확장이 진행된다. 세종 말년에 발생한 토목보의 변 때문에 명과 사이가 개선되었음에도 군비를 줄이지 못했다.[3] 세종 때의 조선통보와 구분되도록 예서체 종류인 팔분서체로 새겨졌다.[4]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참조.[5] 심지어 20세기에도 인플레이션이 격심하면 쌀은 화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6] 이 결과 고액 거래에서는 다 들고 다니기 어렵다 보니 탄생하게 된 게 바로 어음이다. 어음수표와 다르게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 조선 후기에 자생적으로 생긴 제도이다. 그래서 어음은 순우리말이다. 그리고 어음이 통용되다 환(換)어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상평통보의 낮은 단위가 신용 경제를 만든 셈이다. 어음은 개항 이후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과의 거래에도 사용되었을 정도였고 지금도 쓰인다.[7] 근대 재정학을 낳은 재정 혁명은 18-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났다고 본다.[8] 이전까지는 25% 수준에 머물렀다[9] 남도 지역과 평양 이북의 관서 지역은 당백전이 유통이 되건 말건, 청전이 합법화되건 말건 상평통보 외에는 안 받았다. 그래서 당백전과 청전의 문제는 주로 수도권에 치명타를 가한 반면에 남도와 관서 지역에는 영향이 적었다. 정부 시책을 안 들으면 자다가도 떡 나왔던 시기였다...[10] 이때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같은 '반푼'이라는 표현이 돌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는 반푼이라는 단위가 없었다.[11] 1902년에 미국 의사 필하와(...)(Eva Field의 음차)와 한국인 신해영이 서술한 <산술신편>에 "당오전은 한 푼이 곧 닷 푼이므로, 엽전의 다섯 배가 되어서 한 푼을 닷 푼이라고 이르렀으나, 지금은 법률로 당오전 한 푼을 엽전과 같이 마련하니라."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런 풍조는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12] 사진 출처 - 도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