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외 전쟁·정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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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627년 (인조 5년) 2월 23일 ~ 4월 18일 (음력 1627년 2월 23일 ~ 3월 3일) | |
장소 | 한반도 서북부 | |
원인 | 후금의 명 정복을 위한 후방 변수 제거 목적 | |
교전국 | 후금 (공세) 승 |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틀:깃발| ]][[틀:깃발| ]][[숭덕제| ]] (후금 국왕) [[틀:깃발| ]][[틀:깃발|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 ]] [[틀:깃발| ]][[틀:깃발| ]][[아이신기오로 아지거|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아인 | 지휘관 [[틀:깃발| ]][[틀:깃발| ]][[인조| ]] (국왕) [[틀:깃발| ]][[틀:깃발| ]][[정봉수| ]] (의병장) [[틀:깃발| ]][[틀:깃발| ]][[이완(1602)| ]] (영유현령) [[틀:깃발| ]][[틀:깃발| ]][[남이흥| ]]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부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립 (의병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김우 (의병장) [[틀:깃발| ]][[틀:깃발| ]][[장만| ]] (도체찰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김상용 (유도대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김종민 (미곶첨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광립 (용골성 수성좌수) [[틀:깃발| ]][[틀:깃발| ]][[강홍립| ]] (오도원수) |
전력 | 후금군: 50,000명 ↑ | 조선군: 30,000명 ↑ |
피해 | 규모 불명 | 규모 불명 |
결과 | 후금의 승리 | |
영향 | 조선과 후금의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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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1]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인조실록 인조 5년(1627) 3월 3일
인조실록 인조 5년(1627) 3월 3일
1627년(인조 5년, 후금 천총 원년) 2월 23일부터 4월 18일까지(음력 : 1월 8일부터 3월 3일까지)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입해서 일어난 전쟁이다.
2. 배경
1616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이중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1623년 이후 정세가 급변한다.중요점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때와 달리 후금과의 외교 문서 교환을 끊어버린 점.
- 애초 조선의 광해군 정권은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군을 평안북도 철산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원조하고 있었으며,[2] 더나아가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을 표방했다. 그러므로 아민이나 홍타이지는 조선과 모문룡 양측의 연대를 차단하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성이 있었다.
- 슈르가치(Šurgaci)[3]의 장남 아민(Amin)과 홍 타이지의 갈등, 누르하치가 전제적 권력을 휘두른 반면 홍 타이지는 즉위 초에 4명의 대버일러의 대표자적 위상으로서 한이 되었는데, 그가 권력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아민은 누르하치 사망 이래 희망하던 독립을 조선 정벌을 통해 추진하고자 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조선 정벌을 건의한 것은 아민을 비롯한 원정군 지휘부였다. 그는 명군이 해도로 도주하자 내친 김에 조선을 치자고 결정한 것은 그였다. 아민은 정묘화약 이후 한양으로 진입하여 독립을 꾀했으나 천연두의 유행과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을 약탈하고 평양에서 또다른 맹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반항을 그쳤다.[4]
-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5]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했던 점.
- 조선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던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달리 조선에 대해 강경한 실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광해군 때의 방비와 외교정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후금도 대기근에 시달려 조선과 전쟁을 벌이기에 무리였으나 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이 붕괴되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그 과정에서 길잡이들까지 확보됨으로서 홍타이지는 전쟁을 실행에 옮길 현실적 여건을 확보하였다.
- 대청전쟁을 책임진 명나라 병부상서 원숭환과 홍타이지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26년 휴전을 맺었다. 원숭환은 방어태세 정비를 위해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홍타이지는 보위를 이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내부정비가 시급했다. 홍타이지 초반의 지배는 누르하치 처럼 절대권을 쥔 것이 아니라 4대 버일러들과 일종의 동업자 관계였다. 그리하여 원숭환은 합의금 명목으로 후금에 거금의 공물을 보내고[6], 홍타이지는 이를 받고 산해관 방면의 공세를 유보하는 대신 조선을 칠 여력이 생겼다. 원숭환도 이틈에 만리장성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원숭환이 조선이라는 살을 내주고, 만리장성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이라는 뼈를 취한 것이다.
3. 전개
1627년 2월 23일(인조 5년 음력 1월 8일), 초봄에 아민이 이끄는 후금군 3만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7] 심양을 출발해 조선을 침공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군에게 장악된 것이다.[8]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 등지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후금군에게 패하면서 그 본진이 개성까지 후퇴하였다.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후금을 향한 공세[9]와 더불어 정봉수(鄭鳳壽, 1572년 ~ 1645년)라는 무관이 의병을 모아 평안북도 철산군의 용골산성에서 후금군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평안북도 용천군의 김우, 이립(李立, ? ~ 1627년)도 의병을 모아 소위포에서 전투를 벌여 후금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4. 강화
후금은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사신을 보내 조선에게 강화를 요청했고, 백성들에게도 후금군은 강화를 원하는데 너희 조정이 우리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선전하면서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조선 조정은 후금측의 강화 요청을 계속 무시하다가 결국 후금군이 고속으로 전진하여 황해도 평산까지 도달하자 나서야 강화협상에 응했다. 겨우 10여일만에 후금군은 황해도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단 후금은 2월 평산에서 멈추고 강화도에 있는 조선 조정과 계속 사신이 왕래하였으며, 3월 25일(음력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것을 요구했다. 결국 후금군은 유해[10], 강홍립 등을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게 했다.후금 사신단의 일원으로 온 강홍립은 조정에 후금의 내부사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장기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 조정측에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인조와 조선조정은 주전론을 펴는 언관들의 반론을 물리치고 후금과의 화의를 모색한다. 여기에 후금 사신 유해는 명나라 항장출신으로, 협상이 결렬 위기를 맞았을 때, 제3자적 입장에서 조선측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개인서신을 인조에 보내 위기에 빠진 협상을 구해냈다.
이후 조선이 은, 면 등으로 구성된 배상금을 낼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협상이 다 이루어 졌을 때, 조선측에서 보낸 국서에 명나라 연호인 천계가 있었는데, 이를 본 후금군 총사령관 아이신기오로 아민이 발끈했고, 그의 뜻을 받든 유해가 구체적으로 조선에 요구한 기록이 여럿 있다. 특히 유해는 "발끈 성을 냈다(勃然生怒)."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화를 냈는데, 조선 조정의 해결책은 시비붙지 않게, 답서 보낼 때 그냥 연호를 생략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는 조약을 맺고 4월 18일(음력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화의에 따른 공물을 제공하는 한편, 종실인 원창군[11]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냈다. 후금군도 결국 철수하였다.
볼모로 후금측에 갔던 원창군은 몇년후 조선측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5. 아무것도 안한 모문룡군
사실 정묘호란의 원인중의 하나는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군 때문이었다. 모문룡은 가도에 진을 설치하고 (동강진) 이미 청나라에 넘어간 여러 요동의 해안지방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청나라는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청나라의 조선 침략이유의 하나도 이들 때문이었다. 모문룡은 만명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계속 요동 해안이나 혹은 배로 요하를 거슬러 올라가 만주의 내륙까지 공격했다.수전에 약한 청나라군을 괴롭히던 모문룡군은 막상 청나라의 대군이 몰려오자 가도로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모문룡군은 수륙양용 병력이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이후 조선과 청나라가 화의를 맺고 청나라군이 철수할 때, 청나라군이 석방한 조선인 포로들을 공격해 참수하고 "오랑캐의 대군에게 승리했다"며 명나라 조정에 허위보고하기도 했다.
6. 전쟁 이후
사실 후금은 파죽지세로 10여일만에 황해도까지 진격했으나, 원래부터 장기전으로 끌 생각은 없었고 조선과의 관계가 정립되고 내부정비가 완료되면 다시 명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했기에 불만족스러워도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유해(청사고에 유흥조라고 기록)는 항장 출신이지만, 청나라에 확고한 충성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조선측의 사정을 상당히 봐주면서 협상을 했다. 이 사람은 이 이후 다시 명나라에 귀순하여 모문룡 아래 있다가 후금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12]이렇게 유해가 거의 간첩 수준으로 조선의 편의를 봐주면서 협상을 했기 때문에, 후금은 이후 화의에 매우 불만을 품었고, 이런 불만은 이후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화약 과정을 보면 주거니 받거니 협상도 제법 이뤄지고, 후금에서 화친을 재촉하기도 하는 등, 이후의 굴욕처럼 조선 입장에서도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은 아니었다. 유생들을 위로한다고 강화도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질 않나, 상소에 '항복'이라는 표현을 쓴 관리를 파직시키라고 인조가 몽니를 부리질 않나.[13] 후금이 급한 걸 알긴 알았는지[14] 때아닌 여유(?)를 부리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조정차원의 화의가 이어졌어도 후금군과 조선측은 계속 충돌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의병이나 자경단이 후금측의 소부대를 공격해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후금군은 조선측 마을을 약탈하여 포로를 잡아가거나 혹은 약탈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금과 조선 측은 서로 맹약을 어겼다고 계속 서로 항의를 했지만, 이미 맺은 화약은 깨지지 않았다.
후금은 모문룡을 견제하기 위해 압록강 이남에 이해 10월까지 군대의 일부를 주둔시켰다. 이것은 조선 영토에서 모든 부대를 철군하기로 한 화약 내용을 어긴 것이지만 후금군 주력은 그 와중에 내몽골을 원정할 수 있었다. 사실 후금의 수도인 심양은 한반도에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서 후금군 주력이 내몽골 지역 등 근처 유목 부족들을 정복하러 원정하러 비우면, 조선이나 모문룡이 빈집털이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압록강 부근에 주둔한 후금군의 견제 때문에 조선과 모문룡은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후금은 그렇게 완벽히 내몽골을 석권했고 그렇게 불려진 만주족의 세력이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표출되고 만다.
그러다가 정묘맹약 10년 뒤인 1636년 2월,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사절단을 보내 홍타이지의 존호례, 즉 칭제건원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러나 조선은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였고, 삼사와 성균관에서는 사신의 참소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3월 초 도주하는 사절단은 인조의 선전교서를 탈취하였다. 이로 인해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된다.
7. 대중매체에서
다른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전쟁을 벌인 극적인 이벤트이긴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과는 달리 미디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때는 우리나라가 승리한 입장이였고, 많은 영웅들의 존재로 인해 시원하고 통쾌한 스토리가 많고, 병자호란은 패하기는 했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등의 극적인 요소가 있고 남한산성 피난이나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비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반면 정묘호란은 병자호란의 전초전 내지 마이너 버전 정도의 인식인데다 극적인 요소도 없어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2013년부터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하는 칼부림에서 묘사되고 있다.
8. 관련 문서
8.1. 관련 전투
- 의주성 전투(1월 13일 ~ 14일) - 패배
후금 측 참전 장수 : 아민, 지르가랑, 아지거, 두두, 요토, 쇼토, 한윤, 이영방
- 능한산성 전투(1월 15일) - 패배
후금 측 참전 장수 : 아민
- 안주성 전투(1월 19일 ~ 21일) - 패배
후금 측 참전 장수 : 아민
- 창성 전투(1월 20일) - 패배
후금 측 참전 장수 : 지르가랑
- 운암 전투(시기 불명) - 패배
- 용골산성 전투(2월 27일 ~ 6월 14일)
후금 측 참전 장수 : 아민
- 모라산 전투(시기 불명) - 승리
- 의주 전투(시기 불명)
- 철산 전투(시기 불명)
- 선천 전투(3월 초 ~ 4월 9일)
- 평양 전투(시기 불명)
- 소위포 전투(시기 불명)
- 운산 전투(시기 불명)
9. 참고 항목
[1] 자질구레한[2] 다만 이는 모문룡이 이뻐서 주둔을 허용한 것도 아니었으며 모문룡이 이뻐서 원조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이 명의 봉신국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작용하여, 모문룡이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는데 기여하고 명 조정의 실세들과 친밀했다는 점으로 인해 모문룡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조는 정묘호란이 벌어지기 전에 정세를 오인하고 후금의 침략은 현실성이 없지만 모문룡의 내통 및 침략이 현실성이 있다고 여겨 모문룡의 침략에 대비해야하는 논의를 자주하고 5천의 군사도 징발했다.[3] 누르하치의 동생으로, 누르하치와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유폐되어 숨졌다.[4]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8;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중국사연구》 54.[5] 이괄의 난(인조 1년)으로 인해 북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6] 일부 학자나 역덕들이 후금-청나라의 경제난 때문에 적어도 두번의 호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서강대 계승범 교수는 적어도 정묘호란은 원숭환에게 거액을 뜯어낸 직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후금의 경제난과는 거의 관계 없다고 한다. 후금이 정묘호란 당시 조선측에 요구한 공물은 당시 말 700필 수준의 액수로 상징적인 액수였고, 원숭환에게 받은 공물의 수십분의 일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조선측과 어떻게든 교섭통로를 마련해 명-후금 전쟁에서 중립으로 묶어두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한다. (계승범, 정묘호란의 동인 재고 2020)[7] 실록을 보면 후금의 길잡이로 돌아온 강홍립을 두고 조정에선 "얘를 죽여 살려" 하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인조 선에서 삭탈 관직으로 정리되었다.[8] 이로부터 9년 뒤에 치른 전쟁에선 아예 큰 길을 타고 한양으로 요격했다.[9] 즉 당시 후금은 양면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10]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해, 청사고에서는 유흥조로 기록되어 있다.[11] 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으로 원래는 부령(종친부 종5품)이었던 이름뿐인 왕족이다.[12] 이 사람의 동생인 유흥치는 이후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참수되자 가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원숭환이 모문룡의 후임으로 가도 도독으로 임명한 진계성을 죽이고 가도를 지배한다. 그러다가 다시 후금에 재귀순을 하려고 했는데, 이를 안 심세괴에게 죽임을 당한다. 명나라는 심세괴를 가도의 도독으로 임명한다.[13] 웃긴 건 '얼른 항복하세요.' 하고 상소를 올린 게 아니라 '아 쪽팔리게 왜 오랑캐한테 항복하나요 ㅠㅠ 나가서 싸우죠 ㅠㅠ'라는 상소를 올린 것. 인조도 창피하긴 했는지 '야, 우리가 지금 화친 협상 하는 거지, 항복 협상하는 거냐? 너 지금 나 놀리냐?'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항복이라는 건 무릎을 꿇고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14]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인조는 강홍립, 박난영을 만나 후금이 오래오래 조선에 머물러 있을 상황이 못됨을 전해 들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