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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김자점
金自點
출생 1588년(선조 21)
사망 1652년 1월 27일 (향년 63 ~ 64세)
(음력 1651년, 효종 2년 12월 17일)
재임기간 제119대 영의정
1646년 5월 12일 ~ 1649년 7월 31일
(음력 인조 24년 3월 27일 ~ 효종 즉위년 6월 22일)
봉호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1]
본관 구 안동 김씨
성지(成之)
낙서(洛西)
가족 아버지 김탁(金琢)

1. 개요2. 생애
2.1. 인조반정의 공신2.2. 출세한 군사 전문가2.3. 병자호란2.4. 권력의 정점에 서다2.5. 몰락과 비참한 최후
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전라도 낙안 출신이다. 시류를 잘 읽는 반정공신이자, 유능한 군사 관료였지만, 한편으론 실패한 지휘관이자, 차기 군왕이 경계한 권신, 청나라와 결탁한 역적이라는 매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2. 생애

사육신 사건을 밀고한 김질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암기에 능하였다고 한다. 음서로 조정에 나아갔다가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해 쫓겨난 이후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반정공신으로 녹훈되어 중직을 역임했다.

과거에 급제한 적은 없었으나 실무 관료로 군사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어영청을 육성함으로써 광해군의 난정과 이괄의 난으로 무너진 조선의 군사력을 복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배에 일부 기여했으며 전후에는 인조의 최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렸는데 효종에게 숙청당할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에 조선을 고발하고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1. 인조반정의 공신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했으며 글재주로 이름높았다고 한다. 음서로 처음 관직에 올라 광해군 때에는 병조좌랑(兵曺座廊)에 이르렀다. 보통 음서직은 지방 수령이나 돌다가 그만두는게 대부분으로 나름 요직에 해당하는 정5품 병조좌랑에 오른다는 것은 왕의 총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광해군 때는 동인의 분파인 북인의 시대로 서인인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의 당여들은 요직에 앉기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광해군 때 실세였던 김상궁(김개시)에게 뇌물을 많이 준 덕으로 분석하는 견해도 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면서 정국이 갑작스레 혼란해지자 서인 소속 당여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귀 때문에 반정을 꾀하려는 사실이 들통나자.[2] 상궁 김개시와 후궁 소용 임씨등에게 뇌물을 홍제원(弘濟院)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홍제원 밖 세검정에서 이귀, 김류, 이괄 등이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합류하여 홍제원을 치고 궁궐로 진격해 광해군과 대북파 일파를 모두 제거한 뒤 인조를 추대하고 반정을 성공시킨다. 반정 성공 후 1등공신에 책봉되어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반정 후 이귀, 김류 등의 권력 장악을 도와 그가 주로 인사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인 출신 이원익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천하고 일부 직책을 남인에게도 주게 하여 남인 일파 역시 끌어들이고 이조와 병조에는 서인을 배치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귀의 서녀가 김상궁의 총애를 받는 무수리였는데 김자점은 여기까지 손을 뻗쳤다. 한마디로 정세 판단이 약삭빠르고 운도 따랐던 인물로 자기 처지 생각안하고 막무가내였던 이괄과 달리 김자점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있었다.

2.2. 출세한 군사 전문가

공신인 데다 실세들과 사이도 꽤 원만하여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순검사나 한성 판윤 같은 직책을 역임할 때 특유의 급하고 다혈질인 성격을 조정은 과단성 있고 강직하며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인조는 그다지 김자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조가 남인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려고 하자, 김자점은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이 역적인데 어찌 윤의립의 딸을 들이겠느냐며 반대했다.[3]

결국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기를 포기했지만 이 일로 김자점을 괘씸히 여겨 그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다시 등용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적어도 1627년에 김자점은 특진관이자 어영대장으로서 어영청에서 어영군을 훈련시켰다. 즉, 조선에서 훈련도감 다음가는 정예군이자 병자호란에서 활약하는 어영군은 김자점이 직접 선발하고 훈련시킨 병력이었던 셈.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어전회의에 이귀가 "평산, 개성부의 백성들이 장차 살육을 당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인조에게 묻자 김자점은 그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이 어떻느냐고 진언을 올렸다. 인조는 "강화도로 데려왔다가는 장차 굶어 죽게 될 것이다." 하면서 오늘날의 급선무는 강에 있는 선박을 수습하여 경창의 쌀을 운송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순검사(巡檢事) 겸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제수되었고 1628년 숭정대부(종1품)로 승진했다. 1630년 한성부 판윤, 이후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와 겸 구관청 당상(句管廳堂上)이 되었다.

이 무렵 김자점은 조총 관련 군수물자 확보를 건의하고, 요역이 제대로 면제되지 않아 군사들이 견디지 못한다며 낱낱이 신칙하자고 건의했다. 1631년 김자점은 강화도의 성지와 군량을 구관하는 직임을 맡았는데, 백성의 생활이 한창 곤궁하고 또 저축된 것이 없어서 (강화도에 옮갈 백성들) 10만여 명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며 여러 대책을 주장했다. 나주, 영광 등 고을을 강화도에 소속하여 등주, 동래와 통상하고 제주에서 채취한 미역과 각도의 어염세를 본총에 소속시키고 삼명일의 방물을 면포로 바꾸어 배 만드는 자본으로 삼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강화도 수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말한 것이다. 이중에 미역과 어염세는 인조가 다시 의논하라고 했다. 김자점은 명나라의 가도(椵島), 등주(登州) 및 내주(萊州)와 통상(通商)한 다음에야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인조는 명나라가 길을 통하지 않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박했다.

김자점은 이때 (강화도의) 목장 등을 모두 둔전으로 개간하여 경작하면 틀림없이 곡식을 많이 얻으리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말을 먹여 기르는 지역에 쉽게 경작을 허락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4] 김자점은 당장 백성 10만을 먹여 살릴 의무를 맡았으므로 개간을, 인조는 전쟁터에서 중요하게 쓰일 기병 때문에 현상 유지를 주장한 것이다. 당시 김자점은 강화도에 곡식 10만 석을 들이고자 영리를 다투어 시상과 어민이 생업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는 김자점이 강화도에 군량을 비축하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다. 인조 10년(1632)에는 산릉의 큰 역사로 백성들이 궁핍하다며 자신이 담당한 구관청의 포와 미를 내어 민력을 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또 김자점은 상방에 있으면서 여러 기물들을 정밀하게 다듬었다.

1633년 조선군 도원수(지금의 합참의장 정도) 자리에 올라 서북방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도원수 재직 중 한성부와 경기도 주변 지역에 성곽과 진, 보를 보수하였다. 과도한 격무에 시달린 김자점은 1633년 7월 상의원제조직과 구관청당상의 겸임에서 해임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조 16년(1636) 청나라 병력이 움직이려 한다는 보고에 따라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로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 작업을 하였다.

1635년에는 김자점이 몸소 돌을 져 날라 몇 개월 만에 백마산성을 수축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느 정도 가감할 필요야 있겠지만. 또한 1635년에 이르면 김자점이 의주에 설치한 둔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의주의 둔전은 1634년에 6둔이지만 35년에는 12둔이 되었고 소출 2300석을 내었다. 지난해에는 2만 석이었는데 올해는 배가 되어 3, 4만 석을 수확할 수 있었고, 의주의 둔곡의 두해의 소출이 4만 5천 석에 쓰고 남은 게 3만 6천 석이라는 것도 있다. 김자점은 의주를 포기하잔 주장에도 반대하고, 백마산성을 지켜 초입의 저지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사와는 달리 임경업과도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믿고 맡기기도 했다.

2.3. 병자호란

병자호란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청군의 급속한 남하를 강건너 불 구경하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고 욕을 거하게 얻어먹는다. 나만갑의 병자록과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용골산의 봉화보고에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것과 제대로 근왕하여 돕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자점은 도원수가 되어 봉화체계를 정비하였는데 한명기 교수는 '병자록' 등을 보면 김자점은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를 제때 서울로 전달하지 않았고 겨울철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판단에 기초해 청군의 움직임을 간과했다고 언급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산성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자점이 도원수가 되어 말하기를, "도적(徒敵)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하였다. 혹 도적이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화를 낼 뿐, 성(城)을 지킬 군사를 조금도 더하지 않았다.

"의주 저편 용골산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나리라" 하여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황해도 봉산)까지만 (봉화 불빛이) 오도록 하였다.

납월(병자년 음력 12월) 초6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올렸으나, 자점이 말하였다.

"필시 사신을 맞이하는 불이다. 어찌 도적이 올 리 있으리오."

초 9일에 비로서 군관 신용을 의주로 보내에 적병을 탐지하였다. 신용이 순안(평양 서쪽)에 이르러 보니 적병이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달려와서 보고하자 자점이 크게 노하여 신용을 베려고 했는데,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서 경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 같이 하고 번신(藩臣)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가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청군이 침공한 지 6일 후에야 도원수 김자점이 위세가 급한 줄 알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승정원일기를 집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게 되기 전에 나온 낡은 학설들로 후일 역적이 된 김자점에게 당시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기술에 불과하다. 2010년대에 병자호란 관련 연구를 한 구범진 교수는 의견이 전혀 다르다. 그는 청의 기록을 근거로 12월 8일에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했다고 본다. 거기다가 승정원일기에서도 최전방에 있는 임경업이 12월 9일에 보내어 12일에 접수된 서계가 청군을 발견했다는 첫 보고였다. 즉, 김자점이 주둔한 황주에서 12월 6일에 청군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개인기록에 불과한 산성일기와 연려실기술 모두 서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병자록은 김류 관련 기록도 그렇고 병자호란 관련해서 왜곡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직도 이런 기록을 베이스로 쓰는 사람이 많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기병의 앞에 선발대 몇 기를 보내 길잡이로 삼아 황주에 도착했다. 이들이 황주를 지나가자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했다. 조금 후에 마푸타의 300 본군이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따라오는 본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김자점은 인조가 하사한 상방검을 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참하겠다 어르며 눈앞에 있는 소부대에만 집중했다. 이완은 김응해와 함께 마푸타 군을 산골짜기로 유인하고 김자점 본군이 기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김자점에게 지휘책임을 묻는다면, 나만갑의 일방적인 왜곡에 기반한 봉화 운운이 아니라 동선역 전투를 들어야 한다. 이완 말대로 길목을 막아 후속부대를 차단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1천 기병이 황주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이완은 어제의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을 알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기습 작전을 실행하고 실패했다.

이후 황주 정방산성에 인조의 서신이 당도하자,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이때까지 김자점은 작계에 따라 동원령을 내려 정방산성을 5천 병력으로 지키는 중이었다. 적의 남하를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조선군과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없는 청 선봉대는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이에 남하한 선봉대는 몇 안 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악수를 두는 원인이 되었다.

청의 전략은 선봉대가 신속한 기동으로 적의 종심 깊숙히 침투해 조선 주력부대에 혼란을 주고, 후속 부대들이 각기 시간차를 두고 파고들어 어디가 주공이고 조공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하여 조선 조정의 상황판단 능력까지 흔드는 데 있었다. 이를 방지하려면 적의 선봉대를 최대한 잘라내야 했다.

여하튼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근왕을 지시하자 김자점은 더 이상 정방산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군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12월 23일 황주에 도착하였는데, 도르곤은 주변 주민들을 착생하여 김자점의 1만 5천(실제 5천)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르곤은 곧장 일부 병력을 떼어 추격하라 명했다.

김자점은 12월 24일 당시 토산에 영을 세우고 있었는데 도르곤과 호우거의 군대가 기습했다. 황해병사 이배원과 병사 이석달이 척후 없이 이동하다 급습당해 패퇴했고,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주산으로 급히 말을 몰았다. 이완 신도비명 등을 감안하면 일부 장교들은 수십 명씩 이끌고 산중턱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차 합류한 듯하다.

연려실기술이나 이완 신도비명에야 김자점이 도망가니 이완이 뒤에 남아 병사들을 수습해 저항했다고 하였고, 김자점을 제거한 효종은 지휘관이 무능한데 병사들이 다 했다고 비난했다. 근데 정작 병자호란 이후 기록을 보면 연려실기술에선 비겁하게 달아났다고 매도한 지휘관들(변사기, 정태화)을 잘 싸웠다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명길이 추천했다. 자, 그럼 김자점은 어떨까? 야사에서 달아났다는 지휘관들이 실제론 용감하게 싸웠는데 김자점은 야사 기록 그대로 혼자 산으로 달아났는가? 아니다, 그는 청군 기병에게 맞서는데 유리한 산 위로 올라가 직접 육성한 어영청 포수들을 동원해 저항하여 청나라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토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이에 2천 군사를 수습하여 남하를 개시하고 12월 30일 양평 미원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한다. 이후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양평에 도착한 직후에는 토산 전투의 피해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 강원도와 함경도의 병력이 합류해 병력은 기록에 따라 갈리긴 하나 거진 2만 가량으로 불어났지만, 청군이 병자호란에 동원한 병력이 (구범진 교수의 추산으로) 3만이 넘었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교전을 하는 도박을 벌일 순 없었다. 남도 근왕군과 연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남도 근왕군은 패하거나(쌍령), 피로스의 승리(광교산)에 머물러 끝내 김자점의 서북 근왕군과 연계하는 데 실패했다. 김자점이 양평 미원에 도착한 것이 12월 30일인데 쌍령 전투는 1월 3일, 광교산 전투는 1월 6일에 벌어졌다. 전화기와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김자점이 남쪽 근왕군까지 통솔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유도대장 심기원을 도원수로 임명해 통솔케 했다. 그런데 이 또한 도원수가 2명이 되는 악수라 지휘권이 서로 충돌했다. 중앙에 있던 심기원은 남도 근왕군과 합류도 못한 채 불과 2백 기만 거느렸다가 미원에 들어온 김자점과 만났다. 김자점은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고 주장했지만 심기원은 반대해 마찰이 벌어졌다. 둘 다 직급이 도원수라 진통이 꽤나 있었다. 겨우 정리는 되었으나 김자점은 조선의 마지막 모든 것을 쥐어 극도로 신중했고, 결국 그사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즉, 김자점이 가만히 처박혀 있어서 근왕군이 각개격파되었다는 주장은 그에게 예언능력이 있어야 했다, 또는 조선시대에 전화와 자동차를 발명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김자점이 미원에 도착한 때가 12월 30일, 하삼도 근왕군이 참패한 쌍령전투가 1월 3일. 조선시대에 이 정도 날짜, 거리 차이가 뭘 뜻하는지 모르겠는가?

조계원 묘비명에 의하면 무조건 틈만 노리진 않고 인조를 구원하고자 했다. 조계원이 김자점을 설득해 심기원에게 군사를 빌려서 인조를 구원하자고 주장하자 심기원이 김자점에게 부하 병력 500명을 빌려주었고, 김자점은 수하의 병력을 합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했으나 남한산성에 30리 못 미쳐서 화친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에 그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로 탄핵을 받자,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임경업을 두둔, 용서하게 하여 도로 임소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기를 청하고 도망병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사태 수습에 힘썼다.

어쨌거나 누군가 책임은 져야 했고, 동선령처럼 분명히 더 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1637년 전쟁이 끝난 직후 도원수로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절도정배(絶島定配)형을 받아 충남 서산군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639년에 인조가 사면하여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박씨전에서도 박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대로 하자 결국 청에게 패하고 나서 욕을 먹는다는 얘기가 똑같이 나온다.

2.4. 권력의 정점에 서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친청과 반청으로 나뉘어 격렬한 정쟁 속에 빠져있었다. 인조는 이 상황에서 조정을 정리하고 군사전문가로 계속 활용하기 위해 김자점을 다시 기용했다. 도원수로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강화 유수와 호위 대장을 역임하면서 인조의 측근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히려 도원수로서의 실패 때문에 계속 중용했을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큰 약점이 생겨버린 탓에 인조의 총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천 최명길이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17년인 1639년에 어영군을 김자점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걸 보면 여전히 실무능력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김자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조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이후 서인이 공서와 청서로 나뉘자 김류, 이시백, 원두표, 이시방, 최명길, 심기원 등을 비롯한 공서파 편에 서서 청서파를 탄압했지만 이후 공서에서도 원두표, 민광훈 등이 원당을 구성해서 나가자 원당 역시 탄압했다. 이후 김류와 손을 잡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김자점의 반대편에 있던 최명길의 라인에 있으면서 당시 실세인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인조의 무능함에 실망해서 원래는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고 인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할 작정이었으나 소현세자는 큰 일을 도모할 사람이 아니었는지 왕족인 회은군을 추대하자는 모의를 했지만, 거사 직전에 고변자가 튀어나와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심기원은 가산이 몰수당하고 능지처참당해 죽는다. 심기원의 부하인 채문형과 권억도 연루되어 같이 처형된다.

심기원이 왜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승할 세자를 굳이 인조를 상왕으로까지 만들면서 추대하려고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기원은 인조의 정치에 실망해서 역모를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후로 인조는 세자에 큰 실망을 하게 되면서 사망 이후에 세자의 아들보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했다는 것, 그리고 김자점이 이를 찬성한 것과 세자 일가를 싫어하는 인조가 민회빈 강씨에게 왕실에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웠다는 것에 영합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심기원은 이괄의 난 때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흥안군을 멋대로 교수형에 처한 것 때문에 인조한테 밉보여 있었던 점이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임경업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서 조사를 받다가 고문으로 인해 옥사했는데,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었고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임경업을 죽게 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다만 실제 정황을 보면 김자점이 임경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인조는 임경업의 해명을 듣고 '심기원이 먼저 반역을 일으키고 사후에 임경업을 끌어들이려 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며 임경업에 대한 처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신하들과 토론하던 도중 임경업이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즉, 의도적인 고문사가 아니라 단순히 임경업이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옥사의 형태이다.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최명길이 물러나고 김자점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인조가 왜 김자점에게 힘을 실어줬는지 알 수 있는데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알수 없는 병으로 승하한 후, 그의 가계(원손을 죽이고)를 배제시키고 효종의 승계를 확정짓는 전위대 노릇을 했다. 민회빈 강씨가 인조 독살과 왕실 저주라는 누명을 쓰고 역모 혐의를 받게 되자 앞장서서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장해 결국 관철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김자점은 자신의 뒷배를 봐주던 세력이 돌아서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영의정 김류가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반대하자 인조는 이에 분노했는데, 이때 좌의정이던 김자점은 강빈 사사를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인조의 뜻에 찬동하여 김류마저도 배신을 했다. 이후 김자점은 김류를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영의정 자리를 장악했으며 이후 김자점은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인조와 더욱 밀착하여 권세를 누리게 된다.

인조가 죽기 전에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

2.5. 몰락과 비참한 최후

인조 사후 김자점은 인조의 정치에 반발하는 소위 산림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그 이유는 김자점이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서 패전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청나라에서 파견된 정명수(鄭命壽)를 위시한 역관 무리와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종법을 무시한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민회빈 강씨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유배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이유로 김자점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인조가 승하한 지 6일 만에 대간은 인조의 은혜를 저버리고 대신으로서 사익을 추구하고 방종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의 파직을 요구했다. 김자점을 파직해야 한다는 대간의 주장에 대해 효종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효종은 표면적으로 김자점이 인조의 공신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그를 두둔하는 한편, 탄핵 논의를 제기한 대간을 교체하기도 하였다.[5]

효종의 미온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을 파직하라는 여론은 오히려 격렬해졌다. 이에 효종은 한 달 여 만에 '김자점이 죄는 없지만, 부득이 공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파직했다. 김자점의 파직을 얻어낸 대간은 수위를 올려 김자점의 관작을 삭탈하고 유배 보낼 것을 청했다. 효종은 선왕의 공신인 김자점에 대한 추가 처분은 없다며 대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1649년 11월에 이르러 대간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공론에 의거해 김자점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문외출송시켰다.

대간은 문외출송의 처분은 김자점의 죄과에 비해 부족하다면서 거듭 유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1650년 3월,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효종과 조선 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간에서는 김자점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효종이 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을 모의하고, 송시열이 쓴 장릉(인조의 능) 지문에 청나라 연호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썼다는 일을 밀고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효종은 김자점을 강원도 홍천 땅에 중도부처했다. 그 후 김자점의 두 아들까지 외직으로 내보내려 했는데, 영의정 이경석은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효종은 김자점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김자점의 두 아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세간의 소문과 달리 청나라 사신은 김자점 구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가 사신을 보낸 궁극적인 목적은 당시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조선 왕실 여인의 혼사를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청나라 사신은 한양에 입성하기 전 조선이 양궁의 혼사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비추자 조선의 편의를 봐주는 방향으로 조사를 마무리 했다. 심지어 김자점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사도 없이 비리 문제로 김자점을 파직했다는 조선 조정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청나라에서 김자점 문제를 건드린 것은 양국 간의 혼사를 추진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이 드러났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김자점은 청나라를 이용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청나라 사신이 귀국한 후 김자점을 절도안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김자점이 전라도 광양 땅에 옮겨진 지 1년 여가 지난 1651년에 김자점의 사돈인 귀인 조씨의 저주사건이 일어났다. 소용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하려 했다는 혐의로 옥사가 시작되었고 관련자들이 속속 붙잡혀 왔다. 그러던 중 추국청에서 소용 조씨의 종형인 조인필(趙仁弼)을 압송하려 하면서 저주 사건의 불똥이 김자점에게 튀었다. 조인필의 압송이 결정된 후 진사 신호(申壕)와 해원부령 이영(李暎)이 효종에게 김자점과 그 아들이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을 올렸다. 신호와 이영은 조인필의 사위로, 이들이 고변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고변 내용에 따르면, 김자점이 문외출송당한 이후 그 아들 김식(金鉽)이 무관들과 함께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관련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면서 김자점과 두 아들 김식과 김련(金鍊), 손자 김세룡(金世龍) 등이 귀인 조씨와 결탁해 왕실을 저주하고 역모를 계획했다는 진술이 나왔다.[6]

효종이 김자점의 아들 김련과 김식을 친국(親局)하여 공모자들을 밝혀내 여러 무장들이 희생되었고, 김자점은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7][8] 가족들 역시 무사하지 못해 아들 김식, 김정(金鋌)과[9] 손자 김세룡, 김세창은 처형되고 소용 조씨도 자진을 명령받아 목숨을 잃었으며, 조씨의 딸이자 김자점의 손주 며느리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김자점의 어머니와 아내, 첩들, 며느리들은 전부 노비로 전락했다. 김자점의 아버지 김탁의 묘소와 그의 선산에 있던 가문의 묘소들도 전부 파헤쳐져 부관참시당하는 말로를 맞는다. 김자점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라,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파직되고 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쫓겨났다. 다만 김자점의 아들과는 별도로 김자점의 역모는 조작이라는 지적도 일부 있지만, 설령 저게 조작이라고 해도 이미 아들이 역모를 꾸민 것 자체가 사실이라 연좌제를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 권력 추구, 궁중과 파행적인 유착 관계, 매국 행위, 역적질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간신으로 후세에 엄청난 비판을 들으며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 김구다.[10] 그나마 중국과 달리 당사자 및 16세 이상 남성만 사형에 처하는 조선의 연좌제에 따라 직계는 노비, 나머지는 그냥 서민으로 강등하는 선에서 끝났다. 물론 역적의 일가가 한성에서 살기는 불가능했으므로 김자점의 남은 일가는 황해도 해주로 이주[11]했는데 김구가 태어날 때쯤엔 완전 몰락했다.

김자점의 죽음을 두고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이 김자점에게 '너는 내 형님의 원수니 귀양 가라.' 했다는데 헛소리다. 효종은 소현세자 부부와 친하긴 했어도 정통성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에,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형수 민회빈 강씨를 역강(역적 강씨)이라 부르고, 강씨를 입에 올리는 자는 엄벌에 처하리라 경고할 정도로 매우 강경하게 나갔다. 공교롭게도 김자점이 제거된 직후 강빈의 옥사를 재조사하고 나아가 민회빈 강씨를 신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즉, 효종이 김자점을 제거한 이유는 김자점이 매국행위를 했고 장차 자신의 권위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였다.

3. 여담

  • 김자점이 간신의 대명사인지라 김자점의 탄생에 관해서도 여러가지 야사가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과거 김자점이 거대 지네저주로 태어난 인간이고 이로 인해 성장해 가면서 흑화했다는 말이 있다. 이 내용은 문화원형백과 참고자료에도 실려 있고 역사 위키[12] 등에도 상세히 서술되어 실려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과거 <삼국유사> 등의 설화를 모은 학생 문고 중에도 이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위에 첨부한 문화원형백과, 역사 위키에 실린 내용을 정리해 적은 설화 내용이다. 사또에게 죽은 지네가 사또의 아들로 태어나 역적이 되어 사또의 집안을 역적의 가계로 몰락하도록 복수했다는 것이다.
조선조 전라도 땅 낙안에는 해마다 마을에 자리잡은 당집에 15살 남짓한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만 낙안 고을이 무사하다고 하여 처녀를 제물로 하는 제를 매년 지내었다. 만약 제물로 바쳐진 처자가 숫처녀가 아니거나, 아니면 제물로 처녀를 바치지 않거나, 제를 지낼 때 부정이 있으면 무시무시한 괴물 때문에 고을에 어김없이 재앙이 닥쳤다. 결국 낙안 고을의 딸 자식 가진 주민들은 할 수 없이 해마다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제비뽑기로 선출하여 제를 지내었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낙안 고을에 부임한 어느 사또(부윤)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런 폐단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사또가 포졸들을 지휘하여 당집을 허무는데 갑자기 일진광풍(一震狂風)이 일어났고, 당집의 대들보에는 커다란 지네가 나타나 당집 허무는 일을 방해하였다. 사또는 지금까지 숫처녀를 제물로 받아먹은 놈이 바로 이 지네임을 깨닫고 장검을 꺼내어 마디마디 토막내어 버렸다. 그러나 이 지네는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영물(靈物)이었다. 결국 사또는 토막난 거대한 지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완전히 죽여버렸다. 그런데 사또가 장검으로 지네를 토막낼 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의 입에서 나온 붉은 피가 튀어 빨간 얼룩이 지었다. 사또가 아무리 세수를 해도 붉은 점은 지워지지 않아 마음 속으로 사또는 불길함을 느꼈다.[13] 몇 달이 지나며 사또 미간의 붉은 얼룩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후 사또의 부인이 수태하여 열 달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난 아기의 미간에 핏빛 붉은 점이 진하게 박혀 있었다. 과거에 사또의 미간에 튄 지네 핏자국의 얼룩과 똑같았다. 사또는 불길한 징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세월이 흐르자 그럭저럭 불안을 잊고 지냈다. 아들의 이마에 있는 붉은 점 때문에 아들에게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 또는 '붉은 점'이라는 뜻으로 자점(紫點: 자줏빛 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사또가 그 아이를 잘 가르치면 나중에 틀림없이 좋지 않을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가르치지 않고 자신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명석하여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학당에서 배워서 과거에 급제했고 영의정까지 올랐다.[14] 이때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자점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쁜 마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역적이 되었다.
  • 탄생 설화처럼 다른 야사들에서도 김자점은 당연히 나쁘게 묘사된다. 이 역시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심기원이 김자점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려 주벌될 때에 김자점이 수상으로 있었다. 이에 김자점은 심기원에게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을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이 역적은 상률로 단죄해서는 안 되니 먼저 다리를 자른 뒤에 죽여 반역자들을 징계하소서." 심기원이 형을 받을 때에 집행하는 자가 먼저 그 다리를 자르려 하자 심기원이 형틀에 엎드려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그러자 집행하는 자가 "김 상공이 명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심기원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김자점이 주벌될 때에 과연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후 이 법은 폐지되었다.
  • 자질구레한 일화들을 모아 놓은 <청성잡기>에는 여관을 정비하고 온돌을 유행하게 한 사람이 김자점이라 하였다. <청성잡기>에는 이 때문에 물가가 상승하고 땔감이 많이 필요해졌다고 김자점을 비판하는 논조인데, 상업을 촉진하고 백성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한다는 측면에서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온돌이 보급되어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심각한 문제로 지적[15]되었으니 <청성잡기>도 그 부분을 비판했다. 다만 다른 대책은 이야기하지 않고 추위는 정신력으로 극복하자 부분은 아무리 봐도 <청성잡기> 저자 성대중의 에러.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가서 일본의 코타츠를 보고 좋아보인 모양인데, 일본의 겨울한국보다 덜 추우니까 코타츠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청성잡기> 3권에 악인이 만든 제도도 시대에 맞으면 오래 남는다는 이 있듯이 당시 조선 사회의 한계도 있었는데 김자점이 살던 시기의 기준으로 볼 때 여관과 온돌의 장점이 드러난 것은 최소 100~200년 뒤의 이야기였다.
점(여관)과 온돌의 폐해: 옛날에 여행자는 원에서 묵었다. 원에는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저 땔감과 물이나 갖추고 있을 뿐이어서 양식이나 그릇, 솥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가야 했으므로 여행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김자점이 처음으로 떠도는 거지(꼭지)들을 모아 점을 설치하니, 여행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점의 이익이 너무 많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상인들의 이문이 모두 점으로 들어가니, 점이 백성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사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고, 습지나 산이 모두 민 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 보니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하였다. 나도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이 난 자가 없었으니 억지로 습관 들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를 전국에 시행하면 처음에는 비록 약간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니, 백성들이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다. 다만 점의 경우에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대체로 역신이 만든 법들이 현재 많이 시행되고 있으니, 점과 온돌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 청성잡기 4권 -
  • 김자점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특히 밥상에 쇠고기가 없으면 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쇠고기 마니아'였다. 문제는 지금과 달리 는 농번기에는 귀중한 농기계 역할을 하고 물자 운송을 하는 등 아주 귀중한 자원이기에 고대부터 농경 국가 대부분이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16] 조선도 마찬가지라 소를 함부로 도살하거나 쇠고기를 먹으면 처벌할 정도로 소 도축을 금하였으나 김자점은 쇠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법을 어기고 소 도축을 자주 해서 유생들이 끊임없이 상소했다. 결국 사헌부가 김자점 집을 압수수색했더니 쇠고기가 무려 큰 상자 6개가 꽉 찰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양반이고 평민이고 나라에서 소 도축을 금지하든 말든 별의별 핑계를 대며 쇠고기를 탐식하고는 했다. 김자점이 권세 높은 고관이라 많이 먹었을 뿐이지 특별히 탐욕스러웠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김자점 본인이 저지른 각종 악행들을 감안하면, 김자점이 쇠고기를 많이 먹은 것은 적어도 좋게 보기는 힘든 모습이다.
  • 장호원은 남쪽으로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치수 사업의 일환으로 보를 건립한다. 김자점은 아버지 김탁이 매장된 백족산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자점보(自點潽)라는 인공 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이 고여있게 했다. 그 덕에 가뭄이 들 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으며 미질이 좋아 왕에게 진상하는 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한다.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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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의 황해도 재령평야도 김자점이 간척한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내정에는 꽤나 재능이 있는 관료인 것이 사실이었던 듯 하다.

4. 대중매체

인조 시대를 다룬 드라마 등에서는 인조 따위는 억누르고 꼭두각시로 만드는 대단하고 노회한 권신으로 묘사되며, 일종의 악역 보정이나 최종보스 보정을 받아 '나쁜 놈이지만 대단한 거물 정치가', 속된 표현으로 '간지나는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는 사실과는 대단히 동떨어졌는데, 인조 재위 후기의 김자점은 소용 조씨와 마찬가지로 인조의 충실한 장기말에 불과했다. 효종이 즉위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왕이 훙했는데 눈물을 안 흘린다는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을 정도로 그의 기반은 미미했다. 얼핏 병자호란 이후 정국을 주도한 듯 하지만, 인조 후반기 정치 상황은 철저하게 인조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는 작업은 무리수가 많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모르고 목소리 높여 여론몰이를 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 절대 대단한 권신이 아니었다.[17] 오히려 이 과정에서 정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를 밀어주던 왕이 없어지면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전제 왕조 국가의 특성상 독박쓸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8] 이런 부분에서는 유자광이나 임사홍의 후배격. 그러나 유자광, 임사홍은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해를 가하지는 않았기에 유자광, 임사홍이 억울할 법도 하다. 오히려 조선에 해를 입힌 간신배 원균이나 민겸호와 비교해야 옳다. 무게감 있게 다룬 작품들조차 어영군을 만들다시피 한 군사 관료로서 그의 행적은 무시하기 일쑤다. 물론 그럼에도 그가 오늘날까지 악인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악인이 맞기 때문이다. (이완용 등의 친일 부역자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휘두른 간신은 숱하게 있었지만, 모국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으려 했던 인물은 김자점이 유일하다. 인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보통 정통 사극보다는 퓨전 사극으로 많이 나타난다.)에서 김자점이나 김자점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흑막이나 악역 기믹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9]
  • 1981년 KBS 드라마 <대명>[20]에서는 배우 김순철이 연기했다. 물론 대중의 인식대로 무능하게 나온다는건 변함이 없다.
  • 고우영의 만화 <일지매>에서는 주인공 일지매를 죽이려 하고 나라를 청나라에 팔아치우려는 매국노로 등장한다. 그래도 능력은 있어서 일지매와 1:1 담판을 벌여 회유하려 드는 모습을 보였으며 외모도 상당히 위엄있는 모습이라 모르고 보면 이 사람이 우리가 아는 그 김자점이라고 생각이 안 들 정도다.
  • 2008년 KBS 드라마 <최강칠우>에서는 '김자선'이라는 인물로 나오는데 김자점이 모델이다.
  •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이경식'이라는 인물로 나오는 역시 김자점이 모델이다.
  •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인조반정 때 망설이는 능양군을 데려오면서 혈서로 '忠'자를 쓰는 등 미화되는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간지 악역으로 나온다는 것이지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가진 김자점으로 일국의 도원수가 되어 나라가 전란에 빠졌는데도 기생이나 끼고 잠이나 자면서 인조를 구원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뒤늦게 찾아갔다가 인조에게 친히 두들겨 맞은 다음 무인도로 귀양을 가[21] 거지꼴로 하루하루 고생하는 처지가 되자 죽을 결심을 하나 곧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낭떠러지에서 억눌려 왔던 분노를 표출함과 동시에 인조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내가 죽기는 왜 죽느냐? 내가 임금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씨(조선)는 왕씨(고려)에게서 나라를 훔쳤고, 세조어린 조카에게서, 중종연산군에게서, 지금의 너(인조)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훔친게 아니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내가 만든 임금의 손에 죽느니 내가 살아서 임금이 된 후에 네 놈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내가 임금이다. 내가 임금이란 말이다!"라고 부르짖으며 역성혁명을 꿈꾸며 봉산탈춤을 추는 장면은 전율까지 일 정도. 다시 으로 돌아온 뒤 얌전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인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등 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계획 자체는 성공해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지만 문제는 김자점의 생각과 달리 얌전은 꼭두각시에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최후에는 역모를 꾀하려다 실패하여 사지가 절단된 이후에 능지처참된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조민기가 연기했다. 다른 드라마들처럼 악독한 면모는 변하지 않았을 뿐 유달리 냉철하면서도 머리가 좋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며, 동시에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캐릭터이다. 본래는 정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한다지만, 정의는 늘 패하기 때문에 패하는 걸 싫어하고 이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쁜 쪽 편에 섰고, 나쁜 일을 하였다.
  •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조선군 도원수로 등장하는데 실명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 누군지 모르고 넘어가는 관객도 많았다. 다만 심기원도 도원수였으므로 심기원일 확률도 있긴 하다.
  • 2018년 개봉한 영화 <창궐>에서는 '김자준'이라는 인물로 나오는데 김자점이 모델이다.다른 사람도 아닌 장동건이 연기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미화물이다
  • 2023년 드라마 연인에서는 배우 김민상이 연기하였는데, 극 중 비중이 공기이고, 포로 송환 건을 두고 소현세자 및 이장현과 암투를 벌이는 인조가 최종 보스격 인물이다. 어느 정도 역사 재현이 제대로 된 셈이다.


[1] 김자점의 난으로 인한 삭탈.[2]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명(李溟)이 평산에 순찰하러 오자 이귀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군사를 일으켜 바로잡아 구제할 뜻을 언급하는 바람에 들통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귀가 사람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일이 자주 발각되었다며 이귀를 디스하는 듯한 기록까지 있다.[3] 윤인발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했다.[4] 김자점의 말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무능해서 한 말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건의해봄직한 사안이었다. 인조 재위기간은 임진왜란 이후 재건 중이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는 개간 열풍이 불었다. 과거 목장으로 쓰이던 서해, 남해 연안의 섬들은 땅이 기름져 농토로 개간하면 분명 좋은 효율을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는 도서 지역에 유생들까지 몰려들어 오늘날보다도 인구가 많았다.[5] 사실상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 당시 여론에 따라 김자점을 처분한다면, 정국 운영의 활로를 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김자점이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된 강빈의 옥사에 깊숙이 개입했던 만큼, 섣불리 김자점을 처분했다가 혹여 강빈의 옥사가 재조명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최기준. "孝宗初 金自點 제거 과정과 효종의 정통성 문제." 한국문화연구 43 (2022), pp.81~83.[6] 구체적인 역모 내용은 진술자마다 크게 달랐다. 혹자는 소용조씨의 큰 아들인 숭선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지만, 혹자는 조씨가 숭선군을 미워했다라고 진술했다. 또다른 혹자는 숭선군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김식 혹은 김세룡을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다.[7] 일부에서 사지를 먼저 잘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기록이 없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나온 걸 보고 적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기록상으로는 규정대로 처형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만 연려실기술에서 심기원을 죽일 때 김자점이 처형 담당자에게 '심기원의 팔다리를 먼저 자른 뒤 목을 베라'고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심기원이 '너도 똑같이 죽을 거다'라고 저주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얘기는 나온다. 아마 그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8] 한편, 반역죄로 처형된 만큼 김자점의 시신은 사방에 조리돌림을 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효종은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선왕의 공신이었다는 이유로 그 시신을 조리돌림 하지 말고 바로 수습하도록 하였다.[9] 다른 아들인 김련은 국문 도중에 물고.[10] 정확히는 김자점과 14대촌 먼 일가의 후손이다. 친형제나 사촌형제의 후손이면 당연히 방계 후손 대접을 받지만, 무려 14대촌이나 되면 사실상 남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김구의 직계 조상이 해주로 피신하고 양반 신분을 숨겼던 점과, 집안 어른이 청년 양반에게 하대받는 처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자점으로 인해 생긴 후폭풍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백범일지에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김자점 역모 사건으로 인한 가문의 몰락이었다. 즉, 김구는 자신의 조상인 김자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11] 해주로 온 것은 평범한 이주가 아니라 거의 야반도주하듯이 역적으로 쫓겨 도망쳐 온 셈이다.[12] 이 내용은 제다이 위키를 비롯한 몇몇 다른 위키에도 서술되어 있다.[13] 어느 책에서는 지네를 솥에 넣고 삶을 때 지네의 입에서 한 줄기 빛이 나와 사또의 머리를 비추어 미간에 붉은 점이 생겼다고 설명하기도 한다.[14] 어느 책에서는 아이에게 벼슬 같은 것을 하지 말고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던지 하라고 했지만 아이 스스로가 공부를 좋아하여 찾아서 공부를 했다고 나오기도 한다.[15] 대표적인 사례로 황폐화되어 씻겨져 내려간 토사가 한강 하류에 퇴적되는 문제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16] 동양만 한정. 서양은 소보다 농사에 주로 사용했고 소를 식용으로 개량하기도 했다.[17] 의외로 조선시대 권신으로 알려진 인물들 중에 이런 케이스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임사흥, 유자광, 남곤, 이이첨, 그리고 여기서 말한 김자점. 이들이 권세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존의 왕을 갖고 논 간신들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오히려 왕들이 이들을 쥐고 흔들었다는 게 현대의 평가이다.[18] 되려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엄청난 사태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 후반기의 정국을 본인 의도대로 끌고 나갔다.[19] 소설 <박씨전> 때부터 까여왔다. 정확히는, 이완용이라는 매국노가 등장하기 전까지,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했던 게 바로 김자점이었다. 역점(逆點)이라는 멸칭으로까지 불렸을 정도.[20]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 정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21] 단, 김자점도 억울한 측면이 있는데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계속 주둔하라"고 한 것은 인조 본인이다. 인조가 "어떤 경우라도 군을 움직이지 말고 평안도 기지를 지키라"고 한 명령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다만, 김자점이 본격적으로 권신이 된 후에 한 짓을 생각하면 김자점이 순수하게 충신으로서 인조의 해당 명령을 그대로 따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만약 김자점이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과 비슷한 성향인 사람이었다면 필요에 따라 인조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청나라군과의 전투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