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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갑

羅萬甲
1592년(선조 25) ~ 1642년(인조 20)

1. 개요2. 생애3. 성품4. 가족 관계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𩿨浦).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군량을 총괄하였다.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인 병자록의 저자이다. 벼슬은 정3품인 형조참의,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서인에서 청서(소서)로 분류된다.[1] 김류, 김경징 부자와의 악연에 더해, 결정적으로 인조가 그를 좋아하지 않아 관직 생활의 절반 이상을 한직에 머무르거나 유배당해 있었다.

2. 생애

1592년(선조 25) 전라도 나주목(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아버지 나급(羅級)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이의 직계 제자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김장생[2]이정구의 문인이기도 하다. 1602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22세 되던 1613년(광해군 5) 증광시 진사시에 1등 1위, 장원으로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소성대비)의 폐출을 논하자 그들과 멀리하였고, 인목왕후가 유폐되자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623년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고, 통덕랑(通德郞:정5품)으로 그해 열린 알성시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 3위로 급제하였다. 1624년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사에게 한수(漢水) 이남에서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거두어 공급하였다. 당시 공조참판 김경징이 군관을 장살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인조는 훈계 선에서 넘어가려 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죄를 청하였다. 당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정엽이었고, 나만갑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이때부터 김류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3]

1625년 4월 정엽이 사망하였다.[4]실록 졸기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교리(校理)로 승진한다. 5월 이조판서 김류가 남이공을 대사헌에 천거하여 임명되었다.[5] 나만갑이 홍문관 응교 박정(朴炡)[6], 부응교 유백증(俞伯曾, 1587 ~ 1646)[7], 교리 김반(金槃), 부수찬 이소한(李昭漢)[8]과 함께 남이공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체직을 논하자[9], 김류가 세 사람(나만갑, 박정, 유백증)이 붕당을 이루어 이조를 비방한다고 인조에게 아뢰어 모두 외직으로 좌천시켜 버렸다.[10][11][12] 나만갑은 평안도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13][14] 이귀의 도움으로 복직한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종사관으로 인조를 호종한다. 1628년 환도 후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병조 정랑(正郞),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29년 이조정랑(正郎) 자리를 두고 이조에서 이소한, 조경(趙絅), 나만갑을 의망(擬望)하였는데 좌의정 김류가 나만갑을 부박(浮薄)하다고 반대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오윤겸과 우의정 이정구[15], 병조판서 이귀, 대제학 장유[16][17]가 실드해주었음에도, 결국 인조는 나만갑을 유배시킨다.[18][19][20] 전라도 벽성(碧城)[21], 충청도 아산(牙山)을 거쳐 황해도 해주(海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김상용(金尙容) 역시 화평론(和平論)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소한 무리들로부터 크게 실망을 받고 있다 합니다. 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만갑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필시 부박한 무리들이 서로 선동하여 하는 짓일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나만갑의 사람됨을 보건대, 기(氣)가 지나친 듯하기는 하나 사려가 깊고 식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신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링크

1631년 영의정이던 김류가 죄를 지어 파직되었고, 인조가 나만갑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나만갑이 공신(功臣)과 외척(外戚)의 사치가 도에 지나치다고 공격하였으므로 공신과 외척들이 나만갑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 1632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으나[22]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인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간다. 그러나 성혼(成婚)한 자식들을 데리고 부임하였다고 공서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35년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죄인 석방 서류를 바로 결재하지 않은 이유로 좌의정 오윤겸을 비판하였다가 인조가 오만불손하다며 파직시킨다.[23]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파직당해 있던 나만갑은 말 한필을 타고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따라들어가 인조를 호종한다. 과거 종사관 시절의 경험을 살려 공조참의, 병조참지로 관량사 역할을 하며 군량 공급에 공을 세운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인 병자록을 훗날 회고하며 쓰게 된다.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 격렬하였고, 인조가 비축된 군량미를 물은 기록이 있다.[24]

결국 병자호란은 조선의 항복으로 끝났다. 호란 당시 나만갑의 모친이 서산으로 피난 갔다가 1637년 사망하였고, 나만갑은 충청도의 관선(官船) 한 척을 사서 어머니를 운구하여 경기도의 선영에 묻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송준길의 위로 서한 1640년 사면을 받아 경상도 안동의 영천군(榮川郡)로 이사를 가 중앙 조정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25] 유배지에서 얻은 병이 위독해지며 1642년 51세로 사망한다.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나만갑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인조는 나만갑에게 관작(官爵)을 되돌려주게 하고 예조에서 부조를 하도록 하였다. 호란 시기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대신(大臣)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58년에 건립된 신도비의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새겼다. 경기도 구리시의 안정나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묘비명 링크김수항이 작성한 묘지명

3. 성품

기가 셌으나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정엽이 “어린 임금이라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다.”하고,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의 말을 인용하며 자기 딸을 위해서 찾던 사윗감이라고 여기고 제자를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붕당을 질색하던 인조는 나만갑이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붕당을 짓는다고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였던 것 같다.그냥 파직, 유배가 기본이다. 가만히 있다가 천거가 되었는데도 평소 태도가 좋지 않다고 파직된다. 다수 신하들이 실드를 쳐도 무시되고, 김류의 말은 골라서 듣는다. 할 말은 임금 앞이라도 다 했기에 더 싫어했던 듯. 훗날 아들 나성두도 인평대군과 관련된 일에 엮여 파직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본인 생각에 잘못된 일이 있다면 가리지 않고 고했던 당대 언관의 표본이다. 김류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

1625년(인조 3년) 공주와 인조의 이복형 인성군 문제로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 나만갑의 언급이다.
검토관 나만갑(羅萬甲)이 아뢰기를,
"신하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인성군(仁城君)이 나갈 때 옥교(屋轎)를 탔다고 합니다. 비록 귀한 왕자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죄인인데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광해는 폐출된 임금인데도 가교를 타지 못했는데 어찌 인성군만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호송하고 도사(都事)가 배행한 것도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신중히 해야 할 것은 상벌입니다. 지난 번 소방(疏放)할 때 폐모론(廢母論)을 전담하고 권간에게 붙었던 자는 방면되고 한 차례 정청(庭請)에 참여한 사람은 방면되지 못했으니, 이는 해괴한 일입니다. 윤휘(尹暉)처럼 탐학스럽고 아첨한 죄인이 사면되었는데도 대각(臺閣)이 논하지 않았으니, 신은 대각의 기풍이 점점 전일만 못하여 사정이 앞선다고 여깁니다."

4. 가족 관계

증조부 나익(羅瀷)[26]나익 묘갈명[27]. 조부는 나윤침(羅允忱)나윤침 묘갈명[28], 부친은 나급이다. 나익, 나윤침, 나급, 나만갑 4대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급(羅級, 1552 ~ 1602)은 병조좌랑, 성균관전적을 거쳐 임진왜란 중 정사 김명원을 보좌하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왕복하였다. 왜란 중에는 한산군수로 재임하였는데, 관군이 용인전투에서 패해 흩어졌을 때 수습한 공이 있다. 왜란 이후 보덕, 장령, 세자시강원 문학, 필선, 보덕 및 공주, 광주목사 등 외직도 지냈다. 평산부사로 나갔는데 1600년 형장(刑杖)을 남용했다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실록 링크[29] 사후 아들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들 나만갑과 나이차가 40이다. 늦둥이 아들인 셈.[30]묘비명[31]나급 묘지명[32]

대사헌, 대사성, 우참찬을 역임한 유학자이자 이이, 성혼, 송익필의 제자인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 ~ 1625)의 문인이자 사위였다.[33] 어찌 보면 김경징의 김류처럼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부친과 장인이 모두 나만갑이 중앙 조정에서 활동을 활발히 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큰아들 나성두(羅星斗, 1614 ~ 1663)는 장유와 정홍명, 김장생의 문인이다. 자는 우천(于天), 자호는 기주(碁洲). 호란 이후 출사의 뜻이 없었으나 부친 사후 모친의 뜻으로 1646년 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세자익위사 세마, 호조좌랑, 봉산현감, 이산현감, 해주목사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당시 나만갑은 인조에게 파직당해 은거하던 중 말 한필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가족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겼고, 어디로 갈지 물으니 '너의 식견과 사려가 출중한데 어찌 내 지시가 필요하겠느냐. 다만 강도(江都=강화도)는 사녀(士女)와 보화가 모이는 곳이니 적이 반드시 취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수령(=장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니 부디 삼가서 들어가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부친처럼 기상이 있던 모양으로 봉산현감 재직 당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위세를 빌린 이에게도 전혀 굴하지 않았던 일화가 있다. 이기조가 '이 사람은 나만갑의 아들로 아비의 기상이 있습니다.'하자, 인조도 '이 사람이 오랫동안 솔부(率府=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소속이었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다.'하였으나 삭직하고 유배된 건 마찬가지였다. 1656년 이산현감으로 서용되어 3년간 잘 다스려 송시열이 그를 추천하여 관직 단계를 뛰어넘어 1659년 종3품 해주목사에 임명되었다.[34] 1662년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사망한다. 박세당의 부친 박정과 나만갑이 매우 가까웠기에[35] 박세견[36], 박세당과도 친하게 지냈다. 박세당이 묘갈명을 지었으며,링크 사위 김수항이 묘지명을,링크 윤증이 행장을 지었다.링크 당대의 명사 중 하나로 이단상링크을 포함한 여러 문인들의 만사가 전한다. 나성두는 경주 김씨 김남중(金南重, 1596 ~ 1663)[37]의 딸과 혼인하였다. 여담으로 1657년 송준길이 율곡의 묘지(墓誌)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광주요에서 제조하려 하였으나 비용이 부족하여 나성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송시열, 유계, 이유태와 연명으로 보낸 적이 있다.링크 나성두의 장남 나명좌(羅明佐, 1634 - 1651)는 송준길의 제자이자 사위이나 일찍 사망하였다. 10년 후 배우자인 송준길의 딸도 결국 자결하였다.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후사를 세우기를 기다렸으나 동서가 딸만 둘을 낳는 것을 보고 갑자기 목을 매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조카 김창협이 지었다. 김창협의 모친이 나명좌의 누나이며 서로 사이가 좋았던 듯 하다.나명좌 묘지명송준길의 혼인 서한송준길의 제문송준길의 나씨 부인 제문[38], 차남 나양좌(1638 ~ 1710)는 윤선거의 제자로, 윤증과 매우 친한 지우였으며, 의리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3남은 나석좌(羅碩佐, 1652 ~ 1698)이다. 나석좌는 조카 김창협보다 1살 아래였는데 함께 이단상의 제자로 친하게 지냈다. 이단상의 형인 이가상의 아내가[39] 나석좌의 고모[40]이기에 인척이기도 하며, 나석좌의 조부 나만갑이 이단상의 조부 이정구의 제자이기도 해서 얽히고 섥힌 관계다.김창협의 제문나석좌의 이단상 제문 송준길에게도 배웠으며, 윤증의 편지도 여러 편 전한다.링크 나성두의 첫째 딸은 김수항, 둘째 딸은 이사명과 혼인하였다.

셋째 아들 나성원(羅星遠, 1628 ~ 1649)은 송준길의 제자이며, 천안 군수를 지낸 안동권씨 권순창의 딸과 혼인하였다. 형의 사위인 김수항과 절친으로 지냈으나 1649년 요절했다.[41] 유복자 나홍좌(羅弘佐, 1649 ~ 1709)와 딸이 있었고, 훗날 아들의 고위직 역임으로 호조참판을 추증 받았다. 나홍좌의 자는 제백(濟伯)이며 부친 사후 송준길 문하에서 공부하며 백부 집에서 자랐는데 독특하게 문과 집안에서 나온 무인이다. 무과 급제 후링크 내금위장, 어영대장, 한성부좌윤, 포도대장, 숙천부사, 영흥부사,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를 거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역임한 고위 무인으로 당상관에 올라 비변사에 참여한다. 숙종 재위 당시 정홍좌(鄭弘佐), 강성좌(姜聖佐)와 함께 '삼좌(三佐)'로 불릴 정도의 유명한 무관이었으며 최석정이 작성한 묘비명이 전한다.링크[42] 나성원의 딸은 송준길의 손자 송병하와 혼인하였다. 딸 안정 나씨가 남편 송병하, 아들 송요화, 손자 송익흠에게 남긴 한글 편지가 현존한다.[43] 둘째 아들 나성한과 막내 아들 나성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첫째 딸은 이정구[44]의 손자이자, 이명한의 둘째 아들인 이가상과 혼인하였다.[45] 병조호란 당시 이가상이 모친을 찾던 중 청군에게 피살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나씨 부인은 충격으로 곧 사망하였다. 둘째 딸은 박세주와 혼인하였다.

장동 김문과의 교유가 혼맥으로 이어졌다.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친분이 있었다. 김수항이 쓴 나만갑 묘지명에 나만갑의 부친인 나급과 김상헌의 친분이 언급되고, 나만갑 대에 이르러 친분이 더 깊어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나만갑이 김류의 탄핵을 당할 때 실드를 쳐주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나라조선이 항복을 결정한 소식을 듣고 김상헌이 목을 매었을 때 나만갑이 구해주었다.[46][47] 큰아들 나성두는 김상용의 사위인 장유의 제자이다. 안동 유배 당시 근처에 있던 김상헌과의 교분이 지속되었고, 김상헌의 손자[48]김수항과 나만갑의 손녀 (나성두의 딸) 안정 나씨의 혼인으로 인척이 되었다. 김수항은 산림의 송시열과 정치적 동맹으로 노론의 중핵이었으며, 형 김수흥과 함께 형제 영의정으로도 유명하다. 김수항의 창자 돌림 여섯 아들들은 모두 재주가 빼어나 당대에 육창으로 불렸다. 그 중 김창집경종때 소론과 극렬하게 대립하던 노론 4대신 중 하나로 영의정에 이르렀고, 김창협, 김창흡은 특히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수항의 고손자는 세도정치의 시작인 김조순이다.


[1] 당시의 서인인조반정에 참여해 공을 세운 공서, 참여하지 않은 청류 유학자의 청서로 구분된다. 청서는 김상용, 김상헌 형제, 신흠, 윤원거, 나만갑, 이식 등이 속한다.[2] 문인록에 올라있다.링크[3] 결국 김경징은 벼슬이 강등되었다.[4] 사망 3일 전 몸이 좋지 않다고 사직을 청했는데 인조가 반려하고 내의와 약을 보냈다. 사망 다음날 바로 인조의 명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가 아꼈던 것 같다.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사위에게 힘이 되었을텐데[5]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때 남이공이 외람되이 헌장(憲長)을 차지하여 인망(人望)이 부족하였는데 김류가 천거해 임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한마디도 입 밖에 내어 논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아래 링크 함께 참조.[6] 인조반정 정사 3등공신이다. 나만갑과 절친한 사이였고, 교류가 아들대로 이어진다. 박세당의 부친이다.[7] 역시 박정과 함께 인조반정 정사 3등공신이다. 훗날 이조참판, 대사헌에 이른다.[8] 이정구의 아들이자 이명한의 동생. 세 부자는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에 비유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이명한의 아들(곧 이소한의 조카)와 나만갑의 딸이 혼인하게 된다.[9] "대사헌 남이공은 약간의 재국(才局)은 있다 하지만 그 행신과 처사에는 본디 칭송할 만한 선한 점이 없고 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과 심복이 되어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지 오래입니다. 하자를 씻어버리고 하찮은 인재까지도 모두 거두어 쓰는 때를 당하여 재주에 따라 적소에 쓰는 것은 혹 불가할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각에서 활개치며 장관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여론이 비웃어 남을 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이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헤아리게 하더라도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링크[10] 도승지 김상헌이 실드해주었으나 소용 없었다. "박정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은 신들이 즉시 전지(傳旨)를 받들어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박정 등이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차자를 올린 것은 구규(舊規)를 어긴 것이긴 하지만 ‘상의하지 않았다.’고 말씀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이공이 헌장(憲長)에 합당치 않다는 논의도 또한 박정 등이 졸연히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를 ‘헌장을 저격하였으며,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은 편들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한다.’고 하는 것은 또한 실정이 아닙니다. 더구나 박정 등의 상소에 지리하고 외람한 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또한 어찌 감히 공론을 가탁하고 허위를 꾸며 군상을 속일 마음이 있겠습니까. 박정 등은 오래도록 경연에서 상을 모시었으니, 진실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아량은 하늘처럼 넓으시니 필시 재차 생각하실 것이기에 신들은 삼가 붓을 쥐고 기다립니다."[11] 김류는 이렇게 아뢴다. "이 논의는 박정에게서 발론되었고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으니, 또한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나만갑(羅萬甲)은 본시 기가 성한 사람이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조정이 장차 안정되지 못할 단서가 있습니다."링크[12] 2개월 후에도 논의는 지속되고 있다. 이귀가 경연에서 인조에게 아뢰어 나만갑이 정엽의 사위라는 것에서부터 김류의 원한을 샀다고 언급한다.링크[13] 당시 김상헌이 시를 보내 지조 있는 삶을 칭송했다. 《청음집(淸陰集)》 권9 〈조천록시(朝天錄詩)〉 〈즉석에서 입으로 읊조려서 강동(江東)의 사군(使君) 나몽뢰(羅夢賚)에게 주다(卽席口占贈江東使君羅夢賚)〉에 “마음 기약 천 년인데 만 리나 먼 이별하매 진중하게 세한 맹세 잊지 말라 말해 주네.(千載心期萬里別, 一言珍重歲寒盟)”[14] 장유도 시를 써서 전송해주었다.링크[15] 이들은 나만갑이 결국 유배되자 '감히 태연하게 행공(行公)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기도 한다.[16] 장유의 차자 링크.나주목사(羅州牧師)로 좌천되었다.[17] 장유와 서로 시를 주고 받은 기록이 있다. 장유의 화답시.[18] 인조는 뜬금 없이 가만히 있던 나만갑의 친구 박정도 나만갑의 당이라고 하여 남원부사로 좌천시킨다. 당시 조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는지 기사가 며칠 동안 계속된다.[19] 김류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며칠 후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다가 사직하겠다고도 한다. "신은 시의(時議)의 기휘(忌諱)에 거듭 저촉되어 뭇 노여움이 한 몸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송구스러운 마음에 숨을 죽이고 엄한 견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지까지 보내시어 부드러운 말로 간절하게 유시하시니, 성은이 깊어질수록 신의 죄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신이 대략 듣건대, 어제 경연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신 부자(父子)의 집에 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여운 감정을 품은 나머지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했다.’고 하고는 신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악담을 낭자하게 늘어놓았다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놀란 나머지 바로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신은 본래 고립 무원의 처지로서 성명(聖明) 밖에는 믿을 곳이 없는데, 나만갑을 칭찬하는 소리는 날마다 천청(天聽)에 들어가는 반면 소신의 위급하고 절박한 정상은 아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장을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머리를 베어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원통함을 간직한 채 참으며 아무 말없이 목숨이 끝나는 날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신의 정상이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죄를 다스려 인심을 진정시키고 언자(言者)를 통쾌하게 하소서."[20] 최명길[49]까지 나서며 나만갑의 귀양과 박정, 장유의 좌천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였으나 소용 없었다.링크[21] 현재의 김제[22] 당상관에 오름.[23] 과거 자신을 실드해준 오윤겸도 비판할 게 있으면 비판하는 남자. 우의정 김상용의 실드가 있었다.[24] “원래 수효는 6천여 석인데, 현재는 2천 8백여 석이 남아 있습니다.” 하고, 척화파의 입장에서 청나라 군사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25] 김상헌이 당시 안동에 있었다. 아들 나성두도 김상헌 문하에 출입하였다.[26] 1546년 을사사화에 사사당한 나식, 나숙의 동생이다. 김안로를 경계하는 방이 붙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다가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실록 링크 1537년 30세에 형들보다 먼저 사망하였다.[27] 장유가 지었다.[28] 이항복이 지었다.[29] 김상헌의 묘지명에는 나급을 미워하던 형조판서가 뒤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죄를 지은 백성에게 곤장을 적용했는데 그가 다른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것을 형장을 남용한다며 탄핵했다 한다.[30] 김상헌이 작성한 비명에 따르면 나급이 큰아들을 잃고 상심하던 차에 꿈을 꾸어 신인(神人)을 만났고, 얼마 안 되어 아들을 얻자 신인이 명(命)한 바로 이름을 짓고 몽뢰(夢賚)로 자를 지었다고 한다.[31] 나만갑의 스승 이정구가 지었다.[32] 김상헌이 지었다. 김상헌의 부친, 형과 친했다고 한다.[33] 정엽 사후 나만갑이 유고를 정리하여 수몽집(守夢集)을 편찬하였고, 아들 나성두가 해주목사 시절 송시열의 서문을 받아 문집을 간행하였다.[34] 잘 다스렸는지 실록에 언급이 된다. 링크[35] 나성두의 행장에 지기지우(知己之友)라고 표현되어 있다.[36] 박세당의 형[37] 병자호란 당시 예조참의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나만갑도 당시 함께 남한산성에 있었다. 이후 김남중은 대사간, 대사헌, 예조/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한다. 김남중의 손자 김주신(金柱臣, 1661 ~ 1721)은 박세당의 문인이었고, 인원왕후의 부친으로 숙종의 장인이 된다. 김주신의 고모부가 나성두였고, 나성두의 외손자인 김창협과 연결고리가 되어 김주신은 부친 김일진(金一振) 사후 김창협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여 받게 된다. 김남중이 사위 삼고자 나만갑의 집에 와서 나성두를 불렀는데 당시 글자를 연습하느라 바닥에 앉아 있었기에 모친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자 '외모를 가꾸어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 어찌 장부(丈夫)의 일이겠습니까.'하는 일화가 전한다.[38] 김수항의 시문에도 등장한다.링크). 나성원을 그리는 시에 함께 그리는 사람으로 나온다.[39] 이단상의 형수[40] 나만갑의 딸, 나성두의 여동생[41] 김수항보다 한 살 위이다.[42] 최석정은 나홍좌를 본인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승지로 추천하려고 했던 일, 나만갑과 자신의 조부 최명길의 교분, 본인과 친한 친구인 나양좌의 사망으로 인한 슬픔도 함께 언급한다.[43] 참조 - 문희순, 17~19세기 동춘당 송준길 후손가 소장 한글편지에 나타난 가족의 모습[44] 스승의 손자와 자신의 딸이 혼인했다. 제문에도 '혼인으로 두 집안이 맺어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나만갑의 이정구 제문[45] 대제학 이일상의 동생, 이단상의 둘째 형이다. 이단상은 김수항과 사돈이고, 김수항의 둘째 아들 김창협과 이단상의 딸이 혼인하였다. 문과 급제 후 관직 제수를 기다리고 있던 중 호란이 터졌다.[46] 출처: 연려실기술 25권[47]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노끈으로 자살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나만갑(羅萬甲)이 달려가서 구하니, 또 바지를 묶는 가죽으로 자결하려 하자 곧바로 또 구하였다. 그 조카 김광현[50]과 아들 김광찬은 방 밖에서 옷을 갈아입고 가슴을 두드리며 마치 운명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니 나만갑이 말하기를, “부형의 죽음이 비록 강상(綱常)을 부지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공들은 어찌하여 부형이 자결하는 대로 놔두는 데 이르렀는가.”하니,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부형의 일은 영감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이미 한 번 죽기로 스스로 판단하셨으니 우리가 비록 구하려고 한들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지켰는데, 다음날 또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려고 하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죽지 않았다.[48] 김상헌의 둘째 형인 김상관의 아들인 김광찬이 김상헌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수항은 김광찬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