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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충정공(忠定公) 장만 張晩 | |
[1] | |
출생 | 1566년 10월 22일 (명종 21년 10월 10일) |
사망 | 1630년 1월 8일 (인조 7년 11월 15일) (향년 63세) |
본관 | 인동 장씨[2] |
시호 | 충정(忠定) |
자 | 호고(好古) |
호 | 낙서(洛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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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시호는 충정(忠定).고려 말 태상경(太常卿)을 지낸 장백(張伯)의 6대손이며, 인조 때 주화파의 거두 최명길의 장인이기도 하다.#
2. 가계
장만의 본관은 인동(仁同)로, 고려 말에 태상경을 지낸 장백의 6대손으로 7대째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벼슬을 지내온 전형적인 사대부 문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조판서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장기정(張麒禎)이며, 어머니는 배천 조씨(白川趙氏)로 조광침(趙光琛)의 딸이다.6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13살 터울의 맏형 장오와 6살 터울의 중형 장준 그리고 누님이 셋 있으며, 뒤로는 동생 장난과 측실의 동생 장환, 장훈이 있다.
선조 24년(1591년) 장만은 별시 문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날 형 장준과 조카 장희한도 무과에 급제하였고, 후일 종제 장돈과 서제 장환, 장훈도 무과에 급제한다. 이때부터 인동장씨 집안이 유명한 무관의 가문이 되어 더욱 많은 무관이 인동장씨 가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영조 때 장붕익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3. 생애
1566년 서울 필운동에서 종6품 가평현감을 지낸 아버지 장기정(張麒禎)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광침(趙光琛)의 딸 사이의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0살 무렵 부친 장기정이 옥천군수로 발령받아 지방으로 내려가자 함께 내려가 옥천에서 지냈다. 일찍이 학문에 매진하여 14세 때(1579년) 경시(京試)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1589년 증광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3등 26위, 3등 47위로 입격하였으며, 2년 뒤인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檢閱)·성균관 전적(典籍)·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종전 후 1599년에는 봉산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 1619년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1622년 병조 판서로 있을 당시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하였고 이로 인해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된 그는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낙향해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팔도 도원수(八道 都元帥)로 등용되어 당시 후금 때문에 흉흉했던 북방을 수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지방군과 패잔병들을 긁어 모아 열세인 상황에서도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또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3]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으나 이전에 세웠던 공으로 복관되었다.
1629년 11월 15일, 장만은 64세의 나이로 한양 반송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김포 통진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문무와 재략을 갖춘 무장이었으며 많은 부하를 통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저서로 《낙서집》(洛西集)이 있다.
4. 여담
- "장만하다."의 어원이 이 사람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세종 시대부터 쓰인 우리말이라 민간어원에 가깝다.
- 조선 중후반기를 묘사하고 있는 네이버 웹툰 작품 칼부림에서 등장한다.
- 역사를 바꾼 인물이기도 한데 성공한 군사 쿠데타나 다름없는 이괄의 난을 진압했다. 이괄이 한양 도성을 차지하고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까지 하여 새로운 정권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포기하지 않고 부하였던 정충신, 남이흥과 함께 안령에서 이괄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조선 후기 왕실이 허수아비로 전락한 것을 막았다. 한마디로 조선 왕조에 무신정권이 세워질 뻔한 것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