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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괄 (李适) |
출생 | 1587년(선조 20) |
사망 | 1624년(인조 2) 2월 14일 (향년 3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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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인조반정으로 반정공신이 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일으킨 군인. 본관은 고성(固城)[1], 자는 백규(白圭).붕당의 역사에서는 북인을 몰락시키고 서인들이 집권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북인은 광해군 퇴출과 이괄의 난으로 쓸려나간다.
2. 생애
이괄은 1587년(선조 20) 진사(進士) 이제(李磾)[2]와 어머니 동래 정씨 정순하(鄭淳蝦)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괄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문신 집안이었는데 족보에 따르면 이괄은 이암의 8대손이라고 한다.[3]선조 말기 불과 10대 중후반의 나이부터 관직에 올라 선전관부터 목사까지 높은 직책을 오갔다.[4] 출생적으로는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파는 아닌 온건파였던 중북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시 전공이 없었던[5] 어린 시절부터 고위직들과 어울릴 수준은 되었으며 비슷한 명문의 양반 출신 장수들과 교우 관계를 쌓았다. 임진왜란의 전쟁 영웅들이 넘쳤던 시대임에도 이괄은 젊은 시절부터 전형적인 벼슬길을 밟았으며 출생답게 용병술보다는 서예 방면으로 명성을 떨쳤다.[6]
선조 말기에 범람한 행동을 많이 저질렀다고 형조 좌랑 자리에서 쫓겨난 바 있다. 광해군 때는 광해군 8년에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며, 임명 1년 후인 광해군 9년에 정의현감 조양보가 군수 물자를 잘 마련했다고 포상해주자고 요청했다가 아무리 제주도에서 제주목사가 가장 높은 자리라고 해도 전라감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고 직권 남용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이 요청이 없으면 조정이 어찌 지방의 일을 알겠느냐고 비호해주었다. 이후 광해군 14년에 북병사에 임명, 북방에서 여진족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떠날 즈음 신경유 같은 친구들의 귀띔을 받고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인조반정에서 착호갑사들을 이끌었다. 그 공으로 2등 공신의 첫 자리에 올랐다.
반정 당시에 이미 고변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져 대장 김류도 오지 않고 장단의 병사들도 합류하지 않아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이귀의 제안에 따라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뒤늦게 김류가 합류하여 그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자 화를 내며 반항하다가 이귀의 중재로 화해하였다. 이밖에 연려실기술에는 김류는 1등 공신인데 자기는 2등 공신이라고 분개했다고 나와 대중에 김류와의 불화설이 잘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그런 말이 없다. 오히려 김류가 이괄은 공이 많으니 변방이 아닌 도성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거나,[7] 이괄과 이귀하고 함께 인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이괄을 추천한 김원량[8]의 인격과 공로를 칭찬하기도 한다.[9] 인조가 공신 책봉의 타당성을 물을 때, 김류가 직접 이괄이 초기부터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공이 커서 2등 공신의 첫 번째에 오를 만한 인물이라고 타당성을 설명했다.[10] 이로 볼 때 실제로는 이괄과 김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공적을 인정받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어째선지 한 달 만에 그만두려고 했는데 인조에게 반려되었다.[11] 연려실기술에는 이수일이 내응한 공적이 많아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괄은 판윤이라고 공론이 억울해 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수일이 내응한 공적은 실록에 전혀 기록이 없으며 공조 판서에 임명된 기록도 없고, 심지어 공신 목록에도 이수일의 이름은 없다. 이수일이 판서가 되는 것은 인조 6년이며 그것도 공조가 아닌 형조 판서였다.
그밖에 좌포도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사 박진장을 잡으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이귀가 고변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조사 결과 실제로는 공조 좌랑 홍진도가 한 짓이었고 이괄은 홍진도의 요청에 따라 병사들을 보내준 것 뿐이었다. 이괄의 부하들이 저지른 짓이라 이괄이 범인으로 몰렸던 모양이다. 진상을 파악한 인조가 사건 처리를 중단시켰다. 처음에 이괄을 고발한 이귀 또한 홍진도를 무고죄로 비판했으니 이괄의 무죄는 확실히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2]
이후 평안도의 도원수 장만의 청에 따라[13] 부원수로 임명되었고,[14] 북방 후금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자주 들어오면서 철저한 계획을 요구받았다. 출발하는 날, 이괄은 "신이 이 중임을 받고 밤낮으로 떨리고 두렵습니다. 금년에 불행하게도 적병이 침입해 오면 군사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한 차이가 현격히 다를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책임감을 한껏 표현하였다. 또한 구주와 태천은 성채가 없고 영변이 주둔할 만하다고 말하는 등, 나름대로 정보 수집에 기반한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15]
연려실기술에는 인조가 직접 어검을 내려주고 이괄의 수레를 왕의 손으로 밀어주며 굳건한 신뢰를 보였다고 되어있으나 실록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조 2년 1월 17일에 별안간 이괄이 정충신, 한명련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온다. 20일 이귀는 이괄의 국문을 강하게 주장하고, 특히 이괄은 몰라도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에 가담한 것은 확실하다면서 아들이 반역했는데 어찌 아비가 모르겠냐고 하였다. 다음날 21일에는 사간원과 사헌부가 합세하여 이괄의 국문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이 반역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비호해주며, 이괄의 아들 이전만 데려오라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전은 이괄의 군중에 있었고,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온 금부도사와 선전관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실 금부도사가 찾아온 시점에서 이괄에게는 사실상 반역 외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다만 서인들 중에도 이괄보다 어이없이 숙청당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국이 더 큰 원인이었다.[16]다만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괄이 반역 할 것이라고 고변한 것을 추관(推官)이었던 김류가 무고(誣告)라 생각하여 고변한 한흔을 죽이고 문회와 이우도 죽여 옥사를 번복하려 하였고 인조가 이괄의 아들 이전만을 체포하도록 하자 이귀가 이에 반대하자 이귀를 추고(推考)하라고 인조가 명령을 했는데 인조는 아마도 이괄이 반역을 할 것이라는 고변을 무고로 보고 있었고 형식적으로 대충 조사좀 하다가 옥사를 덮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가 아들을 잡으러 오자, 이괄은 일부러 문을 늦게 열어주며 시간을 끌고는, 아비인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며 차라리 반역하겠다는 심리를 부하들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심복들이 반역을 부추기자 결심을 굳히고 다른 장수들을 불러 위협한 뒤, 도사를 안으로 들인 다음 베어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록 야사의 기록이지만 실록에도 '이괄이 도사 등을 죽이고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라고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
하지만 정말로 충동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인지는 이괄이 이후 생포되지 않고 죽는 바람에 국문을 못해 밝혀진 바 없다. 부하들이 앞장서서 난을 부추겼다는 것이나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한 일사불란한 행동을 볼 때, 어렴풋이라도 반란의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방군과 항왜를 동원하여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원정으로 복구되지 못한 관군들을 우회하거나 박살내며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는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며 이괄에게 맡겨놓은 정예군단에게 쫓겨서 충청도 공주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괄은 손쉽게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의 10번째 서자였던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인조를 뒤쫓지 않고 한양에서 안일하게 뭉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17][18] 다음날 이괄은 정충신의 보잘 것 없는 진영을 공격했다가 참패했고 겨우 목숨을 건져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게 배신당하여 취침 중 목이 잘린다. 이괄의 목을 가져온 두 사람은 용서받고 하위직이나마 벼슬을 살게 되는데 이수백은 마탄 전투에서 패해서 수급이 잘려진 장수들의 자식들에게 대낮에 목이 잘리는 끔살을 당한 반면에 기익헌은 조용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3. 평가
조선 시대의 여포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는 군사 행정 보직으로 더 오랫동안 근무한 인물이다.[19] 이러한 후방 근무 경험 덕분에 성공할 기회를 여러 번 얻은 정책통이지만 현대에는 이미지가 180도로 변하여 변방의 마초, 장수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괄에 대한 평가는 좋아졌는데 혈통과 인맥을 따라 광해군 때 출세가도를 밟던 시절은 잊혀지고 인조반정 이후 인조를 엿먹인 멋진 인물로 완벽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반란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아서 포졸 수준의 병사들만 이끌어야 했던 관군들을 도륙했다.[20] 이괄 본인도 반란 직후 북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서 악명을 떨쳤고 참혹한 내전을 일으켜서 동료 장수들의 목을 벨 때의 잔혹함을 보면 이괄은 정치술이 아닌 용병술로 권력 다툼을 벌였던 인물에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21] 애시당초 인조반정에 참여했을 때부터 명백히 야망과 적절한 시점의 군사 행동을 보여준 정치군인이고 단지 본인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권력은 탐내면서도 정치라는걸 전혀 하지 않았던 오만한 인물이다. 특히 친구였던 정충신을 상대로 거짓 투항을 통해서 방심시킨 다음 소드마스터급 항왜들을 이용해서 적을 혼비백산시키고 격파하는 기만책을 보면 무력이 뛰어난 군인으로 왜곡된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군인과 꾀돌이에 가까운 역사 기록에 더욱 부합하는 인물이다.[22] 이후 패잔병까지 병력에 넣으며 맹렬하게 따라오는 정충신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산길[23]을 통해서 진군하며 자기 나라 땅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하는 역발상을 통하여 앞을 막는 관군과 추격하는 정충신을 동시에 따돌리면서 전격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조가 이괄에게 준 병력은 중요한 정예병이었는데 결국 15,000명의 정예병을 반란에서 잃으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초기 방어에 실패해 크게 당하는 나비 효과까지 야기하고 말았다. 이괄뿐만 아니라 평안도의 대여진족 병력들까지도 역적으로 몰릴까봐 도망치거나 여진족에 투항해서 길잡이 노릇을 했으며 이미 한윤 등의 부하들이 탈주하여 홍타이지에게 가서는 조선의 실정을 낱낱이 알렸다. 결국 이괄이 병자호란의 기반을 만든 셈.기록들을 조합해보면 이괄군이 10,000명이 넘는 정예군을 독식한 상황에서 잔꾀를 잘 부린다는 기록이 많은 이괄의 용병술이 관군을 초반에 압도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대오를 꾸린 관군들의 보잘 것 없는 병력에 격파당했으므로 이괄이 당시 조선의 유일한 명장이었다는 인터넷에 퍼진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괄을 격파한 관군 장수들이 권율과 이순신 밑에서 직접 종군한 영웅들이다.[24] 반란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이괄의 용병술 자체는 뛰어나다 하겠지만 현대에는 애시당초 승리할 수 없는 병력으로 싸운 관군 장수들의 능력이 과소평가되었다. 사실 이괄군은 소규모의 관군을 여러 번 각개격파했을 뿐인데 다 합쳐보니 이괄군보다 관군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마치 이괄이 천하용장인 것처럼 눈의 착각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군사적인 재능이 있기는 했으나 여러가지 행운이 겹쳐서 무소불위의 명장으로까지 미화되는 인물이기도 하다.[25] 이괄에 대한 미화는 인조 시대의 조선이 겪은 군사적 패배에 대한 보상 심리를 찾기 위해서 도피처로 이괄을 밀어주는 심리에 가까운데 1.) 정치다툼에서 패배한 인물에게 생겨나는 언더 도그마, 2.) 이괄의 난 이후 약해진 조선의 군사 능력에 대한 변명 수단, 3.) 인조 정권에서 제거당한 이괄이라는 인물에게 투영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일종의 유사역사학적인 심리에 가깝다. 실제로는 통솔하는 병력의 차이를 제외하면 당시 이름있는 장수들의 능력은 엇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많다.[26]
당대의 문무백관들과 비교해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급이 빨랐다. 이괄의 관직이 23살 영흥 부사, 29살에는 그 이경록의 최종보직인 제주 목사, 36살에 한성판윤 겸 부원수 겸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 따지자면 육군사관학교를 16살에 졸업해서 23살에 사단장, 29살에 제주특별자치도지사, 32살에 육군참모총장, 36살에 서울특별시장에 각각 재직한 수준으로 진급 속도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이괄보다 직위가 낮은 인물로는 저 이름도 유명한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1575~1643)과 그 신립의 부장이던 김여물의 아들 김류(1571~1648)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이괄보다 띠동갑 이상의 연상이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서 이괄은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어 추악한 정권쟁탈전을 벌였을 뿐이며 인민들의 어떤 지지와 호응도 받지 못했다고 매우 폄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이 직접 이괄을 더러 "리괄은 인조반정에서 자기가 한몫 하였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는데 그 뜻이 이룩되지 않자 거기에 불만을 품고있다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라고 교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괄의 난으로 서북지역의 방어가 무너져 청나라에 당하게 됐다고 덤으로 더 깐다.
4. 기타
- 야사에서 수많은 전설을 지닌 임경업이랑 같이 강원도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도망친 이괄의 일가가 강원도에 숨어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장수에게는 연관성이 있는데, 임경업은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을 토벌하고 1등 공신으로 추천받아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임경업도 인조에 의해 숙청당했다.
- 야사에서는 매우 성질이 급하고 툭하면 주변사람들과 마찰을 빚고 난폭하고 성격도 더럽고 인격도 개차반이고 대인관계도 개판인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실록에서는 인조는 물론 김류와 이귀 등의 공신들에게도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고, 딱히 성질이 급하다거나 성격이 좋지 않거나 인간성이 막장이라거나 대인관계가 좋지 않다는 등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적혀 있지 않다. 그나마 인조반정 당시에 김류가 지각한 것에 화를 내며 항명한 것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이귀의 중재로 금방 일단락됐다.[27] 3번 탄핵당한 기록이 있으나, 그 중에 진짜로 처벌을 받은 것은 선조 때 단 1번 뿐이며, 광해군 때는 잘못이 아니라고 광해군이 비호해줬고, 인조 때는 아예 다른 사람의 죄를 오해로 엉뚱하게 뒤집어 쓴 것으로 밝혀졌다. 북방으로 가면서 구체적인 방침을 짜고 나라에 목숨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해 싸우겠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등, 실록에서는 그저 성실한 충신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러니 인조와 대신들도 이괄을 신뢰해서 북방의 방비하는 중책과 12000명의 대군을 맡긴 것이다. 이렇게 실록에서 보여주는 성품은 이괄이 역심이 없었는데 역모로 몰려 어쩔 수 없이 반역했다는 주장에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 전설에 따르면 이괄의 할아버지의 산소가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시)에 있었는데, 이괄이 역적으로 죽게 되자 할아버지의 묘가 용의 혈이라 묘를 파헤치니 연결된 못에서 물이 계속 나와 물을 퍼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스님이 양평에 있는 곳에 가서 물길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 양평에 찾아가 물구멍을 재빨리 막고 묘와 연못의 물을 다 퍼내었다. 그리고 그 안을 살펴 보니 이괄의 할아버지의 시신은 없고 용의 모습을 한 이무기가 있어 죽였더니 이무기의 비늘이 수년간 흘러내렸다고 전해온다. 결국 이괄의 5대조인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이원을 묘소를 비롯하여 고조, 증조, 조부와 아버지의 묘를 파명당(破明堂)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고 마을 주변 곳곳에 보초를 세우고 섬처럼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여 그 마을이 섬마을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도촌동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
- 생몰년을 계산해보면 현대인의 시각으로 아직 한창 나이인 38세에 죽었다. 물론 당시는 나이 61세[28]만 되어도 장수했다는 의미에서 환갑잔치를 열어주었으니 당대의 입장에서는 중년이 넘었을 것이다.
5. 대중매체
- 네이버 웹툰 <칼부림>의 1부~2부는 이괄의 난을 중심으로 이괄을 주연급으로 다루고 있다. 항왜 서아지를 매우 신임하며 주인공이자 서아지의 양자인 함이에 대해서도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자기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어 아들인 이전이 함이에게 내심 샘을 낼 정도. 초반에는 이괄에 대한 미화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담대하고 호쾌한 인물로 그려졌지만, 한양 점령 후 참수된 가족들의 수급을 본 이후 마음이 내심 꺾였고 한양으로 진군하던 도중 겪은 일들로 인해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등 환각과 광기에 사로잡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결국 실제 역사대로 정충신에게 패한 이후 도주하지만 이수백과 기익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에도 가끔 함이의 환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부분 환영으로 나올땐 복수와 관련되었고 갑옷이나 관복 차림이지만 함이가 장가갈 때는 이전과 함께 축하해 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6. 관련 문서
[1] 사암공파.[2] 1570년(선조 3)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3위로 급제했다.#[3] 암(嵒) - 강(岡) - 원(原) - 사암공(思菴公) 지(墀) - 륙(陸) - 교(嶠) - 택(澤) - 제(磾) - 괄(适). 연산군 시기 폭정에 실망해 청도로 낙향하여 제자를 키운 어엿한 문인으로 알려진 모헌(慕軒) 이육(李育)은 같은 고성 이씨로 이괄의 고조부인 청파(靑坡) 이륙(李陸)과 동명이인이다. 청파 이육은 <청파극담>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동야승>에도 실려있다.[4] 선조실록 112권의 1599년(선조 32) 윤4월 9일 정해 1번째 기사에서 처음 그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당시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었으며 그의 나이 13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1일에는 종6품 명천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5]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에 12살이다.[6] 이괄의 명성은 반역 이전까지는 붓글씨에 대한 것이었다.[7] 인조 1년 3월 15일[8] 김원량은 훗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사형당하고 효시된다. 인조 2년 2월 8일.[9] 인조 1년 3월 25일[10] 인조 1년 10월 19일.[11]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4월 9일(무진) 맑음[12] 이후 이귀가 홍진도의 악행과, 외척인 홍진도의 위세에 겁먹고 말을 못하는 대간을 인조 앞에서 비판했으나, 인조는 도리어 이귀를 꾸짖었다.[13] 이괄 혹은 이서가 좋겠다고 추천하였다.[14] 연려실기술에는 평안부사를 겸직했다고 나와있으나 정작 실록은 인조 2년 1월 20일에 김신국을 평안부사로 임명했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무장 이수일으로 25일 교체했다고 나와있다.[15] 인조 1년 8월 17일.[16] 이괄을 잡으러 달랑 금부도사만 보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선조 시절 도주 오해를 받은 신각을 참수할 때도 선전관만 보냈고 이순신을 압송할 때도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전공이 누적된 이순신을 경계해 꼬투리잡아 끌어내린 선조지만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킬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선은 200년 이상 유교 이데올로기와 중앙 집권 체제를 굳혀왔고 그런 체제에서는 국왕이 보낸 사자에게 따르는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걸 거부하면 진짜 반란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괄이 몇 안되는 예외였다.[17] 물론 이괄이 놀았던 것은 아니다. 왕족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곳간을 열어 쌀과 재물을 베푸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문제는 인조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인조가 살아있기 때문에 한양 백성들은 필연적으로 인조와 흥안군을 저울질한다.[18] <연려실기술>에서 정충신은 이괄이 인조를 추격하면 상책이오,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했다. <속잡록>의 기록에서는 장만이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상책, 오랑캐 추장들에게 의탁하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장만과 정충신이 상중하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기록된 두 기록의 내용도 조금 다르고 화자조차 다르다.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19] 반정공신이 되기 이전 이괄의 주요한 관직 경험은 목사와 선전관이며 중앙이나 후방 지역에서 근무한 시간이 더 길고 생전에는 용병술이 아닌 붓글씨로 이름을 떨쳤다.[20] 편견과는 달리 이괄을 상대한 관군 장수들의 능력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포졸 수준의 지방군이 붕괴되었는데도 국가의 위기 사태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다 죽은 장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괄의 정예병들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탈출한 관군 장수들도 있었다.[21] 이괄의 여포 이미지는 이괄을 기용했던 모든 왕들마다 꾸준히 문제가 될 정도로 군법을 어기고 정치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서 생겨났을 뿐 실제로는 중앙과 후방에서 근무하느라 행정 장교 경험은 충분히 쌓았던 인물로서 정치판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반정에 그가 왜 참여했는지 생각해보라.[22] 이괄은 같은 조선군 장수들의 심리나 이동 경로를 잘 알고 공략했다. 정충신도 능력은 엇비슷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직책이 관서군의 행정과 보급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이 보인 행보는 달랐는데 정충신은 이괄과 싸우기 직전까지 평양 주변을 돌며 조선군의 추가적인 분열을 차단했고 다수의 반란군을 설득으로 항복시켰다. 인조반정 때도 두 사람의 행보가 똑같았는데 그 때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했고 정충신은 관서군의 내분을 막는다.[23] 거의 절벽을 타고 넘는 수준이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정충신조차도 이괄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가 병사들이 지치고 낙오하여 마탄 전투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관군들이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물론 정충신은 이괄보다 나이가 많았고 정충신이 지휘한 군사들도 역량이 떨어지는 패잔병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24] 이괄이 죽음으로써 후진들의 양성에 실패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능력은 오히려 반란군 지휘관들을 압도하는 면도 있었으며 이괄을 격파한 장수들이나 후임들은 2차례의 호란 때도 턱없는 전력차에서 장렬히 싸우다 죽는다.[25] 실제로는 이괄의 승리 대다수가 약한데다 숫자도 얼마 안되는 지방군에게 승리한 것이고 패배했을 때도 자신보다 턱없이 적은 관군을 상대로 지형에 유인당해서 졌다.[26] 그렇지만 이괄에 대한 언더 도그마와 잘못된 편견 때문인지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상대로 말이 안될 정도의 군사적 열세에서도 목숨을 걸고 의기를 보여준 당대 조선 장교들의 충성심이 이괄의 난, 외침 등에서 악역으로 뒤바뀌거나 조롱받는 억울한 상황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27] 또한 반정 당시의 기록은 사관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 데다가, 반정 당시에 이미 도망쳤을 광해군을 인조가 끌고 다녔다고 서술되는 등으로 다른 기록과도 안 맞고 현실적으로도 동떨어진 부분도 좀 있어서 신뢰성은 비교적 떨어진다.[28] 당시의 60세면 2020년대의 80세에 필적할 정도로 장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