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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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련 韓明璉 | |
| <colbgcolor=#c00d45'><colcolor=#ffffff,#db9e00> 출생 | 생년 미상 |
| 황해도 문화현 (現 황해도 신천군) | |
| 사망 | 1624년 2월 14일 (향년 미상) |
| 경기 광주유수부 경안면 경안리 경안역 (現 경기도 광주시 역동 부근) | |
| 국적 | |
| 본관 | 청주 한씨 |
| 이름 | 명련(明璉) |
| 신분 | 천민 |
| 자녀 | 장남 한란(韓瀾) 차남 한윤(韓潤) 삼남 한간(韓澗) 사남 한활(韓闊) |
1. 개요
한명련(韓明璉, ?[1] ~ 1624)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공을 세운 장수이다.천민 출신이었으나 의병 활동 중 세운 전공만으로 조정에까지 이름이 전해져 정3품 별장 자리에 올랐고, 이후 종2품 순변사(巡邊使)와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될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이괄의 난에 가담하여 반란군 측으로 참전했고, 결국 패배하고 광주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출생과 가계에선 본관과 출신지역이 청주(淸州)로서 황해도 문화현[2]으로만 나올 뿐 전란 이전까지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천민임에도 무예와 병법에 능했던 인물로 추정되며,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을 일으켜 영남에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우기 시작하며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상이 이르기를,
"변장과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선조실록46권, 선조 26년 12월 3일 임자 1번째기사#
처음 실록에 언급된 것은 1593년으로, 선조가 윤두수를 불러 왜군의 동태와 조선군의 징병 방법등을 질문할 때 등장하여 변장(邊將)과 수령(守令) 가운데 공적이 있는 사람 중 첫 이름으로 등장하며"변장과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선조실록46권, 선조 26년 12월 3일 임자 1번째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장사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노숙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선거이ㆍ홍계남ㆍ정희현ㆍ권응수ㆍ백사림ㆍ한명련도 다 같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47권, 선조 27년 1월 21일 경자 3번째기사#
1년이 지난 1594년, 비변사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을 시상할 때 다시 이름이 등장한다. 이 때 선거이, 홍계남, 권응수등 공훈을 세운 여러 무관과 의병장들과 함께 청람(靑藍) 삼승포(三升布) 각 2필씩을 하사받았고, 같은 해 정3품 관직인 경상우도 별장(別將)으로 제수된다.#[3]"남쪽 변방의 장사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노숙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선거이ㆍ홍계남ㆍ정희현ㆍ권응수ㆍ백사림ㆍ한명련도 다 같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47권, 선조 27년 1월 21일 경자 3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韓明璉)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원익이 이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후략)
선조실록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기사#
별장으로 제수된 뒤 한명련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정유재란기 실록에는 왜군의 공세에 맞서 200여 명을 힘껏 싸워 쏘아 죽인 전과,# 소초평에서 왜군을 참살한 전과,# 정기룡과 합세해 왜군의 수급 19급을 거둔 전과 등이 언급되며,# 우병사 김경서가 상관인 권율의 동의도 없이 한명련을 멋대로 데려가 위장(衛將)으로 삼자 권율이 이를 조정에 고변하는 등 상관들 사이에서 한명련을 서로 거느리려 다투는 일까지 있었다.#"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韓明璉)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원익이 이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후략)
선조실록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기사#
또한 그가 총상을 입어 치료를 받으려 한양에 올라오자 선조가 직접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겨울이 다가와 날이 추워지니 따로 옷을 보내주기도 하는 등# 임금에게도 크게 신임받았으며, 명나라 장수 마귀가 조선의 양장(良將) 중 하나로 한명련을 언급한 일례를 보면 당시 그의 명성이 상당히 드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전란이 끝난 1599년 5월에는 전공을 인정받아 종2품 오위장(五衛將)[4]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오위장에 제수되지마자 홍대방(洪大邦)과 함께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임진왜란 이후 정국을 주도하던 북인 세력의 탄핵을 받았고, 선조의 비호로 당장 직위해제는 면했다.## 하지만 한명련은 정치적 견제에 지친 것인지 북인의 탄핵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노모를 뵌 뒤 북방으로 나아가겠다고 비변사에 자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행사과(行司果)[5]의 신분으로 북방으로 올라갔다.#
"한명련(韓明璉)은 장사(壯士)로서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적을 수없이 베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을 힘을 다해 국가에 보답했는데 이번에 차질이 생겨 유방(流放)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그 사이에 깊은 실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이 없어 잘못하여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듣건대 명련에게는 90이 된 늙은 어미가 있는데 곧 죽을 처지라고 한다. 장차 죽게 된 어미를 버려두고 멀리 부산(釜山)으로 유배간다면 모자가 각각 한쪽 하늘가에 있게 되어 오직 꿈속에서나 오갈 뿐일 것인데 나는 그에게 차마 그러한 처지가 되게 하지 못하겠다.
새가 없어지면 활을 저장한다는 옛사람의 경계도 있고 재물로 형벌을 속바치게 한 일이 전대(前代)에도 있었다. 명련에게는 유형(流刑)을 속바치도록 하여 나의 뜻을 장사(將士)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의논하여 회계(回啓)하라고 의금부에 이르라."
선조실록175권, 선조 37년 6월 2일 신사 4번째기사#
북방으로 떠나고 몇 년 뒤인 1604년에는 역참의 기복마(騎卜馬)를 마음대로 타는 실책을 범해 유형을 갈 뻔한 일도 있었으나,# 선조의 적극적인 비호로 재물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는 그 사이에 깊은 실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이 없어 잘못하여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듣건대 명련에게는 90이 된 늙은 어미가 있는데 곧 죽을 처지라고 한다. 장차 죽게 된 어미를 버려두고 멀리 부산(釜山)으로 유배간다면 모자가 각각 한쪽 하늘가에 있게 되어 오직 꿈속에서나 오갈 뿐일 것인데 나는 그에게 차마 그러한 처지가 되게 하지 못하겠다.
새가 없어지면 활을 저장한다는 옛사람의 경계도 있고 재물로 형벌을 속바치게 한 일이 전대(前代)에도 있었다. 명련에게는 유형(流刑)을 속바치도록 하여 나의 뜻을 장사(將士)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의논하여 회계(回啓)하라고 의금부에 이르라."
선조실록175권, 선조 37년 6월 2일 신사 4번째기사#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도 명성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즉위한 직후인 1609년, 노모의 죽음으로 상(喪)을 당해 휴직 중인 한명련을 기복(起復)하여 다시 벼슬을 맡아보게 하였고# 3년 뒤인 1612년에는 한명련을 비롯하여 왜란 중 전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사람들에게 전시(殿試)[6]를 응시할수 있게 해 주었으며, 또 3년 뒤인 1615년에는 길주 목사로 제수되었다.
그리고 1616년, 역모죄로 잡혀온 해주 목사 최기(崔沂)와 그 주변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자 명단에 한명련의 이름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으나[7]
죄인 박정민을 압슬하니, 공초하기를,
"최유영이 괴정(槐亭)에 가서 말하기를 ‘그 흉서 안에 도대장(都大將) 세 사람이 적혀 있었는데, 정창연(鄭昌衍)(정창연(鄭昌緣)이라고 적었다.), 한명련(韓明璉), 박치의(朴致毅)였다. 양변에 제장이 각각 5명이었고 제장의 이름 아래에 각각 10명씩 기록하여 모두 1백 명이었다. 도대장 아래에는, 5월 5일 충원(忠原)에서 군대를 모아 정씨(鄭氏)를 추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일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정씨를 추대한다는 등의 말이 이 어떠한 말인데 문목(問目)에 쓰지 않았단 말인가? 정문익(鄭文翼)을 추문하는 두사(頭辭)에 이 한 조항을 첨가해 넣어서 문초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104권, 광해 8년 6월 24일 계해 5번째기사#
광해군은 여전히 그를 신뢰하여 종 2품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의주에 주둔시켜 군무를 보게 하였으며[8] 의주 부윤이던 정준(鄭遵)과 함께 상을 내리는걸 정원(政院)에 올리는 등[9] 위치가 흔들리진 않았다.[10]"최유영이 괴정(槐亭)에 가서 말하기를 ‘그 흉서 안에 도대장(都大將) 세 사람이 적혀 있었는데, 정창연(鄭昌衍)(정창연(鄭昌緣)이라고 적었다.), 한명련(韓明璉), 박치의(朴致毅)였다. 양변에 제장이 각각 5명이었고 제장의 이름 아래에 각각 10명씩 기록하여 모두 1백 명이었다. 도대장 아래에는, 5월 5일 충원(忠原)에서 군대를 모아 정씨(鄭氏)를 추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일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정씨를 추대한다는 등의 말이 이 어떠한 말인데 문목(問目)에 쓰지 않았단 말인가? 정문익(鄭文翼)을 추문하는 두사(頭辭)에 이 한 조항을 첨가해 넣어서 문초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104권, 광해 8년 6월 24일 계해 5번째기사#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것인지 면직을 청했지만, 인조는 한명련의 면직을 반려하고 계속해서 순변사 자리에 유임하며 그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서 이괄등의 변란을 고하며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중략)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후략)
# 인조 2년 1월 17일 임신 1번째 기사
"(중략)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후략)
# 인조 2년 1월 17일 임신 1번째 기사
"갑자년(1624) 1월 《일월록》에는 14일이라고 하였다.문회(文晦)ㆍ이우(李佑)ㆍ김광숙(金光熽)[원주1] 등이 기자헌(奇自獻)ㆍ현집(玄楫)ㆍ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ㆍ한명련(韓明璉)과 그의 아들 난윤(瀾潤) 등이 반란을 음모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때 원훈(元勳)들은 처음으로 특별한 공훈을 세웠으므로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널리 기찰하려고 밀고할 수 있는 길을 크게 넓혔다.
이 때에 문회 등이 고변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 및 원훈을 불러 의논케 하였던바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반드시 반역하리라 하여 어전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귀가 노하여, “김류는 틀림없이 이괄과 공모하였으므로 이괄이 원통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은 17일이였다.
이귀가 또 말하기를, “만약 이괄이 반역 음모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인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그 아들만을 체포하면 그가 어찌 기꺼이 공손하게 명을 듣겠는가. 부자를 함께 체포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그 일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를 도로 부임지에 돌아가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또 다시 역모로 고변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변에 정확한 증거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와 김류는 고변된 이괄과 정충신을 두둔하면서도 한명련은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함께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때 이전은 이괄의 군중에 있었고, 이괄이 자기 아들을 잡으러 부원수 군영으로 찾아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장수들을 위협해 반란을 일으키며 이괄의 난이 시작된다. 이 때 한명련은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었으나, 압송되던 한명련을 이괄이 구출하면서 그 또한 이괄군에 가담하게 된다.[12]이 때에 문회 등이 고변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 및 원훈을 불러 의논케 하였던바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반드시 반역하리라 하여 어전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귀가 노하여, “김류는 틀림없이 이괄과 공모하였으므로 이괄이 원통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은 17일이였다.
이귀가 또 말하기를, “만약 이괄이 반역 음모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인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그 아들만을 체포하면 그가 어찌 기꺼이 공손하게 명을 듣겠는가. 부자를 함께 체포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그 일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를 도로 부임지에 돌아가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이괄의 난 초기부터 한명련 휘하의 중군(中軍) 김효신(金孝信)이 구성(龜城)의 낙오병을 거느리고 숙천(肅川)으로 달려가 수부(帥府)에 귀순하는 일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반란군은 황주와 마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신속히 진격하여 음력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하루만에 정충신과 남이흥이 이끄는 관군이 한양이 훤히 보이는 안령(무악재)[13]를 점거하였고, 다음날 음력 2월 11일에 관군과 반란군 사이에 회전(會戰)이 벌어진다. 반란군 측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였기에 전세는 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으나, 한명련은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열을 이탈하였고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흡사한 이양이라는 군관이 조총의 탄환에 맞고 전사했다. 그러자 이를 목격한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하여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이괄이 도망친다!고 외쳤고, 안 그래도 부족한 명분으로 사기가 낮았던 이괄군의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도주하기 시작하면서 전투는 관군의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끝나게 된다.
한명련은 부상을 입은 채 이괄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한양으로 돌아갔으나, 어차피 한양을 수비할 병력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한양을 포기하고 관군의 추격을 피해 경기도 광주까지 도주했다. 그러나 음력 2월 12일 밤중, 이괄의 부하 장수이던 기익헌과 이수백이 배신하여 이괄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수급은 장대에 매달려 인조에게 전해진다.# 이후 한명련 일가의 재산은 몰수되어 공신들에게 분배되었고, 후금으로 망명한 차남 한윤을 제외하면 아들 한간, 한활, 한난, 조카 한섬, 사위 정복성, 처남 이번, 그 밖의 처첩들까지 연좌제로 모두 효수되며 그의 가문은 완전히 무너졌다.
3. 평가
천민에서 종 2품 순변사(巡邊使)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임진왜란 시기 그의 행적을 보면 가히 인간흉기가 다름 없을 정도의 무력을 보였다. 생애 항목에서 서술하였듯이 정유재란 시기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한명련의 전공을 권율 등이 조정에 보고한 것이 여러번 등장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크게 출세하고 상관과 임금에게 신임받았다.하지만, 천민 출신으로서 정치력은 상당히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종료 직후에 오위장에 임명되자마자 신분을 문제삼아 탄핵을 당했고, 선조의 비호로 직위해제는 면했지만 스스로 직위를 내려놓고 북방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기록에서도 꾸준히 탄핵과 모함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선조와 광해군에게 신뢰받으며 관직이 종 2품에 이르렀다.
이후 인조반정을 통해 왕이 또다시 바뀌었음에도 신뢰를 받는가 싶었지만, 또다시 역모 가담으로 고변당하는 처지에 놓이며 일생일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거기서 그는 정충신처럼 자신의 무죄를 밝히는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가담하는 길을 택했고,[14] 결과는 본인이 임진왜란 당시 쌓아올린 찬란한 전공와 명성을 버리고, 반역자가 되어 광주에서 쓸쓸히 죽었으며 이후 연좌제로 가문까지 무너지는 결말을 맞았다.
이로 비추어 볼 때, 무장(武將)으로서의 자질은 아주 뛰어난 사람이지만 정치력의 부족으로 본인의 입지를 보전하지 못했고, 인조반정 이후의 새 체제 내에서 살아남는데 실패하여 혼란한 정국에서 이괄의 난 가담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반역자로 낙인찍혔으니 이는 본인이 신중하지 못했거나, 정치적인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파멸한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생애는 조선 후기 전란기의 걸출한 무장이자, 신분의 장벽을 일시적으로나마 넘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정치적 역량과 처세 부족, 신분의 한계로 인해 결국 체제 안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몰락한 인물로 평가할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전생 첫날 수도를 버리다》에 준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다.
[1] 1560년대로 추정. 1596년 실록에 30여 세라는 언급이 있었다.[2] 현재 신천군 문화면 일대[3] 이 시기 경상우도에서 관직을 지낸 덕에 난중일기에도 한 별장 또는 본명인 한명련으로 등장한다. #[4] 오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궁에서 숙직하며 각 위에 속하여 있는 병종(兵種)을 통괄하고, 입직(入直)·행순(行巡) 및 시위(侍衛)는 물론 진법(陣法)·훈련 등의 최고 지휘 및 통제관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자리. 정원은 12명이다.[5] 사과(司果)는 오위의 정6품 관직이다. 관직 앞에 행(行)이 붙은 것은 행수법(行守法)으로 인한 것으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때에는 관직명 앞에 '행'을, 반대의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수'를 붙였다. 따라서 정6품으로서의 사과(司果) 관직을 받은건 아니다.[6] 문과·무과의 제3차 시험으로 국왕의 친림(親臨)하에 복시에서 선발된 문과 33인, 무과 28인의 합격자들을 재시험해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7] 최기는 역모자 명단이 담긴 흉서 고발을 묵살하고 고발자를 도리어 죽인 것이 들켜 역모죄로 잡혀왔고, 최기의 증언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얽힌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아래의 박정민도 그렇게 끌려온 사람들 중 하나였고, 형신과 압슬 등의 고문이 몹시 가혹했는지 심문이 시작되고 불과 3일만에 죽었다.#1#2#3[8] #[9] 승정원(承政院), 어떤 의견이나 보고를 승정원(政院)에 제출하다.[10] 당시 최기와 엮여서 잡혀온 사람이 워낙에 많았는데,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이 으레 그렇듯 사람마다 진술이 다 달랐기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원주1] 김광숙은 《승평시장(昇平諡狀)》에 기록되어 있다.[12] 압송되던 한명련을 이괄이 구해냈다는게 정설이나, 한명련이 직접 금부도사를 죽이고 이괄에게 가담했다는 설도 병존한다.[13] 현재 종로구 무악동과 서대문구 홍제동 사이의 고개[14] 인조반정 이후 혼란한 시기, 서인들이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북인들은 광해군을 복위시키기 위해 여러 역모를 꾸몄다. 이 시기의 역적들을 문초해보면 단골로 튀어나오는 이름이 인조의 숙부 인성군과 흥안군, 이괄, 기자헌, 그리고 정충신이었다. 즉 역적들을 문초만 했다 하면 정충신이 가담하기로 했다는 진술이 쏟아졌던 것인데, 정충신은 조정에서는 반역자로 의심하고 임지에 남아있자니 반란군 세력에게 죽거나 포섭될 것이 자명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제발로 도원수부를 찾아가 장만의 신뢰를 얻어 관군의 핵심으로 이괄의 반란군에 맞섰다.[15] 가장 알려진 설은 한명련도 금부도사에게 압송되던 중 이괄이 구했으나, 다른 설로는 한명련이 주도적으로 금부도사를 죽이고 이괄에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다. 칼부림에서는 두 기사를 인용하면서 후자를 택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