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23:52:13

선조(조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이 문서는 조선의 국왕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선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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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宣祖
선조
묘호 선종(宣宗) → 선조(宣祖)
존호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소경(昭敬)
출생 1552년 11월 26일 (음력 1552년 11월 11일)
조선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1]
사망 1608년 3월 16일 (음력 1608년 2월 1일)
(55년 3개월 20일, 2만 199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현 덕수궁 석어당)[2]
능묘 목릉(穆陵)
재위 조선 국왕
1567년 8월 7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1567년 7월 3일 ~ 1608년 2월 1일)
(40년 7개월 9일, 1만 4,83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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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균(鈞) → 연(昖)[3]
군호 하성군(河城君)
전호 영모전(永慕殿)
부모 생부 덕흥대원군, 생모 하동부대부인
양부 명종[4], 양모 인순왕후
왕비 의인왕후, 인목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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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한글 어필[5]

1. 개요2. 대중의 인식3. 생애4. 후대의 평가5. 논란
5.1. 선조와 이순신5.2. 열등감 논란
6. 기타
6.1. 창작물에서의 묘사6.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6.3. 목릉6.4. 선조 어필
7.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제14대 임금. 묘호는 선조(宣祖), 시호는 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휘는 연(昖). 덕흥군 이초의 아들이자 명종의 양자로써 조선 왕조 최초로 대군 출신이 아닌 방계 출신 왕이다.[6] 하지만 정치적 능력이 워낙에 탁월하여 어린나이에 갑작스레 왕이 되고서도 조정을 휘어잡았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후손들이 된다. 아울러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를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7]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유학계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라고 한다.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전기'와 '후기'를 분류하는 경계가 바로 선조의 치세다.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을 버텨 조선을 이어간 지도자이다.[8] 전란기와 평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왕인데, 사회경제면에서 보면 선조대에 주목할 만한 정책들이 많으며, 무엇보다 인재발탁 하나만으로는 대단한 왕이다. 이이의 경장이 좌초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왜란 전까지는 선조의 의지만으로만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지만, '여민휴식'으로 대변되는 왜란 이후 국가재건 과정에서 재분배와 민생 개혁안이 실행되어 많은 성과를 냈다. 즉, 치세의 업적은 왕의 임무를 경영자로서 한정했을 때 '조선'이라는 국가의 한계 안에서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선조가 남긴 업적에는 긍정성도 많았으며, 이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아들의 책임이 훨씬 크지만 사람 눈에 잘 들어오는 부정적인 부분이 강조되어서 나쁜 여론이 강한 편이다.[9][10]

2. 대중의 인식

순수한 왕으로서의 능력을 보자면 특유의 성격문제를 포함해도 의외로 통치는 나쁘지 않은 인물이다.[11] 하지만, 임진왜란 하나만으로 대중의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암군으로 왜곡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 중 한명인 이순신 장군을 끝없이 시기했다는 대중 매체들의 집요한 묘사가 결정적이다. 하지만, 위대한 그 이순신을 비롯한 명신들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도록 발탁한 왕이 선조였다는 점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12] 이순신을 필두로 선조가 직접적으로 발탁한 신하들 중에는 역사에 남을 만한 인재들이 유독 많았고, 심지어 허준 같은 당대에는 멸시받던 의학에 관심을 가진 인물까지도, 선조는 왕권에 도전할 만한 신하가 아니라면 열심히 발굴하고 육성한 왕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선조가 운이 좋았다든지 신하를 잘 안 믿었다든지 하는 평가는 잘못되었다.[13]

선조의 단점은 단 한줄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왕의 수준에 못 미치는 인성이다. 특히 착각해선 안되는 점은,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보인 모습은 그가 멍청해서 저지른 실수가 아니란 점이다. 선조는 똑똑한 두뇌와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조선이라는 국가와 그 신료들을 끝까지 괴롭혀대며 자기의 안위와 이익만을 철저히 취했다. 선조는 위급한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옹졸할 정도로 자기보호를 최우선시했고, 일반적인 국가 전체의 기준으로는 손해이더라도 자신의 왕권은 안정적으로 사수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즉, 선조는 중세시대의 왕치고는 유별날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고, 국가 위급시에도 철저히 개인의 안위를 위해 국가를 위기에 빠트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14] 다시 말해, 선조는 멍청해서 자기 밥그릇도 못 찾아먹은 왕이 아니라, 밥상이 엎어져도 자기 밥그릇만은 기가 막히게 움켜쥐고 있던 왕이다.

이런 인성 때문이었는지, 선조의 아들들 중 상당수가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선조 본인은 머리가 비상하여 평화기에는 목릉성세의 치적을 쌓는 등 통치에 재능이 어느 정도 있었다지만, 선조의 아들들은 그 능력은 물려받지 못하고 왕족 개인의 관심사에 집착하는 성향만 물려받았다는 말이 있다.[15]

3. 생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선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후대의 평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선조(조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논란

5.1. 선조와 이순신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과 동료 장수는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ㅡ 선조실록, 22년 7월 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16]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ㅡ 선조실록, 24년 2월 16일자
해석- 사간원: 암만 나라의 인재풀이 좁다 해도 그렇지 이순신은 현감(縣監)밖에 안되는 놈인데 그런 놈한테 좌수사[17]라는 자리를 내리는건 좀 아니죠. 이순신 말고 다른 사람한테 좌수사 하라 하세요.
선조: 뭔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지금 시국이 깐깐하게 법이나 규율이나 따질 시기냐? 가뜩이나 인재도 부족한 판국에... 그리고 이순신 걔는 유능해서 좌수사 맡겨놔도 잘해낼테니 괜히 벼슬 낮니 높니 하고 심술 부려서 순신이 섭섭하게 하지마셈.[18]

위의 이야기대로 평화로웠던 시절엔 원균을 쫒아내고 이순신을 앉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날카로웠음을 알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균은 후에 경상우수사로 다시 부임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원균도 상당히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아마 이순신과 함께 왜군들이 침공해올 바다를 방어하게 시킬 생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두 인물을 수군에 앉혔을 것이다. 이 선조가 야심차게 그려낸 큰 그림은 훗날 절반만이 옳았음이 아주 참혹하게 드러난다. 아무튼, 해당 사간원의 말을 선조가 씹어버린 후 이틀 후 다시 사간원에서 이순신을 쫒아내라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ㅡ 선조실록, 24년 2월 18일자
해석- 사간원: 이순신 걔 스펙도 별로 없어서 높은 자리에 올려봤자 애들이 잘 안따를거에요. 암만 인재가 모자라다 해도 그렇지 현감밖에 안되는 놈을 수군절도사씩에나 임명하고 이렇게 인사채용 함부로 하면 나라에 영 안좋으니 빨리 내쫒으세요.
선조: 조까

이리저리 길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이순신을 끌어내리라고 아우성치는 사간원의 상소를 일축하면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였다. 선조는 종친도 아니고 나라에 명망높은 사대부도 아니었던 이순신을 사간원이 경악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승진시켰는데 당시 이순신의 벼슬의 변동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1589년 12월,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종6품]으로 부임함.
1590년 8월, 임기 1년을 채우기도 전에 조정에서 이순신을 고사리진, 만포진 첨사[종3품]로 임명하려 했으나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무산됨.
1591년 2월, 선조는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으로 승진시킴.
같은 달, 군수로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종3품]로 전임시킴.
다시, 가리포에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전임시킴.

이순신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벼슬 생활이었다. 현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수로 승진했으니 짐싸서 부임할 준비를 하라는 교지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다시 첨절제사로 승진했다는 교지를 받아서 읽고 있을 무렵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겠다는 교지가 날아온 것이었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서 당상관에 드는 직책이었고 타인으로부터 영감으로 불리며 존대받는 위치였다.[24] 종6품으로서 지방의 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품계로 무려 9단계를 2년만에 건너뛰어 전라도 수군의 절반을 다스리는 수군절도사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살 떨릴 정도로 빨랐던 승진에는 이순신을 지켜보던 선조의 강력한 후원에 그 배경이 있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25]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문을 가지는 거지 선조가 바보라서 진짜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다.[26] 그도 그럴 것이 전란 발발 후 육지에서는 번번한 승전이 없는 반면 바다에서는 싸우는 족족 대승을 거두니 의주까지 도망가 있는 선조 입장에선 이순신의 승전 장계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선조는 당시 속속 날아오는 이순신의 승전보와 왜군의 수급을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직접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하라는 명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버린 임진왜란 중반에 가면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 파직 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만했다고 고문[27]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28] 선조는 실제로도 의병장 이산겸죄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산겸을 때려죽인 예가 있다.[29]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으며 훗날 명나라 장수가 선조를 마주하여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기리는 언사를 하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즉 선조가 이순신에 냉대한 것은 인간적으로 미워서라기 보단, 왕정 체제의 운영자인 군왕으로서, 난세의 유력 무신인 이순신을 경계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순신이 전선에서 선조의 출격명령을 여러번 어기자 선조는 '무신이 조정을 가벼이 여기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발언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징벌을 행했던 것으로 볼 때, 조선왕국 자체가 전쟁영웅이 건국한 국가이자 문치주의 왕국인 만큼, 제2의 전쟁영웅의 출현과 무신정권의 탄생을 경계하는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일견 이해는 가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에서 안가리고 숙청을 시도한 결과 칠천량 해전이라는 임란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기에 아무리 옹호적으로 봐줘도 근시안적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30] 오늘날에 선조의 행동은 마치 춘추전국시대 백기와 염파의 대전때, 조나라 장수였던 염파를 경질하고 경험부족의 조괄을 후임으로 세워 파국을 초래한 조나라의 군주 효성왕 보였던 판단착오와 동일한 관점에서 보곤 한다.(물론, 착각하면 안되는 점은 선조는 멍청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서 일부러 꼬장을 부린 것이며, 따져보면 이순신의 처벌 이외에도 조정과 심지어 명나라한테도 꼬장을 부리면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데 뛰어난 계산을 보였다.)

또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려 해도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고 들면 힘들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전쟁영웅으로써의 명망뿐 아니라 당장 기용가능한 육군 병력을 전부 쥐어짠 5만여명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31] 이순신이 직접 통솔하던 부대는 수군이라 그 숫자가 훨씬 적었다. 조선 수군의 전성기에도 수천명에 불과했고 칠천량 해전 이후론 수백명까지 전락했다가 나중에야 다시 수천명 수준을 회복한다. 또한 병사들 대부분이 육상전 경험이 없었다. 이순신을 포함한 휘하 장수들은 육군과 수군의 보직을 오가서 육상전투 지휘 역량도 있었다곤 해도, 이순신이 통솔권을 쥐고 있는 부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건 어불성설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다른 수만명의 육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적극 동조할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이성계가 배극렴, 박위 등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장수들에게까지 전장과 조정에서의 교분으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이순신은 다른 육군의 장수들에 대한 개인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설령 이순신이 쿠데타를 일으킬 마음이 진짜 있다고 치더라도 조건을 곰곰히 따져보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크게 경계할 일이 아님에도 선조의 편집증적인 피해망상에 가까웠다.

5.2. 열등감 논란

선조에 대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단 건데 조선왕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선조의 정통성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명종에게 정통성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선조가 왕이 된 이유가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서손이지만 대비가 직접 선택해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명분상 이를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 시대 예법을 지금 기준으로 해석하는건 대단히 무리한 일로 그 시절에는 혈연 관계보다 종법 계통이 우선이었기에 법적인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가 덕흥대원군 제사에 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혈연 관계로만 따져도 중종 7남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 아들 명종의 3촌 조카로 매우 가까운 촌수다. 서자 후손이라거나 혹은 혈통상 멀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면 이후 국왕들 중에선 훨씬 더 먼 사람들도 많다. 숙종 서자 영조의 서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적자였던 철종이나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 따지만 인평대군 후손이었던 고종 등. [32] 선조보다 훨씬 먼 방계였고 조정의 상황도 훨씬 열악했던 고종조차도 방계 컴플렉스의 흔적이랄건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 편이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는데 망설인 건 광해군이 서자라서가 아니라 총애하던 인빈 김씨 소생에 마음이 가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에 둔 신성군도 서자다.[33] 덕흥대원군에서 서술했듯이 생부 덕흥군의 추숭은 한 적도 없다. 즉위 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 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 게 전부다.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왕실은 사대부와 달라서 서자라도 승통이 가능했고[34] 따라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서자나 서손 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다. 서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등이 있다.[35]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도 있는데 내명부 수장인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초상 다 치르기도 전에 문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선조는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 이상으로 활용하진 않았으며(영창대군 문서 참조) 당대 종법 해석상 광해군의 정통성이 영창대군보다 훨씬 우월했다. 1 2 광해군을 박대한 것은 더도덜도 없이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부터 전위를 요구한 유생과 신하들이 누굴 보고 그런 요구를 했겠는가?

선조가 임진왜란 몽진 길에 올라 호종하는 군사들의 수가 적었음에도 이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지닌 장수들과 의병장들도 감히 왕권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오히려 선조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로 선조의 왕권은 강력했다. 이는 물리적 무력을 압도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상이 당시 조선 지배층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다만 선조 대에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지는 붕당의 서막이 올랐으니 왜 하필 붕당이 선조 대에 시작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선조의 정통성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6. 기타

  • 원래는 선종이었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됐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오기된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사대주의 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조선의 숙원이었다. 실록은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 및 명나라 사람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도와 명을 친다는 무고를 바로잡은 것, 왜란을 극복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선조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광해군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밀어붙인 사안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칭송과 권위를 덧붙이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권력자를 위해서다. 참고로 이 묘호는 북송의 건국자 송 태조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황제로 추존되며 받은 묘호이기도 하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 부윤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 바 금지한 것. .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조총을 본 따 손수 새로운 총을 설계하기도 했다고. 1593년의 기사다.

    상이 류성룡에게 전교하였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사관 :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원문[36]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1593년 11월 12일

    기록이 저것이 전부라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있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 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이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만한 자를 가렸다.[37]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 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파일:선조.jpg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좌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기사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6.1. 창작물에서의 묘사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선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
  • 김성한의 임진왜란 소설 7년전쟁에 당연히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임란도 임란이지만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하는 데다가 재위 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엄청나게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사극에도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사극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상대적으로 악역을 많이 맡는다. 단, 허준에서는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뭇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38] 그러나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무능하거나 허둥대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왕권 강화나 전란 중 왕권 유지에 혈안이 된 소심해 보이면서도 정치판에서는 상당히 음험한 군주의 모습이 더 부각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커진 편이다. 2000년대 이전 사극과 이후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들을 비교해 보면 묘사가 사뭇 다른 걸 볼 수 있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 온리 콤판의 만화 YI SOON SHIN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심하게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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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렇게. 물론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 선조보단 세종대왕님흑화시킨 버전같다.[39] 곧 터질거 같다
  • 간혹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 하지만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 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인물이며 시대도 임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선조의 인성과 능력을 뒤바꿔서 성격은 참 좋은데 무능한 왕이 되었다
  • 오성X한음에는 당연히 등장. 나름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한양을 내주고 함흥으로 퇴각한다. 이 때 정원군(인조의 친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끌어들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되려 여진족에게 살해당한다.
  • 이순신의 나라와 동일한 작가가 쓴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왕이 되지 않았고, 하성군으로 남았다. 주색잡기를 비롯한 비행으로 악명은 자자하나, 주인공의 명으로 볼모로 가게 된 일본에서는 스파이활동을 충실히 수행하여 나라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허나 경인왜란이 벌어지자 그의 가솔들 중 상당수가 순왜가 되고, 아들인 임해군이 노부나가에게 포섭당해 왕을 참칭하는 바람에 의금부에 투옥되는 고생까지 하게 된다.[40] 그래도 스파이활동의 공이 커서 죽음은 면할 가능성이 높다.
  • 임진록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 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한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않는다.

6.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6.3.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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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상술했다시피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곳으로 이장(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다. 이 능은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인데,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 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훨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참고로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45]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마냥 어지러웠던건 아니고 선조 대는 세조가 씨뿌리고 연산군과 중종이 키워놓은 조선 중기의 사회 모순[46]에 대한 보완과 개선 노력이 시작되는 굉장히 의미있는 시기이다.

6.4. 선조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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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한글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이곳 #을 참조하자.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47]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48]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7. 관련 문서



[1]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2] 이 이름은 선조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3] 참고로 명종의 친 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이 이부(李)다. 선조가 법적으로 명종의 아들이 되었으니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날 일(日) 변'의 한자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이준경의 건의로 '경(曔)', '연(昖)', '요(暚)' 세 글자 중 '연(昖)'으로 고른 것이다. 피휘로 인한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조선조 대부분의 국왕들은 이름을 외자로, 그것도 일상 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벽자로 지었는데(국조 이성계(李成桂)조차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이름이 외자면 형제끼리의 돌림자를 설정할 수 없게 되므로 한자의 부수를 같게 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후보 중 하나였던 '경(曔)'은 정종이 본래의 이름인 방과에서 바꾼 휘(諱)이다. 애초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게 왕의 이름인 휘인데 새 왕의 휘 후보로 선왕의 휘를 올리다니 다른 왕 같았으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만으로 진실로 '경'을 칠 일이었다. 공정왕은 정식 임금이 아닌데 이름 좀 쓰면 어때!!!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정종을 진실로 공경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왕 취급도 안 해 줬단 얘기. 세종조에 지어진 "용비어천가"의 '해동 육룡(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에도 정종은 당연히(?) 빠져 있다. 애초에 '공정왕'이라며 묘호도 받지 못했던 정종의 안습한 대우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종적으로는 '연(昖)'으로 결정된 게 정종 입장에서 다행이었다면 다행. 졸지에 왕실 족보에 동명이인이 생길 뻔했다.[4] 실제로는 삼촌이 된다.[5] (네가 쓴) 편지 보았다. (정안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 (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음하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거든 내 친히 (돋은 것을)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염려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 계묘 (1603년) 복월(11월) 19일(9일) 사시(오전9~11시)[6] 할머니가 창빈 안씨로 후궁이다.[7]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당시 朝明간의 관계가 상당히 나빴기에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 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넘겨버렸었다.[8] 선조의 후퇴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1선이 돌파된 순간부터 중세답지 않게 외교와 뒷심을 칼같이 준비하는 판단력에서 만만찮은 군주임을 드러낸 것이다.[9] 특히, 선조 광해군 인조는 모두 '독이 든 성배' 수준의 군주들로서, 장점만 추켜세우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교훈들을 남긴 왕들이다. 제각기의 인간적 결함이 국가 위기 사태에서 오히려 위험과 멸망을 향해 더욱 폭주하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10] 그리고 덧붙이자면, 선조는 심질, 정신질환을 앓았는데, 정신착란이나 조현병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당사자도 수차례 양위코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1] 대중매체의 왜곡과는 정반대로,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강력한 권위를 이양받았는데도 당파 통제를 못해서 자멸하고 나라를 망쳤다. 그에 비하면, 왕위 계승은 생각도 못했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즉위하였는데도 신료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선조의 모습은 타고난 왕의 재능이란 말 외엔 표현이 힘들다.[12] 선조의 인재에 대한 집착은 광인 수준이어서 인재발탁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이순신만 하더라도 녹둔도 전투를 계기로 눈여겨보다 직접 파격적인 인사를 추진하여 그 자리에 앉혔고, 권율처럼 40대에 들어서 관직에 나선 인물도 재능만 보고 몹시 이뻐했다. 퇴계 이황, 서인의 태두인 율곡 이이, 왜란시기 재상 서애 류성룡 등 기라성 같은 명신들을 누구보다 챙겨준 왕도 선조이다.[13] 현대처럼 민주주의가 없던 시대의 명군들은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길들이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기초적인 자질이었다. 즉, 선조의 문제는 신하를 안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 이상으로 이기적인 왕이었다는 점에 있다.[14] 선조가 벌인 뻘짓은 이순신에 대한 푸대접 이외에도, 명나라와 조선 조정에 정치적 시위 형태의 퍼포먼스를 여러 번 벌여서 그들을 견제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이 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왕권을 활용하여 천조국과 신하들을 협박하는 도박을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의 안위에 매우 집착하여, 임진왜란 초기에는 아예 조선에서 탈출하려고 하여 조정과 명나라를 당혹시켰다. 너무 똑똑해서 탈조선을 꿈꾼 조선왕.[15] 흔히 광해군이 선조 때문에 미쳤다느니 하는 대중매체의 유치한 선악구도의 인물해석이 아니더라도, 선조의 아들들은 유난히 개인주의적이고 잔혹한 인물들이 많았다. 광해군조차도 대중매체의 왜곡수준의 미화와는 달리, 자신의 관심 밖의 경제와 사회 분야에는 책임감도 부족하고 방관했기에 왕으로서는 적절치 않은 인물이었고,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고 잔인하고 무능했다는 점에서 역시나 선조의 성향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16]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17]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당시엔 전라북도, 전라남도가 아니라 전라도로 지역이 하나였고 군사 편제상으로만 좌도, 우도를 나누어 병영과 수영을 두고 그 병,수영에 해당하는 보직을 가진 이들을 임명하고 파견했다.[18]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비슷하게 원균이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파격적으로 전라 좌수사로 임명됐을때 원균은 수령으로 일하던 시절에 실적이 꼴등이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좌수사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사간원에서 따졌고 선조는 원균을 쫒아내고 좌수사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혔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가 바로 원균 직후에 좌수사로 임명되는 이순신의 이야기이다.[종6품] [종3품] [종4품] [종3품] [정3품] [24] 사극에서 흔히 다른 부하들이 이순신을 '장군'으로 지칭하는데 이순신은 1591년부터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의 품계였기에 영감으로 불러야 맞다. 제일 정확한 호칭으론 수사 영감. 이순신이 정헌대부가 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로는 통제사 대감으로 불렸다.[25]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는 뜻이 아니라 유학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묻는 것.[26] 첫 승전인 옥포해전에서 가선대부로, 2차 출동 승전 후 자헌대부, 3차 출동인 한산대첩이 있은 후엔 정헌대부로 1차례씩 승진을 시켜주고 1593년 8월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신설하고 초대 통제사로 임명한다.[27]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 후 멀쩡히 말도 타고 사람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그래도 약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갖춰놓고 안했을 뿐이지 사실상 죄도 없는 사람을 가둬놓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한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다.[28]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참으로 역적이다.' '이젠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29] 물론 이산겸은 북인의 수장 이산해의 사촌이므로 북인에 대한 견제 조치로서 죽였다는 시각이 많다. 비슷한 예로 거론되는 김덕령의 경우 류성룡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혐의가 너무 짙어서 살리지 못한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소지가 있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자 기사,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자 기사를 참조할 것.[30] 일례로 토사구팽의 일화로 유명한 유방은 한신이 오만꼬장에 거의 항우가 초의제에게 했던 것처럼 난장을 피웠고 이것 때문에 크게 분노는 했지만 항우라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는 호구같아 보일 정도로 한신을 어르고 달랬다.[31] 조민수와 지휘권을 반으로 나눠놨다곤 해도 그간의 군공이 그저그랬던 조민수에 비하면 이성계는 화려한 전공으로 군영내에서 실제 영향력 차이가 확연했다.[32] 그 왕들도 먼 방계 출신임으로 인한 정통성 컴플렉스를 크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왕이 승하한 당시에 남아있던 왕족들 중에선 가장 높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계승법은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놨기 때문이다.[33] 사실 선조의 적자는 영창대군 뿐이다. 다만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것이 영창대군 출생보다 빠르므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34] 사대부조차도 정말 사정이 궁하면 서자도 제사를 받드는게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박원종의 서자 박운.[35] 다만 경종의 경우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시에는 소의라 서자라서 송시열이 태클 걸기도 했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상 '왕위 계승=대종(왕가) 계승'이라는 논리를 통해 후궁 출신이든 어떻든 다소 인위적으로라도 '왕위 계승자=왕실 적장자'로 만드는 게 왕가의 종법이었는데, 송시열은 여기에 반대되는 논리인 '왕위 계승≠대종 계승'이라는 특수한 주장을 펼쳤고 이는 전임 왕 때 예송논쟁으로 나타난다. 왕실도 일반 사대부가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는 왕위와 종통의 계승 절차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므로 아무리 대유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라 해도 왕가의 이러한 특수성을 무시한 주장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거기에 장(옥정) 소의 어머니의 옥교 사건으로 뿔이 나 있던 숙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당시에는) 외아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게 된다.[36] 쉽게 말하면 왕이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터를 권하고 있다![37] 윤흥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다대포 전투에서 목숨걸고 싸워 전사했다.[38]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 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허준에서 선조 역을 맡은 박찬환 씨는 후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을 맡았는데, 수시로 상관에게 왕은 절대 믿을 것이 못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자아비판.[39] 세종은 실제로 고기를 즐기는 식습관과 운동부족 등으로 인해서 비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0] 실은 그가 일본에 갈 볼모가 된 원인도 임해군이었다.[41] 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워낙 인기있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그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42] 당초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을 빚고 심지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를 내자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꽤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43] 재미있게도(?) SBS의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했다. 전란으로 욕 먹는 조선의 두 임금을 모두 연기한 셈.[44] 실존 인물이 아닌 그 모티브만을 따온 창작 캐릭터이다.[45]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46] 지배층의 모랄 해저드,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47] 한석봉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데다가 선조 자신부터가 한석봉 팬이라 한석봉에게 가평군수에 앉혀준적도 있었다.[48] 인조와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