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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8년 한양 대화재 世宗八年漢陽大火災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426년[1] 2월 15-16일 사고일로부터 [dday(1426-02-15)]일 | |
발생 위치 |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일대) | |
유형 | 화재 | |
원인 | 방화 (추정)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 사망 | 32명 이상 |
재산 피해 | 민가 2,400여채 전소 (당시 한성 가옥의 약 13%)[2] | |
관련자 처벌 | 방화범 전원 능지처사 가족 중 남성 전원 교형 여성 및 아동 노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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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종 8년(1426) 2월, 한양에서 발생한 화재사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큰 화재사건이다.조선의 왕후는 정치적으로 큰 권한을 가지지 않으나, 이 사건에는 왕인 세종과 왕세자인 문종이 모두 강무라는 사냥 겸 군사훈련을 감독하러 나가 있었던 탓에 만삭이었던 소헌왕후가 직접 방재작업을 진두지휘했다.[3] 정승 황희도 통상적인 보고절차를 생략하고 왕후에게 직접 보고했다. 불이 너무 번지자 종묘라도 지켜내야 한다며 소화 작업에 힘을 쏟았고, 세종이 환궁하기 전까지 수도 한양의 전권을 맡았다.[4]
2. 전개
1426년 2월 15일, 한양 남쪽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 때마침 불어온 서북풍을 타고 불길이 맹렬히 번져 하루 동안 집 2,200채를 재로 만들었고, 32명이 불에 타 죽었다. 당시 세종은 도성을 벗어나 강원도 횡성군에서 병사들의 강무를 참관하였는데, 그날 밤 연락을 받고 바로 환궁했다. 그런데 다음날(2월 16일) 또 다시 불이 나 전옥서를 태우고 민가 200여 채가 소실되었다.[5] 이에 세종은 이재민 구호에 나서는 한편, 방화범을 잡도록 명령하고 다음과 같이 공고했다."‘각방(各坊)과 각 동(洞)의 중심지에 현직이나 전직(前職) 자를 물론하고 각 호(戶)의 인원이 밤마다 1개소에 5명씩으로 정하여 교대로 파수를 보며, 각 경(更)마다 순관(巡官)과 별순(別巡)이 검열할 것.
"‘불지르는 사람을 잡아서 고발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양민(良民)은 계급을 초월하여 관직으로 상을 주며, 천민은 양민으로 옮겨 주며 모두 면포 200필을 급여할 것.
"‘불을 지른 자의 무리 중에서 자진하여 자수하는 자에 대하여는 《대명률》에 ‘반란을 도모한 큰 역적이 자수한 자’에 대한 예에 의하여 죄를 사면하며, 서로 고발한 자도 죄를 사면하고 면포 200필을 상으로 급여할 것 등입니다." -세종 8년 2월 25일의 기사 -
3. 처벌 및 피해보상
방화범을 추적한 결과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6] 당사자들은 모두 극형인 능지형에 처해졌으며,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남자는 교형에 처해지고 여자는 노비가 되었다.조정에서는 이재민들에게 구호양곡과 장 300석을 나누어 주었고, 화재가 커지지 않도록 길을 넓히고 방화장(防火墻)을 쌓게 했으며, 개인집에도 5간, 10간마다 우물을 파도록 하고 종묘와 대궐 안, 종루의 누문에는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했다.[7]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병조 예하에 금화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화재를 예방하게 하였다. 이 금화도감은 오늘날의 소방서와 같은 역할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소방기관이다.
4. 둘러보기
[1] 명 선덕제 원년, 조선 세종 8년[2] 2021년 8월 기준 서울시 종로구에 대략 73,000세대가 거주중이므로 대략 8,700여 세대가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상황이다.[3] 당시 소헌왕후는 금성대군을 임신한 상태였으며, 금성대군은 화재 발생으로부터 불과 1달 뒤인 3월 28일에 태어났다.[4] 이후에도 세종은 신료들에게 자신의 부재시에는 중궁인 소헌왕후에게 모든 사항을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5] 이 당시 한양의 가옥은 17,000호 ,인구는 약 90,000명 ~ 100,000명으로 잡는다. 그런데 2,200채가 탔으니 전체 가옥의 13%가 소실된 것이다.[6] 갇힌 자들은 대부분 함경도 북청(北靑)·길주(吉州)·영흥(永興) 출신이었다. 근데 이 때문인지 북한에선 이 사건을 '한성방화투쟁'이라고 민중투쟁으로 터무니없는 올려치기를 하고 있다.[7] 그때 당시 소화기는 대포에 바퀴가 달린 모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