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연산군
1. 개요
조선의 10대 국왕 연산군에 대한 여담.2. 관련 분야별 여담
2.1. 즉위 이전
- 어린 시절 연산군과 성종의 대화가 전해지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성종이 연산군과 함께 오랜만에 밖에 바람쐬러 나왔다고 한다. 성종이 "융[1]아, 너도 좋으냐?"라고 물었는데 이에 연산군은 소 떼를 보며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마마마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연산군이 밖에서 놀고 싶어서 성종의 허락을 받고 놀다 저녁 때 쯤 대궐로 돌아왔는데 이에 성종은 연산군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여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연산군은 "딱히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으나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울어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하여 성종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고 한다.
- 세자 시절부터 연산군은 대간들에게 시달리는 성종을 답답하게 여기며 반감을 가졌고 즉위 이후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서는 매우 성종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왕에게 진계하는 한 신하가 항상 아버지 성종을 본받으라고 자주 말하였는데 매우 듣기 싫어했으며 성종을 매우 미워하고 원망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성종의 덕을 칭찬하였지만 본래 속마음은 매우 싫어하여 여러 신하들이 성종의 덕을 칭찬할 때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성종을 거의 원수처럼 보았다.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연산군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었으며 기일에는 고기반찬을 먹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종 기일 날 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는 반찬을 올렸다 하여 사옹원의 관계 관원을 국문하였고 성종을 미워해 행상하던 사람까지 죄주었고 한다. 또한 성종의 옛법을 모두 폐지하였고 성종의 기일 날에는 사냥하러 나갔으며 성종의 반신 영정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거나 영정을 걷어 손으로 때리기도 하였고 혹 크게 술을 먹고 취하고는 미쳐서 부르짖으며 선릉을 파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특진관 예조 판성 유지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그릇을 옮기고", "호조 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2]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 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를 쏘아서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성안에 요귀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그릇을 옮기고", "호조 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2]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 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를 쏘아서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 성종실록을 보면 연산군 즉위 전 성안에 요귀(妖鬼)들이 나타났고 호조 좌랑 이두(李杜)의 집에서 여귀(女鬼)가 나타나 말을 하며 음식을 먹었는데 상반신이 없어 음식이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영의정 정창손[3]의 집에서는 귀신이 집안의 그릇을 옮겼다는 폴터가이스트기록이 있다.[4] 기록을 보면 예조판서 유지가 "화포로 귀신들을 퇴마하자" 라고 하였는데 방술(화약)을 이용해 나쁜 귀신을 쫓고 재앙을 막자고 의견을 내세운 것이다.[5] 즉 '양진' 을 하자는 것이었다. 양진은 "나쁜 귀신을 쫓아 재앙을 막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귀신이 나온다니까 대포 한방 맞으면 귀신도 꼼짝 못할테니 퇴마하자" 라고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이에 성종은 아무런 대응을 안 하였다. 이는 음기가 강한 귀신을 양기인 불(=화포)로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듯 귀신들을 퇴마하는데 있어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지만 훗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이 11년 6월 18일 종묘에서 화포를 쏘아 '양진'하라고 명하여 결국 연산군은 귀신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만화가인 미즈키 시게루가 그려서 일본에도 소개되었다. 미즈키 시게루 본인이 만화가 겸 요괴 연구가로서 세계 각지의 민담과 신화를 찾아 직접 방문 취재를 했다고 한다.
2.2. 성격
- 폐비 윤씨의 성격에서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 폐비 윤씨가 연산군을 출산하기 전까지는 성종에게 많은 총애를 받은 와중에 세 명의 대비들에게도 예쁨 받았을 뿐더러 후궁들과도 잘 지냈고 어질고 온순한 사람이었으나 연산군을 출산하고 난 후 포악한 사람으로 뒤바뀌었다고 한다. 성종은 매일 폐비 윤씨에게 시달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폐비 윤씨가 그 사이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더욱 두렵다면서 인수대비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무릇 폐비 윤씨가 불의한 일을 행했을 때 인수대비와 성종이 물으면 "주상이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성종이 이를 보고 꾸짖으면 "대비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짓된 짓을 행하고 인수대비,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세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바른말로 폐비 윤씨의 잘못을 꾸짓거나 나무랐는데 폐비 윤씨는 턱을 괴고 성난 눈으로 이들을 노려보는 등 대비들에게 불손하였다.
- 참고로 인수대비는 상당히 고귀하고 기품 있는 여성이었다고 전해지며 학식도 뛰어나 당시에는 왕비나 세자빈들도 한자를 못 읽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 한학과 유학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고 불교를 신봉했던 인수대비는 산스크트리어로된 불경을 번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성으로 살림집에 봉양하는 부녀자의 무식함을 걱정하여 열녀전, 소학, 여교명감 등의 서책을 가져다가 절실하고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모두 일곱 장으로 나누어 이름을 내훈이라 짓고 국문으로 번역하였다.[6] 이 외에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기간 동안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엔 사실 인수대비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 있다. 성격은 불같았다고 전해지는데 인수대비의 성품은 범과 같아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범절을 하늘처럼 소중히 여겼고 야사에서는 인수대비의 천품이 엄격하고 날카로워 왕손들을 기를 때 이들이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봐주지 않고 곧 얼굴빛을 바로 하고 경계하므로 시아버지인 세조는 농담으로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여하튼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는 집착하면서도 성종을 죽이려 했으며 항상 성종을 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고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고 성종을 경멸하여 노예 대하듯이 대했을 뿐만 아니라 성종에게 대놓고 용렬한 무리라고 하고 또 눈을 뽑고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하고 발자취까지 없애버리겠다며 극악무도한 말을 퍼부었다. 그뿐만 아니라 매 때마다 성종을 경멸하여 성종이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도록 방해하고 어선이 있는 곳도 아무 때나 출입하자 성종은 자신이 편치않을 때 혹시나 독을 어선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비하면서 폐비 윤씨가 지나가는 곳에 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성종이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소장(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기 전에 궤연 앞에 치는 하얀 포장.)이라 말하고 다녔다.
- 폐비 윤씨는 성종이 편치 못할 때마다 마음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욱 기뻐하였고 혼자서 꽃 핀 뜰에서 놀며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자신의 몸이 편치 않을 때면 기도하여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 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 라고 말했는데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아서 모두 폐비 윤씨를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스로 상복을 입으며 여름철에도 표의를 벗고 항상 흰 옷을 입으면서 늘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에 볼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라고 항상 말하고 다니며 원자를 내세워 뜻을 이루어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고자 기약하였다. 또 항상 비상 가루를 옷속에 차고 다니고 약물과 방양서(굿하는 책)를 가지고 다니며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몰래 독약을 품고 주머니에 건시와 비상을 같이 넣어 두며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일,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법, 무릇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쓰기도 하였다.
- 이렇듯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인 면, 상대를 안 가리는 극단적 언행에 따른 인간관계 파탄 또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연령을 따지면 경계성 인격장애 또는 조현병일 가능성이 높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보통 청소년기나 성년기 초기에 나타나며 폐비 윤씨가 이러한 성향이 된 나이도 22살 때부터이다.[7] 이 외에도 연산군과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거라는 논문도 소개되었다. 참고로 흔히 손톱자국으로 성종의 용안을 할퀴는 것이 화근이 되어 폐위되었다고 널리 알려져있지만 실록이 아닌 야사에 나온 내용이다. 야사에 따르면 폐비 윤씨의 생일 날 성종은 하례를 정지하고 표리[8]만 올리자 이에 폐비 윤씨는 분노하여 성종을 찾아다녔으나 하필 성종은 첩의 방에 첩과 함께 있어 이를 발견한 폐비 윤씨는 다짜고짜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와 성종을 화나게 하였으며 야사에는 이날 폐비 윤씨가 성종과 싸우다가 손톱으로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기록 외에도 성종이 껴안으려는 것을 뿌리치다 실수로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설이 있다. 여담으로 성종이 대부분의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폐비 윤씨를 사사시킨 뒤로도 성종은 과거 폐비 윤씨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에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 연산군의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2.3. 예술 활동
- 재위 9년부터 무당굿을 좋아하고 즐겨했다. 총애하는 여인들 중에서도 사내 무당놀이를 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총애하는 여인들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를 베풀었다. 스스로 무당이 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폐비 윤씨가 붙은 형상을 하였으며 백악사에 자주 올라가 굿을 했다. 이런 임금을 보고 궁중에서는 폐비가 빌미가 되었다고 여겼다. 실록 원문을 보면 빌미 수(祟)라는 한자를 그냥 '빌미'로 해석하였는데, 빌미 수(祟)의 본래 뜻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 또는 '귀신(鬼)이 나타나서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나쁜 일의 원인이나 음모를 꾸미거나 그런 의미로 퍼져나가는 것을 말한며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귀신이 내린 재난으로 해석하는 쪽이 맞다. 일본에서는 귀신이나 신령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을 '타타리(祟り)'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훈자로 '수(祟)'를 사용하였다. 즉 당시에는 연산군이 스스로 무당이 되어 무당굿을 하며 폐비 윤씨가 붙어 빙의된 모습을 보였고 궁중에서는 폐비 윤씨가 원귀되어 연산군에게 빙의되어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연산군은 정신질환인 광질[9]을 얻어 때때로 한밤 중에 혼자서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을 막 달렸다고 한다.
- 나름 무예와 예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연기력도 뛰어났는지 총애하는 모든 여인들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를 베풀며 연산군이 죽은 자의 말을 하며 그 형상을 취했는데 모든 여인들은 그런 연산군을 보며 두 손을 모으고 몰입해서 시청하였다. 또한 죽은 자의 우는 형상을 하자 모든 여인들은 슬피 울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노래와 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으며 흥청들과 화합하면서 즐거움을 삼았다. 불시로 궁인들을 뒷뜰에 모아 미친듯이 노래를 부르고 난잡하게 춤추며 즐거움을 삼기도 했다.[10][11] 또한 신하들에게도 노래와 춤을 추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간혹 파행적인 춤을 추는 면모를 보였다. 연산군은 대비나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 앞에서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안겨 주는 춤을 추기도 했고 근빈박씨는 나이 80세로 춤을 추기에는 어려웠는데 연산군이 춤추면서 박씨에게도 춤추라고 명하였고 박씨는 연산군의 학대가 두려워 억지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연산군이 매 때마다 술에 취하여 발광할 때마다 처용무 가면을 쓰고 경복궁으로 갔는데, 흥청 수백 명에게 풍악을 치게 하였고 인수대비 앞에서 희롱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인수대비 앞에서 처용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을 추며 괜한 트집을 잡아 대비가 겁에 질려 두려워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며 처용의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인수대비 앞으로 나아갔는데 이에 인수대비는 이 일로 크게 놀라 병을 얻자 연산군은 미리 상기를 짧게 하는 제도를 마련했고 끝내 대비는 사망하였다.[12] 대비가 승하해도 슬퍼하는 빛도 없었으며 상례 장례 모든 일을 모두 강쇄해서 행하였다. 보다시피 춤 중에서도 처용무를 좋아하고 가장 즐겨췄다.
처용무는 신라 후기부터 현대까지 행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궁중춤으로 기본적인 의미는 처용(병을 내쫓는 신)을 중심으로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풍요가 가득하길 바라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음력 섣달 그믐날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기 위해 궁중에서 열린 귀신 쫓기 행사인 구나의식에서 2차례에 걸쳐 추는 춤이었다고 전해진다. 춤사위를 가만히 보면 한삼 끝자락을 반대편 옆구리에 낀 채로 손을 앞으로 힘껏 내딛거나 휘젓는 동작이 있는데 이 동작은 귀신을 손으로 쓸어내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13]
연산군은 궁중에서 처용의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기도 했고 계집들 중 광희악 소속 여산이 가장 처용무를 잘 춰 잔치 때 여산을 불러 짝을 지어 같이 처용무를 췄을 뿐만 아니라 운평들에게 처용무를 가르치되 처용무를 출 때 허리가 가는 미인이 사뿐이 추는 듯한 형식으로 추라고 하는 등 디테일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고 흥청에서 몸이 가늘고 키가 커서 맵시가 있는 자들을 뽑아 처용무를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또한 노래 부를 때 일일이 문제점을 집어내기도 하였으며 새 운평이 음악을 연주 할 때 수양수[14] 동작을 모르면 이에 한탄하며 이렇듯 춤의 동작을 모르거나 어설프게 추면 매우 한탄하여 익힐 때까지 훈련을 시키게 하였다. 연산군은 여기들에게 음률을 익히게 하였고 여러 악기를 다루는 것과 다양한 종류의 춤과 노래를 완벽히 익히도록 교육을 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의외로 몸이 날렵하였는데 말 위에서도 처용무와 검무를 추기도 했고 말을 달리다가 거꾸로 말을 타기도 했으며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기도 했다. 또한 나무도 잘 탔는데 사냥을 즐겨했던 연산군은 어느 날 사냥터에서 직접 나무 위에 시렁을 매고 스스로 나무에 올라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서 짐승이 지나는 것을 엿보아 쏘기도 했다고 한다.
- 많은 시를 남겼으며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연산군의 시는 총 141편이다. 실록에 수록된 연산군의 시 141수 중 군주로서 신하에 대한 애정과 배려를 담은 시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시를 쓰고서는 군주가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인 선온(宣醞)과 각종 꽃을 함께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리고, 종종 신하의 역심을 경계하며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협박을 내비치는 시를 쓰기도 했었다.
또, 말년에는 연회와 음주가무를 즐기는 폭군이었던 만큼, 향락에 대한 탐욕과 희구의 마음이 가득한 시들을 창작하기도 했었다. 그런 반면에 간혹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 정현왕후에 대한 장수를 기원하며 효심을 담은 시를 짓기도 했었으며, 매우 총애하던 흥청 소속 기생 출신 월하매가 병에 걸려 죽자 그날 슬픔이 깊어 잠 못 자고 너무 애달파 눈물 걷기 어려우며 맘이 애끓는다는 비통한 글이 담긴 월하매를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때로는 시적 감수성이 흘러넘쳐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자기연민에 빠진 시를 읊조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지은 시는 당시에 격조와 운율이 청고하다는 평이 있었고 현대 문학가들로부터는 허무주의를 멋지게 살려 놓으며 풍류성이 뛰어나고 문장이 깔끔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부왕 성종처럼 취미로 서예나 그림을 그렸다는데 아쉽게도 남겨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종이 그린 그림도 남겨지지 않았으나 필체는 남겨져있다.
- 꽃과 나무를 사랑하였다. 특히 연산군의 꽃 사랑은 꽃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고 꽃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 중 꽃 가꾸는 취미와 관련해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국왕이었으며 각 꽃의 생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꽃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시에도 꽃이 많이 등장하였고 고된 업무에 지친 신하들에게 제철 꽃과 술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이 외에도 팔도 관찰사에게 품종 좋은 모란을 봉진하게 했으며 치자 동백 유자 석류 장미 철쭉 들국화 등 각종 화초를 심은 넓은 화단을 조성했고 후원에 영산홍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참고로 꽃들 중 영산홍과 장미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 연산군의 미의 의식은 항상 웅장 화려함을 추구하였다.[15] 조선에서 사치를 장려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으며 사관은 "사치와 화려함이 극치에 달하였다."라고 평하며 왕을 비판하였다. 자신의 처용 가면을 금 은 주옥으로 장식하였고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질 때면 곧 새것으로 바꾸었으며 새롭게 짓는 이궁의 정전을 청기와로 덮고 규모도 크게 지었다. 이 외에도 모든 크고 작은 배를 한강에 모아 배 위에 판자를 깔고 못질하여 누각 4칸을 지었는데 금벽(궁궐이나 사찰 등을 단청할 때 황금색과 푸른빛의 고운 색채로 칠한 것을 뜻함.)이 눈부셨다고 한다.
경회루가 가장 활성화됐던 시기는 연산군 때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경회루 주위를 화려하게 꾸몄는데 경회루 연못에 관사의 배 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상징하여 연못 가운데는 만세산, 왼쪽엔 영충산, 오른쪽엔 진사산을 만들어 세 산이 높직이 치솟았다. 그 위에는 전우(신령과 부처를 모셔놓은 집), 사관(절과 도교의 사원), 인물(사람)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으며 영충산에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의 바라던 것이 뜻대로 이루어 조정에 드날리며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 희락하는 모양을 상징하여 이렇듯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 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진사산에는 소인이 먼 지방에 쫓겨나 의복이 남루하고 용모가 초췌하여 초가집에서 궁하게 살며 굶주려 쓰러져 있고 처자가 매달려 울부짖는 모양을 상징하여 이렇듯 귀양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만세산 위에는 봉래궁 일궁 월궁 예주궁 벽운궁을 만들어 모두 금은 채단으로 꾸며 찬란한 금빛이 햇볕에 빛났다. 반면 만세산 밑에는 푸른 난새, 자주빛 봉황새, 연꽃, 모란, 고소대, 봉래산, 황금까마귀, 옥토끼, 은붕어, 황금용 등의 여러 종류 관등을 좌 우보로 나누어 달아 천태 만상으로 기교를 다하여 금은 주취로 꾸몄다. 또한 채색 비단 천을 오려 백화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만상이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오려 연꽃도 만들고 산호수도 만들어 연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이 외에도 수백명이 탈 수 있는 황룡주를 만들어 채단으로 꾸미고 연못 위에 띄어 휘황하게 비춰 놓았으며 연산군은 미복으로 잠행하여 황룡주에 올라 타 만세산을 구경하였고 주위에 부용향[16] 수백 다발을 태우고 납거 1천 자루를 늘어 세워 밤이 낮처럼 밝았으며 흥청 수백명들을 시켜다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경회루 누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 운평 등 3000여명의 여인들을 모아놓으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고 한다.
- 옷 입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기생들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까지 깨끗한 옷을 입도록 하고 서민들에게는 넓은 소매를 입도록 장려하였으며 품계가 낮은 신하들에게는 흉배를 달게 하고 비단 옷을 장려하였다. 또한 갈포[17]와 마포[18]를 짜되 곱고 굵기를 3등급으로 구분하고 각도로 하여금 이 견본에 의하여 짜 올리도록 상의원에 명하는 등 각도에 갈포와 슬란[19] 등을 봉진하도록 상의원에 명하였다.
- 상당한 미식가였으며 귀하고 비싼 음식을 많이 먹었다. 특히 열대 과일을 엄청 좋아했으며 빈랑 등 희귀한 열대 과일도 많이 먹었다. 전국 팔도를 쥐어짜서 귀한 식재료를 공수하는 걸로 모자라 중국에서 수입해 먹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중국의 귀한 과일인 여지와 용안을 구해오게 한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수박을 먹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 이를 반대한 신하 김천령을 능지처참하여 사형시키기도 했다. 또한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에 청포도를 올려 시원하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으며, 귤도 좋아해서 제주도에 가서 직접 귤나무를 베어오라고 명하였으며 키위랑 비슷한 품종인 다래도 좋아하여 넝쿨째 뽑아다 바치라고 명하였다. 연산군 때문에 후대 왕들이 비싸고 맛있는 것 좀 먹으려 하면 신하들이 "연산군이 했던 짓입니다!"라면서 제동을 걸었다. 과일 외에 그가 즐겨먹은 음식 중에는 사슴의 꼬리와 혀가 있는데, 실록에서는 연산군이 이를 워낙 즐겨먹는 통에 전국팔도에서 달마다 사슴의 꼬리와 혀를 조달해야 했다고 전한다. 이때 그 수효를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경도관찰사 박건이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 연산군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그의 식도락에 대한 근거없는 낭설이 많은 편이다. 예컨데 세간에는 연산군이 스테미너를 위해 마늘을 넣은 장어 백숙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아무런 문헌적 근거가 없다. 몇몇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식료찬요》를 들고 오는데, 이는 연산군 즉위 한참 전인 세조 시절의 문헌인데다가 단순히 당시 조선에 장어 요리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연산군를 비롯한 어느 왕이 특별히 장어를 즐겨먹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또한 논산시 연산면에서는 연산군이 오계를 매우 즐겨 먹었기에 그 품종을 오늘날 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으나 이 또한 역사적으로 근거가 전혀 없는 입소문에 불과하다.[20]
2.4. 외모
-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역사 만화에서는 사치스러운 폭군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간혹 비만인 모습으로 묘사하지만 실제 연산군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연산군의 체형은 호리호리했는데, 한 군사에게 몸과 허리가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지 못하고 위대하지 않다며 임금의 위엄이 없다는 뒷말을 들을 정도였다. 또한 폐비 윤씨가 야사에 의하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 공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연산군 외모는 모친 폐비 윤씨를 닮아 고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여인네 같다는 뒷말도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연산군은 자신의 외모를 기피하고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는 수염이 길고, 육중하고 웅장한 떡대좋은 체형이 건강과 더불어 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21] 이렇듯 연산군이 외모에 관해서 안 좋은 뒷말을 들었을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로는 외모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야사와 실록에선 여자들이 그에게 반했다는 말들이 있다. 미복을 입고 잠행을 자주 즐겨했던 연산군이 잠행을 나갈 때마다 여인들은 연산군 외모에 홀려 당시 연산군이 운영하던 음악예술 모집단인 흥청 운평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다른 실록 기록에 따르면 제일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어떤 양반가 여인을 자주 범하였는데 그 여인은 연산군과 관계를 갖은 뒤로 남편은 안중에도 없고 매일 곱게 꾸미고는 멍하니 궁궐을 바라보면서 상사병이 걸렸다고 한다. 또 연산군과 성추문 있었던 몇몇 사대부 부인들은 임금의 명도 없었는데 궁중 잔치에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잘 보일려고 점차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했고 연산군과 흥청들과 함께 밖에 어울려다니면서 놀러가기도 하여 사대부 여인의 품행을 잃었다며 많이 비판을 받았었다고 한다.
- 전해내려온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닮아 키가 컸다고 한다.[22]
연산군과 그의 아버지 성종의 키가 정확히 몇 척인지는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성종이 내전에 있는 폐비 윤씨를 찾아갔는데 마침 명주를 짜고 있던 중전이 베틀에서 내려와 성종을 맞이하면서 어찌 그리 키가 크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자기보다 더 큰 사람도 있다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내전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았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사고에 의하면 11척 2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당시 척으로 환산하면 키가 2미터가 족히 넘는다고 한다. 성종은 허종과 자기 키를 비교한 다음 조정에서 허종 다음으로 자신이 제일 컸다고 했는데 이를 볼 때 성종도 상당히 장신이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고 연산군도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다고 하므로 장신이었을 것이다.
- 집안에 미남 미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수대비는 그 당시 여성치고 키도 크고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외모를 물려 받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도 미남이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진외증조부이자 인수대비 아버지인 한확 또한 외모가 뛰어났는데 실록에 따르면 그의 외모를 가리키며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미남이라 황제 영락제가 그를 자신의 아들인 홍희제의 딸의 사위, 즉 자신의 손녀사위로 삼고자 했지만 한확은 조선에서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고 한다.
한확은 누이 덕과 영락제의 총애 덕분에 위세가 높고 많은 혜택을 누렸는데 실상은 능력도 없는데 세종은 한확이 기간(器幹)이 있다하여 판한성부사를 제수하고 이조,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오래 전선을 맡게 했는데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감히 이간하는 자들이 없었다 한다. 또한 한확이 영락제로부터 관직 광록시소경을 받은 것을 세종이 비로소 알게 되자 감사와 병조를 고치고 이조 판서에 임명한 것에 대해 조정 신하들은 인사행정의 임무는 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확은 학문에 짧고 대체적으로 어두웠으므로 못마땅해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락제 사후에도 조정 안에서 굳건한 위치었으며 한확의 위세는 대단하였는데 영락제 사후로부터 1년 뒤 당시 장군절제사였던 한확이 김성정의 첩의 딸과 간통하여 신하들이 논핵하기를 청하자 세종은 장군 절제사를 체임하고 한확을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헌사에서는 일의 실상을 조사해 죄과를 논의하여 형을 결정해 적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세종은 "한확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며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한확의 둘째 딸은 세종과 신빈 김씨 아들인 계양군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그의 누이들도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영리하고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품위 있고 아름다운 미모라 미모가 곱고 아름다운 미모인 황씨와 더불어 공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상등으로 삼았다. 경회루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푼 어느 날 태종이 경복궁에 거둥하여 황씨 한씨를 포함한 공녀 10명을 근정전에 모으고 두 명나라 사신들에게 고르게 하니 사신들은 한씨를 제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한씨의 미모가 황씨보다 미모가 더 출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락제에게 총애를 받아 후궁 '여비'로 봉작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영락제 사후 순장당했다. 한확의 여동생인 한계란도 누이처럼 총명하고 아름다워 오빠 한확에 의해 강제로 공녀로 뽑혀들었고 이후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으며 훗날 선덕제가 죽어도 언니와 달리 다행히 순장되지 않으며 그후로 3명의 황제들을 섬겼고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수복을 누리며 황실의 녹을 누렸다고 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황제 성화제를 보호하고 양육한 공으로 황제 성화제에게도 총애를 받았으며 성화제는 한씨의 족친들에게도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한계란은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배우고 익힘이 많아 황궁에 들어오면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밤낮으로 일을 받들며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썼고 신중하고 세밀하고 빈틈이 없어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다고 한다. 또한 궁인들과 황제의 첩들을 질서 있게 잘 다스리고 4명의 황제들을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게 조심하여 말을 망령되게 하지 않고 행동에 떳떳한 법이 있으며 궁안 법도에 하나하나 능히 알고 기억해 모든 집사가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으며 빈첩 이하들이 한계란을 모두 여사라고 부르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한계란의 성품은 유순하고 온화하며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였고 여러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 빈첩들은 한계란을 신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한계란은 향년 74세에 사망했는데 사후에도 성화제는 후한 장례를 치러줬고 살아서는 황실의 녹을 누리고 죽어서는 은혜의 내림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며 네 조정을 거쳐 섬기고 황궁에 거처하면서 명나라에서 보지 못한 바를 보았다며 일생이 영화롭고 귀하여 한계란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고 한다.
- 연산군의 어진은 실제로 전해내려 오는 것이 없다. 온라인상 연산군 상상화라고 알려져있는 그림은 화백이 그린 것이 아닌 한 네티즌이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그 그림이 연산군의 실제 모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2.5. 건강
- 즉위 초에 치통을 앓았다고 한다. 근데 아버지 성종과 이복동생 중종도 치통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종의 가족력. 중종은 무려 재위 25년까지 치통으로 고생했다고 하며, 연산군은 즉위 초에 치통을 계기로 최초로 칫솔을 사용한 인물로 남아 있다. 나무로 만든 양치목으로 양치를 했다는 내용. 그런데 이로 인해 연산군이 항상 치통으로 고생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 또는 돌아갔다는 떠도는 이상한 루머가 나돌고 있어 연산군 외모에 대해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은 즉위 초에만 치통을 앓았었고 가볍게 앓았는지 극심하게 않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와있지 않고 실록에서는 그저 치통을 앓았다고만 표기되어 있다. 일생동안 앓지는 않았으며 치통으로 인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는 등 이에 대한 내용은 일절 실록이나 야사에 존재하지 않는 기록들이다. 연산군의 외모 묘사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외에도 온라인상에서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손이나 빨고 있고 하도 화를 내 주름이 졌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이에 관한 내용은 애초에 실록에 전혀 없는 기록이고 마찬가지로 야사에서도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애초에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록들이며 연산군 외모 기록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폭군이라 폭군의 이미지만 보고 날조된 내용이 많이 퍼진 것 같다.
- 연산군을 세자시절부터 재위 초기까지 정말 고생시켰던 질병은 종기이다. 그런데 연산군 말고도 많은 조선 임금들은 거의 고질병처럼 종기에 시달렸다. 세자 시절부터 연산군은 창진이라는 피부병을 앓았으며 치료의 기록이 자주 나온다. 치료의 효과를 봐 성종이 의원과 내관에게 말과 목면을 내려주었다. 또한 창병이 아닌 면창이라는 부스럼 질환을 앓았었다. 창병을 앓은 기록은 없다. 세자 시절부터 즉위하고 나서도 면창을 앓아 이때 신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보고 연산군에게 추위를 피하라고 하였다. 이후 연산군의 얼굴이 붉어지고 고름이 나며 소변이 잦은 증상이 있자 어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인한 양기[23] 부족과 스트레스로 보았다. 그 이후에도 임금의 얼굴에 진물과 종기[24]로 성할 날이 없어 면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명나라에 가서 웅황해독산과 선응고라는 귀한 치료제들을 구해왔다. 우선 일단 함부로 임금의 용안에 먼저 사용할 수 없기에 연산군과 같은 피부병 증상이 있는 노비에게 시험했다. 이후에 치료제들을 사용한 노비의 얼굴에 있는 종기가 서서히 완화되는 효과를 보이자 의관들은 다시 명나라에 가 치료제들을 많이 구해오고 제조법을 물어온 다음 임금에게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찬바람을 피해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하였고 양기에 좋은 음식과 약재로 기력을 보충하여 원기와 양기를 회복하였으며 소변이 잦는 증상도 멈추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면창 증상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있었는데 전과 다르게 심한 증상이 아니고 가벼운 증상이었으며 더군다나 그 전까지는 면창 증상에 대해 언급이 여러 나왔었다. 전에 비해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어가고 있으며[25]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는 간접적으로 완치되가고 있다는 늬앙스의 서술이 있기 때문에 완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얼굴에 종기(부스럼)가 떠나지 않았다는 내용은 세자 때의 기록이며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나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야사에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덕형[26]이 기록한 수필집 죽창한화를 보면 연산군 피부병은 완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전라도에 머문 이덕형이 97세인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한테서 연산군 외모 묘사를 듣고 자세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어린시절 노인은 당시 한양에서 재위 끝무렵 연산군의 얼굴을 직접 봤으며 그 해 가을에 반정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노인은 연산군이 키가 컸으며 빛은 희고 수염이 적으며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만 묘사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의 피부병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분명 노인은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또는 곰보 자국과 종기와 흉터(자국)이 있었다고 언급했을 것이다.[27] 그러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에 연산군의 종기 질환은 제대로 치료되었으며 만성적인 피부질환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 연산군의 피부가 안좋았다는 얘기가 나올 때 질환을 치료한 이에 대한 얘기는 언급이 없고 일생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여드름이 많았다 식으로만 알려져있다. 또한 연산군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중종은 얼굴과 몸에 아토피 피부 질환이 있었으며 외모 묘사에도 얼굴이 약간 얽었다는 묘사가 언급되있고 세조 또한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었다. 이 외에도 태종, 세종, 문종, 성종, 광해군, 정조는 종기 질환을 숙종, 현종, 헌종은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 이렇듯 수많은 조선 임금들은 유전처럼 종기질환이나 피부병을 앓았었다.
즉위 초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재위 중반~ 후반에 들어서는 눈병 외에는 다른 병상은 없었고 사소하고 가벼운 증상들만 있었는데 금방 호전되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앞서 언급했었는데 그동안 연산군은 대간들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금방 완쾌되지 않았고 완쾌 됐어도 다시 또 재발하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신하들을 억누르고 나서부터는 신하들의 족쇄로부터 자유를 찾았는지 몰라도 확실히 초기 때와 달리 활기차고 연산군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운평과 흥청들의 외모를 항상 중요시여겨 부스럼같은 피부질환이 있으면 곧 치료하게 하였다.
- 영화 간신에 나오는 연산군은 실제 외모 고증과 상관 없이[28] 관자놀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는데 이에 대해 배우 김강우는 인터뷰에서 연민을 넣고 이해를 시키고 싶어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다고 하였다. 어머니로 인해 미쳐가는게 아닌 태생적으로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설정하였으며 결핍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외적으로 이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산군 얼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2.6. 업적 및 폭정
- 연산군 시기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은생산량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며 훗날 세계사조차 바꾼다. 조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으나[29] 조선에 은이 별로 없어 잘 적용되지 않았다.
- 재위 중반 일본에서 암컷 원숭이를 바치자 "선왕 때 앵무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비용만 많이 들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구리나 철과 같은 꼭 필요한 물건도 값을 그 값을 대기가 어려워서 공무역과 사무역을 정지했는데, 하물며 이같은 무익한 짐승이겠는가? 도로 돌려보내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타이르라."라는 실속있는 발언을 남겼다. 그 이후에도 일본 스님이 말과 원숭이를 바쳤는데 연산군이 둘다 도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에 스님이 원망하는 투의 발언을 하자 말만 받고 원숭이는 돌려보냈다고 한다. 연산군은 개나 고양이는 좋아하였지만 원숭이를 매우 싫어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성종이 워낙 동물을 좋아했던 터라 그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유가 연산군의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꽤나 조리에 닿는 것이 의외인 부분. 참고로 아버지 성종도 일본에서 원숭이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동물들을 좋아한 성종은 원숭이가 추위에 떨까봐 사슴가죽으로 옷을 입히고 흙집을 지어 원숭이를 기르자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에 기침을 한 신하를 처벌한 적이 있었다. 가령 연산군일기 12년(1506) 3월 27일에는 김새(金璽)가 왕 앞에서 기침을 했다며 이는 매우 거만한 행동이므로 국문(鞠問/鞫問)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2.7. 사망 이후
- 음력 기준 1506년 11월 6일에 사망하여 11월 7일 생일인 하루 앞두고 사망하였다.[30] 그레고리력 기준으로는 생일 2일 전,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생일 3일 전이다.
- 충무공 이순신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을 교육한 세자 시강원의 관리 중 이거(李琚)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순신의 증조부이다.[31] 이거는 연산군이 즉위한 뒤엔 순천부사 등의 자리를 역임했으며 연산 8년 무렵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 왕의 남자를 감상한 가수 안예은은 연산군과 공길의 감정변화를 공길의 시점에서 풀어나간 노래 '홍연'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로 K팝 스타 시즌5 예선에 참가한 안예은은 유희열에 의해 슈퍼패스로 합격한 것이 화제가 되었고, 후일 안예은이 데뷔한 이후, 이 노래는 연산군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6화와 7화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
[1] 이융은 연산군의 본명이다.[2] 여자 귀신[3] 참고로 정창손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4] 그러나 정창손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그냥 냅두라고 하였다.[5] 일각에서는 영의정 정창손과 사이가 안 좋아서 귀신도 내쫓을 겸 화포로 정창손도 같이 내쫓자는 본심이 있기에 제안을 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6] 내훈은 부녀자의 덕목과 훈육에 대해 저술한 책.[7] 만 21세[8] 옷의 겉감과 안찝[9] 광증[10] 연산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혹시나 궁 밖 바깥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궁 밖 사람들이 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11] 궁 밖 사람들이 몰래 엿보는 광경을 들켰을 때는 곤장을 때리고 그 일대의 집을 허물었다고 한다.[12] 흔히 대비에게 박치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는 야사이다.[13] 참고로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14] 포구악에 맞추어 격구하는 동작의 한가지[15] 연산군의 외모는 선대 왕들에 비해 유난히 곱상했기에, 이러한 자신의 외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도 있다.[16] 목련으로 만든 향[17] 칡 섬유로 짠 베[18] 삼실로 짠 천[19] 생원·진사에 합격된 때에 입던 예복[20] 다만 연산면의 오계 품종이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21]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 생겼다라고 기록에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22] 연산군과 더불어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둘의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고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23]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24] 부스럼[25] 재위 중반~후반에 넘어가면서부터는 면창의 관한 증상이 도졌다거나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언급되지 않았다.[26]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27] 다른 외모 기록에도 연산군 얼굴에 곰보나 종기 흉터자국이 있었다는 얘기는 언급되지 않았다.[28]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29] 이 시기의 세계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순조 때 나폴레옹을 알 정도. 허나 겉으로만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30]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하였는데 고종 때부터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며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31] 이거의 둘째 아들인 이백록이 이순신의 할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