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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 묘 전경 | |
출생 | 1400년(정종 2) 또는 1403년(태종 3) |
사망 | 1456년 10월 19일[1] (음력 세조 2년 9월 11일)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봉호 |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A] →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A] |
시호 | 양절(襄節) |
본관 | 청주 한씨 |
자 | 자유(子柔) |
호 | 간이재(簡易齋) |
부모 | 친부 - 한영정(韓永矴) 친모 - 의성 김씨 |
형제자매 | 누나 강혜장숙여비 한씨 여동생 공신태비 한씨 |
배우자 |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
자녀 | 슬하 3남 6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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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명나라 황실의 외척.2. 생애
'삼한갑족'이라 불렸던 전근대 한반도의 명가 중에서도 대성이었던 청주 한씨의 자손으로, 아버지가 의정부 영의정 서성부원군을 추증받은 한영정이었다. 가문의 명성 덕분에 이미 어린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종7품 부사정에 올랐다.당시 명나라가 후궁으로 들여보낼 공녀를 바치라는 요구를 조선에 해오자, 1차로 공녀들을 보냈으나 명나라 영락제는 미모가 없는 여자들만 골라보냈다며 다시 미모의 여자들을 골라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2차 선발에선 심혈을 기울인 결과 한확 누나 한씨를 비롯, 3명의 여자가 선발되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녀가 떠나던 날 길가의 모든 이가 슬퍼하며 울었다고.
그리고 그 공녀로 바쳐진 누나가 바로 명나라 제3대 황제였던 성조 영락제 주체의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였다. 미색도 뛰어났지만 영락제의 비위를 잘 맞췄던 그녀는 총애를 받아 곧 비(妃)로 책봉되었고, 그 총애는 동생인 한확에까지 미쳤다. 이 때부터 한확의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 되는데, 역시 공녀로 뽑혀 명나라로 가던 황씨가 이미 외간 남자와 사통해 임신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조선 사신단의 목숨은 물론 조명관계마저 위태로워질 지경이었으나 한씨 남매가 대노한 영락제를 달래어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6] 이 시점에서 한확은 작게는 단신으로 황씨 일가와 진헌색 관리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고, 크게는 조선의 대명 외교 참사를 수습한 것이었다.
영락제는 한술 더 떠 한확을 아예 정5품 봉의대부 광록시 소경에 봉했고,[7] 그의 잘생긴 외모에도 호감을 가져 심지어 부마로 삼으려고도 했다고 한다.[8]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외모를 가리켜,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번역하자면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당대의 미남이었던듯.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영락제는 곧 쇠약해졌고, 여비 한씨가 중국 역사상 희대의 궁중 암투인 어여의 난에 휘말리면서 유폐되더니, 곧 죽어버린 영락제의 장릉에 순장되고 말았다. 단순히 외모가 뛰어나단 이유로 20대의 어린 나이에 정든 조국과 가족을 떠나, 말도 안 통하는 명나라에 바쳐졌던 한확의 누나는 겨우 24살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죽을 때의 일화는 더욱 슬픈데 죽기 직전 여비 한씨는
"어머니, 저는 갑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라고 울었지만, 도중에 집행관이 그녀의 목을 매달아 유언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9] 이렇게 한확의 권세는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으로 끈 떨어진 연이 되나 싶었으나...영락제의 뒤를 이은 인종 홍희제가 일찍 죽고, 그 다음 선종 선덕제가 즉위했을 때 조선 출신의 환관들이 여비 한씨의 막내 여동생인 한계란이 그녀만큼 절색이라고 운을 띄우자 이번엔 아예 한확의 막내 여동생을 공녀로 바치라고 딱 꼬집어서 지명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확은 누나의 비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얼씨구나 하며 그에 응했다. 1427년 5월 1일과 1428년 10월 4일 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장차 공녀로 바치기 위해 혼기가 지난 누이를 시집보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누이를 슬피 여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도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보아 명나라에서의 지명도 있었겠지만, 한확 본인이 권력을 위해 누나에 이어 여동생마저 명나라에게 '진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당시 한확의 여동생 한씨는 절망하여 앓아누운 상태였는데 오라버니 한확이 약을 지어오자
"이미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지극하거늘 나까지 팔아 호사를 누리려는가?"
라며 울었다고 한다. 여동생 한씨 입장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들어버린 언니의 죽음을 보고도, 기어코 자신마저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버리려는 오라버니 한확이 원망스러웠던 듯 하다. 자신이 공녀로 바쳐진다는 소리를 듣자 애지중지했던 혼수를 칼로 찢고 패물을 내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시름시름 앓아 예정된 시기보다 1년 늦게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한씨가 명나라로 떠나던 날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녀를 태운 가마가 명나라로 향하자, 이를 본 사람들은"언니가 생매장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번엔 동생이 산송장이 되어 떠나는구나''
라며 비통해했다고 한다. 명나라로 떠나는 한씨의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하지만 그녀는 비극적으로 죽었던 언니와는 달리 남편인 선덕제 사후에도 살아 남았으며, 영종 정통제가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에게 포로로 잡히고(토목의 변) 그의 동생이었던 대종 경태제가 황제가 되면서 폐태자가 되어 버린 정통제의 3살 배기 어린 아들을 거두어 애지중지 보살피며 지냈는데... 8년 후 다시 정통제가 복귀하는데 성공했고(탈문의 변) 특히 그 폐태자가 복권되어 천자인 헌종 성화제로 즉위하면서 황실에 크게 기여한 웃어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녀의 입지 덕분에 오라비 한확 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조카들까지 명나라를 왕래하며 호화롭게 지냈다고 한다. 이 한씨는 성화 연간 19년까지 천수를 누리고, 죽은 후에는 공신부인에 봉해졌다.
이처럼 한확은 누나와 여동생을 희생시키고 조선 정계의 초대형 거물이 되었다. 특히 여동생은 명나라 황제들의 총애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권세도 막강해졌다. 심지어 궁중의 궁녀와 통정하는 죄를 지었다가 발각났는데도 세종조차
"이 사람은 (죄를 지어도) 내가 벌 줄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10] 이미 누나를 공녀로 바치고 돌아왔을 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려 한성판윤에 도관찰사, 장군절제사, 판서, 찬성, 의정에 이르기까지 고위직을 두루 해먹었으며, 간통 혐의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왕이 처벌을 거부해서(...) 아무 탈없이 지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고"누이들을 팔아 권세를 누리는 구나."
라며 욕을 했다고.한확은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한 조선의 대중국 외교통이자 로비스트이기도 했다. 조선을 대표해 황제 알현이나 사신 접대 업무를 수시로 도맡아해서, 환관 출신인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초기의 조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황금과 은의 조공을 면제받기도 했고, 공녀 차출도 없어졌다. 세종과 세조가 한확의 딸들을 며느리로 삼은 것에는 이러한 사실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한 명은 세종의 서자였던 계양군의 아내였고, 다른 한 명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였다. 또한 한확의 3남이었던 한치례(韓致禮)는 세종의 적녀였던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했고 한확의 뒤를 이어 작은 고모 빽으로 중국에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다.
계유정난에 적극 협조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 직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로비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데 성공하고 귀국하던 중 객사했다.[11]
묘지는 능내역인근에 있다.
3. 대중매체
- <조선왕조오백년 - 설중매> 전무송
- <한명회(드라마)> 박웅 : 강직하고 꼿꼿한 인물로 그려지며, 수빈의 아버지인 동시에 정신적인 스승으로 묘사된다.
- <왕과 비> 남일우 : 명나라 황제의 처남인지라 이 작품 최고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수양대군 앞에서도 여유롭게 할 말을 다하는 거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심지어 수양대군 자신의 사돈이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어려운 상대이긴 하다.
- <인수대비(드라마)> 장용 : 본래 인수대비를 명나라 황제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지만 딸이 처음부터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알면서 혼처를 바꿔줄 정도로 딸바보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마냥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주는 반면에 사돈이 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는 등 정치적인 면모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4대부 명문가의 규수로 살면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면 응당 그에 대한 댓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한다며 인수대비가 도원군의 부인이던 시절에 은장도를 주는 등 여러방면의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또한 작중 등장인물들에게 누이를 팔아 명나라의 관직과 부를 축적한 인물로 평가되어 당시 시대상으로 그가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12]
[1] 율리우스력 10월 10일[A] 단, 이 작위는 국구의 자격이 아닌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 자격으로 받은 것이다.[A] [4] 세종의 적차녀 정의공주의 딸인 죽산 안씨와 결혼해 정의공주의 사위가 되었다.[5] 세종의 서차남 계양군의 부인[6] 공녀인 한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 남동생인 한확을 죽이지 않으려고 불문에 부친 것으로 추정된다.[7] 당시 한확의 나이 겨우 15살 또는 18살이었는데 진사시도 볼까말까한 애송이를 천조국 재무부에 5급 부원장으로 꽂은 것이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이등체강이 적용되니 의전상 정3품 하계의 대우를 받는다! 영감 소리만 못들을 뿐이지 그야말로 벼락출세가 따로 없다.[8]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11일 무인 5번째 기사 . "황제가 인종 황제(仁宗皇帝)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려 하니, 한확이 노모(老母)가 집에 있음으로써 사양하여 그만두었다."[9]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한다연'(정유미 役)이 이 여비 한씨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보인다. 한다연 역시 영락제의 후궁이 되어 순장당한다.[10] 궁녀는 국왕과 육체관계가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관념적으로는 모두 왕의 여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니 궁녀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왕의 여자를 건드린 셈이 되니 보통 사람이라면 반역죄인에 준하는 죄인으로 사형을 당할 일이다.[11] 야사에서는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사건으로 원한을 너무 많이 사서 그 원혼들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객사가 좋지 않은 죽음의 형태로 인식된데다가 일반인도 아니고 권신이 객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이런 이야기가 생겨난 듯.[12] 양녕대군에게 뺨맞는 장면이 그 대목을 알려주는 쪽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