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2:37:07

한양 조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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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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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8월 20일 태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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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 趙氏
한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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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서울특별시[1]
시조 조지수(趙之壽)
중시조 조인벽(趙仁璧)
조인규(趙仁珪)
조인옥(趙仁沃)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양평군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충청북도 청주시·음성군
충청남도 공주시·보령시·당진시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전라남도 무안군
경상북도 안동시·영양군
함경남도 북청군
인구 332,580명(2015년)
웹사이트 한양조씨전통대종회

1. 개요2. 조지수 계열
2.1. 역사2.2. 계파2.3. 항렬2.4. 인물
2.4.1. 항렬 미상
3. 조지수의 후손임을 주장하나 계보 고증이 불가한 파
3.1. 조영무 계열
3.1.1. 역사3.1.2. 계파3.1.3. 항렬3.1.4. 인물
3.2. 조논걸 계열3.3. 조방보, 조방좌 형제 계열
4. 종주권 문제5.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를 본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조휘 계열과 조영무 계열, 조논걸(趙論傑) 계열, 조방보(趙邦輔) 계열이 있는데, 모두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2]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한다. 조휘 계열은 조지수와의 관계에 대해 이론이 없으나, 그 밖의 계열은 다른 본관을 쓰다가 나중에 한양으로 바꾼 뒤 조지수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조휘 계열에서 1524년 발간한 족보에 의하면 조지수의 조상은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시에 대대로 세거했다고 한다.

인구가 30만을 넘으나, 이는 조돈의 후손이 아닌, 호적상 한양 조씨인 사람의 수이다. 한양조씨정통대종회에서 편찬한 족보를 보면 조지수 이후의 모든 후손, 즉 족보에 기재된 생존자와 사망자를 모두 포함해서 167,676명이 등재되어있다.

2. 조지수 계열

시조 조지수의 독자 조휘(趙暉, 1232 ~ ?)가 때에 여몽전쟁몽골 제국에 투항하여 이후 아들 조양기(趙良琪), 손자 조림(趙琳), 증손 조소생(趙小生)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세습하였다.

한편 조양기의 둘째 아들이자 조림의 동생 조돈(趙暾, 1308~1380)이 공민왕 때 고려에 귀순하여 쌍성총관부의 수복에 공헌해 멸문을 피했으며 쌍성총관부 멸망 이후 조돈의 장남 조인벽(趙仁璧, 1328~1393) 때에 이르러 조선 건국 이후 한성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한양 조씨는 조씨(趙氏) 본관 중에서도 인구수가 가장 많아서(2015년 기준 332,580명) 전라남도 동부[3]와, 경상남도[4]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골고루 분포돼 있으며, 북한에도 비교적 많이 분포돼 있다.

한양 조씨는 고려 왕족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런 기록이 있는데, 비록 조선왕조실록이 정밀한 점은 많지만 조선 건국 이전의 내용은 첨삭된 점이 많아서 자세한 점을 알 수 없다. 저 내용에도 이평(李平)[5]의 어머니 조씨가 고려 왕족이라는 기록 외엔 단서가 없다.

2.1. 역사

한양 조씨의 초기 역사와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하는데 다음과 같다.
  • 고려왕으로부터 당시 개발 중이던 남경에 식읍을 받고 정착하였으며[6] 받은 땅이름을 한양(漢陽)으로 하고 본관을 삼았다가 2세 조휘 때에 지방관과 갈등이 생겨 식솔을 끌고 문주 용진 땅으로 옮겼다. (고려사 권130 열전 제43권 반역 조휘 등)
  • 함경남도 용진 땅에 정착하였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한성부로 건너간 4세 용성부원군 조돈의 아들, 양렬공 조인벽을 비롯한 5세 때에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으며 5세에 이르러 한성부의 고려 때 명칭인 한양으로 본관을 삼았다. (한양조씨대보, 한양조씨세보 일부)
  • 도조의 후처 조씨[7]는 2대 총관 조양기의 딸인데, 실록에 고려 왕족이라 기재되어있다. (태조실록 제1권 총서 21번째 기사)

1258년, 몽골의 제 6차 고려 침입군이 화주까지 침입하자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은 성과 마을을 버리고 백성을 강제로 죽도섬에 들어가게 하여 농성한다. 농성의 시기가 길어져 굶어 죽는 백성들이 생기자 조휘는 정주(定州) 출신 탁청(卓靑)과 모의하여 사병을 이끌고 신집평,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와 경별초의 군사들을 죽이고 고성을 점령하여 강원도 등주(登州), 문주(文州) 등 여러 성과 의주 이안사 휘하의 전주이씨 세력(조선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를 회유하여 몽골에 철령 이북을 헌상하는 형식을 취해 투항한다. 이에 몽골제국의 칸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삼고 탁청이안사를 천호로 임명한다.

1259년, 조휘는 등주와 화주의 사람들과 함께 몽고병을 인도하여 한계성(寒溪城, 지금의 인제군(麟蹄) 모처)을 치려고 했으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거느리고 나온 야별초(夜別抄)에게 패했다. 고려왕이 몽고군에게 보낸 사자(使者) 김기성 일행을 보룡역에서 습격하여 몽골에 보내는 물자를 취하고 동진(東眞=동하)의 군사와 함께 춘주(春州)의 천곡촌(泉谷村)에서 취숙하다 몽골 장군 자랄타이의 사신을 자처하던 군인들인 신의군(神義軍)에게 공격받아 다시 빼앗겼다. 양주(襄州)에서 난민들이 요청하자 군사 400을 내주어 양주지주사(知州事)를 잡도록 하기도 했다.

3세인 2대 총관 조양기는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하여 13살에 아버지로부터 화주 이북의 12개 씨족을 받아 잘 다스렸다. 21세에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여했으며 문중의 기록에는 연합군의 부원수로 기록되어 현재도 부원수(副元帥)로 추존하나 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문중의 기록에 따르면 1281년 2차 침입 당시 훈둔(忻都, 忽敦)을 도원수, 김방경을 원수로 하여 조양기는 2만의 병력을 받아 부원수로 출항했으며 상륙 직전 바다의 상황이 좋지 않아 서둘러 병력을 상륙시키던 사이 주력군인 훈둔과 김방경의 군세가 공격을 받아 전멸하자 생존자를 구원했고 자신의 병력은 보존하여 원으로 돌려보낸다. 이에 원 세조 쿠빌라이는 조양기를 대도(大都)에 불러 칭찬하고 금과 은으로 수놓은 금포 한 벌과 옥으로 장식한 혁대를 하사했다. 이후 한양 조씨의 장손들은 조정에 나아갈 때 이 금포와 옥대를 입지는 못하더라도 혼인 때에는 입었으며 금포는 닳아 사라졌으나 옥대는 현존한다.[8]

딸 조씨를 조선도조 이춘(이성계의 조부)의 계첩으로 보내고 친척(?)[9] 선수천호의 딸 조씨를 익조 이자춘에게 시집보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는데
  • 이춘의 부인인 조씨는 이춘의 첫 부인이며 주군인 총관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계실이며 이후에 혼인한 이자춘의 어머니 경순왕후 박씨가 이춘의 정실로 기록되어있다.
  • 이춘의 부인 조씨는 실록에 고려 왕족이라 기록되어있다.

이는 여말선초 쌍성총관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조선 초기 실록 차원으로 진행되었던 해동육룡 신격화와 정통성 확보 과정으로 인해 조정 및 첨삭된 것으로 보인다.

4세 3대 총관 조림은 문중의 기록을 따를 때 1306년 출생해 22세에 총관직을 물려받고 1354년 11월 1일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조림의 활동시기 약 30년에 대한 기록이 없고 동생 조돈의 세력이 강했던 것으로 볼 때 세습 후 영향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5세 4대 총관 조소생은 32세인 1354년 (공민왕 3년)에 총관직을 물려받아 이 때 부터 쌍성총관부는 조소생의 삼촌 조돈세력과 이자춘을 위시한 전주이씨 세력의 대두로 인해 꺾이기 시작한다. 2대 총관 조양기의 차남이자 조소생의 삼촌인 조돈충숙왕 때 고려에서 도망 온 도민들을 여러 차례 쇄환하여 고려정부로부터 감문위낭장(監門衛郎將)을 받고 이어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제수되는 등 일찍부터 고려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자춘은 천호자리를 놓고 한양조씨의 소생인 이복동생과 대결해 승리하여 쌍성총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원말명초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충정왕 시기부터 공민왕에게 접근하였다.[10]

1355년, 공민왕이 쌍성수복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고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며 회유하자 이자춘 부자가 투항하였으며 조소생은 삼촌 조돈이 따라 투항할 것이 두려워 그를 연금하였다. 이듬해 밀직부사 유인우가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되어 침입하자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 또한 거병하여 침입했고 조돈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아들인 조인벽 사형제를 보내 쌍성인을 회유하고 투항하게 하자 조소생은 천호 탁도경과 함께 고려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여진으로 후퇴한다. 이후 조돈은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고 이듬해 태복경(太僕卿)이 되었으며 조소생을 회유하기 위해 수차례 여진으로 파견되었으나 성과는 없었고 1359년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자 안우(安祐)의 휘하에서 지병마사로 종군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사농시판사(司農寺判事)를 거쳐 1361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다. 이 해 홍건적의 재침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남행하게 되자 목인길(睦仁吉)과 함께 복주(福州)의 군사를 나누어 행궁숙위의 책임을 맡았다.

1362년, 조소생이 만주와 심양에서 세력을 두고 있던 원의 나하추의 힘을 얻어 삼살과 홀면을 침공하자 4월에 이성계가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고 나하추군은 7월에 출격하여 홍원의 달단동에서 크게 싸우고 물러나는 이성계를 쫓아 평양 일대에서 패퇴시키고 함흥평야까지 쫓았으나 이성계의 매복에 의해 격파당하고(함흥평야의 대회전) 결국 조소생은 같은해 여진의 다루가치 소음산(所音山)과 총관 부카(不花)[11]에 의해 일가 50명, 탁도경과 함께 살해당했다. 조소생의 자손은 전하지 않으며 그 이름은 족보에서 제명되었다. 1524년 간행된 한양조씨 가정보(嘉靖譜)를 보면 “양렬공(襄烈公) 이하는 자세하고, 용성군(龍城君) 이상은 간략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양 조씨들은 조소생 이전의 역사를 흑역사로 취급하였다.

한 편 조돈은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1등공신에 녹명되었으며, 해주목사·예의판서(禮儀判書)·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 등을 지내고, 1372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지고 고향인 쌍성으로 돌아가 함경도 용진에서 별세하였으니 모든 한양조씨의 공통조상이다.

이후 한양조씨는 조돈의 장남 용성부원군 조인벽을 중심으로 조선 개국 이후 차차 공을 세워 한성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세거하였으며 일부는 조돈처럼 옛 쌍성총관부의 땅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대체로 경기지방에 정착하였으나 지방에 내려가 은거하거나 사화나 시국에 휘말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충정공 조인옥은 충북 금왕에 은거하여 지금의 집성촌을 이루었고 기묘사화 때는 화를 직면한 문정공 조광조가 종친이며 그가 탄핵받은 명분이 대역(大逆)이었기 때문에 많은 종친들이 지방으로 피신하였는데[12] 경북 안동시 임하면-길안면에는 먼 옛날 한양조씨들이 낙동강을 타고 도망오자 지역의 여러 김씨 문중들이 의논한 결과 계곡 깊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관군으로부터 지켜줬다는 구전이 전한다.

2.2. 계파

굵은 글씨는 족보상으로 분류하는 파다. 실생활에서는 6세 기준으로 분류한다.
4세 5세 6세 7세
용성군
조돈(趙暾)
양렬공계
조인벽(趙仁璧)
양절공파
조온(趙溫)
한풍군파[13]
조완(趙琓)
[14]
도제공파
조하(趙河)
참판공파
조흥(趙興)
고사공파
조육(趙育)
[15]
양경공파
조연(趙涓)
총제공파
조모(趙慕)
돈녕공파
조자(趙慈)
공안공파
조혜(趙惠)
병참공파
조련(趙憐)
[16]
가천재공파
조사(趙師)
현령공파
조맹발(趙孟發)
현감공파
조중발(趙仲發)
검한성공계
조인규(趙仁珪)
부사공파
조순(趙純)
사정공파
조근(趙瑾)
충정공계
조인옥(趙仁沃)
절효공파
조뢰(趙賚)
파서공파
조순생(趙順生)
봉례공파
조관생(趙觀生)
사직공파
조효생(趙孝生)
정랑공파
조덕생(趙德生)
참의공파
조재(趙䝴)
호의공파
조욱생(趙旭生)
사평공파
조갱(趙賡)
현감공파
조서(趙瑞)
판사공파
조관(趙貫)
참의공파
조숙생(趙肅生)
대호군공파
조충서(趙冲諝)

2.3. 항렬

대동 항렬 주실 조씨 항렬
22세 가운데 종(鍾) / 재(載) 가운데 병(秉)
23세 원(元) / 윤(允) 용(容)
24세 가운데 병(炳) / 병(昺) 기(基)
25세 행(行) / 형(衡) 석(錫) / 호(鎬)
26세 가운데 성(誠) / 성(成) 영(泳) / 수(洙) / 해(海)
27세 희(熙) / 기(紀) 동(東)[17] / 식(植)
28세 가운데 경(慶) / 용(庸) 렬(烈) / 섭(燮) / 휴(烋)
29세 신(新) / 장(章) 균(均) / 재(在) / 배(培)
30세 가운데 정(廷) / 성(聖) 현(鉉) / 옥(鈺) / 종(鐘)
31세 규(葵) / 규(揆) 심(瀋) / 태(泰) / 홍(泓)
32세 가운데 학(學) / 존(存) / 후(厚)
33세 서(書) / 숙(肅) / 용(用)
34세 가운데 연(演) / 인(寅) / 황(璜)
35세 경(卿) / 소(邵) / 영(迎)
36세 가운데 진(震) / 진(振) / 양(養)
37세 범(範) / 룡(龍) / 기(夔)
38세 가운데 년(年) / 남(南) / 준(準)
39세 동(東) / 수(洙) / 래(來)
40세 가운데 중(重) / 련(連) / 창(暢)
41세 필(弼) / 존(尊) / 유(猷)
42세 가운데 기(璣) / 의(義) / 무(武)
43세 하(夏) / 원(遠) / 준(俊)

2.4. 인물

이름 생몰년도 비고
근대 이전
조휘(趙暉) 1232 ~ ? 쌍성총관
조소생(趙小生) ? ~ 1362 쌍성총관
조영무(趙英茂) 1338 ~ 1414 우의정 조선 전기의 문신.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고사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22세손
조종승(趙鍾勝) 1903 ~ 1970 병참공파 국회의원
조종호(趙鍾昊) 1921 ~ 2010 병참공파 국회의원
23세손
조인원(趙仁元) 1864 ~ 1931 파서공파 독립운동가
조인원(趙仁元) 1875 ~ 1950 한풍공파 독립운동가
조방원(趙邦元) 1927 ~ 2014 (양절공파) 미술가
24세손
조병옥(趙炳玉) 1894 ~ 1960 파서공파 국회의원
조병화(趙炳華) 1921 ~ 2003 한풍군파 시인
25세손
조시형(趙始衡) 1927 ~ 1995 육군 소장, 국회의원, 농림부장관
조세형(趙世衡) 1931 ~ 2009 한풍군파 국회의원
조윤형(趙尹衡) 1932 ~ 1996 파서공파 국회의원
조승형(趙昇衡) 1934 ~ 국회의원
조순형(趙舜衡) 1935 ~ 파서공파 국회의원
조찬형(趙贊衡) 1938 ~ 국회의원
조복형(趙福衡) 1946 ~ 2019 성우
조길형(趙吉衡) 1957 ~ 영등포구청장
조명균(趙明均) 1957 ~ 통일부장관, 족보명 명형(明衡)
조용형(趙容衡) 1983 ~ 축구선수
조수행(趙修行) 1993 ~ 야구선수
26세손
조헌영(趙憲泳) 1901 ~ 1988 병참공파 국회의원
조운해(趙雲海) 1925 ~ 2019 병참공파 교수, 고려병원 이사장, 범 삼성가
조근해(趙根海) 1937 ~ 1994 병참공파 공군 대장, 공군참모총장
조성태(趙成台) 1942 ~ (양경공파) 육군 대장, 국방부장관
조응천(趙應天) 1962 ~ 참판공파 검사, 국회의원, 공무원
조성민(趙成珉) 1973 ~ 2013 한풍군파 야구선수
조성진(趙成珍) 1994 ~ 피아니스트
27세손
조기담(趙紀淡) 1893 ~ 1979 판사공파 독립운동가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병참공파 시인, 교수
조동걸(趙東杰) 1932 ~ 2017 병참공파 교수, 역사학자
조준희(趙峻熙) 1969 ~ 고사공파 기업인,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회장
28세손
조태열(趙兌烈) 1955 ~ 병참공파 외교부 제2차관, 주유엔대사
29세손
조명남(趙明男) 1943 ~ 판사공파 성우

2.4.1. 항렬 미상

3. 조지수의 후손임을 주장하나 계보 고증이 불가한 파

3.1. 조영무 계열

조영무(趙英武)의 원래 본관은 영흥이었다. 번상군(番上軍) 출신[22]이었다가 조선 건국과 이후의 정변들을 거치며 공신이 되어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면서, 봉호(封號)를 받은 사람은 본관을 봉지(封地)에 따른다는 원칙에 따라 아들 세대부터 본관을 한양으로 바꿔 쓰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영무 졸기(卒記)에는 아버지의 함자와 본관이 기록되어있지 않고 조영무의 윗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일단 이 일파는 자신들의 계보를 지수-인재-순후-세진-영무로 설정해놓고 있다.

3.1.1. 역사

관북읍지(關北邑誌)에 의하면 조영무의 증조 조인재(趙麟才) 대에 이미 대대로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였다가, 조영무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영흥 조씨 기미보에 의하면 함경남도 영흥 땅에 정착하여 본래 영흥을 본관으로 삼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태종 이방원이 어린 시절 영흥에서 자랄 때부터의 친구이자 가신으로 1차, 2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정몽주를 척살한 바 있는 5세 한산백 충무공 조영무 때에 이르러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으며 조영무의 아들들인 6세 때에 한양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3.1.2. 계파

5세 6세 7세
충무공
조영무(趙英武)
남원공파
조전(趙琠)
자평공파
조완규(趙完珪)
판관공파
조완주(趙完珠)
참판공파
조윤(趙倫)
월계당파
조종경(趙宗敬)
백당공파
조수경(趙守敬)
세마공파
조이경(趙以敬)

3.1.3. 항렬

  • 조영무를 5세로 한다.
21세 가운데 천(天)
22세 선(善)
23세 가운데 태(泰)
24세 동(東)
25세 가운데 용(容)
26세 원(遠)
27세 가운데 종(鍾)
28세 한(漢)
29세 가운데 수(秀)
30세 희(熙)
31세 가운데 규(圭)
32세 현(鉉)
33세 가운데 영(泳)
34세 식(植)
35세 가운데 병(炳)
36세 교(敎)
37세 가운데 석(錫)
38세 순(淳)
39세 가운데 춘(椿)
40세 욱(煜)

3.1.4. 인물

  • 조영무(趙英茂)
  • 조맹선(趙孟善) : 22세손, 독립운동가
  • 조창선(趙昌善) : 22세손, 독립운동가
  • 조용원(趙容瑗) : 25세손, 배우
  • 조응천(趙應天) : 참판공파 26세손, 국회의원(20대, 21대),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3.2. 조논걸 계열

1651년 한양 조씨 족보를 편찬할 때 철원의 조씨 일족들이 자신들이 조의(趙儀)[23]의 후손이니 족보에 넣어달라며 보내온 신청서는 조의의 아들로 조관(趙灌)과 조옹(趙澭), 사위로는 정잠(鄭箴), 황한우(黃旱雨)가 있고, 조옹의 아들로 조논걸이 있었다. 조논걸(趙論傑, 1530(가정 경인) ~ 1610(만력 경술))은 철원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고 벼슬을 했다는 기록도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한양 조씨 기존의 족보에 조의의 자녀로 두 딸[24]만 있었기에 이 신청서는 기존의 기록과 맞지 않았고, 이들을 족보에 넣어주긴 하되 별보(別譜)에 넣었다. 한편 조논걸 계열이 조영무 계열과 합의를 마친 덕에, 조영무 계열이 편찬한 족보에서 조논걸이 조의의 손자로 등재되어있다.

3.3. 조방보, 조방좌 형제 계열

조방보(趙邦輔), 조방좌(趙邦佐) 형제는 후손은 제주도에 세거하고 있다. 이들 형제 스스로 말하길 조상을 알 수 없으나 전라북도 남원에서 왔다 하여 후손들이 남원 조씨로 있다가 1960년대 방좌, 방보 형제가 한양 조씨 11세였다고 주장하며 본관을 한양으로 바꿨다. 이 당시는 조휘 계열과 조영무 계열이 우연히 동시에 족보를 편찬하고 있었는데, 조방보 계열이 조영무 계열에 자신들을 족보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자평공 조완규의 장손 조윤진은 아들을 두지 못해 후사가 끊겼는데, 조방보 계열이 자신들이 조윤진의 후손임을 주장한 것이다. 조영무 계열에서는 그렇게 되면 종갓집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집안에 넘기게 되니 거절하고, 조윤진의 둘째 숙부(조완규의 삼남)인 조숙의 후손이 끊긴 것으로 기록된 것을 고쳐서 조방보 계열을 조숙의 후손으로 넣어주는 것으로 타협하고 완의문(完議文)을 작성했으나 조영무 계열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족보 발간을 마쳤다.
  • 조봉호(趙鳳鎬) : 22세손, 독립운동가

4. 종주권 문제

한양 조씨의 대종회는 '한양조씨정통대종회'[25]와 '한양조씨대종회[조씨문중]'[26]로 나뉘어져 있다. ‘정통대종회’는 조휘를 조지수의 독자로 보고 있으며 ‘대종회’는 조인재를 장자, 조휘를 차자로 보고 있다. [종통수호]조영무(趙英茂) 가문은 우리의 일족(一族)이 아니다!한양조씨유래

‘정통대종회’는 조지수의 증손 조돈의 장남 조인벽의 후손인 양렬공계(襄列公系)를 대종으로 3남 조인규의 후손인 검한성공계(檢漢城公系), 4남 조인옥의 후손인 충정공계(忠靖公系)로 크게 3대 계파를 두고 있으며 그 아래로 세세하게 19지파를 두고 있다. 이는 위 2.2. 문단에서 도표로 그린 것과 같다.
‘대종회’는 크게 판도공파와 총관공파, 작게는 판도공파의 후손으로 자평공파, 판관공파, 월계당파, 백당공파, 세마공파로 나누고, 총관공파의 후손으로 양절공파, 양경공파, 가천재공파, 부사공파, 충정공파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조논걸 일파를 양절공파의 장손으로 설정하고 있다.[27]

현재 양 대종회는 한양 조씨의 종주권을 두고 양립 중인데 조선시대에 간행된 한양조씨의 여러 족보들을 정리한 한양조씨세보의 서문들을 살펴보면 15세기 무렵 한성부에 세거하던 조씨들을 계보로 정리하고자하는 시도가 있었으며 영흥의 조영무(趙英武) 일파, 철원의 조논걸(趙論傑) 일파, 제주도의 조방보(趙邦輔) 일파 등 셋 이상의 종파가 한양 조씨에 편입되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고 이 중 한 종파인 영흥 조씨(조영무의 후손)는 한양 조씨의 충무공파(조영무의 시호)로 편입되었다. 이후 시대를 거치는 동안 조지수는 본래 함경남도 영흥군(현 금야군) 사람이며 조지수의 장자가 조인재(麟才)라는 기록이 포함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총관공계와 판도공계 양측이 종주권을 두고 소송갈등이 시작되어 1922년 경성지방법원에 의해 판도공계가 한양 조씨가 아니라는 판결이 있었음에도 광복 이후 다시 갈등을 이어가다가 1997년 판도공계 자평공파, 남원공파를 대종으로 하는 '한양조씨대종회'가 결성됨으로써 두 개의 대종회가 생기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양조씨정통대종회는, 조영무 일파가 한양에 연고를 가지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바꾸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왜 그것을 빌미로 자기들과 같은 씨족이라 주장하냐고 한다.

판도공계의 실질적인 중시조는 충무공 조영무로 고려 말기, 조선 초기에 위세가 대단히 컸으나 신분이 미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시기 활동하던 친척 양렬공 조인벽 삼형제와 어떠한 교류도 없었으며 그들의 아들들도 조선 초기 활동 범위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접점이 없다. 조영무는 활동 초반에는 각종 기록에 본관란이 공란으로 되어있고, 그 장남 조서는 젊을 적에는 본관이 영흥으로 기록되어있다가 사망할 때는 한양으로 바뀌어있고, 조영무의 3대조인 판도공 조인재(麟才)부터 조순후(珣厚), 조세진(世珍) 3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3인의 관직 또한 조영무가 역임했던 관직과 작위를 시대 순으로 나열한 것이고 현존하는 묘소는 1901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존여부에 의문이 많다.

현재 대종회로써의 대외적인 활동은 한양조씨대종회[조씨문중] 쪽이 더 많으며 한국조씨연합회, 세계조족간친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5. 여담

조선왕조실록에 풍양 조씨 시조 조맹이 한양 조씨 시조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이 시조의 거주지 개념이 아니라 지금의 본적과 유사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본관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내가 원래 어디 김씨인데 여기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여기 김씨로 바꾸겠다가 일반적인 인식이었다.[28] 서울에서 대대로 살던 풍양 조씨 일족이 있었고,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이 일족을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한양 조씨다'라고 인식하고 이 일족의 맨 윗대 조상을 한양 조씨의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나무위키 문서에도 풍양 조씨와 한양 조씨의 인물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8번 후보자인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조광조, 윤석열 검찰총장을 윤임·윤원형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광조의 문중이자 보수우익 성향[29]인 한양조씨대종회에서 "정암 선조와 우리 한양 조씨 문중과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조국을 윤임, 윤원형에, 윤석열을 정암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비판했다. 사실 조국은 아예 창녕 조씨(曺)로 한자마저 다르다. # 한양 조씨 대종회

동아일보 2020년 03월 24일 [김순덕의 도발]에서 '조국·조광조가 개혁을 했다고?'라는 칼럼에서 조국을 '정암 선생'에 빗대어 한양 조씨 문중의 항의를 받고 사과를 하였고 결국, 기사 아래에 [반론 보도문-알려왔습니다]를 게재하는 일도 있었다. 한양조씨대종회 물론 조상의 명예에 집착하는 건 일반인들 눈에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원래 종친회 영감들이 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

네이버 웹툰 조선홍보대행사 조대박에 등장하는 조대박, 조팔선은 한양 조씨이다.
[1] 옛날 한양은 서울 강북에 번창하였으니 관향이 서울 강북이라는 것이 정확하다.[2] 몽고의 압제하에서 고려 관제가 격하되어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이 첨의부로 통합⋅개편되었던 시기로 추정된다.[3] 전라남도 서부에는 많다.[4] 여기는 함안 조씨가 많다.[5] 몽골식 이름이 이노하이(李那海)[6] 당시의 남경, 지금의 서울 한강 이북은 거란족을 중심으로 투항자와 귀화인들을 정착시켜 개척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7] 위에 언급한 이평(이노하이)의 생모[8] 옥대는 800년 동안 전해지고 있는데 1430년 3월에 종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구슬(璧) 반쪽을 유실했으나 1810년대에 종친 하나가 우연히 잃어버린 구슬 반쪽을 찾아 340년 만에 온전한 형태를 이루었으며 이후 용인 종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한강을 건너지 않게 한다.'는 규칙을 두고 보물로 전하다가 1864년 흥선대원군이 빌려가 14년동안 신정왕후 조씨가 소장하다가 돌려받았으며 1882년 다시 빌려가 흥선대원군의 사망 후 부장품으로 묻힌 것을 문중의 끊임 없는 반환 요구 끝에 1907년 10월 23일 흥선대원군의 무덤을 개장하던 날에 돌려받았다.[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혜왕후의 아버지가 원래 조씨였다가 최씨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 말의 근거를 알 수 없다. 태조대왕팔고조도에도 의혜왕후 최씨의 부계 조상은 하나같이 영흥 최씨로 기록되어있다. 조씨에서 최씨로 바꾼 게 맞다 쳐도, 그 조씨가 조양기와 같은 집안인지 알 수 없다.[10] 이 시기 공민왕은 의주에 칩거하고 있었다.[11] 심왕 왕토크토아부카로 보인다.[12] 조광조는 사림파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한양 조씨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많은 가문들이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사례 중 하나로 그의 제자 중 하나였던 기준도 같이 사형당했고 그의 가문인 행주 기씨 또한 대거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13] 참고로 현주공파는 한풍군파에 속한 소종파이다.[14] 형인 한풍군 조의(儀)가 딸만 둘 남기고 아들 없이 사망하여 한풍군 봉호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15] 조광조의 증조부[16] 병참공파 후손 중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세거하는 일파만을 따로 주실 조씨라고 칭한다.[17] 가운데[18] 양절공파[19] 양경공파[20] 양절공파[21] 항렬상 26세손으로 추정된다. 나혼자산다에 선산에 비석이 등장했는데 할아버지의 성함이 국, 아버지의 성함이 기으로 모두 항렬자가 들어가 있다.[22] 태조실록에서 이성계가 한 말로 기록됨.[23] 조의는 한풍군 작위를 받았으나 아들이 없어 조의가 사망한 후 한풍군을 아우 조완이 승습했다. 한편 조논걸의 후손은 조의가 한풍군을 승습했다는 주장을 하지 않고, 아예 조완이 처음 봉군되었다고 한다.[24] 장녀는 김계덕(金季德), 차녀는 이사림(李斯林)과 혼인했다.[25] 한양조씨정통대종회.[26] 한양조씨대종회.[27] 정통대종회 입장에서는 한양조씨는 모두 조휘의 후손이므로 조휘 계열을 따로 나눌 필요가 없으니 총관공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28] 조선시대 이렇게 생긴 본관은 대한 제국 시기 원래의 본관으로 돌리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거의 없어졌다. 고려시대나 그 이전에 생긴 본관은 돌아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신라의 왕족인 박씨와 김씨가 본관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고려시대에 이미 많은 본관이 생겼기 때문이다.[29] 사실 문중을 막론하고 종친회들은 고령층 위주라 통상적으로 보수적이긴 하다. 한양 조씨가 특별히 더 우파적이고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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