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7 12:21:42

위(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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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魏 (나라이름 위)3. 韋 (가죽 위)4. 衛5. 유명인

1. 개요

한국 성씨중 하나.

2. 魏 (나라이름 위)

시조는 위경(魏鏡). 본관은 장흥 단본이며, 인구는 2015년 기준 31,342명이다. 인구 분포는 전라남도경상남도 지역에 압도적으로 많으며, 거의 8할이 전남/광주 혹은 부산/경남 사람이다.



# 장흥위씨의 연원과 현황

우리나라 성씨의 연원은 신라 왕계를 이은 박석김(朴昔金)의 3성과 6부촌장 성인 이(李, 反梁部), 정(鄭, 沙梁部), 손(孫, 漸梁部) 최(崔, 本彼部), 배(裵,漢岐部), 설(薛, 習比部) 등 6성에서 시작된다. 물론 백제, 고구려국에서도 성씨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쉽게도 현존 성으로 남아있지 않아, 우리나라 성씨의 출발은 신라 때부터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씨들은 당연히 당대 귀족신분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거주, 변방의 장흥지역에는 성씨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귀화씨족으로 단일본 성씨인 장흥 위(魏)씨가 신라 말에 건너온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후손들이 신라 말부터 장흥지역에서 토호세력으로서 기세(起世), 성세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씨의 시조는 중국인 위경(魏鏡)이다. 그는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이었다. 위경의 동래설은 4가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라 제27대 선덕왕(재위 632∼647)이 638년 당나라 태종(재위 627∼649)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태종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 魏·房·洪·陸·奇·殷·吉·奉) 중 한 사람으로 신라국으로 건너왔다는 설과 당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신라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장흥위씨 측에서는 최근 위경의 8학사 동래설을 공인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경 신라 입국의 시기도 당태종 12년, 선덕여왕 7년인 638년이 된다.

위경(위경(魏鏡)은 방(房)·홍(洪)·목(睦)·기(奇)·殷·길(吉)·봉(奉)씨와 더불어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신서면(西新面) 상안리(尙安里) 고당성(古唐城)·익주(益州)·남양(南陽)에 입국(入國)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위경은 신라국으로부터 아찬(阿 )벼슬까지 제수받으며 문화사절(文化使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충열왕때 위경 즉 위씨의 시조공을 회주군(懷州君)으로 봉(封)하였으며, 회주(懷州)는 지금의 장흥(長興)을 이른다.

광복후(光復後) 서기(西紀) 1972년에 팔학사의 입국(入國) 상륙지(上陸地)인 당성(唐城)을 지방문화사적(史蹟) 217호로 지정(指定)됨으로써 팔면시비(八面詩碑)를 세우는 한편 팔학사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제향(祭享)키로 한 바 있다.



회주군 이후의 위씨 세계는 고려 초에 '대각(大覺)한 분으로 관(官)은 시중(侍中)이었던(大覺官侍中)' 창주(魏菖珠)를 1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여기서 위씨들은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시조인 위경과 1세조 위창주 사이의 300여년을 실계(失系)로 인정하고 있다. 3백년 실계로 인해 위씨 세계상에는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위씨 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몇 사람 나온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진성여왕 때 국내 문학사상 최초의 향가집(鄕歌集)인『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위홍(魏弘 ?∼888))을 비롯 828년(흥덕왕 3) 약관의 나이로 고성태수가 되고 중원대윤(中原大尹)·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던 위흔(魏昕 808 - 85), 그리고 신라말 사람으로 경주의 주장(州長)이었던 위영(魏英)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한때 위씨측에서도 이들을 위씨 방조(傍祖)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본래 성씨가 김씨들로 밝혀지면서 장흥위씨와 관련 없는 인물인 것으로 정리돼 가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 은 신라 하대 장흥지역에서 천관산 일대의 화엄신앙이나 보림사 등 불교세력이나 당시 청해진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의 후원으로 곧장 장흥임씨 등을 거론하는데, 장흥임씨의 경우, 시조로 알려진 임호(任灝)가 대체로 고려 초기 정종(재위 946∼949)연간에 우리나라에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신라 하대에 장흥지역의 토호세력으로 거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장흥 위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위경이 철저한 신분사회로 6두품 귀족들만 오를 수 있는 아찬에 오르는 등 경주에서 인정받는 '귀화 귀족으로 행세'했었을 것으로 미루어, 그들 후손들도 경주에서 '귀화 귀족 세력'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씨족보등 관련 문헌 등에, 위경이 아찬을 역임하고 '회주(懷州)의 군(君)으로' 봉해져 위씨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여 장흥에서 정착하였다'는 식으로 설명되면서 신라 말부터 위씨들이 장흥에서 살았을 것으로 알아왔는데, 이것은 후에 부회되는 과정에서의 오기로 파악된다.

'장흥'이라는 지명도 고려 인종대 이후에 나타난 지명이거니와 특히 장흥과 관련된 '회주'는 고려 원종 때(1265년 원종 6)에 장흥부가 '회주목'으로 승격되면서 나타난 지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경이 '회주군(懷州君)'으로 봉해졌다면, 아마 고려조 원종대(재위 1259∼1274)이거나 원종 다음 왕인 충렬왕(재위 1274∼1308)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위씨 측에서는 고려 충렬왕때 회주군으로 추봉된 것으로 로 정리하고 있다.

신라말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최치원도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듯이, 더러 사후에 추증·추봉된 예가 많았다. 위경의 '회주군 추봉'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충렬왕때는 장흥위씨와 관련된 사람으로 속명이 위원개(魏元凱)인 원감국사가 있었다.

그는 1284년(충렬왕 10)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한림(翰林)이 된 후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승려가 되어 조계사(曹溪寺)의 제6세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원감국사는 후에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았을 만큼 대덕의 위명을 떨친 인물이어서 그의 국가에 대한 공훈에 대한 보답으로 장흥위씨 시조인 위경에 대해 '회주군'을 추종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흥 위씨들이 언제 장흥지역에서 기세(起世), 계대를 이어왔을까. 시조 위경이 신라국에 입국하면서 바로 장흥지역에서 기세하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물론 행주은씨의 시조로 위경과 같은 8학사의 한 분으로 알려졌던 은홍열(殷洪悅)이 은퇴 후 행주에 정착한 것처럼, 위경도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장흥지역에 정착했을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위경이 아찬에 오르면서 '귀화 귀족'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위경 이후의 위씨들은 얼마간 경주에서 뿌리를 내렸을 가능성이 크고, 몇 계대를 지나면서 성씨 일부가 장흥으로 내려와 토착세력으로서 기세했거나 또는 신라 말 극심했던 왕족간의 암투 등으로 어지러웠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변방 중의 변방인 장흥지역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장흥위씨 측에서는, 위씨들이 장흥지역에 거주하게 된 때를 고려초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1세조인 위창주가 대각(大覺)한 분으로 불교와 관련이 깊었을 것으로 여겨, 당대에 천관산 지역과 보림사를 중심으로 불교가 크게 융성했을 장흥으로 입지해,위씨의 계대를 이어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장흥도호부 성씨조에는 수령현의 성씨가 위(魏)·박(朴)·조(曺)·함(咸)으로 나와 고려시대 장흥에서 위씨는 토착력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시대가 개막되면서 장흥위씨는 현달하게 된다. 고려초 1세조인 위창주 이후 5세조 위계정대까지 중앙관료에 진출한 인물들이 『고려사』 등에 여럿 나온다. 『고려사』에 나오는 장흥위씨의 최초의 인물은 위덕유(魏德柔)로, 980년(성종) 병부낭중(정5품)으로 중앙관직에 진출, 송나라에 가는 사신에 낀다. 고려개국 70여년이 지난 성종 때의 일이다.

위씨 세계는 중조 1세조 창주 이후 2세조는 달(澾. 門下承宣 監察御使), 3세조는 원보(原補. 中郞將), 4세조는 기로(耆老. 平章事), 5세조가 위계정이다. 3세조 위원보(魏原補)는 관직에 나아가 벼술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또 4세조인 평장사 기로((耆老)는 1018년(현종 19년) 때 등과했다. 등과 후 상서문하시랑동평장사(尙書門下侍郞同平章事), 문하시중태보(門下侍中太保)에 오른 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1품)에 이르렀다.

위계정 이후 6세조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소(魏紹)였고 7세조는 원개(元凱) 원감국사로 이어지며고 원개 동생으로는 문개(文凱)와 신개(信凱)가 있었는데, 신개도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원개·문개에 이어 과거에서 급제하여, 3형제가 살던 장흥 땅에 장원봉(壯元峰), 거발봉(居末峰)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생겨난다.

7세조 이후에는 8세 극겸(克謙)-9세 경효(景孝)-10세 온(溫)-11세 인감(仁鑑) 등을 거쳐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 귀양를 간 판공사 위충(魏沖)이 원개 8세 종손이자 14세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같은 위씨세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위씨들이 『동국통감』『고려사』등 사기에 더러 나온다. 위씨 측에서는 이분들에 대해 위씨의 방조(傍組)로 족보의 누락, 또는 실계로 인정하고 있다.

『고려사』등에 나오는 위씨 최초의 인물은 위덕유(魏德柔)로, 980년 병부낭중(정5품)으로 중앙관직에 진출, 989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송제로부터 광록대부(光綠大夫)를 제수받는다. 고려개국 70여년이 지난 성종 때의 일이다.

위덕유 다음 인물은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魏從)으로 1011년(현종 2년) '강조의 정변'으로 유배된다. 강조의 정변은 1009년(고려 목종 12), 서북면도순검사인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이었다. 곧 이어 1049년(문종)에는 병부상서인 위숭(魏崇)이 호부상서를 겸임(정 3품)하게 되며, 1081년(문종)에는 우보궐(右補闕) 위강(魏絳)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1135년(인종)에는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이 서해에서 병선 50척을 거느리고 묘청의 토벌에 나선다. 또 1200년(신종)에는 위돈겸(魏敦謙)이 경주부유수(慶州副留守)로 제수되며, 1212년(강종)에는 위대여(魏大與)가 십운시(十韻詩)에 선정되며, 1250년에는 낭장(郎將) 위공취가 몽고에 파견된다.

또 1260년(원종)에는 위문경(魏文卿) 형제가 장원에 급제한 사실이 나오지만, 문경은 원감국사 원개의 동생인 문개(文凱)의 오기인 듯 여겨진다. 문경이 아닌 문개는 이후 부역·병역기피자를 잡아오는 일을 맡기도 하며(1269년), 1271년에는 평양으로 도망간 백성을 검거하는 일등을 맡으며 국자박사(國子博士), 중랑장(中郞將)에 이른다. 1359년에는 고성현령 위양용(魏良用)이 적과 싸워 등용된다.

이본(二本)이 아닌 단일본인 위씨였으므로 이들이 비록 족보상에는 누락되었지만 장흥위씨였음에는 분명하다. 이처럼 고려 초·중기에서 말엽까지 장흥위씨는 성세를 누리며 현달했던 것이다. 장흥임씨의 시조 임의(任懿1041-1117)가 현종 때 처음 나타난 것과 비교하면 흥미 있는 현상이라 할만하다.

위씨 세계에서 4세조인 평장사 기로((耆老)는 1018년(현종) 때 등과했다. 그리고 5세조 위계정(魏繼廷정)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를 지냈으며 1091년(선종 8) 예부시랑 때 송나라를 다녀왔다. 숙종 초 예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1105년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고, 예종 즉위 후 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을 지내고, 1106년 수태보(守太保)에 이르렀던 명신으로 장흥위씨를 명문거족으로 빛낸 일대 거인이었다.

6세조 위소(魏紹)는 몽고와 싸운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1224년(고종)에 허벅지 살을 떼어 모친의 병환을 치료하였을 만큼 효성이 지극했다(『고려사』). 그러나 1231년 (고종 18년), 그의 아들 원개의 나이 6살 때 몽고병의 용주 침입시 포로가 되고 만다(『동국통감』).

7세조는 원개(元凱). 호는 밀암(密庵), 초명은 법환(法桓), 속명이 원개(元凱)였고, 시호가 원감국사(圓鑑國師)였던 충지(沖止. 1226∼1293)는 1244년(고종 31년)에 예부시에 장원하고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1252년에 승려가 되면서, 원오국사(圓悟國師)의 법통을 잇고 조계사(曹溪寺)의 제6세가 되었다.

그는 또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고 대도(大都:현 北京)에 가서 빈주(賓主)로 대접받고 금란가사와 백불(白佛)을 하사받았으며 저서로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을 남겼는데 1293년 충렬왕이 '원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가 망할 즈음에 위씨들은 쇠운에 든다. 문개의 8세손으로 공민왕 때 합문판사(閤門判事)였던 14세조 위충(魏沖)이 이성계의 혁명을 번복하려는 모의에 시중 김종연(金宗衍), 판삼사(判三司) 지용기(池湧奇), 조유(趙裕) 등과 함께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곤장을 맞고 멀리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위충은 마침내 자포자기하며 스스로를 돌보자 않고 집에 칩거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 때문에 위씨는 그로부터 3대에 걸쳐 벼슬길이 막혔다가 그의 증손 위종복(魏宗復)이 한성참군을 지내면서 벼슬길을 열게 된다.

위종복에게는 위유형(魏由亨)·위유정(魏由貞)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형의 자손들은 주로 관산 일대에서 살아 '관산파'라 하고 유정의 자손들은 주로 장흥읍 행원에서 살아 '행원파'라 부르면서 세칭 관산파와 행원파의 두 파로 갈린다.

관산파인 위유형의 증손 위덕원(魏德元.21세.1549∼1616)은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며, 위덕의(魏德毅.21세.1540∼1613)와 위덕화(魏德和.1551∼1598)는 한 형제로 피난길에 오른 선종를 호종하며 전란을 치러 공신이 되었으며, 그들의 현손인 정훈(廷勳1578∼1662), 정철(廷喆.1583∼1657), 정오(廷嗚1589∼1640) 등은 선대의 뜻을 받들어 병자호란 때 참전, 공을 세우며 충의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 조선조에 위씨 집안을 빛낸 가장 큰 인물로 최근 학계로부터 새롭게 평가를 받기 시작한 호남실학의 거목 위백규(魏伯珪.1727∼1798)도 이 집안출신이다..

관산파의 대표적 인물이 존재(存齋)라면, 속칭 '행원파'인 유정의 집안에서는 입향조 유정의 손자인 대용(大用.21세.1530∼1610)과 대기(大器..21세.1559∼?)를 꼽을 수 있다. 명조 10년에 사마시 무과에 합격한 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김천익(金千益)을 도와 호남모곡도유사로 군량미조달에 큰 공을 세웠고, 대기는 가리포 첨사로 있던 중 임란을 맞아 해남현감으로 충무공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옥포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그들로부터 홍면비장군(紅面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용장이었다. 위대기는 전쟁이 끝난 후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 이 집안의 대경(大經.1555∼1597)·순정(舜廷)등도 임란 공신들이다.

이 두 집안 외에 위종복의 아버지 때(세종조) 갈려나간 위자온(魏自溫)의 능주파, 멀리 관북으로 이주한 위자공(魏自恭)의 함흥파, 위종복의 동생 위종로(魏宗魯)의 여천파가 있다. 능주파 자온의 6세손 천우(天祐)도 담양부사 재임 중 임란을 만나 노량해전에 참전, 무공을 세웠다.

함흥파는 세종 때 갈려나가 장흥파들과 별로 교섭이 없었으나, 이시애난 때 공을 세운 19세 위세충(魏世忠), 임란 때 의주부사로 활약한 위한양(魏漢良), 그의 동생으로 의병장이 된 위륜양(魏倫良), 영조 때의 호조참의를 지낸 위창조(魏昌組.31세), 그의 아들로 강원감사를 지낸 위광조(魏光組)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특히 함흥파는 조선조에서 지역적인 이유에선지 위씨 집안에서 인물을 가장 많이 낸 집안으로 알려졌는데 조선조에서 30명의 문과 급제자, 107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한국학 교수 에드워드 와그너가 '사회완충제도로서 과거-조선 북장 3도 주민의 경우'라는 논문에서, 조선조에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던 북방민들 중에 장흥위씨 함흥파가 관계 진출을 가장 많이 해 함경도에서 명문을 이루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제 때 만주와 러시아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위석규(魏錫圭(1883∼1913)는 관산파 위덕의의 9세손이다.

1930년 조사('祖先의 姓', 조선총독부, 1934년)에 의하면, 20세대 이상 거주 동족마을은▲여수군 동천면 산수리 70호 ▲완도군 청산면 국산리 22호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 38호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 25호▲장흥군 유치면 단산리32호 ▲장흥군 관산읍 옥산리 33호 ▲관산읍 옥동리 16호 ▲관산읍 방촌리 83호 ▲안양면 담암리 19호 등이었다.

그리고 1985년 11월 1일조사에 따르면, 장흥 5,420가구 22,726명, 관산 108가구 566명, 광산(光山) 18가구 54명, 함흥 14가구 65명, 수령 16가구 59명, 해남 17가구 54명, 전주 11가구 49명, 고흥 4가구 17명, 기타 미상이 121가구 631명으로 집계되었다.

또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9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는 약 8천4백39가구에 인구는 4만5천여명으로 집계되어 85년 조사보다 가구 수는 2천7백가구, 1만여명이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장흥위씨는 전국 77위의 성으로 밝혀졌으며, 전국적으로는 5,729가구에 24,569명이 산 것으로, 그리고 전남은 1,952가구 8,472명으로 전체 34,9%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상계분파와 종친활동

앞에서 위씨 세계와 주요인물을 약술하는 과정에서 상계분파(上系分派)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다.

단일본인 위씨가 능주·관산·행원·여천·사월·관북파 등으로 분파되기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이다. 14세조인 위충(魏沖.閤門判事)이 고려왕조 복고운동에 가담하다 귀양가고 만다. 그동안 지금의 장흥읍 장원봉 밑(지금의 장흥향교와 법원사이)에서 성촌하며 살았던 위씨들은 휘충(諱沖)의 실각과 금고로 인해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역경을 겪는다.

그후 충(沖)의 자(子) 15세 위덕용(魏悳龍.通善郞)이 장원봉 밑 구거지를 버리고 장흥읍 평화리에 정착하게 된다. 위덕룡은 자량(自溫.伯)·자량(自良.仲)·자공(自恭.叔)·자검(自儉.季) 등 아들 넷을 둔다. 16세인 이들로부터 위씨의 상계분파가 시작된다. 즉 자온은 '능주파'로 21세인 천우(天祐.청양현감)·천보(天保)가 그의 후예이다. 또 자량의 아들 종복(宗復.17세)은 유형(由亨)·유정(由貞) 두 아들을 두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형으로부터 관산파, 유정으로부터는 행원파가 이어진다. 그리고 종복의 동생인 종로(宗魯.17세)로부터 여천파가 이어진다.

또 덕룡의 셋째인 자공은 손자로 서(瑞)·돈(頓) 손자 둘을 둔다. 자공의 장손으로 18세 서(瑞)는 장흥에 남아 용산 계산에 살며 사월파(沙月派)가 형성되고 자공이 차손 18세 돈(頓)을 데리고 세종조(1418∼1450)에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면서 관북파라는 지파가 이루어진다. 덕룡의 넷째인 자검은 자손을 두지 못했다.

따라서 장흥위씨의 상계분파는 16세 때부터 시작되고 여기서 수십 지파로 분화·분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흥위씨 유적으로는 5세조 충렬공 계정의 묘가 장흥군 장동면 연하동(烟霞洞)에 남아있다. 또 사우와 제각으로는 하산사를 비롯 죽천사(竹川詞)·석천사(石川詞)·다산사(茶山詞)·월명사(月明詞)·사월재(沙月齋)·백산재(栢山齋)·장천재(長川齋)·추원재(追遠齋)·운곡재(雲谷齋)·양춘재(陽春齋)·경모재(敬慕齋)·관산재(冠山齋)·흥문재(興門齋산)·금산재(錦山齋)·운산재(雲山齋)·계양재(桂陽齋)·화운재(畵雲齋) 등이 있다.

또 향사(享祀)는 시조 및 5현조(중시조 諱昌祚, 판사공 諱沖)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하산사에서 봉헌되고 있다.

# 종친활동

●위씨 대종회 결성

장흥위씨 대종회는 시조 위경으로부터 1,3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지난 1990년 11월 3일 화각지역 종친회와 문중을 대표하는 종인 70여명이 모여 대전의 유성관광호텔에서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창립되기에 이른다. 이때 초대회장에는 위찬호(魏燦鎬.사회교육학박사. 33세), 이사장은 위혹량(魏或良), 부회장은 위황량(魏滉良)·위자형(魏滋炯·위재형(魏載炯), 사무국장은 위갑종(魏甲從) 등이 선임되어 회장단을 구성했다.

이후 대종회는 조직의 저변확대 및 종회기금 모금 등 종무활동을 기반으로 봉제사(奉祭祀), 현창(顯彰)사업, 육영사업(장학사업), 종친 친목도모 등 대종회의 본령적(本領的)적인 사업들을 활발히 펼치면 위씨 종친회로서 위상을 정립해 나오고 된다.

이리하여 위씨 종친회는 ▲95년 '장흥위씨종보'(4×6배판, 60∼70쪽,2000부)를 창간, 종인들의 정보교류와 소식지로 활용하게 되었으며(2003년 제 7호 발간) ▲정례적인 연중 행사로 매년 5월첫째주 일요일, 장흥위씨의 성지인 하산사(霞山祠)에서 시조 휘경(諱鏡)을 위시한 5현조에 대한 대제(大祭) 봉행 ▲1987년 5월, 시조공 사적비 제막(하산사) ▲학업성적 우수자와 생계 빈곤 종인 자제 중 고교생과 대학생에 장학금을 지급(15명∼20명)하는 지속적인 육영 장학사업 추진 ▲하산사 하계 수련회 개최 등 역동적인 활동을 펼쳐 오고 있다.

특히 지난 98년 5월 13일 하산산 5현조 대제 때는 지난 98년4월부터 3년간 모금해온 장학금 3억3백70만원 기탁금에 대한 '장학기금 헌성비(獻誠碑)'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이 헌성비에는 장학기금을 기탁한 9개 문중과 14개 종친회, 78명의 개별 헌성 종인 이름을 새겨, 종친과 후학을 위해 성금한 이름들을 후인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999년 10월 4일에는 3년 간에 걸쳐 추진돼 온, 남북합본으로서는 처음인 '장흥위씨 대종보' 2천7백여 부를 발간하는 큰일을 치르기도 했다.

현재 위씨 대종회는 산하에 장흥·서울·광주·관북종친회 등 15개 지회가 있으며, 문중으로는 하산문중을 비롯하여 장천(長川)·행원(杏園)·사월(沙月)문중, 정무공(貞武公)·평덕(平德)·종사랑(從仕郞)·운암(雲岩)·운곡 종중(雲谷宗中) 등 9개 문중이 있다.

●관북종친회

대종회 외에 위씨 문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종친회는 관북종친회다. 관북종친회는 초선 초기 입북하였던 16세 자공(自恭)의 후예들로, 피난 1세 위씨들로 이루어진 종친 모임이다. 세칭 '38 따라지'라는 멸시와 실향민이라는 외로움 속에 서울과 전국 각처에 흩어져 살던 이들에게 본향과 같은 성씨 중심한 종친회 모임이 일찍 결성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때가 1981년 8월 23일이었으니 대종회보다 9년 빠른 때였다.

관북종친회 창립 이후 이들은 ▲'관북 장흥위씨 족보' 발간(79.10∼81.7) ▲85년 5월 17,18일 관북종인 14명 하산 대제 참석 등 장흥과의 교류추진 ▲관북입조(關北入組) 자공 기념사업-86년 4월27일 사월제(沙月齊) ▲96년 종보인 '명월송(明月頌)' 창간(격년간. 4×6배판, 100쪽 안팎). -2003년 제 7집발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왔다.

●장흥·재경 종친회

위씨 종친회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것은 역시 장흥종친회이다. 장흥종친회가 결성된 것은 지난 1971년 5월 1일이었다. 종친회 설립 목적을 쉽게 풀어보면, "하산문중(霞山門中) 숭조애족(崇祖愛族)의 전통을 이어 회원상호간의 족의(族誼)를 돈독히 하며, 현창선조(顯彰先祖), 육영자손(育英子孫)하여 위씨 문중의 영원한 번영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전국 종친회 활성화에 기여해 온 장흥종친회의 초대 회장단은 위계남(魏啓男.장흥)-부회장 위종익(魏鍾鎰, 유치단산)·위황량(魏滉良.관산옥당) 이었다. 이후 바톤을 이어온 회장단은 ▲제2대(73.4-75.4) 회장 위용철(魏容喆.관산방촌)/부회장 위규복(魏圭復.장흥행원), 위행환(.魏杏煥.장흥건산) ▲제3대-회장단 연임 ▲제4대(77.4-79.5)-회장 위환(魏桓.장흥내양.작고)/부회장 위정량(魏定良.부산기동), 위옥환(魏玉煥.관산옥당.작고)▲제5대(79.5-81.4) 회장-위환/부회장 위계현(魏啓玹.안양비동),위성환(魏星煥.관산방촌)▲제6대(91.5-94.9)-회장 위황량/부회장(魏聖鎬.부산효자), 위성환▲제7대(94.9-현재)-회장 위성호/부회장 위종흠(魏鍾欽.부산기동),위옥환 등이다.

지난 96년6월에 장흥종친회가 펴낸 회원명부에 의하면, 세대주 위주의 회원은 525명으로 돼 있다. 당시 읍면 별 회원수 분포를 보면 장흥읍 38세대, 관삼읍 220세대, 부산면 26세대, 유치면 29세대, 안양면 58세대, 용산면 24세대, 장동면7세대,장평면 5세대, 대덕읍·회진면 17세대 등이었다.

장흥종친회 정기총회는 매년 하산대제일 이전인 3월 경에 열리고 있는데 현재 장흥종친회원은 더욱 줄어들어 450여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위씨 종인이 장흥 외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서울수도권의 재경종친회가 결성된 것은 1984년이었다. 초대회장은 역시 위찬호(魏燦鎬) 종인. 위회장은 재경종친회 발족에서부터 활성화의 토대, 그리고 대종회 창립의 산파역을 맡으며 12년 동안 재경종친회를 이끌어오다 지난 95년 5월 28일 95년 재경종친회 정기총회에서 당시 이화여대 위자형교수(魏滋炯.醫博)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다. 재경종친회는 1989년 5월에 '장흥위씨(長興魏氏)'라는 종보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다양한 분파, 가장 많은 위씨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는 재경종친회는 대종회의 중심체 역할을 해 오고 있다.

# 문화·선조 숭조 선양 활동 활발

1) 출판문화 활동

어떤 조직 단체에서나 그 조직의 지속적인 활성화와 성장발전, 그리고 그조직의 위상의 정립의 관건 중의 하나는 문화적인 힘이다. '장흥위씨'를 하나의 조직으로 보았을 때 언급한 전제 역시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장흥위씨의 문화활동은 적정수준에서 이루어지면서 오늘의 '장흥위씨'의 초석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화활동은 조상 곧 선인들에 대한 현창사업의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씨족사회에서의 문화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현창사업이나 문화활동은 족보·종보 발간 등 기본적인 일 외에도 비석을 세우는 묘제사업이나 그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연구, 그리고 유고와 행적 등을 모은 유고집 발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장흥위씨의 문화활동은 출판문화에 역점이 모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출판을 통한 대내외 홍보와 교육을 위한 필수적 요청에 의해 이루어져 이루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흥위씨의 출판은 족보발행, 종보 발간, 선조 저작물 발간 등으로 추진돼 나왔다.

족보발행은 위씨의 역사 자체여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타 성씨들과 달리 '관북파(關北派)'라고 하는 입북파가 있어 남북교류의 한계로 인해 여태까지 관북에서 따로따로 족보를 발간, 남북통일합보 발간은 선인들의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다. 따라서 최근(1999년)에서야 남북합보 발간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장흥위씨의 족보가 처음으로 발간 된 것은 함경도로 입북한 자공(自恭) 후예들인 관북파에서 1689년 발간한 '기사보(己巳譜)'였다. 남에서는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뒤인 1759년에야 '기묘보(己卯譜)'가 출간된다. 이어 북에서는 정해보(丁亥譜.1767), 갑신보(甲申譜.1824), 을해보(乙亥譜.1875), 을묘보(乙卯譜.1915), 경진보(庚辰譜.1940), 신유보(辛酉譜1981년)가 잇달아 출간되며 위씨 씨족사를 정리해 왔다. 또 남에서는 '기묘보'를 시작으로 임인보(壬寅譜.1842), 계미보(癸未譜.1883), 병진보(丙辰譜1916), 정유보(丁酉譜.1957), 임자보(壬子譜.1972)가 출간되면서 위씨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러다가 위씨대종회가 결성되고 나서 지난 1996년 12월 15일, 장흥 하산사 강당인 백산재에서 전국의 각 종파대표 문인들이 모여 '장흥위씨 대동보'편찬을 위한 첫 모임을 가진 이래 거의 3년만인 1999년 10월 4일 '장흥위씨 대동보'(전8월) 편찬을 완료하게 된다.

이 대동보는 ▲남북 위씨들의 숙원이던 남북합보 표준보로 발간됐고 ▲한글번역과 함께 한자와 한문을 병기, 한글 세대도 쉽게 족보를 볼 수 있게 했으며 ▲남녀평등사상의 시류에 맞추어 딸을 본명대로 싣는 등 현대화된 대동보로서 특장점을 갖추었다 데 적잖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족보발행에 이어 대동회 종보(宗報) 발행은 또 하나의 경사라 할 만했다.
'장흥위씨종보'는 대종회가 창립된 지 5년만인 95년에 4×6배판형, 56쪽으로 2,000부를 발간됐는데, 제2호부터는 70∼80쪽 안팎으로 출간되며 종인들의 정보공유와 교육 자료로 활용되면서 올해에 이르고 제7호 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종회 종보 외에도 관북종친호의 '월명송(月明頌)'이 격년으로 정기 발행돼 나오고 있으며(현재 2003년 제7호) 이밖에도 비정기적 간행 종보로는 ▲재경종친회의 '장흥위씨'(173쪽. 89.5刊) ▲광주종친회의 '장흥위씨 광주종보'(타불로이드판. 수회 刊) ▲여수종친회의 '장흥위씨 여수종보'(99.5. 창간호) 등이 발행 되며 장흥위씨의 활동상황과 역사를 기록해 오고 있다.

특히 '명월송' 창간은 위씨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이루어진 발간작업인데, '장흥위씨 종보'보다 9년 앞선 것이었다.

2)저작물 출판사업

위씨들의 출판사업은 주로 선조들의 공적을 고무하고 전대의 선조들의 덕과 영광을 현창하려는 이른바 '현창(顯彰) 출판'이 주종을 이룬다.

물론 존재 위백규의 저서를 재판하거나 한글로 번안하는 사업은 굳이 위씨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장흥군의, 또는 학계나 일반 출판업계의 주요하고 당연한 문화사업일 수 있지만, 선조들의 유고집 발행 같은 일은 언급한 취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원감국사집(88.아세아문화사)』『국역 정현신보(87.장흥향토문화보존의원회)』『지제지(支提誌(76.장흥문화원』『지제(천관산)지(92.장흥문화원황』『존재위백규의 사상과 생애(01.도서출판 삼보아트)』등은 바로 위씨 외인들의 출판으로, 장흥역사에서 대표적인 위인이라할 수 있는 원감국사와 존재선생에 관한 책들이었다. 물론 『지제지』의 첫출판은 위황량씨의번역이, 두 번째 92년출간도 위황량씨의 제정지원으로 출간이 가능했으며, 『존재 위백규의 사상과 생애』역시 위성복씨(前조흥은행장)의 재정지원으로 펴내진 출판이었으므로 전적으로 위씨들의 관련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도 같다.

여기서 특히 위황량씨의 숭조현창(崇祖顯彰) 정신은 유달라 위에서 소개한 책들의 출간의 직접적인 도움 외에도『덕암유고(德菴遺稿.2000刊)』『덕암의열록(덕암의열록(德菴義烈錄)』직접 엮어 펴내기도 했다. 또 직계 선조에 관한 출판으로 위정철(魏正哲)이 펴낸 『장흥위씨 행와공파 세록(幸窩公波 世祿.02 刊)』이 있다.

3)선조 사상·생애 조명 학술세미나

선조들의 공훈과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 같은 사업도 선조 숭조정신에서 비롯된다. 위씨의 역대인물 중에서 심포이엄 등으로 학술계로부터 단독적인 재조명을 받을 수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원감국사와 존재위백규가 대표적일만 한다. 다행이 두 분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려, 위씨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원감국사에대한 학술조명작업은 장흥군에서가 아닌 지난 2002년 9월 29일 조계산 송광사에서 개최된 바 있다. 이는 원래 송광사에서 조계산문 초기 사상정립에 대한 학술 조명사업을 추진해오면서 송광사 6세조였던 원감국사도 여기에 포함이 되면서 개최되어진 학술대회였다. 이때 장흥위씨 및 장흥문화계 인사들, 불교학계 인사들 5백여 명이 모여, 원감국사에 대한 괌심도를 반영해주었다.

이날 세미나에서 ▲김영태 박사(동국대명예교수) - '원감국사의 선교관' ▲진성규교수(중앙대)-'원감국사의 생애와 현실인식에 기초한 국가관' ▲최인선 교수(순천대)-'원감국사의 유물유적에 대한 고찰' ▲ 박완식교수(전북대)-운감 詩文에 나타난 다산일여(茶禪一如)' 등으의 주제로 원감국사에 대한 학술적인 조명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국내 학계에서 존재 위백규를 주제로 한 십 수편의 박사학위논문을 비롯 수많은 석박사 논문과 자작물들이 쏟아졌지만 정작 그분의 생애와 사상, 문학을 연구 조명하는 학술대회는 지난 6월 12일, 장흥문회원이 전국문화원연합회 전남지회와 공동으로 주최한 '조산 후기 향토문화와 존재 위백규'라는 주제로 개최한 학술심포지움이 처음이었다.

이날 심포지움에서 ▲이해준교수(공주사대)-'조선후기의 지방 지식인과 향촌문화' ▲이종범교수(조선대사학과)-'존재 이백규의 가통과 향촌활동' ▲김석희교슈(인하대국문과)-'존재 위백규의 문학' ▲안동교교수(전남대 철학과)-'존재 위백규의 사상'▲김희태박사(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존재 위백규의 선양활동과 문화유산의 활용' 등의 주제로 학술발표가 이루어졌다


장흥위씨 역대인물들

●5현제 모신 하산사는 장흥위씨의 聖地

장흥위씨들의 성지는 장흥읍 평화리에 있는 하산사(霞山詞)이다. 장흥위씨 시조인 회주군을 비롯 5현조가 배향된 이곳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국의 위씨종인 4,5백여 명이 모여 5현조 대제가 치러진다. 또 이때 대종회에서 선정한 후학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하며, 매년 여름이면 이곳에서 하계수련회가 개최되는 등 이곳은 위씨들의 숭조정신의 함양과 교육의 장이 돼 오고 있다.

하산사에 배향돼 있는 5현조는 시조 회주군 휘경(懷州君 諱鏡)을 비롯, 중조(中組) 대각관 시중 창주(諱昌珠), 5세조 충렬공 계정(繼廷), 14세조 합문판사공 충(沖), 15세조 통선랑공 덕룡(悳龍) 등 다섯 분이다.

5현제 배향의 하산사가 있기까지에는 몇 번의 변천과정이 있었다.
5현제중 가장 오래된 묘소는 장동면 만년리 제암산 밑에 있는 5세조 충렬공의 묘소로, 1925년 충렬공 묘각인 하산재(霞山齋) 동편에다 단을 쌓고 시조 회주군과 판사공 휘충(諱沖) 두분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 1975년에 이르러 평화마을 백산재(栢山齋) 뒤뜰에 새 신실을 조성하게 된다. 이 새 신실은 숭조정신에 투철해 온 관삼읍 위황량(魏滉良)씨가 독자 힘으로 지은 것인데, 기와집 3칸의 단청으로 된 건물인데, 이 신실을 하산사(霞山詞) 명명한게 된 것이다. '하산사'라는 이름은 하산재 동편에 설단했던 일을 상고하여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 이때 하산사에 모신 분이, 시조 회주군, 충렬공 계정, 판사공 충 세 분이었다.

백산재는 본시 관산파조 유형(由亨)의 묘각으로, 1936년 원량 종인의 독지로 세워진 것이지만, 이곳에 하산사가 저리하게 되자 장천종중(長川宗中)에서 하산사 강당으로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1992년 5월 3일 대종회의 합의에 따라 중시조 대각관공 창조(昌祚), 통산랑공 덕룡 두 분을 이곳에 추배하면서 오늘날처럼 5현제가 모셔지면서 장흥위씨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장흥위씨 역대 주요인물들

1)역대 주요인물

▲신라조
위경(魏鏡.시조.아찬)

▲고려조
魏昌珠(중시조)/魏澾(2세조.門下承宣 監察御使)/魏原補(3세조.中郞將)/魏耆老(4세조.문하시중태보/魏繼廷(5세조.문하시중태사보)/魏紹(6세조.희종.檢校장군)/魏元凱(7세조.송광사제6국사.시호-원감국사)/魏文凱(7세조.한림학사)/魏德柔(성종.병부랑중)/魏從(목종.내사주서)/魏崇(문종.호부-병부상서)/위강(魏絳.祐補闕)/위통원(魏通元.軍候)/魏敦謙(예종.경주부수사)/위공취(魏公就.郞將)/魏沖(14세.공민왕.閤門판사)

▲조선조
위자공(魏自恭.관북파조)/위돈(魏頓.괸북파시조.建功將軍-종3품)/위이환(魏以煥광해.通政大夫.청송파시조)/위덕룡(魏悳龍.通德郞)/위천우(魏天祐.선조.掌令)/위덕의(魏德毅.선조.병조참판)/위덕관(魏德寬.선조.副護軍)/위덕화(魏德和.선조.임란공신.판서)/위덕원(魏德元.선조.임란공신)/위덕후(魏德厚.선조.濟用監察官.학자)/위덕남(魏德男.선조.임란창의.主薄)/위대기(魏大器.선조.水使)/위공달(魏公達.선조.임란공신)/위방(魏방.선조.임란창의)/위정훈(魏廷勳.인조.병자호란倡義)/위순정(魏舜廷.선조.현감)/위대택(魏大擇.선조.임란공신)/위대용(魏大用.선조.刑曹佐郞)/위정설(魏廷說.선조.임란倡義)/위정철(魏廷喆.선조.형조참판)/위한양(魏漢良.선조.의주부사)/위윤양(魏倫良.선조.임란倡義)/위정헌(魏廷獻.인조.학자)/위정보(魏廷寶.인조.名弓)/위정망(魏廷望(인조.中司馬)/위정렬(魏廷烈.武將)/위정명(魏廷鳴.인조.학자)/위산보(魏山寶.인조.선전관)/위종(魏鍾.인조.奉事)/위대성(魏大城.인조.현감)/위동전(魏東전.효종.군수)/위천회(魏天會.효종.郡守)/위정상(魏定相.현종.도승지贈)/위영조(魏榮組.숙종.掌令)/위창조(魏昌組.영조.左副承旨)/위흥조(魏興組.영조.군수)/위중준(魏重俊.德源府使)/위세보(魏世寶.학자)위홍조(魏弘組.군수)/위광귀(魏光龜.刑曹佐郞)위문철(魏文喆.察訪)/위종겸(魏鍾謙.校理)/위종선(魏鍾善.掌令)/위도원(魏道源.校理)/위익원(魏翼源.掌令)/위산하(魏山河.通德郞)/위흥인(魏興仁.좌승지) 덕菴공자 XHDEJHR런삼

▲근세
魏伯圭(학자)/魏錫奎(독립운동가)

2)조선조 급제자 정록
천우(天祐.선조15년.武年試병과)/정상(定相.현종5년.함경도별시.을과)/영조(榮組.숙종43년.함경도별시)/창조(昌組.영조7년.함경도별시)/치양(致亮.영조17년.무년시)/흥조(興組.영조22년.함경도별시병과)/광조(光肇.정조19년.庭試병과)/문철(文喆.순조26년.함경도별시)/적철(迪喆.순조27년.增廣試)/종선(鍾善.헌종4년.함경도별시을과)/종겸(鍾謙.고종12년.별시병과)/도원(道源.고종13년.함경도별시병과)/익원(翼源.고종17년.정시 甲科)

3)조선조 등과 인명
□문과=천우(天祐.縣監)/정산(定相.郡守)/영조(榮組.承旨)/창조(昌組.승지)/흥조(興組.승지)/치양(致亮.監察)/광규(光肇)/홍조(弘組.군수)/광귀(光龜.府使)/적철(迪喆)/문철(文喆.察訪)/종선(鍾善. 掌令)/종겸(鍾謙.校理)/도원(道源.교리)/익원(翼源. 장령)
□무과=원충(元忠.군수)/원신(元信.宣傳)/대기(大器.선조.임란공신.水使勳)/대택(大擇.선조.현감.임란공신)/대용(大用.임란공신.판관)/대홍(大弘.임란공신.部將)/대경(大經.營將)/대의(大義.僉正)/덕화((德和.임란공신.判書.贈戶判勳)/덕원(德元.임란공신.
訓練副正)/덕관(德寬.判官)/정철(廷喆.防衛使)/정렬(廷烈.현감)/정윤(廷尹.훈련첨사)/정설(廷說. 直長)/정익(정익(廷益.司果)/순정(舜廷이.현감)산보(山寶.현령勳)/서보(西寶.主博)/동방(東방.군수.임란창의)/동보(東寶.판관)/대성(大成.현감)/천증(天曾.부사)/부상(夫相.군수)/혁만(赫萬.군수)/영길(榮吉.守門將)/영신(榮信연.司果)/세경(世卿.선전)/세규(世規찰방)/원석(元錫.선전)/남(楠.수문장)/계충(啓忠.別軍職)/거조(去祚.사과)/석기(碩基.사과)/계상(啓尙.사과)/계인(啓仁.사과)

3. 韋 (가죽 위)

본관은 강화 단본이며 2015년 기준 834명이다.

4.

중국에서 쓰이는 위씨.

5. 유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