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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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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93 엠블럼1994~1995 엠블럼
태평양 돌핀스
Pacific Dolphins
인수년도 1987년 10월 31일
팀명 변경년도 1988년 3월 8일
매각년도 1995년 9월 21일
모기업 태평양화학
첫 경기 1988년 4월 5일 VS 롯데 자이언츠 (인천)
마지막 경기 1995년 9월 29일 VS 해태 타이거즈 (광주)
연고지 인천광역시(1988~1995)
홈구장 도원야구장(1988~1995)
수원야구장(1989~1995)
구단명 변천사 삼미 슈퍼스타즈(1982~1985)
청보 핀토스(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1996~2007)
해체
삼청태현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1. 개요2. 역사
2.1. 창단2.2. 팀 컬러2.3. 초기 (1988시즌)2.4. 김성근 시절 (1989~1990시즌)2.5. 박영길 시절 (1991시즌)2.6. 정동진 시절 (1992~1995시즌)
2.6.1. 영광의 1994년
2.7. 매각
3. 역대 선수
3.1. 투수3.2. 포수3.3. 내야수3.4. 외야수
4. 역대 감독5. 역대 성적6. 유니폼7. 응원가

1. 개요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했던 KBO 리그의 옛 구단.

1988년 청보 핀토스50억원에 인수하여 팀명을 변경하여 탄생하고, 1995년 시즌을 끝으로 모기업인 태평양의 공격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현대그룹470억원에 매각되어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되면서 사라졌다.

주 연고지는 인천광역시였다.[1] 참고로 모 회사인 태평양(현 아모레 퍼시픽)은 화장품 회사(...). 팀의 상징색은 원래 녹색/노란색이었으나,새마을운동 1994년에 빨강/흰색/파랑으로 바뀌었다.

2. 역사

2.1. 창단

태평양화학청보 핀토스를 인수하기 이전부터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4년 KBO가 7번째 구단에 대한 창단 신청을 받을 당시 태평양화학도 창단 신청서를 넣었던 것.[2] 이 당시에도 태평양의 희망 연고지는 이북5도였다. 태평양이 이북5도를 고집한 것은 태평양의 창업주이자 당시 회장이었던 서성환 회장이 황해도 평산군에서 자란 실향민이었고 서 회장의 어머니는 개성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84년 이북5도 연고의 제7구단 창단을 추진할 당시 "야구를 통해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KBO는 제7구단의 연고지로 OB 베어스의 서울 연고지 이전으로 자리가 빈 충청도 지역에 우선권을 주기로 내부 결정을 내렸고 결국 충청남도 연고 기업이던 한국화약그룹으로 프로야구단 창단 기회가 갔다. 이 때 창단된 팀이 바로 빙그레 이글스. 7구단 독자 창단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던 태평양화학은 경영난으로 채권은행에 야구단 매각 의사를 밝힌 청보식품과 잽싸게 매각 교섭에 착수했고 결국 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태평양 돌핀스 창단에 이르게 된다.

어쨌든 태평양화학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역대 세 번째 인천 연고팀을 창단하게 됐는데 팀명을 새로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태평양 프런트는 당초 팀의 이름을 "태평양 아모레"로 지으려고 했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 공모를 통해 결국 돌핀스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모레라는 이름을 포기한 이유는 너무 여성스럽다고. 게다가 너무 장삿속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알다시피 아모레는 당시 태평양화학이 판매했던 화장품 브랜드였고 훗날 이 브랜드가 회사의 공식 명칭이 된다. 당시 공모된 팀명도 제각각인데 돌핀, 허리케인, 죠스, 쾌남, 멍게(...), 해삼(...) 본격 해산물 구단 앞에는 그렇다 쳐도 쾌남부터는(...) 쾌남이 당시 태평양의 남성 화장품 라인업의 이름이었다고는 하지만...

참고로 팀명인 돌핀스는 역대 KBO 리그 팀명 & 마스코트 중 유일하게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다. 그러나 인천팀의 마스코트로 돌고래가 붙기에는 어폐가 있다. 돌고래는 상대적으로 깊은 바다에 사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크고 수심이 얕은 서해 중부 앞바다는 돌고래가 살기 어려운 조건이다.

2.2. 팀 컬러

예로부터 인천지역은 명투수들이 샘솟듯 나오던 투수의 요람이었다.[3] 그 덕분에 팀의 투수력은 항상 리그 톱클래스에 있었다. 실제로 팀 최초의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던 1989년 리그 평균자책점 2, 3, 4위를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4] 등 한 팀의 선발투수 삼총사가 차지한 적도 있다.

투수 왕국이라는 닉네임은 유명한 투수들을 연이어 배출했던 인천+경기+강원 팜이 있었기에 붙을 수 있었다. 이 닉네임은 후신팀인 현대 유니콘스로도 이어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투수왕국 하면 해태를 떠올리지만 선발에 비해 그럭 저럭이었던 불펜진을 가진 해태에 비해, 태평양은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역사에 남을 수준급의 투수들을 거느렸다. 단 해태에는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그럭저럭이었던 불펜진을 혼자서 떠받드는 역할을 하기는 했다. 오히려 선발이 수준급이지만 불펜이 별로 였던 구단은 빙그레였다. 평균적인 선발레벨은 빙그레가 해태보다 나았지만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때문에(...).

이렇듯 투수진은 남부럽지 않았지만 공격력은 역대 최악의 시망 수준이어서 번번이 팀의 상위권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다. 위에 언급된 태평양 삼총사가 40승을 거뒀지만 1989년 팀의 승리는 62승에 그쳤으며[5] 결국 그 해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는 박정현의 투혼으로 이겨냈으나[6], 어렵사리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밀리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력과 투수진 사이의 극심한 격차로 인해 붙은 팀 별명은 짠물야구. 더불어 인천 출신인 사람을 '인천 짠물' 또는 '짠돌이'로 부르던 당시의 지역드립도 영향을 미쳤다. 1루수 김경기[7]와 청보 핀토스에서의 활약을 이어나가 4번타자를 맡았던 포수 김동기[8], LG에 박준태를 내주며 데려온 좌익수 윤덕규 외에는 정말 공격을 맡아줄 타자가 없었다. 그나마 테이블세터진에서 1988~1990시즌까지 김일권이 3할의 타율이나(1988시즌), 40개 이상의 도루(1989시즌 62도루, 1990시즌 48도루)로 활약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활약했던 김일권의 후임 1번타자 이희성을 제외하면 6번타자 밑의 하위타선은 문자 그대로 암울했다. 1번타자를 보조할 확실한 2번타자가 없었던 것은 덤. 그나마 이희성도 1992,1994시즌에 부상으로 빠졌었고, 이희성과 더불어 테이블세터 역할을 했던 여태구도 1992년에만 반짝한 정도였다. 여태구는 준주전 정도의 선수로 기억남을 뿐. 이 짠물 타선이 극에 달한 1993년에는 팀 출루율 .290, 팀 장타율 .299, 팀 OPS .589로 타격 지표에서만 KBO 역사상 최악의 기록을 세 개나 세우게 되며, 팀은 당연히 꼴찌를 하고 말았다.[9]

2.3. 초기 (1988시즌)

태평양그룹은 처음에 의욕적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는데 그룹 실세인 신동관 수석부회장이 야구단 사장을 맡을 정도였다. 애초에 프로 원년 시절부터 꼴찌권에 맴돌던 만년 약체팀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탓에 팀 전력은 절망 그 자체였는데, 이미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인 1988년 3월 9일에 팀을 공식 창단했던만큼[10] 첫 시즌이었던 1988년 시즌은 어떠한 전력 변화도 없이 기존의 청보 핀토스의 선수진 및 코칭 스태프를 그대로 데리고 시즌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연말에 코칭 스태프의 대대적인 교체가 예상되었던 만큼 현장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고, 결국 시즌 초반 1승 14패라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11] 결국 강태정 감독이 경질되고, 임신근 감독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뤘다. 임신근 감독대행은 그래도 전기리그에서 MBC를 밀어내고 탈꼴찌에 성공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 팀분위기를 어느정도 수습하였으나 하위권을 탈출하는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시즌 종료와 동시에 경질되었다.

2.4. 김성근 시절 (1989~1990시즌)

첫 시즌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린 태평양은 시즌이 끝나면서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팀 개편에 들어갔다. OB에서 임기가 종료된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했다. 김성근은 자신과 함께 몇몇 코치들을 함께 영입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어차피 기존의 청보 출신 코치들을 물갈이할 계획이었던 태평양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를 받아들여 코치진까지 싹 물갈이 했다. 이어 태평양은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비시즌 동안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등을 영입했고, 시즌이 시작된 후에도 적극적인 트레이드로 전력 보강을 이어나갔다. 한편 수원야구장(현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이 완공되면서 기존의 춘천구장 대신 제2구장으로 쓰이게 된다.

오대산 극기훈련을 통해 정신무장과 혹독한 훈련을 견디어 낸 태평양은 1989년 일대 파란을 몰고 갔다. 이렇게 보강된 전력에 더해 투수 신인 트로이카(박정현-최창호-정명원)가 혜성처럼 나타나 맹활약했다. 이들 3인방은 팀의 62승 중 64.5%에 해당하는 40승을 합작하며[12] 정규시즌 평균자책점 2, 3,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태평양은 7개 구단 중 3위를 기록하며 인천 연고팀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오른 태평양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2승 1패를 거두며[13]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당대 최강의 무적 해태 타이거즈를 넘지 못하고 결국 3전 전패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태평양의 돌풍은 이어지지 않았다. 최창호 정명호 김동기 등 주축선수들이 지루한 연봉 싸움 으로 전지훈련에 참가하기 못했다. 김성근 감독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 버텼지만 4강은 너무도 멀리 있다. 5할에 가까운 승률(0.496)을 기록한게 기적에 가까윘다.

1989년 시즌의 영광은 짜릿했지만 지나친 혹사와 전력 짜내기의 여파로 이듬해인 1990시즌에는 투수 3인방이 모두 부상과 부진을 겪었고 팀성적도 5위(7개 구단 시절)로 추락했다. 게다가 김성근은 부임 직후부터 오대산 훈련비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여 사사건건 프런트와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2년차때는 임호균 각서 파동까지 일으켜 고의로 짤리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세대교체를 위해 임호균 등 노장 선수들을 정리하라는 구단지시에 반발하며 임호균이 5승을 못하면 옷을 벗겠다. 는 각서를 작성했던 것. 자신을믿고 따르는 선수들과의 도리를 위해 감독직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신동관은 김성근을 경질하고, 후임 감독으로 박영길을 영입했다.

태평양그룹의 실세였던 신동관 수석부회장은 프로야구가 그룹의 이미지 개선과 인지도 증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야구단 창단에 의욕적으로 참여했고 초기에 태평양에 많은 지원을 해줬다. 그러나 김성근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은데다가 임호균 각서 파동으로 야구계가 시끄러워지면서 태평양그룹과 본인의 이미지까지 함께 실추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신동관 부회장은 야구단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어갔다. 밖에서 김성근이 자신과 태평양을 비난하고 임호균을 보호하기 위해 신동관과 싸웠다는 등 거짓 언플을 해댔지만 신동관 부회장은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서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신동관 부회장이 관심을 끊으면서 야구단에 대한 모기업의 지원도 크게 줄어들었다. 모기업의 지원과 관심이 축소되면서 태평양 돌핀스는 침체 일로에 접어들었다. 신동관은 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끊은 대신 90년대 초 대한민국을 강타한 농구 열풍에 편승하여 태평양화학 여자농구단에 주력했고 덕분에 1995년에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2.4.1. 1989년 오대산 극기훈련

파일:external/suxmedia.com/1405671511.jpg[14][15]
태평양의 1989년 돌풍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바로 '오대산 극기훈련'이다. 인천야구 100년의 역사를 기술한 故 이종남 기자의 <종횡무진 인천야구>에도 이 에피소드가 자세히 나와있다.

1988년 말 태평양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은 당시 자신이 신봉하던 역술인이자 의료인[16](?)이었던 변영호(일명 변도사)[17]의 추천으로 1989년 1월 선수단 전원을 이끌고 오대산으로 떠난다. 이 당시 태평양 선수단이 오대산에서 했던 훈련은 야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던 산골 계곡 한가운데에 구멍을 파놓은 뒤 팬티까지 다 벗은 온몸을 차디찬 계곡물에 담그는 '냉탕 15초 입수' 훈련을 비롯해 10㎞ 산악 구보, 50㎞ 산악 행군, 맨발로 눈길 걷기, 극기 체조, 알몸 좌선(...), 산에서 맨손으로 살아 있는 짐승 사냥하기(...) 등 야구와는 전혀 관련 없는 훈련[18]을 했다.

일각에서는 이 훈련이 심각한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던[19] 선수단의 정신을 개조시키고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효과를 창출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양승관이나 임호균 등 일부 선수들이 산악 행군 등의 여파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불만을 터뜨렸다는 증언도 있으므로 오대산 극기훈련의 효과에 대해서는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 훈련 이후 태평양이 사상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자 이 당시 야구판 전체에 극기훈련이 트렌드처럼 퍼졌다. 특히 김성근의 그림자가 남아 있던 OB 베어스나 구단 고위층이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 라이온즈도 혹한기 극기훈련 내지는 겨울바다 입수 등의 훈련을 했지만 훈련 과정에서 장점보다 단점이 더 두드러지면서 극기훈련은 야구판에서 사라졌다.

2.5. 박영길 시절 (1991시즌)

김성근 경질 후 혹사 후유증으로 팀의 주축 선수들이 모두 부상을 겪게 된다.[20] 1991시즌 후임으로 부임한 박영길 감독은 화끈한 공격야구를 표방하여 주축 투수들이 모두 부상과 부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타격 위주의 팀으로 체질 개편을 시도했으나[21] 김성근 감독 시절 번트 야구에 익숙해 있던 팀의 체질을 단기간에 바꾸는데 실패하고 결국 1년만에 경질되었다.

2.6. 정동진 시절 (1992~1995시즌)

1992시즌 부임한 정동진 감독은 주축 투수들이 모두 혹사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박정현, 정명원, 최창호 등 주축 투수들을 전부 수술대로 보냈다. 그렇게 태평양은 사실상 주전 투수들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92, 93시즌을 보내며 6위,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동진 감독은 재활 투수들의 무리한 조기 투입을 지양하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 성적부진에 따른 중도 퇴진이 예상됐지만 뜻밖에도 팀은 마지막 기회를 줬다. 역대 인천 팀 감독 중 계약 기간을 채운 이가 단 한명도 없는 점과 주전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전력 공백이 컸던 점을 고려한 것이다.

2.6.1. 영광의 1994년

1994년 마침내 수술을 받은 선수들이 모두 복귀하면서 한동안 침묵하던 태평양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전신인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2년 팀을 창단한 이후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22]을 거두며 정점을 찍게 된다. 최상덕(13승)-김홍집-최창호(이상12승)-안병원(11승)이 모두 두 자릿 수의 승리를 달성하고[23] 부상 이후 전업 마무리로 전환한 정명원[24] KBO 리그 최초이자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인 44세이브포인트(4구원승40세이브)를 올리며[25] 환상적인 투수진을 구축했다. 그 결과 그해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를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김경기 등이 홈런 6방을 터뜨리며[26] 3연승으로 발라버린다.

그리고 인천팀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나...하필 상대는 LG 트윈스[27]. 이상훈-김태원-정삼흠으로 이루어진 15승 투수 3인방과 유지현-서용빈-김재현의 신인 트로이카. 김기범-차동철-차명석-김용수의 막강 계투진으로 최강의 리즈 시절을 달리고 있던 팀이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김홍집이 11이닝 141구를 던지고도 마지막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으로 승부를 내준 태평양은 2차전에서 정삼흠에게 영봉패하며 자멸하고, 3차전에서도 앞서가다가 정명원블론세이브로 역전패, 또다시 4차전에서는 1점차를 따라붙지 못하고 3:2로 패배하며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4경기 스윕을 당했으나 1,3,4차전 모두 1점차의 격전인데다 1, 3 차전은 승기를 갖고 있었기에 더욱 아쉬운 시리즈. 12년만에 인천 팬들에게 한국시리즈란 행복한 추억을 선사한 것 그 자체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이 해 숭의야구장수원야구장을 찾은 관중수는 47만 6277명(1경기당 평균 7560명)으로 2007년 SK 와이번스가 65만 6426명의 관중을 동원하기 전까지 인천 연고팀 최다 관중 동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다른 팀에 비해 안습한 성적과 낙후하고 협소한 시설[28] 등 태평양의 구단 인프라를 감안하면 이 해의 흥행 기록은 실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2.7. 매각

막강 마운드를 앞세워 계속될 것 같던 1994년의 영광은 일회성으로 끝났다. 1995년 시즌 최창호, 최상덕이 부진했고 전년도와 다를 바 없는 물방망이 타선이 이어지면서 7위로 추락했다. 게다가 구단운영에 어려움이 생기자 태평양은 결국 1995 시즌이 끝난 후, 어떻게든 야구판에 끼어들려 하던 현대에 매각되어 현대 유니콘스가 된다. 그리고 이 때 구축한 막강한 투수진은 현대 유니콘스1996년 한국시리즈 진출,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밑거름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태평양이 구단을 현대로 팔아넘길 때 무려 470억원을 받으면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유일하게 시세차익을 남기는 데 성공한 구단이 되었다.[29]

이 470억원은 KBO 리그 구단 매각대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다. 태평양이 청보를 인수할 시 대금을 지불하는 대신 청보의 부채 50억원을 대신 떠안는 것으로 퉁쳤고 이는 8년 거치-7년 분할상환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거치기간이 끝나고 부채의 분할 상환이 개시되는 1996년 현대에 구단을 팔아버렸는데, 이 당시 태평양은 당초 부채 50억원+8년간 이자 20억원, 총 70억원의 부채를 현대에 넘기면서 별도로 현금 400억원을 받고 구단을 매각했다. 결국 돈 한 푼 안들이고 빚만 떠안는 조건으로 야구단을 헐값에 사왔다가 통큰 매수자에게 냅다 팔아버고 대량의 현금을 먹으며 엄청난 시세 차익을 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현대그룹의 행동을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현대그룹은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자랑하던 국내 제1의 재벌 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파일:attachment/taepyungsell.jpg

1992년 이미 매각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태평양그룹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태평양증권을 매물로 내놨는데 선경그룹이 협상 대상자로 앉았다. 당시 태평양 측은 증권사와 야구단을 함께 가져가달라고 요청했지만 선경 측은 증권사만 가져가겠다고 해서 증권사만 매각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회사가 SK증권. 위 기사는 1992년 시즌 시작전에 모 스포츠신문에 나온 것이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인천의 초등학생이었던 현재 30대들은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30]

3. 역대 선수

  • 연도에 관계 없이 가나다 순으로 선수 이름을 작성. 등번호가 확인되지 않은 선수들은 미표기.

201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숭용이 은퇴하며 태평양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들은 모두 은퇴했다. 태평양과 경기를 가져본 상대팀 선수중에서도 마지막 현역 선수였던 임창용이 2019년 3월부로 은퇴를 하게 되어 태평양 돌핀스는 완전한 추억의 팀으로 남게 되었다.

3.1. 투수

배번 이름 데뷔년도 소속기간 은퇴년도 비고
47 가내영 1990(태평양) 1990~1995 2003(KIA) 제물포고 감독
33 곽병찬 1994(태평양) 1994~1995 1996(현대)
39 김력 1990(태평양) 1990~1991 1993(롯데)
67 김민범 1992(태평양) 1994~2005 2007(현대) 넥센 히어로즈 원정 기록원
30 김민태 1991(태평양) 1991~1994 1998(한화) 부천고 감독
17 김신부 1982(난카이) 1988~1989 1990(LG)
27 김억만 1995(태평양) 1995 1996(현대)
19 김일부 1988(태평양) 1988 1988(태평양)
11 김홍집 1993(태평양) 1993~1995 2003(한화) 부평구 리틀야구단 지도자
66 나성열 1992(태평양) 1992~1994 1998(쌍방울)
18 노민승 1989(태평양) 1989~1990 1990(태평양)
57 노승욱 1993(태평양) 1993~1995 2007(롯데) 야탑고 투수코치
38 문창환 1994(태평양) 1994~1995 2001(현대) 現 상인천중 감독
58 (故)박은진 1989(태평양) 1989~1995 1996(한화) 안산공고 코치[31]
21 박정현 1988(태평양) 1988~1995 2000(SK) 주엽고 코치
26 배경환 1983(롯데) 1988~1990 1990(태평양)
40 신상윤 1991(태평양) 1991~1995 1997(현대)
19 신완근 1988(태평양) 1988~1993 1993(태평양)
59 안병원 1992(태평양) 1992~1995 2003(LG) 원주고 감독
13 양상문 1985(롯데) 1988~1993 1993(태평양) 롯데 자이언츠 감독
LG 트윈스 감독
LG 트윈스 단장
18 위재영 1995(태평양) 1995 2007(SK) 동산고 투수코치
57 이상구 1988(태평양) 1988~1990 1991(롯데)
29 이충우 1985(롯데) 1988 1988(태평양)
14 임호균 1983(삼미) 1988~1990 1990(태평양) 성남 블루팬더스 감독
전일수 1991(태평양) 1991 1994(LG) KBO 리그 심판
64 전준호 1994(태평양) 1994~1995 2011(SK) 부천고 코치[32]
28 정명원 1989(태평양) 1989~1995 2000(현대) kt 위즈 투수코치
49 정명진 1989(태평양) 1989~1992 1992(태평양)
20 정민태 1992(태평양) 1992~1995 2008(KIA) 한화 이글스 코치[33]
47 조도연 1984(해태) 1989 1989(태평양)
24 조병천 1986(청보) 1988~1992 1992(태평양)
53 조영상 1990(태평양) 1990~1992 1993(OB)
41 조웅천 1989(태평양) 1989~1995 2009(SK) 두산 베어스 코치
지병호 1995(태평양) 1995 1995(태평양)
18 천창호 1982(롯데) 1989 1989(태평양) 빙그레 이글스 투수코치
30 최상덕 1994(태평양) 1994~1995 2009(한화) SK 와이번스 코치
31 최창호 1987(청보) 1988~1995 2002(LG) SK 와이번스 코치
27 허정욱 1989(태평양) 1989~1994 1994(태평양) SK 와이번스 스카우트[34]

3.2. 포수

배번 이름 데뷔년도 소속기간 은퇴년도 비고
22 금광옥 1982(삼미) 1988 1988(태평양) 동산고 감독
22 김경문 1982(OB) 1990 1991(OB) 국가대표팀 감독[35]
35 김동기 1986(청보) 1988~1995 1996(현대) 現 인천신흥초등학교 감독
김선우 1993(태평양) 1993 1993(태평양)
12 김성태 1994(태평양) 1994~1995 1998(현대)
32 김진한 1989(태평양) 1989~1992 1992(태평양)
24 도명진 1995(태평양) 1995 1996(현대)
37 이재주 1992(태평양) 1992~1995 2009(KIA)
25 장광호 1992(태평양) 1992~1995 2001(현대) 넥센 히어로즈 배터리코치
SK 와이번스 배터리코치
LG트윈스 배터리코치
23 최영환 1982(삼미) 1988~1989 1989(태평양)

3.3. 내야수

배번 이름 데뷔년도 소속기간 은퇴년도 비고
55 권준헌 1990(태평양) 1990~1995 2008(한화) [36][37]
37[38],00[39] 김경기 1990(태평양) 1990~1995 2001(SK) SK 와이번스 2군 감독
SPOTV 해설위원[40]
25 김바위 1982(MBC) 1988~1989 1991(태평양) 롯데 자이언츠 원정 전력분석원
2 김성갑 1985(삼성) 1991~1995 1995(태평양)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8 김용국 1985(삼성) 1994~1995 1995(태평양) kt 위즈 1군 수석코치
경주고 감독
6 김인호 1989(롯데) 1990~1995 2001(현대) SK 와이번스 1군 외야수비코치
7 김재박 1982(MBC) 1992 1992(태평양)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 감독
現 KBO 경기감독관
38 김풍기 1989(태평양) 1989~1991 1991(태평양) KBO 리그 심판 [41]
39 김한근 1982(삼성) 1989~1990 1990(태평양) 한양대 감독
9 손차훈 1993(태평양) 1993~1995 2001(SK) SK 와이번스 스카우터
SK 와이번스 단장
5 염경엽 1991(태평양) 1991~1995 2000(현대) 현대 유니콘스 운영팀 과장
넥센 히어로즈 감독
SK 와이번스 감독[42][43]
1 원원근 1988(태평양) 1988~1995 1995(태평양) [44]
56 유동효 1988(태평양) 1988~1989 1994(롯데)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팀장
7 유영환 1992(태평양) 1992~1994 1995(태평양) [45]
34 윤성훈 1989(태평양) 1990~1992 1993(쌍방울) 춘천고 감독
울산공고 감독
청원고 감독
1 이광길 1983(삼미) 1989~1990 1991(삼성) KNN 러브FM 해설위원
17 이근엽 1991(태평양) 1991~1995 1999(쌍방울) 前 부천북초등학교 코치
넥센 히어로즈 재활코치
16 이선웅 1983(삼미) 1988~1992 1992(태평양)
16 이용주 1995(태평양) 1995 2002(현대) 제물포고등학교 감독
2 정영기 1982(MBC) 1989 1990(태평양) 現 강릉영동대 코치
6 정진호 1983(MBC) 1988~1990 1990(태평양) 현대 유니콘스 수석코치
주경업 1991(태평양) 1991~1993 1993(태평양)
23 하득인 1994(태평양) 1994~1995 1997(현대)
48 황윤성 1992(태평양) 1992~1995 2006(KIA) 제물포고 코치
유신고 코치
연세대 코치[46]

3.4. 외야수

배번 이름 데뷔년도 소속기간 은퇴년도 비고
강광회 1990(태평양) 1990~1992 1994(쌍방울) KBO 리그 심판 [47]
44 강영수 1989(삼성) 1995 1997(쌍방울) 원주고 감독
36 공의식 1993(태평양) 1993~1995 1997(쌍방울) 충암고 감독
유원대학교 감독
4 곽권희 1988(태평양) 1988~1992 1992(태평양)
24 구윤 1986(삼성) 1993~1994 1994(태평양)
39 계기범 1993(태평양) 1993~1994 1997(현대)
14 김갑중 1993(태평양) 1993~1995 1999(쌍방울) 화순고 감독
송원대학교 감독
10 김윤환 1984(해태) 1988~1991 1991(태평양) 주엽고 감독
7 김일권 1982(해태) 1988~1990 1991(LG) 삼성 라이온즈 2군 주루코치
12 김진규 1988(태평양) 1988~1990 1993(태평양)
23 김홍기 1991(태평양) 1991~1993 1993(태평양) [48]
11 박준태 1989(태평양) 1989~1992 1998(LG) 배명고 감독
강릉고 감독
LG 트윈스 2군 수비코치
16 백성진 1991(태평양) 1991~1994 1997(현대)
29 서정민 1992(태평양) 1992~1995 1995(태평양)
7 송재박 1975(다이헤이요) 1991 1991(태평양)
8 양승관 1982(삼미) 1988~1989 1990(LG) NC 다이노스 타격코치
40 여태구 1988(태평양) 1988~1995 1995(태평양) [49]
3 윤덕규 1985(MBC) 1992~1995 1997(현대)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
36 이광근 1986(청보) 1988~1992 1992(태평양) kt 위즈 2군 감독
10 이숭용[50] 1994(태평양) 1994~1995 2011(넥센) kt 위즈 1군 타격코치
kt 위즈 단장
87 이해창 1982(MBC) 1988~1989 1989(태평양) kt 위즈 2군 감독
51 이희성 1989(태평양) 1989~1995 1997(삼성)
8 정문언 1981(니혼햄) 1991~1992 1992(태평양)
3 정상진 1987(빙그레) 1990~1992 1992(태평양)
26 지화선 1993(빙그레) 1995 1997(현대) [51]
8 홍문종 1984(롯데) 1989~1990 1990(태평양)

4. 역대 감독

5.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 이름 경기수 승률
1988 7위/7팀[52] 7위 태평양 돌핀스 108 34 73 1 0.319
1989 3위/7팀 3위[53] 120 62 54 4 0.533
1990 5위/7팀 5위 120 58 59 3 0.496
1991 5위/8팀 5위 126 55 69 2 0.444
1992 6위/8팀 6위 126 56 67 3 0.456
1993 8위/8팀 8위 126 34 82 10 0.310
1994 2위/8팀 준우승[54] 126 68 55 3 0.552
1995 7위/8팀 7위 126 48 73 5 0.401
KBO 통산 8 시즌 978 415 532 31 0.424
이후 역사는 현대 유니콘스

6. 유니폼

현대 유니콘스/유니폼 문서 참조.

7. 응원가

들어보기
< 1절 >
젊음 하나로 뭉쳐진 우리
터지는 가슴으로 승리를 부른다
저 넓은 대양의 정기를 받은 태평양돌핀스

환희의 순간 위해 오늘을 사른다
승리의 순간 위해 내일을 사른다
아~ 아~ 돌핀스
그 이름에 명예를 건다

(후렴)
돌핀스 돌핀스 무적함대 돌핀스
돌핀스 돌핀스 태평양돌핀스

< 2절 >
투지 하나로 맺은 너와 나
피끓는 가슴으로 영광을 만든다
저 푸른 대양의 정기를 받은 태평양돌핀스

내일의 기쁨 위해 오늘을 사른다
승리의 기쁨 위해 내일을 사른다
아~ 아~ 돌핀스
그 이름에 사랑을 건다

(후렴구 4회 반복)


[1] 여전히 광역 연고권으로는 경기도강원도, 이북5도였다. 다만 1989년부터는 기존의 춘천야구장 대신 수원야구장을 제2홈구장으로 쓰게 된다.[2] 이 당시 창단 신청서를 낸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꽤나 화려하다. 태평양화학을 비롯해 금성사, 한국화약, 국제그룹, 한양, 한일합섬, 농심, 한국야쿠르트, 쌍방울 등 9개 기업이다. 이 중에서 금성사, 한국화약, 쌍방울은 훗날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이뤘다. 반면 한일합섬은 1989년 제8구단 창단 신청 때도 마산시를 중심으로 한 경남 연고 구단 창단을 신청했다가 쌍방울에 밀리면서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 6위의 기업이였던 국제그룹은 전두환에게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았다고(...) 찍혀서 해체당했다.[3] 박현식, 서동준, 임호균, 최계훈, 정민태, 김홍집, 위재영, 김수경, 류현진 등 수많은 명투수들이 인천에서 탄생했다.[4] 박정현 2.15, 최창호 2.22, 정명원 2.45. 참고로 이 시즌 평균자책점 1위는 1.17의 선동열.[5] 각각 19승, 10승, 11승.[6] 준PO 1차전에서 경기도중 허리부상으로 병원행... 그것도 5회부터~9회까지 던졌다.[7] 김경기 이외에 1루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평양 팀 역대 개인홈런 1위 및 팀내 홈런 1위였다...[8] 김경기 이전 돌핀스의 유일무이한 주포.[9] 다만 팀타율은 .224로 역대 최하는 아니었다. 역대 타격 최약체는 1986년 이 팀의 전신인 청보 핀토스가 세운 .219.[10]태평양화학이 프로야구단 창단을 선언한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11] 문서 최상단에도 나와있지만 홈 개막전이 4월 5일 롯데전이었는데 이 날 경기는 5:6으로 한점차 승부에서 아쉽게 패하고 말았었다. 시즌 첫 승은 개막한지 일주일도 넘었던 4월 13일 잠실 MBC전에서 7:1로 승리하였다.[12] 박정현 19승, 정명원 11승, 최창호 10승.[13] 1989년 준플레이오프의 2승은 모두 공교롭게도 끝내기 승리였다. 1차전은 김동기의 끝내기 우중월 쓰리런 홈런, 3차전은 곽권희의 끝내기 중전 안타.[14] 김성근 뒤에 안경낀 선수는 다름아닌 양상문(...), 그리고 줄 맨 끝엔 당시 에이스 였던 박정현.[15] 그리고 김성근이 들고 있는 드링크는 태평양화학 식품사업부에서 제조한 '고려왕'이라는 인삼맛이 함유된 음료였다.[16] 대만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주장했으나 국내에서 정식 과정을 거쳐 한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즉 무면허 진료를 했던 것.[17] 김성근에게 변영호를 추천했던 사람은 김성근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계형철이다.[18]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는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 사자와 눈싸움(...) 대결도 훈련에 포함시켰다. 2016년 1월 엠스플 구구절절 '스프링캠프'편 참조.[19] 삼미-청보-태평양은 1982년 창단 이후부터 1988년까지 단 한 번도 가을야구에 나간 적이 없던 원년 6개구단 중 유일한 팀이었다. 그나마 장명부의 활약 속에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2위를 했던 1983년이 가장 잘했던 시즌이지만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나가는 한국시리즈만 있었을 뿐 플레이오프 제도가 없었던 탓에 가을야구는 나가지 못했다.[20] 태평양 신인 투수 3총사의 줄부상이 대표적인 사례. 김성근이 감독을 맡았다가 경질당했던 팀의 후속 사례에도 잘 나와있지만 1989년 태평양을 가을야구로 이끌었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등이 1990년대 초반에 한꺼번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만다.[21] 박영길 감독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격이론가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와 감독을 맡던 시절 삼성의 타선은 리그를 그야말로 씹어먹었던 핵타선이었다. 태평양 구단 입장에서는 박 감독의 지도력이면 물타선이 금방 핵타선이 될 줄 알았겠지만...현실은 시궁창...[22] 페넌트레이스 2위 & 한국시리즈 준우승. 8개 구단 시절이다.[23] 훗날 현대 왕조의 에이스가 되는 정민태는 1992년 억대 계약금을 받고 태평양에 입단했으나 병역비리와 부상에 휘말리며 두 시즌동안 35.1이닝만 던지는데 그쳤고 1994년이 돼서야 레귤러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이 시즌 정민태의 성적은 8승 9패.[24] 부상 이전인 1991년까지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포지션에 있었지만 마무리 투수로 완벽하게 전업에 성공한 것은 1994년부터다.[25] 40세이브 기록은 6년 뒤인 2000년 진필중에 의해 깨지게 된다.[26] 특히 김경기는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터뜨렸는데 대전 3차전에서 터진 결승 홈런이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김경기는 플레이오프 3차전 연장 10회초 한화 구원투수 정민철에게 결승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견인했다. 지금으로 치면 당연히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해야 하는 성적이지만 플레이오프에 MVP 시상 제도가 도입된 것은 한 해 뒤인 1995년부터다.[27] 유독 삼청태 라인 팀들은 LG에 약했다. 1994년 정규시즌에서도 LG한테만은 자주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8] 이 당시 각 팀당 홈경기가 63경기였고 숭의야구장의 관중석 수가 1만1000석인 것을 감안하면 숭의야구장 홈경기가 전부 매진된다고 해도 홈 관중 수는 69만6000명에 불과하다. 숭의야구장에서 치러야 할 일부 경기를 수원야구장에서 옮겨 치르고 그 곳에서 만원이 됐다고 해도 80만명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 비슷한 시기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는 3만석의 관중석을 갖춘 구장과 똘똘한 성적, 팬들의 뜨거운 애정이 한꺼번에 겹치며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동원 기록을 쓰기도 했다.[29] 이 당시 돌핀스 구단의 매각 등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서성환 회장의 아들이자 현재 아모레퍼시픽 회장인 서경배다. 훗날 서경배 회장은 아모레퍼시픽 주식이 수직상승하면서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주식 부자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30] 니 XX 왕XX 태평양 고래XX 만지면 말랑말랑 튀기면 바삭바삭 먹으면 우웩![31] 삼청태현 역사상 최초의 전천후 중무리 투수로 볼 수 있는 인물. KBO 리그 사상 보기 드문 도서지역 출생자이기도 하다. 무려 백령도 출신이며, 2017년 취침 도중 급사했다.[32] 현대그룹으로의 매각이 발표된 후 태평양 돌핀스라는 이름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1995년 9월 29일 광주 해태전) 선발투수였으나 이날 태평양이 해태에 패배하면서 패전투수가 됐다.[33] 태평양 입단 당시 1억6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다. 이는 삼청태현 역사상 최초의 신인 억대 계약 사례.[34]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배출한 프로야구 선수였다.[35]두산 베어스 감독, 前 NC 다이노스 감독[36]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1996년 ~ 1999년에 타자에서 2000년 ~ 2008년에 투수로 전환했다.[37] 태평양 돌핀스 최후의 3할타자였다.[38] 1990~1992[39] 1993~1995[40] KBO 리그 심판 김풍기의 사촌 동생[41] 김경기 前 야구선수의 사촌형[42] 이전 배번은 17번, 1번이었다.[43] 2017~2018 두 시즌은 SK 와이번스 단장직을 역임하였다.[44] 이전 배번은 5번, 29번이었다.[45] 이전 배번은 26번이었다.[46] 2005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5시즌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이듬해인 2006년에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하게 된다.[47] 야구선수 강진성의 아버지다.[48] 1991시즌 2군리그에서 8홈런으로 2군 홈런왕을 차지한 바탕으로 1992시즌부터 1군에 콜업되어 개막 직전에 실시했던 시범경기에서 홈런을 5개나 쏘아올리며 시범경기 홈런왕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김경기, 김동기와 더불어 K-K-K타선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당시 정동진 감독이 했으나, 정규시즌에서는 62경기 0.239 3홈런 18타점의 기록으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실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데뷔 3년만에 은퇴를 하고, 이후엔 골프 강사로 활동중인데 아마추어 골프에서 인지도를 갖게 되어 스타 골프 강사로서 유명하다.[49] 이전 배번은 54번이었다.[50] 돌핀스 최후의 좌타자 현대 유니콘스가 무너지고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 되었을때도 오직 팀을 옮기지 않고 은퇴한다. 이름만 바꼈지 한팀에서를 뛴 것으로 간주.[51] 빙그레 이글스 내야수 출신인 지화동의 동생.[52] 전기 6위, 후기 7위[53] 인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꺾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했다.[54] 인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 직행해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꺾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LG 트윈스에 1승도 못 거둔채 스윕패를 당해 준우승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