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태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
1982년 2월 ~ 1985년 5월 | 1985년 5월 ~ 1987년 10월 |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 |
1987년 10월 ~ 1995년 9월 | 1995년 9월 ~ 2008년 1월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007f55><tablebgcolor=#007f55> | 현대 유니콘스 관련 문서 |
{{{#!wiki style="color: #FAB93D;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000000; margin:-6px -1px -11px" | 기본 정보 | 현대그룹|삼청태현(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2군 | 키움 히어로즈 | |||
역사 정보 | 구단 역사|역대 시즌|실업 현대|연고 이전 1994년 한국시리즈|1996년 한국시리즈|1998년 한국시리즈 (V1)|2000년 한국시리즈 (V2)|2003년 한국시리즈 (V3)|2004년 한국시리즈 (V4) 역대 감독|역대 주장|역대 1차 지명 선수|사건 사고 | 암흑기 | ||||
세부 정보 |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 ||||
경기장 |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
구단명 | 연고지 | 존속 기간 | 모기업 |
삼미 슈퍼스타즈 |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이북 5도 [1] | 1982~1985. 5 | 삼미그룹 |
청보 핀토스 | 1985. 5~1987 | 청보식품 | |
태평양 돌핀스 | 1988~1995 | 태평양화학 | |
현대 유니콘스 |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이북 5도(1995~1999) 무연고[2](2000~2007) | 1996~2007 | 현대그룹 |
[clearfix]
1. 개요
삼청태현 三靑太現 1982 ~ 2007 | |||
청보 핀토스 |
1982년부터 2007년까지 KBO 리그에 참여했던 원년 프로야구 팀인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를 합쳐 이르는 말. 타팀에 비해 훨씬 많은 3번의 인수인계를 거쳤고, 2007년 시즌 후 히어로즈로 승계되는 과정에서 재정적 문제로 법인이 해체되었다.
당시 삼성과 자웅을 겨루던 재벌인 현대의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는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강렬한 전성기를 보냈고, 중견급 대기업 구단인 태평양 돌핀스는 비록 우승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1989년 플레이오프 진출, 19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의 성과를 낸 반면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는 구단의 운영 기반인 자금력마저도 심각하게 빈약한 구단들이었다.[3]
2.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삼청태현의 구단 역사는 시조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탄생부터 스토리가 꽤 스펙타클하다. 공통적인 것은 야구를 잘 한 적이 없는 전통의 약체팀이었던데다 팀의 모기업도 다른 재벌 기업에 비해 빈약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삼미와 청보는 구단의 매각 과정에 주채권은행이 개입했다는 점도 똑같다.삼미는 사실 KBO의 구상에 없던 팀이었다. 1981년 12월 대한민국에 KBO 리그가 탄생할 당시 연고지 배정의 기준은 구단주인 기업 총수나 구단의 모기업이 연고지와 연관이 깊은 기업에 맡기는 것이었는데 인천 연고 구단을 맡아줄 기업이 없었다. 원래는 정주영 회장이 있는 현대그룹에 야구단 창단을 제안했다. 정 회장이 강원도 출신의 실향민이자 젊은 시절 항만 노동자로 일했던 곳이 바로 인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1988 서울 올림픽의 유치와 개최 준비를 위해 힘써야 한다며 거부했다.[4] 차선책으로 당시 실업야구의 강자였던 한국화장품 야구단을 운영했고 개성시 출신의 실향민 임광정 회장이 있던 한국화장품에 프로야구단 전환을 제안했지만 임광정 회장마저 프로야구단 창단을 거절했다.[5] 그러자 원래 대전 연고 구단을 만들기로 돼 있던 두산그룹이 뜬금없이 새 팀을 대전이 아닌 인천에 만들면 안 되겠냐고 KBO에 요청했다. 연고지 기반이 부족한 대전에 가느니[6] 서울 바로 옆 지역이고 야구 인프라도 탄탄했던 인천에 팀을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리그 출범 작업을 총괄하던 이용일 당시 사무총장이 나서서 이제 와서 대전이 아닌 인천을 달라고 하면 리그 준비 과정이 꼬이니 그냥 대전으로 가라고 말렸다.[7]
그렇게 리그 출범을 위한 창립 총회 시한은 다가왔고 인천 연고지가 붕 뜨려고 할 즈음 갑자기 웬 30대 남자가 KBO에 찾아와 자신들이 인천 연고 구단을 맡으면 안 되겠냐고 나섰다. 이 30대 남자는 다름아닌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이었다. 이 당시에도 삼미의 인지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청계천의 초고층 빌딩이던 삼일빌딩의 주인이 이 회사였다는 점이 돋보였다고 한다. 김 회장은 미국 유학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심취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고 프로야구단의 구단주가 되면 연고지 지역사회 내의 유력 인사가 돼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프로야구단 창단에 나섰다고 한다. 어쨌든 삼미에서 허공에 뜰 뻔했던 인천 연고 구단을 맡아 창단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삼미 슈퍼스타즈가 하필이면 첫 해부터 맨정신에 눈 뜨고는 차마 보기 어려운 성적을 내면서 인천지역 야구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삼미는 1983년 장명부 덕분에 반짝 성적을 냈으나 이 해를 빼면 늘상 꼴찌를 전전해야 했고 1984년 이후에는 모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던 삼미해운의 경영난까지 겹치며 구단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 당시 주채권은행이었던 한국산업은행은 야구단을 팔지 않으면 재정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엄포를 놨고 결국 김현철 회장은 울며 겨자먹기로 경기고등학교 선배 김정우 회장이 운영하던 풍한방직에 구단을 넘겼다. 공교롭게도 구단을 넘긴 날은 최계훈의 완봉역투로 팀의 18연패를 끊은 다음 날이었다. 여담으로 김현철 회장은 구단 매각에 도장을 찍은 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청보 핀토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구단은 풍한방직이 인수했는데 청보식품의 이름이 야구단에 붙은 것은 전형적인 B2B 업체인 방직회사보다 B2C 업체인 식품회사의 인지도가 더 높고 새로 시작하는 라면 사업을 적극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청보를 전면에 내세웠다.[8] 그러나 만년 꼴찌팀과 가난뱅이의 DNA를 바꾸지는 못한 터라 구단 운영기간 내내 최하위권을 맴돌았고[9] 역시나 1987년 후기리그부터 구단 매각에 대한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전신팀 삼미와 똑같이 청보 역시 주채권은행이었던 KEB외환은행으로부터 야구단을 팔지 않으면 재정 지원을 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구단을 매물로 내놨다. 다행히 프로야구 참가 열의가 컸던 서성환 태평양화학 회장 덕분에 '태평양 돌핀스'라는 새 간판을 달 수 있었다. 그리고 김정우 회장 역시 삼미가 매각되던 당시 김현철 회장이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구단을 넘겨야 했던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새 구단의 주인인 태평양은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기업이었다. 화장품 회사였기 때문에 당시 프로야구 팬덤의 핵심인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인지도가 높았고 비누, 샴푸, 치약 등 소비자들이 매일 사용하는 생활용품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삼미나 청보처럼 적어도 돈에 대한 우려는 덜 들게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태평양 역시 그 이전의 기업보다 조금 돈이 많을 뿐 여전히 돈에 대해 여유가 많은 기업은 아니었고[10] 전력 역시 약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1989년은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과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등 투수 3인방의 영향으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고 1994년은 정동진 감독의 성공적인 리빌딩 덕분에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며 현대 인수 전까진 구단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록을 남기게 된다.
태평양은 1995년 당시 모기업에서 단행한 선제적 구조조정 작업의 일환으로 구단 매각이 진행됐는데[11] 프로야구단 창단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당대 최고의 재벌 기업 현대에 구단을 넘기는 조건으로 무려 470억원의 현금을 챙기면서[12] 어마어마한 시세차익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야구계를 뒤흔든 현대 유니콘스가 탄생하게 된다.
3.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
현대는 1995년 가을 무려 470억원에 태평양을 인수하여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새 출발한다. 당시 현대는 연고지 고졸우선지명 선수였던 박진만에게 당시 고졸 야수 최고 대우인 계약금+연봉 3억원을 쥐어주고[13]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던 박재홍을 빼오는 조건으로 계약금 4억3000만원을 부담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아울러 배수 시설과 잔디 관리 수준이 국내 최악이던 숭의야구장 그라운드를 인조잔디로 전면 보수했다. 심지어 숭의야구장에 설치되어 있던 기존의 구형 전광판을 수리하여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신식 못지않게 개조하는 등 전체적인 시설 개선 투자에 직접 나섰다.[14]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구단 출범 첫 해에 준우승을 하더니 2년 뒤인 1998년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팀의 인기도는 모그룹의 기대만큼 높지 못했다. 1998년 우승 후 홈구장에서 열린 해태와의 1999년 정규시즌 개막전의 관객이 기대했던 것보다 적었던 것이[15] 현대의 연고지 이전 시도에 결정타였다고 금광옥 전 동산고 감독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인천은 서울, 경기와 마찬가지로 지방 출신 이주민이 많은 도시이기에 다른 도시만큼의 충성적인 홈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여기에 1999년은 외환 위기 이후 경기가 가장 나빴던 한 해였고 프로야구의 열기도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0년대 중반보다 떨어졌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현대는 2000년 1월 모기업 차원의 주도로 연고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스포츠신문을 통해 현대의 연고지 이전 소식이 들려왔고 이 소식을 접한 인천의 현대 팬들은 강하게 분노한다.[16] 그러자 현대 구단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일간스포츠에 제9구단을 추가로 창단해 기존의 현대는 인천에 머물고 9구단을 서울 연고 구단으로 키우겠다는 거짓 해명 기사를 내면서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구단 공식 홈페이지 공지 사항에 이런 글을 올리며 인천 팬들을 끝까지 우롱했다.
새천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홈페이지 관리자입니다.
연고지 문제와 관련한 구단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었던 구단의 연고지역 이전에 대해 구단에서는 전혀 고려한 바가 없습니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할 당시 인천·경기·강원 연고지 영입권으로 450억원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영입권을 포기하고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2002년 완공 예정인 문학구장에 대한 장기 임대 등 구장의 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구단에 확인 절차 없이 보도된 것입니다.
연고지는 쉽게 버리고 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립니다.
저희 구단을 믿어주시고 계속 성원 부탁드립니다.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드림
당시의 연고이전 강행에 대해 선수단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자타공인 인천의 슈퍼스타인 김경기와 박재홍을[17]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18] 눈물로 호소하면서까지 구단의 연고이전을 반대했었던 반면 정민태, 임선동, 박종호, 박진만[19] 등 몇몇 선수들은 연고이전 소식에 반색하며 환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팬들의 가슴을 찢어놓았다.[20] 김용휘 전 사장이 훗날 2008년 스포츠 2.0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연고지 이전은 야구단에서 추진한 것이 아닌 모기업 고위층 쪽에서 강행해서 밀어붙인 것이라고 한다. 프런트는 물론 선수단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모기업에서 '불도저'식으로 강행했던 것.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홈페이지 관리자입니다.
연고지 문제와 관련한 구단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었던 구단의 연고지역 이전에 대해 구단에서는 전혀 고려한 바가 없습니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할 당시 인천·경기·강원 연고지 영입권으로 450억원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영입권을 포기하고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2002년 완공 예정인 문학구장에 대한 장기 임대 등 구장의 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구단에 확인 절차 없이 보도된 것입니다.
연고지는 쉽게 버리고 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립니다.
저희 구단을 믿어주시고 계속 성원 부탁드립니다.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 드림
그렇게 현대는 선수단과 팬들의 동의를 일절 구하지 않고 그룹의 이익만을 위해 인천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2000년 시즌 중반에 터진 모기업 현대전자의 부도와 2001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후 소위 기업 내부에서 터진 '왕자의 난'으로 인해 현대가 분해 위기까지 갔고, 이로 인해 재정난 문제가 심각해져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21] 기존의 제2 홈구장이었던 수원야구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하여[22][23] 이후 현대가 해체될 때까지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수원에 눌러앉게 된다. 이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인기 구단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현대의 인기는 수원으로의 임시 연고 이전 이후 이런저런 사정이 겹치면서 바닥까지 떨어졌다. 당시의 수원은 축구 인기가 높으며[24] 그 당시 시장이던 심재덕, 김용서 등도 축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더구나 수원이 현대에게 있어 임시 연고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수원시민들이 현대에 정을 줄 리가 없었다. 거기다 2000년대 초반은 1997년 외환 위기 여파와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으로 인해 한창 야구의 암흑기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현대가 연고지를 이전한 데에는 구단 안팎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현대가 18년간 함께 해온 지역 팬덤을 버리고 연고지를 이전하여 인천을 떠난 것은 인천 팬들을 배신한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2000년 초 현대가 떠나면서 텅 비어버린 인천광역시에는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단을 주워담아 창단한 신생구단 SK 와이번스가 터를 잡게 되었다. SK는 운영 불가 상태가 된 쌍방울의 매각 협상에 대응하지 않았고, 웨이버 공시된 선수들을 영입하여 새로운 지역에서 완전힌 신생팀으로 창단하였다.[25] 당시 프로야구의 연고지 변경과 인수, 재창단에는 정치권의 압력이 있었다는 썰이 파다하게 퍼졌다. 실제로 당시 국민의 정부 최고 실세였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SK에 프로야구단 창단을 반공개적으로 종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또한 당초 SK는 구단 창단 시 그룹의 태생지인 수원이나 성남을 연고로 희망했으나, 기업 고위층에서는 서울 연고를 희망했고, 결국 타협 끝에 수도권 광역시면서도 현대가 떠나면서 비게 된 인천이 가장 적절하다는 분위기가 나왔다.
이렇게 현대의 연고지 이전과 SK의 인천 연고 구단 창단으로 2000년 초 큰 소용돌이가 일단락됐다. 그리고 현대의 연고지 이전으로 인천 지역의 야구팬들은 엄청난 분노와 정신적 공황을 겪게 되었다. 그 결과, 기존 인천권 거주 팬들은 새로 창단된 인천팀 SK라도 응원하게 되었고,[26] 비인천권 거주 혹은 일부 인천 팬들은 비록 연고지를 이전했지만 기존에 응원하던 선수들만큼은 온전히 있는 현대를 응원하였고,[27] 그리고 새로 온 SK의 이질감과 현대의 연고지 이전에 배신감을 느껴 야구 자체에 관심을 끊은 경우[28] 등 이렇게 3등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이런 팬덤이 분열된 양상은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팬이 많지 않아 빈자리가 많았던 수원구장에서의 경기, SK 팬과 소수의 현대 팬으로 어색하게 나눠져 응원전을 펼쳤던 문학구장에서의 경기, 그리고 잠실구장 중립경기의 결과는 KBO 한국시리즈 역대 최악의 흥행참패로 이어졌다.
4. 종말을 고한 현대 유니콘스, 그리고 그 이후
현대는 인천을 떠나 서울로 연고 이전을 시도하나 목동 야구장 리모델링 문제와 서울 연고 두 팀에게 줄 보상금 문제 때문에 바로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고 임시 연고지로 수원시에 머물게 됐다. 한마디로 준비도 되지 않았으면서 억지로 추진만 하고 해결 못하는 꼴. 그러나 수원시는 1996년부터 프로축구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리그에 참가해 스타선수들을 영입해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내었고 1998년과 1999년 K리그 우승을 차지 하면서 축구의 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수원시민으로서도 언젠가는 서울로 떠날 현대에 큰 정을 붙일 이유도 없었다. 이렇듯 아무런 대책없이 불도저식의 무리한 연고이전을 강행한 현대는 크보에서 흥행 최악의 구단의 오명을 썼다. 거기에 모기업인 현대전자의 계속되는 적자와 범현대가 후계구도 싸움인 왕자의 난을 거치며 모기업마저 암운이 드리워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결국 왕자의 난 이후 정몽헌 현대 회장의 자살과 현대전자의 지원 중단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현대는 KBO와 야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 스스로의 뻘짓[29]에 힘입어 종말을 고했고, 농협, STX, KT의 현대 인수 시도가 차례로 무산되었다. KBO가 최후의 수단으로 접촉한 이장석의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를 해체 후 선수단만 인수해서 재창단하는 형식으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된다.[30]
재창단이라면서 계보가 단절된 신생구단이라는 모순이 발생했던 이유는 당시 현대의 막장 상황에 기인하는데, 우선 현대전자가 진작에 GG를 친 상황에서 근근히 이어지던 범현대가의 지원도 끊긴 2007년의 현대는 순전히 KBO의 자금지원으로 운영되었다. 2001년과는 달리 하이닉스는 인수금을 내놓으라고 큰소리 칠 상황이 아니었던 것. 또한 자금력이 빈약했던 센테니얼에서는 사업양수도 계약 체결을 통한 인수나 구단 운영 법인 지분 인수와 같은 재창단의 적절한 예와는 달리 KBO 가입비 120억 원의 분납을 조건으로 현대의 인적 자산, 즉 선수단은 대부분 고용승계하는 대신, 물적 자산은 포기하고 외형상 새로운 법인으로 다시 탄생하겠다는 제안을 걸었다. 밑에서도 언급되겠지만 당시 이장석은 현대의 승계보다는 신생구단의 창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야구팬들이 바라던 대기업의 인수도 아니었고 재창단이라 부르기도 뭔가 미묘한 모습이 되긴 했지만 사실상 현대의 명줄을 쥐고 있던, 그리고 아무도 야구단을 인수하지 않으려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8구단 운영의 파행은 막아야 했던 KBO가 센테니얼의 제안에 콜을 부르면서 현대의 해체와 함께 히어로즈가 창단된 것.
근데 사실은 이것이 단순히 자금력 부족이나 센테니얼에서 먼저 제안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KBO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팀만 해체되어서 8구단 리그가 7구단으로 바뀌게 되는것이다. 실질적으로 같은 팀이지만 공식적으로 역사와 빚을 인수하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8구단 체제를 유지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답이다. 만약 태평양 때나 LG 때처럼 법인 간의 사업양수도 계약 방식으로 넘긴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현대의 주주인 하이닉스가 운영권을 양도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법정관리에 들어갈 정도로 회사가 어려웠던 하이닉스 측에서 초기투자비용 운운하며 양도 비용을 요구하게 될 경우 법적으로는 권리가 있으므로 그 돈을 줘야 된다.[31]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안 팔리는데 인수 비용이 올라가게 되는 건 둘째치고, 현대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쳐다보지도 않아서 KBO 기금으로 운영했건만, 구단 팔린 뒤에는 하이닉스가 인수 비용을 챙겨가는 꼴이 되는데, 이건 상식적으로 봐도 기존 구단들이나 KBO가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현대 팬들의 생각과는 달리 2007년 KT는 고작 60억원대의 가입금에 해체 후 재창단 방식으로 KBO와 합의를 보았다. 금액으로 따지자면 센테니얼은 오히려 KT의 2배인 120억을[32] 가입금으로 지불했으니 센테니얼이 자금부족으로 승계실패 운운은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결국 센테니얼이 아니었어도 어찌 되었든 삼청태현 계보의 단절은 예정된 결말이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SK는 2000년에 현대에서 '인천 야구의 적자'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던 김경기를 데려오고,[33] 2002년 8월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이벤트성 유니폼 데이를 펼치면서 삼미 유니폼을 모티브로 한 이벤트 유니폼을 선보이는 등[34] 현대의 연고지 이전으로 야구 자체에 발길을 끊은 인천 시민의 발길을 야구장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생한 결과 SK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가 정착하고, 김성근 감독 체제 첫 해에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등에 업고 점점 인기를 높여가고 있었다.
4.1. SK의 태평양 데이 행사와 그 후폭풍
그런데 SK가 2008년 5월 4일 문학야구장에서 태평양 데이를 실시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 히어로즈를 상대로. 이 행사는 SK가 KBO에만 행사의 사전 협의를 하고 히어로즈 측에는 통보하지 않았던 일방적인 행사였다.
이날 마침 우리-SK 전의 MBC ESPN 중계방송 해설로 나왔던 박동희는 SK의 행동을 동북공정이라고 하며 크게 깠다. 안 그래도 미묘한 관계이던 히어로즈 팬들은 태평양의 후신은 현대인데 이게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이냐며 크게 반발, SK의 올드 데이 이벤트에 항의하는 성격의 걸개를 들고 온 우리 팬들도 있었다. 반대로 SK 팬들은 태평양도 인천야구 역사인데, 없어진 팀 추억하자는 뜻에서 한 이벤트에 서울 신생팀에서 뭐라 할 자격이 있냐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SK는 정확히 반대되는 논리로 히어로즈가 현대의 후신이니 현대의 수원 야구장 무단 사용 비용을 히어로즈가 우리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동시에 했고, 이에 따라 히어로즈에게 돈은 받아갔으면서 또 태평양과 관련해서는 법인이 다르니 다른 팀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뺌을 시전했다.
1994년 태평양을 무너트린 김재현[35]이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있고, 그러한 모습을 이숭용, 전준호[36] 등 태평양 시절부터 선수 생활을 해왔던 우리 선수들이 지켜보는 상황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이 행사는 인천 연고지 팀으로써 SK를 응원했던 팬들에게는 좋은 평을 들었던 반면, 히어로즈 팬들에게는 악담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양 팀 팬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37] 결국 SK 입장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꼴이라 군소리 못하고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히어로즈의 행보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창단 초기 히어로즈의 구단주 이장석은 히어로즈가 서울 신생 팀으로 비춰지길 바라고 있었다.[38] 물론 히어로즈야 과거 현대가 사용했던 KBO의 기금 채무를 탕감한다는 조건 하에 법적으로는 삼청태현의 기록을 이어받지 못하는 별개의 팀으로 창단되었다는 점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낯선 지역에 창단한 신생구단이 안고 가기에는 리그 최강팀으로 불렸던 현대란 상징은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운 명예인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삼청태현은 전통적인 인천 연고 구단으로 서울 신생팀으로 시작하려던 히어로즈 입장에서는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침몰하는 난파선인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현대에 남았던 김시진을 위시한 코칭스탭들을 대거 잘라버렸으며,[39] 전준호와 같이 연봉의 고하를 막론하고 현대색이 짙으면서 은퇴가 가까운 선수들을 푸대접하거나 아예 그냥 방출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히려 이러한 '현대색 지우기'는 히어로즈 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구 현대 팬들의 반발과 팬이탈을 불러왔었고[40], 그런 구단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것이 위의 태평양데이 이벤트였다.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삼청태현 계보에 대한 논란 역시 재점화되었고, 이에 대한 히어로즈 구단의 태도 역시 이 시점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9년 조태룡 단장이 부임하면서 팬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삼청태현 역사의 필요성을 주장, 구단주 이장석을 설득해 현대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김시진을 다시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이후 목동구장 전광판을 통해 히어로즈가 삼청태현의 역사를 이어받았음을 알리는 한편, 2009년 9월 삼청태 유니폼 모양의 LED 배지를 만들어 판매하고 구단 사이트에 삼청태현 히스토리를 실어 놓았다.
2009년 당시 목동구장 전광판의 모습.[41] |
이후에는 완전히 갈피를 잡은 듯, 태평양 최후의 선수이자 현대의 상징이었던 이숭용을 한 팀에서만 2,000경기를 뛴 선수라고 소개하며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러주었으며, 당시 스포츠 언론 역시 '최초로 한 팀에서만 선수 생활 하면서 2천 경기 출장'이란 타이틀을 붙여 이후 넥센 팬덤이 스포츠 언론계도 현대와 넥센을 하나의 팀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KBO 역시 공식 보도 자료로 저 내용을 돌렸는데, SK에서조차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선수 본인 역시 현대와 넥센을 한 팀으로 여긴다.[42] 다만 자신의 팀이 태평양-현대-넥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연고지가 각각 인천-수원-서울로 옮겨지는 바람에 이숭용 본인은 선수생활을 오직 한 팀에서만 보냈는데도 딱히 크게 소속되는 연고지(뿌리)가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원본 영상. 연고지에 대한 이숭용의 회한이 잘 나타나 있다.[43]
2013년 시즌 이후에는 염경엽 감독을 선임하게 된 배경으로 염 감독이 현대 출신이기에 선임했다고 이장석 사장이 직접 언급했다. 게다가 과거 현대의 고문이었던 현대해상의 정몽윤 회장은 후임 감독으로 박흥식 당시 타격코치를 원했다고. 정몽윤은 현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현대가 해체된 이후에도 2010년부터 계속 넥센의 스폰서를 해왔다. 다만, 2017년에 손을 끊고 지금은 범현대가인 KIA 타이거즈에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너무 안타까운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게 갈라진 팬들은 한때 같은 한 지붕에 있던 사람들 사이였는데 말이다.[44] 최소한 키움이 삼청태현의 계보를 이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연고지 이전 직후 현대를 응원했고, 지금도 그 현대가 정신적으로 이어진 히어로즈를 응원하고 있는 팬들뿐이다.
4.2. 넥센 히어로즈 때문에 산다 사건
이런 양측의 갈등은 2014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2014년 9월 '넥센 히어로즈 때문에 산다'라는 책[45]이 출판되었고 넥센 구단의 입장에 동조하여 넥센의 역사는 삼청태현을 계승한다고 나오는 바람에 양측에서 각각 "서울 신생구단인 넥센이 인천야구의 역사인 삼청태를 지들거라고 겆북공정을 시도한다.", "니들은 삼청태 자격없는데 웬 참견이냐?" 등으로 논쟁이 일어나는 중이다. 사실 넥센 팬덤에서도 좀 억울한 게, 김은식 작가가 쓴 다른 팀의 'XX 때문에 산다' 시리즈와 달리 '넥센 히어로즈 때문에 산다'만 고유라 기자가 저술했고, 책의 저자인 고유라 기자는 이 시기 한창 '코유라'[46]로 불리며 혀갤에서 까이고 있던 판이었기 때문. 당장 저 책이 나오자마자 혀갤에서는 삼청태현 부분을 포함해 이 책을 냄비받침 취급했고 고유라 기자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회복된 2015년 현재도 해당 책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 게 없다.
5. 그럼 후계자는 누구인가?
“정확히 10년 전인 2006년 사업을 하기로 결의하고 2007년 회사를 설립해 2008년 서울 히어로즈를 창단하게 됐다. 우리 구단의 역사의 효시가 10년이라 생각한다.
이장석. 2016년 1월 구단 시무식에서. ##
히어로즈 팬덤의 경우 현대의 법인을 해체했으나 사무국의 공식적인 관할 아래 권리와 책임을 승계하였으니 자신들이 삼청태현의 적통자라는 주장을 한다.이장석. 2016년 1월 구단 시무식에서. ##
SSG 팬덤은 현대와 한국시리즈까지 치러 본 마당에 SK가 현대를 계승했다고까지는 못하고 어중간하게 '인천에 있었던 팀이라면 모두 인천 야구의 역사'라 하며, 수원으로 이전하기 직전까지의 삼청태현 역사에 대해 최소한 인천의 야구팬들이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히어로즈의 경우, 인적 승계를 근거로 삼청태현의 우승 기록과 원년 구단 자격을 잇는다는 주장은 구단이 해체한 뒤 새로 창단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정식으로 인수했다면 애초에 이런 논란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프로 스포츠 팀은 당연히 팀의 연속성이 우선이며, 실제로 기존 구단을 해체한 후 재창단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팀과 연고를 이전하며 역사를 이어온 스포츠팀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은 두 팀 모두 과거 팀들을 해체한 뒤 창단했다는 것이다. 인적 승계를 근거로 삼청태현 족보의 계승을 주장한다고 해도 어느 시점부터는 현대 시절 인적 자원이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니 이 논리는 너무 쉽게 격파된다.
같은 이유로, SK는 인천 야구의 계보는 이을 수 있지만 삼청태현의 후계자는 될 수 없으며, 삼청태현이 인천에 머무를 동안 활약했던 선수들 역시 SK와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SK는 쌍방울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했지만 스스로 신생팀 창단을 선택했기에 삼청태현과는 무관하며, 그들에게 삼청태현은 그저 현재 연고지에 있었던 사라진 팀이자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같은 리그에서 뛰었던 팀일 뿐이다. 연고지가 우선이라는 주장은 팀의 연속성이라는 요건에서 본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프로 스포츠 구단에게 연고지 이전은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고, 연고지를 기준으로 팀의 족보를 정의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연고지를 따지기 이전에 이 팀들의 역사는 공식 해체로 끝났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히어로즈는 현대를 계승했으나 분명히 새로운 구단으로서 창단된 것이니, 현대와의 연관성과 역사를 강조하는 수준까지만 가능하고 완전히 같은 팀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SK는 쌍방울 출신 선수들을 기반으로 만든 신생 구단이며, 삼청태현이 경기를 했던 지역에 자리를 잡고 야구를 한다는 사실 외에는 삼청태현과 연관성이 없다. 이 논쟁은 삼청태현의 계승자라는 키움 일부 팬덤과 삼청태현을 왜 너희들이 가져가냐는 인천 야구 팬덤 사이의 우기기 논쟁이다. 이 문단의 역사 역시 객관적인 사실만 남기려는 사람들과 그 사실 기록조차 조금이라도 자신들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려는 양 팬덤의 누더기 싸움이었다.
삼청태현은 삼청태현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신생 구단들은 과거는 잊고 신생 구단만의 역사를 써나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SSG는 창단 25년차가 되었으며, 2017년 18년차가 된 이후 이미 인천 프로야구 역사의 절반 이상이 되는 시간이다.[47], 키움 역시 창단 15년차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삼청태현을 응원하던 기존 팬들의 이탈[48] 및 삼청태현의 추억이 없는 신규 팬덤의 유입[49] 등으로 팬덤이 물갈이되면서 양 구단 모두 굳이 삼청태현을 이용한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 다만 SSG의 경우 여전히 삼미 컨셉의 얼트 유니폼을 출시 하거나 모기업의 자회사인 이마트24에서 슈퍼스타즈 맥주를 출시, 판매하는 등 계속해서 자신들과 삼청태현을 연관짓는 마케팅을 이어오고 있는 반면, 키움의 경우 2017년 캐치프레이즈[50]에서 볼 수 있듯이 굳이 삼청태현에 대한 추억팔이 없이 자신들의 역사만으로도 충분히 마케팅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팬들은 해외의 특이한 사례를 들고 오기도 한다. NBA 팀인 샬럿 호네츠의 연고지 이전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호네츠가 2002-03 시즌을 앞두고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을 한 뒤, 샬럿의 시민들은 NBA팀을 돌려달라고 사무국에 매달렸고 결국 2004년에 NBA의 30번째 팀인 샬럿 밥캣츠를 이 지역에 새로 창단하게 되었다. 이 팀의 현재 구단주는 마이클 조던. 뉴올리언스로 간 호네츠는 2013-14 시즌을 앞두고 팀 이름을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개명했고, 이 때를 놓칠세라 샬럿 밥캣츠는 예전 이름인 호네츠를 되찾았다. 이 때 펠리컨스와 밥캣츠 사이에 삼청태현 논란과 비슷한 족보 문제가 발생했는데, 밥캣츠는 샬럿 시절의 호네츠 역사(1988~2002)를, 펠리컨스는 뉴올리언스 시절의 호네츠 역사(2002~2013)를 가져가는 방향으로 족보를 정리했다.
5.1. 키움 히어로즈 팬덤 관점
키움의 경우 현대가 망한 후, 현대의 기존 선수 등 공식 기록 제외 거의 모든것을 승계하였으므로 적통자라는 주장이다. 비록 완전히 승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후계자로 공인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선수는 이숭용이다.[51] 태평양, 현대, 넥센의 유니폼을 입었고, ‘KBO 최초 한 팀에서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업을 이뤘다.[52] 이는 삼청태현과 키움이 한 팀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다.[53]
물론 KBO리그는 연고지라는 개념이 정착되어 있다. 때문에 인천 야구 팬이 삼청태현에 향수를 느끼는 것까지는 키움 팬덤 입장에서도 감히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인천 야구 팬덤은 향수를 느끼는 것을 넘어 아예 키움 팬이 느끼는 향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의 야반도주는 분명 인천 야구에 대한 배신이다. 그러나 수원으로 현대가 옮기고 나서도 계속 응원하는 팬, 수원에서 현대를 응원하기 시작한 팬[54], 목동과 고척에서 유입된 팬 등이 버무러진 것이 오늘날의 키움이다.
지역에 관련한 논쟁에서는, 지역에 관계없이 같은 팀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약 지역을 바꾸었다고 해서 족보가 끊어진다고 하면 지금 현대 유니콘스 항목은 '현대 유니콘스/인천', '현대 유니콘스/수원'과 같은 식으로 나뉘어야만 할 것이다.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선수였으니 지금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레전드가 아닌가?[5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라스베가스로 옮기는 그 날부터 빌리 빈은 다른 팀 단장으로 기록되나? 현대가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애정을 저버린 것은 맞다. 하지만 스포츠의 역사는 결국 선수로 결정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현대의 인적 구성을 계승한 키움은 적어도 구색은 갖춘 셈이다. 정말 ‘지역=팀’이라고 생각한다면 잠시나마 충청도 연고를 쓴 OB와 대전에 쭉 자리잡은 빙그레도 형제인가?[56] 삼청태현과 키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현대의 도주극에 대한 혐오의 연장선 밖에 안 된다.
따라서 \'현대는 키움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숭용을 비롯해 정민태, 송신영, 이택근, 강정호, 오주원, 임창민 등 현대와 키움 사이에는 여러 선수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로 인해 당대의 야구인[57]은 현대와 키움을 한 팀으로 인식한다. 해당 시기 현대-히어로즈에 몸담고 있던 선수들은 특히나 그 인식이 확고한 편으로, 예컨대 이택근은 2024년 8월 29일 삼성 VS 키움전 중계 도중 카메라에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은 관중이 잡히자 "우리 집에도 현대 시절 유니폼이 없다. 꼭 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는 듯이 "키움의 전신이지 않느냐"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해체까지 현대는 수원에 있었고, 히어로즈는 서울 목동 야구장에서 시작했으므로 연고 이전을 한 것이니 더욱 무관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실상은 정반대로 현대가 서울행을 재정적 문제로 실행하지 못하고 수원에 무연고로 눌러앉아 있던 상황을 현대의 후신으로서 참가하게 된 히어로즈가 LG와 두산에 입성금을 지불하고, 목동 야구장을 프로용으로 개조해 서울 입성을 이뤄내는 것으로 타개한 것이다. 쉽게 말해 현대가 추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완수하며 참가한 것이며, 오히려 강한 연관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삼청태현 계승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SSG는 현대가 떠난 자리에 새로 생겨난 구단이다. 명백한 반증인 2003년 한국시리즈는 차치하더라도, SK는 엄연히 쌍방울의 선수단을 흡수했음에도 탄생 당시 ‘신생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선수 수급을 받은 반면, 우리는 2008년 당시 그런 게 없었다. SK는 취사선택을 2번이나 했는데, 거기에 수원에 엄연히 존재하던 현대의 역사를 빼앗으려는 시도도 했다.[58]
키움, 그리고 삼청태현의 올드팬이 사랑한 것은 선수들과 팀이지, 모기업이 아니다. 선수가 그대로 유지됐는데 어떻게 역사를 부정하느냐는 관점을 가진 키움 팬덤은 심정적으로 삼청태현과 키움이 별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히어로즈는 법적으로 삼청태현과의 연관성을 공인 받은 바가 있으므로 사실 히어로즈가 삼청태현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그냥 틀렸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5.2. SSG 랜더스 팬덤 관점
SSG 팬덤의 경우 삼청태현의 역사 자체를 이어받는다는 주장을 하기보다는[59], 인천 야구의 역사를 강조하며 삼청태현 역사를 추억 공유를 명목으로 SSG의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래서 태평양 데이 같은 행사의 경우에는 단순히 '인천 연고지 야구팀' 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한 행사이며, 이러한 전 연고지 팀의 유니폼을 입고 하는 행사는 메이저리그에도 많이 존재하기에 역사 왜곡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SK는 선수단의 인적 구성이 쌍방울이라는 비인천 출신을 주축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도 팀 구호, 인천 출신 선수나 인천 연고 구단 프랜차이즈 영입과 같은 여러 방법을 통해 인천 연고로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60] 특히 태평양의 전성기 시절 지도자인 김성근 감독이 SK를 맡아 3회 우승, 1회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팀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SK가 인천 야구팬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의 인천 연고구단은 그러한 SSG이며, 삼청태 등 인천 연고구단의 역사를 포함한 인천지역 야구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 가보면 관중석 복도 한켠에 전력 투구하는 장명부, 삼미 유니폼 반납식, 당나귀를 타고 교체되는 청보 투수 등 삼청태 시절의 사진 자료가 걸려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역시 역사를 잇는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도원구장에서부터 인천에서 야구를 보아왔던 팬들을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 개념인 셈.[61]
당연히 키움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삼청태현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이 KBO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SSG 팬이 향수를 느끼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는 다른 프로 스포츠와 달리 지역 연고가 매우 잘 정착되었고 각 팀의 팬층이 지역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삼미, 청보, 태평양은 ‘영광’보다는 ‘고난’에 가까웠으며, 그 고난의 동반자는 분명 인천에 있었다.
다만, 현대에 관한 인천 야구 팬의 감정은 동일하지 않다. 첫째는 야반도주한 현대에 느끼는 배신감이다. 차라리 그냥 당당하게 옮긴다고 말하면 모를까, 현대는 “떠나지 않는다”라며 언플을 때렸다. 이는 서울 연고지 이전이 여의치 않자 시간을 번 것이다. 여기서 남았다면 해프닝이었으나, 기어이 수원으로 옮겼다. 때문에 인천 야구팬 중에는 현대도, 현대의 선수단을 이어받은 키움도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현대의 연고 이전은 인천 야구팬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독단적 결정으로 인천 야구팬은 삼청태의 인천 시절을 통째로 빼앗겼다.
둘째는 그래도 우승을 안겨준 현대에 대한 그리움이다. 꼴찌에서 벗어나 우승을 만끽했던 1998년 한국시리즈는 분명 인천 야구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엄연히 서울에 있는 키움이 그 우승까지도 자기들 몫이라고 하니 인천 야구의 팬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밖에 없다. SSG가 삼청태현의 후계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도원야구장 한 번 못 밟은 서울팀이 인천 야구의 첫 영광을 날로 먹으려는 것이다. 집 근처 야구장을 계속 찾았던 인천 야구 팬을 무시하는 처사다. 키움이 현대의 후계자로 ‘인식’되는 것은 정근우도 인정할만큼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승 횟수 승계에 민감한 것은 이러한 내력이 있어서다.
위 주장은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각자의 개연성을 갖고, 서로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인천 야구 팬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에서 기인한다. 현대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 중 어떤 것이 더 큰지에 따라서 갈린다. 전자라면 ‘현대는 배신자’고, 후자라면 ‘현대는 우리 역사’인 셈이다. 두 주장은 현대의 야반도주로 인해 영구적으로 논리적 결함이 생긴다.[62]
결정적으로, 인천 야구 팬덤은 삼청태에 대해서는 그리움을 느끼지만, 현대에 대해서는 시도해볼 명분조차도 없고, 시도하고자 하는 미련도 없다.
5.3. 총평
정리하자면 히어로즈는 삼청태현을 해체 과정을 거쳐 계승하여 2008년부터 참가하고 있는 팀이다.이 문서에서 여러번 강조되었듯 V4 원년구단 현대 유니콘스는 해체했고, 히어로즈 구단은 2008년에 새로 시작된 구단으로서 원년 구단/4회 우승 구단이 아니다. 그러나 검찰이 “(이장석 대표가) 인수하기 전에 서울 히어로즈는 정규시즌 우승 4회를 차지한 명문 구단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가) 트레이드를 하며 전력이 약화되며, 직원들은 광고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다”라는 내용을 언급한 바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법적으로도, 기업의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도 삼청태현과 히어로즈는 매우 높은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며, '해체'라는 단어 하나에 꽂혀 모든 연관성을 소멸시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설이다.[63]
이에 발맞춰 KBO 사무국 측에서도 삼청태현-히어로즈의 경력을 이적이 없는 완전한 원클럽 커리어로 인정하며, 이 문서에서 서술된 양팀간의 족보 문제도 격파할 만한 근거로서 SK의 히어로즈에 대한 현대 시절 권리 침해 배상금 청구가 있다. SK는 히어로즈가 창단할 때 히어로즈가 현대의 권리를 모두 이은 후신이므로 현대가 수원 야구장을 6년간 계약 위반으로 연장 사용한 것에 대한 배상금을 청구했고, KBO가 이를 받아들여 히어로즈는 SK에게 그 배상을 했다. 히어로즈가 삼청태현의 후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현재로서는 어제의 유니콘스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팬들이 오늘의 히어로즈를 응원하고, 인천의 야구단을 응원했던 인천 야구 팬들이 연고지를 떠난 어제의 유니콘스 대신 오늘의 랜더스를 응원하는 것일 뿐이다.
키움 구단이 삼청태현의 역사를 비공식적으로 구단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키움이 우승했을 때 현대의 기존 4회 우승을 포함한 다섯 번째 우승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며, 구단의 공식적인 역사는 2008년에 시작하는 것이 자명하고, 그저 삼청태현의 정신적 후신이라는 명분을 글자가 아닌 마음속으로만이라도 가진다 해도 팬들과 구단에게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SSG 역시 인천에 있었던 삼청태현의 존재 자체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팀들의 성적과 역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연고지 측면에서의 후계자로서 과거 연고지에 존재했던 구단을 추억하는 것이다.
야구인들의 경우에는 키움을 현대의 후신으로 인식하고 있는 편이다.[64] 주로 인터뷰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키움에서 뛴 적 없는 타 팀 소속 모 유명 야구선수의 경우에는 현역 시절 넥센 유니폼에 사인해달라는 넥센 팬의 사인요청에 자기는 현대를 싫어한다며 거절한 일화도 있다.[65] 현대를 대신하여 제8구단으로 들어온 것과 무엇보다 선수단을 계승받은 것이 키움이 현대의 후신 구단으로 여겨지는데 큰 요소가 된 듯 하다. 재창단 방식이긴 해도 야구인들이 느끼기에는 인수랑 별 차이가 없기도 하고. 야구인들이 까칠하게 인수니 재창단이니 일일이 따지진 않을 것이고.
6. 기타
- 인천 SSG 랜더스필드(구 문학 야구장) : 원래 현대가 홈구장으로 쓰려고 계획했으나 결국 현대그룹 차원으로 연고지 이전을 결정하면서 2002년에 SK가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현대건설이 시공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문학야구장을 비롯한 인천문학경기장 건설 공사에는 ㈜한양과 성지건설, 한진중공업 건설부문이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이 경기장의 건립 과정에 관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려던 현대가 설계 과정에 직접 관여한 적은 있다. 현대가 설계에 관여했다는 것이 현대건설 시공사 참여설로 와전된 셈.
- 자신과의 싸움으로 유명한 2003년 한국시리즈는 SSG 팬들이 인천야구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현대를 족보로 언급할 때 키움 팬은 물론 타 팀 팬들도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자주 쓰는 예시이며 그 어떤 이들도 반박할 수 없는 마법의 말. SK가 현대를 이어받은 거면 SK와 현대의 한국시리즈는 자기자신과의 싸움, 혹은 청백전이냐는 이야기.
- 넷 다 마스코트에 야구배트를 들고 있는 캐리커처가 있다.
- 결과적으로는 현대의 모기업이었던 하이닉스는 2012년에 SK에 인수되었으나, 삼청태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기업 인수도 아니었고. 그리고 SK도 구단을 이마트에 넘기면서 SSG로 바뀌었다.
- 공식적으로 KBO 리그에서 팀명을 가장 많이 변경한 두 팀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한 팀은 키움.[69] 태평양으로 구단명을 변경한 1988년부터 독보적인 횟수를 자랑했지만 2019년 넥센이 키움으로 이름을 바꾸며 공동 1위가 되었다.
- 명목상이나마 연고지에 이북 5도가 있었기 때문인지 유달리 실향민 출신 기업인들이 이 계보와 연관이 깊다. 삼미를 넘겨받은 청보의 김정우 회장은 부친인 김영귀 창업주가 평양 출신인 실향민이었고, 후에 태평양으로 이 팀을 넘겨받은 태평양의 창업주 서성환 회장과 이 계보의 끝을 장식한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 역시[70] 각각 고향이 평산과 통천이었다. 또 이들의 주 연고지였던 인천 역시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해 살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 대대로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선수가 많았다. 감사용, 인호봉, 금광옥, 김바위, 이영구, 정구왕, 여태구, 원원근, 가내영 등이 주인공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책에도 특이한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가 잠시 등장한다. 작가는 "선수들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기억하기 쉽다"고(...) 표현한다.
7. 관련 문서
- 삼청태현/암흑기
- 이숭용 - 삼청태현 - 히어로즈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모두 경험한 선수. 선수 시절 태평양-현대에서 뛰었고, 현대 해체 당시에는 주장으로서 팀의 해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히어로즈로 해체 후 재창단 되어 히어로즈에서 4시즌을 보내며 2천 경기 출전을 완수하고 은퇴했다. 은퇴 당시 보도자료에 이적 없이 통산 2천경기 출전으로 표기가 됐을 정도였다.
- 현대 유니콘스/연고 이전
- 인천 도원구장 연고 구단의 사건 사고
- 흥행참패동맹 - 흥참동 중 NC 다이노스를 제외한 세 팀이 삼청태현과 연관이 있다. 삼청태의 연고지를 이어받은 SSG, 선수단을 이어받은 키움, 연고 이전한 현대의 임시 연고지였던 수원을 이어받은 KT까지. 사실 NC도 접점은 있는데, 구단주인 엔씨소프트의 김택진이 과거 현대를 인수하고자 협상을 하러 하일성 사무총장과 대화를 나눴으나 이 당시 NC의 잠재력을 무시한 KBO 수뇌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다.[71]
- 해체 후 재창단
7.1. 키움 히어로즈
- 삼청태현에 관한 올드팬의 추억
- 가수 김광진은 삼미 때부터 삼청태현을 응원해오던 대표적인 팬이며, 지금은 SSG보다 후신인 키움을 좋아한다고 하며, 스스로를 "히어로즈 지킴이"로 자청하고 있다. 가끔 트위터에 삼청태현과 키움에 대한 얘기를 올리기도 한다.
- 2008년 재창단 당시의 현대 선수단 중에선 2024년 현재 코치 4명과 감독 1명[72]이 남아있고, 선수는 오주원을 끝으로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뜬금없이 음주 운전 삼진 아웃된 강정호가 재복귀를 하는 바람에 다시 최후의 1인이 남아있게 될 수도 있었으나 KBO에서 강정호 재복귀를 승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정석 전 감독도 KIA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현대에서 기록원으로 일했으며, 역대 감독 중 김시진, 염경엽 모두 현대의 선수단 출신이기도 했다. 그나마 초대 감독인 이광환과 5대 감독인 손혁은 LG 소속이었고 둘 다 삼청태현 팬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73] 인물들이었다.
- 현대왕조 블로그. 글쓴이는 구 현대팬이며, 인적 자원을 계승한 키움을 응원하고 있다.블로그[74]
7.1.1. 공식 웹사이트 논란
과거 키움 공식 웹사이트에 있었던 삼청태현 히스토리[75]예전부터 여러 차례 지적받았지만, 2019년까지 웹사이트에 키움 전신이라는 이름으로 삼청태현의 역사를 그대로 놔두었다. 결국 오마이뉴스와 KBReport의 기사가 올라왔고 타팀 팬들의 날선 반발이 이어지자 2019년 1월 17일에 삭제되었다. 다만 구단 공식 웹사이트에서의 링크만 삭제했을 뿐 페이지 자체는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므로, '현대 유니콘스'를 검색 엔진에 검색할 경우 여전히 키움 히어로즈 웹사이트 해당 페이지가 검색결과의 최상단에 표시되고 있다.
현대가 키움 전신? 관계자 "제작 과정 실수…페이지 삭제할 것" 이 사건에 대한 관계자의 입장도 올라왔는데, 요약하자면 외주 업체에게 홈페이지 제작을 맡겨서 넥센 시절 홈페이지 구단 소개란이 그대로 넘어왔다는 소리다. 따라서 해당 히스토리는 넥센 시절에도 있었다. 키움으로 넘어와서 해당 히스토리가 새로 적힌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 외에도 구단 소개에 키움의 역사는 20년 전 프로야구 원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적힌 구절이 있었으나 이것도 2019년 1월 17일 삭제되었고, 그 뒤에는 삼청태현의 홈구장이었던 도원구장과 수원구장이 언급된 구절이 논란이 되자 결국 구단 인사말을 새로 올렸다. 새로운 글에는 2008년 서울을 연고로 창단한 히어로즈 프로야구단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7.2. SSG 랜더스
- SK는 인천에 정착하고 올드팬들의 향수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미, 청보, 태평양을 마케팅 과정에서 활용했지만[76] SK를 이어받은 SSG는 어느 정도 인천 연고지에 대한 정착이 된 상태에서 팀이 만들어진 만큼 '랜더스'라는 이미지를 유독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SK 시절의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77][78]
- SSG의 형제회사인 이마트24가 2021년 수제맥주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야구 맥주 3종을 내놨는데 여기에 삼미의 구단 명칭인 슈퍼스타즈와 슈퍼맨 마스코트를 써먹었다. 정식 제품명은 '슈퍼스타즈 페일에일'.
- 인천 토박이 출신 개그맨으로 널리 알려진 지상렬, 염경환, 이혁재는 SSG의 광팬이기도 하다. 지상렬은 인천야구 관련 다큐에 당시 팬으로 몇번 얼굴을 비춘 적이 있다. 특히 이혁재는 인천야구를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금광옥 역을 맡기도 했고 종종 SK의 시구자로 나오기도 했다. 연고 이전 당시 엄청 화냈다고 하며, 인터뷰에서 대놓고 "현대 개새끼"라고 욕을 했을 정도였다.
[1] 구단 창단 당시부터 1995년 2월까지 제1 연고지의 행정 구역명은 인천직할시였다.[2] 1999년 시즌 후 기존 연고지인 인천을 떠나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연고지 이전 추진 과정에서 기존 서울 연고 구단(LG 트윈스, 두산 베어스)에게 줘야 할 각 27억씩의 권리금을 주지 못해 서울 연고 구단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홈경기는 임시방편으로 수원 야구장에서 치렀다.[3] 다만 깜짝 놀랄 만한 성적도 낸 적이 있는데 삼미는 1983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2위를 기록했고 태평양은 1989년 정규시즌 3위, 1994년 정규시즌 2위를 했다. 가을야구 진출은 태평양 때만 두 번 해봤다. 1989년과 1994년이 있으며 특히 1994년은 현대 인수 이전까지 구단 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이기도 하다.[4] 프로야구 창설 논의가 오가던 1981년 여름에, 대한민국은 실제로 올림픽 유치에 총력을 다하던 시기였고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단 임원으로서 세계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만나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결국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를 통해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했다. 그러나 올림픽 유치 작업을 마친 직후 프로야구 원년 시즌이 개막했고 프로야구가 생각 외의 흥행 대박을 치자 내심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K리그가 출범하자 프로야구 참여 거부에 대한 만회 차원에서 축구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의 울산 HD FC다. 그러나 현대는 프로야구단 창단 가능성을 여러 차례 타진했고 먼 길을 돌고 돌아 14년 뒤인 1995년 말 인천 연고의 야구단 태평양을 인수하게 된다.[5]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임광정 회장이 프로야구단 창단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임 회장은 인천이 아닌 서울 연고지를 원했고 KBO가 서울을 줄 수 없다고 말하자 창단을 거부했다.[6] 리그 출범 당시 인구수를 기준으로 봤을 때 대전의 인구가 가장 적었다. 더구나 대전 고교야구의 수준도 당시에는 약체였다. 때문에 당시만 해도 대전은 야구의 불모지로 분류됐다.[7] 이때 두산에 당근이 될 만한 대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대전에서 3년을 보낸 뒤 1985년부터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약속이 이뤄졌고 1985년부터 OB 베어스가 두 번째 서울 연고 구단이 된다.[8] OB와 빙그레 이글스도 같은 이유로 모 그룹명이 아닌 그룹의 대표적 소비재 계열사 이름을 야구단에 달았다. 물론 두 팀 모두 해당 소비재 계열사가 계열분리가 되어 남남이 되는 바람에 결국 모 그룹 명칭을 구단명으로 삼게 된다. 여담으로 삼미는 소비재 계열사가 하나도 없는 B2B 사업 그룹이다 보니 야구단이 적자를 보더라도 팀 이름 붙은 기업의 홍보효과로 만회하는 다른 팀과는 사정이 달랐고, 이는 바로 매각의 한 이유가 된다.[9] 청보도 삼미만큼이나 인지도가 떨어지는 기업이었다. 1985년부터 야심차게 라면 사업을 시작했지만 돋보이는 광고만 만들었을 뿐 맨정신에 눈 뜨고 먹기에는 차마 어려운 극악의 맛을 낸 탓에 시장에서 도태되고 말았다.[10] 지금이야 아모레의 주가가 높고 오너 일가의 주식 보유 가치가 급등했지만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당시만 해도 태평양은 30대 재벌에 겨우 들 정도의 기업이었다. 더구나 이 당시 태평양의 기업 운영 전략은 큰 돈을 들이지 않는 짠돌이 경영에 가까웠다. 서성환 회장이 실리를 중요시하던 개성상인 특유의 경영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11] 이 당시 구단 매각을 진행한 사람이 서성환 회장의 차남이자 현재 아모레퍼시픽 회장인 서경배다.[12] 태평양과 현대의 구단 양도 과정을 보면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당시 태평양이 구단 매각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평양은 1987년 청보를 인수할 때 별도의 매각 계약금 없이 50억원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에서 구단을 인수했다. 그리고 8년간 구단을 잘 운영하다 매각을 결정했고 인수자로 나타난 현대 측에 청보 시절부터 이어온 빚(이자 20억원 포함 총 70억원)을 청산하고 어림잡아 평가한 구단의 현존가치 400억원 등을 합산 평가해 현금 총액 470억원을 달라고 찔렀다. 그런데 현대가 이 제안을 정말 쿨하게 받아들이면서 470억원이라는 계약이 성사됐다. 대한민국 전체를 호령할 정도로 자금력이 빵빵했던 당시 현대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어쨌든 이 계약으로 태평양은 8년간의 구단 운영자금을 모두 회수한 셈이 됐다.[13] 당시 인천고 졸업반이자 고려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던 박진만을 현대로 데려온답시고 스카우터가 귀찮게 계속 쫓아다녔는데, 박진만이 스카우터를 떼어낼 요량으로 그럼 3억원 달라고 얘기하자 현대 스카우터가 코웃음을 치며 자동차 트렁크에서 007가방에 담긴 3억원과 계약서를 꺼내왔다는 무시무시한 일화가 존재한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체육특기자 대학 진학 기준인 수능 점수 40점(200점 만점)을 넘지 못해 입학하지 못한 것으로 발표되었다.[14] 장기적으로는 숭의구장을 전면 리모델링하는 것이 현대 구단의 목표였으나 황당하게도 구장이 무허가 건물이었기에 인천광역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못했고, 전면적인 리모델링은 단념하게 된다.[15] 고작 12,000석 규모의 홈구장 관중석 입장권이 매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홈팀 현대가 직전 연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기에 어느 정도 구단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도 있었을 테고 더구나 상대도 연고 구단인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못지않게 수도권에서 압도적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해태였기에 매진은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해보였던 개막전 매진이 실패하자 현대 구단 경영진 입장에서도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16] 인천 구월동 현대해상 건물에 입주해 있던 현대 구단 사무실에 연고지 이전에 항의하는 전화가 이어진 것은 물론 당시 운영되던 구단 공식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도 연고지 이전을 반대하는 항의 글들이 쏟아졌다.[17] 실제로 박재홍은 현대가 연고 이전을 하던 당시 선수단 내 반대파 중 하나였고 훗날 KIA 타이거즈를 거쳐 SK 와이번스에 입단했을 때도 인천으로 다시 돌아와서 좋다는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인천에 대한 애정이 크기로 유명했다.[18] 당시 현대의 일부 선수들과 그 가족들은 그 즈음 현대가 인천 옥련동에 대규모로 조성한 현대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연고도 연고지만 가족의 이주 또한 고려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19] 다만 박진만의 경우 SK로 이적해 인천으로 돌아온 뒤 한 인터뷰에서 현대 구단의 연고지 이전에 찬성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오히려 당시 고향인 인천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웠다고 했을 정도.[20] 정민태가 후에 밝히길 본인은 구단에는 반대의사를 알렸으나, 인터뷰에서 어디로 가서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오해를 받았다 한다. 정민태의 증언대로 현대라는 거대한 모기업에 비해 선수단은 힘이 없는 건 사실이었고, 구단이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선수단이 막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21] 인천 연고지 보상으로 SK에게 받은 54억원을 이미 먼저 서울에 터를 잡던 LG와 두산에게도 각각 27억씩 지불해야 서울 입성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하필 그 시기에 모기업이 위기에 빠지며 해당 자금을 죄다 써버리는 바람에 서울 입성을 미루게 된다.[22] 서류상 현대의 연고지는 서울특별시였지만, 서울시내에서 프로 전용구장으로 쓸만한 경기장이 없는데다가(당시 목동 야구장은 아마추어 전용 구장으로 프로구단이 쓸 경우 상당수의 개조를 거쳐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돈도 없어서 SK 연고권 내의 수원 야구장을 무단점거한 셈이었다. 즉, 사실상의 무연고. 덕분에 이러한 연고지 문제로 인해 KBO는 2003년부터 현대의 1차 지명권을 박탈했고, 이는 현대 말기부터 우리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선수층이 얇아진 주 원인이 되었다.[23] 이는 SK 입장에서도 상당히 골치아픈 상황이 되었는데, 인천 입성을 위해 현대에게 54억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가 수원에 눌러앉게 되자 돈은 돈대로 주고, 연고지는 연고지대로 뺏기는 상황이 된 셈.[24] 지금은 다소 침체된 상태지만 2000년대 초반 수원 삼성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현질로 수집해 레알 수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프로축구를 지배하던 최고 인기 구단이었다.[25] 당시 쌍방울은 KBO의 위탁관리 끝에 법정 퇴출되어 해체되고 선수와 지도자 프런트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살길을 찾아야 했지만 그들을 받아줄 기업을 구하기 위해 KBO가 선수들은 타팀으로 가지 못하고 기다리게 하던 상황이었다. 당초에 KBO는 SK에 쌍방울 인수를 건의했지만, SK는 역사도 짧고 우승도 없고 거의 하위권만 전전하던 전주의 연고 구단을 전혀 이어 받고 싶지 않아 했다. SK는 쌍방울이 해체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해체 후 웨이버 공시된 쌍방울 선수들을 개별 계약으로 입단시키고, 신생팀 특혜인 신인지명 우선권과 외국인선수 확대 보유를 보장받으면서 사실상 신생구단을 창단했다.[26] 인천 원도심 출신이자 현재까지도 성골 인천야구 팬인 염경환, 지상렬이 대표적으로 해당된다.[27] 이러한 경우가 대부분 현대의 후신 히어로즈로 넘어가 응원하는 경우가 많다.[28] 특히 비인천권 삼청태현 팬들이 이랬다. 대표적인 경우가 춘천 출신으로 삼청태현을 응원해왔던 장지현 축구 해설위원.[29] 후술하지만 현대자동차그룹에서 2001년 인수를 제안했으나 대주주였던 현대전자가 인수금액 900억 드립을 치면서 결렬되게 만들었다.[30] 이 때문에 2008년 드래프트에서 현대가 지명했던 신인선수들은 그대로 히어로즈로 입단했으며, 현대 소속의 군복무 선수들도 제대후에 모두 히어로즈 소속이 되었다.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에서 현대가 지명했던 김병현도 2012 시즌을 앞두고 넥센에 입단했다.[31] 사실 잘하면 돈을 주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하이닉스와 인수자, KBO 사이에 꽤 복잡한 법정 다툼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법정 간다고 100%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고. 더구나 팬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프로야구단과 KBO가 법정에서 운영권 문제로 소송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지에 좋을 리가 없다.[32] 다만 KT의 경우엔 창단 이후 KBO한테 돈을 더 투자하는 조건으로 싼 가입금으로 합의를 봤었다.[33] 사실 김경기도 SK로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김경기 자신이 인천에 대한 애착심이 컸던 선수였던 데다, 1999 시즌부터 용병타자의 도입과 부상으로 팀 내에서 자리가 없었고 선수협을 지지했던 전준호를 폭행해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등의 행위를 해 현대 선수단 내에서의 입지가 상당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2000년 이후로 현대-히어로즈의 팬이 된 사람들은 김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34] 뒤에서 언급될 태평양 데이와 엮어 이 행사를 삼미 데이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 이름은 "꿈★의 이벤트" 였다. 당시 2002 월드컵에서 등장했던 "꿈★은 이루어진다!" 키워드에 맞춰 SK의 포스트시즌 진출 염원을 담았다. 하지만 이는 구단측의 설명일 뿐이고, 실제로는 당시 현대측의 반발로 삼미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35] 김재현은 LG 시절 현대를 상대로 유독 강했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90년대 LG는 현대 상대로 강했고, 그 가운데 김재현하고 유지현, 김동수 등을 내세운 LG는 현대 팬들 입장에서 매우 얄미운 존재였다.[36] 전준호는 이 상황을 보고 우리의 과거가 부정당하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37] MLB의 경우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워싱턴 내셔널스는 자신들이 캐나다 몬트리올을 연고로 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이어받았다기보다, 워싱턴 세네터스의 연고 이전으로 끊어진 워싱턴 D.C.의 야구 역사를 계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몬트리올 유니폼을 입는 행사는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현재 미네소타 트윈스, 텍사스 레인저스인 세네터스의 유니폼을 입는 행사를 여러 번 개최했다. 심지어 이 팀은 자신들의 홈구장인 내셔널스 파크에 몬트리올 시절 제정되었던 영구결번들보다 세네터스의 레전드들을 먼저 기렸다. 또, 1969년에 시애틀에서 창단한 뒤 딱 1년 후에 밀워키로 이전해 현 밀워키 브루어스가 된 시애틀 파일럿츠의 유니폼을 시애틀 매리너스 선수들이 입는 이벤트를 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메이저 리그에서도 연고지에 따라 팀 역사를 나누지는 않으며 몬트리올-내셔널스가 한 팀이라고 하지, 세너터스-내셔널스가 한 팀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본프로야구의 경우에는 한 팀의 프랜차이즈 역사를 강하게 내세우는 편이다. 한 예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각각 예전 난카이 호크스 시절과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의 올드 유니폼을 입고 뛴 이벤트가 있었다. 난카이가 오사카, 니시테츠가 후쿠오카를 연고로 했던 팀이나 이 팀들이 훗날 연고지 이전을 하여, 옛날엔 후쿠오카 팀었던 팀이 사이타마에서 후쿠오카 시절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거시기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여기엔 불문율이 하나 있는데,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할 경우 예전 연고지에 현존하는 구단과 한 번이라도 대결할 것이다.[38] 이후의 인터뷰를 보면, 이장석은 당시의 판단에 대해 본인도 무지했었다며 크게 후회하고 있는 듯하다.[39] 2006 시즌을 마치고 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재박 감독과 상당수 코치, 프런트가 LG로 옮겨가자 상당수 현대 팬들은 이제 끝이라는 심정을 보였다. 이 와중에 타 팀들의 무수한 제안을 거절하고 팀에 대한 애정으로 잔류한 김시진 감독, 이광근, 김성갑 코치 등에게는 깊은 애착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이장석이 들어서자마자 이들을 모조리 잘라버린 것이다.[40] 이장석은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무리한 현대색 지우기는 마케팅 측면에서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 이미 LG와 두산이라는 양대 인기구단이 자리잡고 있는 서울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선수와 코칭스탭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던 기존 팬들은 모조리 내치면서 자금력도 없으면서 신생구단이라고 맨땅에 헤딩 식으로 들이댔으니. 말 그대로 목동 야구장이 텅텅 비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거기에 구 현대 시절 코칭스탭을 내치고 데려온 박노준 단장, 이광환 감독, 강병철 2군 감독 등 같은 외부인사들은 선수단, 프런트 모두와 삐걱대면서 팀운영도 엉망진창이었다.[41] 별도의 설명이 없기에 흔히들 조작된 사진이라는 말과 히어로즈가 문구만 적당히 바꿨다는 주장이 상반되어 나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두 모습은 모두 실존했다. 정확히는 전광판에 번갈아서 나왔다. 윗 사진은 7월 21일, 아래 사진은 7월 31일 경기다. 이에 대해 구단측이 삼청태현의 계보 승계에 대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는 평이 줄을 이었으나, 사실 저것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히어로즈는 삼청태현의 후신으로서 2008년부터 참가하는 구단이라는 것이 히어로즈를 정의하는 가장 깔끔한 해석이다.[42] 재창단이긴 해도 선수단은 현대 시절 그대로이니 선수들한텐 같은 팀이다. 더군다나 이숭용 본인은 선수 생활 내내 타 팀으로 이적한 적이 전혀 없다.[43] 이숭용은 넥센에서 은퇴한 후 잠시 해설자 생활을 하다 수원을 연고지로 한 팀의 코치와 단장직을 거쳐 현재는 인천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보를 위의 인터뷰에 빗대어 이숭용의 뿌리 찾기라고 부르며, 이숭용 본인도 2023년 11월 SSG 감독 취임 당시 인천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게 된 점에 대해 뿌리를 찾은 느낌이라고 표현했다.[44] 그런데 인천 외 타 지역이나 2000년 이후 현대 팬이 된 사람들에게는 얘기가 좀 다를 수 있다. 타 지역 팬들에게는 연고지 이전은 별 충격이 아니었으며 되려 연고지 이전을 반기는 팬들도 있었다. 또한 2000년 이후 현대 팬이 된 현 키움 팬들에게도 위의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김경기에 대한 2000년대 전후 현대 팬들의 시선 차이가 그 대표적인 예다.[45] 각각 구단별로 출판되었다.[46] 야구에 대해 무지한 코갤 출신 야갤러들을 비하하는 말인 '코갤러'와 고유라 기자의 이름을 합성한 것. 이전 시즌 이런저런 코갤러짓으로 빈축을 샀던 고유라 기자가 2014 시즌에는 그야말로 포텐을 터뜨린 탓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47] 삼청태현 1982~1999년까지 18년간, SK-SSG 2000년부터 23년간.[48] SSG의 경우 당연히 현대의 야반도주로 인해 기존 지역 팬덤이 반토막 났고, 키움도 현대의 해체와 우리의 창단 이후 초기 자금난 등으로 인한 선수팔이 등 막장 운영으로 인해 기존 팬덤이 많이 이탈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 도원야구장에서 삼청태의 경기를 직접 지켜봤던 팬들도 2023년 기준으로 최소 40대가 됐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삼미나 청보의 홈 경기 도중 흥분을 못 참고 그물을 탔던 팬의 당시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면 현재는 70대 후반~80대 초반 정도의 노인이 됐다.[49] SSG는 2007~2012년까지의 기간 동안의 유입, 키움은 2013~2016년까지 KS 진출 1회 포함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과 더불어 강정호, 박병호, 서건창, 한현희, 김하성, 이정후 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인한 유입.[50] Nexen Heroes Season X The Burgundy Revolution[51] 아이러니하게도 2023년 11월 17일에 SSG 감독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KBO 최초 한 팀에서 2,000경기 출장’을 통해 인정되는 키움의 역사는 그의 선수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큰 변동은 없다.[52] KBO 공식 보도자료, 그리고 각 언론사의 타이틀에서 인정된 사실이다.[53] 2022년에도 이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현대의 마지막 신인왕인 오주원 역시 은퇴식에서 스스로 ‘원클럽맨’임을 천명했다. 특히 구단에서 진행한 싸인 행사에서는 뒷면의 종이에 현대의 유니폼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새겼다. 녹색과 노랑, 그리고 금색 Y선이 그것이다.[54] 대표적으로 임병욱이 있다.[55] 물론 로빈슨의 유족이 브루클린 가까이 있는 구단에 더 애착이 간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56] 물론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드립으로 자주 볼 수 있는 드립이기는 하나, 최동원이 한화의 레전드라는 주장 등 디시에서 볼 수 있는 블랙유머에 가깝다.[57] 대표적으로 정근우 등이 있다.[58] SK 와이번스/유니폼 항목에 삼미 유니폼을 복각한 게 보인다.[59] 실제로 인천 야구팬들은 이미 삼청태현에 관심을 끊은지가 오래이며 SSG 팬덤도 이미 우승을 5번이나 했으니 상관 없다는 입장이다. 애초에 관계가 없는 신생팀이라고 선을 그어왔고.[60] 물론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쌍방울과의 선을 그으면서 쌍방울의 존재가 야구계에서 소멸되는 나쁜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과거 SK가 태평양 데이를 치르는 과정에서 팬덤이 갈라질 정도의 강한 역풍이 괜히 발생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쌍방울의 연고지인 전라북도에서의 야구 인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미지근해졌고 이후 연고지 축구팀인 전북 현대 모터스가 뛰어난 성적을 거두자 전북 사람들은 거진 그쪽으로 몰려갔다. 물론 쌍방울이 인천 연고인 SK로 흡수되고 전북 연고 프로야구팀이 사라진 이상 야구 열기가 식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으며, 반대로 SK가 지역밀착 마케팅을 하면서 현대에 등을 돌렸던 인천 야구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다시 불러온 공도 인정해야 한다.[61] 짧은 역사로 지적받아왔던 팀이기에 오히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역사기록에 더욱 철저해진 것. 다만 자체적 역사가 20년이 넘어가며 소홀해진 것인지 새 구단주의 의향인지는 몰라도, 이마트 인수 이후 경기장 내부에 있던 와이번스 박물관 자리에 스타벅스가 입점하며 전시되어있던 SK 시절 우승컵, 선수 실착 유니폼이나 야구용품 등의 자료들의 전시가 중단되었다.[62] 이 고뇌는 아예 인천 야구의 팬이라는 정체성보다 현대 유니콘스의 팬을 택해 지금껏 키움을 응원하는 이들도 있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심각해진다.[63]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단순히 히어로즈팬이 "현대 시절부터 응원했다"라는 말을 한 것을 가지고도 이것이 역사왜곡이라며 흥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완전히 틀린 주장이다.[64] 인터넷 야구팬 초미의 관심사인 우승 횟수 승계에는 딱히 별 언급이 없다. 애초에 주제가 주제니만큼...[65] 이어서 넥센 팬이 현대가 아니라 넥센이라고 정정해 주자 그 선수는 그게 그거라고 얘기했다고. 사실 웬만한 선수들은 소속팀이 아닌 타 팀 유니폼엔 사인 잘 안 해준다.[66] SSG나 키움은 1980년대에 창단된 팀들보다 역사가 짧아 소위 말하는 팀덱을 맞추기에는 선수의 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선수수급을 쉽게 하기위해 게임사에서 고의로 연관지어 설정해놓는다. 컴투스 프로야구 시리즈를 예를 들면 삼미 83 장명부(선발) - 넥센 14 한현희(중계) - 태평양 94 정명원(마무리)같은 환상의 덱이 성립가능하며, 심지어 쌍방울 시절 김성근을 SSG 덱의 감독으로 놓으면 SSG 선수는 물론, 쌍방울 선수들도 당연히 부가 효과를 똑같이 받는 등 호환이 된다.[67] 현대의 경우엔 SSG 팬들은 인천에서 야반도주한 현대를 싫어하니 언급안하기도 했고 기록은 끊겼더라도 선수단을 이어받은 우리를 어느 정도 현대의 후신격 구단으로 여겼던 여론이 대부분이었기도 했고. 현대는 연고이전을 하고도 8시즌을 수원에서 더 보냈다. 이는 인천에서 보낸 기간보다 2배 더 많다.[68] 대략 넥센이 만년 하위권을 벗어나 상위권에 들 때쯤.[69] 2008년 우리 히어로즈, 2009년 히어로즈, 2010년 넥센 히어로즈, 2019년 키움 히어로즈.[70] 초대 구단주는 정주영의 아들이었던 정몽헌이었다.[71] 당시 KBO 수뇌부는 7개 구단 체제로 시즌을 시작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KT에게도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등 전반적으로 무능함을 보여줬으니, 하물며 당시의 NC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KT 쪽에서도 잠실구장 경기 등 무리한 요구를 해오기는 했었고, 결과적으론 NC와 KT 모두 뒤늦게나마 신생 팀으로서 프로 야구에 뛰어들었지만.[72] 오윤, 노병오, 권도영, 오주원, 홍원기.[73] 이광환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였고 손혁은 1998년 한국시리즈 3차전 승리투수 였다. 이광환과 손혁은 96년 함께 했던 사제지간인데, 이 감독이 시즌 중 경질되었다.[74] 단, 넥센의 김시진 감독 경질 사건 이후 그닥 많이 응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 근황은 개인사정으로 바빠서 그런지 2014년 이후 글이 올라오고 있지 않는다.[75] '히어로즈 전신'이라는 소제목으로 삼청태현을 간단히 소개하고 성적을 정리한 글이다. 공식적으로는 삭제되었지만 링크는 남아 있다.[76] 2024년 현재도 랜더스필드 3루 그린존-외야석 인근 출입구를 통해 구장 내부로 들어가면 80년대 삼미 / 청보 시절 몇몇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걸어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SG에서 건 것은 당연히 아니고, 오래전 SK 와이번스 초창기에 걸어둔 것을 굳이 떼지 않고 그대로 둔 것.[77] 대표적으로 구장내에 위치해있던 와이번스 박물관 자리에 스타벅스가 입점한 것이나 경기 중 응원단상에서 진행하는 팬 참여 행사에 SK 유니폼을 착용한 팬을 배제하거나 갈아입을 것을 종용하는 것. 상술한 삼미 / 청보 시절 사진들이 여전히 구장 복도에 걸려있는 것과 달리 인수 초기에는 남아있던 SK 시절 사진들도 여기저기 리모델링을 하며 찾아볼 수 없게되었다. 이 외에도 2021년 치러진 박정권과 채병용의 은퇴식 기념물이나 굿즈 등에는 현역 시절 사진을 그대로 쓰는 대신 굳이 선수로서 입어본 적 없는 SSG 유니폼을 입은 트레이싱 일러스트를 사용했고, 2022년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선정된 정근우, 박재홍, 박경완의 시상식 행사에 사용된 일러스트에는 차마 SSG 로고를 그리지는 못 하고, KBO측에서 사용한 공식 일러스트를 그대로 사용한 다른 구단들과 달리 스윙 동작이나 포수 장비를 착용한 일러스트로 자체적으로 대체해 어떻게든 SK가 노출되는 것을 막는 등 여러모로 'SK 지우기'에 골몰한 모양새다.[78] 다만 삼청태 마케팅은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