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8 15:50:58

1994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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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KBO 한국시리즈
1993년
해태 타이거즈
1994년
LG 트윈스
1995년
OB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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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LG 트윈스
MVP 김용수[1]
투수 잡았습니다. 자 1루에 던집니다. 1루에서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드디어 LG 트윈스가 94년도 한국의 최강자, 챔피언으로 등극했습니다.
MBC 고창근 캐스터의 우승콜[2]

1. 개요2. 시즌과 플레이오프까지의 전개3. 엔트리4. 경기
4.1. 1차전: 김홍집의 141구와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 4.2. 2차전: 정삼흠의 완봉승4.3. 3차전: 무너진 인천 소방수4.4. 4차전: V2! 4년만에 다시 찾아온 우승
5. 우승반지6. 트리비아

1. 개요

1,2차전 하이라이트 영상
3,4차전 하이라이트 영상

1994시즌 페넌트레이스 1위 LG 트윈스와 2위 태평양 돌핀스가 맞붙었던 시리즈. LG 트윈스가 4연승을 거두며 V2를 달성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1990년도에 이어 김용수가 차지했다.[3] 김용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2번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 이후 이종범이 1997년, 정민태가 2003년, 오승환이 2011년에 2번의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

4연승으로 싱겁게 끝났지만, 2차전만 빼고는 모두 한점차 접전을 펼친 시리즈이기도 했다. [4] 특히 1차전에 태평양 돌핀스의 좌완 에이스 김홍집의 141구 완투패[5]가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LG 트윈스팬들에게는 추억의 리즈 시절이나 해도 다름 없었다. 이 우승 이후 2019년까지를 기준으로 어느 구단과 더불어 25년 동안 우승 기록이 없다. 20년이면 강산도 두 번이나 변하는 시절인데도(…).[6]아 옛날이여! [7]

태평양 돌핀스도 비록 아쉽게 스윕패를 당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그리고 태평양 초창기의 암울한 약체 시절을 딛고 인천 프로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달성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시즌을 보냈다. 특히 이때 구축한 막강 투수진은 이후에 인수되는 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져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에 군림한 투수 왕국 현대 왕조의 기반을 닦은 시리즈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정동진 태평양 감독은 1990년에 이어[8] 1994년에도 LG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는 바람에, 2015년 현재까지 LG 트윈스를 상대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둔 유일한 감독이 되고 말았다.

1990년 한국시리즈와 묘하게 공통점이 많다. 둘 다 LG가 4연승으로 스윕했고, 한국시리즈 MVP는 같은 선수가 차지[9], 상대팀 감독이 동일인이라는 것과 큰 점수차 승부, 11회말 끝내기 승부, 역전 승부 등이 각각 한 번씩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두 시리즈 모두 일요일에 끝났다는 점이 있다. 1~3차전 승리투수도 김용수-정삼흠-김기범이다.[10] 거기다 LG가 어웨이인 상태에서 우승을 거뒀다. LG는 언제 잠실에서 우승을 거둘 수 있을까... 중계한 방송국 순서도 MBC-KBS-MBC-KBS다.

트리비아를 덧붙이면, 1994년 한국시리즈는 원년 이후 도중에 모기업 및 팀명이 바뀐 팀끼리 처음 맞대결한 시리즈이기도 하다.[11][12] 그리고 양팀 감독인 이광환, 정동진 이 두 감독은 각각 자율야구와 선수를 혹사시키지 않는 관리야구[13]의 정점에 달한 인물들이라 최근들어 선수 혹사와 권위주의 등으로 지탄을 받는 감독들에 비해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또한 구단 연고지가 · 지역이 아닌 팀끼리 붙은 최초의 시리즈이자 수도권 연고팀끼리 붙은 최초의 시리즈이기도 하다.[14] 특히 양 팀의 홈구장인 잠실야구장숭의야구장을 지하철로 오갈 수 있다고 해서 "지하철 시리즈"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붙은 시리즈이기도 하다.

2. 시즌과 플레이오프까지의 전개

1994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LG와 태평양이 4강에 들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LG는 주력 타자였던 송구홍이 군입대로, 김상훈한대화와 맞트레이드로 해태로 이적했고, 태평양은 지난 시즌 투수진들의 연쇄 부상으로 꼴찌로 처진 데다가 그 투수들이 살아날지도 미지수였고, 타자도 김경기, 윤덕규, 김동기를 빼면 별 볼일 없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자 두 팀은 완전히 달라지는데 LG는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인현배 등 신인들이 투타에서 맹활약하고 한대화와 노찬엽, 김동수도 타선에서 제몫을 해주었으며 이상훈-김태원-정삼흠의 선발 3인방과 차동철-김용수등의 불펜진으로 구성된 투수진도 탄탄했다. 태평양 또한 김홍집-안병원-최상덕-최창호-정민태의 선발진이 1994시즌 돌풍을 일으켰고, 마무리 정명원은 역사상 최초로 40세이브를 기록했으며, 타선의 김경기는 리그 2위인 23홈런을 쳤고 윤덕규와 김동기도 준수한 활약을 했다.

시즌이 끝나자 LG와 태평양은 각각 1, 2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초부터 시작한 KBO 포스트시즌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과 겹쳐 별로 주목을 못 받았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공동 3위를 차지했던 한화 이글스해태 타이거즈가 만났는데, 한화가 해태를 2연승으로 물리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평양 대 한화의 대결이었고, 3차전 연장 11회초 김경기의 홈런으로 태평양이 한화를 3연승으로 초살, 인천 연고 팀으로는 12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15].

LG와 태평양의 대결이 성사되면서 처음으로 경인선 시리즈가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 팀타율이 0.244로 최하위를 기록한 태평양의 타선이 LG 투수진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유독 LG전에 약한 정명원이 LG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가 태평양의 고민이었다. 반대로 LG는 떨어진 경기 감각과 그 전 해 포스트시즌에서 홈경기 전패를 당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고, 해결사 한대화에 대한 상대 투수진의 견제를 뚫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3. 엔트리

3.1. LG 트윈스

LG 트윈스 199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감독 1명 이광환
코치 5명 김명성, 천보성, 최정우, 김용달, 신언호
투수 9명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차동철, 김기범, 민원기, 이상훈(47), 강봉수, 인현배
포수 3명 김동수, 서효인, 김정민(12)
내야수 8명 한대화, 김선진, 윤찬, 이종열, 박종호, 서용빈, 유지현, 허문회
외야수 5명 김영직, 노찬엽, 박준태, 최훈재, 김재현(7)

3.2. 태평양 돌핀스

태평양 돌핀스 199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감독 1명 정동진
코치 5명 김재박, 김시진, 고원부, 정진호(75), 금광옥
투수 8명 박은진, 정명원, 정민태, 가내영, 안병원, 최상덕, 최창호, 김홍집
포수 2명 김동기, 장광호
내야수 9명 김경기, 이숭용, 김성갑, 하득인, 손차훈, 김용국, 권준헌, 염경엽, 이근엽
외야수 6명 윤덕규, 여태구, 이희성, 김인호, 계기범, 김갑중

4. 경기

4.1. 1차전: 김홍집의 141구와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

한국시리즈 1차전 10.18(화)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10 11 R H E B
태평양 김홍집 0 0 0 0 0 0 1 0 0 0 0 1 6
LG 이상훈(47) 0 0 1 0 0 0 0 0 0 0 1 2 5

중계방송사는 MBC TV.

LG의 선발 투수는 이상훈, 태평양의 선발 투수는 김홍집. 3회말에 LG가 서용빈의 2루타에 이은 김동수의 보내기번트, 유지현의 희생 플라이로 선취점을 얻어냈다. 반면, 태평양은 계속해서 득점권 찬스를 만들어내고도 이상훈의 구위에 완전히 눌리면서 작전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다 7회초 김동기의 2루타[16]에 이은 대타로 쏠쏠히 활약해온 하득인의 깨끗한 좌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며 스코어 1:1을 만들었다.

이후 LG는 이상훈에 이어 차동철, 김용수[17]가 이어던지며 태평양의 타선을 봉쇄했고, 태평양은 김홍집이 11회말 1사까지 140구에 육박하는 공을 홀로 던지며, 승부의 추는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11회말 선두타자 유지현이 1루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1아웃, 다음타자는 6회말부터 최훈재의 대주자로 나온 김선진. 시즌 타율도 2할 6푼에 홈런도 1개 타점도 7개에 불과했을 정도로 대주자와 대타로만 나왔던 선수였다. 김홍집의 141구째 슬라이더가 김선진을 향해 날아왔고 그는 그 공을 통타.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으로 4시간이 넘는 승부를 마감한다.

태평양은 8회초 1사 만루를 만들고 선발 이상훈을 끌어내리고도 김동기가 김용수의 묘수에 걸려들면서 병살타를 친 것이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시구를 하고 9회까지 경기를 관람했다.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의 일.[18]

비록 김홍집은 혼신의 역투를 하고도 타선의 지원를 받지 못해 완투패를 기록하고 말았으나 1984년 최동원의 40이닝 역투,1993년 박충식의 연장 15회 역투와 함께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훗날 인천 출신의 삼청태 키드였던 작가 김은식이 쓴 책 '야구의 추억' 1권의 부제인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는 것은 바로 김홍집이 1차전 때 던졌던 투구수를 의미한다.

4.2. 2차전: 정삼흠의 완봉승

한국시리즈 2차전 10.19(수)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태평양 안병원 0 0 0 0 0 0 0 0 0 0 3
LG 정삼흠 0 1 0 0 3 0 3 0 X 7 10

중계방송사는 KBS 1TV.[19]

LG는 정삼흠(15승 9패, 평균자책점 2.95), 태평양은 안병원(11승 10패, 평균자책점 3.40)이 선발 투수로 나왔다. LG는 2회말 노찬엽의 안타와 안병원의 실책으로 만든 2사 3루의 찬스에서 김동수가 적시타를 기록하며 선취득점을 한다. 5회말 태평양은 최상덕으로 투수를 바꾸는데 이것이 태평양에게 결정적인 패인이 된다. LG가 박종호의 3루타로 한 점을 더 달아나자 태평양은 최창호까지 투입하지만, LG가 특급신인 유지현-김재현]의 연속 안타와 폭투로 2점을 더 보태면서 스코어 0:4로 달아났다. 이후 LG는 7회말 서용빈의 2타점 2루타와 노찬엽의 적시타가 터지며 7점차까지 벌여놓았다. LG 선발 정삼흠은 9회까지 태평양 타선을 꽁꽁 막으며 역대 한국시리즈 세 번째 완봉승을 이뤄냈다.

이날 경기가 시작한지 30여분만에 전광판이 고장나서 장내 아나운서가 볼카운트와 아웃카운트 등 경기 상황을 직접 방송해주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시리즈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이 무슨...

4.3. 3차전: 무너진 인천 소방수

한국시리즈 3차전 10.22(토) 14:00, 숭의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LG 김태원 0 0 0 0 0 2 3 0 0 5 8
태평양 정민태 0 0 0 4 0 0 0 0 0 4 7

중계방송사는 MBC TV.

10월 21일에 예정되어 있던 3차전은 비로 인해 하루 연기되어 치루어졌다.[20] LG의 선발 투수는 김태원, 태평양 선발은 정민태.

태평양 타선이 한국시리즈 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던 김태원을 상대로 4회말에 대거 4점을 뽑고, 정민태가 5회까지 퍼펙트로 호투하면서 태평양은 반전의 기회를 얻는 듯했다.

그러나 6회 공격에서 LG는 선두타자 김영직이 우익선상 2루타를 치며 정민태의 퍼펙트 행진을 깬 뒤 2사 2루에서 김재현이 태평양 우익수 김갑중의 키를 넘기는[21][22] 2루타를 날리며 1점을 만회, 후속 타자 서용빈의 바가지성 적시 안타로 스코어 2:4까지 추격했다. 태평양은 6회의 이 사건을 계기로 분위기를 LG로 넘겨주게 되었다. 태평양은 정명원을 투입하는 강수를 던졌지만, 7회초 2사 1, 2루 기회에서 유지현의 좌전 동점 적시타가 나왔고 거기다 좌익수 윤덕규의 홈 송구 실책까지 겹치며 역전주자 박종호가 홈인하여 LG가 스코어 5:4로 역전한다. 태평양으로써는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어처구니 없는 실책으로 3차전을 내준건 덤.

이후 태평양은 4차전 선발로 내정한 김홍집을 구원등판시키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타선이 LG 클로저 김용수를 공략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무리수가 되었다. 결국 태평양은 정명원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무너지면서 승부의 추가 LG로 넘어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4.4. 4차전: V2! 4년만에 다시 찾아온 우승

한국시리즈 4차전 10.23(일) 14:00, 숭의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LG 이상훈(47) 2 0 1 0 0 0 0 0 0 3 8
태평양 최창호 0 0 1 0 1 0 0 0 0 2 7

중계방송사는 KBS 1TV, SBS TV.

4차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할 것으로 예상된 김홍집을 3차전에 구원투수로 써버린 태평양은 최창호를 선발 투수로 내보냈고, LG는 예상대로 이상훈을 등판시켰다. 1회초 1사 2, 3루의 찬스에서 한대화가 태평양 선발 최창호를 중전 적시타로 두들겨 2점을 선취한 LG는 3회초 서용빈이 바뀐 투수 최상덕으로부터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포를 뽑으며 스코어 3:0으로 앞서갔다.

이후 태평양은 3회말, 5회말 공격 때 각각 1점을 뽑으며 1점차 까지 접근했지만 고비마다 타선이 침묵을 지키며 더 이상의 점수를 뽑지 못했고, LG는 8회부터 등판한 김용수가 2이닝을 꽁꽁 틀어막으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9회말 마지막 타자 김성갑의 투수강습 땅볼을 잘 처리한 김용수는 포수 김동수와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1994년 시즌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23]

태평양으로서는 2차전을 제외한 1,3,4 차전 모두 1점차의 접전을 벌인데다 1,3차전의 경우 승기를 갖고 있었기에 정말 아쉬웠던 시리즈였다.

5. 우승반지

파일:1994반지.jpg
파일:1994반지2.jpg
파일:1994반지3.jpg
이상훈의 우승반지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한국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우승반지가 지급되었다. 이전까지의 한국시리즈는 매달과 트로피를 받았다.최훈재의 말을 빌리자면 구단에서 메이저리그 우승반지 카탈로그를 구해와서 "이 중에 골라봐라"라고 해서 선택된 디자인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참고로 모티브가 된 반지는 1985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우승반지. 요렇게 생겼다.

6. 트리비아

1994년 폭염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94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무더운 여름의 한 해였다. 이런 가운데 가장 무더운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역대 최고의 시즌을 만들며 우승을 했기 때문인지 LG 올드팬들 중엔 날씨가 더워지면 은근히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2011년경 정성훈이 더위 먹고 쓰러지는 사건 이후에 회색 유니폼을 입으면서 7년간 검은색 유니폼이 사라졌는데 이후 2019년에 부활했다.

1994년 우승 멤버들은 이후에도 구단 행사에 꽤 많이 초청되고 있다. 하지만 코치로서 팀에 해악을 끼친 멤버들도 상당수 있어 팬들에게 좋게 추억되는 선수들, 나쁜 기억으로 남은 선수들이 명확히 갈리고 있다.


[1] 최초로 한국시리즈 MVP 2회 수상자. 그리고 LG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이다.[2] 4차전 TV 중계는 KBS 1TV와 SBS가 맡았고 MBC는 당시 라디오를 통해 이 경기를 중계했다. 이 우승 콜은 MBC의 1994년 프로야구 연말 결산 프로그램을 통해 TV 전파를 탔는데 경기 영상에 라디오 중계 녹음본을 덧입힌 것이다. 나중에는 인터넷에 이 장면에 대한 녹화본이 등장하며 팬들에게 우승 장면이 알려졌다.[3] 1990년에는 선발 투수, 1994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MVP를 차지했다.[4] 당시만해도 큰 경기 경험이 89년이후 전무한 선수단이라 결정적인 고비를 넘지 못하고 실책으로 자멸했다. 3차전 김갑중.만세사건[5] 당시 김홍집으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친 김선진은 입단 후 성적이 좋지 못해 1994시즌 종료 후 방출 대상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홈런으로 인해 2000시즌까지 선수 생활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6] 물론 1994년 우승 이후에도 LG는 1990년대 말까지는 KBO 한국시리즈 두 번 준우승도 하고 가을야구도 자주 하는 등 강호의 모습은 유지되었다. 문제는 마지막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한 2002년 이후. 당시 약한 전력으로도 기적적으로 라기 보다는 그냥 갈아마셔서한국시리즈 진출시킨 김성근 감독은 준우승 후 바로 해임되었고, 그리고 LG는 10년간 끔찍한 암흑기에 시달렸다. 그러다 2013년에서야 암흑기를 끊고 오랜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물론 10년간의 공백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광탈했지만. 그리고 2014년에는 초반부터 최하위를 찍은 것도 모자라 감독도망 사퇴하면서 좌초 위기에 놓였으나, 시즌 중에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양상문이 팀을 추스려 최하위에서 4위로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이어서 NC를 준플레이오프에서 3승 1패로 이기고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힘의 차이를 절감하며 넥센에게 1승 3패로 탈락했다. 2015년 9위 추락 후 2016년 부진하다가 후반기에 반등하여 4위를 차지하며 와일드카드에서 KIA를, 준플레이오프에서 2년 전 아픔을 안겼던 넥센을 3승 1패로 이기고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물빠따로 2년 전 자신들이 아픔을 안겼던 NC에 1승 3패로 탈락했다.[7] 1994년의 LG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때에는 LG의 야구인들도 팬들도 정말 행복했었다고 한다. 야구장에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떻게 이길까?라고 생각을 했었다고...[8] 정동진 감독은 1990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다.[9] 공교롭게도 1990, 1994 리그 MVP는 둘 다 해태 선수가 받았다.[10] 1990년에는 김용수-김기범이 선발승, 정삼흠이 구원승이었지만 1994년은 반대로 정삼흠이 선발승, 김용수-김기범은 구원승이었다.[11] 태평양은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 LG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하며 팀명이 바뀌었다.[12] 신기하게도 1994년과 1998년 한국시리즈의 LG와 태평양-현대 맞대결 이후로 창단 이후 모기업이 변경된 팀끼리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전무하다. KIA의 경우는 모기업이 변경된 이후로 LG나 현대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적이 없었고, SK와 넥센의 경우는 타 구단의 인수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창단한 구단이며, 두산과 한화는 모기업은 바뀌지 않고 팀명만 변경된 경우다.[13] 정동진 감독의 경우 전전임 감독(...)의 혹사로 인해 몸상태가 안 좋은 여러 선수들이 치료를 받고 컨디션을 제대로 회복할 때까지 오랜 시간 출전을 시키지 않았을 정도였다.[14] 역대 한국시리즈 중에서 영남과 호남 연고팀이 올라오지 못한 시리즈는 이 해 이후 1998년, 2000년, 2003년, 2007년, 2008년, 2018년 등 총 7차례가 있었다.[15] 이 탓인지 88년(빙그레 3승), 89년(해태 3승), 90년(삼성 3승), 91년(빙그레 승-빙그레 승-삼성 승-빙그레 승)에 이어 4번째로 지방 팀끼리의 잠실 플레이오프 경기가 성사되지 못했다[16] 잘맞은 타구는 아니고 투수키를 살짝 넘어 2루 베이스 위로 넘어가는 평범한 타구였으나, 이걸 유지현과 박종호가 쫓아가느라고 2루가 비어버리는 바람에 김동기가 2루까지 진루하게 된 것이다[17] 김용수 본인은 선수시절 경기 중 이 시합이 잊을 수 없는 경기라고 말했다.#[18] 김영삼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5년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시구를 한다.[19] 1994년 10월 1일부터 KBS1TV에서 광고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무광고로 시청 할 수 있었던 경기였다 포스트시즌 전체로 확대하면 1994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해태 vs 한화의 경기가 사상 첫 무광고 중계였다.[20] 3차전이 열릴 예정이었던 10월 21일은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전국이 초상집 분위기 였던지라 오히려 3차전이 우천으로 열리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을지도.[21] 일명 김갑중 만세 사건. 속칭 만세라 부르는 실책성 플레이도 겹쳤다.[22] 김갑중의 삽질로 인하여 4점차로 리드 중이던 태평양은 무너져버렸고, 이에 반해 LG는 이 날 경기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게 된다.[23] 공교롭게도 LG는 1994년 시즌 개막전에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시즌 마지막인 한국시리즈 4차전도 숭의야구장에서 태평양과 상대했다. 1994년 시즌은 LG와 태평양이 같은 구장에서 시작하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