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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구단주 구광모 | 대표이사 김인석 | 단장 차명석 | 감독 염경엽 | 주장 김현수 | ||
경기장 | 1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2군 LG 챔피언스 파크 이전 동대문야구장 · 구리 LG 챔피언스 파크 | ||
우승 | 1990 | 1994 | 2023 | ||
역사 정보 | 구단 역사 | 트레이드 | 1983년 한국시리즈 | 1990년 한국시리즈★ | 1994년 한국시리즈★ | 1997년 한국시리즈 | 1998년 한국시리즈 | 2002년 한국시리즈 | 2023년 한국시리즈★ | 역대 감독 | 사건·사고 | 암흑기(453566, 6668587667) | ||
주요 정보 | 팀 특징 | 선수단 | 등번호 | 유니폼 | 상대전적 | 팀 응원가 (서울의 찬가 · 서울의 모정) | 응원단장 | 엘튜브 | 치어리더 | 제휴카드 | ||
지역 연고 | 경기고등학교 | 경동고등학교 | 덕수고등학교 | 배명고등학교 | 배재고등학교 | 서울고등학교 | 서울디자인고등학교 | 선린인터넷고등학교 | 성남고등학교 | 신일고등학교 | 장충고등학교 | 중앙고등학교 | 청원고등학교 | 충암고등학교 | 휘문고등학교 | 제주고등학교 | ||
역대 시즌 | 역대 시즌 | ||
현재 시즌 | LG 트윈스/2025년 | ||
영구 결번 | 9 이병규 33 박용택 41 김용수 | ||
팬덤 정보 | LG 트윈스 갤러리 | I love Twins | 유광잠바 | ||
라이벌전 | 잠실 시리즈 | 엘 꼴라시코 | 통신사 시리즈 | 엘키라시코 | ||
기타 | 방화신기 | 간채골 | 보루갈 | 빅5 | 사랑해요 LG | 엘롯기 | 엘넥한 | 엘롯한 | 헬로키티 | 탈쥐효과 | 추격쥐 | 쥐평 | 엘나쌩 · 엘상바 클럽 | 아워게임 : LG트윈스 | 이 팀은 솔직히 | 메가트윈스포 | 용택아 나는 무서운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 박신홍문 | 오김박 | ||
무적 LG! 끝까지 TWINS! | }}}}}}}}} |
1. 성적
LG는 MBC때부터 야구를 특출나게 잘하지는 못한, 중상위~중위권의 이미지였다. 청룡팬들의 증언이 담긴 80년대 영상에서부터 이미 MBC/LG팬들은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강팀으로 뛰어오르지는 못하는 팀이었다. 원년에 백인천이 4할타자의 대기록을 세웠고 팀의 간판인 김재박을 비롯해서 선수 면면은 90년대 LG 황금기에 버금갈 정도로 좋았지만[1] 리더가 정해져 있지 않은 '방송국 야구단'의 한계가 명확히 있었던 것. MBC 청룡 시기의 최고 성적은 1983년의 준우승이다. 그래도 이 시기는 아직 OB가 '대전에서 올라온 팀'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1984~1989의 삽질에도 서울팬덤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리고 당시 스타선수도 많고 아직 프로 출범 초창기였던지라 청룡올드팬들은 해당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2][3]이후 LG 트윈스는 1990년, 1994년에 우승을 했다. 특히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를 내세운 1994년 우승은 현재까지도 LG 트윈스의 상징이자, 한국프로야구 발전에도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뉴욕 양키스가 될만한 팀'[4]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1990년대 중반의 LG 트윈스는 잘 나갔다. 현재도 LG 팬덤의 코어는 이 시기에 형성된 팬들과 그들의 아들, 딸들이다.
1990년, 1994년의 우승은 최초의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청룡의 1세대 선수들이 은퇴하기 전에 비교적 빠르게 찾아온 (7년) 황금기였고 아직 OB가 대전에서 올라온 팀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벗지 못하고 있을 때 지방팀들의 전유물이었던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구단에서 최초로 이루어내면서 LG는 90년대 황금기를 맞으며 서울의 야구팬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게 된다. 2008년 이후 두 팀의 성적이 차이가 나게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두산은 팬덤 '규모'에서 아직 LG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을 정도. 1990~1994는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1997년과 1998년 2연속 준우승에 그치고, 2002년에는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원조 벌떼 마운드' 운용으로 투수들의 팔과 어깨를 무진장 갈아대며 준우승을 했으나, 시즌 후에 김성근감독을 경질하고,[5] 1994년 우승 감독인 이광환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았으나 이때부터 LG에 암흑기가 도래했다. 이광환 감독은 유지현, 이상훈, 김재현의 처리를 두고 구단과 갈등을 하다가 1년 만에 물러났다.
LG 프런트는 기존의 베테랑들을 반 강제로 은퇴시키고 제2창단을 부르짖었으며, 수석코치 금지어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이는 암흑기의 시작이었으며, 2006년에는 창단 첫 최하위의 수모를 겪게 된다.[6] 2007년 시즌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재박이 화려하게 친정팀으로 돌아왔으나, 결과적으로 주전들의 철밥통 포지션 운영과 조공성 트레이드 등으로 비밀번호가 늘어났을 뿐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암흑기를 보내면서 얻은 별명이 칠쥐(7위+LG)이다.[7]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막판 삽질쇼로 인해 화끈하게 100억 지르고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며[8], 2008년에는 결국 2번째 최하위의 성적표를 받았다.[9] 참고로 2008년의 2번째 꼴찌는 팀 역대 최저승률 기록이기도 하다. 몇 년째 100억 단위로 돈을 쏟아 부으며 굴하지 않고 매 홈경기를 관전하는 구단주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천사임이 틀림없다는 게 야구관계자나 팬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했다.
실제로 엘롯기 중 기아 수뇌부는 아예 야구에 관심이 없어 운영은 현장과 프런트가 알아서 하고, 롯데 수뇌부는 구단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데 반해[10] LG 수뇌부는 꼬박꼬박 직관에 스프링캠프 때도 찾아가며 2군까지 꿰고 있을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그러나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다.[11] 야구를 잘 모르는 구단주의 지나친 관심은 자칫 필요 이상의 간섭과 구단주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장, 단장의 삽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실제로 LG의 팀 성격이 엉망이 된 것을 그 때문으로 보는 입장도 상당하다. 이상훈+이광환 체제에 대한 미련으로 김성근 축출도 그렇지만, 리빌딩에 들어가야 할 팀에 포지션까지 중복되는 즉전급 선수를 몇 년 동안 사들여서 팀 목표가 리빌딩도 아니고, 우승 도전도 아닌 애매하게 흘러가는 이유가 된 것이 그 이유. 이런 케이스가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도 있으니 바로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5년 준우승 이후 지속적인 영입을 통해 대권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계속 좋은 유망주들도 놓치자 성적이 수직으로 추락한 것이 닮았다.
2011년 방영된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LG 특집에서 그 충격적인 실상이 알려졌다. 구단주가 임명한 사장이라는 인간이 "야구에 대해 문외한"이며 그저 술만 좋아해서 스프링캠프 때 박종훈 감독과 기자들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 하니... 그나마 이 보도 덕에 그룹에서 직접 감사팀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에 들어가면서 현재는 평타는 치는 프런트로 바뀌었다. 비록 능력 부족으로 인해 지탄받는 점은 있으나, 2011년부터 시작된 백순길 단장 체제가 4년 이상 지속되는 것만 해도...[12]
메이저리그 팀으로 보면 116승 이후로 거짓말처럼 무너진 시애틀 매리너스, 일본프로야구 팀으로 보면 2010년대 들어 세대교체 실패+막장 프런트로 망가진 주니치 드래곤즈 라고 볼 수 있겠다. 타격 부분은 타자쪽으로 MVP급이 거의 없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 육성 부분에서는 나가는 선수마다 다 터지는 마이애미 말린스. 한마디로 답이 없다. 그나마 2010년대 이후로 조금 나아지는 중이다.
이 시기에는 10년 동안 도무지 발전이 없는 팀 성적과 구단의 철밥통 코치와 스카우터들, 이러한 답답한 LG 트윈스의 구단 경영에 실망을 넘어 염증을 느낀 팬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진지하게 GS그룹에 팀을 매각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FC 서울과 GS 칼텍스 여자배구단 등 GS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스포츠단은 LG 그룹보다 괜찮은 성적과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 물론 실제로 LG 그룹이 야구단을 GS 그룹에 매각할 확률을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2016년부터 GS의 스포츠단 운영도 막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실제로 넘어갔어도 잘 했을지는 의문이다.[13]
그러나 2013년[14]과 2014년[15] 연속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면서 10년의 비밀번호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2014년에는 김기태 감독의 사임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양상문 감독이 부임한 뒤 5할 -16 꼴찌에서 기적같이 4위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LG팬들을 기쁘게 했다.
2015년 구단 역사상 첫 9위로 최악의 한해를 보냈으나 2016년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함께 2년 전처럼 5할 -14에서 후반기 대반전을 만들어내며 4위에 안착, 2년 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하였다. 허나 2017년 후반기 불펜들의 연쇄적인 붕괴와 타선의 침체, 결정적으로 이병규의 은퇴식 다음날 윤지웅의 음주운전 시즌아웃과 제임스 로니의 야반도주 사건이 터져 평균자책점 1위를 찍고 가을야구에 실패했는데 95년의 해태 타이거즈 이후 처음 나온 기록이다.[16] 그리고 철밥통 서용빈이 드디어 짤렸다. 그리고 2018년 시즌 양상문 감독이 단장으로 승진하고 류중일 감독이 취임했으며 구단 역사상 가장 비싼 선수인 김현수를 115억에 영입했다. 그리고 김현수 효과와 함께 고정라인업 운영으로 양상문 시절 애매했던 타자들이 우후죽순 커리어하이 기록을 써가기도 했다. 그러나 불펜 불안과 고정라인업으로 인한 야수 체력 고갈로 시즌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던 팀 순위는 두산을 만날 때마다 패배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아시안게임브레이크 후 김현수의 시즌 아웃이 결정적인 치명타로 작용하며 두산에 전패 위기를 겪는 치욕 끝에 결국 2011년 이후 역대급 DTD로 8위로 마감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욕먹던 강상수도 짤렸고 양상문도 단장 자리에서 사임하고 2019년에 롯데감독을 맡게 되었으며[17], 빈 단장자리는 차명석이 맡게 되었다.
2019년 현재도 팀 뎁스가 두껍지 못하여 매 시즌 판도가 변하는 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차명석 단장이 이전 취임자들과 달리 고참선수들을 신경쓰는 모습을 보이면서 팀의 인기는 확실히 안정권에 들었다. 2019년에는 김민성이 사인앤트레이드로 영입되며 정성훈의 1루 전향 이후 무주공산이었던 3루수 자리에 어느정도 무게감이 생겼고, 지난해부터 이어진 류중일의 고정라인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며 야수 전력에 안정감이 생겼다. 2년차를 맞은 타일러 윌슨과 소사 대신 영입한 케이시 켈리는 리그 최고의 외국인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결정적으로 마무리 정찬헌의 이탈이 있었으나 고졸신인 정우영가 LG에서 이병규 이후 22년 만에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불과 1년차에 불펜의 주축으로 자리잡았고, 고우석이 제구불안을 떨쳐내고 언터쳐블한 모습을 보여주며 뒷문을 단단하게 막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상위권 3팀과의 상대전적에서 밀려 우승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전반기도 끝나기 전에 5강5약이 거의 결정된 분위기 속에서 일찌감치 승패마진을 벌어놓으며 구단 역사상 최다승 2위인 79승에 +15라는 여유로운 승패마진으로 4위를 기록하며 3년 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그러나 불펜 붕괴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 탈락을 기록했다.
2020년에는 뎁스 쪽에서 드디어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우승에도 잘하면 도전해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슨의 부진과 차우찬의 부상, 이형종, 이천웅 등 주전 야수들의 줄부상, 마무리 고우석의 2개월 이탈 등 여러 악재가 겹쳤음에도 타선에서는 홍창기가 리드오프로 자리잡고, 투수에서는 이민호, 이정용, 김윤식와 같은 1~2년차 신예들이 등장하며 9월 초까지 선두 NC에 1경기차로 따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9월 이후 벤치의 쓸놈쓸 운영을 포함해 여러 차례 벤치 미스가 나오며 대역전패가 속출했고 결국 치열한 2~5위 경쟁에 돌입했다. 10월 선두 NC에 4연전 싹쓸이 승리를 기록하며 2위 수성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지만 총력전 선언이 무색하게 이상한 운영이 나오며 마지막 2경기에서 최하위권 두 팀인 한화와 SK에 연패[18], 결국 1승만 거두면 2위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최종전에서 4위로 추락했다. 결국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구단 포스트시즌 역사상 첫 스윕패와 함께 준PO에서 2년 연속 탈락하며 류중일의 3년 임기는 막을 내렸다.
2021년부터는 상위권에서 드디어 우승 경쟁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승은 커녕 한국시리즈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3년에는 정규 시즌에서 1위를 거머쥐고야 말았고 이어서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며 29년만에 한풀이에 성공했다.
2. 연표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c30452><tablebgcolor=#c30452> | LG 트윈스 역대 시즌 (MBC 청룡 시절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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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 2위 | 4위 | 5위 | 4위 | |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
5위 | 6위 | 6위 | '''1위 ''' | 6위 |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
7위 | 4위 | '''1위 ''' | 3위 | 7위 |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
2위 | 2위 | 매직 3위 | 매직 1위 | 6위 |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
2위 | 6위 | 6위 | 6위 | 8위 |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
5위 | 8위 | 7위 | 6위 | 6위 |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
7위 | 3위 | 4위 | 9위 | 4위 |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
6위 | 8위 | 4위 | 4위 | 4위 | |
2022 | 2023 | 2024 | 2025 | 2026 | |
3위 | '''1위 ''' | 3위 | |||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2.1. MBC 청룡 시절(1982~1989년)
자세한 내용은 MBC 청룡 문서 참고하십시오.2.2. 백인천 체제(1990~1991년)
1989년 말 MBC 청룡을 럭키금성그룹이 인수, 구단명을 LG 트윈스로 바꾸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청룡 시절 이미 영입한 백인천을 유임시키고,[19] 신인 선수로 김동수, 이병훈을 영입, 1990년 1월 OB 베어스와 트레이드로 김상호를 내주고 최일언을 데려오면서 시즌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즌 시작 전에 이광은이 교통사고로 이탈하고, 신언호와 김기범, 박흥식도 부상으로 빠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김건우는 기약없는 재활을 해야 했기에 팀은 큰 전력누수를 안고 시작했다. LG 트윈스로의 명칭 변경 후 치른 개막전인 OB 베어스와의 2연전에서 2연패로 시작한 LG는 5연승을 기록하며 잠시 선두를 가져갔지만 5월까지 6연패와 7연패를 차례로 기록하며 꼴찌로 처졌다. 6월 3일 태평양 돌핀스와의 홈경기에서 무기력하게 5:0 패배를 당하며 14승22패로 최하위에 머물자 경기가 끝나고 100여명의 홈팬들은 잠실구장 출입문 앞으로 몰려가 백인천 감독을 향해 청문회를 요구하며 감독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백인천감독 퇴진시위에 곤욕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해태 타이거즈와의 원정 3연전을 모두 잡으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기세를 모아 8연승을 기록하며 5할을 맞췄다. 그리고 상승세를 이어가며 올스타전이 지난 7월 13일에는 꼴찌에서 불과 39일 만에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기존 마무리투수였던 김용수와 선발투수 정삼흠의 보직 변경이 신의 한 수였으며 지난해까지 유망주에 머물렀던 김태원과 문병권이 선발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7월 빙그레 이글스 원정 4연전을 모두 내주며 대전구장 19연패라는 특정팀 원정 최다연패를 기록, 3위로 추락하며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20][21] 다행히 빙그레전을 제외하고는 루징시리즈 없이 보냈지만 8월을 마쳤을 때 선두 빙그레와 5경기차 3위에 머물렀다. 그 와중에 8월 26일 잠실 해태전에서 LG가 1:13으로 승리하자 분노한 해태팬에 의하여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LG가 9월 2일에서 13일까지 태평양전 2승1패-OB전 3연승-빙그레전 2승1패-태평양전 3연승으로 10승2패를 기록하며 막판 스퍼트를 낸 사이 빙그레가 김영덕 감독의 계약 문제로 인해 급격하게 무너졌다. 9월 14일에서 17일은 LG의 휴식일이었는데 이때 선두였던 빙그레가 해태와의 홈 4연전에서 모두 패하며 LG는 가만히 앉아서 두 달 만에 선두를 탈환했다.[22] 그러나 LG가 삼성과 태평양에 갑자기 3연패를 당하며 빙그레를 스윕하고 기세가 올라온 해태에게 잠시 선두를 빼앗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선두를 탈환했다. 그러나 해태의 잔여 경기수가 많아 매직넘버는 해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9월 28일 LG의 최종전에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꼴찌가 확정된 OB와의 최종전에서 9회말 김동수가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치며 1대0 승리를 거뒀고 몇 시간 뒤 해태가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패하며 마침내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3] 1위로 직행한 LG의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였고 시리즈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팽팽한 접전을 예측했지만[24] 결과는 4전 전승으로 LG의 창단 첫 우승과 삼성의 감독 정동진의 해임이었다. 이는 서울 연고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이기도 했다. [25] 상세한 내용은 1990년 한국시리즈 참고.
불행하게도 1990년 우승은 곧바로 LG의 전성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프런트는 백인천과 계약 연장 문제[26]를 두고 대립했으며 일단 연말에 1991년에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1991년 전반기는 지난해에 비해 투타에서 모두 확 떨어진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하위권이었던 쌍방울과 태평양, OB를 탈탈 털어 강약약강으로 겨우 3~4위를 꾸준히 지켰지만 중반부터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27], 백인천 감독의 히트앤런 작전은 이미 수를 다 읽혀 전년도 만큼의 재미를 보지 못했고, 김용수와 정삼흠이 또다시 보직을 서로 바꿨지만 이번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4위 경쟁에서 밀려난 시즌 막판에는 백인천의 계약이 종료되던 시점에서 레임덕 현상으로 무너지면서 최종 순위는 53승1무72패, 신생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와 공동 6위로 마감했다. 전반기 막장의 끝을 달리다 이재우 경질 후 윤동균 대행 체제에서 5할 이상의 성적으로 승률을 4할대로 끌어올렸던 꼴찌 OB와는 불과 1.5경기 차였다. 포스트시즌행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였던 8월 말 백인천은 시즌 종료 후 떠나겠다고 선언했고 구단은 이를 곧장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에는 LG로 팀명 변경 후 최다연패인 10연패를 기록했다. 쌍방울이 막판 3연패하지 않았더라면 최종 순위는 공동 6위가 아니라 7위였다.
2.3. 1992년 ~ 1999년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뜨겁고 신바람이 넘쳐났던 리즈 시절이자 6년 사이 포스트시즌 5번, 한국시리즈에 3번 진출하며 신바람 야구가 꽃피우던 시절로 이 때만 하더라도 LG 트윈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가 있다.2.3.1. 이광환 체제(1992~1996년)
후임은 OB의 전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으로 결정되었고, 이와 동시에 김재박과 이광은에게 은퇴를 종용, 이광은은 받아들였지만 김재박은 이를 거부하고 트레이드로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1992년 시즌의 결과는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으로 떨어진 끝에 53승3무70패로 지난해와 승수가 같고 무승부 수가 2개 많아 승률은 조금 올랐으나 압도적인 최하위를 한 신생팀 쌍방울에만 앞선 7위로 마감하면서 더 안좋아졌다. 개막 이후 김용수의 부상과 정삼흠, 김태원의 부진, 김기범의 방위병 복무 등의 이유로 마운드 붕괴를 겪으며 한 달도 안 되어 꼴찌로 처지자 이광환은 홈팬들의 거센 야유와 사퇴 요구를 받았다. 언론에서도 연일 그의 야구철학인 자율야구를 거세게 비판했다. 거기다 이광환은 그해 6월 30일에 태평양에 윤덕규-박준태 트레이드를 하면서 팬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윤덕규는 3할이 가능한 타자였고, 박준태는 백업이었기 때문에 비난이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28] 그래도 수확이 없던 건 아닌데 대졸 2년차 송구홍이 팀 창단 첫 20-20을 기록하고 지난해 극심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던 김동수도 20홈런을 치는 등 젊은 선수들이 빈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였고, 전반기 바닥을 쳤던 LG는 후반기인 7월과 8월에는 월간 5할 승률 이상을 찍으며 성적이 나아졌다. 이는 신바람 야구로 이야기되는 전성기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1993년 억대팔 이상훈의 가세와 김용수의 부상 복귀로 팀 전력 상승이 기대되었다. 1993년의 개막전은 해태 타이거즈와 하는 광주 원정이었는데, 이 경기를 잡으면서 4월 내내 승리 행진을 계속하면서 상위권을 찍었다.[29] 특히 4월 30일의 잠실 해태 타이거즈 경기는 한국프로야구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불리는데, 3연전 내내 만원관중을 동원하면서 본격적인 관중 몰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4월의 상승세는 계속 이어져 5월부터 줄곧 2위권을 지켰고[30][31], 그해 7월 23~25일의 잠실 삼성 라이온즈 3연전은 평일임에도 전 경기 만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32] 정삼흠이 한때 다승 1위[33]를 기록하며 8월초에는 해태를 1경기차까지 다 따라왔다. 그렇지만 8월달 '대구 대회전'으로 불리는 삼성과의 3연전을 다 내주고 9월달에 부진을 겪으며 4위로 내려갔지만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뒤의 일이었다.[34][35] 9월 9일 잠실 쌍방울전에서 김태원은 구단 역사상 유일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그리고 시작된 준플레이오프는 OB 베어스랑 붙게 되었는데, 치열한 투수전 끝에 3차전에서 김경원을 무너뜨려 5:2로 역전승을 거두며 2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36]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 초반 잠실에서 2패로 밀리는가 싶더니 대구에서 이상훈과 정삼흠이 3~4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동률을 이루지만 잠실 홈에서 열린 5차전에서 마지막을 넘지 못하고 탈락한다. 덧붙여 이 플레이오프에서는 윤찬과 김선진[37][38] 의 전설로 남을 뇌주루가 나오고 저 경기를 모두 날림으로서 아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시즌이 끝난 그해 12월 1일 LG와 해태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김상훈+이병훈과 한대화+신동수+허문회+김봉재 간 2:4 트레이드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미스터 LG로 불리던 김상훈을 하락세 조짐이 보이던 한대화와 바꾸자 프런트가 미쳤다는 소리가 나왔지만, 결국 결과는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트레이드와 송구홍의 군 문제 이탈, 주전 포수 김동수의 방위병 복무로 인해 1994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쉽지 않다고 대부분 전문가들이 예측했다. 하지만 류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 3인방[39]과 대폭발한 이상훈,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김태원, 정삼흠과 마무리 김용수, 노장 한대화와 노찬엽의 활약은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았고, 태평양 돌핀스와 대결한 한국시리즈도 4전 전승으로 초살시키며 1994년 시즌의 지배자로 올라섰다. 이해 한국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94년 한국시리즈 참고. 그리고 신인왕 류지현을 배출하고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도 5명[40]이 수상하면서 개인기록으로도 풍년을 맞았다. 참고로, LG 트윈스의 1994년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전 구단 상대전적 우세이다. 최장연승은 5연승에 불과하며 긴 연승은 없었으나 단 한 번도 3연전 스윕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연패는 길어봤자 3연패였다. 마운드의 원투쓰리펀치 이상훈과 김태원, 정삼흠은 모두 15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신인 인현배가 전반기 9승을 기록하는 등[41] 10승을 기록하며 선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지난해까지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이닝을 먹어주던 김기범이 부상으로 인해 5선발과 롱릴리프를 오갈 정도로 선발진은 매우탄탄했다. 중간계투에서는 차동철과 강봉수, 민원기, 차명석이 역할 분배를 하며 잘 맡아주었으며 뒷문은 김용수가 30세이브로 든든하게 막았다.
압도적인 우승으로 인해 LG의 전성시대는 길게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1995년 내야 핵심들이 죄다 방위병 크리를 맞는 악재를 맞았다. 방위병 문제는 전 구단 모두에 해당했으나 내야 핵심이 모두 빠지는 LG와 이종범이 빠지는 해태가 그 피해가 특히 컸다. 유격수 유지현, 2루수 박종호, 3루수 송구홍이 한꺼번에 방위병 복무를 했다.[42] 그리고 시즌 초 방위병 신분의 롯데 강상수의 의문의 강판 이후 방위병 출전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한때 야구장에 있는데도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그나마 11월까지로 적용을 유예하기로 바뀌면서 일단 한숨을 돌렸다.
방위병 문제에 더해 투수 쪽에선 김기범이 13승으로 반등에 성공했고 김용수가 더 단단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반대급부로 김태원과 정삼흠이 흔들리며 노쇠화를 보이기 시작했다.[43] 그리고 야수 쪽에선 억대신인인 심재학과 조현이 기대에 못미쳤고[44] 김재현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으며 한대화와 노찬엽의 경기력은 떨어졌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조직력을 통해 초반 선두를 달리던 OB 베어스를 잡고[46] 8월 말 시즌 종료를 1달 앞둔 시점까지 OB 베어스에 6게임차 앞선 1위를 달렸지만 이광환의 잘못된 운영[47] 때문에 막판에 역전을 허용해 0.5게임차 2위로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에서 송구홍의 통한의 악송구가 나오며 롯데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탈락하게 된다. 김태원의 갑작스러운 부진이 계속되며 선발 운용에 어려움을 겪자 이광환은 자신의 지론을 깨고 이상훈-김기범-정삼흠-박철홍의 4인 로테이션을 가동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잘 던지던 선발의 체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했 타선의 침체 역시 1달 가량 두자릿수 안타가 안나올 정도로 최악으로 치달았다. 롯데전에선 특히 맥을 추지 못했는데 8월 이후에만 롯데에 1승7패를 기록하며 승률을 깎아먹었다. 결국 그해 9월 부터 시작된 어메이징한 추락의 끝은 정규리그에서 역전 당해 우승을 빼앗기고 플레이오프에서 업셋을 당해 3위로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48] 그해 이상훈은 순수 선발로만 20승을 따내는 괴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2007년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 되었으며 토종 좌완 선발투수 기준으로는 2017년에 양현종이 20승을 기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당연히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했다.
1996 시즌 지난해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이상훈의 척추분리증으로 인한 이탈[49]과 주축 투수들의 노쇠화[50], 부진이 겹쳐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새로 나오는 신진급 투수가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당초 대학 졸업 후 1996년에 LG에 입단해야할 임선동이 일본에 진출하고 싶어서 떼를 쓰며 구단과 소송을 벌였으며 1차지명과 2차 1라운드였던 이정길과 손혁은 입단 후 사실상 사이버투수가 되며 경기에서 모습을 감췄다.[51] 송구홍과 유지현, 박종호가 방위병 복무를 마쳤지만 팀의 상황을 바꿀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52][53] 한대화와 노찬엽의 노쇠화는 심해졌으며[54] 서용빈과 김동수 역시 2할 4푼대로 떨어지며 부진했다. 1995시즌 전반기 9홈런을 기록했던 조현은 어퍼스윙을 레벨스윙으로 교정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더 망가지고 말았다. 여기에 이광환의 이상한 운영이 지속되면서 전반기 7위로 추락했다. 김용수의 선발 재전환과 심재학의 성장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결국 이광환은 올스타전 직후 경질되었으며 천보성이 감독대행을 맡았다. 프로야구 4강이 일찌감치 정해지는 흐름으로 순위경쟁이 사실상 힘들어지자 전년도 프로야구 1~2위를 다투던 OB와 무명의 2진급의 선수들을 대거 내보내는 등[55] 서로 꼴찌하고 싶어서 안달인 운영을 하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56] 박철홍이 병역 문제로 이탈하고[57] 김기범은 구위 저하를 겪었다. 정삼흠과 김태원이 규정이닝을 소화하며 분전했지만 정삼흠은 아직 더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음에도 이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58] 김태원은 이 해가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1996년에 입단한 신인인 손혁은 시즌 막바지에 2경기 선발등판에 그쳤다. 시즌 내내 구단과 지명권 관련 소송으로 시끄러웠던 임선동은 2년 뒤 트레이드로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7억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1996시즌을 마친 시점에서 선발진은 사실상 원점에서 다시 새판을 짜야하는 상황이 됐다. 투수가 부족한 LG는 1993년에 이어 3년만에 해태와 초대형 트레이드를 했다. 좀처럼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던 외야수 2명 최훈재와 조현을 내주는 대신 투수 송유석과 최향남, 외야수 동봉철을 받아왔다. 그리고 노쇠화가 심해진 한대화를 쌍방울로 보내고 투수 신영균을 받아왔다.
2.3.2. 천보성 체제(1997~1999년)
천보성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하고 맞은 첫 시즌인 97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4강에 못 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초반에 10연승을 찍으며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된다. 그러나 5월 4일 5:27 대참사를 겪고 삼성과의 압축 배트 시비를 기점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10승, 20승, 30승, 40승에 차례로 선착했으나 올스타브레이크를 기점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추격이 시작되고 삼성 라이온즈까지 가세하자 3위로 밀려났다가[59] 시즌 막판에 다시 9연승으로 힘을 회복하면서 해태에 1.5경기차 뒤쳐진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60]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삼성을 만났고 유지현의 만루홈런, 서용빈의 역전 끝내기 2루타 등 명장면이 펼쳐진 혈투 끝에 3:2로 삼성을 잡지만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정규시즌에서 매경기 명승부[61]를 찍으며 상대전적 10승8패로 앞섰던 해태에게 투수진이 줄줄이 맥없이 무너지며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7년 한국시리즈 참고. 이 시기에 등장한 선수가 이병규로 그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손혁, 임선동, 최향남, 전승남, 신국환 등 천보성이 키우거나 외부에서 데려온 선수들은 팀의 돌풍을 이끌었다. 김재현이 발목 및 허리부상에 신장염 문제로 1경기도 나오지 못했으나 트레이드로 온 동봉철이 그의 공백을 잘 메워줬다. 박종호의 부상을 틈타 무명 선수 신국환이 해태전 연장 끝내기 이후 '신데렐라'로 등극하며 주전으로 도약했다. 차명석과 이상훈은 구원투수임에도 10승을 기록하며 뒤를 받혔고, 이상훈은 생애 첫 구원왕에 올랐다.
하지만 1998년 시즌 전 이상훈이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은 약해졌고, 외국인 선수 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마무리 마이클 앤더슨만 뽑는 등[62] 특이한 행보를 보였던 98시즌은 김용수가 다승왕을 하고, 시즌 중반에 버닝하면서 간신히 5할에서 겨우 1승 앞선 3위로 마감했다.[63] 그러나 포스트시즌이 되자 완전히 달라지는데, 엔트리에 부상중인 서용빈을 꺼내든 강수가 적중하고 8월에 영입한 주니어 펠릭스가 포스트시즌 내내 날아다니며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를 박살내고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고 전적에서 앞섰지만 정민태와 김수경을 위시한 투수진과 박재홍에게 농락당하며 또 준우승을 하고 만다. 1998년 한국시리즈 참고.
결국, 1998년의 준우승의 후유증은 팀을 기울어가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인 1999년 시즌 양대리그제가 시행되어 매직리그 3위, 전체 6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개막 후 20승에 선착한 팀이었지만 곧바로 급격하게 추락, 8월까지는 어찌어찌 5할대 승률에서 버텼으나 초반 하위권으로 추락했던 매직리그 3위 한화가 반등에 성공하며 결국 따라잡혔고 9월 이후 한화의 파죽의 10연승과 LG의 연패가 맞물리며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해체 직전 17연패의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패를 끊어주는 굴욕도 당했다.[64] 마운드에서는 선발투수 손혁[65]과 마무리로 재전향한 김용수[66]가 분투했지만 그 뒤를 받쳐야 할 김광삼, 김상태[67]가 부진했고, 이에 투수진 보강을 위해 중심타자였던 심재학을 어깨가 강하다는 이유로 투수로 전향시키는 무리수를 두는데 투수진 강화는커녕 부상으로 신음하다가[68][69] 막판에 다시 타자로 돌아오는 등,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투수진 강화는커녕 선수 본인과 구단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반대로 야수진은 이병규가 30-30 클럽과 최다안타 역대 2위 기록을 쓰며 맹활약했고 김재현과 유지현, 김동수, 이종열도 잘 받쳐주었지만, 서용빈이 병역비리로 인해 구속되며 전년도에 이어 시즌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김선진과 신국환은 부진, 98년 후반기에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던 펠릭스와 99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외국인 타자 케빈 대톨라는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70] 특히 대톨라는 3루수와 1루수를 소화한 적이 없는데 3루수로 쓰려고 영입하는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 둘을 합쳐서 김재현 하나만큼의 생산성도 보여주지 못해 차라리 심재학을 그대로 두고 외국인 투수 두 명을 뽑아 부족한 마운드를 보강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2.4. 2000년 ~ 2003년
이 시기에는 2000, 2002년에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2001, 2003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 기복이 있는 성적을 냈다. 그리고 LG의 2000년대 마지막 포스트시즌 진출기이자 6668587667이라는 암흑기의 일부 원인이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2.4.1. 이광은 체제(2000 ~ 2001.5)
1999 시즌의 부진은 천보성 감독의 사퇴를 불러왔고, 후임 감독으로는 MBC 청룡-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이광은이 새롭게 감독자리에 올랐다.[71] 이광은은 이전 천보성이 상당부분 진행시킨 리빌딩보다는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이며, 2000년 시즌 개막 직전 해태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풀린 양준혁을 손혁을 내줘가면서까지 데려온다.[72][73] 허나 주전 포수 김동수가 FA로 삼성 라이온즈 행을 선택하고 투수 전향 관련으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심재학을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하면서 전력은 이전보다는 약해졌다.[74]
어찌하여 이광은 체제로 개막한 2000년 시즌. 이광은 감독은 기존 자율야구 대신 선수들을 엄하게 통제하는 스파르타식으로 지도하게 되며 기존 자율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의 반발을 불렀다. 팀 최고참이던 김용수가 항명하기도 했고,[75] 최향남도 항명, 서용빈이 팀을 이탈할 정도로 선수단 장악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투수 운용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는데 한 시즌에만 마무리 투수 교체가 무려 5번이 넘었다.[76][77] 고정 클로저 없이 선발과 구원의 이동이 굉장히 잦아 투수 운영에 혼란이 심했다. 두산과의 어린이날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는 9회말 2사 무주자에서 5점차를 뒤집히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6월 2일 롯데와의 사직 경기에서도 8회까지 8점차 리드로 앞선 경기를 뒤집히기도 했다. 시즌 17승을 기록한 외국인 에이스 데니 해리거는 거의 매번 4일 휴식 후 등판으로 혹사시켜 결국 플레이오프와 이듬해 그 댓가를 치렀다. 시즌 초반 마무리 실패 후 선발로 돌아와 선발 6연승에 방어율 1위를 질주하는 등 맹활약하던 장문석은 마무리투수가 없다고 다시 마무리로 전환시켰다.
성적만으로만 보면 매직리그 1위, 전체 4위를 기록하면서 나름 괜찮았다고 평가를 하는 쪽도 있지만, 이는 양대 리그 제도의 허점으로 인해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가 서로 리그를 바꾸면서 양대 리그 체제가 바뀌었고, 그 중 매직리그는 약체팀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LG는 매직리그 1위가 되었지만[78] 승률은 불과 0.515였다.[79] 6월까지는 해리거와 장문석의 원투펀치를 앞세워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으나 해리거와 장문석이 선발에서 흔들린[80] 전반기가 끝나기 전에 팀 전체가 흔들리며 연패에 빠져 매직리그 선두를 롯데에 5경기차로 뒤쳐졌다가 후반기 선발진에 김민기와 안병원, 최향남, 타선에 테이텀과 쿡슨 대신 삼성에서 방출된 스미스가 가세한 뒤 안정화되어 시드니 올림픽 브레이크가 포함된 9~10월에 10연승하며 같은기간 14경기 1승13패의 부진에 빠진 롯데로부터 다시 매직리그 선두 자리를 재탈환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서 있었으나 2승 4패로 패하고 만다.[81] 여기서의 압권은 6차전으로 이광은 감독은 9회 2사까지 잘 막고 있던 김용수를 내려버리고[82] 장문석을 등판시키는 등 이해되지 않는 투수교체를 했고, 결과는 장문석이 안경현과 심정수에게 홈런을 맞고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83] 이 때문에 단장 신교식이 짤리고 최종준이 다시 단장이 된다. 이해 LG팬들은 자율야구의 기조가 흔들리고 이기는 야구에만 집착하여 시즌 내내 포지션 중복에 선발과 마무리 보직을 파괴하고 불화설이 끊이지 않는 이광은 감독의 팀의 운영에 불만이 많았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보면 이후 LG 프런트의 막장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시작은 당시 야인이었던 김성근 감독의 2군 감독 영입이었다. 이는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은이 구단에 요청해서 영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유는 분위기 쇄신. 그러나 이광은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은 그전에 전혀 인연이 없는 사이였던 만큼, 이를 그대로 믿을 만한지는 의문. 사실상 이광은을 쳐내기 위해 초보 감독 이광은보다 경력이든 뭐든 압도적인 야구계의 대선배 김성근을 들이밀면서 나가라고 압박을 줬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 자율 야구가 맘에 안 들어서 이광은을 임명했고, 이광은 같은 초보 감독으로는 그게 한계가 있으니 김성근을 데려와서 그걸 더 강요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이 역사는 2002년 김성근, 2003년 이광환에게 다시금 또 반복된다.
2000년 시즌 종료 후 LG는 대대적인 투자로 FA 최대어 홍현우를 데려왔고,[84][85] 한화 1999 우승의 중심에 있었던 거포 댄 로마이어를 영입, 일명 '준마재현' 타선을 구축했다. 당시 준마재현이란 양준혁-로마이어-김재현-홍현우. 여기에 당시 신인이었던 이병규와 꾀돌이 유지현이 테이블세터를 구축하고, 하위 타선마저 서용빈, 조인성으로 이어지는, 적어도 이름값만으로만 보면 LG는 물론 한국 역사상 최강의 타선이라 할 수 있었다. 2루수 이종열 정도를 제외하면 역대급 핵타선인 데다가, 이병규(좌)-유지현(우)-양준혁(좌)-로마이어(우)-김재현(좌)-홍현우(우)-서용빈(좌)-조인성(스위치)로 이어지는, 마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역대급 좌우놀이 타선. 선수협 파동으로 여느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던 동계훈련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대내외적으로 우승후보 내지는 최소한 4강권이라는 기대를 갖고 시즌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체 그 타선은 어디로 간 건지 이광은 감독은 2001년 시즌 시작하자마자 개막전, 그것도 당시 쌍방울을 물려받아 창단한 최약체 SK를 상대로 1회 만루 찬스에서 홍현우가 병살을 치고, 2연패를 맞이하며 추락하기 시작한다. 투수진은 '노송' 김용수가 은퇴한 가운데 외국인 투수들이 하나같이 부진했고, 최향남과 최원호가 부상으로 개점휴업했으며, 기존 선수들 또한 자신감 없는 피칭으로 마운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믿었던 타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스에 한방을 기대했던 선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팀배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부진의 최대의 변수는 선수협 사태였다. 2000년 선수협 사태 당시 LG 선수 중 김재현, 양준혁은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선수들이고, 유지현은 당시 선수협 5적이라 불릴 정도로 이들과 극렬하게 각을 세웠다.[86] 그런 와중에 제일 강경파였던 양준혁이 팀에서 쫓겨나 LG로 들어와버렸으니, 당시 주전 선수들 간에는 이미 이 문제를 두고 파벌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87]
또 커다란 사건은 서용빈의 병역비리 사태. 1997년 서용빈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고 재기하였으나, 1998년 시즌 개막 직전 교통사고로 인한 턱관절 손상에 이어 1999년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병역 비리로 구속되어 통째로 시즌을 날렸다. 2000년 다시 복귀하기는 하였으나 소송은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고, 무려 2년이라는 공백기 동안의 훈련 부족까지 겹친 상태인지라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양준혁 영입에 따라 포지션을 위협받으면서 이광은 감독과의 불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2000년 선수단 무단 이탈 사태는 이러한 영향도 분명 있었다.
여기에 용병 또한 최악으로 뽑아왔는데, 바로 댄 로마이어였다. 로마이어는 1999년 데이비스와 함께 한화의 우승을 이끌었고 2시즌 동안 74홈런을 기록한 강타자로 그 실력은 최고였지만, 그럼에도 한화가 재계약을 포기한 것은 그 성격 때문이었다. 로마이어는 동료 선수들에게 타격에 대하여 지적과 설교를 자주 하며 반 농담 삼아 플레잉 코치라고 불렸고, 한화 시절에도 국내 코치들이 로마이어의 이런 행동을 월권 행위로 여겨 못마땅스레 여겼다. 심지어 당시 한화 1군 수석 코치였던 유승안이 "로마이어를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 이런 막장 팀 분위기에 제멋대로인 용병까지 결합한 상황. 여기에 양준혁이 DH로 사실상 고정인 상황에서 1루를 서용빈과 경합해야 하니, 전력상으로도 이탈이 발생하는 상황. 결국 로마이어는 이런 습관을 LG 시절에도 버리지 못했고 2001년 7월에 중도 퇴출 당했다.[88]
즉 당시 LG 타선은 그 이름값과는 꽤나 다른 상황이었다.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유지현, 김재현, 양준혁, 서용빈)들은 선수협 갈등, 병역비리 등으로 사분오열하며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제 앞가림도 못하는 판이었고, 기껏 데려온 외부 영입 선수는 현재까지도 기록적인 먹튀 선수로 부상에 시달려 1군 출전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였다. 여기에 당시 조인성은 1998년 이제 새로 들어와서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신인 포수였고, 오히려 1999-2000 시즌 중 이런 팀 분위기 속에서 혼자 날아다니던 이병규가 독특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결국 이 시기는 LG 트윈스가 안 좋던 시절 항상 지적받았던 콩가루 집안이란 비판이 가장 적절했던 시절.
이러한 상황은 투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LG 투수진이 사분오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리더였던 김용수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김용수가 2000년 시즌을 기점으로 이광은 당시 감독과 LG 구단에게 등 떠밀리듯 은퇴한 것. 당시 김용수는 1999년 FA 자격 신청을 포기하면서 조금이라도 LG에서 더 있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던 상황이었고, 1999년에도 26세이브를 올리며 건재함을 보여줬으며, 2000년에는 클래식 기록이 나빠보이지만 무려 127이닝을 소화한 것을 볼 때 은퇴가 너무 일렀던 것이 사실이다.
은퇴 기자 회견에서도 김용수는 은연 중에 “1년 정도는 더 뛰고 싶었는데…”라며 기자 회견 중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당시 김용수의 은퇴는 2000년 이광은 감독에 대한 항명 사태까지 연결된 내용이었다.[89] 게다가 은퇴 전 김용수는 마무리 훈련 도중 “만약 구단이 은퇴시킨다면 구단이 마련해주는 은퇴식이나 은퇴경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 그 결과 은퇴식, 은퇴경기 모두 이뤄지지 못했다. KBO 최초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로서는 굉장히 모욕적인 상황.[90]
당시 LG는 급기야 최하위로 추락해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는 등 긴급 처방을 취했다. 그러나 이 과정 또한 엉망 그 자체였다.
LG는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 코치로 긴급 수혈하고 필사적인 연패 저지에 나섰지만 뒤숭숭한 분위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는다. 연차로 따지면 이감독의 13년 선배인 김성근 수석은 이미 이감독에게서 투수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다.이광은 감독은 마운드 운영을 제외한 타격과 작전, 수비에만 책임을 지는 구도. 이감독은 “내가 직접 구단에 부탁해 김성근 수석을 모셨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짜 감독과 감독급 코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랄까. ... LG의 올 시즌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조 토레와 돈 지머의 뉴욕 양키스마냥 잘 나갈까, 아니면 지난 99년 삼성처럼 한 명이 사임하는 것으로 끝날까. 전국 최다 팬을 보유한 LG의 행보는 2001시즌 프로 야구의 또 다른 관심사다.
- 주간동아 283호, #
- 주간동아 283호, #
결국, 시즌 시작 열흘만인 4월17일 프런트는 특단의 조치로 이광은 감독의 10여년 선배인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고 감독의 고유권한인 투수 운용 전권을 이광은 감독에게서 빼앗아 김성근 수석코치에게 위임했다. 이로써 LG 트윈스는 이광은 감독-김성근 수석 코치의 '1팀 2체제'가 한달간 지속되었다.
김성근 수석코치가 투수를 지휘하자마자 LG는 4연승을 기록하며 반전을 꾀하는가 싶었지만, 머리가 두 개인 상태에서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인 파워 게임이 여지없이 시작되었다. 4월 21일 9회 3-3 동점 상황에서 벌어진, 마치 귀신들린 듯한 무더기 실책을 시작으로 팀의 연승이 끊겼고 연달은 실책으로 3연패를 기록하자, 이광은 감독은 김성근 코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양준혁, 홍현우, 발데스 등을 2군으로 내리며 팀 쇄신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점차 김성근 코치의 권한을 제약한 끝에 5월 8일 어버이날 경기부터 투수 교체 권한까지 다시 뺏어오기에 이른다. 김성근이 명목상으로라도 투수 권한을 잡고 있던 시기의 성적은 7승 1무 10패.
[김성근 등록말소 배경] 부적절한 지휘체계로 혼란… 이감독에 힘주는 마지막 기회
이번 조치는 김수석의 요청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LG 이광은 감독은 “김수석이 특별히 부탁을 해왔다. 감독으로서의 내 위치와 위상을 고려해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한다”며 “팀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만큼 모양새를 따질 때가 아니다. 김수석의 도움은 앞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감독은 “5회 이전에 투수교체를 해야 한다거나 접전 상황 등 중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감독의 지시를 받고 김수석이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이 김수석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등록말소의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6일 김성근 당시 2군감독을 수석코치로 임명하면서 “위기탈출을 위해 최고 수준의 소방수를 영입한 것”이라던 LG의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2001-05-08 기사 #
이번 조치는 김수석의 요청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LG 이광은 감독은 “김수석이 특별히 부탁을 해왔다. 감독으로서의 내 위치와 위상을 고려해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한다”며 “팀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만큼 모양새를 따질 때가 아니다. 김수석의 도움은 앞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감독은 “5회 이전에 투수교체를 해야 한다거나 접전 상황 등 중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감독의 지시를 받고 김수석이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이 김수석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등록말소의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6일 김성근 당시 2군감독을 수석코치로 임명하면서 “위기탈출을 위해 최고 수준의 소방수를 영입한 것”이라던 LG의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2001-05-08 기사 #
그러나 김성근이 물러나고 나서 팀 성적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5월 8일 당일 승리 이후 이광은 감독이 경질될 때까지, 6경기 동안 LG는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였다. 최종 성적은 9승 1무 25패. 결국 5월 16일 이광은 감독이 경질되고, 김성근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어 남은 98경기를 이끌게 되었다.[91]
당시 LG 트윈스의 갈팡질팡 행보는 프런트가 팀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보였다. 처음에는 이광은 감독에게 다 맡기나 싶더니 10경기 동안 크게 부진하자 김성근을 올려 팀을 두 개로 쪼개놓았고, 잠깐 성과가 좋다 싶었으나 바로 파워 게임으로 팀이 다시 부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또 18경기만에 김성근의 투수 권한을 뺏고 이광은에게 몰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부진이 시작되니 7경기만에 이광은 감독을 경질, 김성근 감독 대행호가 출범하였다. 팀의 체제라는 건 시즌 내내 굳건해야 하는데 4-5월 2개월 동안 체제가 4번이나 바뀐 것. 이처럼 당시 LG는 팀 선수 내부로도 문제가 많았지만, 프런트의 갈팡질팡 행보가 이를 더욱 망가뜨리는 분위기였다.
2.4.2. 김성근 체제(2001.5 ~ 2002년)
우왕좌왕 끝에 등장한 김성근 감독 대행의 첫 행보는 팀 분위기를 다잡는 것이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극을 주면서 하겠다. 현재 상황은 신바람야구로 좋고 관리야구도 좋지만 우선 싸울 수 있는 팀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 이를 위해 먼저 중심타자였던 양준혁을 1번으로 돌렸고, 로마이어와 서용빈을 모두 활용하기 위해 우익수 역할을 고정 수행하도록 하였다.[92]
여기서의 핵심은 서용빈이었는데, 기존 이광은 감독 시기 서용빈은 기용 관련하여 갈등을 빚으며 선수단을 무단 이탈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대행은 2001년 시즌 내내 서용빈의 1루수직을 보장해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3명 모두 거의 전 경기 출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팀의 분란을 일으키는 베테랑들에게 믿음을 주면서 양쪽 모두를 품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93]
투수에서의 핵심은 신윤호였다. 당시 LG는 김용수의 반강제 은퇴 이후 투수진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최향남은 이광은 감독의 방침에 반발하여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장문석은 2000 시즌 이광은 감독의 이상한 기용[94]에 휘말리면서 망가져버렸고, 2000년 그래도 활약해주던 해리거조차 시즌 내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95] 붙박이 선발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 대행이 투수진의 중심으로 택한 선수가 바로 신데렐라 신윤호였다.
신윤호는 충암고 시절 주형광과 함께 고교야구계의 좌우 쌍두마차라고 불리며 "제2의 선동열" 이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기대를 받던 역대급 유망주였다. 정작 데뷔 후에는 구리 2군 숙소에서 틈만 나면 이탈하기 일쑤였으며 무단 이탈해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고 심지어 축구 팀 버스와 승용차를 두들겨 부수고 다니는 등의 기행[96][97]과 불성실한 연습 태도로 인해 고교 때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기에 입단 7년차였음에도 아무 활약도 없었으며, 사실상 구단조차 포기하고 버려지는 선수 취급을 받던 선수.
이런 신윤호에게서 어떤 모습을 봤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 대행의 집중적인 조련으로 멘탈을 다잡은 신윤호는 기량이 급상승, 일명 신데렐라로 불릴 정도로 큰 활약을 하였다. 당시 기록이 1군 70경기(2위)[98] 144⅓이닝 15승 6패 18세이브(4위) 32세이브포인트, 평균자책점 3.12(2위).[99] 이 활약으로 신윤호는 손민한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으며 다승, 구원, 승률 1위를 하여 3관왕에 올랐고 MVP투표 1차에서는 이승엽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2차투표에서 이승엽, 신윤호를 투표하지 않은 기자들이 이승엽에게 투표하면서 MVP는 수상하지 못했다.
타선의 안정화, 신윤호를 중심으로 한 투수진의 안정화를 기반으로 LG는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팀이 제대로 안정되기 시작한 6월 승률은 12승 1무 10패로 0.545, 7월 승률은 7승 3무 5패로 0.583. 이 과정에서 개막 후 두달 이상 최하위에서 허덕이던 LG는 7월 26일 4위 해태에 2경기 뒤진 5위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초반 부진은 너무 컸고, 이쯤 되면서 신윤호를 비롯한 선수진도 점차 지쳐가며 8월에는 추락을 거듭, 결국 다시 최하위로 떨어졌다(8월 승률 8승 1무 10패, 승률 0.444). 9월 가을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부활하며 치고 올라가고 특히 마지막 8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며 치고 올라갔지만, 결국 창단 첫 최하위를 면했지만 가을 야구는 실패, 58승 8무 67패 승률 0.464, 6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101]
김성근 감독 대행은 2001 시즌, 자신이 맡은 이후 팀 승률 49승 42패 1무 0.538의 성적을 남겼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승률만으로 보면 당시 3위였던 두산 베어스의 0.508보다 3푼이 높은 수치. 당시 망해가던 팀을 잘 추스러서 마지막까지 가을야구 싸움을 벌였던 공적을 인정받아, 김성근은 2002 시즌을 앞두고 감독 대행 꼬리표를 때고 정식으로 감독이 되었다. 정식 감독이 된 김성근은 그해 겨울, 자신의 전매 특허와 같은 혹독한 동계 지옥 훈련을 시키며 선수들을 조련했다.
하지만 프런트 쪽은 이번에도 난장판이었다. 이 시기 구단은 사장 최종준이 사임하면서 훗날 부산 영도구청장이 된 어윤태로 교체되었고, 단장 또한 유성민으로 교체되었다. 어윤태는 1993년부터 1995년 당시 LG 트윈스 단장으로 근무하며 신바람야구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는데, 여기서 결국 또 사달이 났다. 김성근 감독의 관리형 야구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사장으로 임명된 것. 게다가 FA가 된 양준혁을 잡지 않았고[102] FA 보상마저 보상선수가 아닌 보상금으로만 받으면서 전력 보강의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거기에 신인 지명에서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지명으로 인해 팜을 보강하기는커녕 오히려 삽질을 하고야 말았다. 내야를 보강하겠다고 실업팀을 거쳐 상무에서 뛰던 20대 후반의 김우석을 2차 1라운드 지명권을 써가면서 지명하였는데[103] 문제는 김우석을 지명하려고 거른 선수들이 바로 고영민과 조동찬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구단에서 김성근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 엿먹어보라고 김우석을 지명했다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추가로 프런트 주도로 핵심 선수들의 연봉을 대거 깎아내기 시작하면서 유지현, 김재현, 이병규가 연봉조정 신청을 냈다. 결과는 유지현은 승리, 김재현은 삭감, 이병규는 동결로 끝났다.[104] 안 그래도 선수협 사태 등으로 팀 케미가 박살난 걸 겨우 꾸려놓은 팀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망가뜨린 수준.
희한한 일이다. 꼬박 1년 전인 2001년 3월의 국내 신문들을 뒤져보면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LG는 삼성과 함께 강력한 우승후보로 등장했다. 2002시즌 개막을 기다리는 지금 셈이 밝기로 국내 톱인 김성근감독은 "지난해보다 전력이 좋아졌다"고 자신하지만 LG는 어처구니없게도 '꼴찌 후보'라는 극언까지 섞인 박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 조선일보, 2002-03-31 #
- 조선일보, 2002-03-31 #
언론의 시선 또한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물음표 전력 투성이라는 것이 감점 요인. 선발 후보 6명의 지난해 합작승수가 고작 9승(이동현 경헌호 4승, 안병원 1승). 유지현-홍현우의 주전 키스톤이 나란히 지난 겨울 몸에 칼을 댄데다 지난해의 '용병 3명 몫'을 대체한 만자니오 외에 전력 보강이 전무한 마운드는 온통 '부상 재활파'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01 시즌보다는 전력이 나아졌다고 김성근 감독은 이야기하였으며,
하지만 당시 LG 트윈스는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초반에 극심한 부진을 겪으며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었다. 변명 같긴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당시 LG 트윈스는 악재란 악재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양준혁의 이적이야 뭐 예상되었던 바였지만, 기대를 가득 안고 삼성에서 데려온 용병 매니 마르티네스가 개막전 덕아웃 옆 대기석에서 철망 밖에 있던 어린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손바닥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 여기에 계속된 통증으로 정밀 검진을 받던 유지현마저 팔꿈치에서 뼛조각을 발견하면서 팔꿈치 수술과 손목 인대 수술을 받으며 이탈했다.
여기에 현대에서 데려온 기대했던 용병 톰 퀸란은 13경기 2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결국 4월 23일에 2군행 통보를 받은 뒤 5월 3일에 웨이버공시되어 방출당했다. 이 퀸란 영입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당시 퀸란이 현대와 재계약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본인이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애초에 퀸란이 현대 시절조차 장타율과 3루 수비 능력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일 뿐 타격 기록 자체가 엉망인 선수였는데, 심지어 은퇴까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선수를 데려온 LG 프런트가 그저 막장일 뿐.
그 결과 5월 18일, LG는 최하위 롯데만을 밑에 남긴 7위를 기록하기에 이른다.[105] 특히 4-5월간 승률이 계속해서 부진하였고, 특히 5월 승률은 4할을 겨우 넘기는 수준을 기록하면서 김성근에 대한 경질 여론까지 일어나기 시작. 하지만 7위를 기록한 5월 18일날 첫 등판을 시작으로 LG의 영혼과 같은 이상훈이 복귀하였고, 마르티네스도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하였다. 그리고 LG의 대반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LG의 여름 승률은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특히 6월 성적은 9연승을 기록하며 13승 2무 6패로 자그마치 0.684에 달하였다. 7월 그나마 부진한 게 0.556이었고 8월에는 다시 6할대인 0.632. 심지어 초반의 부진에도 불구, 한때는 현대를 누르고 3위에까지 올라섰으며, 8월 8일 이후 4위 아래로는 내려간 적이 없다.[106] 다만 이 과정에서 봄 시즌의 부진으로 발생한 경질 여론, 여름부터 김성근을 응원하던 팬덤층으로 LG 팬덤 내에서도 김성근에 대한 여론이 나뉘기 시작했다.
이 시기 LG의 반등 원인은 역시 김성근이라 할 만한 불펜진의 활약이었다. 타선은 양준혁, 유지현의 이탈로 평균 이하였고, 선발진은 만자니오와 최원호를 제외하면 규정이닝 달성자도 없는데다[107] WAR는 2할 승률로 역대 프로야구 리그 중에서도 기록적인 최하위를 기록한 롯데보다 못한 낮았다. 심지어 리그 하반기에 들어서면 그나마 겨우 복구해놓은 타선이 소송에서 패한 서용빈의 입대[108], 김재현의 고관절 부상[109]으로 계속하여 흔들렸다. 그러나 불펜진에서 장문석, 이동현, 이상훈 트리오의 활약으로 두산을 제치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부족한 타력은 팀도루 2위를 기록한 기동력으로 만회했다. 여기에 시즌 후반기에 복귀한 유지현, 신인 박용택의 대활약도 큰 힘을 보탰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110]
- 김응용[110]
그리고 2002년. LG는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여 플레이오프까지 승리, 악착 같은 승부 끝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당시 현대와의 준플레이오프는 2승으로 가볍게 이긴 편이었지만, 기아와의 플레이오프는 1승 2패로 몰린 상황에서 4차전 심성보의 결승타로 기사회상한 후 마지막 5차전에서 신인 박용택이 홈런 2방을 포함, 3안타 4타점에 플레이오프 최다루타 타이기록인 10루타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3승 2패로 겨우 올라왔다. 당시 박용택의 6회 홈런 이후에 LG로 분위기가 넘어가자 흥분한 관객이 광주 무등야구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미 7경기를 치르며 지칠 대로 지친 LG와 상대하는 삼성 라이온즈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생각 이상의 격전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은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너 어디 가?"
"저 밖에 던질 투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갈 수 있겠나?"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이상훈
"저 밖에 던질 투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갈 수 있겠나?"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이상훈
당시 LG 트윈스가 9대 6으로 앞선 9회 말, 시리즈 전적 3승 3패 동률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하지만 투수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당시 LG 불펜은 투수 대부분을 소모한 상황이었고, 상대 타선은 중심 타선인 이승엽-마해영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한국시리즈의 이승엽은 20타수 2안타의 극단적인 타격 부진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타자 이승엽. 그리고 여기에서 한국시리즈 3경기 연속 등판의 투혼을 보여주었던 이상훈이 등판하였다. 하지만 구위가 이미 많이 떨어진 이상훈을 이승엽이 공략하며 동점 3점 홈런을 때려냈고, 이상훈이 강판당하고 뒤이어 올라온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연속으로 내주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최원호의 마지막 모습 이후 LG는 10년 동안 가을 야구를 맛보지 못했다.
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LG가 8회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 김성근[111]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 김성근[111]
2002년 포스트시즌의 선전으로 김성근의 입지는 탄탄해질 줄 알았지만, 11월 말 구단은 김성근을 해임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김성근과 구단의 야구관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으나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원인은 김성근식 야구와 LG가 추구하던 야구관이 상충되었던 점이 꼽힌다.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가는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의 김성근식 야구는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 LG 트윈스의 야구관이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구단주인 구본무 회장도 김성근 야구가 LG가 추구하는 야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직접 거론했을 정도다. 여기에 2002년 초반의 부진으로, 구단 수뇌부 또한 김성근의 지도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기도 했다. 분명 당시의 LG를 찬찬히 뜯어보면 당시 김성근의 성과는 꽤나 기적적인 성과로 볼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LG 트윈스는 김성근이 부임하기 전 8년 동안 7회 포스트시즌에 진출에 1회 우승과 2회 준우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만큼, 이 정도 성적은 그렇게 눈에 차는 성적은 아니었다.
2002년 말 김성근 경질설이 나돌자, 과거 OB시절부터 구단주와 직접 독대해서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던 # 김성근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구본무 구단주에게 직접 이야기하기 위해 구본무 회장의 개인 스케줄을 알아내어 골프장에 직접 찾아 가기도 했다. 사실 프런트 전체와 갈등하고 있었던 만큼, 구단주급이 아니면 이를 돌릴 방법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구본무 구단주는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김성근의 돌발 행위를 매우 언짢아 했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김성근의 표면적인 해임 이유는 우승 실패였지만, 실제로는 2002 시즌 초반 극도의 성적 부진, 팀의 이념과 상반되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 계속된 프런트와의 갈등, 구단주의 의향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었다.
시즌 초 성적이 부진하였을 때 우리도 감독님 스타일에 한소리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정규 시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에 선수들의 보여주었던 투혼과 멋진 플레이와 적장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감독님의 작전을 보면서 더 이상 회의적이었던 팬들 조차도 감독님과 선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 많은 팬들이 야구장에 모여 우리 서울 트윈스를 외쳤고 많은 트윈스 팬들은 감독님의 야구 스타일을 인정하였다. 또한 우리 트윈스 팬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의 팬들조차 감독님과 선수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중략)...
하나. 이광환 감독 선임을 취소하고 김성근 감독님의 대한 부당한 해임을 철회하라...!!!
둘. 구단의 독재 경영을 주도한 어윤태 사장은 감독님 및 선수, 팬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라...!!!
셋. 이번 사태까지 오게 한 장본인 어윤태 사장과 유성민 단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라...!!!
넷.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구단 독재 경영을 일삼는 구단 사장들은 각성하라...!!!
다섯. 구단 운영은 구단에서 야구는 감독과 선수, 팬이 할수 있도록 보장하라...!!!
'LG 할머니'라고 본인을 밝힌 심계순(72)씨는 "트윈스 야구와 김성근식 야구는 맞지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없애려 노력했다. 트윈스와 맞지 않는 감독을 해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회원은 "나는 김성근 감독이 이번에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은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한번도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보지 못한 김성근 감독이 트윈스라는 팀을 만났기 때문에 준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성환,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2002-11-30
하나. 이광환 감독 선임을 취소하고 김성근 감독님의 대한 부당한 해임을 철회하라...!!!
둘. 구단의 독재 경영을 주도한 어윤태 사장은 감독님 및 선수, 팬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라...!!!
셋. 이번 사태까지 오게 한 장본인 어윤태 사장과 유성민 단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라...!!!
넷.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구단 독재 경영을 일삼는 구단 사장들은 각성하라...!!!
다섯. 구단 운영은 구단에서 야구는 감독과 선수, 팬이 할수 있도록 보장하라...!!!
'LG 할머니'라고 본인을 밝힌 심계순(72)씨는 "트윈스 야구와 김성근식 야구는 맞지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없애려 노력했다. 트윈스와 맞지 않는 감독을 해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회원은 "나는 김성근 감독이 이번에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은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한번도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보지 못한 김성근 감독이 트윈스라는 팀을 만났기 때문에 준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성환,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2002-11-30
당시 LG 팬들의 반응은 조금 복잡했는데, 김성근 해임에 반대하는 세력과 해임 자체는 찬성이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세력이 나뉘었다. 당시 LG 트윈스 홈페이지 내 '쌍둥이마당'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엘지만행공동대책위원회는 김성근 해임 자체를 반대하였고, 오프라인 모임으로 구성되었던 8개 동호인연합회는 "김성근 해임과 관련 하여 저희 8개 동호인연합회는 구단의 의사 결정을 존중 하며 감독 해임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라고 이야기하며 해임은 찬성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이었다.
당시 동호인들의 성향을 보면 굉장히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오프라인 동호인층이 고연령층이고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는 층이 저연령층이다. 2000년대 초반인 만큼 이런 성향은 더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기사에서 나오는 LG 할머니 같은 분을 봐도 이런 부분을 알 수 있다. 즉 오히려 저연령층 팬덤에서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신바람야구를 오랜 기간 접해왔고 응원해왔던 고연령층 팬덤에서 김성근 감독을 비판했던 것. 지금 온라인 팬덤층이 김성근 감독에 훨씬 더 비판적인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가 많이 바뀌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팬덤의 분화와는 별개로, 이러한 경질 과정에 대해서는 한마음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이 사건과 이후 이광환 체제에서의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 등 팀 레전드 정리 과정에서 다수의 올드팬들, 그리고 당시 김성근 감독을 지지했던 이들 또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4.3. 이광환 체제 2(2003년)
이광환 감독 체제로 바뀐 2003년 시즌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군입대한 서용빈[112]을 제외한 지난 시즌의 전력이 고스란히 유지되긴 했지만 SK 와이번스의 급성장, 여전히 강력했던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에 밀려 중위권으로 밀려났고, 5월 29일에는 주축타자 이병규가 1루에서 전력질주하다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전력에서 이탈했다.[113] 여담으로 이병규의 부상 직후 광주에서 KIA에 스윕승을 거뒀으나 백골퍼의 롯데를 상대로 주중에 롯데의 새 외국인 타자 2명 페레즈와 이시온에게 농락당하며 스윕패를 당하고, 11승 39패라는 역대 최악의 부진을 하던 옆집 라이벌 두산한테마저 주말 스윕패를 당하게 된다.[114] 전반기 LG는 상위권 팀 현대와 기아, SK에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승수자판기로 전락한 두산에 열세, 롯데를 상대로도 근소우세에 그치는 모습을 보였다. 지지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던 한화에도 열세였다.
마운드에서는 선발 이승호가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고 최다이닝, 탈삼진 1위에 올랐고, 불펜진에서는 류택현과 전승남[115]이, 마무리는 이상훈이 버티며 투수진은 여전했지만 이동현과 장문석은 전년도 혹사[116] 여파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김민기는 아예 개점휴업, 최원호는 초반 준수한 모습을 보인 뒤 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막판이 돼서야 돌아왔다. 그래도 ERA 3.98로 8개 구단 중 KIA 다음으로 2위이자 유이한 3점대 팀 방어율로 경쟁력있는 준수한 투수진을 보유했다. 김광수와 김광삼은 전반기에 정말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117] 그러나 연패를 끊어줄만한 확실한 에이스가 부족했던 것은 큰 약점이었다. 또한 시즌아웃 되기 전까지 구원 선두였던 마무리 이상훈은 1이닝 이상을 맡기면 크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 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팀 타격이 구단 역사상 최악+한국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뒤에서 15등[118]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성적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전년도에 김성근 감독이 데려온 김상현이 쏠쏠한 활약을 펼쳤고, LG에서만 두 번의 퇴출을 당한 쿡슨 대신 데려온 이지 알칸트라의 가세에 전반기를 고관절 수술로 인한 재활로 통째로 쉬었던 김재현이 후반기 복귀에 성공해 고군분투했으나 이병규의 시즌 아웃, 박용택의 소포모어 징크스,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겪은 유지현 등으로 물방망이가 된 타선은 힘이 떨어졌다. 결국 전반기 때 간신히 지킨 4위 자리를 5위였던 기아가 8월부터 무서운 연승 행진을 달리며[119] 4위를 내주면서 8월에만 6연패-5연패로 순위가 슬슬 내려가기 시작했다.[120] 그리고 9월 들어 마무리 이상훈마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까지 후반기에 급격한 추락을 겪은 SK와 4위 경쟁하면서 버텼으나[121] 한화와의 4연전 피스윕 기점으로 8연패를 기록하며[122] 그나마 지키고 있던 5위자리를 내주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마지막 원정 15경기에서 모두 졌다.
한화에서 김태균과 이범호를 발굴해냈던 이광환 감독과 함께 차근차근차근 팀을 리빌딩했더라면 긴 암흑기는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천천히 팀을 빌딩하라고 기다려주며 강팀으로 가는데 밑거름이 됐던 1992시즌과는 정반대로 구단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즌이 한창이던 2003년 7월, 이광환 감독은 구단 윗선에서 고참들인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에 대한 결정을 통보받았는데 그 내용인 즉 이 셋을 다음 시즌 전력구상에서 제외하라는 것. 당연히 이광환은 이에 반발했고, 시즌이 끝나자 프런트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국내에 귀국한 선동열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겠다는 영입을 빌미삼아 그를 2군 감독으로 보내버렸고, 선동열 영입이 실패하자[123] 대신 이순철을 새 감독으로 내정하면서 제2창단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LG 트윈스, 아니 한국프로야구 사상 포스트시즌 연속 실패기록인 비밀번호 6668587667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2.5. 2004년 ~ 2011년
LG 트윈스 최악의 암흑기이다.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2007년을 제외하면 5위조차 기록한 적이 없다.2.5.1. 이순철 체제(2004 ~ 2006년)
새 감독이 된 이순철은 우선 이상훈을 진필중의 영입과 기타 사건 등 팀 분위기 저하 등을 이유로 2004년 1월 SK 와이번스에 양현석, 오승준을 받는 조건으로 보냈으며 FA 미아가 된 유지현 또한 SK로 이적시키려고 하였다. 외국인 타자로 알칸트라, 마르티네스와의 재계약 대신 현역 메이저리거 알 마틴을 영입했고 외국인 투수로 에드윈 후타도를 데려왔다. 2004년은 초반에 치고 나가며 줄곧 2위에 있었지만 6월부터 마무리
유지현이 은퇴한 데 이어 김재현은 프런트의 고관절 부상에 대한 각서에 실망하여 FA를 통해 SK로 가고 말았다. 보상선수 선발과정 또한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당시 SK에는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 등 많은 투수 유망주가 있었고 언론에서도 투수가 약했던 LG가 김재현의 보상선수로 투수 유망주를 지명할 거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3루수 포지션 보강 겸 SK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전략으로 안재만[130]을 지명했는데 SK 전력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131][132] 또한 시즌 말 병역비리 파동이 일어나면서 김광수, 이동현, 심수창 등 많은 유망주 자원들이 이탈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이동현은 2001년~2003년 간 무지막지한 혹사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하게 되었으나, 이순철은 최소 1년 이상 재활을 필요로 하는 선수를 8개월도 안 되어 실전 투구를 지시하는 등 무리하게 당겨쓰려다가 재활은커녕 오히려 상태가 심각해졌고 이후 인대 재수술과 두 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는 등 무려 5년간의 공백 끝에 돌아오게 된다.
2005년 또한 7월초에 잠깐 두산전 스윕승[133] 등 6연승으로 반짝하여 4위 탈환한걸 제외하고는 시즌 내내 중하위권에서 놀다시피하며 또 다시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7월 6일에 잠시 SK를 누르고 3일동안 승차없는 4위를 유지했으나 곧바로 7월말 6연패, 8월에 또 6연패로 두 번의 6연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프로야구 판도는 4강4약으로 나뉘어 가을야구 희망은 사라진 채 7위로 굴러떨어져 KIA와 창단 첫 최하위의 굴욕만 모면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19경기에서 10승9패로 고춧가루 뿌리기를 하면서 가까스로 6위로 마쳤다. 이 시즌 전까지 LG는 통산 승률에서 5할 이상이었으나 이 시즌부터 5할대가 무너지며 4할대 통산 승률이 되었다.[134]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SK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초대형 고춧가루를 작렬하며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두산에 뺏기게 한 것 정도.[135] 이해 LG의 득점력은 빠른 발을 앞세우며 전체 3위를 기록하였으나 마운드에서는 최다실점을 기록하며 극심한 투타 불균형을 보였다. 2005년 11월에는 KIA와의 3대 3 트레이드를 통해 마해영을 영입했는데, 문제는 기아로 가는 3인 중 불펜의 핵심 장문석이 있었다. 장문석은 떠나면서 구단을 디스했는데,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지만 돌아온 결과는 토사구팽이었으니 그런 말이 나왔던 것.[136]
이순철의 마지막 해였던 2006년, 시범경기에선 1위를 했지만 정작 정규시즌에서는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여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6월 3일 팬들의 대대적 시위는 그 절정이었다.
결국 이순철은 그라운드에 빠따를 던진 마지막 모습을 끝으로 6월 5일 해임되었고 남은 시즌은 양승호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이미 기운 팀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끝내 8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는 구단 사상 최초의 꼴찌였다. 이순철 시기 3년 동안 구단 프런트는 송지만, 심재학, 박재홍 등 외부로부터의 트레이드 제안을 씹으며 전력 강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고, 진필중을 제외하면 FA 또한 거들떠보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도 알 마틴이나 루 클리어를 제외하면 실패에 가까웠으며 관광객 매니 아이바와 아마우리 텔레마코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신인 선발 또한 2003년과 2005년을 제외하면 항상 똥망이었으며, 기껏 뽑아놓은 박병호, 정의윤, 우규민, 이대형, 이성열 등의 출장 기회는 제한적이었다.[137] 현장에서는 써 먹을 선수가 없어 베테랑 위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전력은 막장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탈쥐효과로 대표되는 야수진 육성 및 스카우트 실패가 더더욱 돋보이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투수진은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최악으로 전락해버렸다. 팀이 첫 최하위를 한 2006년은 2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들 중 리그 평균자책점 3.58보다 낮은 평자를 기록한 선수가 우규민, 경헌호, 키라이어 셋 뿐이었다. 이로 인해 3.5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평범한 풀타임 선발 정재복이 이 팀에서는 1선발이었다. 팀 ERA+는 무려 83.9를 기록[138]해 KBO 역사상 최악의 투수진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다만 시기 자체가 극악의 투고타저 시대였고 그나마 홈구장이 투수친화적인 잠실구장이라 돋보이지 않았을 뿐, LG 투수진은 그야말로 막장으로 치달았다.
2.5.2. 김재박 체제(2007 ~ 2009년)
이러한 상황에서 LG의 선택은 현대 유니콘스의 김재박 사단을 일부[139]만 제외하고 통째로 빼오는 것과 박명환의 영입이었다. 메이저리거 봉중근이 국내 유턴하면서 LG 유니폼을 입었고 삼성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팀 하리칼라가 삼성과의 재계약이 불발되자 계약했다. 그러나 간판 타자 이병규를 주니치 드래곤스로 보내며 타선이 더 약해졌고 그 결과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2007시즌 LG를 유력한 꼴찌 후보로 찍었다.
2007 시즌 결과는 5위로 8~9월달의 부진[140]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4강에 들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3할 타율과 도루왕 이대형이 등장하면서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나름대로의 실적도 있었다. 최동수는 36세의 나이에 데뷔 첫 규정타석 3할에 성공했고, 캡틴 이종열이 분전했다. 지난해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던 우규민은 30세이브를 올리며 세이브 부문 2위에 올랐다.[141] 무엇보다도 전임 이순철 재임기간의 수많은 실정으로 인해 크게 이탈했던 LG 팬덤이 돌아오며 흥행에 성공하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승률에 비해 기대승률은 낮았고 실제 전력은 빈약했다. 장타력과 클러치 능력이 떨어지는 빈약한 중심타선은 시즌 내내 고민거리였고, 김상현, 정의윤, 이성열, 박경수 등 젊은 타자들은 여전히 1군에서 자리잡지 못했으며 박명환이 10승을 거뒀으나 기대했던 봉중근과 팀 하리칼라의 부진[142]으로 인해 팀 ERA도 리그 하위권 수준이었다. 좌완 스페셜리스트 류택현이 23홀드로 홀드왕에 등극했음에도 전반적으로 불펜은 불안했다. 오죽하면 김재박 감독이 프런트에 조웅천이라도 영입해달라고 할 정도로.
이렇게 성적을 힘들게 끌어올렸다면, 그 다음은 전력을 더 올리기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요했지만 LG는 아니었다. 2007년의 선전에 안주해 프런트는 2007년의 전력 그대로 4강권에 도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전력 보강은 없었다. 결국 2008년 시즌에 앞서 보강을 소홀히 한 대가는 2년만에 최하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으로 돌아왔다. 2년 만에 구단 역사상 최다패를 경신하며 80패를 당했다. 2008년에는 무승부가 없어 끝장 승부였는데 마운드가 약한 LG에게는 치명적이었다. 5월에 9연패, 6월에 6연패와 9연패를 기록하면서[143] 일찌감치 최하위를 확정지었다. 박명환은 드러누웠고 브라운이 부진해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을 빼면 선발투수진은 전멸했고 정재복과 신인 정찬헌을 갈아넣은 불펜진은 이 둘의 선수 생명까지 같이 갉아먹고 말았다. 지난해 30세이브를 올렸던 우규민은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타선 또한 안치용과 시즌 중 들어온 로베르토 페타지니만 빼면 막장이었다. 특히 박용택은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2년 전 서용빈과 함께 은퇴식을 열었던 노장 김정민이 은퇴를 번복하며 복귀하며 맹활약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승환과 이성열을 트레이드[144]시키면서 포수 뎁스는 빈약해졌다.
이 때문에 구단 내부는 시즌 중 대대적인 감사를 받았으며 온갖 치부들이 밝혀졌다. 몇몇 자리만 빼고 대부분의 구단 직원들이 잘려나간 시기가 이 시기의 일. 새롭게 바뀐 프런트의 선택은 FA시장 영입이었으며 그 결과 이진영과 정성훈을 영입하면서 2009년을 대비했다.
정성훈과 이진영이 가세하고 페타지니가 똑딱이스러웠던 첫 시즌과 다르게 두 번째 시즌에는 괴물같은 선구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홈런까지 펑펑 터뜨리며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그리하여 LG 타선은 지난해보다 확실한 경쟁력이 생기며 팀 공격력은 상위권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은 1군 합류 후 5할에 가까운 타율을 보여준 박용택과 5월까지 4할대 타율을 넘나들며 완벽하게 폭격하던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맹활약에 힘입어 5월 들어 히어로즈전과 어린이날 두산전을 차례로 스윕하고 5년 만에 8연승과 함께 2위 자리까지 치고 올라갔었다. 이 과정에서 전년도에 복귀한 김정민의 맹활약도 한몫했다. 그러나 김정민이 치명적인 시즌 아웃 부상을 당하고 타격이 식어버리면서 추격만 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헛심만 쓰는 경기가 늘어났다.[145] 경기 막판에 리드를 잡아도 불펜이 무너지면서 재역전패를 당하기도 했고, 에이스 봉중근이 나서는 날에는 물방망이가 되면서 봉중근을 패전투수로 만드는 경우도 속출했다. 결국 8연승을 하며 벌어놓은 승패마진은 3주 연속 주간 1승으로 다 갉아먹으면서 7위로 추락했다. 6월 중순 마무리 이재영이 등장하면서 잠시 SK와 한화에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삼성에 더블헤더를 포함 스윕을 거두고[146] 5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그러나 곧바로 찾아온 히어로즈와의 4위 쟁탈전에서 1승 2패로 밀리는 사이 하위권에 있던 롯데와 삼성이 무섭게 치고 올라가며 LG는 7위로 내려갔고 시즌 끝까지 더 이상의 순위변동 없이 그 순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7월 31일 ~ 8월 2일에 목동에서의 히어로즈와의 3연전 피스윕은 LG의 2009 시즌에 내려진 사형선고와도 같았다.[147] 히어로즈에 스윕을 내준 LG는 곧바로 잠실에서 KIA전까지 피스윕을 내주고 7연패를 당해 7위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여기서 심논개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은 것도 덤이다. 전반기 팀 타율 1위를 다투던 타격도 페타지니의 뜨거운 페이스가 6월 이후 무더위를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약해졌고 타선과는 다르게 스토브리그 때 전혀 보강되지 못한 투수진의 허약함 문제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에 전반기 리그 최다이닝을 소화한 에이스 봉중근마저 후반기에는 팔꿈치 통증 이슈가 터지더니 9월초에 일찍 시즌을 마쳤다. 결국 LG는 승률 4할을 간신히 넘긴 7위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나마 2008년 후반기부터 전력이 완전히 망가진 한화가 시즌 중 12연패에 10연패로 1986년 원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찍으면서 최하위는 면했는데 LG는 이 한화를 상대로도 6승 1무 12패로 절대열세를 당했다. 그나마 잠실 라이벌 두산 상대로 13승 6패로 절대우세를 기록하면서 2000년 이후 무려 9년 만에 상대전적 우세를 거둔 것은 작은 위안이었다.
시즌 전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맹활약한 에이스 봉중근만 고군분투했던 LG 투수진은 너무나도 허약했다. 2008 시즌 봉중근과 원투펀치를 이뤘던 옥스프링은 WBC 출전 이후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하고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리고 그를 대체한 우완 강속구 투수 릭 바우어는 오자마자 퀵모션 약점이 노출되고 두들겨 맞으며 2군에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2승을 거두며 잘 던졌으나 훈련 도중 손가락에 타구를 맞아 골절당하는 부상으로 인해 그 역시 시즌 도중 제레미 존슨으로 교체되었다. 박명환은 1년 만에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허벅지 통증을 호소하며 다시 이탈하였고, 최원호는 무박 2일 경기 후 새벽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부상으로 2개월 간 팀을 이탈했다. 2006년 이후 3년 만에 선발로 돌아온 정재복은 홈런공장장이 되면서 전혀 경쟁력이 없었다. 그나마 봉중근에 이어 2선발 역할을 했던 투수는 심수창이었는데 심수창은 5월까지는 3점대 ERA에 5승을 거두며 괜찮았으나 6월 들어 그 역시 부진에 빠지더니 7월 이후에는 심논개 사건 이전까지 심수창의 호투 여부와 관계없이 타선 지원도 따르지 않으면서 패전만 쌓이기 시작했다. 선발에 구멍이 발생하면서 당초 롱릴리프 역할이었던 김광수가 20번의 선발등판을 해야했다. 방화신기로 유명한 불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규민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마무리 자리를 이재영에게 넘겨주고 2군에 갔다가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통증으로 시즌아웃되고 경찰청으로 입대했다. 타 팀에는 2~3이닝 정도는 거뜬히 맡아주는 불펜이 즐비했는데 LG는 2이닝은 커녕 1이닝도 제대로 막아줄 역할을 해줄 선수가 턱없이 부족했다.[148] 고졸 2년차 정찬헌은 8월 중순 시즌아웃되기 전까지 불펜으로만 55경기 76.1이닝을 던지면서 혹사를 당했고 이는 그의 선수생명까지 갉아먹었다.
결국 김재박 체제는 5-8-7로 가을야구 진출 없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롯데가 앞서 기록한 8888577 비밀번호 자릿수와 동률이 되었다. 박용택이 0.372라는 고타율로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으나 이마저도 '졸렬택' 논란으로 웃지 못했다. 또한 조인성과 심수창이 경기 도중 마운드에서 언쟁을 벌이고, 터지지 않는 만년 유망주 서승화가 2군에서 후배인 작은 이병규를 방망이로 폭행하여 물의를 빚는 등 사건사고도 있었다.
한편 2009 시즌 초 LG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정성훈의 영입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김상현과 내야 멀티백업 박기남을 KIA에 내주고 강철민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했는데 그 김상현이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 MVP를 차지하며 크게 터져버리는 바람에 LG만 피본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강철민은 2009 시즌 단 한 번도 등판하지 못하고 사이버 투수 신세가 됐다. 그리고 KIA에게 2승 1무 16패의 굴욕을 당했다. 게다가 경쟁팀인 잠실 라이벌 두산에는 13승 6패로 절대우세, 그리고 SK의 발목을 잡아버리면서[149] KIA의 우승의 1등공신이 되고 말았다.
2.5.3. 박종훈 체제(2010 ~ 2011년)
김재박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이었던 박종훈을 선임했는데 이례적으로 파격적인 5년이라는 장기계약을 맺었다. 큰 이병규가 국내 U턴하고 넥센 히어로즈로부터 이택근을 현금을 주고 사오며 기존의 박용택, 이대형, 이진영에 더해 외야수 빅5를 구성하게 됐다. 대신 페타지니와는 재계약하지 않고 곤잘레스와 오카모토를 영입하며 용병 슬롯 2명을 모두 투수로 채웠다.
2009년에 입단한 신인 오지환이 권용관의 부상을 틈타 개막전부터 차기 유격수로 낙점받았다. 개막전인 대구 삼성전에서 연장전 끝에 짜릿한 승리를 거뒀으나 얼마 안가 빅5는 이대형을 제외하고 부상[150]과 부진[151]으로 와해되며 힘겨운 시즌을 치렀다. 여기에 봉중근마저 초반 부진으로 2군행 통보를 받았고 이상훈과 봉중근의 부인, 그리고 이형종의 문제로 야구 외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렇지만 4월에는 6연승의 상승세를 타면서 3위까지 올라갔고 조인성과 오지환, 그리고 등번호 24번 작은 이병규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선발은 곤잘레스가 부진하며 골칫거리였으나 돌아온 박명환과 김광삼이 버텨주었고 불펜은 마무리 오카모토를 구심점으로 김광수와 이동현, 김기표, 이상열, 오상민이 분전했다. 여기에 봉중근이 1군에 복귀한 뒤 좋은 모습을 보여줘 탄력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월말 연이은 우천취소로 좋은 분위기가 끊기더니 문학 SK전에서 뒷심 부족 등으로 시즌 첫 피스윕을 당하며 기세가 꺾였다. 4월 미스터제로였던 오카모토까지 시즌 첫 블론에 패전을 당했다. LG는 4연패 2번, 5연패 1번으로 15경기 2승 13패에 그치며 7위까지 거침없이 내려갔다. 이번에도 선발투수는 봉중근 하나밖에 없었고 곤잘레스는 9경기 6패만 남긴 채 퇴출되었다. 주장 박용택은 끝없는 부진 끝에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빅5가 부상과 부진으로부터 하나둘씩 돌아오며 타선이 경쟁력을 갖추면서 다시금 LG는 중위권 경쟁에 합류했다. 그러나 문제는 마운드였는데 새 외국인투수 더마트레는 전혀 믿음직하지 못했고 봉중근을 뒷받침할 만한 선발투수는 보이지 않아 중간계투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카모토의 피칭 내용도 점점 나빠졌다.
KIA의 16연패를 틈타 잠시 4위를 탈환했지만 롯데가 정신을 차리면서 급기야는 그 16연패를 기록한 KIA에 5위를 내주게 되었다. 8월 7일부터 시즌 끝까지 쭉 6위에 머무르며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결국 롯데의 8888577을 넘어 프로야구 최초로 8년 연속 포스트시즌 실패가 확정되는 굴욕을 당했다. 전반기를 4위 롯데에 2.5경기차 뒤진 5위로 마쳤고 후반기 첫 2경기를 승리하며 4위 롯데에 1경기차까지 쫓아갔지만 곧바로 이어진 롯데와의 사직 3연전에서 치명적인 피스윕을 기록하며 사실상 호흡기를 떼게 되었다. 이미 올스타 브레이크 무렵부터 치고 올라갈 동력, 특히 투수력이 부족하여 4강 탈락은 유력시되었다.
2.6. 2012년 ~ 2024년
암흑기 막바지인 2012년부터의 역사로, 2013년 비밀번호를 끊고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LG의 중흥기와 암흑기를 이끌었던 주축 타자들의 노쇠화로 인해 2015년부터 리빌딩에 들어갔다. 2016년 젊은 선수들을 앞세워 PO까지 진출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2017~2018년은 PS 진출에 실패하는 등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2019년 팀 재건에 성공하고 2020년대에는 다시 우승을 노리는 강팀으로 변모했다. 1990년대에 이은 제 2의 전성기라고 볼수 있다.2.6.1. 김기태 체제(2012 ~ 2014.5)
전년도의 역대급 DTD를 뒤로하고 LG는 별다른 전력 보강 없이 신임 감독 김기태를 선임한다. 이후 언제나 그랬듯 시즌 초반에는 없는 전력 속에서도 2위까지 올라가보는 등 상위권에 진출하며 또다시 ‘혹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6월부터 또다시 급속도로 낙하하며 결국 7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 전에 FA로 조인성이 이적하고, 박현준의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며 전력이 급악화되어 꼴찌나 다름없는 전력이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실적은 있었다. 몸무게를 감량하고 다시금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 중 하나가 된 박용택과, 한국생활 2년차에 에이스가 다된 주키치, 봉중근의 성공적인 마무리 투수 전환, 불혹을 앞두고도 3할을 때린 이병규와 경직된 더그아웃 분위기 변화 등 김기태가 추구했던 형님 리더십이 성공적으로 안착되어 가고 있었고, 이는 곧 2013년 비밀번호 청산의 초석이 된다.
이후 맞이한 스토브리그에서 LG는 FA로 투수 정현욱을 영입하고 트레이드 교류가 별로 없었던 삼성과 3:3 트레이드를 단행, 외국인 선수 재계약, 내부 선수단 변화와 내부 FA를 단속하는 등 당장 성적을 내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전문가들 사이에서 LG의 전력은 당연히 하위권으로 예측되었고, 팬들 또한 비밀번호 하나 더 생기나 하고 허심탄회하게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봄에는 역시 야구 잘하는 LG이니만큼 3~4월 성적은 5할 승률을 넘었다. 하지만 5월 초 신생팀 NC에게 스윕을 당한데 이어 4연패를 두 번이나 하면서 순식간에 7위로 나가떨어졌고, 5월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DTD냐는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상이 있었던 주장 이병규가 돌아오고 5월 19일 기아전 류제국이 한국 무대 데뷔전 승리투를 달성한 것을 기점으로 팀이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후 진행된 상위권 삼성과의 맞대결에서 위닝시리즈를 챙기고, SK-한화에게도 위닝시리즈를 적립, 순위를 5위까지 상승시키고 부상중이었던 이진영도 컴백, 기아에게는 6월 2일 대역전극과 더불어 스윕을 달성하면서 LG의 진격이 시작된다. 이후 두산까지 위닝시리즈로 잡아내면서 4위 탈환, 순위싸움에 분수령이 될 롯데전도 위닝시리즈로 3위 탈환, 그 후 한화도 위닝으로 잡고 천적인 넥센마저 스윕으로 잡아버리면서 LG의 기세는 식을 줄 몰랐고, 다시 만난 삼성에게도 위닝시리즈를 거두며 1달 만에 7위에서 2위까지 순위가 수직상승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SK도 위닝시리즈로 잡아내면서 10연속 위닝시리즈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올해는 정말 다른 것인가’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러나 7월 넥센과의 3연전을 처참히 피스윕으로 마감하며 암운이 드리우나 싶었는데, 곧바로 NC전을 스윕으로 가져오고 SK와 롯데를 격파하며 전반기를 2위로 마감했다. 이후 후반기에도 살아있는 기세를 보이며 2연전 전환 이후에도 계속해서 승수를 쌓아나갔고, 멀어보였던 선두 삼성과의 격차를 줄여 8월 20일 넥센전 승리로 18년만에 후반기 1위를 달성, 9월 초중반에는 선두 자리가 계속 LG의 것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막판 들어 힘이 부친 것인지 9월 22일 드디어 11년만에 가을야구를 확정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수를 쌓지 못해 아쉽게 정규시즌 우승 기회를 날리고 2위 자리마저 위태위태해졌다. 10월 3일 기준으로 LG는 자력 2위가 불가한 상황이었지만, 10월 5일 최종전에서 순위 경쟁팀 두산에게 승리를 거두고 넥센이 한화에게 패하며 16년만에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허나 플레이오프에서는 경험의 차이로 인해 넥센을 꺾고 올라온 두산의 기세를 누르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2013년은 LG라는 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강력한 투수진과 베테랑들의 활약은 이 팀의 전력이 그렇게 약하진 않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김기태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도 상승시킨 요인이 된다. 이후 스토브리그는 에이스 리즈의 계약 문제 등으로 인해 그리 시원찮게 흘러가긴 했지만, 여전히 4강권에는 든다는 전력 평가로 2014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직전 정규시즌 2위의 모습은 어디가고 암흑기 급의 시즌 초반을 맞이하면서 연패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터지지 않는 타선에 더해 초반부터 불펜 소모로 마운드 붕괴 문제가 터져나왔고, 급기야 최하위로 떨어지면서 벌써 시즌이 끝난 것 아니냐는 여론이 급증, 끝내 김기태 감독마저 감독 자리를 사퇴하며 수장을 잃은 선수들이 어떻게 한 시즌을 보내야 하는지 막막한 기로에 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LG는 5월 11일 과거 4년간의 투수코치 경력이 있는 양상문 신임 감독을 맞이하게 된다.
2.6.2. 양상문 체제(2014.5 ~ 2017)
양상문이 감독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LG의 성적은 10승 1무 23패 9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번 시즌의 LG는 끝이다’라고 말할 정도였고 팬들도 계속되는 연패에 암흑기를 청산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또다시 야구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LG는 과거 LG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한 양상문 신임 감독을 선임한다. 사령탑 없이 표류하고 있던 LG 입장에서는 새로운 구심점을 찾긴 했지만, 야구라는 게 감독 하나 바뀐다고 팀이 바뀌지는 않는 법이기에 과연 LG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주목되었고 양상문 감독은 덕아웃에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라는 문구를 붙여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게 만들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양상문 체제 이후 첫 경기인 5월 13일 롯데와의 홈 경기에서 최경철의 10년만의 홈런을 포함해 0:5로 승리를 장식했고 다음날도 이진영의 결승타로 승리를 장식해 2014년 첫 연승을 달성했다. 이후 기아에게 위닝 시리즈를 따내거나, 삼성의 11연승도 저지하는 등 팀이 조금씩 변하는가 싶었으나, 6월이 시작되자마자 3연패를 당하며 -16까지 승패차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LG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3연패 중이었던 기아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7번 이병규의 6안타 6타점 야신강림급 활약에 힘입어 20점을 폭격하며 연패를 탈출했고, 롯데와의 주중 시리즈는 1승 1패로 마무리했다. 이후 SK와의 3연전에서 첫날에는 이진영의 3연타석 홈런과 오지환의 끝내기로 극적인 역전승을 기록하며 꼴찌를 드디어 탈출하고 다음날 김광현에게 완투승을 헌납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타선이 15점을 내주면서 SK에게 위닝시리즈를 가져간다.
이후 두산과의 라이벌전은 첫날에 끝내기 패배를 당하며 안좋게 출발했지만, 둘째날 7번 이병규의 역전 만루홈런으로 난타전 끝에 역전승, 마지막날에도 7번 이병규의 멀티홈런에 힘입어 홈런 5방을 쏘아올리는 괴력을 뽐내며 위닝시리즈를 가져간다. 한화와의 주말 3연전은 첫날 김태균의 역전 쓰리런으로 패배했지만 둘째날과 마지막날을 승리로 장식하며 3연속 위닝시리즈를 가져간다.
하지만 NC와의 홈 3연전에서는 첫날 찰리 쉬렉에게 노히트노런의 굴욕을 헌납하고 다음날도 LG 킬러 이재학에게 쉴새없이 무너졌다. 그나마 마지막 날 리오단이 무사사구 완봉승으로 굴욕을 복수하며 스윕은 면했다. SK전에서도 첫날 끝내기 패배에 이어 둘째날도 속절없이 지다가 마지막 날 부진에 빠졌던 정성훈의 멀티홈런으로 타선이 폭발해 승리하면서 꼴찌는 탈출했지만 6월의 마지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7월이 되자마자 잠실에서 한화를 상대로 시즌 첫 스윕을 두며 SK를 제치고 7위로 올라서더니, 주말에 NC까지 2연승으로 패면서 6연승을 달리게 된다. 이후 새 외국인 타자 브래드 스나이더가 합류한 이후 두산에게 위닝을 내주기도 했지만, 전반기 마지막 선두 삼성과의 홈 2연전을 쓸어담으며 기분좋게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이때 당시 전반기를 총평하자면 초반엔 그렇게 답도 없던 팀이었지만 양상문 부임 이후 마운드를 재정비하고 야수진도 재정비했다. 코리 리오단을 에이스급 투수로 끌어올리고 류제국, 우규민 등 기존 국내 주축 선발진들도 안정을 되찾았으며 윤지웅, 정찬헌 등도 불펜에 힘을 보탰다. 야수진에서는 주전 포수에 최경철을 앉히면서 안정적인 수비와 더불어 타석에서도 클러치 능력을 보이고, 7번 이병규와 이진영, 박용택, 정성훈 등이 다시 타선의 중심이 되면서 강팀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타선의 구색은 갖추게 되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첫 상대인 기아를 상대로 위닝시리즈를 거두면서 중위권 도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6위까지 올라섰다.둘째날 최경철의 역전 만루홈런이나 스나이더의 첫 홈런, 7번 이병규의 맹활약 등 타선의 힘으로 성과를 얻은 것도 고무적.
이후 롯데와의 3연전에서 첫날 임정우가 무너지면서 9:1로 그대로 완패하나 싶었지만, 4회 롯데의 공격이 채 지나기도 전에 폭우로 노게임이 되고 말았다. 이 경기는 4위를 달리던 롯데와 6위를 달리던 LG의 앞으로의 행적을 결정짓는 경기가 되었고, LG 입장에서는 4위를 향한 미라클 런의 첫 걸음이 된 셈.
다음날 치러진 경기에서는 1번에 정성훈을 두고 4번에 7번 이병규를 두는 특이하지만 공격적인 라인업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결과는 8회 6득점 대역전극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둘째날엔 황재균의 홈런으로 패배했지만 월요일 경기였던 마지막 날 정의윤의 역전 쓰리런으로 위닝시리즈를 가져가면서 중위권 판도는 아예 바뀌게 된다. 이후 삼성과의 원정 3연전은 첫날엔 난타전 끝에 이기면서 기아를 제치고 6위가 되었으나 둘째날 봉중근의 충격적인 블론세이브 패배 이후 다음날도 패배하며 루징 시리즈를 거뒀지만, 8월 첫 경기 넥센과의 홈 3연전에서 첫 날 정성훈의 멀티홈런과 마지막 날 신정락의 복귀 첫 승 등으로 위닝시리즈를 가져가며 두산을 제치고 5위로 올라섰다.
휴식일을 리그가 2연전 체제로 바뀌게 되고 첫 상대인 NC전을 타선의 힘으로 모두 쓸어담았지만, 한화와 SK에게 연달아 4연패를 당하면서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 다행히 NC를 잡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 넥센과는 1승 1패를 거둔 뒤 8월 21일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고 그 사이에 두산이 삼성에 패하며 두산을 제치고 드디어 4위로 올라선다. 다음날 기아를 상대로 2:3 역전승을 거두었고 그 후 롯데와의 운명의 원정 2연전도 첫 날 3:0 영봉승에 둘째날 8회초 황재균의 실책에 힙입어 6:5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4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후 두산에게 1승, SK-롯데에게는 1승 1패씩을 기록하며 4위로 8월을 마무리했다.
9월이 되자 연달아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고 추석 연휴 기간 동안 두산에게 역전승을 거둔 걸 빼면 한화-기아에게 3연패를 기록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그 사이 SK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다행히 기아와의 마지막 경기를 대승으로 장식하며 4위는 지켰고,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직전 마지막 경기인 삼성과의 2연전을 모두 쓸어담으며 기분좋게 휴식기를 맞이했다.
휴식기가 끝나고 10월엔 SK와의 4위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역전승을 수차례 만들어가는 가운데 LG는 넥센에게 위닝 시리즈를, NC에게는 팀 노히트노런으로 6월의 완벽한 복수를, 삼성에게는 8회의 기적, 기아에게는 0:6을 뒤집는 엄청난 저력을 선보이며 4연승으로 끝끝내 꿈의 5할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이후 두산을 타선으로 박살내면서 라이벌의 손으로 두산의 가을야구를 좌절시킴과 동시에 시즌 내내 한번도 가본 적 없었던 승패마진 +1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연승기간 동안 너무 많은 힘을 쏟아냈던 것인지 다음날 타선이 침묵하며 두산에게 패배하고 삼성의 정규시즌 우승의 제물이 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10월 17일 최종전 직전 LG의 성적은 62승 63패 2무, SK는 61승 64패 2무로 1경기 차였는데, 만약 SK가 넥센을 이기고 LG가 롯데에게 지면 무승부까지 같아 승률이 완전히 동률이 되는 상황에서 SK가 LG 상대로 10승 6패로 상대전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4위는 SK가 된다. 따라서 LG는 넥센이 SK를 이기던지, 아니면 본인들이 롯데를 잡고 자력으로 가을야구를 확정지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최종전, LG는 롯데를 상대로 7번 이병규의 연타석 투런에 힘입어 4:2로 앞선다. 하지만 곧바로 롯데에게 역전을 당하고 최준석에게 투런 홈런까지 맞으며 4:7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한편 같은 시각 목동에서는 서건창의 단일 시즌 최초 200안타와 강정호의 유격수 최초 40홈런, 유한준의 20홈런 등으로 5회 기준 5:1로 리드를 잡고 있었고, 사직 경기 7회말이 진행되던 목동 경기가 7:2로 넥센의 승리가 되면서[152] LG는 4:8로 경기를 패배하며 결국 5할 승률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2년 연속이자 기적같은 포스트시즌 막차 티켓을 얻어내었다.
이런 LG의 기적같은 행보를 뒤로하고 맞이한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NC 다이노스. 전력 차도 나는데다가 시즌 막판 연패에 제대로 된 휴식도 못하고 시즌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사직에서 곧바로 창원으로 간 LG에게 웃어주는 점은 별로 없는 듯 했다.
하지만 1차전 이재학을 상대로 1회부터 타선이 폭발하면서 1회만에 이재학을 강판시켰고 이후 최경철의 쓰리런 홈런까지 터진 결과 13:4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한다. 이후 이틀 순연 이후 치러진 2차전에서도 정성훈과 스나이더의 홈런포, 문선재의 뇌주루가 경기를 결정지으며 4:2로 승리, 원정에서 2연승을 거두고 잠실로 오게 되었다. 잠실로 온 3차전에서는 사실상 잠실이 LG팬들로만 꽉찬 상태에서 치러졌으나 4:3으로 아쉽게 석패, 4차전은 7번 이병규의 맹활약과 7회 타선 폭발로 3:11로 완승을 거두며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된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1년 전 LG가 경험했던 경험의 차이를 똑같이 NC에게 되돌려주어 승리했다는 평.
플레이오프 상대는 넥센 히어로즈. 1차전에 소사를 맞이해서 기세 좋게 앞서나가는 듯 싶었지만 만루에서의 어이없는 주루플레이로 더블아웃당하면서 분위기가 단숨에 꺾였고, 윤석민에게 역전 쓰리런을 허용하며 경기를 내주고, 2차전에서는 반대로 신정락의 호투에 8회에 LG 타선이 대폭발하며 9:2로 압승을 거두며 1승 1패 이후 잠실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3차전 오재영의 호투와 리오단의 난조로 패배, 4차전에는 결국 힘이 부친 듯 5회 김민성의 쓰리런으로 완전히 분위기를 내주는 등 12:2로 패배하며 1승 3패로 플레이오프와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12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꿈은 또다시 이루어내지 못했으나, LG 팬들에게는 암흑기 탈출 이후 또 하나의 인상 깊은 시즌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년도에 페넌트레이스 2위를 기록한 감독이 돌연 사퇴해 당시 꼴찌였던 팀 분위기는 다시 암흑기급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팀을 수습해 4위까지 기적같이 성적을 끌어올려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양상문 감독의 역량이 재평가받았고, 많은 야구 관계자들에게도 큰 감명을 남겼다.
그후 맞이한 2015 시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LG를 삼성-넥센 다음으로 보거나, 못해도 최소한 5강은 간다는 평가를 들으며 시즌을 맞이했다. 다만 투타의 주축 선수들이 나이가 적지 않은 가운데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 더뎌 우려섞인 평가도 있었다.
신정락이 군입대로 자리를 비우고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주축 선발 류제국-우규민의 이탈, 외국인 타자로 야심차게 영입한 잭 한나한이 장기간 결장에 들어가고 마무리 봉중근의 부진과 LG 타선의 중심이었던 베테랑들이 정성훈을 제외하고 집단 부진에 빠지면서[153] 기아와의 개막 2연전을 모두 지고 롯데와의 홈 개막전 첫경기도 무기력하게 지면서 3연패로 좋지 않게 시즌을 시작한다. 그 후 첫 승과 더불어 삼성에게 위닝 시리즈를 거두고 4월 내내 주간 승률 5할을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5할로 4월을 마무리했다. 마무리 봉중근이 한 달 내내 '봉포영화'라는 오명을 들으면서 부진하고 에이스로 점찍은 루카스는 제구 난조에 타선도 부진했지만 투수진에서 소사가 중심을 잡고 대체 선발들이 기대 이상을 보여줬으며 나머지 불펜의 힘으로 어찌어찌 버텼다.
하지만 5월이 시작되자마자 내리 7연패로 9위로 추락하면서 시즌 구상이 어그러졌고, 투타의 불균형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한나한은 일단 복귀하며 타선에 힘을 불어넣고 있고[154], 정성훈을 위주로 어떻게든 타선이 버텨주었지만 투수들이 말썽이 되면서 패배를 쌓았다. 그리고 큰 이병규, 이진영, 손주인, 최경철 등이 차례로 줄부상을 당하면서 강제 리빌딩에 나섰다.
그리고 맞이한 6월, NC를 스윕으로 잡고 4연승도 하는 등 시작은 좋았지만, 그새 루징시리즈를 적립하면서 승률이 도로 회귀했다(…) 또한 정찬헌이 목동에서의 끝내기 스퀴즈패배 다음날 음주운전으로 시즌아웃되는 악재가 있었다. 결국 코칭스태프를 대거 교체했고, 허리가 아픈 잭 한나한을 방출하고 루이스 히메네스를 새로 영입했다. 히메네스가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에 양석환과 유강남, 서상우 등의 신인들이 두각을 보였고, 복귀한 주축 선발들도 팀에 보탬이 되어 주어 6월 승률은 +3을 기록했다.
어찌어찌 5강과의 격차를 5경기차 이내로 유지하며 후반기 반격을 준비하는듯 했으나 7월 대구 삼성 원정에서 스윕패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매 경기 결정적일 때 안터지는 변비타선은 이어졌다. 입단 후 맹타를 쳤던 히메네스는 약점이 노출되며 급격하게 성적이 떨어졌다. 제구 난조로 퇴출위기에 몰렸던 루카스가 갱생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1선발이었던 소사가 몹시 흔들리면서 투수진에서 엇박자가 발생했다. 결국 7월 14일 단 하루만 8위로 잠시 환승한 것을 제외하고 기약없는 9호선 탑승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정의윤과 신재웅, 신동훈을 주고 진해수와 임훈, 여건욱을 데려오는 SK와의 3대3 대형 트레이드가 있었다.
8월 들어 5, 6위였던 한화와 SK 등이 급격히 추락했지만 LG는 빈약한 타선으로 인해 좀처럼 연승을 만들지 못해 상승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9위 자리는 점점 굳어져갔다. 양상문 감독도 5강 진출을 위해 무리하게 쥐어짜내려는 모습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즈음에 봉중근이 마무리 자리를 내려놓고 선발 복귀를 선택했고, 임정우가 새로운 마무리가 됐다.
9월 첫 주 1승 1무 4패로 부진해 70패에 도달하고 승패마진이 -17까지 벌어지며 사실상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은 무산됐다. 그러나 이후 중상위권 팀들에게 고춧가루를 선사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트레직넘버를 유지하고 9위 탈출의 희망을 남겼으나 9월 29일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확정되고 10월 2일에는 9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남은 2경기를 모두 잡으며 유종의 미는 거두었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통해 상위권으로 드디어 도약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완전히 잃은 채 리빌딩에 돌입하며 9위만 표류하던 2015 시즌을 뒤로하고 2016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장이었던 이진영이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신생팀 kt로 이적하는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으며, 전력 보강이라고는 FA 자격을 얻은 정상호의 영입이 유일했다.[155] 전문가들은 거의 대부분 LG의 전력을 하위권으로 예측했고 팬들 사이에서도 낙관적인 예측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예측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9년 만에 맞이한 홈 개막전에서 한화에게 이틀 연속 연장 끝내기 승리를 거두면서 스타트를 알렸고 기아전 1승 1패, SK전 피스윕, 롯데-한화전 위닝시리즈, NC-넥센전 루징시리즈, 삼성-kt전 1승 1패로 승률 5할을 맞추고 4위의 성적을 거두는 등 예상 외의 성적을 기록한 것. 팀 스탯은 매우 형편없었지만 재계약을 한 히메네스가 타선의 중심이 되어주었고, 우규민이 완봉을 기록하고 마무리 임정우도 부침은 있지만 그럭저럭 세이브를 쌓아나가면서 팀이 나름 짜임새가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투수 한 명을 시즌 개막일까지 구해오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고, 뒤늦게 부랴부랴 데려온 스캇 코프랜드는 땅볼 투수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데뷔전부터 외야와 포수 옆으로 땅볼을 기록하며 LG 팬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이후 맞이한 5월, kt전 남은 한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위닝시리즈를 달성했고 두산과의 어린이날 시리즈에서 1승 1패를 기록했지만 NC에게 스윕당하고 삼성에게도 루징시리즈를 거두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SK전을 위닝시리즈로 가져간 이후(1경기 우천 취소) kt와의 원정 경기에서 스윕을 거두고 넥센과의 첫 경기까지 잡으며 6연승을 달성해 공동 2위까지 순위가 상승했다. 7연승은 저지당했지만 위닝시리즈를 거두는데는 성공.
그러나 롯데와의 울산 원정에서 첫 날 우천취소 이후 두 경기를 내리 패배하고 두산전에서도 첫 두 경기를 패배하며 4연패에 빠졌다가, 마지막 날 유강남의 6타점 경기로 스윕은 모면했다. 그 후 5월 마지막 경기인 기아전을 무승부로 장식하며 5월에도 5할 승률을 사수해내는데 성공한다.
6월의 시작을 알리는 기아와의 경기에서 5월 31일 경기를 포함해 1승 1패 1무로 사이좋게 나눠가진 다음 kt에게 루징시리즈, 삼성에게 위닝시리즈를 얻어내며 어떻게든 5할 승률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한화와의 원정 3연전에서 첫 날 정근우의 끝내기 안타, 마지막 날 양성우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루징시리즈를 거두며 분위기가 침체되더니, 급기야 NC전 2:6의 리드를 9회에 10:7로 뒤집히는 대역전패를 당하고 4연패를 당하면서 5할 본능이 사라지고 7위까지 순위가 바닥친다. 그 후에도 부진은 끊임없이 이어져 기아와 SK에게 연달아 루징시리즈를 당하고 넥센에게 그나마 위닝을 거두었지만 다시 만난 기아에게 마지막 날 대역전승으로 스윕을 면하며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6월을 마친다.
그리고 7월이 시작되자마자 SK에게 정의윤-최승준의 탈쥐효과만 증명해주며 2경기를 모두 지더니, 삼성과의 2경기도 모두 지고 롯데와의 3연전 중 두번째 경기까지 지며 6연패에 빠지게 된다. 이 와중에 5선발조차 힘든 수준의 피칭을 보여주던 외국인 스캇 코프랜드가 웨이버공시되고 데이비드 허프가 영입되었다.[156] 이후 마지막 경기를 잡고 한화와의 첫 경기를 잡았으나 도로 루징시리즈를 내주며 전반기를 마감했다.
후반기가 시작되고, LG는 넥센과 두산에게 연달아 또 루징시리즈를 거두며 순위도 8위까지 떨어져버려 LG의 일부 홈팬들은 잠실 외야에 양상문 감독의 사퇴를 기원하며 현수막까지 들고 오는 지경에 이른다. 현수막이 등장한 롯데와의 3연전 중 첫 경기마저 지면서 승패차도 -14까지 벌어졌고, 최하위 kt와의 승차도 단 1경기였다. 더이상 LG에게 희망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스캇 코프랜드의 대체 선수로 영입한 데이비드 허프의 한국무대 첫 승으로 연패를 끊고, 마지막 날 류제국의 호투로 한 달만에 위닝시리즈를 챙겨가게 되었다.[157] 이후 NC와의 원정 시리즈에서 첫 두 경기를 잡으며 5월 이후 두 달만에 4연승과 더불어 위닝시리즈를 확보했지만, 마지막 날 8:0을 역전패당하며 급한 불은 끄는 듯 하다가 찝찝하게 7월을 마무리했다.
8월의 첫 상대는 두산, 첫 날엔 LG 수비진의 실책 퍼레이드로 허프가 2.2이닝 동안 8실점 무자책이라는 어메이징한 투구를 하게 만들면서 대패했다. 다음 날 경기는 쫓고 쫓기는 승부 끝에 2점차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날에는 동점 상황 10회말 1사 만루 끝내기 위기를 윤지웅이 막아내고 12회초 히메네스가 적시타를 때려내며 위닝시리즈를 가져간다. 이후 맞이한 kt와의 3연전은 타선의 핵심인 히메네스와 타점을 잘 먹던 채은성 없이도 타선의 힘으로 스윕을 달성하며 5연승을 만들었고, 2016 LG 반격의 신호탄이 되었다.
2연전 체제로 바뀌고 처음 맞이한 SK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첫날 오지환의 멀티 홈런(만루 홈런, 솔로 홈런)으로 첫날을 이기고 둘째날에는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 SK 마무리 박희수를 상대로 유강남의 동점 홈런, 김용의 2루타-박용택 내야안타-정성훈 행운의 안타 등이 겹치며 역전승을 만들어내 7연승을 달성한다. 이후 NC와의 홈 2연전은 박용택의 2천 안타와 마운드의 힘으로 첫날 승리, 둘째날은 역전패 위기에서 8회 오지환의 동점 홈런, 박용택의 극적인 끝내기로 2002년 6월 이후 14년 만에 9연승을 달성하며 중위권 판도를 크게 뒤바꾸며 순식간에 6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후 삼성에게 2연전 스윕을 당하며 기세가 한풀 꺾이고, SK-한화-기아-두산에게 모두 1승 1패씩 거두며 가을야구 사정권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6위를 불안하게 왔다갔다했다.[158] 이후 넥센을 스윕하고 kt전 첫날까지 잡으며 3연승으로 5위로 올라섰지만, kt전 둘째 날과 사직 롯데전에서 선발 붕괴로 도로 3연패를 당하면서 8월을 마무리했다.
이제 가을야구의 당락이 결정되는 9월, LG의 시작은 좋지 못했다. 첫날 한화를 상대로 박용택의 5년 연속 150안타와 류제국의 10승으로 승리했지만 다음날 패배했고, kt에게 이틀 연속 역전패로 3연패를 달성하며 주간 1승 5패로 분위기가 꺾인다. 그러나 SK가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하면서 LG에게 기회가 왔고 LG는 넥센전 스윕-두산전 1승 1패 이후 롯데에게 이틀 연속 역전승으로 스윕을 달성하며 주간 5승1패로 전 주의 부진을 만회해 기아와 공동 5위에 올랐다. 그리고 NC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하며 부진하는 SK를 제치고 기아와 공동 4위가 됐다.
그리고 맞이하는 추석 2연전 상대는 공동 4위인 기아 타이거즈. 그야말로 빅매치이자 대혈투가 예상되는 경기로 이 2연전이 양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봐도 무방했다.
첫날 기아는 LG 킬러 양현종을 등판시켰고 LG는 후반기 에이스가 된 허프를 등판시킨다. 1회말 양현종을 저격하기 위해 2번에 배치된 문선재가 솔로 홈런을 때려내며 앞서나갔지만, 5회와 6회에 기아가 역전에 성공한다. 하지만 6회말에 LG가 바로 역전에 성공했고 8회에 1점을 추가하고 임정우가 브렛 필에게 홈런을 맞은 걸 제외하면 깔끔하게 막고 승리를 챙기며 LG가 단독 4위에 올랐다. 그리고 둘째날 기아는 헥터를, LG는 우규민을 등판시켰고 우규민이 6이닝 1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달성하고 LG 타선도 헥터에게 3점을 얻은 것을 끝까지 지켜내며 기아와의 2연전을 스윕하고 4위를 굳히는 계기가 된다.
다음 상대는 삼성. 첫날 삼성은 차우찬을 선발등판시켰고 LG 타선을 꽁꽁 틀어막은 반면 LG는 선발 봉중근이 2실점을 하면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8회 장필준을 공략해내며 동점을 만들고 11회초 위기를 넘긴 이후 공격에서 이천웅이 장원삼에게 끝내기 홈런을 때리며 -14를 극복하고 5할 승률로 복귀했다. 둘째날은 양석환+문선재의 홈런과 류제국의 데뷔 첫 완봉승으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며 4연승을 기록하고 잔여경기만 남겨놓게 된다. 2주 연속 주간 5승1패를 기록하며 선수단의 사기는 극에 달했다.
잔여 경기 첫 경기인 한화전에서 오지환의 20홈런으로 승리를 거두며 5연승을 거뒀지만, NC전에서 빈공 끝에 무승부, 잠실 한화전에서는 실책으로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다. 다행히 기아와의 4위 결정전에서 다시 한번 문선재가 양현종을 두들기며 승리를 거뒀지만, 홈에서 열린 SK전에서 뜻밖에 스윕을 당하며 LG의 4위 자리도 오리무중이 된다.
그리고 10월 3일 삼성에게 승리를 거두며 2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짓는다. 하지만 다음날 1점 차 패배를 거두며 4위 자리는 알 수 없어졌으나 6일 롯데전을 역전승으로 장식하고 기아가 삼성에게 패배하며 4위(+5할 승률)를 확정지었다. 8일 최종전인 두산전은 전력 점검+이벤트 차원에서 시구/시타를 이상훈 코치와 노찬엽 코치가 맡았다. 그리고 9번 이병규를 콜업했는데 2016 최고의 투수였던 니퍼트에게 대타 안타를 때려냈다. 경기는 11:1로 패배하며 정확히 5할 승률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홈에서 열린 KIA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1차전 에이스 허프를 내세웠음에도 오지환의 실책과 유강남의 주루사 등으로 분위기가 넘어가며 4:2로 패배해 업셋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양현종과의 팽팽한 투수전이 펼쳐진 2차전에서 류제국이 8이닝 무실점으로 인생투를 했고, 기아의 여러 차례 호수비에 찬스가 무산되다가 9회말 1사만루에서 김용의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2년 전 플레이오프에서 LG를 무너뜨렸던 정규시즌 3위 넥센이었는데 이때 넥센은 염경엽 감독과 프런트의 불화설이 퍼지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159]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1차전에서 소사의 무실점 호투와 함께 타선이 에이스 밴 헤켄 대신 1차전 선발로 나온 스캇 맥그레거를 공략하며 손쉽게 7:0 승리를 거뒀다. 2차전에서 우규민이 무너지고 타선은 LG 킬러 밴 헤켄을 공략하지 못하며 5:1로 완패했으나 잠실에서 열린 3차전에서 허프의 호투와 유강남의 결정적인 한 방으로 4:2 승리를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리고 4차전에서 주장 류제국이 부진하며 2회까지 4:0으로 끌려갔으나 불펜이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가운데 추격을 개시해 5회에 동점을 이뤘고, 8회말 상대 마무리 김세현을 상대로 오지환의 결승 적시타로 5:4 역전승을 거두며 2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60]
플레이오프 상대는 2년 전 준플레이오프에서 맞대결한 NC였다. NC는 시즌 전 모든 전문가들로부터 우승후보 평가를 받았지만 시즌 중 승부조작 및 여러 사건사고로 분위기가 처져있어 LG로서는 2002년 이후 14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도전해 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61] 마산에서 열린 1차전에서 선발 소사가 무실점으로 막아낸 가운데 타선에서는 히메네스와 정상호가 7회와 8회 홈런 1개씩을 뽑아내며 9회말 전까지 2-0으로 리드해 승리를 눈앞에 뒀다. 그러나 마무리 임정우가 연속 3피안타를 허용하며 2:1로 쫓기고 무사 1,2루가 됐고, 결국 여기서 김지용이 등판했다. 그러나 김지용마저 1사에서 이호준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했고, 손시헌을 고의사구로 내보내 1사 만루에서 용덕한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아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LG 선수단은 이 패배로 인해 분위기가 급격히 흔들렸고, 나머지 경기에서 처참한 빈타에 시달리게 됐다. 2차전에서 에이스 허프가 나왔지만 타선이 NC 선발 스튜어트를 공략하지 못하고 잘 던지던 허프마저 7회말 박석민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얻어맞으며 2:0으로 패해 시리즈 전적 2패에 몰렸다. 잠실에서 열린 3차전에서 상대가 안타 6개와 사사구 16개나 내주며 알아서 승리하라고 떠먹여 주는데도 연장 10회까지 단 1점만 뽑는 최악의 졸전이 이어지다가 안익훈의 결정적인 호수비와 양석환의 끝내기 안타로 2:1 승리를 거둬 시리즈 스윕패는 면했다. 그리고 4차전에서 선발 우규민을 빠르게 내리고 허프를 투입시키는 승부수를 펼쳤지만 1:1이었던 7회초 또다시 박석민에게 결정적인 홈런을 얻어맞으며 시리즈 내내 안터지던 NC 타선이 활화산처럼 타올랐고[162], 결국 8:3으로 패해 시리즈 전적 1승3패로 NC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의 제물이 되었다.[163]
비록 14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무산됐지만 투타에서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며 성공적인 세대교체와 함께 호성적까지 잡았던 한 해로 평가받았다. 이에 고무된 LG 구단은 2017년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3명을 빠르게 모두 잔류시키고, 삼성의 선발투수 차우찬을 95억이라는 거액에 영입하며 2017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164] 여기에 팀의 5선발로 활약했던 신정락이 사회복무요원에서 제대해 복귀하고, 당초 군입대 예정이었던 오지환의 입대도 미루어졌다. 또한 1차지명 신인 고우석이 입단하며 기대를 받았다. 이에 LG는 최형우를 영입한 KIA와 함께 상위권 판도를 뒤흔들 수 있을만한 팀으로 평가받았다.
고척돔에서 열린 넥센과의 개막 시리즈 3연전을 스윕한 LG는 여세를 몰아 삼성과의 홈 개막전 2경기에 롯데와의 사직 첫 경기까지 6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며 전문가들의 전망에 부응하는듯 했다. 그러나 롯데와의 아쉬운 역전패를 시작으로 빈약한 타선을 노출하며 내리 5연패를 당했다. 에이스 데이비드 허프와 마무리 임정우가 시즌 직전 무릎 부상과 어깨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LG 투수진은 초반부터 최소 평균자책점 1위를 독주하며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다. 차우찬과 소사가 강력한 원투펀치를 이루고 주장 류제국은 승리요정에 5선발 임찬규도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으며 대체 선발로 등판한 윤지웅과 김대현까지 좋은 모습을 보였다. 불펜은 고정 마무리투수는 없었지만 잘 굴러갔다. 그러나 타자들은 시즌초 맹타를 휘두른 이형종을 제외하곤 대부분 직전해에 좋았던 모습들이 실종되면서 무기력한 득점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2점대 팀 ERA를 기록한 투수진이 압도적이라 15승 11패로 3위로 4월을 마감했다.
5월초 LG는 완벽한 투타 밸런스를 보이며 7연승으로 승패마진 +10을 기록하며 2위까지 치고갔다. NC와의 잠실 시리즈에서 첫 경기 패배 후 내리 2연승을 거둔 뒤 두산과의 주말 어린이날 3연전에서 7년만에 스윕승을 거두며 팀 분위기는 최고조에 올랐다. 삼성 원정에서 2경기 모두 승리를 거뒀다. 허프가 복귀한 한화와의 잠실 3연전에서 2패 후 1승을 기록한 가운데 광주에서 1.5경기차 선두 KIA와 운명의 3연전을 치르게 됐다. 선발 매치업은 원투펀치 양현종과 헥터가 로테이션상 나오지 않는 KIA보다 차우찬과 소사가 나오는 LG가 유리하다고 평가받았으나 첫날부터 병살만 4이닝 연속 치는 등 극심한 빈타로 인해 연장전 끝내기 패배를 당하더니 나머지 2경기도 또다시 4병살 경기를 적립하는 등 무기력한 경기 끝에 내리 패하며 충격적인 스윕패를 당하고 말았다. 롯데와의 잠실 첫 경기도 허프가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며 패배를 추가해 4연패를 당한 가운데 주말에 열린 나머지 2경기에서 1점차 승리를 거두며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두산과의 2연전에서 첫 경기 빈타에 두 번째 경기에서 타선이 간만에 일을 하고도 믿었던 불펜이 무너지며 역전패를 당해 다시금 연패를 당했다. 그리고 문학에서 열린 주말 SK와의 3연전에서도 히메네스의 삼중살 등 타선에서의 무기력한 경기가 계속 이어지며 결국 5연패를 당했다. 툭하면 땅볼만 양산하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서용빈 타격코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6월에는 NC에게 스윕을 당하면서 여전히 안좋게 시작했지만, kt전 역전승 이후 두산-SK-KIA로 이어지는 상위권 팀에게 전부 위닝시리즈를 챙기면서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러나 월말에 삼성-넥센에게 루징시리즈를 당하고 KIA에게도 홈에서 스윕을 당하며 7월 시작은 또 안좋게 시작되었다.
이후 7월 초 한화와의 3연전에서 이병규의 은퇴식이 거행되었고, 히메네스를 방출하고 새 외국인 타자 로니를 영입하는 등 그 이후 경기력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7월 하순에는 6연승을 달리기도 했고, 7월 말 넥센전에서는 LG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황목치승의 혼신의 슬라이딩과 박용택의 끝내기 홈런 등이 나왔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거기에 뒤이은 한화와의 3연전도 위닝시리즈를 거두며 여름에 분위기를 한껏 올리게 된다.
8월에는 시작하자마자 롯데를 홈으로 불러들여 짜릿한 역전승을 반복한 결과 스윕을 달성하면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당시 3위 두산을 3경기 차로 압박하고 있었고 다음 3연전이 두산과의 홈 3연전이었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3위도 노려볼만 하다는 여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두산과의 3연전을 처참하게 스윕당하면서 이 팀의 특징인 DTD가 또다시 시작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2연전으로 리그 진행 체제가 바뀌면서 지금까지의 집단 마무리 등의 투수 운용의 결과가 그대로 돌아와버렸고, 로니는 2군행을 통보받고 미국으로 도주하는 등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아 버리면서 6위까지 수직하락한다.
9월에는 초반에 4연승을 달리면서 다시 5위로 올라서기도 했지만 그 뒤로 역시나 급속도로 추락하면서 도로 6위가 되고, 9월 29일 두산전을 패배하며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확정되었다. 이후 10월 3일 최종전 패배로 시즌을 6위로 마친 이후 양상문은 단장으로 직책이 변경되고 류중일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3년 반 동안 이어진 양상문 체제는 막을 내린다.
2.6.3. 류중일 체제(2018 ~ 2020)
2018 시즌을 앞두고 LG는 2010년대 초반 삼성 왕조의 주역이었던 류중일 감독을 영입해 우승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2년 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김현수까지 영입, 외국인 선수로 투수는 타일러 윌슨이라는 새로운 선수와 더불어 LG에서 3년 간 검증된 투수이자 에이스인 핸리 소사와 재계약, 외국인 타자로는 메이저리그 경력이 꽤 있는 아도니스 가르시아를 영입해 2017 시즌의 문제점이었던 투타 밸런스 붕괴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다. NC와의 개막 2연전에서 맥없이 스윕당하고, 넥센에게 루징 시리즈를 겪는 등 많이 흔들렸다. 이후 디펜딩 챔피언 기아를 만나 첫 날 패배 이후 둘째날 양현종을 두들기며 승리했고, 마지막 날에는 가르시아의 끝내기 안타로 위닝 시리즈를 달성했다.
이후 두산전에서 2패를 당했으나 타선의 힘으로 롯데와의 사직 원정에서 위닝 시리즈, SK전에서도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고 kt전에서도 화력쇼를 선보여 스윕승을 거두는 등 연승을 달렸다. 다만 기아에게 피스윕과 동시에 가르시아가 이탈했으나 NC와 넥센에게 스윕을 거두고 삼성에게 위닝 시리즈를 거두어 8연승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LG의 3~4월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그러나 5월이 시작되자마자 무려 8연패를 적립하여 승률을 다 까먹었다. 한화전에서는 부족한 뒷심으로 스윕을 당했고, 두산과의 어린이날 3연전도 내내 압도당하면서 졌다. 이후 롯데전에서는 8연패를 끊긴 했으나 졸전을 거듭하며 루징시리즈로 이어졌다. 그 뒤에도 SK에게 1승 1패, 삼성전 위닝시리즈, 한화전 루징시리즈, NC전 스윕, kt전 루징시리즈 등 기복 있는 경기력이 계속 이어지다가, 5월 마지막 3연전인 사직 롯데전에서는 거의 16년 만에 사직 원정을 스윕으로 장식하여 5월 마무리는 최상의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6월이 되자마자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넥센과의 6월 첫 3연전에서는 김현수와 박용택의 맹활약, 마지막 날 윌슨의 완봉승까지 앞세워 스윕을 달성하고, 잠실 한화전 첫날까지 7연승을 기록한다. 한화전도 마지막 날 양석환의 대활약으로 위닝시리즈를 챙겼고, 삼성전도 위닝시리즈를 챙겼다. NC전에서는 스윕을 당하며 위기가 오긴 했지만 곧바로 기아와의 3연전을 정주현-박용택의 연속 끝내기 안타와 오지환의 맹활약으로 스윕하면서 3위를 탈환하고, 청주 한화전 첫날까지 승리를 거두며 2위까지 올라선다. 그 뒤 루징시리즈를 당하긴 했지만, 롯데전은 박용택의 KBO 최다안타 신기록을 바탕으로 2승 1무를 기록하고 kt전 한 경기도 승리. 6월 내내 2위와 3위를 왔다갔다 했지만 6월 막판 SK에게 2패를 당하며 다시 4위가 되었다.
7월에는 NC에게 루징-기아에게 위닝-SK에게 루징을 당하며 그다지 좋지는 않은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후반기가 시작하자마자 유강남의 역전 만루홈런이 터지고 임찬규가 데뷔 첫 10승을 달성하면서 넥센을 스윕하며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랐지만, 두산에게는 실책, 막장 투수운용 등으로 처참하게 스윕으로 박살났고, 이는 곧 2018 LG의 DTD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삼성전 스윕 위기에서 오지환의 끝내기 홈런으로 간신히 스윕을 모면했고, kt전에서도 스윕 위기였으나 김현수가 팀을 구원했다. 그러나 또 두산을 만나 처참히 스윕을 당하고 2연전 체제에서 SK와 롯데에게 모조리 피스윕, 삼성전 첫 날도 패배해 8연패에 빠지며 5위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그 후 연패를 탈출하긴 했으나 절대우위를 가졌던 넥센에게 스윕패를 당하고 기아에게 1승 1패, SK에게 1승을 거두며 힘겹게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맞이한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에는 오지환의 국가대표 승선 논란 등의 문제로 팀 이미지 자체가 많이 실추되어 있었고, 그럼에도 브레이크 이후 kt와 NC에게 1승 1패, 한화전 스윕, 넥센과 삼성, 다시 만난 한화에게 1승 1패를 거두는 등 힘겹게 5위를 사수하며 나름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롯데를 만나 스윕을 당하고 여기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또 두산을 만나 또 스윕을 당하면서 순식간에 8위로 나가떨어지게 된다. 이후 kt에게 1승 1패를 거뒀으나 SK에게 스윕당하고, 당시 5위를 빼앗은 기아와의 2연전을 1승 1패로 마감, 그리고 또 두산을 만나 스윕을 당하며 시즌 내내 두산에게 17전 17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kt전 1승 1패 이후 두산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차우찬의 혼신의 134구 완투승으로 1승을 겨우 거둔다. 이후 SK와의 정규시즌 최종전을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8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LG의 2018 시즌은 두산전 1승 15패와 DTD로 인한 8위 추락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 지난해 문제점이었던 타선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이번엔 마운드에서 엄청난 문제들이 터져나왔고, 윌슨과 소사를 제외하고 믿을 만한 국내 선발진이 실종됨과 동시에 거듭된 혹사로 인해 지친 불펜이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대폭발하면서 2011년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DTD가 나오고 말았다. 또한 아도니스 가르시아가 부상으로 무려 100경기를 날려먹어 외국인 타자 인선에 또 실패한 것도 주 원인 중 하나였으며, 오지환이 아시안게임 관련으로 팬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논란이 일면서 팀 내외적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삼성 왕조를 세운 류중일 감독도 LG로 오면서 감독 밑천이 다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산전 연패는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추가로 박용택의 주장 자질 논란과 더불어 김현수의 리더십이 조명받아 대비되기도 하는 등 다사다난한 한 시즌을 보낸 2018년의 LG였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양상문 단장이 해임되어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가고 차명석을 신인 단장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스토브리그에서 LG는 윌슨과 재계약하고 새로운 외인 투수 케이시 켈리를 영입, 타자는 토미 조셉을 영입하고 장원삼과 심수창, 송은범, 이성우 등 황혼기에 접어든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하는 등 성적을 내기 위한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2019 시즌 시작 직전 3루수 보강을 위해 키움에서 김민성을 영입한 것 외에는 특별한 전력보강이 없어 전문가들은 LG를 상위권 후보로 예측하지는 않았다.
3월 23일을 개막으로 2019년이 시작되고, LG는 KIA와의 개막 2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첫 단추를 잘 꿰맸다. 개막 2연전 동안 윌슨과 켈리가 모두 퀄리티 스타트로 좋은 피칭을 선보였고, 토미 조셉도 2경기 만에 한국무대 첫 홈런을 뽑아내는 등 좋은 소식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SK와의 원정 3연전에서 루징 시리즈를 당하며 분위기가 다소 꺾였다. 첫날에는 조셉의 역전 쓰리런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나머지 두 경기에서 연속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이후 롯데를 만나 첫날에는 조셉의 홈런과 이천웅의 결승타로 역전승, 둘째날 패배 이후 셋째날에는 9회 2아웃까지 5:2로 뒤지던 경기를 5:5로 맞추고 10회말 유강남의 끝내기 2루타가 터지며 위닝 시리즈를 거두며 3월을 마무리했다.
4월에는 김민성이 1군에 등록됐지만 시작하자마자 한화와 kt에게 연속으로 루징 시리즈를 당하고 삼성과도 1승 1패를 주고받으며 다소 허덕이던 가운데 하필 다음 주말 시리즈가 LG를 2018 시즌 내내 처참히 짓밟은 두산이라 다소 어렵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첫 날 차우찬의 7이닝 무실점 호투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더니, 둘째날에도 5회말 유희관을 공략하는데 성공해 역전승을 거두었고 셋째날에는 아쉽게 패배하면서 2017년 6월 이후 22개월만에 두산에게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다.
이후 NC와의 3연전을 스윕으로 가져가며 분위기가 올랐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연장 접전 끝에 어떻게든 승리를 가져갔고, 마지막 날에는 8회에 오지환의 역전 투런과 김민성이 이적 후 첫 홈런을 장식하면서 스윕에 성공했다. 이후 마무리 정찬헌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키움을 만나 루징 시리즈를 거두긴 했으나 마지막 날 체면치레는 했고, 이때부터 마무리 투수가 고우석이 된다. 주중 기아와의 맞대결에서 김민성이 만루홈런을 때리는 등 타선이 폭발하며 2승을 챙겼다.
삼성과의 라팍 맞대결에서는 첫날이 우천취소된 가운데 둘째날 평균자책점 0점대 투수인 윌슨의 짠물 투구를 바탕으로 8:0 완승을 거두었고, 마지막날에는 9회 유강남의 결승 홈런이 나오면서 5연승을 거둔다. 이후 kt와의 3연전에서 오지환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스윕을 거두면서 8연승을 기록하고 공동 선두로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4월을 마치고 최고의 분위기로 5월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두산과의 어린이날 3연전에서 2년 연속 스윕을 당하고, 키움전에서 첫 날 역전승 이후 루징 시리즈, 한화에게 위닝 시리즈를 거두긴 했으나 롯데를 상대로도 힘겹게 루징 시리즈, NC에게도 2패, SK에게도 3연전 중 2패를 먼저 당하며 연패를 적립하면서 단숨에 5위로 떨어졌다. 그나마 마지막 날 김용의의 센스 넘치는 주루로 끝내기 승리를 거두어 한숨 돌리기는 했다.
이후 다시 만난 롯데와의 사직 3연전에서 첫날 패배 이후 둘째날 0:5 경기를 6:5로 역전승, 마지막 날에는 타선이 시원하게 터지면서 위닝 시리즈를 달성했고, 키움전에서는 김민성의 맹활약으로 위닝 시리즈를 챙기면서 다시 4위가 되었다. 그리고 NC와의 3연전에서도 첫날 김현수의 역전타, 둘째날 윌슨의 호투로 승리하며 위닝 시리즈를 챙기면서 다시 3위까지 올라가며 다소 다사다난했던 5월을 마치고 6월을 맞이했다.
6월이 시작하자마자 LG의 천적이 된 kt를 스윕해버리고, 한화전에서는 역전승을 반복하여 위닝시리즈를 가져온다. 그리고 2019 시즌 막장이 된 롯데를 상대로 낫아웃 끝내기 등 이색적인 끝내기 승리(…)를 통해 2승 1무를 거두어 6월의 스타트도 아주 좋았다. 그러나 이후 두산에게 루징시리즈를 내어주고 삼성에게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지만 KIA와 SK에게 다시 루징을 거두며 6월의 마무리는 다소 평범했다.
7월에는 한화를 스윕했지만 KIA와 두산에게 1승 4패를 당하며 주춤거렸고, 삼성과 SK를 상대로도 3승 3패를 기록하며 비교적 무난하게 전반기를 마쳤다. 후반기에는 LG가 자랑하는 천적 kt에게 2승을 거뒀지만 되려 키움에게 2패를 당해 딱 5할 승률로 7월을 마쳤다.
8월에는 키움과의 3연전 마지막 경기를 끝내기 승리로 장식한 걸 빼면, 8월 중순까지 2연전이 시작하면서 삼성-KIA-NC-SK-키움을 상대로 죄다 1승 1패씩을 기록하며 평범한 한달을 보냈다. 그 사이 대체 용병 페게로가 한국 무대에 조금씩 적응하며 홈런 2개를 쳤다는 게 인상적. 그 후에도 KIA만 스윕한 걸 빼면 그냥 DTD 없이 무난무난하게 흘러갔다.
9월이 되면서 페게로를 중심으로 타선의 집약력이 살아나기 시작, 9월 중순에는 무려 5연승을 거두는 등 4위를 착실하게 지켜나갔고 9월에 두산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천적 관계도 조금씩 청산해나갔다. 하지만 고우석에 대한 혹사가 점차 늘어난건 흠. 이후 9월 16일 kt에게 승리를 거두며 3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얼마 안가 4위도 확정되었다. 이후 9월 30일 롯데와의 최종전을 2:0으로 이기고 이 시즌 유일하게 홈 100만 관중을 달성, 거기에 구단 역사상 두번째 최다승인 79승을 거두며 정규시즌을 마무리지었다.
3년 만에 진출한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상대는 NC가 되었다. 전반적인 승부예측에서는 팽팽한 상대전적 덕분인지 시리즈도 팽팽할 것 같다는 예상이었으나 타선의 힘 차이 때문인지 다소 NC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졌지만, 켈리의 호투와 더불어 타선도 나름 적시에 터져주면서 3:1로 승리하여 1차전만에 와일드카드를 끝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키움. 이때까지 LG에게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전적이나 순위와는 별개로 치열한 시리즈로 예상되었지만, 1차전 고우석의 9회말 초구 끝내기 피홈런으로 허무하게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2차전에서도 경기 내내 리드를 이어갔던 LG였음에도 고우석의 블론으로 연장전에서 끝내기로 패배했으며, 3차전은 고우석이 천신만고 끝에 세이브를 올리며 승리했지만, 4차전에는 키움의 타선이 폭발하면서 결국 1승 3패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LG는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를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비록 준플레이오프를 통과하지 못한 LG였지만, 지난 시즌 그 급격한 DTD를 겪었던 팀이 다시 나름 내실을 잡아 가을야구까지 올라온 것을 보면 팀적으로도 상당히 의미있는 시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스토브리그에서 딱히 전력 유출 및 유입은 없었고, 한화에서 황혼기에 접어든 정근우를 영입한 것과 박용택의 은퇴시즌이라 우승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빼면 큰 이슈는 없었다. 외국인 투수도 둘 모두 재계약함과 동시에 페게로와의 재계약은 포기하고 새 외국인 타자 로베르토 라모스를 영입했다. 그러나 2020년 2월 경부터 코로나19가 창궐하여 시즌 개막도 계속해서 미뤄졌고, 5월에야 시즌이 시작되었다.
정규시즌이 개막하고, 2020년의 LG는 시작부터 순조롭게 흘러갔다. 두산과의 개막 시리즈에서 루징을 당했지만, NC에게 1승 1패, SK전 스윕, 키움-삼성-kt전 위닝, 한화전 스윕, KIA전 위닝으로 상당히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지었다. 특히 새 외국인 타자 라모스가 거포의 모습을 여실없이 보여주며 타선의 파괴력이 확실히 강해진 게 눈에 띄었던 5월이었다.
하지만 6월은 다소 삐걱거렸다. 삼성과 키움에게 연달아 루징을 당하고 SK와 롯데에게 위닝을 거두고 한화를 상대로 또 스윕을 거두며 살아나나 싶었으나, 곧바로 두산과 키움에게 모조리 스윕당하며 7연패까지 몰렸다가, SK전에서 위닝을 장식하며 힘겨운 6월을 보냈다.
7월에도 영 나아지지 않으며 DTD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 kt와 삼성, 두산에게 모두 루징을 당하고 NC에게도 1무 1패를 기록하고 롯데에게도 루징을 당하며 추락만 하다가, 또 한화에게 스윕을 거두면서(…) 살아나고 두산에게 위닝시리즈를 거두었으며, SK를 스윕하며 7월의 마무리는 괜찮게 했다.
8월에는 반등을 시작했다. KIA에게 위닝, 키움에게 루징, KIA에게 다시 위닝을 거두었고, 정규시즌 1위 NC를 스윕해버림과 동시에 2연전 체제에 들어서서 KIA에게 스윕을 거두는 등 7연승을 달리며 다시금 경기력을 끌어올렸다. 이후에는 한화와 삼성에게 발목잡히며 주춤주춤했지만, kt와 두산에게 3승 1무를 거두며 8월을 잘 마무리했다.
이후 9월 시작까지 7연승을 거두며 다시 잘 나가나 싶다가, 1승 1패씩을 반복하며 또 주춤거렸으나 10월에 갑자기 상승세를 타면서 상위권 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kt와의 4연전을 2승 2패로 마친 이후 삼성에게 위닝시리즈를 거두었고, 이후 1위 NC와의 홈 4연전을 스윕하며 상위권과의 격차를 단숨에 좁혔고, 이때부터 LG는 2위와 3위를 왔다갔다 하게 된다. 그 후에도 꾸준히 승수를 쌓아나가며 자력으로 정규시즌 2위를 확정할 수 있었으나, 143경기째인 한화전에서 오지환의 실책이 빌미가 되어 0:5를 6:5로 역전패, 이때까지만 해도 자력으로 2위가 될 수 있었지만, 다음 경기 SK에게 3:2로 패배하며 2위에서 4위로 굴러떨어지며 와일드카드로 가게 되었다.
시즌 막판을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 보낸 LG의 와일드카드 상대는 키움. 초반부터 채은성의 홈런으로 앞서갔지만 이내 역전당하고 후에는 동점이 유지가 되어 연장행, 13회 키움에게 다시 역전당했지만 13회말 이천웅의 천금같은 내야안타와 신민재의 끝내기 안타로 어렵사리 2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서울 라이벌 두산. 이때까지 LG는 두산 공포증을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했고, 1차전 선발투수를 이민호로 낙점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는 6:0 참패에, 2차전에는 경기 초반부터 8실점으로 탈탈 털리다가 타선의 맹추격이 이어졌음에도 끝끝내 역전하지 못하며 9:7로 패배해 LG의 준플레이오프는 허망하게 끝이 났다.
이번 시즌은 시즌 중반부터 뎁스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거의 후반기 내내 2~3위권에 있었으나 막판 두 경기 때문에 4위로 추락하고 포스트시즌에서 두산에게 패하였으며 우승을 하기 위해 영입했던 류중일 감독은 재임 내내 한국시리즈는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하면서 재계약 의논 전에 사퇴하고 후임 감독으로 수석코치 류지현이 내부승진하였다. 거기에 어떤 상황이든 LG를 심지 굳게 지킨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 박용택도 우승반지를 끝내 끼워보지 못한채 19년의 LG 생활을 마무리짓고 은퇴했다.
2.6.4. 류지현 체제(2021 ~ 2022)
비시즌 신임감독 류지현이 선임되고, 타팀들은 죄다 전력누수가 큰 가운데 LG는 홍창기, 이민호 등 뎁스 강화에 따른 유망주 발굴 성공과 더불어 라모스의 성공, 오지환의 3할, 이형종과 김현수의 몬스터 시즌 등 지난 시즌 LG를 이끌었던 장본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타일러 윌슨이 은퇴하여 외국인 투수 한명만 교체한 걸 빼면 전력 약화도 거의 없다. 많은 전문가들 또한 뎁스가 두텁고 주전 라인업도 강력한 LG를 우승후보로 예측할 정도.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자 류지현은 전임 류중일과 다를 바 없는 쓸놈쓸 성향과 더불어 타선이 대침체하면서 상위권에 위치해있음에도 어렵게 시즌을 시작했다. 개막전 NC에게 승리하고 이어서 kt-SSG-키움에게 연달아 위닝시리즈를 거뒀음에도 타선의 침체로 인해 두산과 KIA에겐 루징을 거두었으며, 그나마 한화와 롯데에겐 다시 위닝을 거두며 4월을 마무리했다.
5월에는 시작하자마자 삼성에게 스윕을 당했지만, 어린이날 시리즈에서 두산을 스윕하며 분위기를 업시켰다. KIA에게 루징시리즈를 당했지만, 상위권 팀인 삼성과 NC를 연달아 위닝으로 잡아내며 1위까지 올라섰지만, SSG에게 처참히 스윕당하며[165]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나마 롯데와 키움에게는 위닝시리즈를 거두며 5월 마무리.
6월에는 로베르토 라모스가 허리부상으로 인해 교체 수순늘 밟았지만, kt에게 1승 1패를 기록한 후 KIA-NC-키움-두산-KIA로 이어지는 매치를 전부 위닝시리즈로 장식[166]하면서 팀 분위기가 한껏 올랐다. SSG에게 또다시 루징시리즈를 당하긴 했지만, 삼성전을 위닝시리즈로 잡아내며 전반적으로 좋은 흐름 속에서 6월을 마쳤다.
7월에는 kt에게 연패를 당하고 한화에게 위닝시리즈를 달성하고 두산전을 맞이할 참이었으나, KBO에 코로나 19가 드리우면서 도쿄 올림픽 브레이크까지의 모든 경기가 스톱되면서 상위권을 달리던 LG의 분위기가 다소 꺾이기 시작했다.
8월엔 대체 외국인 타자 저스틴 보어를 영입했지만, 조금씩 부침이 보이기 시작했다. SSG 3연전은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지만, 롯데에게 루징 시리즈를 거두고 kt에게 1승 1무 1패를 거두었다. 다행히 삼성전 위닝시리즈, 키움 2연전 스윕으로 분위기를 다시 바꾸어냈다.
9월, 본격적인 순위 싸움에 돌입하는 가운데 8월부터 이어진 6연승 이후 4연패를 당하면서 순위싸움에 먹구름이 끼게 된다. 다른 팀들을 상대로 1승 1패씩을 주고 받다가, 삼성-kt-롯데-두산에게 4연승을 거두며 9월을 마무리지었다.
10월에 돌입하면서 LG의 타선이 급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리그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연장전마저 없애버린 지라 무승부가 속출하면서 순위싸움에서 불리해졌다. 삼성과 kt의 1위 싸움이 격화되고 그 사이에서 LG도 선두 싸움에 참전했지만, 10월 한 달간 9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타선의 한계를 심각하게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시즌 최종전까지 선두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여전한 변비 타선 끝에 롯데에게 패배하며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 직행에 만족해야 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와일드카드를 2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온 두산. 지난해와 다르게 대부분의 예측은 LG의 우세를 점쳤지만, 최근 두산이 LG 상대로 끊임없는 강세를 보이면서 이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가버렸다.
1차전 LG는 타선의 부진 속에 최원준에게 꽁꽁 막혔고, 수아레즈도 그다지 좋지 못한 피칭을 보이며 5:1로 패배했다. 2차전은 켈리를 앞세워 경기 중반 두산의 불펜진을 두들기며 9:3으로 승리했지만, 3차전은 반대로 경기 중반 두산이 LG의 불펜을 두들기며 10:3으로 승리해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지난해와는 달리 다른 상위권 팀들의 전력 약화로 충분히 우승후보로 평가받았던 LG였지만, 류지현 감독의 수많은 문제점과 터지지 않는 타선과 외국인 타자 인선 문제, 여전한 두산전 약세 등으로 전력보다 밑도는 성적을 보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홍창기의 골든글러브 수상 정도.
2022년에는 개막 5연승으로 출발했으나 SSG에 루징, kt에 스윕패, 롯데에 스윕패, 두산에 루징으로 초반부터 DTD를 하나 했다. 그러나 5월에 6연승을 달리며 분위기를 반전기켰고 KIA와 kt에게도 연속 패승승으로 2위로 복귀했다. 이후 키움에 스윕패를 당하는 등 4연패를 하며 다시 4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6월부터는 꾸준히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연패가 별로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LG의 상징인 물타선도 1년만에 강타선이 돼버리며 7월 초에 다시 6연승을 달렸다. 천적 두산을 상대로 5년만에 스윕승은 덤. 이렇게 6할이 넘는 승률로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167]
후반기 시작하자 마자 NC, SSG에 연속 루징을 당하고 3연패까지 하며 6할이 붕괴되기도 했으나 8월 초 롯데와 키움에 위닝시리즈를 거두며 2위로 올라섰다. 이후 꾸준히 승리를 추가하며 2위 굳히기에 들어갔고 9월 초에는 7연승까지 달렸다. 하지만 이후 타선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1위 추격에 빨간불이 켜졌고 2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피타고리안 승률 1위, 실제 승률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LG는 정규시즌 3위 키움을 상대로 1차전을 이겼지만 추격쥐와 함께 2차전을 패했고 3~4차전도 내리 패하며 이번 시즌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전력이 가장 좋은데도 3위를 했다. 전통적인 천적 두산을 상대로 10년만에 10승을 거뒀고 8년만에 두산보다 윗순위 인것이 그나마 위안거리.
결국 우승을 노리며 감독 계약을 맺었지만 우승에 실패한 채 류지현은 29년동안의 LG 생활을 마무리했다.
2.6.5. 염경엽 체제(2023 ~)
개막전부터 패하며 안좋게 출발했지만 이후 키움에 위닝, 삼성에 스윕을 거두며 상위권으로 올라왔다. 4월에는 한때 1위까지 올라가 보기도 했으나 막판에 KIA에 스윕당하며 3위로 추락했다. 그러나 5월 한달간 16승 6패라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단독 1위로 5월을 마치게 되었다. 특히 중요했던 SSG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거둔 것이 한몫 했다.
6월 초에는 3연패 2번으로 위기가 찾아왔지만 5연승으로 손쉽게 위기 극복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5월의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1위로 복귀했다. 역전승 횟수도 많아지며 집중력도 좋아졌다. 또한 SSG전도 2승 0패를 거뒀다. 7월에는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5연패를 하며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11연승을 거뒀던 두산을 약 1년만에 스윕하며 살아날 기미를 보여줬다.
8월 초에도 키움을 상대로 스윕승, 7연승을 달리는데 성공했다. 이후 꼴지 삼성에 2연패를 당했지만 키움전 스윕 포함 5연승으로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8월 말에 타선이 침체되고 NC에 스윕패, 9월 초에는 한화에 루징시리즈를 당하며 7.5게임차의 여유가 4.5게임차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뒤이어 KIA 4연전에서도 더블헤더 2패 포함 1승 3패로 6할 승률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올해의 LG는 다르다. 이렇게 길었던 위기 후에도 5연승을 달리며 어느덧 1위 매직넘버를 1까지 줄인 상태이다.
결국 10월 3일, 2위 KT와 3위 NC가 모두 패배하며 매직넘버가 소멸하고 LG가 29년 만의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매직넘버 소멸을 위해서는 LG가 한 번 이기거나 KT와 NC가 한 번씩 패해야 했는데, LG 경기가 없는 날 경쟁팀 둘이 모두 패배하며 자동으로 우승이 확정되었고 이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통해 통산 7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결국......
LG는 1994년 이후 2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2023년 11월 13일 마침내 3번째 통합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168]
이어지는 2024년에도 우승 후보로 불렸으나 시즌 초부터 각종 부상과 감독의 이상한 작전들로 인해 팀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타선과 투수진 모두가 전년도보다 약해졌으며 이때문에 5월 중순까지 5위에서 허덕거렸다.
이후 5월 22일 한화전부터 6월 8일 kt전까지 15경기에서 13승 2패를 거두며 단독 1위까지 점프했다! 지난해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홍창기와 문성주를 앞세운 테이블 세터가 너무나도 막강했다.
그러나...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최원태가 선발 등판날 당일에 부상을 호소하며 삼성에게 스윕패를 당한걸 시작으로 한달동안 팀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6월 9일 kt전부터 7월 12일 한화전까지 성적은 8승 17패. 5월말~6월초에 벌어놨던 승률을 다시 까먹고 4위까지 추락하고 말았다.[169] 다행히 타선이 살아나며 7연승을 달리고 2위로 올라갔으나 8월에 다시 부진하며 3위로 추락했다. 8월에는 중간에 5연승을 달리기도 했으나 KIA와의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한걸 시작으로 타선이 완전히 식물타선이 돼버렸다. 이제 LG 야구는 이기든 지든 재미가 없게 되었다.[170][171][172]
이러한 부진과 노잼야구는 9월에도 이어져서 정규시즌 1위와 2위 트레직넘버가 소멸되고 3위 자리까지 위협받는 처지에 이른다. 그리러나 천만다행으로 9월 20~22일 4위 두산과의 중요한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9월 24일 SSG전도 승리하며 정규시즌 3위를 확정지었다. 6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패넌트레이스였다.
3. 역대 시즌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c30452><tablebgcolor=#c30452> | LG 트윈스 역대 시즌 (MBC 청룡 시절 포함) |
{{{#!wiki style="color: #FFF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ffffff; margin:-6px -2px -12px" |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
3위 | 2위 | 4위 | 5위 | 4위 | |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
5위 | 6위 | 6위 | '''1위 ''' | 6위 |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
7위 | 4위 | '''1위 ''' | 3위 | 7위 |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
2위 | 2위 | 매직 3위 | 매직 1위 | 6위 |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
2위 | 6위 | 6위 | 6위 | 8위 |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
5위 | 8위 | 7위 | 6위 | 6위 |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
7위 | 3위 | 4위 | 9위 | 4위 |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
6위 | 8위 | 4위 | 4위 | 4위 | |
2022 | 2023 | 2024 | 2025 | 2026 | |
3위 | '''1위 ''' | 3위 | |||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3.1. MBC 청룡 (1980년대)
3.2. 1990년대
- LG 트윈스/1990년 ★
- LG 트윈스/1991년
- LG 트윈스/1992년
- LG 트윈스/1993년
- LG 트윈스/1994년 ★
- LG 트윈스/1995년
- LG 트윈스/1996년
- LG 트윈스/1997년 ★
- LG 트윈스/1998년 ★
- LG 트윈스/1999년
3.3. 2000년대
3.4. 2010년대
3.5. 2020년대
- LG 트윈스/2020년
- LG 트윈스/2021년
- LG 트윈스/2022년
- LG 트윈스/2023년 ★
- LG 트윈스/2024년
- LG 트윈스/2025년
- LG 트윈스/2026년
- LG 트윈스/2027년
- LG 트윈스/2028년
- LG 트윈스/2029년
3.6. 2030년대
[1]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이 시기의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청룡의 우승'이라고 봐도 된다.[2] 그럴만한 이유는 1986년과 1987년 후기리그에서는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선두다툼을 시즌 막판까지 끌고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각 OB 김형석의 최동원 상대 마지막 운명의 한 방과 김건우의 교통사고 부상이 겹쳐서 포스트시즌이 아쉽게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전기/후기 중 한 번은 2위 안에 들어야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했고 현재와 같이 3위나 4위로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없었다. 포스트시즌만 못 가서 그렇지 5할 승률 이상 시즌도 8시즌 중 4번으로 적어도 중간은 했던 팀이었다.[3] 마찬가지로 롯데 자이언츠도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이 없는데 이걸 암흑기라고 여기는 팬들은 많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4] 언론에서 하도 한국의 양키스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최근의 LG팬들은 이 별명을 싫어한다.[5] 당시 사장 어윤태의 "이건 김성근의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오."라는 멘트는 당시 프런트와 김성근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6] 이 시기 금지어의 행태는 KTF 매직엔스(現 kt 롤스터) 시절의 김철 감독과 더불어 삽질의 대명사로 남는다.[7] 하지만 암흑기 시절에도 LG는 7위가 아닌 6위를 가장 많이 기록했다.[8] 다만 이때의 평가는 의외로 좋았던 편. 전년도보다 더 약해진 전력임에도 성적이 좋아졌기에 팬들은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지만, 더 질러야 할 상황에서 프런트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는... 딴 거 다 필요 없이 큰 돈 주고 산 박명환이 2008년에 그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시기 김재박 감독은 불펜 자원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프런트에 FA 선수 조웅천 영입을 요청했으나, 프런트에서는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LG의 불펜은 멸망했다.[9] 하지만 LG그룹은 이걸 광고로 사용했다.[10] 그러나 KBO 리그에서 자생으로 운영되는 구단은 전무하며 그 중에서도 롯데는 2019년 선수단 연봉 전체 1위를 기록했다.[11] 대표적인 예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현 구단주 피터 앙헬로스. 홈런과 거포에 환장해 팀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12] 백순길 단장은 단장을 맡기 이전에는 LG그룹 고객서비스 부문. CS(고객 만족) 경영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경력 때문인지 팀 케미스트리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을 차단하는 데 능하다는 평을 받는다.[13] GS스포츠의 운영은 성적보다 관중동원 같은 마케팅에만 치중해서 해당 팀 팬들에게 평가가 매우 안좋다.[14] 업셋 당해서 3위[15] 4위[16] 팀 평균자책점 1위를 하고도 가을야구를 못 했다는 점을 기준으로 두면 사실 최초는 84년의 OB다. 출범 원년부터 84년까지는 전/후기 1위 팀들로 한국시리즈만을 치르고 끝이었으며, 이 시즌의 OB는 전후기 통합승률 1위에 시즌 팀 평균자책점이 2.53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1위 기록이지만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쳐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17] 그러나 양상문은 전반기를 마치자마자 쏟아지는 비난 여론 끝에 사퇴했고, 롯데는 2019년 연봉 1위를 기록하고도 48승 3무 9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18] 한화에게는 0:6으로 이기고있던 경기를 역전당했다.[19] 야인 생활을 하던 백인천이 다시 감독으로 선임되며 야구계로 돌아온 게 1989년 11월 7일인데 이 때는 구단명이 여전히 MBC 청룡이었다. 즉 백인천은 MBC의 첫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인 셈.[20] 안타까운 점은 4경기에서 3경기가 역전패였으며 나머지 1경기도 4:4로 맞서던 8회말 2실점하며 무너져 지독한 대전 징크스를 이어갔다. 대전구장 19연패의 악몽은 8월 17일 이용철의 호투로 5:2로 승리하며 마침내 벗어났다.[21] 빙그레는 MBC 청룡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연속 LG를 상대로 절대우세 내지 압도했다. LG는 1988년부터 빙그레에 6승12패, 3승1무16패, 7승13패, 3승1무14패, 3승15패로 도합 22승2무70패, 승률은 .239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약했다. 이때 대폭 깎였던 승패마진과 2000년대 후반 류현진으로 인해 LG는 2020년이 끝난 현재까지도 통산 한화전에서 4할대 후반으로 열세에 놓여있다. 심지어 약체인 삼청태를 겪었던 삼청태현도 한화전 통산 승률은 5할이 조금 넘는다.[22] 1위 LG에서 4위 삼성까지의 승차가 3경기 안일 정도로 치열한 선두 다툼을 펼쳤다.[23] 다만 MBC 청룡 시절에도 1983년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단일리그 체제에서 정규시즌 첫 우승은 맞다.[24] 그해 포스트시즌은 모든 시리즈가 스윕승이었고 휴식일이 길어 체력적인 영향은 덜 받았다. 다만 상대전적에서 LG의 13승7패 절대우세로 LG의 우세가 조금 더 예상되었다.[25] OB베어스가 원년인 82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지만 그당시에 연고지는 대전이었다.[26]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27] 투수쪽에서는 전년도 선발의 축들이었던 김태원과 문병권이 부진했으며 정삼흠, 김용수, 김기범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심했다. 그리고 시즌 중 정삼흠은 빈볼시비로 10경기 출장 정지를 먹기도 했다. 타선에서는 윤덕규와 노찬엽 정도만 3할을 치며 분투했을 뿐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다. 특히 불과 전년도 신인왕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동수는 1할대로 부진했다.[28] 아니나다를까 윤덕규는 트레이드 되자마자 다음날 LG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쳤다. 물론 박준태도 얼마 후 LG에서 끝내기를 쳤다.[29] 그리고 다음 날 경기에서 송구홍이 9회초 2사에서 조계현의 노히트 노런을 깼다.[30] 92시즌 4승14패, 3승15패로 굉장히 약했던 롯데-빙그레와의 경기에서 10승8패로 우위를 차지하며 상대전적을 뒤집었다.[31] 초반만 되면 잘 치는 박준태가 초반 버닝했고, 김상훈은 전반기 안타&타점 1위였다. 후반기에는 이 둘의 타격감이 확 떨어지면서 LG 타선이 물타선이 되었고 이로 인해 LG 성적도 같이 추락했다.[32] 이 3연전에서 스윕승을 거뒀고, 마지막 경기는 3:1로 지던 경기에서 9회말 6점을 내며 역전승했는데 3:3에서 대타 최훈재가 상대 마무리 김상엽을 상대로 끝내기 만루홈런을 쳤다.[33] 아쉽게도 8월 19일에 14승을 기록한 다음 한달 넘게 승리를 기록하지 못해 결국 다승왕을 이해 LG 상대로만 6승을 기록한 조계현에게 내줬다.[34] OB보다 순위가 낮았던 유일한 날이 시즌 최종전이었다. 시즌 막바지까지 OB는 후반기 내내 안정적으로 4위를 기록하고도 LG와 3경기차 이내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LG가 조금만 더 후반기에 분발했더라면 준플레이오프는 없었고 OB의 가을야구 실패 비밀번호를 7자리로 만들뻔했다.[35] 꼴찌 태평양전에서 타선이 물타선이 되며 상대전적 9승1무8패로 유독 고전했는데 해태는 그 태평양을 17승1패로 때려눕혔다.[36] 김태원이 2승의 주인공이 되었다.[37]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나온 이 뇌주루로 인해 방출대기명단에 올랐지만 1년뒤에 그 한타석에서 보여준 엄청난 한방 덕분에 그때의 뇌주루는 묻혔으며 기억하는 팬들 또한 많지 않다. 그리고 선수생활도 몇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38] 만약 뇌주루가 나오지 않았다면 LG가 최초로 리버스스윕이 가능했었을지도 모른다.[39] 서용빈은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면서 2017년 이정후가 이 기록을 깰 때까지 신인 최다안타와 함께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류지현은 3할 15홈런 51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김재현은 21홈런 80타점 21도루로 홈런 3위, 타점 2위에 오름과 함께 최연소 20-20을 기록했다.[40] 포수 김동수, 1루수 서용빈, 2루수 박종호, 3루수 한대화, 외야수 김재현[41] 선동열이 선발등판한 해태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다.[42] 홈경기와 원정경기 내야의 구성원이 완전히 달라졌다. 홈경기는 3루 송구홍(지타 한대화), 유격 유지현 2루 박종호이지만 원정경기는 3루 한대화 유격 이우수 2루 이종열이였다. 이로 인해 홈경기와 원정 경기 간 편차가 심했다. 롯데 원정에서 1승8패로 크게 부진했다.[43] 그나마 5선발 듀오였던 박철홍과 오희주가 각각 9승과 3승으로 기대 이상의 모습이었고 부상으로 빠져나간 인현배의 자리를 채웠다.[44] 조현은 전반기 9홈런으로 맹활약했으나 후반기 어퍼스윙의 약점이 노출되며 후반기 급락했다. 심재학은 그나마 타율에 비해 볼삼비와 출루율은 좋았는데 당시에는 타율이 낮으면 저평가받는 분위기였다.[45] 스탯티즈 기준으로 팀내 야수 WAR 1위가 방위병 유지현일 정도로 타선이 약화됐다.[46] 상대전적에서 11승1무6패로 압도했다.[47] 이광환 감독의 잘못된 운영이 없었다면 LG는 2연패를 달성했고 왕조로 이어질수 있었을지도 모른다.[48] 2019년에 SK 와이번스가 키움 히어로즈에 7.5게임차, 두산 베어스에 9게임차로 앞서고 있다가 두산 베어스에게 따라잡혀 승차는 없었지만 상대전적에서 열세로 인해 2위로 밀려났고 플레이오프에서 키움 히어로즈에게 스윕패 당하면서 1위 → 3위 추락이 재현되었다.[49] 마무리로 전향했다.[50] 특히 1997년에는 504 대참사가 일어났다![51] 손혁은 시즌 막판 3차례 등판했다.[52] 유지현은 타율 0.249로 부진했다. 그나마 좋은 선구안으로 출루율은 1할이 더 높았다.[53] 반면 해태는 4월까지 꼴찌였으나 방위병이었던 이종범과 이대진이 제대한 뒤 탄력을 받아 3년만에 우승을 기록했다.[54] 한대화의 노쇠화 때문에 한화의 황대연을 트레이드로 영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한대화는 이 해를 끝으로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55] 권용관, 최동수, 신국환, 허문회 등 무명의 선수들이 이때 기용되기 시작됐다.[56] 당시 최하위는 신인드래프트에서 최고 신인 2명을 우선 지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7] 공익판정을 받아 1997년과 1998년은 군복무에 나섰는데 이후 박철홍의 아버지는 뇌물을 주고 공익 판정을 받아냈다는 혐의로 2000년 구속되었다.[58] 은퇴경기인 롯데전에서 5이닝 1실점했음에도 패전 기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59] 전반기를 1위로 마쳤으나 7월 이상훈과 최향남이 빠진 사이 마운드의 붕괴로 7승12패에 그쳤다.[60] 2년 전 3위팀 롯데에 6승12패로 호구잡힌 것처럼 3위팀 쌍방울을 상대로 6승12패로 매우 약했던 점이 한국시리즈 직행에 실패한 원인이 됐다. 전주구장에서 14연패의 악몽에 시달렸다가 안재만의 결승타로 탈출했다.[61] 4월 첫 만남에서 3경기 연속 연장승부에 이종범의 끝내기 실책, 신국환의 끝내기 안타 등 역전경기를 찍더니 6월에는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이 나온 경기에서 양팀의 마무리투수이자 구원 1-2위였던 이상훈과 임창용이 나란히 불쇼를 펼친 끝에 LG가 이긴 경기도 있었다. 9월에는 9회 2사에서 허문회의 출루와 임창용의 쓸데없는 견제 에러 후 이병규의 동점타와 연장 14회말 송구홍의 결승타로 역전한 경기도 있었다.[62] 주니어 펠릭스도 뽑았지만 연봉 협상에서 틀어지며 앤더슨만 계약했다.[63] 이 해 프로야구 성적은 외국인선수의 활약이 크게 좌우했는데 조 스트롱과 스캇 쿨바가 활약한 현대는 전준호의 부활과 신인 김수경의 입단, 박경완, 이명수 등의 영입이 더해져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64] 서스펜디드 경기를 치른 끝에 졌다. 2020년 한화가 두산과의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18연패를 끊으면서 쌍방울과 LG의 서스펜디드 경기가 기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17연패의 쌍방울이 서스펜디드경기 전에 1패를 추가한 상황에서 역사상 마지막으로 치른 경기인건 맞는데 공식 기록상으로는 LG와의 경기를 통해 17연패를 끊고, 마지막 경기가 아니게 됐다. 만약 LG가 이겼다면 쌍방울의 기록은 19연패였다.[65] 팀내 유일한 10승 투수.[66] 당시, 40 가까이가 될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20세이브 이상을 거뒀다.[67] 1차 지명으로 뽑은 신인 선수여서 기대가 더 컸으나 최종 성적은 147⅓ 이닝 9승 15패 방어율 6.17로 망했다.[68] 애초에 타자가 쓰는 어깨 근육과 투수가 쓰는 어깨 근육 부위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게 되니 부상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실제로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권준헌 역시 투수 전향 초반에는 어깨가 싱싱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부상으로 고전하며 얼마 가지 못했다.[69] 펠릭스와의 재계약, 김상호 영입으로 심재학 자리를 빼앗고 투수 전향하지 않으면 트레이드할 것이라고 협박했다.[70] 둘 다 20홈런 이상 치지 못하였다. 당장 타팀은 우즈, 샌더스, 로마이어, 호세, 데이비스, 스미스 등이 홀로 30개씩 쳤지만...[71] 아이러니하게도 전임 감독 천보성과 후임 감독 이광은은 2012년 입시비리 당시 혐의가 드러나면서 나란히 연루되고 만다.[72] 당시 양준혁을 상대로 해태에 트레이드된 손혁은 이에 반발하면서 트레이드를 거부,(당시 김응용 감독이 있던 해태의 쌍팔년도식 덕아웃 문화와 열악한 인프라 등으로 인해 해태로 트레이드되는 걸 거부했다는 말이 있다.) LG와 해태 양쪽 구단에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결국 해태에서 임의탈퇴 공시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야구를 쉬다가 2001년 김성한 해태 감독의 요청으로 인해 임의탈퇴가 해제되며 해태로 복귀했으나 이미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뒤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 어찌보면 트레이드 하나가 선수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셈.[73] 이광은의 이러한 정책 때문에 피를 본 것은 안상준 등 한창 자리잡고 있던 유망주들이었다.[74] 이후 심재학은 현대로 떠나 두번째 우승에 일조했고 2001년 두산으로 건너가 3할 4푼대 타율과 골든글러브를 찍는 등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2년 연속으로 우승을 맛보게 된다. 반면 심재학의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최원호는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마해영에게 역사적인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라는 임팩트가 큰 데 이어, 이후 LG에서도 2005년을 제외하면 별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거기에 현대 또한 심재학을 1년간 잘 기용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고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두산에서 심정수를 받아오는 등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현대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다.[75]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용수는 기량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시즌 후 은퇴하고 만다.[76] 김용수, 장문석, 경헌호, 김민기, 큰 승호, 최향남 등[77] 이 중 최향남과 장문석, 경헌호는 시즌 전 겨울 스프링캠프에서 선발투수로 낙점했던 투수였다. 김용수가 개막 주 흔들리자 선발투수로 분류했던 투수들을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닥치는대로 마무리로 세웠다. 선수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78] 두산과의 최종 더블헤더 포함 3연전에서 이미 드림리그 2위가 확정된 두산은 롯데 대신 LG와 만나기 위해 LG의 매직리그 1위 확정을 위해 13안타 무득점, 허술한 수비 등 일부러 지려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79] 압도적인 우승을 거둔 현대에 9승10패, 승률 2위 두산에 10승9패였지만 드림리그 꼴찌 해태에 8승1무10패로 열세, 신생팀 SK에 고전하며 11승8패로 겨우 앞서 약팀을 상대로도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특히 SK 상대로는 LG 킬러 오상민에게 크게 고전했다.[80] 해리거는 8월 이후 페이스를 되찾았지만 장문석은 마무리투수로 나섰다. 9승11세이브로 팀내 다승 2위, 세이브 1위를 기록했다.[81] 이해 두산은 승률에서 LG에 앞서있었지만 박명환의 부상, 파머의 부진 등으로 마땅한 1선발감이 부족하여 은퇴를 앞둔 조계현과 이광우가 1선발을 맡을 정도로 선발진에 고민이 심했던 팀이었다. 오죽하면 플레이오프에서 끝내기 폭투 등으로 부진했던 진필중이 한국시리즈에서 선발등판할 정도.[82] 여기에는 두 가지 정설이 있는데 첫번째는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잘 던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내려버렸다는 것과 두번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장문석의 사기를 복돋아 주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있다. 이후 김용수가 2000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게 됨에 따라 이 경기는 김용수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83] 특히 심정수는 3차전까지 무안타로 부진 했는데 심정수가 때린 홈런은 모두 승부를 짓는 홈런들이였다. 시리즈 3안타를 모두 결승 홈런으로 장식했다.[84] 이때까지만 해도 LG는 그가 해태에서 했던 만큼은 아니여도 그래도 평타 이상을 해줄거라 믿었던 데다 나이도 29세로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18억이라는 거금을 써가며 영입을 했다. 실제로 홍현우에 의하면 당시 인천 연고 신생팀이었던 SK가 LG보다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서울 연고 팀에서 뛰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데다 많은 팬이 응원해 주는 곳에서 야구를 즐기고 싶어서 LG를 선택했다고 한다. 또한 해태 시절에도 부진하다가 잠실에서 경기를 뛰다 보면 스트레스가 잘 풀리기에 좋았던 기억이 있어 더욱더 잠실을 홈으로 쓰는 LG를 선택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85] 다만 홍현우의 몰락은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다. 실제로 30-30을 찍으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던 1999년만 해도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몸을 불렸고 그 부작용으로 인해 FA 직전시즌인 2000년에는 무릎 부상 등이 겹치며 전년도에 비해 성적이 떨어지는 등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과거 보여준 모습이 있는데다 아직 젊은 나이였다 보니 충분히 영입할 가치가 있었고 LG가 과감히 베팅을 한 것.[86] 다만 유지현의 경우 원래부터 선수협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반 선수협 결성 당시에는 김기태(당시 삼성 주장, 역시 선수협 5적으로 지목되었다), 송진우, 박정태, 양준혁, 최태원과 함께 선수협 결성에 찬성한 편. 하지만 양준혁, 강병규 등 급진강경파가 아예 노조까지 주장하자, 김기태와 함께 노조 설립에 반대하며 친목 단체 성격으로 창립하여 구단 인정부터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온건 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극렬하게 충돌, 온건파였던 유지현, 김기태는 결국 기존부터 선수협을 반대하던 이호성, 김경기, 김태형 등과 함께 선수협 반대 노선의 중심 축이 된다. 다만 나중에 선수협이 어느 정도 안착하자 본인이 주도하여 팀원을 선수협에 전원 가입시켰던 것만 봐도 구단과의 싸움을 걱정했던 것일 뿐, 선수협을 마음 깊이 반대하는 쪽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87] 당시 선수협 5적으로 지목받은 선수 중 유지현이 가장 온건파였고, 실제로 당시 LG 주장이었던 유지현은 일단은 선수단을 데리고 선수협 창립총회에 갔으나 기회를 봐서 중간에 선수단을 데리고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후배였던 이병규의 후일담에 따르면, 당시 LG 선수들은 선수협을 반대하는 유지현과 선수협 핵심 멤버였던 김재현과 양준혁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며 심정적으로는 선수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LG 선수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지현은 결국 선수들을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는데, 선수협에 적극적이었던 김재현을 제외한 나머지 LG 선수들을 전부 데리고 나와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입단 동기였던 유지현과 김재현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며, 이 둘의 관계는 거의 2019년 1994년 우승 멤버들 모임쯤에 와서야 회복되었다.[88] 당시 로마이어는 김성근 감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김성근 감독 대행은 끝내 퇴출 지시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89] 이광은 감독 입장에서는 김용수가 껄끄러울 만도 했던 것이, 둘의 나이 차이가 고작 5살이었다.[90] 다만 김용수는 이 시기의 김성근과는 관련이 없었으나, 김성근 경질 이후 구단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김성근의 아이들이라 불리던 선수들에게 가혹하게 대해 은퇴를 종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91] 2001 시즌 당시 김성근 감독 대행의 실제 승률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02년보다 더 높았다.[92] 다만 양준혁의 우익수 임명은 5월 12일부터 시작되긴 하였다.[93] 당시 서용빈의 기용은 수비를 중시하는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보였다. 김성근 감독은 커리어 내내 보통 공격보다도 수비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여줬으며, 서용빈의 1루 수비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돌글러브로 유명했던 김재현은 우익수로 더는 기용되지 않고 좌익수 붙박이로 고정되었으며, 역시 수비력이 떨어지던 로마이어도 지명타자로 고정시키다가 결국 코치진과의 마찰 끝에 퇴출시켰다.[94] 선발/불펜을 오갔던 것이나 마구잡이로 기용한 것은 기본이었고, 페넌트레이스 내내 마무리를 5번이나 바꾸었다.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 김용수를 위시로 한 투수단 항명 사태까지 일어났다.[95]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96] 이 때 같은 LG그룹 산하의 축구팀의 최용수와 맞짱을 뜨려 했는데, 최용수가 신윤호를 보고 쫄아서 도망쳤다는 카더라가 있다.(참고로 최용수도 축구계에서 한 주먹 하는 걸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당사자인 신윤호 본인은 최용수랑 싸웠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이를 부정했으나 자동차 부순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술에 취해서 숙소에 들어오다가 앞을 막으니 누구 차인지도 모르고 손상시켰다고...[97] 정확히는 술에 취해서 축구팀과 야구팀이 같이 쓰는 구리 숙소에 왔을때, 주차된 차들을 지나가다가 앞이 막히니까 백미러를 손으로 밀어 부러뜨리고 지나갔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술에 취해서 돌아가다가 차가 막길래 손으로 밀고 간 건데 그게 누구 차인지 어떻게 아냐고?[98] 선발 등판은 겨우 4경기에 불과했다.[99] 신윤호의 통산 승수는 28승이다.(…)[100] 하지만 신윤호의 투수 골든 글러브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2012년까지 리그베다 위키에서 투수 골든 글러브 수상이 누락되어 있었던 선수는 신윤호가 유일하다.[101] 당시 중하위권 경쟁은 역대급으로 치열했는데, 4위 한화부터 8위 롯데까지의 승차가 고작 2경기 차이였다. 삼성이 압도적 1위, 현대가 7경기차 2위를 기록한 상황에서 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거의 고만고만한 성적을 거둔 것. 특이한 점은 당시 LG는 8무를 기록, 전 팀을 통틀어 승은 가장 적은데도 6위를 기록했다.[102] 다만 이것은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과 본인이 LG와 우선협상을 하던 중 LG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불러버려 협상을 진작에 파토내버린 것도 있다. 김성근에 따르면 구단이 양준혁을 꼭 잡아야 한다면서 내치지 말라고 그렇게 반대를 하였다.[103] 2000년까지 삼성 2군 감독을 했었고 2001년 초까지 LG 2군 감독을 했던 김성근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김우석을 높게 평가하면서 강력하게 뽑아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김우석이 수비는 높게 평가받았으나 타격은 2군 무대에서도 좋지 못한 편이라서 2차 1라운드에서 뽑힐 정도는 아닐 수준이었다는 것.[104] 유지현은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연봉조정신청에서 선수가 구단을 이긴 케이스이지만, 이로 인해서인지 구단에 찍혀 반 강제성 은퇴를 하고야 만다. 김재현은 이 후 고관절 부상과 각서 사건으로 인해 아시다시피... 이병규는 훗날 FA가 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일본프로야구 러브콜에 LG와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해버린다.[105] 다만 5월이면 아직 시즌 초반기이고, 당시 시즌은 4위 두산부터 7위 LG까지 2경기차이로 박빙인 상황이었다.[106] 유달리 이 시기 LG의 4강을 턱걸이라고 부르는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8월에 이미 4위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2경기 차이의 4위였던 만큼 그렇게까지 턱걸이는 아니었다. 다만 막판까지 치열하게 중위권 다툼이 계속되었던 것은 사실이다.[107] 이마저도 만자니오와 최원호는 평균자책점이 4점대였다.[108] 당시 서용빈은 2001년 소송에서 패한 후 단 하나 남은 희망이었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참가를 위해 야구에 매진하였다. 팀의 주장을 맡게 된 2002년 초반에는 3할을 넘나드는 타격을 보여주며 2002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승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승엽, 장성호에 밀려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 후에 모든 것을 놔 버렸는지 힘빠진 타격을 보여주다가 최소한 시즌만이라도 끝내고 입대하게 해달라는 LG 구단의 요청도 병무청으로부터 거절당하며 리그 중반 공익 근무 요원으로 입대하기에 이른다.[109] 당시 김재현의 부상은 경기나 훈련 중의 부상이 아니라 희귀병인 대퇴골두무혈괴사증에 따른 부상이었다. 이는 김재현의 선수 생명마저 위협한 최악의 질병이었다.[110] 이때의 인터뷰로 김성근의 별명으로 야구의 신이란 뜻의 "야신"이란 별명이 생겼다. 그러나 김응용이 직접적으로 야신이라고 말한 적은 없으며, 오히려 "저는 야신이라고 안하고 그냥 신이라고 했었는데...신도 여러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껄껄 웃으며 김성근 감독을 물먹이는 듯한 인터뷰를 농담삼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인터뷰는 준우승한 상대팀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을 추켜올리며, 동시에 그 사람을 이긴 자신도 올리는 말에 가까웠다. 오랜 기간 김응용 감독과 싸워온 만큼 그 스타일을 알고 있던 김성근 감독 또한 그 진의를 꿰뚫어 보았으며, 이후 인터뷰에서 자기가 신이면 자기를 이긴 김응룡 본인은 뭐냐고 말하기도 했다.[111] 그때의 3루 코치는 김용국이었다.[112] 이 때, 한국 나이 32살로 매우 늦게 입대했다.[113] 98년 2년차 징크스를 제외한 역대 시즌에서 가장 불운한 커리어 로우였다.[114] 화룡점정을 찍었던 경기는 6월 8일 두산전에서 5연패를 끊기 위해 8회부터 세이브 상황에 오른 이상훈이 9회에 3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7실점으로 무너진 경기였다.[115] 개막 이후 36.1이닝 무자책점을 기록했다.[116] 둘 다 김성근 감독의 눈에 걸려 죽어라 던졌다. 중간 계투에도 불구 하고 100이닝을 돌렸으니... 다만 장문석은 선발 재전환 이후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117] 다만 후반기에는 체력 저하 등으로 부진했다.[118] wRC+ 기준[119] 후반기에 엄청난 성적을 기록한 기아는 현대에 2승이 모자라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다.[120] 전반기에 현대와 KIA를 상대로 우세했던 전적을 까먹으며 결국 열세로 마감했다. 삼성에게는 5승14패로 자판기가 되었고, 최악의 부진을 겪은 두산을 상대로는 7승12패로 열세를 당했다.[121] 이해 SK전에서 12승7패로 우세했다.[122] 한화를 상대로 대전과 청주 원정에서 1승9패라는 극악의 전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잠실에서 6승1무2패를 거둬서 7승1무11패로 마감했다. LG의 2003시즌에 결정타를 남긴 9월 4연전에서 송진우가 구원으로만 3승째를 거두며 통산 170승째를 올렸다.[123] 이 당시 잠실 라이벌 팀 두산 베어스도 선동열을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 9년 간 두산 감독을 맡아서 두 번의 우승을 이뤄낸 적 있던 김인식 감독을 사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스승 김응용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가게 되며 결론은 두 구단 모두 애꿎은 감독을 내쳐버린 셈이 되었다.[124] 이로 인해 쿠퍼의 퇴출은 기정사실화 되었는데 전반기 막판에 갑자기 각성하여 3연승으로 반짝 호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왔을 때의 피칭은 뛰어나지 않았다.[125] 진필중의 부진으로 시즌 중 마무리투수로 승격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126] 사실 김상현과 최동수, 박경수 등이 맹타를 휘둘렀던 시즌 초반에는 김재현과 이병규가 타율 2할대 초반으로 부진하면서 엇박자를 냈다. 정작 김재현과 이병규가 살아나자 박용택과 마틴 제외 나머지 타자들이 집단으로 부진했다.[127] 이로 인해 팀 합류 후 한 달을 개점휴업했던 쿠퍼를 퇴출하고 외국인 우타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쿠퍼가 갑자기 잘 던지면서 퇴출설을 무마시키며 없던 일이 됐다.[128] 순페이에게 볼배합 문제를 지적받으며 후반기 김정민에게 주전포수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다.[129] 전반기 주전 3루수였던 김상현은 타격 부진에 빠지면서 이종열에게 후반기 3루 주전 자리를 빼앗겼다.[130] 안재만은 LG에 입단했던 내야수였으나 2001년 5월 SK 투수 유현승과 포수 장재중을 상대로 트레이드됐었다.[131] 오히려 SK는 안재만을 LG에 내주자 롯데에서 FA 미아가 되어 나온 전천후 내야수 김태균을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으로 영입하여 3루수 공백을 메웠고, 이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최정이 3루수 자리를 차지하였다.[132] 당시 LG가 지명할 거라고 예상했던 투수들인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은 알다시피 몇 년 후 SK의 주축 투수가 되었고, 반면 안재만은 LG에서도 부상 등으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은퇴하고 말았다.[133] 시즌 초반에는 두산에 어린이날 스윕패 포함 시즌 6전 전패 지난해부터 8연패를 기록하며 5월 홈경기에서 두산전 승리시까지 무료 입장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이해 두산전은 스윕승이 있었음에도 스윕패를 두 번 당하면서 5승13패로 마쳤다.[134] 2004년까지 LG의 통산승률은 두산보다 앞서있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LG와는 반대로 두산은 통산 5할대에 진입했다.[135] 최종전 전까지 7위였으나 이 승리로 최종전에서 패배한 현대를 승차없이 승률에서 제치며 6위로 마쳤다.[136]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장문석은 KIA로 이적한 후 팬들로부터 팀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니… 특히 김진우의 방황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까였다.[137] 이러한 문제점은 2006년 신고선수로 두산에 입단한 김현수가 LG팬 집안에 LG에서 더 좋은 조건을 받고도 두산에 입단하는 원인이 됐다.[138] 100이 리그 평균. 체감이 안 가는가? 역대 최악인 6.35의 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2014년 한화가 ERA+ 85.1을 기록했는데 06LG는 그보다도 더 낮은 ERA+을 기록했다.[139] 김시진, 이명수, 염경엽이 현대에 남았고, 염경엽은 현대 해체 후 LG로 오게 된다.[140] 8월까지 4연패는 7번 기록하면서도 5연패만은 안 당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9월 7일 SK전에서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대수비 김우석이 히 드랍 더 볼을 저질러 연장전 끝에 역전패해 첫 5연패로 이어진 것이 치명타였다.[141] 전반기 1점대 ERA와 21세이브로 세이브 1위에 올랐으나 후반기에만 8개의 블론세이브 등 역대 최다인 13개의 블론세이브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142] 둘 다 5점대 ERA에 그쳤고 하리칼라는 두산전 완봉승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를 끝으로 웨이버공시되며 크리스 옥스프링이 대체 용병으로 왔다.[143] 2008년 6월 성적이 4승18패, 승률 0.182로 승률 2할도 안 된다. 그마저도 6월 첫 두 경기는 이겼기 때문에 22경기 20패라 그야말로 오늘도 졌다 모드였다.[144] 이재영과 김용의가 LG로 오게 됐다.[145] 대표적인 경기가 5월 12일 잠실 SK전 연장 12회 16:10 패배, 5월 21일 광주 KIA전 13:13 무승부, 6월 2일과 3일 잠실에서 한화를 상대로 당한 이틀 연속 11:10 패배가 있다.[146] 스윕을 확정한 경기에서 박용택이 '끝판왕' 오승환을 상대로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만루에서의 피홈런의 굴욕을 안겨주었다.[147] LG는 히어로즈와의 목동에서 치른 히어로즈와의 세 경기에서 모두 1점차로 패하며 스윕패를 당했고 특히 8월 1일 경기에서는 6:3으로 앞서던 경기를 8회말에만 4실점하며 무너져버리며 LG는 더 이상의 동력을 상실해버렸다.[148] 이해 불펜투수 WAR 1위이자 LG 팀내 투수 WAR 2위는 긴 이닝 소화보다는 한두 타자 상대하는데 익숙한 좌완 원포인트 류택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봉중근의 WAR이 5.32인데 류택현의 WAR은 1.65다. 2009 시즌 WAR 1을 넘긴 투수도 봉중근과 류택현, 오상민, 심수창, 이재영으로 단 5명 뿐인데 오상민의 역할 역시 원포인트에 가까웠다. 게다가 오상민은 시즌 도중 사채업자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법정구속되는 일로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149] SK가 시즌 막바지에 리그 최다 연승인 19연승을 기록했는데 이 과정에서 1무승부가 바로 LG전이었다. 그런데 2009년 당시 무승부는 패배로 간주되었고 이 규정 때문에 SK는 한국시리즈 직행에 실패했다.[150] 이택근, 이진영[151] 박용택, 이병규[152] 이 때 많은 LG 원정팬들이 휴대전화 등으로 목동의 경기 소식을 접했고 팀이 지고 있음에도 원정석에서 환호성이 들리는 진풍경이 일어났다.[153] 특히 전년도 4번타자 역할을 잘해줬던 작뱅의 부진이 뼈아팠다.[154] 그러나 본 포지션인 3루수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155] 최승준이 보상선수로 SK로 떠났다.[156] 당해년도 메이저리거였던 에릭 서캠프가 올 수도 있다는 떡밥이 있었지만 한화 이글스로 갔는데 제대로 망했다.[157] 주장이었던 류제국은 롯데와의 경기 이후 일부 팬들의 현수막 시위와 관련하여 선수단이 양상문 감독과 함께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했다.[158] 한편 두산전 승리는 압도적 선두였던 두산의 화요일 20연승을 저지한 것이라 의미가 깊었다.[159] 결국 염경엽 감독은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날 사퇴를 선언했다.[160] 이때까지 치러진 모든 준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전승 행진을 이어갔었다.[161] 이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면 역대 처음으로 잠실 시리즈가 한국시리즈에서 펼쳐질 뻔 했다.[162] NC가 유일하게 이해 포스트시즌에서 4점 이상 기록한 경기였다.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NC는 4경기 도합 2점만 뽑는 무기력한 경기 끝에 두산에 4전 전패를 당했다.[163] 2년 전 NC와의 준플레이오프, 넥센과의 플레이오프가 모두 정반대로 끝났다.[164] 반대급부로 프랜차이즈 투수였던 우규민이 삼성으로 65억원에 이적하기도 했다.[165] 이 시리즈 첫 날은 그 유명한 유강남의 실책이 나온 날이다.[166] KIA전은 스윕.[167] 이때 SSG와 키움도 잘했기 때문에 6할 승률임에도 불구하고 3위로 전반기를 마쳤다.[168] 두번째 우승 당시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현재 10대, 20대의 LG 팬들은 비로소 본인들이 응원하는 야구 팀이 우승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169] 이 사이 문성주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타격이 매우 약해진 탓이 컸다.[170] 하위타순에 돈은 무지하게 쳐 받으면서 제대로된 타격은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들이 꾸준하게 배치된 탓에 출루도 안되고 어쩌다 출루해도 득점을 못하는 답답한 야구가 계속되었다.[171] 심지어 염경엽 감독의 쓸놈쓸에 더불어 이해할수 없는 투수 교체와 선수 편애, 경쟁 기피 등등 때문에 팀이 추락한 것도 있다.[172] 전반기에 꾸준히 출석 체크를 하던 노장 김진성과 매번 5아웃 세이브를 하던 유영찬이 혹사 여파로 후반기에 제대로 퍼졌다. 더 암울한 점은 최고의 뎁스를 자랑하던 LG가 차명석 단장의 선수 퍼주기로 인해 2군에 마땅한 선수도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