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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박진만 [[틀:삼성 라이온즈 감독| ★ ]] · 73 정대현 · 75 손주인 · 77 배영섭· 84 강영식 · 85 이진영 · 90 박찬도 · 97 강명구 · 98 채상병 · # 이종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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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조동찬 · 74 박한이 · 79 정민태 · 87 박희수 · 92 정병곤 · # 이흥련 · # 최일언 [[틀: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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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2012 | 2014 |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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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대표팀 참가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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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4ca1><colcolor=#ffffff> 삼성 라이온즈 No.71 | ||
조동찬 趙東贊 | Cho Dong-Chan | ||
출생 | 1983년 9월 4일[1] ([age(1983-09-04)]세) | |
충청남도 공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공주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
신체 | 180cm, 80kg | |
포지션 | 유틸리티 플레이어(3루수)[2][3][4][5]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2002년 2차 1라운드 (전체 8번, 삼성) |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2002~2018) |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수비코치 (2019)[6]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19)[7]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20~2022)[8]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22~2023)[9] 삼성 라이온즈 2군 작전·외야코치 (2024~) | |
병역 | 예술체육요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 |
등장곡 | 박상민 - 너에게로 가는 길 | |
응원가 | Village Stompers - Washington Square[]삼성 삼~성 조동찬~ 삼성 조동찬~ (안타!) ×4][11] 이지연 - 바람아 멈추어다오[12][13]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74ca1><colcolor=#FFFFFF> 가족 | |
<colbgcolor=#074ca1><colcolor=#ffffff> 배우자 | <colcolor=#000,#fff>김하연 | |
자녀 | 아들 조부건, 딸 조서윤, 조서아 | |
부모 | 아버지, 어머니 | |
형제자매 | 형 조동화 |
[clearfix]
1. 개요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비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 주 포지션은 3루수였으나 유격수-2루수는 물론 외야수로도 출장한 적이 있다.[14]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손에 꼽히는 툴 플레이어였으나 극심한 유리몸 기질로 인해 주전급 기량에 비해 충분히 경기를 나오지 못했고, 결국 가진 재능에 비해 아쉬운 통산 성적을 남겼다. 통산 wRC+는 약 90에 WAR은 거의 매년 양수를 찍을 정도로 내야 백업으로서는 매우 준수했고, 커리어하이에는 웬만한 주전 선수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 경력도 있다. 대체선수에 가까웠던 형 조동화보다는 훨씬 급이 높은 선수였다. 하지만 당시 강팀이었던 삼성의 내야 사정상 많은 출전을 보장받지 못했고 기회가 생겨도 부상으로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전 자체를 많이 하지 못했을 뿐 실력은 충분했기에 전성기 시절에는 박석민이 각성한 왕조 시절 이전까지는 건강하기만 하다면 무리 없이 주전을 잡을 수 있었다. 왕조 시기 이후에도 내야 제1백업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왕조 시절을 지탱하는 큰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무릎 부상 이후에도 최우선 백업으로 뛰다 커리어를 마쳤다.
2. 선수 경력
조동찬의 선수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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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2003년 | 2004~2005년 | ||
2006년 | 2010년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2014년 |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3. 지도자 경력
이후 2019년부터 삼성 육성군 코치를 맡으면서 선수 은퇴와 동시에 지도자로써의 제 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엔 여전히 육성군 수비코치로 나와있지만, 어째서인지 6월쯤부터 계속 1군과 동행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9년 7월 17일부로 강봉규 코치가 1군 말소되면서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2군 타격코치가 오지 않고 조동찬 코치가 온것에 대해 김한수 감독은 "분위기 전환 차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이영수 코치와 메인겸 서브 구분없이 남은 시즌을 맡을 것이라고...
2020 시즌은 보직을 바꾸어서 수비코치로 바뀌게 된다.
2020년 9월 3일 대구 두산전 8대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단을 집합시키고나서 결국 10대 11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이후 3연승을 하고 있다.
이후 종종 집합을 시키곤 하는데 집합하고 나서 경기력이 좋아지는 경우가 빈번해서 의외의 지도력을 인정받고있다.
2022년 7월 10일 2군으로 내려갔다.
4. 플레이 스타일
툴가이가 드물었던 21세기 삼성 라이온즈 내에서 손에 꼽히는 툴 플레이어였다. 무릎 부상 이전에는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펀치력과 압도적인 주력을 뽐내는 호타준족형 선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부상만 없다면 주전급으로 항상 중용되었던 선수였다. 하필 팀 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채최박이 터져버리고 본인도 30세에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는 바람에 재능에 비해 통산 성적이 매우 아쉬운 케이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 주전~1호 백업으로 뛰어난 통산 성적을 올렸다.[15]장타력이 최채박 트리오에 비하면 아쉽지만 그래도 뜬금포를 자주 때려주는 경향이 있어 류중일 감독이 주전으로 꽤 애용했다. 타율 또한 3할을 넘긴 시즌은 한 번도 없으나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 떨어지는 타격 능력을 잘 커버했다. 거기에 포수를 제외한 내외야 전 포지션에 출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준수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이 때문에 대수비나 대타 요원으로도 자주 기용되었고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포지션이 있을 때에는 대체 후보 1순위로 활용되었다.
부상 전엔 주력이 매우 좋아 단독 도루 작전을 자주 맡았고 대주자로도 자주 기용되었다. 통산 도루 성공율 또한 매우 높으며 전성기인 2010 시즌에는 3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술할 무릎 수술의 영향으로 주력이 상당히 감소해 같은 팀의 박해민이나 김상수처럼 대담하게 시도하는 편은 아니게 되었다. 은퇴 시점에서 통산 100도루 이상을 기록한 선수들 한국 프로야구 역대 도루 성공률 1위(83.8%)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16]
조동찬의 가장 큰 단점은 유리몸. 부상 때문에 2015 시즌은 그냥 통째로 날려먹었고, 100경기 이상 출장한 시즌이 4번에 불과하다. 특히 2013년에 입은 무릎 부상은 결국 그의 양 다리의 길이를 달라지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주력과 타격 밸런스 모두 무너지며 한동안 크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도 이후에도 내야진에 구멍이 날 때마다 1호 백업으로 활동하며 선수 생활을 마쳤다.
5. 응원가
6. 여담
순진한 성격 때문에 이런 일화들이 있었다.2006년 4월 27일 김재걸과 캐치볼 도중 김재걸이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에 금이 간 적이 있다. 그리고 5월달 복귀하며 검투사 헬멧[17]을 쓰고 나타나 2001년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 2002년 KIA 타이거즈의 이종범에 이어 세번째로 검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검투사 헬멧을 쓰고 부진하자 김응용 감독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고 결국 한 달만에 벗었다. 여담으로 이때 조동찬을 위해 만들었던 검투사 헬멧은 나중에 한화의 김태완에게 갔다.
선술했듯 조동찬은 유리몸이었으며 이로 인해 삼성의 심각한 내야진 포화와 맞물려 재능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올렸다. 우선 2007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2군에 갔다가 결국 어깨 수술을 하며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고, 2009년에는 주루플레이 중 왼쪽 무릎 인대 손상으로 역시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잔부상으로 1,2군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이는 순진한 성격탓도 있다. 아파도 내색 않고 경기에 나서다 오히려 부상을 더 키우는 것. 2007년 어깨부상이 그러한 경우. 결정적으로 2013년 문선재의 얼척없는 1루 수비로 인해 무릎이 꺾이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연골을 떼버리는 바람에 양 다리 길이가 달라져 기량이 크게 하락해버렸다. 이건 사실 조동찬이 유리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누구라도 선수 생명에 큰 위기가 생길 만한 부상이었다.
KBS N SPORTS 이병훈 해설위원이 전하는 김성래 코치의 말에 의하면, 힘은 엄청나게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한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라고….
2012 시즌 물오른 번트감각으로 쳤다 하면 툭 떨어져 3루/1루 라인을 따라 구르는 완벽에 가까운 번트를 만들어내 번트+아티스트를 합쳐 번티스트라는 별명이 생겼다. 경기 중에 파울볼이 덕아웃으로 날아드는 걸 번트로 막기까지 했을 정도이다.[18][19]
2010년 9월, 혼인 신고를 하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결혼식은 2013년이 끝나서야 올렸지만.[20] 2012년 2월 득남했다. 이름이 '부건'이라 조동찬은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부건애비라 불리며, 조동찬이 활약을 할 때는 '분유값 벌었다' '부건이 오늘 포식하겠네'라는 드립이 쏟아진다. 여담으로 아들도 그렇고 조카[21]도 그렇고 세모입이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조동찬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은 부건이를 기준으로 불린다. 조동찬 본인은 물론, 조동화는 부건이큰애비, 둘째 아이는 리틀 부건이, 아내는 부건이 엄마 등등.
앞서 말한 2012년 8월에 눈 밑에 부상을 입어서 5바늘을 꿰메는 흉터가 생긴 탓에 조루피라는 별명이 생겼다. 덕분에 이우의 야구수첩에서는 밀짚모자를 쓴 어떤 고무인간으로 나온다.
2016년 5월 30일 라디오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무릎 수술의 영향으로 왼쪽 다리가 2cm 넘게 길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신발에 깔창을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주력도 감소해 단독 도루도 어려워졌다고.
2016년 6월 12일 모 삼갤러에게 캔디 크러시 사가 초대를 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싸인받기 어려운 편인데, 팬들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버스에서 내렸다하면 경기장 들어가서 도저히 안나와 싸인받을 기회가 많이 없기에... 팬서비스 관련해서 욕도 칭찬도 안듣는 희귀한 케이스. 그래도 팬 서비스가 형편없는 선수는 아닌지라 일단 팬들이 싸인을 요청하면 그럭저럭 잘 해준다고 한다.
의외로 100도루 이상 선수 중 통산 도루 성공률이 가장 높은 선수였다.[22] 83%로 꽤 오랫동안 해당 기록을 가지고 있다가, 2022년 현재는 김혜성에 의해 깨진 상태다. 김혜성은 2022년 8월 20일 현재 155도루에 도루 실패가 단 26개로 85.6%의 성공률을 기록중이다. 다만 김혜성은 아직 어리고 뛸 시즌이 많기 때문에 계속 도루하면서 도실도 기록하다 보면 다시 조동찬에게 이 기록이 넘어갈 확률이 높다. 도루를 자주 하는 선수일수록 도실도 많이 당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23]
배우 조찬형과 친분이 있다.[24]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으로 공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충청도 토박이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대구에서만 지내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선수 생활을 보냈고, 은퇴 후 지도자로 전향한 이후에도 삼성에 남아 코치 생활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6.1. 형 조동화
2001년 조동화(우)와 동생 조동찬(좌)의 모습. |
양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던 시절 두 사람의 모습. |
양 팀의 코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 |
SK 와이번스의 조동화와는 두살 터울 형제 사이다. 형인 조동화가 2000년 SK에 신고선수(연습생)로 입단한 것에 비해 조동찬은 2002년 2차 1번으로 지명받고 입단해서 프로 입단년도는 형보다 늦었지만, 실질적인 1군 활약은 조동찬이 더 빨라 인지도는 형보다 더 앞선다. 또한 한국시리즈 경험 커리어나 우승 경험면에서도 동생이 한수 위. 조동화가 2003년에 상무를 안갔다면 경험 커리어는 같았겠지만.[25] 그러나 삼성과 SK가 만난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가 우승함으로써 둘의 우승 경험 커리어는 같아졌나 했는데, 2011년~2014년 4년 연속 삼성이 우승, 동생이 다시 세 개 더 앞선다.(2013년은 무릎 부상으로 엔트리 제외)[26]
형과는 매우 사이가 좋다. 어려서 집이 가난해 둘 중 한 명만 야구를 시키려고 했는데 형이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해 결국 부모님이 좀 더 노력해 둘 다 계속 야구를 시켰다는 일화도 있고, 프로에 먼저 입단한 형이 동생을 위해 선배들한테 이런저런 야구장비를 얻어다가 동생을 줬다는 일화도 있는 걸 보면 오히려 형이 동생을 더 아끼는 편인듯 하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 나간 형을 위해 형이 홈런치는 꿈을 꿨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0년 아시안게임 엔트리 탈락 이후에 갑자기 버닝한 것도 형하고 하룻밤 자면서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버닝 덕에 결국 최종 대표로 선발되었다. 인터뷰에서도 형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
참고로 2014 시즌 후 두 형제가 나란히 FA 자격을 얻었는데, 역대 최초의 형제 FA기도 하다. 두 선수 모두 우선협상 마지막 날에 조동찬이 4년 총 28억, 조동화가 4년 22억에 원 소속구단과 타결에 성공, 합쳐서 50억을 버는데 성공했다.
부모님께서 계란 장사를 하셨는데, 형 조동화는 계란을 싫어해서 남는 계란은 자연히 조동찬의 몫이 되곤 했다. 이 계란 덕인지 체격 면에서는 형보다 앞선다. 여기에 1군에서의 활약도 조동찬이 더 빨랐기 때문에 조동찬이 형인 줄 오해하는 팬들이 꽤 있다.
여담으로 조동화, 조동찬 형제의 우승반지 개수는 무려 9개나 된다.(02,05,06,07,08,10,11,12,14) 게다가 중간에 빠진 2년조차 조동화의 소속팀 준우승(09)과 조동찬의 소속팀 우승(13)[27] 이 포함돼 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번갈아가며 우승반지를 획득할 수도 있었던 셈. 소속팀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2000년 후반~2010년 초반을 호령한 강팀이었다보니 이런 기록도 가능할 뻔 했다.
05조동찬-06조동찬-07조동화-08조동화-09x-10조동화-11조동찬-12조동찬-14조동찬.
같은 해에 유니폼을 벗었다. 또 각자 30세 시즌 말미에 심각한 왼 무릎 부상을 당했던 것도 공통점이다.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팀 | 출장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출루율 | 장타율 |
2002 | 삼성 | 5 | 7 | .286 | 2 | 0 | 0 | 1 | 1 | 2 | 0 | 0 | .286 | .714 |
2003 | 14 | 23 | .174 | 4 | 0 | 1 | 0 | 4 | 1 | 0 | 0 | .167 | .261 | |
2004 | 123 | 342 | .222 | 76 | 18 | 0 | 7 | 29 | 44 | 3 | 32 | .286 | .336 | |
2005 | 122 | 387 | .274 | 106 | 16 | 0 | 16 | 63 | 55 | 17 | 54 | .360 | .439 | |
2006 | 107 | 370 | .259 | 96 | 13 | 0 | 10 | 46 | 51 | 20 | 35 | .323 | .376 | |
2007 | 38 | 106 | .189 | 20 | 3 | 0 | 0 | 10 | 14 | 3 | 18 | .301 | .217 | |
2008 | 68 | 151 | .225 | 34 | 2 | 0 | 2 | 14 | 25 | 8 | 24 | .322 | .278 | |
2009 | 75 | 215 | .256 | 55 | 8 | 0 | 8 | 29 | 34 | 21 | 30 | .341 | .405 | |
2010 | 95 | 332 | .292 | 97 | 20 | 2 | 9 | 51 | 61 | 33 (5위) | 37 | .359 | .446 | |
2011 | 85 | 208 | .216 | 45 | 7 | 0 | 4 | 25 | 27 | 18 | 21 | .284 | .308 | |
2012 | 94 | 270 | .285 | 77 | 15 | 2 | 6 | 39 | 40 | 12 | 34 | .363 | .422 | |
2013 | 74 | 221 | .240 | 53 | 15 | 0 | 7 | 25 | 36 | 7 | 29 | .327 | .403 | |
2014 | 31 | 74 | .270 | 20 | 4 | 0 | 1 | 6 | 8 | 5 | 11 | .360 | .365 | |
2015 | 1군 기록 없음[28] | |||||||||||||
2016 | 90 | 247 | .275 | 68 | 11 | 1 | 10 | 36 | 32 | 0 | 29 | .348 | .449 | |
2017 | 122 | 353 | .289 | 102 | 23 | 0 | 10 | 46 | 35 | 3 | 32 | .333 | .439 | |
2018 | 28 | 54 | .222 | 12 | 1 | 0 | 1 | 2 | 5 | 0 | 4 | .276 | .296 | |
KBO 통산 (16시즌) | 1171 | 3360 | .258 | 867 | 156 | 6 | 92 | 426 | 470 | 150 | 390 | .322 | .390 |
8. 관련 문서
[1] 음력 1983년 7월 27일.[2] 주 포지션은 3루수로 통산 670경기(513선발) 4,590.1이닝을 출전했다. 원래는 키스톤과 3루를 모두 보는 유망주였으나 2005년 김한수를 1루로 밀어내고 2년 동안 주전급 3루수로 출전했고, 이후 잦은 부상으로 박석민에게 밀려났으나 이후에도 3루수로 종종 투입된 편. 특히 2010년에는 박석민이 손가락 부상으로 지명타자 출전이 많아져서 사실상 주전 3루를 꿰찼으며, 2016년에도 박석민의 이적과 발디리스의 부진/부상으로 3루수 주전이 되었다.[3] 2루수와 유격수로도 많은 경기를 출전했는데, 2루수로는 통산 271경기(222선발) 1,750이닝, 유격수로는 통산 185경기(135선발) 1,235.1이닝을 출전했다. 2004년 브리또의 이적으로 주전 유격수를 맡았고, 박진만의 영입 후에는 3루수로 더 많이 출전했으나 유격수로도 2011년까지는 간간이 출전했으며 특히 2009, 2010년에 유격수로 적지 않은 경기를 출전했다. 2011년부터는 김상수가 주전 유격수를 맡기도 했고 주전 2루수 신명철의 노쇠화로 서서히 2루수 비중이 늘어났고, 2012~2013년에는 주전급 2루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에는 거의 3루수 위주로 출전했다가, 2016~2017년에는 키스톤이 부실했던 팀 사정상 2루수와 유격수로도 종종 출전했고 특히 2017년에는 사실상 주전 2루수에 가까운 위치였다.[4] 이외에도 외야수, 1루수로도 종종 출전했다. 외야수의 경우 주로 좌익수로 나왔는데, 특히 2005년과 2008년에 출전이 많았으며 통산 35경기(26선발) 212이닝을 출전했다. 우익수와 중견수로는 각각 통산 7경기(2선발) 12이닝, 6경기(4선발) 35.1이닝 출전에 그쳤다. 1루수로는 거의 출전이 없었다가 2017, 2018년에 러프의 백업으로 간간이 1루수로도 출전했고, 통산 39경기(13선발) 161이닝을 출전했다.[5] 여담으로 2008년에는 포수를 제외한 내외야 7개 포지션에서 적어도 1경기 이상 출전하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주로 3루수와 좌익수로 나온 편.[6] ~7월 16일[7] 7월 17일~[8] ~7월 9일까지.[9] 7월 10일~[] [11] 참고로 이 곡은 해병대 군가 《묵사발가》, KIA 타이거즈의 팀 응원가와 원곡이 같다.[12] 조동차~아~안~ 조동차~아~아~아아아안~ 삼성 조동찬~ 조동찬~ 조동찬~[13] 팬들에게 매우 혹평을 받으며 2011 시즌 초반만 쓰고 폐기됐다.[14] 특히 2008년에는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 출장했다. 역대 포지션 출장 경험으로 따지자면 포수까지 출장한 경험이 있는 이종범에게 밀려 2위에 해당하지만 단일년도 포지션 출장 경험으로만 따지자면 조동찬이 1위이다.[15] 당장 암흑기 시대 조동찬과 비슷한 포지션의 외야수인 김헌곤과 비교하면 승리기여도 격차가 확실하다.[16] 이후 김혜성과 김지찬이 100도루를 기록함과 동시에 각각 84.7%, 87.8%의 성공률로 조동찬의 기록을 돌파했으나, 현역을 지속하면서 성공률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김혜성과 김지찬 모 성공률이 우상향하고 있다.[17] 기존에 선수들이 쓰는 헬멧에 얼굴가리개를 붙인 것으로 헬멧 쓴 모습이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연상시킨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전에 심정수와 이종범의 사례 때문에 검투사 헬멧 형태가 따로 제작되었지만 조동찬이 쓴 헬멧은 따로 국내에서 만든 수제품 헬멧.[18] 보면 알겠지만 쳐서 막아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기 쪽으로 굴려서 잡는다. 게다가 형 조동화도 번트하면 크보에서 알아주는 번티스트다.[19] 근데 잘 보면 좌타자 번트자세다...[20] 2012년 말에 정식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2012 시즌 도중 부건이가 태어난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둘째가 생겼다. 따라서 결혼식은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 미뤄진듯.[21] 형 조동화의 딸인 조예원 양[22] 통산 도루 개수는 150개, 도루 실패는 단 29개.[23] 상대방 포수도 김혜성을 비롯하여 발이 굉장히 빠른 주자가 루상에 나갈 경우 거의 뛸 것을 다 의식하고 있으니 투포수들이 더 집중하게 된다. KBO의 대도들이 조동찬보다 도루 성공률이 낮은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24] 초중고 동기로 함께 야구부 생활을 했다.[25] 2009년까지 삼성은 02, 04, 05, 06 4번 진출했고 3번 우승했으며, SK는 03, 07, 08, 09 4번 진출했고 2번 우승했다.[26] 참고로 조동화는 2011년에는 시즌 막판 무릎 부상으로 가을 야구에 불참했고, 2012년에는 2010년과는 반대로 건너편에서 동생이 우승 반지 끼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근데 불행 중 다행으로 조동화는 동생과 달리 2011년의 부상과 큰 수술 이후 재활에 성공하여 수비력에 큰 지장을 받지 않고 FA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큰 부상도 더 이상 당하지 않았다. FA직전 시즌에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실력 대비 초대박 계약에 성공했다. 결국 한 시즌 정도를 날렸어도 이후 부상 후유증에 의한 치명적인 악영향은 받지 않았다. 노쇠화로 못하게 되어 은퇴한 것은 있지만[27] 부상으로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28] 부상으로 인한 재활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