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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김민호 · 72 박승민 · 74 김경문 [[틀:한화 이글스 감독| ★ ]] · 76 윤규진· 77 박재상 · 78 김남형 · 79 양상문 · 82 김재걸 · 83 김우석 · 88 양승관 · 89 정경배 · 90 김정민''' | |
2군 | |
'''71 이대진 [[틀:한화 이글스 2군 감독| ★ ]] · 75 박정진 · 80 고동진 · 86 최윤석· 87 추승우 · 100 정현석 · # 쓰루오카''' | |
잔류/재활군 | |
57 정우람 · 81 김성갑 · 85 정범모 · 91 이상훈 | |
트레이닝파트 | |
이지풍 · 김형욱 · 김연규 · 장세홍 · 최우성 · 김재민 · 김소중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군 입대 선수 | 등록 선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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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용 (1984~1989) | 류영수 (1990~1991) | 박용진 (1992~1993) | 김충 (1994~1995) | 감독 대행 조창수 (1995) | |
<rowcolor=#fff>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
정순명 (1996~1997) | 이철성 (1998) | 신용균 (1999) | 김성근 (2000) | 신용균 (2001~2004) | |
<rowcolor=#fff> 10대 | 11대 | 12대 | 13대 | ||
장태수 (2005~2009) | 장효조 (2010~2011) | 감독 대행 양일환 (2011) | 장태수 (2012~2016) | 성준 (2017~2019) | |
<rowcolor=#fff> 14대 | 15대 | 16대 | 17대 | ||
오치아이 (2020~2021) | 박진만 (2022) | 감독 대행 최태원 (2022) | 김재걸 (2023) | 정대현 (2024) | |
<rowcolor=#fff> 17대 | |||||
이병규 (2024~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번 | ||||
윤용하 (1991~1993) | → | <colbgcolor=#228b22><colcolor=#fff> 김재걸 (1995) | → | 이중화 (1996)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 ||||
이정훈 (1995) | → | 김재걸 (1996~1998) | → | 결번 |
결번 | → | 김재걸 (2001~2004) | → | 박진만 (2005~2010)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 | ||||
고지행 (2003.4.25.~2004) | → | 김재걸 (2005~2009) | → | 손주인 (2010~2012)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3번 | ||||
나가시마 (2009) | → | 김재걸 (2010~2018) | → | 윤성철 (2020) |
LG 트윈스 등번호 72번 | ||||
손인호 (2018) | → | 김재걸 (2019~2020) | → | 김민호 (2021~2023)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3번 | ||||
윤성철 (2020) | → | 김재걸 (2021~2023) | → | 정대현 (2024~) |
한화 이글스 등번호 82번 | ||||
박윤 (2022~2023) | → | 김재걸 (2024~) | → | 현역 |
A대표팀 참가 경력 | ||||||||||||||||||
|
<colbgcolor=#f73600><colcolor=#ffffff> 한화 이글스 No.82 | |
김재걸 金在杰 | Kim Jae-Gul | |
출생 | 1972년 9월 7일 ([age(1972-09-07)]세) |
서울특별시 구로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영일초 - 우신중 - 덕수상고 - 단국대 |
포지션 | 내야 유틸리티[1]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5년 2차 2라운드 (전체 13번,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95~2009)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10)[2] 삼성 라이온즈 1군 작전코치 (2010~2018)[3] 삼성 라이온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8)[4] LG 트윈스 1군 작전코치 (2019~2020)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21) 삼성 라이온즈 1군 작전코치 (2022)[5]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22)[6]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23) 한화 이글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2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작전·주루코치 (2024) |
병역 | 공익근무요원 (1999~2001) |
응원가 | 자우림 - 하하하송[7][8]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며, 선수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 現 한화 이글스 1군 작전·주루코치이다.현역 시절 전상렬과 마찬가지로 야구계의 노안으로 유명했다. 여담이지만 삼성의 3김(김한수-김종훈-김재걸) 타자 중 키가 제일 작다.(186cm-183cm-175cm) 실제로 중학생 시절 겨우 150cm밖에 안 되어 한때 야구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 김재걸 파동
김재걸이 단국대에 재학하고 있었던 당시 현대그룹은 프로야구단 창단을 위한 밑떡밥으로 실업야구단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며 문동환, 박재홍 등 유망한 고졸, 대졸 선수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단국대 시절 국가대표를 했던 김재걸도 1994년 11월 현대 피닉스와 1억원에 계약했다. 그러나 몇 달 전 열린 1995 신인지명 때 김재걸을 지명했던 삼성에서 김재걸에 대한 소유권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김재걸과 계약하며 이중계약 파동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현대와 삼성은 김재걸을 두고 법정 공방까지 벌였으며, 1995년 3월에서야 김재걸은 삼성 선수가 맞다고 판결이 났다.여담으로 당시 여론은 현대 피닉스 편이었다. 아무래도 김재걸이 현대 피닉스와 먼저 계약을 했기 때문. 또한 이전에 비슷한 이중계약 파동 때는 프로야구 쪽이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이겼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2.2. 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 입단 당시에는 계약금 2억 1천만원이라는, LG 1차지명 심재학과 함께 신인 역대 최다 계약금을 받아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재걸의 실력은 팬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9]
활동적인 풋워크를 바탕으로 한 괜찮은 수비를 가지고 있었고 발도 빨랐으나, 결정적으로 타격이 시망. 1995~1996년의 주전 시절(95년 유격수, 96년 2루수)[10]에도 꾸준히 2할대 초반의 타격을 보이며 스스로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다. 심지어 1996년 5월엔 비록 어깨가 강한 선수인걸 감안하더라도 땜빵 포수로 나온 이종범에게 도루저지를 당하는 굴욕도 겪는다.
1997년 팀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1루수 이승엽, 2루수 정경배, 3루수 김한수, 유격수 김태균을 주전으로 낙점하면서 파격적인 내야 리빌딩에 나섰다.[11] 김재걸이 이들에게 밀린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타격이였다. 이승엽은 이제 막 시즌을 시작하는 처지였지만 백인천 감독이 열심히 밀어주었고[12], 김태균은 정확도만 놓고 보면 김재걸과 큰 차이는 없지만, 홈런을 16개나 친 시즌이 정도로 한 방이 있는 유격수였다. 그렇다고 외야로 전향하자니, 양준혁, 최익성에 신동주까지 있어서 자리가 없었다.[13]
결국 자신보다 나은 방망이를 가지고 있는 선수들에 밀려 벤치워머로 강등되었으며, 군 복무를 마친 20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수비 요원으로 뛰게 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프로 주전선수라는 자만심에 휩싸여 연습을 게을리 했다고. 이후 백업요원으로 떨어지자 자신의 자만을 깨닫고 죽어라 수비연습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이 막 서른이 지났을 무렵부터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한 모든 한국시리즈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팀이 처음 우승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6차전 9대 6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9번 타자로 나와, 당시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 투수로 뛰던 이상훈에게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큼지막한 중월 펜스 직격 2루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1번 강동우 삼진, 2번 틸슨 브리또 볼넷, 3번 이승엽의 동점홈런,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4번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은 김재걸의 방망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은 언제나 그렇듯이 별 특징 없는 중고참 후보 선수로 시즌을 보냈다.[14]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석패한 삼성이 거액을 들여 심정수와 박진만을 FA로 영입하면서, 18인 보호선수명단[15]에 변변찮은 공격력을 가진 김재걸과 김종훈은 집어넣고 150킬로대의 빠른 공을 던지던 지역 유망주 투수 이정호를 제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 팬들은 왜 김재걸은 보호하면서 이정호는 가게 내버려 두었냐며 불만을 토했다.[16][17] 또 박진만은 삼성으로 넘어오면서 김재걸이 달고 있었던 자신의 기존 등번호 7번을 요구했고, 김재걸은 박진만이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18] 등번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김재걸의 팀 내 입지가 어느 수준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2005년은 김재걸의 선수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한 해가 되었다.
시즌 초 박진만의 부상으로 유격수에 공백이 생기자 선동열 감독은 아쉬운 대로 김재걸을 선발 출장시켰다. 초반에는 김재걸 선발출장을 지지하는 팬들이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2004년에 쏠쏠한 유격수 수비실력을 보이면서 타격에서도 잠재력을 과시한 조동찬이 3루수에서 유격수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재걸은 이런 반대여론을 수비도 아니고 미칠 듯한 공격력으로 메꿔 버린다.[19]이 놀라운 활약에 사람들은 김재걸을 욘사마 배용준과 양신 양준혁에 빗대어 걸사마, 걸신이라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는 박진만이 복귀한 중반 이후에도 백업 선수로 종종 출장하며 팀의 승리에 여러 차례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1위 삼성과 2위 SK의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불렸던 8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원정 3연전의 마지막 날에, 김재걸은 삼성이 1무 1패로 승리가 절실한 상황에서 선발 출장해 솔로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그 경기는 삼성이 1대 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맞이한 2005년 한국시리즈는 말 그대로 김재걸을 KBO 한국시리즈의 사나이로 만드는 경기가 되었다. 이번에도 출발은 백업요원이었으나, 1차전에서 박종호가 번트를 대다가 공에 손가락을 맞아 시리즈 아웃되면서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간 김재걸은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12타수 6안타 5볼넷 4득점 2타점이라는, 말 그대로 MVP급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김재걸의 활약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를 스윕하고 세번째 우승컵을 가져갔다. 시리즈 MVP는 철벽투구를 선보인 신인 오승환이 가져갔지만, 팬들이 뽑은 한국시리즈 최고 선수의 영예(구단 별도시상)는 김재걸에게 돌아갔다. 더군다나 한국시리즈 종료 후 열린 이벤트 게임인 코나미컵 대회에서도 중국전 2타점 적시타를 치는 등 맹활약하였다.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시즌 후 연봉 협상에서는 무려 69.2%가 인상된 1억 1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마치며 데뷔 첫 억대 연봉을 받아보게 되었다. 여기에 2006년 3월에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발탁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2006년 정규시즌 개막 후에는 전체적으로 예전의 그 물방망이로 돌아갔으나, 이 해에도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천금같은 동점타를 날리는 등 팀의 4번째 우승에 기여한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시즌 후에는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2년 총 5억 6000만원에 재계약하는 등 억대 연봉, 국가대표팀 발탁, 한국시리즈 우승, FA 계약까지 이뤄내는 데 성공하면서 평범한 내야 스페셜리스트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줬다.
2007년에는 3루의 구멍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노장 김한수와 함께 고군분투했으며[20], 신명철이 들어오고 박석민이라는 걸출한 신예가 복귀한 이후에는[21]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게 된다. 참고로 당 시즌 5월 8일엔 1이닝에 실책 4개를 범하여 한 이닝 최다 실책 공동 1위 자리에 올라가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2009년에는 선수로 등록했지만 사실상 플레잉코치 역임을 했으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을 때는 2군에서 뛰면서도 후배들의 훈련을 도우며 코치 수업을 쌓기도 했다.[22]
2009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10일 경기에서 동시기에 은퇴한 김창희와 함께 은퇴식을 치렀다. 삼성 구단의 5번째 은퇴식이었다. 그런데,
실력으로 경기를 압도하는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그의 발견은 백업 요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 야구의 체계적인 면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KBO에서 내야백업 유틸리티로 가장 유명한 게 꾸준함은 LG 트윈스의 이종열, 임팩트는 한국시리즈의 사나이 김재걸일 것이다.
연도별 성적을 보면 은퇴식을 치러줄 만한 성적을 기록하진 않았지만[23] 나름 그래도 한 팀에서만 15년을 뛴 원 클럽 플레이어고, 삼성의 한국시리즈 콩라인 탈출의 밑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24] 삼성의 V3, V4를 견인하는 등 큰 경기에 강한 주역이기도 해서...
2.3. 국가대표 경력
2.3.1.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만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A대표팀에 발탁되었다. 2루수-3루수-유격수 모두 가능한 내야 유틸리티 자원이고 발도 매우 빠르기 때문에 주로 대수비나 대주자로 나설 것이 유력하다.예상대로 대표팀에서도 역할은 김민재와 함께 내야 백업. 당시 대표팀의 주전 키스톤 콤비였던 박진만, 김종국의 백업 역할을 수행하며 대표팀의 4강행에 기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김재걸 삼성시절 커리어 수비 하이라이트전형적인 수비형 내야수로, 타격에서는 데뷔 시즌에 wrc+ 90에 근접한 기록을 낸 이후로 늘 절망적인 수준이었고 커리어 통산 wrc+는 65.4에 그친다. 멘도사 라인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격수를 포함해 2루수와 3루수도 가능한 만능 내야 백업이었기에 수비에서의 다양한 활용성을 무기로 살아남았고, 주루도 준수했기 때문에 타격에서의 심각한 단점을 수비와 주루로 메꾸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5 | 삼성 | 109 | 281 | .249 | 70 | 11 | 5 (5위) | 3 | 32 | 32 | 10 | 22 | .356 | .302 |
1996 | 115 | 320 | .228 | 73 | 12 | 2 | 2 | 28 | 31 | 40 (3위) | 36 | .297 | .303 | |
1997 | 30 | 17 | .176 | 3 | 1 | 0 | 1 | 2 | 7 | 1 | 1 | .412 | .211 | |
1998 | 72 | 100 | .250 | 25 | 2 | 0 | 0 | 5 | 8 | 9 | 8 | .270 | .306 | |
1999 | 군복무(공익근무) | |||||||||||||
2000 | ||||||||||||||
2001 | 70 | 138 | .261 | 36 | 5 | 1 | 1 | 9 | 18 | 6 | 11 | .333 | .313 | |
2002 | 83 | 92 | .207 | 19 | 1 | 0 | 2 | 10 | 17 | 5 | 8 | .283 | .265 | |
2003 | 85 | 161 | .199 | 32 | 7 | 1 | 0 | 10 | 23 | 2 | 12 | .255 | .253 | |
2004 | 64 | 64 | .188 | 12 | 2 | 0 | 0 | 3 | 12 | 2 | 5 | .219 | .246 | |
2005 | 103 | 231 | .247 | 57 | 7 | 0 | 1 | 23 | 22 | 8 | 22 | .290 | .311 | |
2006 | 115 | 171 | .211 | 36 | 6 | 1 | 0 | 11 | 35 | 9 | 13 | .257 | .266 | |
2007 | 116 | 314 | .232 | 73 | 12 | 0 | 2 | 22 | 40 | 17 | 40 | .290 | .317 | |
2008 | 99 | 187 | .230 | 43 | 4 | 3 | 1 | 11 | 19 | 6 | 26 | .299 | .322 | |
2009 | 64 | 52 | .212 | 11 | 2 | 0 | 1 | 4 | 7 | 4 | 11 | .308 | .349 | |
<rowcolor=#373a3c> KBO 통산 (13시즌) | 1125 | 2128 | .230 | 490 | 72 | 13 | 14 | 170 | 271 | 119 | 215 | .296 | .299 |
5. 지도자 경력
5.1. 삼성 라이온즈 1기
은퇴 이후 2010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2군 주루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2010년 6월 12일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과정에서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3루쪽 코치석에서 볼 수 있다.하지만 코치로서는 평가가 영 좋지 못한데, 유지현 등 준족 출신 주루코치들이 으레 그렇듯이 선수들 주력을 철저히 자기 눈높이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뭐 배영섭이라든가 김상수같은 선수들이야 주력도 되고 센스도 뛰어난 선수들이니 막 돌려도 보통 문제없이 사는 편이지만, 진갑용처럼 똥차 수준의 선수들한테 그렇게 돌리면 뭐 어쩌라고.
2013년에는 김태한 투수코치, 김한수 타격코치와 더불어 삼성의 적폐 3김 코치라고 까였다.[25]
앞에서 말한 문제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수들이 간혹 김재걸의 사인을 무시하고 주루 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보인다. 예를 들면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강명구가 했던 주루플레이 오버런이라든가[26] 201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박한이가 사인 없이 단독으로 성공한 3루 도루라던가... 심지어 2014년엔 야마이코 나바로에게까지 무시당했다. 그리고 2015년에 또 한 번.
게다가 KIA에서 다시 삼성으로 복귀한 1루 코치 김평호 때문에 존재감이 엄청 없어졌다. 도루 관련 공이든 과든 모두 저 분에게 돌아가다보니, 뉴비팬들에겐 아예 인지도가 없거나 간간히 사고치는 3루 코치 정도 이미지가 되었다.
2016 시즌 후 류중일 감독이 물러나고 김한수 감독 선임과 동시에 코칭스태프 대규모 개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류에 성공하면서 2017년에도 3루 작전코치로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
흑역사도 있는데 2017년 5월 21일 대전 한화전에서 김태균을 오른발로 폭행한 혐의로 인해[27] 5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300만원 징계를 받게 됐다. 역시 과격한 행동을 벌인 강봉규 코치와 동일한 징계다.
2018년 6월 25일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2군으로 내려갔다. 기존 박진만 수비코치가 3루 작전코치까지 겸직하게 됐고 대신 2군에서 강명구 코치가 올라와 주루코치를 맡는다.
2018 시즌 이후 삼성에서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면서 1995년 이후 24년 만에 친정팀 삼성을 떠나게 되었다.
5.2. LG 트윈스
삼성과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얼마 되지 않은 2018년 10월 24일, 이종범, 김호, 최일언 등과 함께 LG 트윈스의 코치로 영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직은 1군 작전코치로, 삼성 시절 보좌했던 류중일 감독의 부름을 받은 듯하다.그래도 LG로 건너와서는 예전의 문제점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막 돌려대지 않고 주루 사인으로 정주현 등 발이 빠른 선수들을 적극 활용하여 타이밍에 맞게 도루시키면서[28] 득점과도 꽤 연결시켜주는 편이라 나름 좋게 평가받았다. 가끔 판단 미스로 돌려버리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는 평. 하지만 2020 시즌 용병 타자 로베르토 라모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홈으로 질주하는 덩치 큰 라모스를 믿지 못하고 막아세웠으나 라모스는 김재걸을 무시하고 지나쳐 두 번 다 득점에 성공했다. 근데 이건 라모스가 순간적으로 의욕이 앞서서 그랬지 막길 잘한 건 맞다. 아웃될 확률이 더 컸고 라모스가 워낙 똥차라...
그러나 2020년 들어 LG는 팀 전체 주루사 1위를 기록하며 김재걸 주루코치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KBO에서 가장 똥차 중 하나인 이성우[29]의 홈에서의 아웃이나 손호영의 주루사[30]에 관한 것 때문에 2배 이상으로 까였다.[31]
근데, 사실 잘 살펴보면 시즌 중반에 판단미스로 가끔 풍차돌리기를 시전했을 뿐 생각보다 김재걸의 실책 빈도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주루코치들 대부분은 약간씩 실수한다. 주루코치가 컴퓨터가 아닌 이상 어떻게 매 상황 완벽한 판단을 내리겠는가? 또, 삼성 코치 초기 시절 때랑 비교해보면 타이밍도 훨씬 잘 아는데 팀 성적이 위태위태할 때 괜히 과하게 까이는거 아니냐는 반론도 나왔다. 그리고 상술된 팀 주루사 지표도 꼭 3루 쪽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다. 분명 김재걸 본인의 코칭이 나쁘지 않은 상태인 건 확실하다.
5.3. 삼성 라이온즈 2기
2020 시즌 후 류중일 감독이 물러난 후 류지현 감독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이후 다시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삼성에 복귀하였다. 보직은 2군 내야 수비코치로 정해졌다.2022 시즌부터 다시 1군 작전코치로 임명되었다. 시끄럽지 않은 것을 보면 별 탈 없는 듯. 그러다가 8월 30일 자로 김종훈 타격코치와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일단 수비코치로 잔여시즌을 보낼 예정.[32]
이후 박진만 1군 감독대행이 신임 감독에 취임하면서 이뤄진 코칭스태프 개편에 따라 2023 시즌부터 2군 감독으로 활동한다. 또한 류중일 - 김한수 - 허삼영 시절의 코칭스태프가 전부 팀을 떠나고 젊은 박진만 감독을 중심으로 팀이 재편되면서 졸지에 팀 내 최고참 코치가 되었다.
2023 시즌 퓨처스에서 삼성이 압도적 꼴찌를 달리고 있는데 투수들은 사사구를 남발하며 실점하고, 타자들은 빈타에 시달리며 최저 득점으로 기록하면서 투타 지표가 바닥권을 쳐 삼성 팬들 사이에서 비판 여론이 늘어났다. 참고로 삼성 2군은 2018년 이후 팀 승률은 나름대로 우상향을 기록했는데,[33] 현재 페이스대로라면 2016년 팀 최저 승률(0.333)을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당시에는 기사화가 됐을 정도 2군 팀내 상황이 최악이어서 시즌 후 코칭스태프가 물갈이됐는데, 2023년의 경우에는 새 감독에 맞춰 김재걸을 비롯해 퓨처스 코치진 대다수가 물갈이된 첫 시즌이다.
시즌 초반 우려와 달리 37승 61패로 승률 0.378을 기록하면서 팀 최다 패배만 경신하는데 그쳤지만 순위는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구단 프런트의 사실상 손을 놓은 듯한 방만한 경영으로 인하여 2군 뎁스가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김재걸이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시즌이 끝나고 이종열 단장 선임과 동시에 정대현 동의대 투수코치 겸 국가대표팀 불펜코치가 2군 감독으로 오는 게 확실시되면서 1년만에 2군 감독 자리를 내려놓게 됐다. 이미 이종열 단장이 대대적인 퓨처스 코칭스태프 개편을 선언한 만큼 자연스레 떠날 것으로 보인다.[34]
삼성에서의 2기는 1군 코치로는 나쁘지 않았으나 2군 감독으로는 매우 좋지 않았다. 허나 이는 앞서 말했듯, 삼성이 10개 구단 중 최악의 육성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므로 무조건 감독 탓을 하기엔 힘들다. 사실 2군 감독이 성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매우 드물며 주로 육성, 경기 운영 능력들을 본다. 그래도 코치로는 주루 면에서도 실책도 적고 평도 좋아서 재취업할 것으로 보였고 결국 한화 코치로 이적했다.
5.4. 한화 이글스
2023년 10월 21일 박재상과 함께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합류한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한화에서의 보직은 1군 작전(3루)·주루코치를 맡는다.#한화 작전코치로서의 평은 나쁘지 않은 편. 가끔가다가 상대 외야수의 유형을 제대로 분석 못하여 멈춤지시나 오버런 지시쪽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즌 후 2024 WBSC 프리미어 12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작전코치로 합류했다. 도미니카 전에서 8회, 박동원 안타 이후 1루주자 김휘집에게 돌리다가 갑자기 멈춰세웠고 따라서 김휘집이 3루에서 오버런으로 아웃될뻔하였다. 다행히도 비디오판독에서도 세잎이 나왔다.
6. 관련 문서
[1] 통산 유격수로 470경기, 2루수로 453경기, 3루수로 228경기를 출전했다. 이외에도 외야수로 2경기(1998년), 1루수로 1경기(1995년)를 출전한 기록도 있다.[2] ~6월 12일[3] 2010년 6월 13일~2018년 6월 25일[4] 6월 26일~[5] ~8월 29일[6] 8월 30일~[7] 랄랄랄랄 라랄라~ 날려라~ 김재걸~ 랄랄랄랄 라랄라~ 날려라~ 김재걸~ 안타! 안타! 안타![8] 은퇴 후 손주인이 물려받았다.[9] 사실 김재걸의 계약금은 현대 피닉스에게 물어줘야 할 위약금 1억원이 포함되어서 세후 실수령액은 9천만원을 약간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김재걸 본인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재계 라이벌인 현대, LG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2억 1천만원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피닉스에서 뛰었던 선수들 상황이 비슷했는데, 1997년이 되어서야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문동환도 공식 계약금은 5억원이었지만, 실제로 현대 피닉스 측에 위약금을 배상해야 했음으로 실 수령액은 더 낮았다.[10] 본래 주전 유격수는 류중일이었고, 주전 2루수는 강기웅이었지만 둘 다 부상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빈 자리를 특급 유망주였던 김재걸이 채우게 된 것.[11] 앞의 선수들 나이가 22, 24, 27, 27살. 사실 KBO에서 단기간에 이런 식의 리빌딩을 성공시킨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12] 그 결과 데뷔 3년차인 1997 시즌에 이승엽은 프로 커리어 첫 첫 홈런왕을 차지했다.[13] 참고로 신동주의 타격재능이 만개한 것은 1997 시즌의 일이다. 1996 시즌 0.230의 타율에서 무려 1할 가까이 오른 0.326(팀 내 3위, 리그 5위)을 기록했다. 1997 시즌 양준혁 - 최익성 - 신동주로 이어지는 외야 라인업은 타격 성적까지 우수했던지라 1할대 내야수인 김재걸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14] 2003년에는 틸슨 브리또와 고지행이 주전이었고 박정환과 김재걸이 내야 센터라인 백업이었다. 2004년에는 박종호가 현대에서 이적하고 조동찬이 성장하면서 주전이 되었다. 김재걸은 두 해 연속으로 1할대 타율을 찍은 백업 내야수였다.[15] 당시에는 FA 보호선수가 18명이었다.[16] 사실 이정호의 성적을 보면 150km을 던지는 유망주라는 점을 뺐을 때 김재걸보다도 더 거둔 결실이 없었다. 계속된 부상과 재활, 투구폼 교정으로 인해 낭비한 시간이 4년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선동열식 훈련을 하다가 부상이 재발한 상태였다. 3년간 19경기에 올라와 던진 성적도 영 좋지 않았다. 그나마 김재걸은 타격이 1할대여서 그렇지 큰 부상이 없이 계속 1군에서 대주자, 대수비 같은 역할이라도도 수행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터지지 않은 유망주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고 김재걸의 통산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아보였던 이정호 VS 그저 그런 대수비 요원 김재걸 중에서 후자가 선택되었으니 팬들의 반발이 있었다.[17] 이후 현대는 이정호를 바로 공익요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정호는 정작 이후에도 부상과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삼성 시절보다 더 시원찮은 성적만 올리고 해외진출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옷을 벗었다. 반면 김재걸은 후술하듯이 제 몫 이상은 해 주고 은퇴했다.[18] 김재걸은 1995년 단국대 졸업, 박진만은 1996년 인천고 졸업(1년 유급). 참고로 김재걸과 함께 단국대 타선을 이끌던 후배 선수가 바로 이병규와 강동우였다. 무려 5기수나 차이가 났다.[19] 4월 월간 타율 0.277에 8타점, 8사사구, 1도루, 8득점을 시작으로 5월에는 월간 타율 0.306에 6타점, 5사사구 3도루 7득점을 올리면서 5월 말에도 시즌 타율은 0.291(127타수 37안타)을 기록하는 중이었다.[20] 통상적으로 김한수는 3루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승엽과 마해영이 동시에 떠난 이후에는 1루수로 출장했다. 2006 시즌을 보면 주전 3루수는 조동찬이었고 김한수와 김재걸이 조금씩 보조해준 양상이다. 2007년에 조동찬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사실상 김재걸이 주전 3루수였다.[21] 2007년에 롯데에서 넘어온 신명철은 주전 2루수가 되어 박종호를 대체했다. 그리고 2008년에 급부상한 박석민이 주전 3루수를 맡게 되자 김재걸은 2루수, 유격수, 3루수로 출전했고 대수비로 출전하는 빈도가 제법 높아졌다.[22] 64경기에 올라왔지만 대주자, 대수비요원으로 올라온 것이 전부였다.[23] 그 이전에 은퇴식을 가진 선수들인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에 비하면 김재걸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24] 이해가 안 가면 위로 올라가서 2002년 코시 부분을 읽어보라.[25] 가끔 김성래를 넣는 경우도 있다.[26] 근데 이게 상대방의 허를 찌르며 득점에 성공하였다.[27] 여담으로 현역 시절이던 2001년 9월 18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도 당시 배영수를 폭행했을 정도로 흥분한 펠릭스 호세를 말리기 위해 호세의 등 위에 올라탄 적도 있다. 참고로 이 경기는 그 참교육으로 유명한 경기다.[28] 3루 도루도 많이 시켰다. 성공률이 꽤 높은 편.[29] 게다가 이성우의 나이는 이미 40대에 접어든 노장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발 느린 포수 + 노장이라는 도저히 주루가 빠를 리 없는 주자임을 감안하지 않고 진루를 시킨 것.[30] 손호영이 2루에 도착하고 3루로 뛰어가는 도중에 막아세웠다. 명백한 김재걸 코치의 실수.[31] 성적이 불안불안할 때 특히 더 까였다. 심지어는 김재걸과 관련이 없을때도 까였다.[32] 반대급부로 1군에 올라간 코치는 박한이, 강봉규. 김재걸이 담당하던 작전코치는 강봉규가 하게 되었다.[33] 2018년 0.384, 2019년 0.426, 2020년 0.474, 2021년 0.500, 2022년 0.525.[34] 보통 대부분 팀에서 2군 감독은 차기 감독에 유력한 후보군이 미리 감독 수업을 받거나 경험쌓기 용으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팀 내 코칭스태프 서열에서 2군 감독의 위치는 1군 수석코치와 같다. 보통 코치-수석코치-감독 혹은 코치-2군 감독-감독 순으로 승진이 되는데, 이미 삼성에는 외부영입으로 온 수석코치 이병규가 있고, 단장이 바뀌었지만 1군 코치진은 전적으로 박진만 감독에게 맡긴다고 이종열 신임 단장이 밝힌 만큼 삼성에서는 더이상 자리가 없을것으로 보여 자연스레 떠날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작년 최태원 코치의 사례랑 유사하다. 단장이 퓨처스리그는 본인 중심으로 개편을 하고 있기에 프로 후배긴 하지만 대졸로 나이가 더 많은 김재걸과의 불편한 관계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