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0:47:39

김재박

김재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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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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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0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1998 2000 2003 2004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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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수 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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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0ad67> 1982 1983 1984 1985 1986
오대석
삼성 라이온즈
김재박
MBC 청룡
김재박
MBC 청룡
김재박
MBC 청룡
김재박
MBC 청룡
<rowcolor=#d0ad67> 1987 1988 1989 1990 1991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장종훈
한화 이글스
김재박
MBC 청룡
장종훈
한화 이글스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rowcolor=#d0ad67> 1992 1993 1994 1995 1996
박계원
롯데 자이언츠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김민호
OB 베어스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rowcolor=#d0ad67> 1997 1998 1999 2000 2001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유지현
LG 트윈스
유지현
LG 트윈스
박진만
현대 유니콘스
박진만
현대 유니콘스
<rowcolor=#d0ad67> 2002 2003 2004 2005 2006
브리또
삼성 라이온즈
홍세완
KIA 타이거즈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손시헌
두산 베어스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rowcolor=#d0ad67> 2007 2008 2009 2010 2011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박기혁
롯데 자이언츠
손시헌
두산 베어스
강정호
넥센 히어로즈
이대수
한화 이글스
<rowcolor=#d0ad67> 2012 2013 2014 2015 2016
강정호
넥센 히어로즈
강정호
넥센 히어로즈
강정호
넥센 히어로즈
김재호
두산 베어스
김재호
두산 베어스
<rowcolor=#d0ad67> 2017 2018 2019 2020 2021
김선빈
KIA 타이거즈
김하성
넥센 히어로즈
김하성
키움 히어로즈
김하성
키움 히어로즈
김혜성
키움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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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환
LG 트윈스
오지환
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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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KBO 리그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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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도루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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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82 1983 1984 1985 1986
김일권
해태 타이거즈 / 53도루
김일권
해태 타이거즈 / 48도루
김일권
해태 타이거즈 / 41도루
김재박
MBC 청룡 / 50도루
서정환
해태 타이거즈 / 43도루
<rowcolor=#fff> 1987 1988 1989 1990 1991
이해창
청보 핀토스 / 54도루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 58도루
김일권
태평양 돌핀스 / 62도루
김일권
태평양 돌핀스 / 48도루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 56도루
<rowcolor=#fff> 1992 1993 1994 1995 1996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 44도루
전준호
롯데 자이언츠 / 75도루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84도루
전준호
롯데 자이언츠 / 69도루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57도루
<rowcolor=#fff> 1997 1998 1999 2000 2001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 / 64도루
정수근
OB 베어스 / 44도루
정수근
두산 베어스 / 57도루
정수근
두산 베어스 / 47도루
정수근
두산 베어스 / 52도루
<rowcolor=#fff> 2002 2003 2004 2005 2006
김종국
KIA 타이거즈 / 50도루
이종범
KIA 타이거즈 / 50도루
전준호
현대 유니콘스 / 53도루
박용택
LG 트윈스 / 43도루
이종욱
두산 베어스 / 51도루
<rowcolor=#fff> 2007 2008 2009 2010 2011
이대형
LG 트윈스 / 53도루
이대형
LG 트윈스 / 63도루
이대형
LG 트윈스 / 64도루
이대형
LG 트윈스 / 66도루
오재원
두산 베어스 / 46도루
<rowcolor=#fff> 2012 2013 2014 2015 2016
이용규
KIA 타이거즈 / 44도루
김종호
NC 다이노스 / 50도루
김상수
삼성 라이온즈 / 53도루
박해민
삼성 라이온즈 / 60도루
박해민
삼성 라이온즈 / 52도루
<rowcolor=#fff> 2017 2018 2019 2020 2021
박해민
삼성 라이온즈 / 40도루
박해민
삼성 라이온즈 / 36도루
박찬호
KIA 타이거즈 / 39도루
심우준
kt wiz / 35도루
김혜성
키움 히어로즈 / 46도루
<rowcolor=#fff> 2022 2023 2024
박찬호
KIA 타이거즈 / 42도루
정수빈
두산 베어스 / 39도루
조수행
두산 베어스 / 64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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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올스타 4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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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2위 3위 4위
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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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24위 25위
박철순 이만수 백인천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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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위 32위 33위 35위
이상훈 박정태 니퍼트 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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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20위 28위 31위
장효조 김시진 한대화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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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13위 18위 26위
이강철 정민철 정민태 조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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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17위 23위 36위
김태균 박재홍 박경완 홍성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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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위 37위 38위 39위
전준호 이순철 정근우 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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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15위 19위 22위
양준혁 박용택 이병규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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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29위 30위 40위
장종훈 김동주 심정수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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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8위 16위 21위
송진우 구대성 김용수 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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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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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 삼성

OF / 해태

OF / 삼성

SS / MBC

2B / 롯데

3B / 해태

P / 해태
''''''
1B / 빙그레
''''''
DH / 쌍방울
''''''
C / 삼성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타자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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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1993~2010)
2007년 / 2318안타
전준호
(1991~2009)
2008년 / 2018안타
장성호
(1996~2015)
2012년 / 2100안타
이병규
(1997~2016)
2014년 / 2043안타
홍성흔
(1999~2016)
2015년 / 2046안타
박용택
(2002~2020)
2016년 / 2504안타
정성훈
(1999~2018)
2016년 / 2159안타
이승엽
(1995~2017)
2016년 / 2156안타
박한이
(2001~2019)
2016년 / 2174안타
이진영
(1999~2018)
2017년 / 2125안타
김태균
(2001~2020)
2018년 / 2209안타
최형우
(2002~)
2021년 / 2323안타
손아섭
(2007~)
2021년 / 2416안타
이대호
(2001~2022)
2021년 / 2199안타
이용규
(2004~)
2022년 / 2076안타
김현수
(2006~)
2022년 / 2236안타
최정
(2005~)
2023년 / 2133안타
황재균
(2006~)
2023년 / 2040안타
강민호
(2004~)
2024년 / 2000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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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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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훈
(1986~2005)
2000년 / 340홈런
이승엽
(1995~2017)
2003년 / 467홈런
양준혁
(1993~2010)
2006년 / 351홈런
심정수
(1994~2008)
2007년 / 328홈런
박경완
(1991~2013)
2010년 / 314홈런
송지만
(1996~2014)
2010년 / 311홈런
박재홍
(1996~2012)
2012년 / 300홈런
이호준
(1994~2017)
2015년 / 337홈런
이범호
(2000~2019)
2017년 / 329홈런
김태균
(2001~2020)
2018년 / 311홈런
최정
(2005~)
2018년 / 495홈런
이대호
(2001~2022)
2019년 / 374홈런
최형우
(2002~)
2019년 / 373홈런
박병호
(2005~)
2020년 / 380홈런
강민호
(2004~)
2022년 / 319홈런
}}}}}}}}} ||
500도루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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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전준호
(1991~2009)
2005년 / 549도루
이종범
(1993~2011)
2009년 / 510도루
이대형
(2003~2019)
2017년 / 505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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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KBO 리그 투수 마일스톤 기록 }}}}}}}}}

보유 기록
통산 최다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1]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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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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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LG 트윈스
역대 주장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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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0> 1982~1983 1984 1985~1986 1987 1988
이종도
이해창 김재박 이광은 신언호
1989 <rowcolor=#fff> 1990~1991 1992~1993 1994~1995 1996
이광은 김상훈
김동재 노찬엽
최훈재
<rowcolor=#fff> 1997 1998 1999 2000 2001
노찬엽
김동수
송유석 김선진 김정민
양준혁 (오프시즌 기간 주장)
<rowcolor=#fff> 2002 2003 2004 2005 2006
서용빈유지현
이상훈 이병규 조인성 서용빈
<rowcolor=#fff> 2007~2008 2009 2010~2011 2012~2013 2014~2015
이종열 조인성 박용택 이병규 이진영
<rowcolor=#fff> 2016~2017 2018 2019~2021 2022~2023 2024
류제국 박용택 김현수 오지환
김민성 (임시 주장)
오지환김현수
<rowcolor=#fff> 2025~
박해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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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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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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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82년 ~ 2007년
<rowcolor=#b21528> 초대 (삼미 초대)
2대 (삼미 2대, 청보 초대)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김진영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1984~1985)
감독 대행
이재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rowcolor=#b21528> 2대 (삼미 2대, 청보 초대) 3대 (청보 2대)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
허구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
<rowcolor=#fff> 3대 (청보 2대)
4대 (청보 2대, 태평양 초대)
5대 (태평양 2대)
감독 대행
강태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
강태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감독 대행
임신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rowcolor=#ff9933> 6대 (태평양 3대)
7대 (태평양4대)
8대 (현대 초대) 9대 (현대 2대)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정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5)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2006)
김시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윗첨자1 : 김진영 감독이 1983년 중반 폭행 사건으로 인해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이재환, 이선덕 코치, 박현식 고문이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
1985년에는 18연패로 인해 신용균 코치가 임시로 대행을 맡았고 모기업이 청보로 넘어가자 다시 복귀했다.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LG 트윈스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0> 초대 2대 3대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어우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5)
<rowcolor=#ff0> 4대 5대 6대 7대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1987)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배성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rowcolor=#fff> 8대 9대 10대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6)
감독 대행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9)
이광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2001)
감독 대행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이순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6)
감독 대행
양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9)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박종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김기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4)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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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대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파일:LG 트윈스 원정 워드마크.svg
염경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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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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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998년~
초대
주성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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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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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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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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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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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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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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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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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조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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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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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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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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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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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이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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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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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7번
팀 창단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재박
(1982~1991)
김재현
(1994~2004)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7번}}}
송재박
(1991)
김재박
(1992)
유영환
(1993~1995)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0번}}}
박용진
(1988~1990)
김재박
(1993~2006)
결번
LG 트윈스 등번호 70번
김인식
(2006)
김재박
(2007~2009)
염경엽
(2010~2011)
}}} ||
}}}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99r74102.jpg
김재박
金在博 | Kim Jae-Bak
출생 1954년 5월 23일 ([age(1954-05-23)]세)[2]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중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초등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 73 / 학사)
신체 174cm, 75kg[3], B형[4]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MBC 청룡 창단멤버[5]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7~1981)
MBC 청룡-LG 트윈스 (1982~1991)
태평양 돌핀스 (1992)
지도자 MBC 청룡-LG 트윈스 플레잉코치 (1987~1991)
태평양 돌핀스 플레잉코치 (1992)
태평양 돌핀스 1군 수석·주루코치 (1993~1995)
현대 유니콘스 감독 (1996~2006)
LG 트윈스 감독 (2007~200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비코치 (200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주루코치 (200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3 / 2006)
경력 KBO 상벌위원 (2010~2011)
KBO 경기운영위원 (2010~2015)
KBO 규칙위원 (2010~2016)
KBO 경기운영위원장 (201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14~2015)
프런트 연천 미라클 자문위원 (2015~)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
가족 아내 정복희[6], 슬하 1남 2녀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대표팀과의 악연
4. KBO 경기운영위원
4.1. 2016 시즌
5. 여담
5.1. 만능 스포츠맨
6. 논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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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야구인.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前 감독이자 前 KBO의 경기감독관. 2015년부터 새로운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의 자문위원도 겸임하고 있다.

실업 시절 타격 전관왕[8]을 달성하는 등 야구계의 슈퍼스타로 이름을 알렸으며, 대한민국 유격수 계보에 빠질 수 없는 존재이자 KBO 리그 유격수 계보의 시작점이다. 80년대 MBC 청룡을 상징하는 선수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5차례나 수상하였다. 또한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으로서 네 번의 우승을 이루며 왕조의 시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9][10]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 중 하나인 개구리 번트의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또한 스포츠계에서 다재다능함으로 유명한 선수들 중 대표격으로 소위 공으로 하는건 다 잘하는 선수 유형의 원조이다.

2. 선수 경력

김재박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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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선수 경력: 김재박/선수 경력
아마추어 시절 실업 시절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MBC 시절 LG 시절 태평양 시절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977년, 1982년
}}}}}}}}} ||
MBC 청룡-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팀의 80년대를 대표하는 간판 선수로 여전히 회자되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이다. 실업 야구 스타 출신으로 30대에 접어들어 프로야구에 데뷔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였다. 다만 후에 감독으로선 아쉬웠다는 평이 많다.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재박/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영광의 현대 유니콘스 시절과 아쉬웠던 LG 트윈스 감독 시절로 요약할 수 있다.

3.1. 대표팀과의 악연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060721004008.261.0.jpg

두 번에 걸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3년 제2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대표팀 감독.
2006년 제15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대표팀 감독.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2003년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이어 대만에게도 패함으로써 '삿포로 참사'를 겪었고[11], 2006년에도 대만에 이어서 주로 사회인리그 출신[12]으로 구성된 일본팀에게도 패함으로서 '도하 참사'이란 말을 들었다.

부임할 때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임팩트가 상당한 흑역사를 만들어 냈으니 앞으로 대표팀 감독을 다시 맡는 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감독이 아닌 코치로썬 실적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대표팀 공모에 지원했으나 류중일이 선임되었다.[13]

4. KBO 경기운영위원

감독 임기를 끝내고, 바로 다음 시즌인 2010 시즌부터 KBO의 경기감독관 자리에 앉았는데 팬들에게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우천취소 결정에 있어서 욕을 많이 먹고 있는데 비가 안 와도 때려버리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해대고 있기 때문에 반발이 심하다. 오죽하면 고척 스카이돔에서 경기 열어도 관중 오기 불편하단 핑계를 대고 우천취소 때려버릴 양반이라는 말이 나올까.

쌓이고 쌓여서 2015년 6월 5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릴 경기를 비가 그쳤음에도 우천 취소를 때려버려 팬들의 원성을 샀고 급기야 SBS 스포츠에서 우천취소 메뉴얼까지 제안해가며 김재박을 깠다. 2015시즌 후반부 월요일 경기 및 더블헤더 임시 도입에 이 사람의 우천취소 남발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4.1. 2016 시즌

이런 팬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경기운영위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팬들의 분노가 더 커지고 있다. 거기에 개막 3일째인 4월 3일, 한화-LG와의 경기를 비가 그쳐가고 있는데 경기장 불량으로 취소를 해버려서 일요일 낮경기를 날려버린데다가 정작 경기시작시간인 2시에는 비가 그쳐버리면서 욕을 더 먹고있다. 결국 KBO에서 징계를 검토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막무가내 우천취소로 인해 이런 농담이 나올 정도.

2016년 4월 4일, KBO사무국이 김재박 감독관에게 6경기 출장 정지를 내렸지만, 야구팬들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전에 최동원 감독관이 비슷한 사유로 똑같은 징계를 받은 만큼, 이번에는 최소 20~30경기 출장 정지는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이후 동년 4월 16일 전국에 비가 내리자 광주구장에서 열리기로 한 넥센-기아 경기를 제외하고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30분-1시간정도 후 우천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김재박 경기감독관도 이날 삼성-두산전에 배정되었다가 45분 기다려 보고 우천취소를 선언했다. 솜방망이 처벌 문제는 둘째치고, 어느정도 경각심을 가지게 된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5월 10일에는 사직 넥센-롯데전에 배정되었으나, 부산 지역의 우천으로 인해 경기 시작 1시간 12분 전에 우천 취소를 결정하였다.

하도 여론이 안좋아서 김재박이 술을 즐겨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우천취소를 시켰다거나, 강제우취시키고 관계자들과 회식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야알못이 간다에서 자신은 술을 못하고 술자리 회식 루머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런 논란 때문인지 2016 시즌을 끝으로 경기감독관 직에서 물러났다.

5. 여담

  •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구광역시 토박이이지만 딱 한 번 대구를 떠난 적이 있었다. 경북중학교(현 경운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경북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대구 지역의 고등학교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체가 작았던 김재박은 경북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자 서울에 있는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 대광고등학교 자체는 건재하지만 야구부는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1975년 아시아 야구선수권 우승 당시 영남대생으로 배대웅, 강병철 등과 함께 내야를 보면서 주전 유격수였다. 우승을 확정 짓는 호주와의 경기에서 3회에 투수로 나서 9회까지 호투했다. 리그전으로 진행된 대회였는데, 그날 호주전에서 우승 확정을 위해 대표팀은 박상열, 이선희, 김호중 등 에이스급 투수를 총동원하였다. 그러나 투수진의 난조로 3회 4:1로 리드를 당하고 무사만루 위기가 계속됐다. 김계현 감독은 게임을 포기하고 마지막 자유중국 전에 대비해 유격수 김재박을 투수로 올렸다. 호주에 패하더라도 남은 자유중국 전에 승리하면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뜻밖에 김재박은 3회 무사만루 위기를 실점 없이 벗어났고, 이후 9회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김재박 대신 유격수로 기용되어 선발투수 타순에 배치된 8번 타자 조윤식은 2타점 역전 결승타를 날렸다. 당시 지명타자제도는 없었다.
  • 한국 야구계에 눈에 띄는 족적을 남긴 야구인이지만, 대체로 성격이 센 편인 스포츠인들 중에서도 성격이 굉장히 빡센 편으로 잘 알려져있다. 자부심 강하면서도 표현이 직설적이라 오해를 살만한 언행이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특히 감독이 되고나서 사람이 바뀌었다는 평도 있었는데 일례로 현대 유니콘스 창단 감독 겸 감독생활 첫 해였던 1996년에 오랫동안 팀이 정규리그 2위를 달리며 잘 나갈 당시, 스포츠서울에서 한 주간 프로야구의 뒷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주간방담 코너에서 김재박을 디스한 적도 있었다. 내용인 즉 타 구단 감독들이 입을 모아 '초짜 감독 주제에 팀 성적 좀 나온다고 눈에 뵈는 게 없다. 뭐 저딴 게 다 있냐' 는 식으로 뒷담화를 까는 감독이 있다는 내용인데, 김재박이라고 대놓고 지칭한 건 아니었지만 이 당시 초짜 감독이면서 팀 성적 잘나오는 감독은 김재박밖에 없었다(...). 당시 선배 감독들에게 이런 식으로 뒷담화를 까인 것도 문제인데 그걸 굳이 기자들이 지면으로 까발렸다는 건 기자들에게조차도 평이 안 좋았다는 뜻.
  • 선수 시절 때도 지금이랑 거의 변화가 없는 비주얼이라서 나이에 비해 매우 노안이었다. 1954년생이라서 성룡과 동갑이며 현대 유니콘스 감독 시절 때도 관록이 있어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겨우 40대 중후반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으며 현대에서 LG로 감독직을 옮길 당시 나이도 겨우 53세밖에 되지 않았다.[14] 다만, 나이가 든 이후에도 선수 시절 때의 외모 그대로라서 노안에서 동안이 된 케이스가 되었다.
  • LG감독 첫 해인 2007년 4월 22일 삼성전 2-3으로 뒤진 연장 12회말 2사 1루에서 이대형의 2루땅볼이 1루심의 오심으로 아웃 판정을 받자 엄청나게 분노해서 어필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며칠 내내 그 상황을 가지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심지어는 "설사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때로는 관중의 재미를 위해 세이프를 선언할 필요도 있지 않냐"[15]는 발언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심판 판정은 모든 팀에게 공정해야 적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오심도 불사하라는, 야구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망언이다.
  • 삼성이 한창 FA영입에 열을 올리던 시절 삼성처럼 돈으로 우승을 사면 누가 우승 못하나는 발언으로 삼성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든 전과가 있다. 그리고 2016년 FA와 용병의 영입으로 과감히 돈을 투자하고도 성적이 안 나오는 한화 이글스를 동시에 비판하는 명언으로 남았다. 사실 이 발언은 선동열을 겨냥한 것에 가깝다. 2013년에 와선 재평가받고 있는 김재박의 드립이다. 우승 못하고 556만든 이 사람은 뭐여 자아비판에 가장 가깝다. FA 영입만 없다 뿐이지 강탈급 현금 트레이드들로 모았던 막강한 초기전력을 생각하면...
  • 추신수에 대한 검증 드립 또한 야구팬들에게 조롱의 대상. 도하 아시안 게임 최종엔트리에서 결국 추신수를 빼버리면서 "추신수는 검증이 되지 않았다" 는 드립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추신수가 아무리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었다고 해도 타국에서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는 후배에게 덕담이나 위로는커녕(당시 추신수는 군면제를 위해 국제대회 출전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저런 말로 후배 기나 꺾는다며 대차게 까였다. 그 이후 추신수가 슬럼프에 빠지자 "거 봐, 아직 검증이 안 됐다고 했잖아." 라며 "추신수를 왜 안뽑았냐 하는 말은 야구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야말로 욕을 사서 먹는게 뭔지를 온 몸으로 보여줬다. 거기에 마지막에 '추신수 출신 고교 사람들이나 그 지역 사람들이 유독 유난을 떠는 것 같다' 라고 하며 지역감정 드립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본인 말대로 검증된 선수들을 뽑아 치른 아시안게임은 대만전 뿐 아니라 아마추어로 구성된 일본전까지 패배를 당하며 도하 참사를 야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박도 존재한다. 김인식 감독도 “기술적으로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보다 나을 게 없다”고 평가하며 대표팀 발탁에 반대한 만큼 추신수의 대표팀 탈락은 김재박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었으며, 당시 대표팀에 최종선발된 외야수는 이병규, 이용규, 이진영, 이택근, 박재홍 총 5명으로 김인식감독의 말대로 모두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외야수들로서, 추신수 대신 이들이 대표팀에 선발된것이 대표팀의 전력을 약화시켜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는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못한 반박으로서, 당시 추신수는 AAA에서 OPS .893 메이저리그에서 OPS .812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으로 온 어떤 용병타자보다 좋은 기록이었으며, 리그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OPS만 비교한다 해도 이택근을 제외한 다른 국가대표 외야수들보다 OPS가 더 높았다. 명백히 급이 다른 선수를 검증이 되지 않았다며 뽑지 않은 것이 맞다.
  • 여러가지 대기록을 망쳐먹기로 유명하다. 과거 현대 시절부터 시작된 행태로, 자세한 것은 맨 아래에 있는 항목 참조. 요근래 최대의 경력이라고 하면 2009 시즌 롯데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박용택의 타율 1위 수성을 위해 경쟁자였던 홍성흔을 4연속 볼넷으로 내보내는 업적을 남기셨다. 박용택이 출전하지 않은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뻔히 보이는 연속 고의사구는... 이 때문에 타팀팬뿐 아니라 언론사들에게도 까이는 중. 오죽했으면 1980년대로 돌아갔다고 할까. 그 예시로 김영덕을 들었을 정도.
  • 2009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 펜스거리 단축을 제안하고 구단 프런트가 이 요청을 들어주어 LG가 홈경기를 할 시에는 구장의 크기를 줄이는 X-존이 만들어졌다. 팬들 사이에서의 이름은 재박존 혹은 재박산성... 재빡존이라고도 언급한다. 쿠션 기능같은 건 전혀 없고 그냥 설치 제거가 쉬운 판때기 펜스일 뿐이었다.

    말이 많긴 했지만 홈런도 그럭저럭 나오고 일부 팬들은 만족한 모양이긴 한데, 여튼 2009년 시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재박산성이 설치된 경기에서의 LG 트윈스의 각종 공격 수치가 약간 상승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상대팀들의 공격력은 더 많이 상승했다는 게 문제... 그냥 2009년이 타고시즌이라서 리그 전체 타격이 올라온것일 뿐. 원정팀에 유리한 홈 어드밴티지였다는 비참한 결과를 낳은 희대의 쓰레기 전략으로 남고 말았다. 뭐, 거기엔 상대적으로 빈약한 LG투수진이 한 몫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 자신이 공들여 키운 박진만FA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자 그때부터 삼성을 대놓고 싫어했다. LG에 와서도 '라이벌은 삼성'이라고 말을 했으나 현실은 시궁창.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말도 아니다.김재박은 LG 감독 재임기간 내내 삼성전에서 총력전을 벌인 끝에 2008년~2009년에 삼성을 상대로 2년 연속 9승을 따냈고, 삼성은 만만한 LG에게 2년 연속 털린 것이 화근이 되어 이른바 멍게강점기라 불리는 삼성 역사상 두 번째 암흑기를 열어 4,4,5[16]라는 처참한 성적을 찍는 바람에 양 팀이 나란히 시궁창에 처박혔기 때문(...) 따라서 따지고보면 라이벌은 라이벌인데 삽질 라이벌(...)
  • 2008년 시즌 종료후 LG구단 자체 행사로 펼쳐진 역대 올스타 경기에서 현역 선수가 무색해질 만큼의 유격수 수비와 송구를 보여주어, 차기 시즌 LG 주전 유격수는 김재박이라는 LG팬들의 자조섞인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 역대 LG 트윈스의 감독 중에서도 매우 나쁜 성적을 거뒀지만 나름대로 프랜차이즈 스타라서 그런지 경질론과 재계약론이 비등비등했던 뭔가 희한한 감독이다. 결국 2009년 9월 26일을 끝으로 3년 계약이 만료되어 감독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엘지 팬...아니, 대한민국 야구 팬들한테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까이고 또 까이고 있다.

    그 내용이 걸작인데, 정리하자면 난 잘했는데 프런트가 못했고, 선수들이 잘 안따라줬고, 구단이 안밀어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나. 모든 책임은 내가 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이런 인터뷰. LG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팬들은 김재박이 앞으로 프로구단 감독을 맡기는 힘들다고 단언할 정도로 치를 떨었다. 이 와중에 묻힌 사실 중 하나는 이광은 전 감독 때부터 이어지던 LG 감독 임기 중 하차를 끝낸 인물이라는 것.

    그러나 후임 박종훈 감독 역시 빵빵한 지원을 받고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고, 선수들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기사가 늘어나면서 과연 LG가 부진한 것이 감독의 문제인가에 대해서 재고의 목소리가 늘어났다.
  • 선수 시절인 1986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시상자인 여배우 이보희가 유격수 수상자인 김재박의 이름을 김재이라고 부른 해프닝이 있다.

    '(넓을 박)'자를 '(전할 전)'자로 잘못 읽어버린 건데, 이 사건 때문에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이던 이보희는 곤혹을 치렀다. 요즘은 한자를 많이 안 쓰며 읽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때만 해도 한자를 많이 쓰고 읽었기에 한자를 읽고쓸 줄 알아야 유식하다고 평가받았다. 사실 아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손으로 쓴 글씨였다면 충분히 혼동할 수 있는 상황[17]인 것은 맞는데, 문제는 그렇게 넘어가기엔 김재박이 너무나 유명했던 것. 그래서 당시 굉장한 화제가 되었고 훗날 이계진의 저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 까지 소개된 바 있다. 당시 김재박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넓을 전할

두 글자를 확대해서 봐도 많이 비슷해 보인다. 여기서는 글씨체가 정자체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지만 아마도 흘려서 쓴 것을 보고 착각했던 듯 하다. 여담으로, 하카타역의 한자도 博을 쓰는데, 가끔 가다 傳多역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보일 지경. 사실상 국한혼용체가 사장된 이유다. 결국 이날 이후 같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수상자 명단은 철저히 한글로 표기되고 있다.# 유명한 해프닝이었기에 20년도 더 지나 김재박 본인도 이 김재전 드립을 써먹기도 했다.
  • 2012년 한화 이글스넥센 히어로즈가 감독을 잇달아 경질하면서 현장 복귀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러 언론들의 보도로 한화 이글스 감독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전구장과 한화 2군경기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것이 목격되면서 사실상 김재박으로 결정된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18] 하지만 한화 이글스김응용을, 넥센 히어로즈염경엽을 차기 감독으로 낙점지었다.
  • 2013년 kt wiz 창설로 또 다시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조범현이 그 자리를 가져갔다. 이후 사상 최악의 추락을 경험한 기아의 선동열, SK의 이만수 감독이 흔들리면서 기회를 찾는 듯 했지만 두 팀 모두 일단 감독의 임기를 지켜주기로 결정. 당분간 야인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2014 시즌이 끝난 후에는 감독 임기가 만료되는 팀이 3팀에다 도중하차 가능성이 있는 팀도 2팀이나 있어서 다시 얘기가 나오는 중. 그러나 기아는 일단 선동열의 임기를 2년 연장했다는 발표를 하고, SK는 김용희를, 한화는 김성근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는 발표가 나면서 야인 생활은 연장될 전망이다. 그리고 기아는 선동열이 팬들의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진사퇴를 하면서 또 얘기가 나왔으나 김기태가 선임되었다는 발표가 나면서 무산.
  • 허영만 화백이 그린 김재박 단편만화도 존재했었다. 소년중앙 별책부록으로 끼워준 단편만화책으로 그야말로 김재박이 그 당시 국딩들한테 어떤 위상이었는지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 제목이 <천재 야구왕 김재박>이었다.
  • 2014년 김시진 감독이 사퇴하자 박정태와 함께 롯데 감독 후보로 떠오르는 중이다. 다만, 일각에선 현대와 LG 시절부터 '초기 투자'를 많이 요구하던 김재박의 스타일을 들어 박정태 단독후보로 내세우면 욕먹을까봐 낸 구색맞추기 용 후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단은 이종운이 감독으로 선임되어 1년을 더 기다리게 됐다. 그래도 양상문 역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지 9년 만에 다시 LG 트윈스를 이끌었고, 김재박이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프런트가 시의 적절한 지원을 하는 구단의 감독이 될 경우 호성적을 기록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 2012 시즌이 끝나고 은퇴한 박재홍은 김재박을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았다. 이는 그럴만한 게 박재홍이 신인 시절부터 김재박 감독이 엄청나게 힘을 실어주며 주전 1번타자로 키웠기 때문이다. 2024년 박재홍의 유튜브 채널 '체육공단'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프로그램 막바지에 박재홍이 고마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 2013 시즌후 은퇴한 박경완도 김재박과 함께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의외로 김재박 감독을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았다.[20]
  • 경기 감독관으로 활동하면서 우천취소를 많이 시키는걸로 야구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다보니 클로저 이상용 690화에서 김재박을 패러디한 감독관이 우천취소를 하려다가 사무총장에게 슬리퍼 홀드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도 패러디 캐릭터로 특별출연한다. 우천취소를 쉽게 결정하는 모습을 반영하여, 요동전투 편에서 폭우가 내리자 철군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관구검이 대장이었을 때는 철군을 받아들이나, 사마의가 왔을 때는 철군 주장을 하자마자 바로 처형당한다(...).
  • 일본 야구만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아다치 미츠루가 대표작 H2에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를 오마주해 집어넣었다. 작중 에이쿄 고교의 3학년 포수 오구라 선배가 주인공 쿠니미 히로를 상대로 개구리 번트를 시전, 스퀴즈 성공으로 한 점 획득한다.
  • 후배가 운영하는 군월드라는 기업의 고문으로 있다고 한다. 기온이나 습도의 차이에 따라 투구나 타격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하며 이를 분석해 우천취소 야구에 과학을 접목시키고 있다고 한다.
  • 나름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이었지만, 요즘 야구팬들에게는 그냥 DTD라는 용어를 만든 아저씨 정도로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사실 왕조를 만든 현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LG에서는 선수로서는 팀의 얼굴마담이었으나 감독으로서는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지라 저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LG 구단 측에서도 이광환이나 김용수 등을 챙겨도 김재박은 챙기지 않는다. 차라리 백인천을 챙기면 챙겼지.
  • 1983년 4월 당시 롯데전에서 9회말 마지막 홈런으로 인해 당시 부산에 어떤 야빠 아재가 홈런 소리에 흥분해 입에 문 담배를 이부자리에 떨어뜨린 것도 잊고 텔레비전으로 달려간 통에 집안을 몽땅 태운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MBC 타임머신 12회(2002년 2월 3일 방송분)에 다루었다.

    LG 트윈스 선수시절 세제 광고에도 나오기도 했다... 광고에 나온 성우가 사오정 성우이다.
  • 선수 시절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그의 등번호 7번은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유격수라면 누구나 달고 싶어하는 번호가 되었다. 이종범, 박진만, 이범호[21], 김상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아 등번호를 7번으로 달았다.
  • 경향신문에 따르면 1984년 어린이들의 좋아하는 운동선수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인기와 명성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
  •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서정환이 현역 시절 라이벌로 지목했던 선수가 김재박이었다. 같은 유격수 포지션에 비슷한 나이에 올스타 선정 투표에서 항상 김재박에 밀렸다고 술회하였다.

5.1. 만능 스포츠맨

파일:attachment/김재박/만능스포츠맨.jpg

이제는 한국야구사에 7관왕은 2명이다. 실업리그의 김재박과 KBO리그에서 이대호가 각 1번씩 기록했다.[22]

그래서 그런지 야구계 인물치고는 특이하게 축빠라 카더라...[23][24]

김재박 감독 ‘축구도 전문가’
김재박 감독 비시즌엔 축구선수로 둔갑?
김재박 감독, 상암구장 찾아 '축구사랑'
김재박 감독의 '축구 강의'
농구·축구도 김재박 눈에는 야구로 보여
(2006 투혼) 김재박, "태극마크 달았으니 무조건 이겨라"

사실 대부분의 프로 운동선수들은 어지간하면 타 종목도 꽤 잘한다. 종목은 달라도 신체능력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 몸 쓰는 재능은 타고난 사람들이기 때문. 타 종목도 야구 룰도 모르는 타 종목 선수가 공 잡는 법만 좀 배우더니 야구공을 두어번만에 100km을 넘게 던진다던가[25] 하는 일화들이 흔한 편.

6. 논란

2006년 경 네이버 뉴스의 댓글이 개편된 이후 '위대한 김재박 감독님의 화려한 업적들'이라는 비아냥성 제목으로 뉴스 댓글란에 꾸준히 게시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글이 옛 리그베다 위키 시절 본 항목에 게시되었고, 이후 아래와 같이 정리된 상태이다.
  • 1998년 5월 14일 해태전, 이대진이 10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고 있을 때 11번째인 4번타자 김경기에게 번트를 지시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기록지에는 유격수 땅볼로 아웃된 것으로 나오고[28], 야구의 추억이라는 칼럼으로 유명한 김은식은 이대진을 주제로 한 칼럼에 번트를 댔다는 내용을 썼지만 후에 이대진과의 인터뷰에서 "갖다 맞추려는 스윙을 했지 번트는 아니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또 이대진 본인도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번트를 대려는 느낌은 못 받았다고 직접 말했다. 경기 영상의 부재와 김재박에 대한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거짓 사건. 현대가 "지금 우리팀은 10타자 연속 삼진을 당해서 신기록을 세워줬는데 더 이상은 안되겠다. 번트라도 대어서 삼진 기록만은 한번 끊고 가자" 라고 생각하고 번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김경기에게 번트를 지시한다? 그런 것은 상대방을 도와주는 꼴이다. 매경기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데 신기록을 체크하며 경기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감독이나 코치 선수들이 설마 연속 삼진기록을 외우고 다닐까?
  • 2000년 5월 19일 한화전, 박경완이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찬스였는데, 5번째 타석에서 교체했다. 당시 팀메이트 조웅천에 의하면 사실은 빈볼 우려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상대였던 한화 이글스가 이 한 경기에서만 10홈런을 쳐맞는 추태를 보이며 처참하게 격침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빈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29]
  • 2003년 8월 15일 삼성전, 현대의 박종호가 홈런, 3루타, 2루타를 기록하고 6-7로 뒤지던 9회 무사 2루에서 마지막일지 모르는 타석에 들어섰다. 이때 현대 벤치의 사인대로 희생번트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박종호-박용택 ‘아! 사이클링 히트’ 사이클링 히트가 진기록이지만 대기록까지는 아니고 이걸 밀어줘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 2000년 시즌 후반 박종호의 타격 1위를 굳히기 위해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5경기에서 박종호를 출전 제외했으며, 10월 12일 SK전에서 타율 2리 차이로 근소하게 추격하고 있던 틸슨 브리또에게 고의적인 몸에 맞는 공을 던져 부상시켰다. 결국 열받은 브리또는 "더러워서 타격왕 안 해먹는다" 라며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다음날 출국해버린다.
  • 2005년 KBO 올스타전장종훈 선수생활 마지막 KBO 올스타전이었는데, 당시 장종훈을 계속 기용하지 않다가 9회 마지막 투아웃 이후에, 그것도 원스트라이크 이후에 선수들과 팬들이 웅성거리니까 그제서야 마지못해 내보냄. 단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 2005년 올스타전은 장종훈 은퇴식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장종훈이 대타로 나간 타석은 본래 조인성의 타석이었다.[30] 당시 중계화면을 보면 김재박 감독도 옆에서 말하기 전까지 전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머쓱 웃으며 출장을 지시하는데, 그 표정이나 상황이 아무리 봐도 '마지못해서'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 경기를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KBO 역사의 한편을 장식한 거포를 은퇴식임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리고' 출전시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내보낸 것 이상으로 비판받을 일이다. 그런데 당시 기사에는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원문은 여기
극적으로 기회가 온 한화 장종훈(37)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올스타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장종훈은 16일 올스타전 6회부터 계속 헬멧을 쓴 채 덕아웃에 앉아있었다. 서군 김재박 감독으로부터 6회에 “9회에 나갈 준비를 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최근 몇년동안 언제 나갈지 모르는 대타 습관 때문에 헬멧을 벗지 않았다. 그러나 9회 투아웃까지 그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서군이 6-5로 뒤진 9회 2사 1·2루에서 조인성이 그대로 출장했다. 조인성이 아웃이 되면 장종훈에게는 더이상 기회가 없는 상황. 그런데 그 순간 덕아웃에서 의사결정이 빠르게 진행됐다. 또 다른 서군 포수 한화 신경현은 이날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출장하지 않기로 하고 조인성이 1회부터 8회까지 포수 마스크를 썼다. 조인성 타석에서 대타를 내면 동점이 됐을 경우 9회말에 뛸 포수가 없다는 것과 경기가 여기서 끝나면 장종훈에게 타석이 돌아오지 않는 것 사이에 고심하던 김 감독은 신경현에게 “뛸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신경현이 'OK'를 하자 볼카운트 1-0에서 재빨리 대타 장종훈을 외쳤다.(후략)

이 기사에 나온 내용이라면 원래 김재박은 9회에 장종훈을 넣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1사 1·2루였던 상황에서 병살타를 치면 그냥 경기가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은 사실.
  • 이 외에도 2000년 시즌은 특히 기록 밀어주기로 인해 시끄러웠다. 임선동, 김수경, 정민태의 등판을 조정해가며 결국은 3명 공동 다승왕을 만들어냈으며, 다승왕 나눠먹기라고 크게 비판받았다. 박종호 타격왕 밀어주려고 한 거야 위에 써져 있고, 박재홍의 타점왕 수성을 위해 10월에 들어서면서 득점 찬스 때마다 대타로 내보내 경쟁자였던 타이론 우즈훌리오 프랑코를 각각 4, 5점 차로 따돌리며 타점왕 수성에 성공시키는 등의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론상 강타자를 선발로 안쓰고 주자 있을 때만 투입하는건 팀의 손해기는 하나 반대로 그 이유가 아니면 굳이 대타로 쓸 이유도 없었다.
  • 그 외 박재홍 사건, 김동수 사건 등 사인 훔치기 논란에는 항상 김재박 감독이 있었음.[31]
  • 2005년, 롯데 자이언츠를 겨냥하여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는 명언을 시전.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데, 김재박의 명언은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아니고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이다. 기사 하여간 당시 2위던 모 팀은 5위로 시즌 마무리. 최근 나온 증언에 따르면 이 말은 그 롯데를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라, 현 시점에서 소속팀 현대가 최하위에 쳐져 있긴 하지만 일정 간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어떤 팀이 미끄러지는 순간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한다.
  • 2008년 5월 29일, 이재우야맹증 때문에 항상 쓰고 나오는 고글을 지적하였다.[32] 이 일로 흔들렸는지 그 해 방어율 1점대를 기록하고 있던 필승계투 이재우는 안타를 맞고 강판되었고, LG는 이와 같은 "감독님의 활약" 덕에 잠실 라이벌인 두산전 5연패를 그날 끊었다.
  • 2009년 박용택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안겨주기 위해 결장시키고 타격왕 경쟁상대인 홍성흔4볼넷으로 보내버리는 진상짓을 벌이고 말았다. 1984년 당시 타격왕이었던 삼성 이만수의 타율을 지키기 위한 홍문종고의사구 사건이 25년만에 다시 벌어진 셈. 지상파 스포츠 프로그램들은 이를 두고 졸렬한 플레이라고 하나같이 비난했으며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졸렬쥐' '졸렬택'이라는 별명이 만들어졌다.졸렬택 플레이어 결국 이 논란은 졸렬택이 은퇴 할 때 까지 사람들의 입에 놀아났다.

7. 관련 문서


[1] 박진만과 타이 기록이다[2] 양력 6월 23일[3] 네이버 프로필 기준[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7/01/2005070170220.html[5]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출전 관계로 프로 입단이 늦어지긴 했으나, 1982년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서 3경기를 소화한 만큼 입단 시기는 198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6] 1979년 2월 10일 결혼.[7] 현대 유니콘스 감독 시절 어떤 기자가 초반 롯데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한 말에 대답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8] 타격,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의 타격 전관왕을 하였고, 최우수 선수상, 신인왕, 타격삼관왕상을 포함한 8관왕으로 알려졌다.[9] KBO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우승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기도 하다.[10] 현역 말년이던 1990년 한국시리즈LG 트윈스 선수로 우승을 경험했고 1998년 한국시리즈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김재박 이후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모두 경험한 사람은 조범현, 선동열, 김태형, 이강철, 김원형,염경엽이범호. 이 중에서 조범현과 이강철은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해 본 유이한 사례다.[11] 덕분에 아테네올림픽은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듬해에 야구계를 뒤흔든 큰 사건이 터졌다.[12] 일본의 사회인 야구는 우리나라의 실업야구 수준에 해당하여 프로에 준하는 선수들이었다고 쉴드를 치기도 하나, 선수단 22명 중 프로에 진출한 선수는 8명이고, 프로에서 제몫을 한건 초노 히사요시 한 명 뿐이다. 1명 빼고 전원 프로였던 한국이 10점 주고 박살날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13] 실제 한국시리즈 우승으로는 류중일과 김재박 모두 4회 우승의 대기록을 가졌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김재박은 2009 시즌을 끝으로 감독으로서 물러나 야인으로서 상당히 오랜 공백을 가졌지만, 류중일은 2020 시즌까지 팀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장 공백이 그렇게 길지 않았었기 때문에 밀렸다는 평이 지배적이다.[14] 현 시점 기준으로 김태형, 염경엽, 이강철 등과 비슷할 나이다(...).[15] 사실 한미일 통틀어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오면 규정상 세이프다. 김재박 외에도 이 규정을 모르는 관계자 및 팬이 많은 편.[16] 이 5위 때문에 삼성의 13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기록은 물거품이 되었다. 만일 이 때 기록이 깨지지 않았으면 2016년 삼성은 20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야만없(...)[17] 그래서 당시 골든글러브 사회를 맡았던 이덕화도 이름을 정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분이 글씨를 상당히 흘려 쓰신 것 같네요...[18] 당시 한화 프런트는 김재박을 감독 단수 후보로 상부에 보고했지만, 수감중이던 김승연 회장을 대신해서 그룹 경영 총괄하던 장남이 무조건 최고를 데려오라면서 김재박 대신 김응용을 찍어서 지시했다는 카더라가 인터넷에 퍼졌다.[19] 풋케위키에 검색하면 심판 홍진호가 먼저 나오지만 동명이인에 들어가면 나온다. 참고로 심판 홍진호가 나중에 등록된 것이며, 프로게이머 홍진호가 1년 먼저 등록되어 있었다. 등록날짜가 2012220일이다! 풋케위키 홍진호 링크[20] 물론 박경완의 경우는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조범현을 호명했다.박재홍의 경우는 김재박을 제일 처음 호명.[21] 프로 초년기에는 유격수로 나왔다. 그러나 무수한 실책을 범하자 5년차 때 김인식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3루수로 고정되었다.[22] 다른 점이라면 이대호는 공격 8개 부문 중에 7관왕이다.[23] 사실 김재박은 2005년 상암 야구장 개조 드립 때문에 다른 축빠들에게 평판이 안좋다.[24] 야구선수들은 물론 운동선수들 중에도 축빠가 많다.[25] 사회인야구 에이스급 구속으로 일반인은 보통 아카데미 등에서 돈 내고 배우면서 몇 년 해야 도달하는 경지고 재능없으면 평생 해도 못 던지는 구속이다.[26] 8월 26일 당시에는 이승엽 36홈런, 우즈 29홈런이었다. 이후 우즈는 9월에만 11홈런을 치며 역전하게 된다.[27] 논외로 기사를 닫고 정면에 사진을 보면 깨알같은 옛 된 재일교포 출신 추성훈의 사진과 인터뷰가 있다.[28] 푸시번트로 살아나가려고 하지 않는 이상 유격수 땅볼 아웃이 나오는건 상상하기 힘들다.[29] 15년 후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데, 2015년 5월 26일 마산 대 두산전에서 에릭 테임즈가 3연타석 홈런, 그것도 투런 홈런만 한번 더 치면 되는 사이클링 홈런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나왔는데, 한 타석만 남겨둔 상황에서 7회 대수비 조평호로 교체된 것이다. 김경문 감독은 어차피 이긴 게임이었으니 이참에 후보선수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교체했다고 밝혔으며, 에릭 테임즈에게 2번을 물어봤는데 테임즈가 쿨하게 승낙해서 교체했다고 한다.[30] 조인성이 빠지면 감독추천이었던 신경현이 포수 마스크를 썼어야 했는데, 당시 신경현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출장하지 않기로 되어있었다.[31] 기존본엔 이대형사건도 있었는데 편집됨.[32] 고글 착용은 규정상으로 위반이나, 어쩔 수 없거나 별 이상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관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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