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55:27

이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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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다안타왕은 1990년부터 공식적으로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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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창단 이강돈
(1985~1997)
이종운
(1998)
한화 이글스 등번호 75번
최동원
(2001)
이강돈
(2003)
이철성
(2004)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이철성
(2007~2009)
이강돈
(2010~2012)
박흥식
(201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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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png
이강돈
李康敦 | Lee Gangdon
출생 1961년 2월 27일 ([age(1961-02-27)]세)
경상북도 포항시[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청림초 - 포항중 - 대구상고[2] - 건국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5년 1차 지명 (삼성)[3]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5~1997)[4]
지도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연수코치 (1998)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1999~2001)
한화 이글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03)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04)[5]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4)[6]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04)[7]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5)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7~2008)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2009)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0~2012)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3~2016)
충남중학교 야구부 감독 (2019~2023)
창원공업고등학교 야구부 타격코치 (2023~)
해설위원 대전MBC 해설위원 (2013(객원), 2017~?)
경력 KBO 육성위원 (2006)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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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설을 찾아] 빙그레 캡틴 이강돈, “원래 나는 삼성 선수였다” 上
[전설을 찾아] 이강돈, “준우승만 네 번, 선동열 못 넘었다” 中
[전설을 찾아] 이강돈, “한화는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 下

빙그레-한화 이글스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이글스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선수. 포지션은 외야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풍미한 선수다. 선수 시절 별명은 '깡통'이었다.

2.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8 ~ 1990)
파일:external/imgmmw.mbn.co.kr/F036FEE2-5250-4794-880C-C6725E4E8F4A.jpg
1985년 당시 신인 시절의 이강돈.[8]

오랫동안 빙그레-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충청도 출신인줄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포항 출신이다. 대구상고(1978년~1981년 졸업) 동기로 김용국, 이종두, 김성갑이 있으며 김용국과 이종두는 한양대로, 이강돈과 김성갑은 건국대(1981학번)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에 비해 대학에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1984 LA 올림픽 국가대표[9]로 발탁되는 등, 일약 대학 무대 최고의 톱 타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10]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대구 지역의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여기서 삼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지명해 놓고서는 이강돈에게 먼저 군대를 갔다 오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한 것. 다른 선수에게는 관대하게 입단 조건을 걸고서, 유독 자신만 군대를 걸고 넘어지는 것에 화가 난 이강돈은 전격적으로 빙그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드래프트의 질서를 해치는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갔다.[11]

왜냐면 당시 빙그레는 막 생긴 신생팀으로서 기존의 6개 구단들보다 전력이 한참 빈약했기 때문이었다.[12] 여기에 당시 빙그레의 초대 단장인 노진호는 바로 직전까지 삼성에서 프런트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삼성은 전관예우 + 신생 구단에게 선심쓰는 차원에서 무상으로 그의 지명권을 양도했다. 그래서 이강돈은 빙그레에 입단할 수 있었고,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드래프트 질서를 거부하고도 별 일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공개되었는데, 군대부터 다녀오라는 삼성 라이온즈의 요구를 거부한 이강돈이 다른 팀으로 보내 주기를 희망했고 놀랍게도 삼성 라이온즈가 신생 팀에 대한 예우 차원인지 빙그레 이글스에 조건 없이 지명권을 양도하여 보내 주는 대인배스러운 결정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강돈뿐만 아니라 중장거리형 1루수 강정길도 삼성의 지명권 양도로 빙그레에 입단했다.
파일:/image/410/2013/12/31/20121231_1356882517.jpg_59_20131231070212.jpg
1987년 8월 27일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후.[13]

빙그레에서 이강돈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데뷔 첫 해 .297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빈약했던 빙그레 타선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 비록 신인상은 MBC 청룡의 에이스로 급부상한 김건우에게 내줬지만, 이강돈은 빙그레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정훈, 장종훈, 강정길, 이중화 같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신생 빙그레는 일약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리며 프로야구를 풍미하기 시작했고, 막강 해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빙그레는 결국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며 1988, 1989,[14]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했고, 1992년에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고도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면서 또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셨다. 당시 이강돈은 모두 출전했고, 이강돈이 은퇴한 시기가 1997년이니 이강돈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시리즈 우승은 못 했지만, 선수 시절 이강돈은 1번 이정훈의 뒤를 받치는 강한 2번 타자로서 맹활약했다. 1990년에는 .335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6사6홀 차이[15]한대화에게 밀려 타격 1위를 놓쳤고,[16] 1992년에는 다시 .320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래도 이강돈 본인은 타율보다 안타에 더 애착을 가졌던 만큼, 타격왕을 놓친 것에 큰 아쉬움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 시즌 막판 한대화 등과의 타격왕 경쟁에서도 마음만 먹었다면 타율 관리 명목으로 쉴 수도 있었지만,[17] "정정당당히 승부하겠다"면서 이를 사양했다. 대신 그 해 이강돈은 최다 안타 1위를 차지했고, KBO 리그 역사상 최다안타 부문에서 정식으로 시상을 받은 첫 주인공이 되었다.

안타 제조기로서 그의 의욕적인 타격은 구질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이른바 '마구잡이 타법'이라고 불렀다. 이후 LG 이병규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배드볼 히터였던 셈이었다. 심지어 원바운드 된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든 적도 있다.

어쨌거나 빙그레의 주축으로 매년 10개 가량의 홈런을 기대할 수 있고, 3할 근처의 타율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 결과 이강돈은 두 차례 최다 안타 1위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KBO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12.jpg
1997년 은퇴식을 앞두고 찍은 사진.

이강돈은 1992년의 최후의 전성기를 끝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슬럼프에 빠지고, 여기에 여러 부상이 겹치면서 조금식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벅지, 무릎, 어깨가 아프고 점차 그 자리를 신인들이 메우면서 이강돈의 입지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결국 199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하기에 이른다.

특이한 기록도 두 가지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1987년 8월 27일 OB전에서 수립한 프로야구 통산 2번째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다.[18] 그런데 이강돈은 전날 저녁, 다음 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만 믿고 밤새 술을 들이붓고 고주망태가 되었는데, 정작 경기 당일 비가 오기는 커녕 쨍쨍한 날씨인지라 정상적으로 경기가 거행되었다. 당연히 숙취에 찌들어 고통스러워하던 이강돈은 대충 휘두르고 죽자는 생각으로 출장했지만 뜻밖에도 홈런에 2루타, 번트 내야안타, 3루타를 차례로 때려내며 대 기록을 작성하였다. 나중에 이강돈은 사이클링 히트 기록에 대한 소감으로 "술기운이 남아서 공이 수박만하게 보이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19]
파일:/image/410/2013/01/01/20130101_1357020324.jpg_59_20130101153505.jpg
1993년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이강돈.[20]

다른 하나는 1993년 올스타전 MVP 수상인데, 원래 팬투표로 선발되지 못해 추천 선수로 나갔지만 1회 홍현우가 2루타를 치고 부상당하면서 대주자로 투입되고, 이후 타석에서 홈런까지 날리며 맹활약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베스트 10 외의 선수로 올스타전 MVP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 또 하나 기록할 만한 점은 바로 징크스인데, 현역시절 장타력을 올리기 위해서 노팬티로 출전한 것이 유명하다.

3.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pds.joinsmsn.com/200812260853591101_1.jpg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지도자로는 평가가 영 좋지 않다.

은퇴 후 다이에 호크스에서 연수를 받고 한화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한화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그 뒤 청주고 감독도 잠시 역임했다가 롯데 자이언츠로 건너가서 타격코치로 재임했다. 그러나 프로구단 코치로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 시즌 종료 후에는 이정훈 前 북일고 감독이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에 선임되면서, 그의 후임으로 북일고 감독에 선임되었다.

2013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올라가 지역 라이벌인 공주고와 맞붙었는데, 0:4로 끌려가던 중 상대 선발김훈호의 볼질로 한점차까지 따라간 상황에서 뜬금없는 스퀴즈를 지시했으며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다.[21]

2014 시즌 중 정수근과의 인터뷰에서 한화의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표시했다. 한화의 약점으로 마무리의 부재를 꼽았는데, 당시 한화는 마무리를 정하지 못하고 박정진, 윤규진 등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2016년 10월 말에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에서 물러나고, 대전MBC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기존의 여정권[22] 해설과 로테이션으로 담당하게 되었으며 2019년 충남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으며 일선 지도자로 복귀했다. 이후 교사 정년 만 62세가 경과하자 퇴임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빙그레 104 347 .297 103 14 6
(2위)
10 36 42 11 41 .458 .370
1987 106 369 .268 99 13 4 3 42 42 4 29 .350 .321
1988 103 377 .313 118
(3위)
26
(1위)
3 4 56 57 8 27 .430 .355
1989 120 464 .295 137
(1위)
24
(3위)
4 9 66
(3위)
67
(2위)
12 35 .422 .342
1990 117 436 .335
(2위)[23]
146
(1위)
20 6
(3위)
16
(4위)
84
(3위)
81
(1위)
12 51 .518
(3위)
.400
(5위)
1991 114 385 .265 102 15 5 11 55 49 7 42 .416 .335
1992 121 403 .320
(5위)
129 27
(5위)
8
(4위)
13 60 73 7 42 .524 .379
1993 108 348 .233 81 18 0 6 33 31 11 37 .336 .303
1994 한화 108 309 .278 86 15 0 4 46 33 8 35 .366 .348
1995 105 290 .248 72 20 2 4 40 29 4 31 .372 .319
1996 96 229 .240 55 10 0 6 35 26 3 32 .362 .331
1997 15 22 .182 4 0 0 1 3 3 1 2 .318 .250
KBO 통산
(12시즌)
1217 3979 .284 1132 202 38 87 556 533 88 404 .420 .347

5. 관련 문서



[1]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항시 태생이다. 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보냈다.[2] 53회 졸업생이며 김용국, 김성갑, 이강돈, 이종두가 동기다.[3] 지명권 양도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4] 1985년은 빙그레 구단의 정식 창단이 이루어지지 않고, 법인만 설립되어 2군 리그 참가[5] ~6월 29일[6] 6월 30일~8월 5일[7] 8월 6일~[8] 왼쪽에 있는 선수는 현 KNN 야구 해설위원인 이광길, 가운데는 박상조 코치, 오른쪽이 이강돈.[9] 이 당시에는 야구는 시범종목이었다.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것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10] 건대 1년 후배인 차동철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대학 시절 이강돈에게 많이 맞았지만 지금도 가깝게 지내고 있으며 이강돈은 '연습을 많이 하지 않고도 운동을 잘 했던 선배'라고 지칭했다. 건국대에 광주일고 선배가 없던 차동철을 김성갑이 많이 챙겨주었다고 덧붙였다.[11] 그렇긴 한데, MLB에서 스캇 보라스의 유명세를 알린 loop hole FA사건 원인이 드래프트 지명 후 15일 안에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의무 불이행이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인 만큼, 삼성 측이 계약하지 않고 군입대를 제안한 것이 의무 불이행으로 해석될 가능성 때문에 법적 공방 들어가도 이강돈에게 승산이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12] 원년 참가 팀들을 제외하고, 1군 첫 시즌을 보낸 팀들 중 최저승률 기록을 갖고 있다.[13]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고 받은 사사키 제품의 배트 세 자루와 KBO에서 준 황금배트를 들고 이강돈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14]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이강돈이 해태의 선발인 당대 최강 선동열을 상대로 선제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승리의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4경기를 차례로 패해 우승을 놓치면서 빛이 바랬다.[15] 반올림하면 0.3349로 모 단위까지 똑같았다.[16] 한대화 0.334928, 이강돈 0.334862.[17] 불과 1년 전에 팀 동료 고원부가 이런 방식으로 삼성 강기웅을 이기고 타격왕을 차지한 바 있었다.[18] KBO 1호 사이클링 히트는 1982년 6월 12일 삼성 라이온즈 오대석이 기록했다.[19] 비슷한 경우로 오시타 히로시가 있다. 이쪽은 무려 7타수 7안타. 그리고 37년 후, 롯데 자이언츠나균안이 이를 따라하려다 망했다[20] 이글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다.[21] 공주고는 김경문이 활약하며 MVP로 선정됐던 1977년 이후 36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이었다. 이 날 경기는 월요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진행되었으며 공주고 동문인 손혁, 박정배, 조동화가 와서 관전했다. 박찬호는 아예 덕아웃 옆에 있었다.[22] 현직 체육교사(체육학 박사)[23] 당시 타격왕이었던 한대화의 0.334862의 기록에 소수점 아래 6번째 자리까지 계산한 결과, 0.000066 차이로 아쉽게 2위로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