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0:46:29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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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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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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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1번
홍광천
(1995)
전병호
(1996~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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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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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kt wiz|kt wiz]] 등번호 80번}}}
팀 창단 전병호
(2014~2016)
이광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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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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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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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3 장원삼 · 14 류택현 · 17 전병호
19 정대현 · 22 한기주 · 47 권혁
51 류제국 · 61 박찬호 · 99 류현진
포수 26 박경완 · 44 조인성
내야수 2 김민재 · 3 고영민 · 7 박진만 · 8 정근우
10 이대호 · 18 김동주 · 31 이현곤
외야수 1 장성호 · 9 이병규 · 29 이택근
39 이종욱 · 53 이대형 · 69 민병헌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김경문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김기태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광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선동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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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003/2007/07/25/NISI20070725_0004871335_web.jpg
<colcolor=#000> 전병호
田炳浩 | Jun Byoung-Ho
출생 1973년 3월 23일 ([age(1973-03-23)]세)
충청남도 예산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칠성초 - 경상중 - 대구상고 - 영남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96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6~2008)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코치 (2009)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투수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12)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투수코치 (2013)
kt wiz 불펜코치 (2014)
kt wiz 1군 불펜코치 (2015~2016)[2]
kt wiz 2군 투수코치 (2016)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3)[3]
병역 공익근무요원 (1999~2001)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
3.1. 삼성 라이온즈 코치 1기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2기3.3. kt wiz 코치
4. 피칭 스타일5. 여담6. 연도별 성적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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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10승을 거둔 시즌이 단 2시즌 뿐이었고 스타급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130km/h대 직구라는 느린 구속으로도 뛰어난 제구력과 완급조절로 프로에서 활약을 하면서, 유희관과 함께 흑마구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는 투수다.

2. 선수 경력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1992학번) 재학 시절 대학 야구에서 에이스로 활약했고, 1996년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신인답지 않게 제구력, 완급조절 능력 등이 뛰어나고 최고구속 140km/h대를 찍을 수 있는 좌완 투수로 기대받았다.

데뷔시즌인 1996년, 전체가 리빌딩을 진행한 덕분에 본인 역시 많은 기회를 부여받아 39경기 출장(선발 15경기)하여 108⅓이닝 동안 탈삼진을 87개나 뽑으면서 4승 7패 방어율 2.65를 기록했다. 사실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세부지표를 보면 ERA+가 142.5에 sWAR도 2.71이나 될 정도로 준수한 활약을 해냈다.

데뷔 2년차였던 1997년 시즌은 전병호 본인에게 있어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시즌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발투수로 자리잡아 팀 역대 토종 좌완 가운데 데뷔 후 3년 이내 10승 고지를 밟은 투수로 5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고[4], 8월 1일에는 부산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원정 경기에서 개인 통산 처음이자 마지막 완봉승을 거뒀으며, 데뷔 후 2년차 만에 포스트시즌 경험까지 했었기 때문이다.[5] 하지만 이 해 10승은 리빌딩에 성공한 타선의 도움도 컸던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4.93의 방어율은 리그 평균에 못미치는 수준(ERA+ 84.0)에 sWAR도 1.10 뿐이었다. 더불어 대학시절 혹사의 여파로 구속 하락이 나타나고 있었다.

97년 9월 3일 LG전, 전병호는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으로 출전해 LG의 4번 타자 심재학과 승부하게 된다. 김영진과의 배터리를 이룬 이 경기에서, 벤치에서 변화구 사인을 냈음에도 정면승부를 선택해[6] 결국 홈런을 맞았다. 백인천 감독이 왜 사인대로 안 던지냐고 질타하자 전병호는 사인대로 던진 거라고 말대꾸를 했고, 이에 격분한 백인천 감독은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 뇌출혈이 발병해 병원행, 이후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다.[7]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뭇 팬들에게 삼성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던 백인천 감독이었기에, 속칭 '백인천을 보내버린' 이 사건으로 전병호는 삼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거기에 낮아져가는 구속과 성적, 새가슴 기질, 1차 지명자라는 점까지 합쳐져 '저 놈은 투수도 아니다', '저 놈이 올라오면 경기 보기도 싫다'[8]는 말이 따라다니는 비호감 선수로 전락했다.

1998년부터는 가끔 땜빵선발로 나오면서 중간계투로 시즌을 보내나 성적은 영 신통치 못했다. 결국 1999년 시즌 종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고, 공익 복무를 마친 뒤 2001년 6월 중순 복귀했다.#. 스타 플레이어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고 등판하기만 하면 오만 욕은 다 들어먹는 전병호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잃어버린 구속 대신 컨트롤을 피나게 연습하였고 결국 느린 구속에 완급조절로 승부하는 방식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는 2002년 한국시리즈였다. LG와의 시리즈 전적 1승 1패 상황 때 3차전에 흔히 말하는 '바람잡이 깜짝 선발'로 낙점됐을때만 해도 당시 삼성 팬들은 경기를 포기했을 정도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4이닝 무실점으로 깜짝 호투하여 막아 내고[9] 배영수에게 마운드를 넘겨 준 경기다. 그 경기 이후부터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에는 데뷔 초창기 처럼 선발과 불펜을 넘나드는 전천후 투수로 활약했고, 2004년 시즌을 앞두고 부임한 선동열 당시 수석코치에 의해 시즌 중반부터 선발투수로 자리잡았다.[10] 특히 이 시즌에 롯데전 상대 10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로나쌩 클럽의 회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후 선동열이 감독으로 부임한 뒤로는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베테랑 투수로 활약했다. 그러면서 2005~2006년 팀의 2년 연속 통합우승으로 우승반지도 2개 더 따낸 것은 덤. 2006년 시즌에는 134이닝 10승 8패를 거줘 지난 1997년 이후 9년만에 두 자릿 수 승수를 올렸고, 개인 커리어 2번째이자 마지막 10승을 거두기도 했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고, 2년 총 9억원에 삼성과 재계약했다.[11]

2007년 한국 나이 35세의 노장으로 접어드는 황혼기에도 32경기 출장(선발 25경기)하여 137⅓이닝 동안 8승 8패 2홀드 방어율 4.06을 기록하며 여전한 관록투를 보였고, 커리어 두번째로 좋은 1.79라는 sWAR을 남기기도 했다. 07시즌 영상 게다가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 대표팀 5차 예비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시리즈 전적 0:1로 밀리고 있는 중에 준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정민철과 맞대결을 펼쳐 한화 타선을 상대로 3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다.

팀은 비록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라고 쓰고 류현진에게 막혀 빠르게 가을야구를 마감했지만 전병호는 이 호투를 바탕으로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발탁,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심지어 일본전 선발투수로 예고되며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다.#[12] 다만 실제 경기에서는 2⅓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3실점(2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했고, 최소한 3이닝 정도를 무실점으로 막아 주기를 원했던 코칭스태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은퇴 시즌이었던 2008년에도 선발과 중간 가리지 않고 나와 던졌으며, 외인투수 둘 다 폭망하여 시즌 도중 퇴출한 이후 어렵게 4강 싸움을 하던 중 7월 24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열린 기아와의 원정경기에서 무려 117개의 공을 던져 8⅔이닝 동안 5피안타 2볼넷만 허용하며 2실점(비자책)을 하는 대호투를 펼치기도 했다. 사실 8회까지 4피안타 1볼넷만 허용하면서 거의 완봉승 문턱까지도 왔었으나 9회 말 기아의 정규시즌 마지막 공격 때 선두타자를 대수비로 들어왔던 김재걸이 송구 실책을 하면서 2루까지 내보낸게 결국 화근이 되면서 완봉에는 실패했지만 팀은 13:2로 대승함과 동시에 순위를 4위로 재진입하게 만든 1등공신이 되기도 했었다.# #

최종 성적 6승 6패 방어율 4.99를 거둔 2008년, 시즌 종료 후 FA 계약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더 이상 그의 흑마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종료 직후 선동열 감독에게 은퇴 권고를 받았으며, 그의 느린 직구에 어울리지 않게 이틀만에 은퇴라는 빠른 결정을 내렸다. 지인 100명에게 물어봐서 많은 쪽을 따르기로 했는데 20명째까지 전부 '은퇴하라'고 권유해서 그냥 결정했다고. 본인은 흑마구라는 말이 싫었다고 한다. 배번은 채태인에게 넘겼으며, 2009년 4월 5일에 대구 시민구장에서 구단 역사상 4번째로 공식 은퇴식을 가졌다.#

3. 은퇴 후

파일:external/file.osen.co.kr/200911261007271101_1.jpg
은퇴 후 코치 시절

3.1. 삼성 라이온즈 코치 1기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1군 불펜코치로 선임되었다. 한편 그의 손에서 흑마구의 계승자가 나올 지 주목받고 있다. 덧붙여 차기 로나쌩 클럽 , 엘나쌩 클럽회장직도 누구한테 넘겨줄지 롯빠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2009년 4월 5일 그의 은퇴식이 열렸는데, 시구자로서 흑마구를 마지막에 장식했다.

2010년에는 잔류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가 시즌 후 재계약이 불발되며 삼성을 떠났다. 대신 2군에서 개X태한김태한이 올라와서 불펜코치가 되었고, 김태한이 맡던 2군 코치는 성준 코치가 맡는다.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2기

2011년 한 해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2 시즌부터 다시 삼성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2013년에는 3군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시즌 도중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역할도 맡게 되었는데, 그 에스마일린 카리대가 거하게 망하고, 먹튀가 되자 비판을 받았다.

다만 전병호가 비판받는데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원래 외국인선수 영입담당이었던 이충무가 2013년 시즌 중 삼성을 떠나 kt wiz로 옮기는 바람에 스카우트 팀에 공백이 생기자 코치였던 전병호가 갑작스레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겸직하게 되었던 사정도 있다.

3.3. kt wiz 코치

2013년 11월 신생팀 kt wiz의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불펜코치. kt가 2군에서 조정기를 거쳐 2015년부터 1군에 진입하자 1군 불펜코치가 되었다.

2016 시즌 종료 후 조범현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코칭스태프가 대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kt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대구로 내려와서 전 삼성 우완투수 이상훈과 함께 중구 남산1동에 아마야구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피칭 아카데미를 열었다.

4. 피칭 스타일

<nopad> 파일:흑마구장인.gif
125km/h의 패스트볼
<nopad> 파일:전병호완급조절.gif
129km/h - 133km/h - 137km/h - 126km/h 완급조절

'흑마신', '음지의 에이스' 등 그를 칭하는 별명처럼 느린 공으로도 활약을 했던 흑마구 투수로 유명하다. 가장 느린 때는 구속 114km/h를 찍었다고. 그런데도 선동열 감독은 '컨트롤만 되면 OK'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입단 후 초기 한정으로는 흑마구 투수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140km 이상을 찍을 수 있었던 투수였으며 그래서 속구 로케이션을 높게 가져가 뜬 공을 양산하는 플라이볼형 투수였었다. 이후 부상[13] 그리고 영남대 시절부터 누적되어 왔던 혹사로 인해 망가져 130km/h대의 패스트볼을 구사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말았고, 이때부터 느린 공으로 상대를 농락하고 땅볼을 유도하는 투수가 되었다.

느린 공으로 타자를 상대했던 또다른 투수였던 성준과 비교하면, 성준은 인터벌과 투구 템포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던 반면 전병호는 '직구 - 느린 직구 - 좀 더 느린 직구 - 매우 느린 직구 - 가장 느린 직구'[14][15]를 던지는 식이었다. 즉 속구의 구속 차이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은 뒤 '몸쪽 꽉 찬 137km/h 속구'를 결정구로 간혹 삼진도 뽑아가며 타자들을 농락하는 식.

구속 차이 외에도 공의 실밥을 하나만 걸쳐잡는 원심과 아예 실밥을 안 잡고 던지는 무심 등 공의 그립 차이로 인한 변화도 주곤 했다. 이외에는 싱커, 커브 등의 변화구를 주로 구사했다. 더불어 강심장으로도 유명했는데, 현역시절 "만루가 투수만 부담스럽나? 타자도 부담스럽지"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땅볼 유도율이 타 투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그 때문에 팬들은 '흑마신은 주자가 있을때 더 보기 편하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견제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투구보다 견제구가 더 빠르다'라는 말도 했을 정도.

매 등판 후 경기를 복기했다. 그 날 자신이 던진 100개의 공의 구질, 코스를 모두 기억한다고 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타자의 타격 자세만 봐도 자신의 어떤 구질을 노리는지 안다고 하니 심리전에도 상당했던 모양.

로나쌩 클럽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4년 롯대전 상대전적이 6경기 동안 3승 1홀드 ERA 1.89를 시작으로 2005년 4경기 동안 2승 ERA 3.38에 2006년도 사직 야구장에서는 5경기나 등판하여 20⅔이닝을 소화하면서도 2승 1패에 ERA가 0.87일 정도로 롯데 팀 타선은 전병호만 만났다 하면 도통 힘을 못쓰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2006년 9월 5일, 홈에서 맞이한 롯데를 상대로 2이닝 동안 11피안타(1피홈런) 2볼넷 12실점이라는 도무지 믿기 힘든 모습을 보이며 이를 끝으로 로나쌩 클럽의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래서 2006년 롯데전 상대전적 자체는 8경기 동안 3승 2패 ERA 4.75 였으나 이후에도 2007년 롯데전에서만 5경기 등판하여 2승 1패 ERA 3.04라는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물론, 로이스터 매직으로 리빌딩과 성적을 모두 잡기 시작하던 2008년의 롯데를 상대로도 4경기 동안 2승 2패 ERA 5.12[16]을 기록하면서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롯데한테는 승수를 올릴 정도였다.

5. 여담

이승엽의 사인을 잘 흉내낸다고.#

파일:attachment/전병호/b1.jpg

파일:attachment/전병호/b2.jpg

파일:attachment/전병호/b3.jpg[17]
※ 그가 어떤 투수인지, 흑마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림들

파일:attachment/전병호/b4.jpg
전병호의 리즈 시절로 유명한 사진. 하지만 이 사진에 찍힌 구속은 조작이다.[18]

선수 초창기 시절인 1997년에 싸인 문제가 생겨서[19] LG의 심재학에게 쓰리런을 허용하자 백인천 감독에게 뺨을 맞았는데, 이 사건은 백인천이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병호가 삼성 팬에게 2002년 이전까지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 여담으로 백인천은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 열이 뻗쳤는지 뇌출혈로 쓰러지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후 백인천은 감독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석코치 조창수가 임시감독으로 시즌을 마친 이후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그후 다시 롯데 자이언츠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일성 해설위원은 같은 팀 대선배이자 레전드 좌완투수 권영호와 투구 폼과 스타일이 흡사하다며 자주 비교하곤 했다.

전병호 역시 1973년생 92학번 황금세대의 일원으로 임선동, 박찬호, 박재홍, 차명주 등의 선수들과 동갑내기이다. 다만 이 때 다른 팜에서는 대어가 쏟아져 나오는데 대구경북 팜만 유일하게 망하는 바람에 내세울 선수가 전병호밖에 없었다.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네임드가 딸리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전병호는 대구경북 팜을 대표하는 에이스였고, 대학시절 한미 대학야구 친선전에 선발되는 등 엄연한 국가대표 출신이었기에 1차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 대구경북 팜이 망했던지라, 국가대표 신인으로 입단하긴 했지만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정도의 전국구급 네임드 선수는 아니었을 뿐더러 처음에는 입단동기 최창양이 더 푸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전병호는 1차 지명자로서의 품격을 보여주듯 1996년 입단한 삼성 대졸선수 중에서는 두 번째로, 프랜차이즈로는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선수였다.[20] 은퇴하는 2008년까지 12년 간을 활약하며 마운드를 떠받치는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당시엔 30대 중반에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딱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을 때 은퇴한 셈이기도 했다.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삼성 39 108⅔ 4 7 0 0 0.364 2.65 89 5 69 87 35 32 1.36
1997 35 131⅓ 10 8 0 0 0.556 4.93 138 14 75 76 81 72 1.55
1998 47 87⅔ 6 4 1 0 0.600 5.34 86 17 49 64 57 52 1.53
1999 44 71⅓ 3 2 0 0 0.600 5.68 90 11 28 39 49 45 1.64
2000 군복무(공익근무)
2001 34 40 3 1 1 1 0.750 4.95 46 5 20 15 24 22 1.65
2002 43 62⅔ 3 0 2 4 1.000 3.88 71 10 19 35 30 27 1.34
2003 45 102 8 4 1 6 0.667 5.03 110 13 39 54 59 57 1.44
2004 21 60 5 2 0 2 0.714 4.20 60 9 25 34 31 28 1.38
2005 29 104⅔ 6 5 0 0 0.545 4.39 110 16 34 51 60 51 1.35
2006 35 134 10 8 0 2 0 556 3.90 146 10 52 65 69 58 1.44
2007 32 137⅓ 8 8 0 2 0.500 4.06 148 11 45 39 71 62 1.38
2008 27 83 6 6 0 0 0.500 4.99 104 8 33 20 49 46 1.63
KBO 리그 통산
(13시즌)
431 1122⅔ 72 55 5 17 0.567 4.43 1198 127 488 579 615 552 1.4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7년 3완투 1완봉
KBO 리그 통산 3완투 1완봉

7. 관련 문서


[1] 1992학번[2] 2015년 5월 2일~6월 1일까지는 외국인을 물색하러 출국한 전병호를 대신해 윤형배 2군 투수코치가 대행.[3] 후술하겠지만 잔류군 투수코치와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겸직했다.[4] 권영호, 이선희(이상 1982년), 성준(1986년), 김태한(1993년), 전병호(1997년), 그리고 최채흥(2020년)이 6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5] 특히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선발 김태한이 4⅔이닝 동안 투구수 87개를 기록하고 2실점 하면서 부진한 탓에 5회 2아웃 상황부터 구원등판하여 9회까지 무실점 분투한 것과, 이틀 뒤 열린 3차전 9회 말 1아웃 상황에 ⅔이닝을 무사히 마무리지어 포스트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6] 현대에 와서는 김영진이 사인을 잘못 전달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이미 못 하는 포수로 당시에도 구단의 속을 썩이고 있었으니만큼...[7] 결국 플레이오프에 겨우 올라갔던 팀은 시리즈 전적 2:3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으며, 전병호 역시 5차전에 김영진의 어이없는 포구미스를 시작으로 구원을 실패하고 패전투수가 되며 1997년의 가을야구도 끝났었다.PO 5차전 하이라이트38초 쯤 포같새의 어처구니 없는 장면만 봐도 왜 삼성이 이후 포수수집에 열을 올렸는지 알 수 있다.[8] 심지어는 팬들로부터 젬병호, 염병호, 전병신 등등... 수많은 욕 별명들이 붙어다니기까지 하며 욕을 여러차례 얻어먹었다고 한다.[9] 5회 첫 타자였던 이종열에게 안타를 맞고 배영수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배영수는 승리투수가 되었다.[10] 불펜투수로서 다른 후보들보다 구위가 안 좋았고 몸이 빨리 풀리는 스타일이 아니여서 불펜보다는 선발이 체질상으로도 맞았다. 더군다나 경기운용 능력도 개선되면서 다른 4~5선발 후보군보다 기복이 적은 이유들 덕분에 선발로 중용될 수 있었다.[11] 이 당시 삼성은 전병호를 포함해 김재걸, 진갑용 등 팀 내에서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을 모두 일찌감치 잔류시켰다.[12] 심지어 전병호 선발건과 관련해 위장오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자세한건 이 문서기사를 참고.[13] 특히 무릎 부상. 오랫동안 쪼그려 앉을 수 없다고 한다.[14] 이 말은 실제로 진갑용이 인터뷰 중에 언급하기도 했고 스스로도 자신의 구질에 대해 저렇게 얘기했다.[15] 이 말 자체는 사실 1960년대 메이저리그 투수였던 스투 밀러에 대한 평에서 나온 말이다. 자세한 것은 야구 명언 참조.[16] 특히 롯데 타선 상대로 피홈런은 단 하나도 없었다. 패전을 먹은 경기조차도 5이닝에서 아웃 카운트가 하나, 둘 정도만 못잡았을 뿐, 은퇴 시즌에도 여전히 로나쌩의 모습을 보여준 편이었다.[17] 왼쪽부터 성준 선수, 전병호 선수, 임동규 선수이다.[18] 실제 이 '플래쉬백' 프로그램을 보면 152km/h가 아닌 125km/h가 찍혀 있다.[19] 물론 포수가 김영진인 거를 감안해야 한다.[20]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선수는 정경배로 전병호 은퇴 1년 후인 2009년에 은퇴했다. 고졸 포함으로는 당시 전성기였던 정현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