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21 17:22:36

이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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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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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2번
강만식(1989) 이태일(1990~1997) 김영진(1998~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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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태일(李太逸)
생년월일 1967년 4월 9일
출신지 경상북도 경주시
학력 경주고 - 영남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지명 (삼성 라이온즈)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90~1997)

1. 소개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시절
2.2.1. 좌절과 복귀
2.3. 은퇴
3. 기타4. 연도별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던 언더핸드 투수. 동글동글한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양일환 - 진동한 - 김성길 - 이태일 - 박충식 - 김현욱 - 권오준 - 심창민 등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잠수함 투수 계보를 잇는 선수 중 하나. 그러나 병마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비운의 투수.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경주고 시절에는 팀 전력이 떨어졌고 이태일도 그저그런 무명선수였다. 영남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데다 아버지의 병으로 집안 형편마저 어려워지며 이리저리 방황하며 야구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이태일이 대학 2학년 때 영남대에 성낙수 코치가 새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태일의 가능성을 발견한 성낙수는 이태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며 그를 집중 조련했다. 게다가 단순히 코치로서 기술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이태일에게 이따금씩 용돈도 쥐어주기도 하는 등, 당시 이태일의 선배들은 성낙수에게 너무 이태일만 편애한다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성낙수는 이태일을 아꼈다고 한다.[1] 또한 성낙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장명부를 인스트럭터로 초빙해, 이태일의 지도를 맡겼다. 이태일은 장명부에게서 수싸움이나 볼배합 등을 배워 더욱 성장했다.

성낙수장명부의 지도로 이태일은 대학 4학년인 1989년, 당시 대학 선수 중 최다승인 9승을 올리고 평균자책 2.66을 기록했다. 비록 당시 영남대 전력이 약해 대회 우승은 못했지만, 대륙간컵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2.2. 프로 시절

1990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500만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했다. 당시 신인선수 중 박동희, 김동수, 김경기 다음으로 거액이었다.

삼성에선 이태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1989년 선수협 파동 후 에이스 김시진을 롯데로 트레이드하고, 대신 데려온 최동원을 겨우 설득해 삼성 유니폼을 입히긴 했지만 그는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었고, 권영호도 1989 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이제 2년차가 되는 류명선 외에는 이렇다 할 투수가 없었기 때문. 김성길김상엽도 있었지만, 김성길은 나이가 꽤 있었고 김상엽은 겨우 2년차 신인에 1989년 성적도 그저 그랬다.[2]

그러나 이태일은 1990 시즌 초반에 5경기 동안 3패만 기록하고 2군으로 강등되었다. 속구와 슬라이더 투 피치에만 의존한데다, 구속을 올리려고 무리한 투구 폼을 구사하다 늑골까지 다쳤기 때문.

이태일도 삼성 투수진에 활력소가 되지 못하나 했지만, 2군에서 권영호 코치와 마티 코치에게서 싱커를 배우며[3] 180도 달라져 1군으로 복귀했다. 7월 13일 롯데를 상대로 프로 첫 승을 거두고, 8월 12일 태평양전까지 8연승을 기록했다. 특히 8월 8일에는 롯데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9이닝 4탈삼진 3사사구 투구수는 116구였다. 프로 통산 6번째이자, 역대 신인 중 최초였으며, 삼성 선수로서는 최초의 노히트 노런이었다. 이후 삼성의 노히트 노런은 무려 29년이나 지나서야 덱 맥과이어가 두 번째로 기록하게 된다.

파일:attachment/leetae11993.jpg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나서.

시즌 최종 성적은 13승 6패 평균자책점 3.50.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것이나 8연승 기록에 시즌 성적까지 좋아 삼성 최초의 신인왕 수상을 노릴만한 성적이었으나, 신인임에도 주전 포수를 맡으며 팀의 정규시즌 1위에 기여한 LG김동수가 신인왕을 수상했다.

비록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91년 10승, 1992년 13승을 올리며 당당하게 삼성 투수진의 한 자리를 확고히 해갔다.

2.2.1. 좌절과 복귀

그러나 1993년, 1994년 두 시즌 연속 10승에는 실패했다. 구위가 노출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혈전증[4] 때문. 결국 1994년 9월 7일 태평양 전을 끝으로 1군에서 모습을 감췄다.

사실 이러한 부진은 김성근 감독이 김성길과 더불어 이태일을 선발 불펜 안가리며 미친듯이 굴린 것도 있으며 특히 이태일은 혈전증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5]

혈전증이라는 병마와 싸우며 1995 시즌을 통째로 재활로 보냈다. 삼성에서는 이태일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방출시키려 했으나, 이태일은 연봉 25% 삭감을 감수하면서 삼성에 남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96년 4월 16일 홈 개막전에서 선발로 등판했다. 7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 비록 패전투수가 되었지만 무려 1년 7개월만에 등판에서 기록한 성적이라 그의 복귀에는 청신호였다. 이후 현대전에서도 선발로 나서 6⅓이닝 동안 2실점을 하며 퀄리티 스타트, 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지만 병을 앓았다는 기색이 없는 듯 점점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5월 5일 쌍방울과 더블헤더 2차전 때 구원투수로 등판해 마침내 승리투수가 되었다. 무려 1년 9개월만의 승리. 그 다음 등판이었던 한화전에서는 선발승을 거뒀다.

2.3. 은퇴

1996 시즌이 끝나고 혈전증은 끝내 이태일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고, 전지훈련지에서 재활을 하다 장딴지 부상을 얻으며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다 혈전증 증세가 더 악화되자 1997년 6월, 결국 은퇴를 선언하며 마운드를 떠났다.

현재는 개인사업을 하며 사회인야구팀 감독을 맡고 있다고 한다.

3. 기타

  • 나이가 어린 야구팬들은 어째 이쪽이랑 연관지어서 부르는듯 하다(...) 아무래도 야구게임으로만 이름을 접해봐서인 듯. 그래서인지 프로야구 매니저마구마구 덱리뷰글에 이태일이 등장하면 "태일아~"드립을 치는 사람들이 꽤 많다(...)
  • 포철공고에 재학중인 아들이 있는데, 이름이 이승엽...

4. 연도별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0 삼성 22 113 13
(5위)
6 0 0.684
(공동 4위)
3.50 95 4 43 45 48 44 1.15
1991 31 126 10 10 3 0.500 4.64 137 18 31 31 68 65 1.31
1992 27 154 13 7 1 0.650 2.86
(4위)
140 7 47 52 60 49 1.19
1993 16 70⅓ 4 3 0 0.571 3.97 68 4 35 25 32 31 1.37
1994 21 128 6 10 0 0.375 3.38 120 6 42 60 56 48 1.22
1995 1군 기록 없음
1996 12 45⅔ 2 3 0 0.400 6.50 62 8 22 17 34 33 1.69
KBO 통산
(7시즌)
129 637 48 39 4 0.552 3.81 622 47 220 230 298 270 1.27




[1] 이후 이태일도 프로 선수가 된 후 성낙수를 자신의 평생 스승이자 친형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2] 결과적으로는 김상엽도 1990 시즌에 10승이 넘는 기록을 세우며 일약 삼성의 에이스 중 한명으로 떠올랐다.[3] 이전 문서에는, 2000년도 이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들은 싱커를 기본적으로 구사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80-90년대의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들의 기본 구질은 오른손 타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몸쪽 싱커와 바깥쪽으로 흐르는 변화구였고, 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그 투수 실력의 '바로미터'였다. 오히려 2000년대에 들어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가 적어지면서 싱커를 구사하는 투수가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싱커 자체가 습득하기 어렵기도 하고 부상의 위험이 높은 구질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2000년대의 대표적 중간계투 요원이었던 조웅천의 경우, 싱커 구사가 어려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서클 체인지업을 몸쪽으로 구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바 있다.(체인지업이 워낙 좋아 싱커로 오인받았으나, 본인이 체인지업이라고 한 바 있다) 80-90년대에 싱커를 잘 구사한 대표적인 언더핸드 투수는 한희민, 박충식. 한희민은 큰키에서 솟아오르는 직구와 싱커로 이름 높았고, 박충식(사실 팔 높이는 사이드암과 언더핸드의 중간 정도)은 그 당시 언더핸드 투수로는 보기드문 140대의 직구와 엄청난 각을 자랑하는 슬라이더 그리고 오른손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싱커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통산 성적에서 언급한 두 명보다 우위인 이강철은 싱커보다는 커브와 솟아오르는 직구가 주무기 였으며, 임창용은 무지막지한 뱀직구를 가지고 있어 아예 싱커를 던지지 않았다.[4] 혈액의 일부가 혈관 속에서 응고되는 데다 무리할 경우 심장에 이상이 올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병이다.[5] 이걸 김성근 감독 만의 잘못으로 보기 어려운게 당시 야구계에서는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였고 다른 구단들에도 좀 잘한다 싶으면 굴렸다. 이러한 폐해는 2000년대 들어서야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