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2 12:59:13

김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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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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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p4rcEr.png KBO 포스트시즌
1997 플레이오프 MV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93 KBO 리그 탈삼진왕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0번
박동경(1983~1988) 김상엽(1989~1999) 박영진(2000~2002)
LG 트윈스 등번호 60번
류택현(1999) 김상엽(2000) 김세중
NC 다이노스 등번호 79번
팀 창단 김상엽(2012~ )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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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No.79
김상엽(金相燁 / Kim sang-Yeop)
생년월일 1970년 5월 11일 ([age(1970-05-11)]세)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대구수창초 - 경복중 - 대구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89~1999)
LG 트윈스 (2000~2001)
지도자 영남대학교 투수코치 (2003~2010)
NC 다이노스 투수코치 (2011~2012)
NC 다이노스 1군 불펜코치 (2013~2016)
NC 다이노스 1군 투수코치 (2017)
NC 다이노스 2군 투수코치 (2017)
NC 다이노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8~)

1. 소개2. 선수 생활3. 투구 스타일4. 이야깃거리5. 은퇴 이후6.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던 투수로 등번호는 30번. 같은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 프랜차이즈 스타인 배영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삼성의 대표적 에이스 투수였다. 현재는 NC 다이노스의 투수코치다.

전성기인 199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에서 1년에 몇 차례나 최고구속 150킬로가 넘는 이른바 광속구를 던진 세 명[1]중 한 명이다.

별명은 만딩고[2], 격년제 에이스. 장원삼이 짝수 해에만 강했다면 이 선수는 홀수 해에만 강했다.

특히 해태한테 유독 강해 달구벌 폭격기라는 별칭도 있었다.

이승엽, 양준혁 등과 함께 1990년대 삼성 라이온즈의 주요 선수 중의 한 명이었으며,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 투수였던 정민태와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2. 선수 생활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06331_STD.jpg

파일:attachment/김상엽/cf.jpg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

촉망받던 고졸 강속구 투수였다. 최고구속 140km/h만 넘어도 강속구 투수 소리를 듣던 1980년대 후반에 최고 구속 150km/h에 근접한 강속구를 뿌렸으며, 강속구와 함께 당시에는 희귀했던 낙차 큰 파워 커브를 주무기로 타자를 농락했다.

1989년에 데뷔한 그는 당시 투수코치였던 미국인 마티 드메리트에게 파워 커브를 전수받고, 한 해 내내 다듬은 끝에 1990년에 선발과 구원을 오고 가면서 12승 18세이브 ERA 2.81의 성적으로 그해 삼성 마운드의 명실상부한 주축을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고졸 출신의 활약이 드물었기에 더욱 인상적인 성적이었다. 그러나 1년 전의 프로 데뷔 때 이미 많은 이닝을 던졌기 때문에, 1990 시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인왕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참고로 이 해의 신인왕 후보로는 김상엽의 팀동료 투수인 이태일이 노히트노런 등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신인왕은 팀 우승 버프를 받은[3] LG 트윈스포수 김동수가 차지하게 된다.[4]

1990년에 너무 굴려진 탓인지 1991년과 1992년에는 신통치 않은 성적을 냈다. 특히 1991년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어느날 술에 취해 한밤중에 숙소에돌아온 룸메이트가 곤히 잠들어 있는 김상엽의 발을 밟는사고를 냈다. 다행히 예상보다 회복이 빨라 4월 5일 시즌 개막전에는 나설 수 있었지만 이후에 일종의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과 유사한 증세가 생겨 격년제 에이스라는 달갑지 않은 딱지가 붙게 되었다. 1992년에는 선발과 마무리를 번갈아 맡았는데 당시 세이브 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마무리를 맡은 것 치고는 평균자책점이 높았다.

1993년에는 시즌 13승에[5] 탈삼진 170개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탈삼진왕[6]에 올랐다. 해태 타이거즈와의 1993 KS 1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이닝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하면서 그때까지 1:0으로 앞서가며 본격 삼성 라이온즈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연패를 끊는가 싶었지만 6회 1사 이후 제구력이 나빠지면서 연속으로 볼넷을 내주고 류명선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만다. 결국 해당 경기에서는 안타까운 패배를 남겼지만, 4차전에서는 다시 등판해 복수에 성공한다. 자세한 내용은 1993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1995년에는 본인의 시즌 최고 성적인 17승을 거두며 김상진과 함께 다승 공동 2위에 올랐다. 1997년에도 12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김시진, 이선희 등 삼성의 역대 에이스들이 포스트 시즌만 되면 부진의 늪에 빠져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 것과는 달리, 김상엽은 예외적으로 큰 경기에 아주 강했던 투수였다. 포스트 시즌에서 거둔 성적이 무려 7승. 그러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동료 투수들이 포스트시즌만 되면 나란히 죽을 쑤는 바람에 가을 무대에서 그 엄청난 성적을 거두고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 차례도 맛보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특히 1997년 포스트시즌 준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상대로 2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올라왔고 0:2 상황이었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LG 트윈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그 해 포스트시즌에서만 3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 기세로 5차전 5회까지도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이미 그의 어깨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6회말 선두타자 동봉철의 번트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출루를 허용한 뒤 다음 투수 전병호에게 마운드를 넘긴다. 그리고 전병호와 그의 후속 투수 성준이 8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하며 순식간에 역전. 1997년 삼성의 가을야구와 함께 김상엽의 포스트시즌 4승도 그렇게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에이스' 김상엽의 모습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투수진이 열악한 소속 팀 삼성의 특성상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무리한 투구로 혹사당한 결과 어깨/허리 부상으로 1998년 이후 전력에서 이탈했다. 1999년에는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고 재활에만 전념하다가, 12월 삼성 라이온즈김동수를 FA로 영입하면서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에 이적하게 된다. 보상 선수로 지명된 당시 김상엽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적 소식을 듣고 숟가락을 내던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팀을 위해서 온 몸 바쳐서 열심히 던졌는데, 그에 대한 결과가 부상과 다른 팀으로의 이적이었으니...... [7]

LG 트윈스로 이적한 후 절치부심하여 재활을 마치고 2000년에 복귀하여 그 해 4월 9일 잠실에서 친정 팀인 삼성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으나, 3이닝 4실점으로 조기 강판 당하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한화 전에 등판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해 6월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2001년에는 또 다시 어깨 부상이 찾아오면서 결국 마운드로 돌아오지 못한 채 LG에서 6.2이닝/2패만 기록한 후 그 해 9월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승수는 78승.

선수 생활은 허무하게 끝났으나, 성준, 박충식, 김태한 등과 함께 1990년대 중반의 암흑기를 누비던 삼성 라이온즈를 온몸으로 지탱한 등불같은 존재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팀을 위해 열심히 고생한 이 선수들은 모두 허무하게 삼성을 떠났다. [8]

3. 투구 스타일

주 무기는 최고 152km의 묵직한 직구와 130km대의 파워 커브로, 전형적인 정통파 강속구 투수였다.

과거에 대한 과장과 허풍이 섞이면서 1990년대에도 150킬로를 던지는 투수가 흔했던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시즌 투구 최고구속 순위를 매기면 145킬로를 넘는 투수가 채 6,7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이상훈이 150킬로를 펑펑 뿌린것처럼 구라를 늘어놓는 추억팔이들이 있으나, 실제 이상훈은 프로시절 딱 한차례 150킬로를 던졌을 뿐, 마무리로 뛸때도 시즌 최고구속은 147~8 정도 였으며 구대성이 부상에서 본격적으로 복귀한 96년 153킬로를 던져 세간의 화제가 되었음을 감안하면, 91년도에 이미 박동희와 함께 마음먹으면 150킬로를 넘길 수 있던 유이한 투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선동열의 경우도 어깨이상의 조짐과 함께 팔의 각도가 좁혀지며 내려오며 시즌 최고구속이 146~7 정도까지 떨어져 있었고, 1992년을 결국 어깨건초염으로 통째로 날린다. 그러다 1993년에 마무리- 지금으로 치면 중무리-로 복귀, 153킬로의 광속구를 선보이며 재기에 성공했다.

또한 그의 파워 커브는 그 당시 구사하는 투수가 거의 없어서 마구급의 위력을 보였다. [9]

당시 각 팀의 웬만한 선발투수들은 최고구속 140킬로를 채 못던지는 선수가 다수였고, 보통 제구력이 뒷받침되면 135~138 정도의 직구 스피드로도 충분히 타자를 상대해 왔는데, 김상엽의 파워커브는 최고 137킬로까지 나올 정도로 왠만한 투수의 직구만큼의 속도로 날아오다 수직으로 뚝 떨어지는 그야말로 마구였다.

그 위력을 가장 잘 보여준 경기가 1993년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으로, 파워 커브가 워낙 잘 들어가서 LG 타자들은 거의 공략하지 못하였고 결국 겨우 볼 93개(!)로 1안타 완투승을 거두었다.1993년 플레이오프 삼성 vs LG 1차전 관련 뉴스 영상. 1990년대 초반에는 직구와 파워 커브만을 우직하게 던졌지만, 허리 부상이 심화된 1990년대 중반에는 파워 커브의 조준점을 낮춰 포크볼처럼 사용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 외 우리나라에서 컷 패스트볼을 거의 처음으로 실전에서 사용한 선수이기도 했다.

선수시절 마운드에서 잘 흥분하는 것이 단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실제로 야수의 에러가 나오거나 볼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화 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진짜 열받으면 혼자 공을 공중에 살짝 던졌다가 받기도 하였다. 본인도 그때는 편협적이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과는 달리 제구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통산 1073⅔이닝에 591사사구가 제구 매우 좋은거라고?

4. 이야깃거리

1990년대에는 당시 보기 드물게 야구 선수로서 삼성물산의 패션 사업부[10]에스에스패션의 신사복 빌트모아 TV CF에도 출연하였을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돈 없기로 유명한삼성 라이온즈에서 최초로 연봉 1억원을 돌파한 선수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1996년 선동열 이후 7명의 억대연봉자가 등장했는데 그중 한명이다. 그 만큼 삼성에서 김상엽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병규의 홈런성 타구를 강동우가 캐치하다가 펜스 사이의 틈새에 끼어서 골절상을 입었던 1998년 플레이오프 2차전 당시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가 김상엽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는 김상엽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기가 되었다.

선발로 등판했을 때 1회 초구의 스트라익 여부가 그날 경기를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왠지 이 분이 생각난다 그만하면 상대 1번 타자는 1회 초구를 노릴 법도 하지만, 전성기 때는 볼이 워낙 좋았으니...

한 가지 불명예 기록이 있는데, 투수 한 경기 최다실책이 그 기록.1990년 4월 8일 인천 태평양 전에서 3실책을 저질러 작성했는데, 금민철이 2014년 6월 25일 타이를 작성하면서 재발굴되었다.

5.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야구와 잠시 거리를 두고 살다가, 2003년 1월 삼성 라이온즈마무리 투수였던 권영호 당시 영남대학교 감독의 제안으로 영남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2010년까지 재임했다. 201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이승엽, 박찬호가 소속된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11] 15년 만에 삼성 코치진으로 다시 돌아온 올드 스타 강기웅처럼, 그도 머지 않아 다시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길 많은 삼성 올드 팬들은 기대하였다.

그러나 2011년 10월 10일에 최일언 코치와 함께 NC 다이노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2011년 인터뷰 대구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이재학 등의 NC의 신예 선수들에게 구질을 전수하는 등 1군 불펜 투수코치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토종 선발들의 부진으로 인해 2017년 5월 20일 부로 2군 투수코치로 강등당했다.

2018년부터는 NC 다이노스 D팀(재활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아들한테 선수들을 못가르쳤다고 구박받았다 카더라.[12]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삼성 24 57⅓ 2 5 0 - 0.286 4.40 58 3 59 31 37 28 2.01
1990 44
(3위)
160⅓ 12 6 18
(3위)
- 0.667 2.81 114 12 90 110 60 50 1.20
1991 36 99⅓ 6 6 7 - 0.500 4.62 87 10 73 62 60 51 1.55
1992 41 144 8 12 15
(2위)
- 0.400 4.19 125 9 75 103 71 67 1.36
1993 36 181⅓ 13 6 8 - 0.684 2.58 150 8 82 170
(1위)
64 52 1.25
1994 7 24⅔ 2 2 0 - 0.500 4.74 23 3 17 21 13 13 1.58
1995 27 191⅔
(5위)
17
(2위)
7 0 - 0.708
(3위)
2.30
(4위)
140 12 75 132 53 49 1.06
1996 8 21 3 1 0 - 0.750 3.86 11 2 18 22 9 9 1.24
1997 25 150⅔ 12 6 1 - 0.667 3.35 128 12 73 82 59 56 1.26
1998 8 36⅔ 3 3 0 - 0.500 5.40 38 5 23 17 24 22 1.50
1999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LG 2 6⅔ 0 2 0 0 0.000 10.80 12 1 6 2 8 8 2.70
KBO 통산
(12시즌)
258 1073⅔ 78 56 49 0 0.582 3.39 886 77 591 752 458 405 1.32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0 2완투 0완봉
1991 1완투 0완봉
1992 5완투 1완봉
(10위)
1993 6완투 3완봉
(5위)
1995 9완투
(3위)
2완봉
(6위)


[1] 마무리 시절의 선동열, 박동희, 그리고 김상엽.[2] 1975년에 개봉한 명작영화로 흑인노예를 다룬 영화다. 얼굴이 검은 편이라서 이런 별명이 붙었으며, 해당 별명은 마구마구에서도 전용 잠재력으로 구현되어 있다.[3] 1990년 시즌 MVP, 신인왕 결정을 위한 기자단 투표는 한국시리즈가 벌어지기 전에 했다. LG의 정규시즌 우승에 대한 기여를 말하는 거라면 대략 맞을지도 있겠지만.[4] 아이러니하게도 김동수는 1999년 시즌 후 FA 자격으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으며, 김상엽은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되었다.[5] 4월 10일 개막전(VS 쌍방울)에서 17-0 완봉승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개인 최다점수차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6] 물론 그 이전에도 탈삼진 1위를 기록에 남기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탈삼진왕을 시상하게 된 것은 1993년이 처음이다.[7] 지금이야 삼성이 프랜차이즈 스타는 물론 가족을 초청하는 등 외국인 선수도 잘 대우해 주고 삼성 트레이닝 센터를 통해 부상/재활 선수들에게도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나, 당시의 삼성은 쓸모없다고 판단된 선수는 가차없이 내치는 그런 구단이었다. 김상엽 이전의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시진, 장효조, 강기웅, 김성래, 이만수도 그랬고, 김상엽과 함께 암흑기를 버텨낸 박충식도 결국 김상엽과 비슷한 시기에 부상을 입어서 재활 도중 FA로 영입된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된다.[8] 김상엽은 김동수의 보상 선수가 되어서 LG로 가서 2001년에 은퇴, 박충식은 이강철 보상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해 2003년에 은퇴, 김태한김기태, 정경배, 김동수와 묶여서 SK로 이적 후 2003년에 은퇴한다. 성준 역시 1999년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다.[9] 구사하기 상당히 어려운 구질로, 한국프로야구를 통틀어서 파워커브를 제대로 의미있게 구사한 투수는 김원형, 이대진 그리고 요즘의 김진우 정도이다.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김상엽은 지도하던 선수들에게 전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한 바 있다.[10] 에스에스패션은 1999년 제일모직에 합병됐다.[11] 박찬호가 오릭스와의 계약 조건 중 하나가 대한민국에서 뛰고 있는 아마추어 코치 중 한 명을 오릭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에 여러 후보군 중 최종적으로 김상엽이 선택되었다. 이로 인해 김상엽은 박찬호와의 인연을 맺게 되고, 그 인연은 후에 박찬호의 공주고 선배인 김경문 감독이 있는 NC 다이노스의 창단 투수코치로 임명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김상엽은 삼성시절에도 김경문과 3년간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12] 의외로 결혼은 좀 늦게 한 편이다. 막 코치 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