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5 17:13:03

김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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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형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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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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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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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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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2006 2007~2008 20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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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민 박정권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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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48번
팀 창단 김원형(1991~1994) 김종국(1996)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6번
이상대(1991~1994) 김원형(1995~1999)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16번
팀 창단 김원형(2000~2011) 이재영(201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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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돡원형.jpg
두산 베어스 No.70
김원형(金圓衡 / Kim Won-Hyeong )
생년월일 1972년 7월 5일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학력 전주중앙초 - 전주동중 - 전주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고졸우선지명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1~1999)
SK 와이번스 (2000~2011)
지도자 SK 와이번스 루키군 투수코치 (2012~2013)
SK 와이번스 1군 불펜코치 (2014~2015.8)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15.8~2016)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투수코치 (2017~2018)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8)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9~)
등장곡 puff daddy - I'll be missing you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박경완과의 관계6. 연도별 성적

1. 개요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의 투수이자 현 두산 베어스의 1군 투수코치.

돌격대 최후의 에이스

선수 생활 동안 트레이드나 이적을 거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사실상 원 클럽 맨이다. 무려 21시즌 동안 한 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셈이니 이 분야의 최고기록 보유자인 한화 이글스송진우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는 수준. 등번호는 데뷔 때는 48번이었다가 1995년에 16번으로 바꾸고 나서 은퇴까지 유지.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에서 뛰기 시작한 첫해부터 선발로 활약하였고[1], SK 와이번스의 창단멤버였으며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의 창단 첫 우승이자 역대 최장기록인 17년[2] 만에 본인의 첫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별명은 곱상한 외모와 덤으로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동안으로 인해 '어린왕자'[3]. 이 외모덕분에 적어도 전북지역에서 인기는 아이돌스타급이었다. 쉽게 생각해서, 광주에서 박정수에 대한 인기의 몇 배. 박정수가 현재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과거 전주의 김원형은 그야말로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주 팬들도 야구팀이 돈 없어서 해체하려 하자 직접 나서서 쌍방울의 속옷...을 팔아주었을 정도인데 그 팀의 젊고 잘생긴 에이스는 그야말로 형용불가. 현재는 나이 사십이 훌쩍 넘었건만 지금도 수염만 깎으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 외모를 지니고 있다.[4]

또한 커브를 매우 잘 던져 선수시절에는 커브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최동원 이후 최고의 커브볼러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파일:/image/295/2010/01/10/7296_4.jpg
1996년에 찍힌 사진, 즉, 24세 때의 사진이다.

전주시 출신의 순혈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전주고를 졸업하고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되었다. 쌍방울이 고려대학교와의 치열한 스카우트 싸움을 벌인 끝에 입단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컸던 선수였다[5]. 신인 시절부터 구단 차원에서 엄청나게 미래의 관리할 정도로 에이스로 일찍부터 점찍었던 선수. 이 당시 각 팀의 에이스급 투수들은 전부 기본 선발에 가끔 팀이 위기에 빠지면 중간이나 마무리 알바도 겸했지만 김원형은 드물게도 중간-마무리 알바는 다른 팀 투수들에 비교해봐도 경험한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당장 같은 기간 쌍방울 다른 투수들인 박성기, 강길용, 최한림, 조규제[6]와 비교해봐도 그렇고. 또한 주목할 점은 이 때 창단 감독이 국민감독 이라 불리던 김인식이었다는 것. 김인식 감독 성향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보호받고 관리받은 거다. 이 시절의 일화로 김원형이 꽤 곱상하게 생긴 편이라 당시 김기태는 누구 빽으로 입단한 선순 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잠시 눈물 좀 닦고 거기에다 고교시절 기량이 미숙했던 포수 친구까지 달고 왔으니 편견은 더 컸다[7]. 그러나 김원형의 불펜 피칭을 보게 된 후 편견이 사라졌는지, 그 후에는 김원형이 등판할 때마다 우리 원형이 우리 원형이하면서 경기에 임했다고. 그 선동열을 상대[8]로 거둔 데뷔 첫 완봉승도 김기태의 솔로 홈런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창단 첫 해 선수층, 특히 선발 투수진이 얇다 못해 없다시피 한 쌍방울 레이더스의 사정상 2군에서 담금질이고 뭐고 없이 데뷔년도인 1991년부터 바로 1군에서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그렇게 데뷔 첫해 방어율 4.69에 7승 11패, 4완투(1완봉)이란 성적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 시즌 초반에는 최연소 완투승[9]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후 내리 9연패에 빠지며 부진하고 관중석에서도 나올 때마다 아재들에게 욕을 먹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에게 스스로 2군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항상 거절당하던 중,[10] 오기가 생겼는지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1991년 8월 14일 광주 해태전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만 19세 1개월 10일에 완봉승(1:0)을 거둔 것. 이와 동시에 당시 최연소 완봉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때 상대가 신생팀 듣보잡 + 고졸투수에 한참 연전연패중인지라 다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광주아재들은 멘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1년 후인 1992년, 이 기록에 염종석이 이틀이 모자라 경신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걸 태평양 돌핀스의 안병원이 깨뜨렸고, 2년 뒤인 1994년에 주형광이 만 18세 1개월 18일로 이 기록을 경신했다.

1992년 8승 7패 3.22로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원만한 시즌을 보내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1993년 4월 30일 전주OB전에서 만 20세 9개월 25일로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6탈삼진, 1사사구)을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안 깨지고 있는 불멸의 기록. 또한 전주 야구장에서 나온 최초이자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기도 하다. 1993년 11승 9패 2.93으로 박성기와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거두면서 기대대로 쌍방울의 에이스로 떠오른다.

1994년 어깨 부상으로 인해 5승 11패 5.39으로 부진한 이 후[11], 1995년부터 다시 9승 8패 3.95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1996년 4.12 5승 8패로 조금 부진하였지만, 이 때의 쌍방울은 24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ERA 2.37로 그 시즌 공동 3위라는 기록을 남긴 성영재에게 10승 5패라는 10승에 겨우 걸친 성적을 안겨줄 만큼 좋지만은 못했다.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3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1996년과 1997년 쌍방울의 기적의 돌풍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가을 야구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그런데 1996년 현대 유니콘스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인호가 김원형의 공을 헤딩해 버린 이 후 다음 타자였던 윤덕규가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치며 싹쓸이 3루타를 쳤다.[12]. 1997년에는 선발투수진이 완전 붕괴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경기당 평균 5이닝 이상을 기록하며 9승 9패 2.75로 시즌을 마친다.[13]

그리고 1998년, 51경기(11선발)에 등판해 150이닝을 먹으며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마구 등판하며[14] 12승 7패 13세이브로 그해 ERA 5위를 차지하며 쌍방울 시절의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그리고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멤버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고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다만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은 썩 좋지 못했다. 4강전 중국과의 경기에 나왔지만 인상적인 투구는 보이지 못했다.

사고 당시의 사진.[15]
IMF로 인해 모기업이 어려워진 쌍방울의 주축 선수 들이 줄줄히 팔려나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쌍방울에서 뛰었으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전에서 장종훈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정통 맞아 코뼈와 광대뼈가 함몰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16][17] 이 때 장종훈1루를 밟고선 김원형에게 갈 수도 있었음에도 1루를 밟지 않고 그대로 마운드로 달려가 김원형의 상태부터 살폈고, 결국 아웃되었다. 경기 중 동업자 정신이 덕보인 초유의 흔흔한 사례였다. 흔히 장종훈의 이 타석으로 인해 장종훈의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와전된 것으로 성적과는 별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의 마해영이었다. 그러니깐, 애초에 타격왕과는 별 관련이 없던 것이 와전이 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이후 김원형은 장종훈이 타석에 설 때마다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상으로 인해 32이닝(전년도의 1/5) 평균자책점 4.86, 3승 2패 3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사실 쌍방울이 팀 내 연봉 상위권인 김원형을 끝까지 지켰다기보다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트레이드할 시기를 못 잡고 놓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쌍방울은 1999년에 현대 피닉스 소속 강필선[18]의 지명권과 2차 1순위 지명권[19]을 현대에 팔았을 정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니까... 저 부상직전에도 쌍방울이 김원형 트레이드를 알아보고 있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부상으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고, 결국 쌍방울이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선수단을 인계한 SK 와이번스에 입단,[20] 그렇게 그는 고향인 전주에서 더 이상 등판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저 때 선동열과 맞짱떠서 승리를 거둔 이후 쌍방울해태 타이거즈에게 광주에서 13연패를... 당한다. 1991.8.15~1993.4.17까지 해태를 상대로 광주에서 한판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연패를 끊은 것도 바로 김원형이었다!

2.2.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05082411341459526_163.jpg 파일:/image/109/2006/03/31/200603311454151100_1.jpg
전매특허인 커브를 던지는 모습.
[21]

리즈시절 쌍방울보다도 훨씬 약체였던 초창기 SK에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팀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역시나 검증 된 선수 아니랄까봐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으며 나오면서, 2000년 ERA 5.81, 2승 13패 5세이브로 커리어 로우를 찍고,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과 함께 리그 다패왕을 먹고 만다.[22] 심지어 같이 다패왕 먹은 한용덕의 자책점은 4점대인 4.68. 이 때의 처참한 성적이 결국 그의 통산 성적에 작용하고 마는데, 그의 통산 승률은 5할 미만이다. 134승 144패. 야구에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2승 13패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5할은 넘겼을 것이다. 물론 김원형의 이런 부진에는 얼굴에 공을 맞은 후유증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02년까지 고령화로 인한 구속저하와 어깨부상으로 성적이 하락하였으나, 정교한 제구력으로 맞춰잡는 기교파로 투구스타일을 변경하며 다시 성적이 나아졌다. 2003년에는 생애 친구[23]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마운드를 밟을 수 있었고[24], 2004년 역시 팀의 감초 같은 역을 하였지만 성적은 별반 다름 없었고 팀은 아쉽게 가을 야구에 실패를 한다.

2005년에는 171.2이닝을 던지며 오랜만에 10승 투수가 되었으며, 최종 마무리 14승 8패를 거두며 평균자책점 6위를 차지했고, 팀의 에이스가 되며 팀의 3위에 공헌한다. 허나, 가을야구에서는 한화 이글스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완벽하게 압도 당하며 패퇴한다.[25]

2006년도에는 전년도 보다도 못한 성적을 받으며 팀의 가을 야구도 순순히 포기하였다.[26]

2007년조범현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물러나고 쌍방울 시절 감독이자 은사였던 김성근 감독이 부임을 한다.투수로서 주장을 맡았으나, 부진으로 인해 선발에서 밀려 중간계투로 주로 나와 5승 4패 4홀드 73 2/3이닝을 기록하며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다. 다만,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시리즈 자체가 워낙 접전[27]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김성근 감독은 6차전 9회에 점수차가 5점차 이상이었다면 김원형에게 마지막 카운트를 잡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차전은 접전 양상으로 흘러 5:1로 마무리를 끝났으니...

우승 직후 쌍방울 출신 중 SK에서도 뛰었지만 결국 우승 경험을 하지 못한 김기태조원우가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28]

2008시즌에는 42출장(4번 선발) 74.1이닝을 먹고, 주로 중간계투로 나와 12승(다승 공동 4위) 6패 2세이브 2홀드로 롱릴리프로서 핵심 불펜역할을 해주었으며, 규정이닝 미달 선수중 최다승[29]을 기록하였다. 특히 끝장 승부가 벌어지던 2008년의 특성상 김원형이 연장에 나와 길게 막으면 SK가 점수를 내서 이기는 패턴으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30]

2000년대 후반 회춘하면서 우승도 경험하고 했지만, 아쉽게도 2009년 시즌 후에 왼쪽 팔꿈치 수술을 받고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2010년 8월이 돼서야 복귀했다. 결국 10시즌은 3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은퇴하지 않고 2011년에도 뛰었다. 연봉은 2억 5천에서 1억 5천이 깎인 1억원. 절친인 박경완이 40임에도 불구하고 2년간 총 14억에 FA대박을 터트린 것과[31] 비교하면 후새드, 그래도 김성근 감독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했다.

2011년에는 내내 플레잉코치 역할을 하고 1군과 동행하다가 결국 2011년 9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시대를 성실하게 던진 선수는 이렇게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파일:/image/076/2011/10/08/2011100801000618700052991.jpg

2011년 준PO 1차전 시구자로 나섰고, 2012년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 전 시즌 성적이 나름 괜찮아 기대를 모았음에도 은퇴하여 의아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은퇴식 전 기사에서 직구는 아직도 던질 수 있으나, 이번 부상 이후 전매특허였던 커브 자체를 아예 던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은퇴 이유라고 밝혔다.

은퇴 후 통산 다승 5위에 해당되는 성적과, 항상 같은 등번호로(16번) 쌍방울-SK시절 동안 한번도 팀을 떠난 적이 없는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상징성 등을 감안하여 SK 와이번스 최초의 영구결번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영구결번되지는 않았던데에는 SK 시절의 활약상이 전성기였던 쌍방울 시절만큼 뛰어나지 않았던 것과 쌍방울의 프랜차이즈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SK의 의도가 맞물린 결과일지도 모른다.[32]

3. 플레이 스타일

134승으로 다승 전체 6위[33]를 기록하고 있다. 전성기 시절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 전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34] 관계로 144패로 송진우에 이어 다패 2위를 기록했다. 투구이닝 전체 4위(2,171 이닝). 1위 송진우, 2위 정민철, 3위 이강철. "현역" 1위이자 통산 5위는 400이닝 차이가 나는 배영수. 배영수가 지금의 페이스로 3년만 더 뛴다면 갱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후, 5위에는 조금 오래 머물러 있을 듯하다... 야만없이지만, 김원형이 조금만 더 강한 팀에 있었더라면, 해태는 못 되어도 OB나 LG에서라도 있었으면 다승 순위에서 선동열도 제쳤을 것이다. 어찌보면 비운의 투수.

177cm, 75kg의 투수로서는 그리 좋지 않은 체격이지만, 전성기 때는 그 체격에서 140대 후반의 직구를 구사하였다. 후기에는 최고구속 140대 초반,평균구속 130대 후반. 대신 수준급의 제구력을 갖춰 맞춰잡는 스타일의 피칭을 선보인다.

주로 느린 체인지업으로 완급조절을 하며, 포크볼도 던진다. 기교파 변신 이후, 땅볼 유도할 때 간간히 싱커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최고의 주무기는 빠르고 "횡"이 아닌 "종"으로 떨어지면서도 스트라이크인데도 타자가 머리로 공이 날아오는 줄 알고 움찔할 정도로 큰 각을 지닌 12-6성 파워커브로, 희대의 마구 중 하나였다.[35]

삼성의 당대 최강의 파워커브볼러인 삼성 암흑기의 에이스 "만딩고" 김상엽과 비견되기도 하였다. 덕분에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선 김원형의 레전드 카드를 입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1성구 카드로 1995년도 올스타 김상엽이 나왔다. 커브 구속은 김상엽보다 조금 느리지만 각도 하나는 당대 제일이었다고. "헬리콥터 커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를 불태운 라이벌 정민철과 거의 비슷한 유형의 커브볼러였다. 그러나 정민철은 직구와 커브볼 속도의 간극을 이용한 커브라면 김원형의 직구와 커브는 속도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궤적도 거의 똑같은 볼이라 기다리는 타자 입장에선 이게 직구인지 커브인지 영겁과도 같은 고민을 하다가 배트를 휘둘러야했고 그러면 대부분 삼진이었다.

4. 지도자 경력

4.1.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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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해외 연수를 생각했으나 팀에 남았고, 루키 팀[36]의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원래 등번호였던 16번은 이재영에게 넘기고 새 등번호로 70번을 받았다.

본인이 잘 던졌던 커브를 잘 전수하는 편이며 임정우, 문승원의 커브가 그의 작품. 특히 문승원은 그가 직접 관리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어깨만 싱싱할 뿐 사이버 투수에 지나지 않았던 서진용[37]을 일부러 집으로 데려가서 밥도 같이 먹는 등 1:1로 집중 코칭해서 상무에 입대시켰고, 서진용상무에서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해 2013년 6월 27일까지 비록 2군이지만 평균자책점 0.57을 기록하였고 SK 팬들은 김상진, 김경기 말고도 믿을 수 있는 코치가 생겼다며 감탄하였다.

2013 시즌부터 조웅천이 1군 투수코치가 되자 1군으로 올라와 불펜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그런데 조웅천과 더불어 중간계투진의 혹사 덕분에 까였다. 다만 이만수 감독이 투수를 직접 교체하는지라, 이만수조웅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까이고 있다.

2015년에 조웅천이 2군 코치로 내려가고 김상진이 1군 투수코치를 맡으면서도 계속 불펜 투수코치에 있었으나, 2015년 8월 코치진이 대거 보직 이동하면서 김상진이 재활군[38]으로 이동하자 1군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불펜 투수코치는 김경태에게 넘겼다.

4.2.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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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즌 종료 후, 옛 동료인 롯데 조원우 감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창단 때부터 16년이나 몸담고 있었던 SK 와이번스를 떠나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영입됐다. 2016시즌에도 조원우 감독이 그를 원했지만, 쌍방울-SK 원팀맨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고사했었다고 김원형 본인이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2017 시즌을 앞두고 김용희 감독이 물러나고 힐만 감독이 영입될 때 팀을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4월 1일, 만우절에 정말 거짓말 같이 기적의 호투를 보여주며 5이닝 무실점, 이어서 6, 7회를 든든하게 받히던 선발 김원중, 중간계투 박시영 듀오가 커브를 제대로 써먹으면서 김원형의 투수코칭 실력에 대한 평이 롯데 팬들 사이에서도 높아졌다. 하지만 김원중은 고질적인 제구난 끝에 난타당하면서 4월 20일에 1군에 말소되었고, 나머지 투수들도 제구가 들쭉날쭉하고 실투가 많아 피홈런을 많이 내주면서 평가가 대폭락했다.

6월 이후 선발 투수들이 한날 한시에 대폭락하고, 나머지 중간 계투들도 컨디션 관리에는 손을 놓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조원우와 더불어 무능력자로 낙인찍혔다. 더군다나 투수들에게 커브 등의 변화구를 장착해서 시즌 초반에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언플을 했으나, 정작 커브보다는 포크볼과 체인지업 등의 구사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문제는 이 2개의 구종을 제대로 던지는 투수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던진다는 것. 이 때문에 이 2개 구종에서 집중적으로 안타를 얻어맞으면서 이길 경기를 어렵게 끌고 가는 원인이 되었고, 김원형의 투수육성에 관해서도 거품이 꺼져 버렸다. 시즌 중반으로 가면 더 심각해서, 중간계투 중에서 싸울 줄 아는(실점을 막는다거나 제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투수가 신인인 강동호 외에는 전멸했을 정도. 내부 철밥통 치웠다고 좋아했더니, 외부에서 주워온 사람도 반쪽짜리. 대체 뭔 생각을 가지고 투수교체를 하는건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서는 조정훈의 복귀와 박진형중간계투 전환 등 새로운 필승조를 구축하여 순항하고 있고, 선발에서는 전반기 부진하던 브룩스 레일리를 살려내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현재 롯데 계투진이 커브, 포크볼, 체인지업 등의 변화구를 마음껏 구사하는 팔색조 투수들로 넘쳐나고, 김원중이 5선발로 안착하고, 5선발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면서 롯데 투수진은 리그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김원형이 떠난 SK 중간계투진이 방화범 천지로 바뀌어 버린걸 보면 무능력한 염종석, 2군에서 투수 고치기만 잘하고 1군에선 막장 투수교체를 펼친 주형광과 비교하면 훨씬 능력있는 투수코치가 맞다.

201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단기전 투수 운용에 큰 문제를 노출했다. 특히 5차전에서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기용으로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조원우 감독이 독박을 쓰고 욕을 먹는 중이지만 사실 조원우 감독은 투수 교체에 대해서는 김원형 코치에게 모두 맡겨서 김원형 코치가 투수 파트를 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원형 본인도 준플레이오프 5차전 투수 운용을 자신이 직접 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물론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조원우 감독도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투수 파트를 운용한 주체가 김원형 코치였기 때문에 김원형 코치에게 보다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비록 준 플레이오프 5차전 패배의 아픔이 크지만 그래도 다수의 롯데팬들은 젊은 투수진들을 1군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김원형 코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원우 감독이 진통 끝에 재계약이 된 만큼 팬들은 김원형 코치가 이번 준플레이오프의 쓰라린 패배를 교훈 삼아 다음 시즌에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이길 바라고 있다.

2018 시즌에는 7연패 기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상한 타이밍의 투수교체로 인해 비판받는 일이 있었지만, 7연속 위닝시리즈를 달성한 5월 17일 시점에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경은, 진명호[39], 그리고 오현택까지 살려내며 여론이 바뀌었다. 그러나 거짓말같이 5월말부터 OMR 필승조들이 붕괴되고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어도 질 것만 같은 상황을 연출하며 역전패하는 경기가 잦아지자 다시 무능력자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결국 7월 21일, 보직 두개를 맡다 보니 워낙 스트레스가 심해 투수 코치직을 주형광[40]에게 넘기고 수석코치로서만 활동한다.

조원우 감독이 물러나자, 10월 23일에 사임했다고 기사가 떴다. 사임한 이후 이강철이 두산 수석코치에서 kt 감독으로 가는 바람에 두산 베어스 수석코치의 물망이 오르고 있다고 기사가 떴다. 아아... 코치님

4.3. 두산 베어스 시절

이후 언론을 통해 두산 베어스에 합류하는 것이 밝혀졌고, 11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공식적으로 두산행이 발표되었다. 보직은 당초 예상과 달리 수석코치가 아닌, 1군 투수코치로 결정되었다. 수석코치는 권명철이 맡는다.[41] 1군 불펜코치로 보좌역을 맡을 사람은 정재훈.

두산 팬들은 이강철 전 코치의 뒤를 이어 불펜투수진을 다잡아 주길 바라고 있다.[42] 그리고 엠스플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투수는 어쩌다 좋으면 안 돼요. 어쩌다 안 좋아야지."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베댓에서는 홍상삼 제구 잡으면 명코치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보였다[43]

그리고 박사논문급 숙제인 최대성, 이동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2월 12일 첫 라이브피칭에서는 마운드 위에선 건방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고, 김호준, 박신지에 대해 호평을 남겼다. 베테랑들에게는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으며, 작년까지 투수조장이었던 유희관과도 대화를 자주 하는 중.

그러나 시범경기에서 선발은 잘 던지는데 한화전에서 김호준을 비롯한 젊은 불펜선수들이 제구난조로 화끈하게 불을 지르며 약간은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이현호가 제구를 잡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다.

아직 초기지만, 정규시즌 중에는 박치국, 이형범, 이현호[44] 등의 불펜 투수들도 호투를 보여주면서 본인이 적절한 타이밍에 마운드로 올라가는 모습[45]을 보여주고 있다. 최대성에게 전해 그냥 네가 못한거라고 그러나 작년 이닝소화가 많았던 함덕주를 쓸데없는 상황에서 올리는 모습으로 인해 투수혹사 우려로 까이기도 하는데, 투구수 TOP 20에 두산 선수들이 없는 모습을 보이며 이 우려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4월 17일 홍상삼이 인생투를 선보였지만 폭투 이후 곧바로 홍상삼을 4와 2/3이닝에서 내렸는데, 잘 던졌다는 격려와 승리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5월 초까지의 모습은 공산야구. 이영하의 타점을 조정하여 더 나은 선발투수로 성장하게 한 건 물론, 배영수권혁의 합류로 불펜 투구수 TOP 20[46]에 두산 선수가 없는 등 전 시즌보다 불펜혹사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참들에게 전해 가비지이닝은 니들이 먹으라고

허나 5월 중후반이 되자 김승회박치국, 함덕주등 많은 투수들이 구위를 완전히 잃었고, 수비에 의존하는 두산 투수진 특성상 수비가 무너지면 손도 못 쓰고 패배하는 공식이 이어지자 비판이 늘어나는 중.

5. 박경완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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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박경완이 SK복귀후 함께한 현역시절 두번째는 절친 박경완과 함께 마지막을 장식하는 김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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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완 은퇴식때 함께해준 김원형.

김원형을 언급하든, 박경완을 언급하든 간에 둘은 꼭 서로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이 나오는 존재이다.

박경완과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함께 지낸 영혼의 배터리이자 30년지기 절친인데, 같은 전주 출신을 시작으로 전주 중앙초-전주동중-전주고를 함께 나와서, 전주 연고팀인 쌍방울에 같이 입단했다. 1991년 김원형 덕에 박경완이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 대학 진학을 모색하다가 무산되면서 졸지에 붕 떠버린 박경완이 쌍방울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팀 내 최고 유망주의 친구라서 볼 받아주고, 말동무 해달라는 팀의 뜻이 컸다고 한다. 박경완은 고등학교 때는 생각보다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고, 기량 저하까지 겹치면서 프로 진출마저 불투명했으나, 그해 1차 지명선수였던 김원형의 도움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고, 성공 신화를 같이 쓸 수 있었다.

1997년 시즌 후 어려운 모기업 사정으로 인하여 박경완이 현대로 당시 사상 최고인 9억이란 거금에 트레이드되었다. 한편, 박경완이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될 당시 둘도 없는 친구였던 김원형은 충격을 받고 "나 딴 팀 안 갈거야!!"라고 외치며 도망쳐서 스쿠터로 전주시내를 이리저리 질주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떨어져서 다른 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박경완이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되어 잠시 떨어져 있었던 때, 박경완이 타석에 들어서자 벤치에서 빈볼 사인이 났음에도 차마 빈볼을 던질 수 없어 위협구만 연거푸 던지다 퇴장당한 사건은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1998년 7월 26일 경기.

그리고 박경완이 FA 자격을 얻어 2003년 SK에 돌아오면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5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같은 팀에서 함께 지내며 21년차 역대 최장수 배터리로 활약하게 되었다. 둘 다 은퇴한 2013년에도 김원형은 투수코치, 박경완은 2군 감독으로서 코치로서도 또 같은 팀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2014시즌에도 김원형이 1군 투수코치, 박경완이 그대로 2군 감독을 맡게 되면서 같은 팀에 있는 햇수가 24년으로 늘어났으며, 2015년에도 박경완이 육성총괄, 김원형이 1군 투수코치로 선임되며 결국 같은 팀에 있는 햇수 25년을 달성했다. 그리고 2016 시즌에도 박경완은 1군 배터리 코치에, 김원형은 1군 투수코치에 선임되어 같은 팀에 있는 햇수를 26년으로 연장시켰다.

쌍방울 시절 박경완과의 에피소드(?). 밑의 5시 방향 조그만 기사도 둘의 기사다.

2011년 은퇴를 선언한 김원형이 준 PO 1차전 시구에 나섰을 때, 자신과 호흡을 맞췄던 박경완[47]이 자기 공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아쉽다고... 아... 영혼의 배터리...

결국 2014년 4월 5일, 박경완의 영구결번식 겸 은퇴식 날에 박경완이 시포, 김원형이 시구를 함으로써,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할 21년차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장수 배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이 된 한 개의 공을 던지고 받으며 둘의 프로생활 20여년의 대장정의 끝을 맺고, 성대한 마무리를 맞이하였다. 시구와 시포 후, 두 영혼의 배터리의 마운드에서의 마지막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박경완: "원형아!"
김원형: "이게 마지막 공이다"
박경완: "그래, 고맙다"
김원형: "수고했다"
박경완: "어... 고맙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1 쌍방울 29 136⅓ 4 1 7 11 0 - 4.69 131 78 75
1992 22 138⅓ 7 1 8 7 1 - 3.32 125 60 104
1993 26 135⅓ 6 3
(5위)
11 9 0 - 2.93 115 70 87
1994 25 132 2 0 5 11 1 - 5.39 143 63 75
1995 25 143⅔ 4 2 9 8 0 - 3.95 145 71 69
1996 26 126⅔ 1 0 5 8 0 - 4.12 133 56 69
1997 29 157 3
(5위)
0 9 9 0 - 2.75
(5위)
139 50 80
1998 51 150 0 0 12 7 13 - 2.52
(5위)
130 48 109
1999 17 37 0 0 2 3 2 - 4.86 30 16 3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SK 29 93 0 0 2 13 5 0 5.81 112 36 52
2001 26 154⅓ 1 0 9 9 0 0 4.37 152 63 100
2002 13 58⅓ 0 0 4 5 0 0 5.25 67 19 37
2003 30 79⅓ 0 0 7 7 1 4 3.74 87 24 44
2004 30 135 1
(5위)
0 8 6 1 1 4.20 147 51 78
2005 30 171⅔
(5위)
0 0 14
(4위)
8 0 0 3.41 172 45 94
2006 24 139⅓ 0 0 5 9 0 0 4.07 152 54 52
2007 43 73⅔ 0 0 5 4 0 4 4.15 87 30 25
2008 42 74⅓ 0 0 12
(4위)
6 2 2 3.15 73 28 41
2009 25 33⅓ 0 0 0 4 0 1 4.59 36 19 17
2010 3 2⅓ 0 0 0 0 0 0 0.00 0 0 0
KBO 통산
(20시즌)
545 2171
(4위)
29 7 134
(6위)
144 26 12 3.92 2179 881 1246
(9위)


[1] 말이 좋아 선발이지 96~99년은 가끔씩 중무리로도 나와서 던지고 스윙맨의 역할도 하는 등 전천후 투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상대팀 선발들이 승리를 챙기고 싶어 쌍방울전에 등판시켜달라고 감독에게 떼를 쓸 정도로 최약체급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방울을 어떻게든 지지 않게 하려는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의 원조 벌떼야구가 낳은 산물이었다.[2] 그래도 콩라인에 속한 수많은 선수들에 비하면 우승을, 그것도 2 연속으로 경험했으니 실력과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3] 게임인 마구마구에서도 이 별명이 있다[4] 그런데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고 나서 홍보팀이 포토샵의 색 처리를 잘못했는지 SNS에 올린 사진에서는 늙수그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오키나와, 미야자키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영상에서는 얼굴이 돌아온 편. 그러니깐, 처리를 제대로 못한게 커서 이상하게 보였다는것[5] 친구였던 박경완은 대학교 오퍼를 받았었다.[6] 이 분도 데뷔 이후 신나게 굴렸었다.[7] 박경완은 조범현 당시, 배터리 코치의 각성 이전 이므로 임시 백업이나 공 줍는게 전부였다[8] 80년대 말 ~ 90년대 초 당시 국내에서 누구도 선동열을 따라 잡을 수 없던 선수였다.[9] 데뷔 첫 승이기도 하다.[10] 단 등판간격을 조정해주기는 했다.[11] 5월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6월 한 달 동안 평균자책이 무려 20점대를 넘을 정도로 최악의 부진에 빠진다.[12] 현대가 5차전 까지 분위기를 이끌어 승리하자,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이 만들어졌다[13] 쌍방울 투수 중 선발 10승 투수가 아무도 없었다.[14] 그해 그보다 많이 출장한 선수 중 그보다 이닝을 더 많이 먹은 선수는 61경기 158.1이닝의 OB의 진필중밖에 없었다![15] 아직도 당시 야구팬들의 회상을 하면 야구공에 맞은 김원형을 생각하면 끔찍한 장면이였다고[16] 야수가 공에 맞은 상황은 당연히 인플레이이며, 1루가 아닌 마운드로 향할 경우 당연히 3피트 라인 룰에 의해 자동아웃된다.[17] 심지어 장종훈 특유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는 친 타구가 점프한 유격수 글러브 윗부분을 살짝 스쳐 지나갔는데 그 타구가 그대로 펜스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직격으로 꽂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홈런 타구도 그의 전매특허. 그러니 은퇴 직전도 아니고 27홈런을 쳤을 시절의 장종훈의 타구에 맞은 김원형은...[18] 연세대를 졸업했고, 현대 유니콘스롯데 자이언츠를 떠돌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19] 현대는 당시 쌍방울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은 대전고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받아 입단시킨다.[20] 쌍방울과 SK는 서로 남남이며 , 역사는 승계 되지 않는다.[21] 옷이 다른 이유는 2005년도 까지 SK 모기업의 CI로고 푸른색을 사용했었고, 이 후 2006년도 부터는 붉은색으로 변경을 했다.[22] 00년 SK의 팀 전력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투수진이 완전히 망가져, 에이스는 그해 1차 지명한 신인상을 타이틀을 딴 이승호로, 워낙 팀에 구멍이 많았던지라 이승호가 돌려막기 요원으로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무차별 등판해 139이닝 4.51 10승 12패 9세이브를 거뒀다. 팀내 ERA 1위는 44이닝 던진 불펜투수 박상근. 그마저 평균자책점은 4.30이었다. 2위는 불펜투수 박주언이나, 고작 20이닝 던진지라 제외. 결국 2000년 SK 선발요원 중 평균자책 1위는 이승호였다. 그해가 타고투저 시즌이란 점도 있다만 답없는 투수진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SK 창단 초반 3년 간의 혹사는 이승호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 그를 기나긴 재활의 길로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타격이 좋았나 하면 그건 또 아니올시다여서, 3할3푼을 치며 타격 3위를 차지하며 성공한 유격수 용병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곤 타격 30위 안에 드는 선수는 0.262로 30위를 차지한 2루수, '철인' 최태원 이외엔 없었다. 투타 모두 개판이었던 상황. 그리고 승률 3할 3푼 8리으로 꼴찌를 차지한다.[23] 그 는 이미 1998년 한국시리즈2000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하고 우승반지도 2개를 먹은 선수였다.[24] 역설적으로 이는 SK와 김원형의 등판은 악용이 작용하였고 4차전에 현대 주장 이숭용에게 동점타와 역전타를 연거푸 맞으며 패전을 당하고 7차전 선발 당시 클리프 브룸바심정수에게 일격을 맞으며 패전을 당해 우승에는 실패한다.[25] 특히, 2선발 신승현의 부진이 컸었다. 3승 무패 방어율 0.64였는데 그렇게 강하였기에 믿었지만 끝내 주저 앉았다.[26] 06년의 SK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시즌이였는데, 용병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초반 맹활약을 하더니 KIA 타이거즈 투수 장문석에게 손가락에 맞는 등 불상사가 있었다. 그 뒤 급격하게 부상으로 1군을 제외시켰는데 뒤 타자인 이진영 또한 몰락하고 만다. 팀은 6위에 그치며, 팀내에 투수진들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팀에서 활약이 돋보인 것은 빵형채병용 두 사람이 개고생을 했다.[27] 역대 한국시리즈 중 벤치 클리어링이 이렇게 심한 것은 2009년 한국시리즈와 함께 아직도 손꼽히는 명장면이였다.[28] 김기태의 경우에는 2005년 SK에서 은퇴했으나 그가 은퇴한 지 2년 뒤에 SK가 우승했고, 조원우의 경우에도 SK 시절인 200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2006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으나 준우승에 그쳤을 정도로 둘 다 우승복이 없었다. 다만 김기태의 경우 2008년 베이징 올림픽당시. 타격코치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우승을 경험해봤고, KIA 감독을 맡은 2017년, 드디어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감독으로 경험해 보게 되었다. 아쉽게 조원우는 감독이 되어서도 우승은 못하고 사퇴하였다. 개인 커리어로는 2017년 준플레이오프가 가장 큰 업적이다.[29] 당시 2위는 두산의 이재우. 11승이었다.[30] 마무리, 정대현이 SK에서 데뷔 이 후 가장 저조한 활약이 였는데, 이는 그가 베이징 올림픽/야구에서도 출장 빈도가 높았기에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20 세이브는 거뜬히 넘겨주셨다.[31] 하지만, 이 계약은 사실상 문제점이 있던 계약이다. 박경완 문서를 참고[32]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친구인 박경완이 SK 선수 최초로 영구결번이 되었다.[33] 1위 송진우, 2위 정민철, 3위 이강철, 4위 선동열, 5위 배영수(현역)[34] 특히 투수 부문에서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급 좌완 마무리 전주특급 조규제, 김현욱-조규제로 이어지는 쌍방울의 고정 승리조의 일원이자 1997년 중간,구원투수로 20승을 기록한 언더투수 김현욱, 선발 중계 구원 안가리고 나오며 같이 포맨팀 해먹던 좌타자 킬러 언더투수 김기덕, 1990년대 말 반짝한 언더 포크볼러 성영재 빼곤 믿을 만한 투수가 거의 없었다. 구원진은 김현욱-조규제라인으로 먹고 살았으나, 선발은 진짜 답이 없었다. 초창기 에이스 박성기부터 이후 짧은 전성기때의 오봉옥, 최정환 등의 선수들이 나름 터져 주었으나 롱런한 선수들은 아니다.[35] 당대의 선수로는 이대진, 정민철, 정민태 이와 같은 선수들도 사용하였다. 단, 정민태는 슬로우 커브에 집중으로 사용했다.[36] 3군 혹은 재활군이라고도 하며 1군이나 2군에서 뛰던 선수의 재활을 돕거나 신인들의 기본기 습득을 위해 신설되었다. 박경완이 1군에서 이 곳으로 내려갔었다.[37] SK 스카우트진이 제물포고 좌완투수 이현호를 거르고 지명했던 2011년 전체 1픽이지만 무릎 수술을 받아 입단 후 육성선수로 전환되었으며, 그나마 2군에서 김원형이 다잡아 줘서 상무에 합격해 군 팀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문서 참조.[38] 2017년 부터 삼성 라이온즈 투수 코치진으로 합류[39] 진명호는 그야말로 데뷔 10년차에 포텐이 터진것이였다.[40] 주형광 코치 역시 투수들을 발굴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투수진들이 털리자 2군으로 아예 떠난 적이 있었다.[41] 두산팬들은 권명철이 투수코치가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반응. 그리고 두산 수석코치는 최근 타팀 영전이 대세가 되어 두산팬들도 다른 의미로 환영 중이다(...).[42] 그리고 이강철 코치는 KT의 3대 감독으로 떠났다.[43] 정말로 4월 17일 선발로 나와 우려하던 투구를 할까 걱정했는데 결과는 4이닝 3실점 이라는 아슬아슬한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당일, 선발에 팬들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것이 알려지면서 맘고생 많았다고 그 날 경기만큼은 홍상삼을 많이 위로했다.[44] 이현호는 김원형 코치의 조언 하에 다리를 들 때 살짝 공을 빼는 방식으로 투구폼을 바꿨다. 그 결과 4월 23일 경기에서 4이닝 4K 1실점으로 호투.[45] 투수가 흔들리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마운드 위로 올라간다. 돡갤에서는 피안타로 투수 까는 사이 이미 올라와 있다고 한다 권명철이 투수교체 타이밍, 무리한 투구폼 이식으로 까인 걸 보면 두산팬들은 환영하는 모습이지만 이닝 쪼개기가 우려되기도 한다.[46] 2019년 5월 3일 경기종료 후 기준.[47] 당시 재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