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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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감독) | ||||||||||||||||||||||||||||||
1998 |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코치) |
2000 |
주성노 朱性魯[1] | |
출생 | 1952년 9월 7일 ([age(1952-09-07)]세) |
부산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부산고등학교 - 부산산업대학교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소속팀 | 한일은행 야구단 (1971~1977) |
지도자 |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경성대학교 야구부 감독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인하대학교 야구부 감독 (1986~200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1984, 1990)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8~199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0~200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2] |
프런트 |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스카우트 팀장 및 기술이사 (2008~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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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훈련에서. 좌측부터 주성노 감독, 김병현, 박찬호 |
대한민국의 야구인. 야구팬들에게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전승 우승을 이끌어 인지도가 있다. 이 대회 덕에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등 전성기를 보내던 젊은 해외파들과 아마추어 선수, KBO리그 신진급 선수들이 대거 병역 혜택을 받는 기쁨도 누렸다.
2. 생애
선수 시절에는 당대에는 드문 언더핸드 투수였다. 부산고, 부산산업대학교,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활동하였다.은퇴 후 부산고[3], 경성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고 휘문고를 거쳐 1986년부터 인하대의 감독을 지냈다.
인하대 감독 시절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겸직했는데, 대표팀 감독을 맡은 뒤에도 굵직한 성적을 냈다. 1998년에는 아시안게임 우승, 1999년에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본선 진출[4]이라는 좋은 성과를 냈음에도 정예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는 물러났다. 이후 한일은행 선수 시절때 은사인 김응용의 요청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코치로 다시 합류하며 각각 동메달과 금메달이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정예 대표팀 감독자린 아니지만 2002년 11월 쿠바에서 열린 대륙간컵 야구대회에서 최정예가 아닌 선수들로 "준우승"을 올리는 등 좋은 성적을 냈다. 이걸로 국제야구연맹에서 2002년 올해의 감독상까지 받았다. 이외에도 각종 국제대회 대표팀을 종종 맡았다. 프로팀 지도경력은 없지만 국제대회 지도 경력은 풍부한 인물.
이후에도 한동안 인하대 감독 자리를 계속 지켰으나, 2005년 체육특기생 선발 관련 비리에 연루되면서 인하대 감독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이후 우리 히어로즈 창단 당시 프런트에 합류해 스카우트 팀장, 이사로 한동안 일했다.
히어로즈 구단에서 스카우트로 일하는 동안에도 평가는 매우 좋았다. 창단 최초로 신인 1차지명에 강윤구를 뽑았었고, 2011년에는 한현희를 지명[5]2012년 8월 20일 드래프트에선 조상우를 전체 1픽으로 선발하며 "체격과 스피드가 좋고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라는 평을 한 적이 있다. 2013년에는 1차지명으로 임병욱 2차 1라운드로는 하영민 2차 3라운드로 김하성을 뽑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이 시절 오점이라면 김대유를 지명하는 바람에[6] 이장석이 왜 지시대로 안해주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후 이장석은 구단주 직무정지 전까지는 계속해서 매년 신인 지명회의 때는 스카우트들과 동행한다고 하였다.
히어로즈 프런트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각급 학교를 돌면서 재능기부 등을 하며 지내는 듯.
3. 여담
- 외손자인 최찬영이 대덕대학교에서 투수로 활동하고 있다.
[1] 마지막 글자인 노둔할 노/로는 두음법칙에 의해 "노"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인명에 두음법칙을 반드시 적용해야 되는 건 아니라서 주성노/주성로 표기가 둘 다 쓰인다. 이런 경우 보통 본인이 선호하는 표기로 굳어지는데 본인이 어떤 표기를 선호하는지는 불명.[2] 대륙간컵 한정.[3] 실업야구 7년차에 접어들던 1977년 8월, 불과 만 25세의 나이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부임되었다고 한다.#[4] 이때부터 아마야구+프로야구 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되기도 하였다.[5] 그러나, 이 지명은 주 팀장이 아닌 이장석 대표 단독 지명 이라는 썰이 있고 또는 박지훈을 뽑으려고 했다는 썰이 있다.[6] 원래는 이장석은 문성현과 "안승민"을 뽑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승민의 은퇴 이후의 행적을 보면 안뽑은게 다행일지도.. 결국 문제투성이로 지목된 2010년 드래프트 생존자는 팀의 프랜차이즈로 남은 문성현 한명만 있고 김대유는 저니맨이 되었다가 2023년 이후로는 KIA 타이거즈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안은 지명식 당일날 본인들 이름이 언급 안되어 불안해 하는 사진이 찍히기도 하였다. 또는 김대유 아버지가 전직 선수였던 김종석인데 이는 당시 팀의 감독인 김시진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한다. 사유가 김시진의 현역시절 마지막팀이 롯데라서 그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