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김응용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둘러보기 틀 모음 | |||
대표팀 | ||||
2대 | ||||
1군 감독 | ||||
2대 1983~2000 | 11대 2001~2004 | 9대 2013~2014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ffffff 20%, #ffffff 80%, #ffffff); color: #0301fc;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301fc>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서상국 | 김동성 | 임병직 | 서민호 | |
<rowcolor=#0301fc>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홍직 | 서민호 | 선우인서 | 전의용 | |
<rowcolor=#0301fc>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김종락 | 임광정 | 최인철 | 김종락 | |
<rowcolor=#0301fc>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최인철 | 이현태 | 정몽윤 | 고익동 | |
<rowcolor=#0301fc> 제17·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이내흔 | 민경훈 | 강승규 | 이병석 | |
<rowcolor=#0301fc> 제22대 | 제23대 | |||
박상희 | 김응용 → 이종훈 | |||
}}}}}}}}} |
}}} ||
김응용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 |
<colbgcolor=#ef8b01><colcolor=#f8d1a6> 연도 | <colbgcolor=#f8d1a6><colcolor=#ef8b01> 2005년 | |
이름 | 김응용 | |
분야 | 스포츠 | |
사유 | 체육발전유공 | |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훈자 | |
<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연도 | <colbgcolor=#00a99a><colcolor=#eec008> 1971년 |
이름 | 김응용 |
분야 | 스포츠 |
사유 | 체육발전유공 |
국민훈장석류장(5등급)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 ||||
1983 | 1986 | 1987 | 1988 | 1989 |
1991 | 1993 | 1996 | 1997 | 2002 |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감독) |
2000 |
보유 기록 | ||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 감독 | 10회 | |
KBO 리그 최다 시즌 감독 | 23시즌 | |
KBO 리그 최다 승리 감독 | 1567승 | |
KBO 리그 최다 패배 감독 | 1300패 | |
KBO 리그 최다 무승부 감독 | 68무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9번 | ||||
결번 | → | 김응용 (1983~1995) | → | 최향남 (1996)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0번 | ||||
남상규 (1995) | → | 김응용 (1996~2000) | → | 백인호 (2003~2004)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0번 | ||||
최창양 (1996~2000) | → | 김응용 (2001~2004) | → | 이여상 (2007) |
한화 이글스 등번호 70번 | ||||
윤승열 (2012) | → | <colbgcolor=#000> 김응용 (2013~2014) | → | 이정훈 (2015~2016) |
}}} ||
김응용 金應龍 | Kim Eung-ryong | |
출생 | 1939년 4월 20일 ([age(1939-04-20)]세)[1] |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2] (現 평안남도 숙천군 대성리) | |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본관 | 경주 김씨 (慶州 金氏) |
신체 | 185cm, 95kg, O형[3] |
가족 | 배우자 최은원, 장녀 김혜성, 차녀 김인성[4] |
학력 | 성지국민학교[5] (졸업) 부산개성중학교 (졸업) 부산상업고등학교[6] (졸업) 우석대학교[7] (학사) |
상훈 | 체육훈장 거상장 국민훈장 석류장 |
병역 | 육군 야구단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
포지션 |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 구단 | 남선전기 야구단 (1960~1961) 크라운맥주 야구단 (1964~1965) 한일은행 야구단 (1966~1973) |
지도자 |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 (1973~1981) 해태 타이거즈 감독 (1983~2000)[8]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1~2004)[9] 한화 이글스 감독 (2013~2014) 성남 블루팬더스 총감독 (2017~201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77~1980 / 2000) |
프런트 | 삼성 라이온즈 사장 (2004~2010) 삼성 라이온즈 고문 (2010~2011) 세계야구선수권대회 U-23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단장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2016~2020) |
[clearfix]
1. 개요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다."
1987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 후 인터뷰에서.
특히 1988년에는 전·후기 리그는 물론 한국시리즈까지 통합 우승을 차지했고 저 시점 이후로 무려 6회나 더 우승했다.
대한민국의 야구인. 그 중에서도 대중들에겐 감독으로 가장 유명하다. 현역 시절에는 연습생 신화를 쓴 실업 리그의 홈런왕이자 부동의 국가대표 4번타자 1루수였고 지도자가 되어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국제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11] 프로 야구 출범 이후에는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고,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올림픽 동메달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야구인 최초로 구단 사장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에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민선 회장도 맡았다.1987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 후 인터뷰에서.
특히 1988년에는 전·후기 리그는 물론 한국시리즈까지 통합 우승을 차지했고 저 시점 이후로 무려 6회나 더 우승했다.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엔 프로 감독 데뷔 첫해에 곧바로 우승을 달성하였고, 오늘날엔 해태 왕조라 불리는 KBO 리그 최초의 왕조시대[12]를 열었다. 해태에서 18년간 한국시리즈 9회 진출 및 9회 우승[13]을 이뤘고, 2000년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엔 구단의 오랜 숙원이었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이뤄냈으며 통산 1567승으로 감독 통산 최다승 1위[14]와 통산 10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의 기록을 보유하였다.[15] 여기에 프런트 시절인 삼성 사장 시절까지 합치면 12회, 고문 시절까지 합치면 13회가 된다. 또한 1986년부터 1994년까지 9년 연속 단일 팀 단일 감독 포스트 시즌 진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97년까지 12년 연속 4위 이상을 기록하였다.[16] 삼성 부임 시기엔 4년 모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등번호는 39번(해태 1983~1996), 70번(해태→삼성→한화 1996~2004/2013~2014).[17]
"김응룡"으로도 많이 불리는데, 유니폼이나 현수막 등에 쓰이는 공식 명칭은 김응용이며, 본인의 호적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발음상 '룡'이 맞지만 집안에서 '용'으로 쓰기로 했다고. 김응용 전 감독 본인도 이에 대해 기자들에게 자주 질문 받은 모양인데 '용'이든 '룡'이든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는 본음대로 적되,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률'만 '열·율'로 적는다. 따라서 엄격하게는 김응'룡'이 맞지만 실제로는 사람 이름 등의 고유명사는 규정상 두음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고 본인 의사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도록 되어 있다. 본인은 "그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며 "기분 내키는 대로 써도 좋다"고 했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보면 '김응용'보다 '김응룡'으로서 검색어 결과가 훨씬 많다. 선동렬로 불리는 선동열과 같은 사례다.
2. 경력
2.1. 선수 경력
부산상고 졸업 후 당대 최고팀이었던 농업은행[18] 입단이 좌절되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이란 이유로 입단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당시 감독이던 김영조 씨가 김응용의 실력을 알아보고 불러서는 농업은행에 들어오라며 입행 서류를 내밀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서류를 찢는 것이 예의는 아닌지라 방에서 나오면서 서류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그렇게 스스로 농업은행 입단 제의를 거절한 후 한국운수 야구단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실업 리그 최고의 강타자로 등극했다.
이후 실업 리그 홈런왕으로 장기 독재를 했는데 이걸 막아낸 선수가 OB 선수였던 김우열. 참고로 이후 '10년은 갈 것이다.'라는 평이 나왔던 김우열의 홈런왕 독식 체제는 5년여 만에 김봉연[19]이 무너뜨렸다. 프로 야구 출범 전 한국의 홈런왕 계보는 박현식-김응용(동시대 좌타자로는 박영길)-김우열-김봉연으로 이어진다. 한편, 실업 시대 홈런왕의 계보를 이은 박현식, 김응용, 박영길, 김우열 모두 실업 리그 통산 100홈런을 넘긴 레전드.
전성기에 체중은 120kg.[22] 1950년대 후반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5cm 정도였으니 요즘으로 환산하면 190중,후반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당대의 농구 선수보다도 더 키가 컸다. 1960년대 농구 국가대표팀의 최장신이던 박한, 신동파와 키가 같을 정도였다. 지금도 굉장히 큰 체구다. 승승장구에 나왔을 때 키 180cm의 MC 김승우보다 더 컸으니. 신발 사이즈는 310MM라고 김성한이 밝혔다.
때문에 선수 시절 1루 수비를 볼 때 동료 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코끼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사장까지 올라가면서 '코사장'으로 승격하기도 했다.[23]
물론 이런 큰 덩치에 맞게 싸움 실력도 출중하다. 183cm에 98kg로 거구로 유명했던 해태 포수 장채근이 전지 훈련 중 술에 만취해서 대들었다가 50세가 다 된 김응용에게 넙치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당시 장채근이 갓 입단한 신인이었을 때 시합 중에 장채근 타석이 될 때마다 대타를 돌려 타석에 나가지를 못하게 한 것에 대해 열이 단단이 받은 장채근은 맥주 여러 병을 비우고 한 손에는 맥주병, 다른 한 손엔 돌을 들고 다짜고짜 김응용이 묵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장채근의 KO패[24] 그리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경기 중에 있던 일로 불만을 품고 공수교대 때 덕아웃에 들어와 깽판을 치던 틸슨 브리또와 호세 카브레라를 제압한 사건도 유명하다.
1965년 크라운맥주 시절 김응용의 타격 자세 |
당시 리그의 대표 타자였던 만큼 10여 년간 국가대표팀에 빠지지 않고 선발되어 활약한 대표팀의 터줏대감이었다. 1963년 제5회 아시아 선수권 야구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3-0으로 사상 첫 국제전 우승과 사상 첫 일본전 승리를 거둘때 1회 선취 타점, 8회 투런 홈런 등 전 타점을 혼자 기록하면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고 우승 당일 밤 너도나도 건네는 축하주에 꼼짝없이 대취하여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창단한 중앙정보부 야구단[25]에 입대하여 병역에 임했지만, 얼마 안 가 중정 야구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남은 복무 기간은 육군 야구단에서 보냈다고 한다.관련 뉴스
이후 한국운수가 매각으로 구단명이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야구단[26]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끝까지 4번 타자 자리를 고수하던 김응용은 1966~1972 시즌에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김응용은 맥주팀과 은행팀에서 자신이 뛰어 봤기에 돈 세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걸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아주 잘 써먹었고 휘하 코치들에게도 전수시켰다고 한다.[27]
2.2. 지도자 경력
2.3. 프런트 경력 및 야구 원로 활동
2.3.1. 삼성 라이온즈 사장
감독 퇴임 직후인 2004년 12월 1일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야구인 출신으로는 최초의 야구단 사장 취임이다.[28]평생 동안 야구 현장에 있었던 인물답게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해태 시절 수제자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현장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프런트로서 구단 지원 임무에만 충실했으며 특히 선수 스카우트와 신인 육성에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투자를 하였다. 미래의 삼성 선수가 될 만한 자원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리틀야구 경기를 찾아다녔던 것도 삼성 사장 시절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이 당시 김응용의 눈에 들었던 선수가 훗날 그의 직접적 후원을 받게 되는 좌완투수 심재민이다. 다만 모교 사랑이 지나쳐서 삼성의 연고 학교도 아닌 개성고를 지나치게 챙긴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개성고의 연고 구단인 롯데보다 삼성이 훨씬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프런트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선수를 알아보는 눈은 여전해서 실무자들이 방출했던 최형우를 다시 불러와서 삼성의 핵심 선수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선동열 감독을 깊이 신뢰해서 2009년 시즌에 팀이 12년만에 가을야구에서 탈락했는데도 5년 재계약을 안겨주었으나 본인이 물러나면서 제자 선동열도 함께 잘렸다. 물론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삼성 라이온즈가 이룬 통합 4연패의 밑바탕에는 김응용이 구축한 라이온즈의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또한 구단이 내쳤던 장효조가 프런트로 복귀할 수 있던 것도 김응용이 구단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사실 사장을 시킨 것은 김응용에게 야구인으로서 맡을 수 있는 최고직을 맡겨서 "사장도 해 봤으니까 그것보다 더 하위 직급인 감독은 안 하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2.3.2. 야구 원로
삼성 라이온즈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제주도에 본인의 의견을 조율하여 조성한 "야구인의 마을"에 거주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 고문으로 재직 중인 것 외에는 조용히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29] 그런데 2012년 9월 13일 현장 복귀를 암시하는 듯한 기사가 올라왔다. 재미난 사실은 희망없는 모 구단이 9월 말 감독을 정하겠단 기사가 나온 후 몇 시간 뒤에 나온 기사란 것이다. 일각에서는 희망없는 모 팀이나 답이 없는 모 구단 또는 암흑기를 쉽사리 탈출하지 못하는 모 구단 감독으로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9월 17일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 경질로 인해 감독 시장은 혼돈의 카오스가...
9월 24일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2~3년 안에 우승시키고 싶다."라신다. 야구 팬들의 반응은 최강 경력의 명장 컴백이 기대된다는 의견, 최고의 명장이었던 것은 맞지만 너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실전감각이 떨어져서 안될 것 같다는 의견, 삼성 맡았을 때부터 슬슬 거품 빠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현장에 복귀해 봤자 김재박 꼴[30]밖에 더 나겠냐는 비아냥, 후진 양성 차원으로 두 번째 독립 야구단이라도 창단해서 서로 비슷한 전력의 팀으로 김성근 감독하고 붙어보면 재미있지 않겠냐는 의견 등 실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응용 감독 재임 기간의 삼성 성적은 2-1-4-2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팀의 전력과 감독의 명성에 비하면 영 초라한 성적이고 때문에 김응용 감독의 까들이 그를 거품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 절하가 말이 안되는게 20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 못 하고 있던 팀 우승시킨 게 영 초라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국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복귀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연령대의, 독수리 요새나 칰갤따위는 전혀 모르는 충청도 연고 빙저씨들이나 국내야구 갤러리 상주 칰키워들 같이 거의 원리 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골수 이글스 팬들도 김응용 부임에 대해 최소한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김응용의 감독 스타일이 지금의 한화에게 제일 필요한 요소인 '패배주의 탈출'과 가장 잘 맞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2012년처럼 경기 분위기 망치면 즉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잘 돼서 성적 오르면 좋고, 설령 망하더라도 과거의 철천지원수를 확실하게 잘근잘근 씹어줄 수 있으니까
한화 감독을 끝낸 뒤에는 2015년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10개 구단 감독들이 전달하는 공로패와 꽃다발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31]
이후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2016년부터 가칭 '김응용 필드'라고 불리는 야구장을 짓는 중. 그 외에 아마야구와 사회인 야구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2.3.3.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대한야구협회와 전국야구연합회, 대한소프트볼협회의 통합으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2016년 6월 출범하였고 많은 공석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은 신임 수장이 누가 될 지 촉각을 기울였다.그러다 20일 회장 선거를 10일 정도 앞두고 출마 선언을 하였다.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일구회 등의 원로 협회의 지지를 받았으며, 선동열 감독 등의 지지에 매우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공약으로는 야구계의 공정함과 성인야마선수 확대 지원을 내건 이계안 후보[32]와 달리
이윽고 2016년 11월 30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회장 선거에서 127명 중 이계안 후보가 받은 41표와 무효표 1표를 합한 42표의 3배 정도 되는 표를 받고 당선되었다. 2016년 12월 9일 대한체육회의 승인을 얻었으나 2017년 1월 16일에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관리 단체에서 해제되어 이 때부터 제대로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선이 된 후 아마 야구계가 늘 그러하듯 실망스러운 행적만 보인단 지적이 있다. 이는 그 동안의 많은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하지 못함에 따른 지적인데, 한편으로는 그 문제 많던 곳을 큰 잡음 없이 통합된 상태로 잘 이끌어 갔다는 평도 있다
공으로는 통합 직후의 상황에서 파벌 싸움 없이 협회를 이끌어 갔다는 점, 고교 야구 투수의 투구수 제한 규정 강화 등이 있다.[34] 문제는 이게 사실상 공로의 전부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문제라 공로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임기 중 안우진에게 자격정지 3년을 부여해 WBC를 제외한 국제대회 출전을 막기도 하였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엔트리 논란이 일면서 김응용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불거진 ‘불공정’ 논란에서 선동열 대표팀 감독은 그간 관례를 깨고 아마추어 선수를 한 명도 뽑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선 감독은 “김응용 회장께 ‘금메달 꼭 따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며 이미 김 회장과 얘기가 끝났다는 식으로 말했다. 한 마디로 이미 김 회장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김 회장의 행동에 대학 야구 감독들은 즉각 반발했다. 대학야구감독자협의회는 성명서를 냈고 홍익대 장채근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김 회장과 선 감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35]
이런 와중에 김응용 회장은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최근 제안한 ‘한국야구미래협의회’를 두고 “근본적인 혁신이 우선이다. 기존 위원회를 정리하고 참신한 인물을 주축으로 새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덧붙여 프로-아마추어 상생과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야구계 전체 자성을 촉구했다.2019년 7월 4일 학생 선수들에게 불법 스테로이드를 투약한 혐의로 구속된 전 프로 야구 선수 이여상이 "김응용 회장과도 친하고 정치인이 뒤를 봐 주고 있다’는 식으로 회유했다”고 자백했다. 이에 김응용 회장은 이여상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36]
아시안 게임과 정반대로 201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아마추어 선수만 선발하는 데 목소리를 냈으나[37] 중국에게 두 번이나 역전패하며 철저하게 유린당한 끝에 올림픽 최종 예선권을 따내는 데 실패했다. 이로써 프리미어12 대표팀은 부담이 더욱 심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38] 단순히 떨어진 게 아니라 저질 스러운 경기력으로 아마추어가 왜 아마추어인지, 어째서 대학 야구 선수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기피 대상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대회였으며 실력면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이 김응용 회장 부임 전이나 후나 똑같이 저조하다는 말을 피할 수 없었다. 향후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표팀이나 드래프트에서 대학 야구 선수가 등장하는 일은 더욱 적어질 것이며 김응용 회장 역시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야구를 한국대학야구연맹에 전적으로 맡긴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한국대학야구연맹이 운영 면에서 숱한 문제를 드러내고 결국 2019년 말에 회장 공석 사태까지 가면서 한국대학야구연맹을 해체하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서 대학 야구를 다시 관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음에도 묵묵부답이다.
2019년 12월 16일에 실업야구 출범 및 창단 심의/등록 절차 안내 공지를 하면서 독립 리그 출신 선수들의 실업 야구 팀 선수 등록을 불허한 것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프로 경력자는 물론 프로 경력이 없는 선수들까지 등록 불허 결정을 내렸기 때문. 게다가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던 실업야구리그 출범은 코로나-19라는 변수를 맞아 2020년에는 아예 치르지 못했고 2021년에 들어와서도 뚜렷한 소식이 없어 사실상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야구부의 폭력 관련 부분에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비판 받고 있다.
결국 4년의 임기 후 연임하지 않고 퇴임하기로 했다.
3. 통산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 | 경기 수 | 승 | 패 | 무 | 정규 리그 | 포스트 시즌 |
1983 | 해태 타이거즈 | 94[39] | 51 | 42 | 1 | 1위 | 우승 |
1984 | 100 | 43 | 54 | 3 | 5위 | - | |
1985 | 110 | 57 | 52 | 1 | 3위 | - | |
1986 | 108 | 67 | 37 | 4 | 2위/2위[40] | 우승 | |
1987 | 108 | 55 | 48 | 5 | 3위/2위 | 우승 | |
1988 | 108 | 68 | 38 | 2 | 1위/1위 | 우승 | |
1989 | 120 | 65 | 51 | 4 | 2위 | 우승[41] | |
1990 | 120 | 68 | 49 | 3 | 2위 | 3위[42] | |
1991 | 126 | 79 | 42 | 5 | 1위 | 우승 | |
1992 | 126 | 71 | 54 | 1 | 2위 | 3위[43] | |
1993 | 126 | 81 | 42 | 3 | 1위 | 우승 | |
1994 | 126 | 65 | 59 | 2 | 3위[44] | 4위[45] | |
1995 | 126 | 64 | 58 | 4 | 4위 | -[46] | |
1996 | 126 | 73 | 51 | 2 | 1위 | 우승 | |
1997 | 126 | 75 | 50 | 1 | 1위 | 우승 | |
1998[47] | 125[48] | 61 | 63 | 1 | 5위 | - | |
1999 | 119[49] | 52 | 64 | 3 | 4위[50]/7위[51] | - | |
2000 | 128[52] | 56 | 68 | 4 | 4위[53]/6위[54] | - | |
통산 | 2122 | 1151 | 922 | 49 | | ||
연도 | 소속 | 경기 수 | 승 | 패 | 무 | 정규 리그 | 포스트 시즌 |
2001 | 삼성 라이온즈 | 133 | 81 | 52 | 0 | 1위 | 준우승[55] |
2002 | 133 | 82 | 47 | 4 | 1위 | 우승[56] | |
2003 | 133 | 76 | 53 | 4 | 3위 | 4위[57] | |
2004 | 126 | 74 | 48 | 4 | 2위 | 준우승[58] | |
통산 | 532 | 312 | 204 | 16 | | ||
연도 | 소속 | 경기 수 | 승 | 패 | 무 | 정규 시즌 | 포스트 시즌 |
2013 | 한화 이글스 | 128 | 42 | 85 | 1 | 9위 | -[59] |
2014 | 128 | 49 | 77 | 2 | 9위 | -[60] | |
통산 | 256 | 91 | 162 | 3 | | ||
총계 | 2910 | 1554 | 1288 | 68 | |
4. 논란 및 사건·사고
4.1. 참외 사건
자세한 내용은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2. 틸슨 브리또 덕아웃 난입 사건
2004년 8월 5일,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삼성 투수 호지스가 브리또를 상대로 3볼에 빈볼성 투구를 하였고, SK의 브리또가 배트를 들고 삼성 덕아웃에 난입하는 등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였다.이 과정에서 SK의 카브레라가 김응용 감독과 대치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혈기왕성한 카브레라를 제압하며 이슈가 되었다. 양준혁은 훗날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 김응용 감독이 카브레라에게 헤드록을 걸었고 같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응용 감독은 "(카브레라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말하길래 헤드록을 풀어줬다고 덧붙였다.
4.3. 발언 관련 논란
2009년 WBC 결승에서 임창용이 스즈키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내 준 것과 관련하여 '임창용이 자기 고집으로 벤치의 사인을 무시하고 정면승부한 것'이라고 말하여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61] 예전에도 메이저 리그의 박찬호가 부진한 이유를 총각이라 밤에 놀기 때문, 해태 감독 시절에 장성호를 두고 또라이라고 하거나[62], 삼성 감독 재임중 본헤드 플레이를 한 박한이를 두고 '정신병자'라고 인터뷰해 구설수에 올랐었다. 그럼에도 장성호와 박한이는 덩치큰 좌타성애자인 김응용의 총애를 듬뿍받았다.4.4. 이여상 강제 도핑 사건 논란
前 프로 야구 선수 이여상 본인이 운영하는 야구 교실에 소속되어 있는 유소년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를 직접 투약해 약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수사 과정에서 2019년 7월 4일 학부모 중 하나가 이여상이 김응용이 자신의 뒤를 봐 주고 있다는 식으로 회유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이에 김응용은 이여상이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모함한 학부모를 명예훼손으로 대응하겠다고 반응했다. #
그러나 이여상은 김응용이 한화 감독 시절이었던 2013년, 개막전 선발 2루수를 포함, 1군에서 22타수 동안 들어선 적이 있다. 한솥밥을 같이 먹으며 출전한 선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이여상이 삼성 라이온즈에 있었던 2006년부터 2008년 당시 삼성 사장은 김응용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진짜로 몰랐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김응용은 한화 감독 시절 개막 13연패 깰 때 마무리 투수 이름도 엉뚱하게 댈 정도로 선수 이름을 못 외우고 있었기 때문.한화의 몰락, 김응용 책임도 컸다 - 일간스포츠 2014년 1월 30일 기사[63] 그리고 김응용 회장은 감독 시절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사적으로 선수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스타일도 아니었다.[64]
또한 김응용은 야구계 원로 취급받는 강병철도 현역 선수였던 1973년부터 감독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30년 가까이 감독직을 맡아 작게는 수백 명, 많으면 수천 명 이상의 선수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 그 와중에 1년 남짓 본,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닌 선수를 김응용 감독이 기억하겠냐는 논리다. 김응용 회장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한화 팬들조차도 이여상이 김응용 이름을 팔았다면서 추하다는 반응. 하지만 김응용 회장도 이여상이 아니라 되려 학부모를 비난하는 건 역시 추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65]
엠스플뉴스의 후속 기사가 나왔다. 엠스플뉴스 역시 김응용이 이여상의 뒤를 봐 줬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여상이 김응용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인데, 그 때라면 김응용이 발을 빼려고 하면 했지 이여상의 뒤를 봐 줄 리가 없다는 게 이유다. 취재에 응한 야구인은 “여러 사람 이름까지 팔 정도면 이여상이 다급하긴 다급했던 모양이다. 학생 선수들에게 불법 약물을 투약한 것만으로도 야구인으로서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일인데, 감독으로 모셨던 분의 이름까지 팔아 학부모를 위협했다는 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라고 말했다. 한편 김응용은 그 학부모에 대한 고소와 함께 '이여상의 큰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5. 여담
5.1. 인물평
자세한 내용은 김응용/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2. 김응용 vs 김성근
자세한 내용은 김응용 vs 김성근 문서 참고하십시오.5.3. 야구인이 말하는 김응용
나는 감독님을 처음 만난게 73년도고, 국가대표도 해보고 해태 때도 봤지만, 82년 말엽쯤에 오셨는데 쇼맨십을 발휘하시고 선수들 장악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나를 그래도 예뻐해 주셨다. 지도자로써는 해태랑 삼성 때 같이 했었다.
김일권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도루왕,골든글러브/해태 타이거즈 코치 및 삼성 라이온즈 코치
김일권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도루왕,골든글러브/해태 타이거즈 코치 및 삼성 라이온즈 코치
김응용 감독이 어필하시면 심판들이 쫄아버린다. 관중이 일단 동요가 되며, 카메라가 다 그쪽을 향해 가니까, 심판 판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덩치가 크니까 용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지장(智將)이 맞다.
선수들이 사인해 주는 문화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표현을 하는 걸 부끄러워 하시는 거 같았다.
김성한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및 코치,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감독/홈런왕, 타점왕, 골든글러브
선수들이 사인해 주는 문화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표현을 하는 걸 부끄러워 하시는 거 같았다.
김성한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및 코치,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감독/홈런왕, 타점왕, 골든글러브
처음에 라디오 방송으로 김응용 감독님이 국가대표 4번 타자로 홈런 치는 걸 들었다. 나에겐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처음 봤을 때는 개인적으로 무서웠다. 선수로 있을 때랑 코치로 있을 때가 완전 천지차이다.
김봉연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겸 전 해태 타이거즈 코치 및 극동대학교 교수/홈런왕, 타점왕, 골든글러브
김봉연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겸 전 해태 타이거즈 코치 및 극동대학교 교수/홈런왕, 타점왕, 골든글러브
해태 타이거즈로 봐선 쉽게 말하면 단체(팀)를 잘 뭉치게 하는 건 감독의 힘이다. 수장이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저런 성적이 나올 리가 없었기에, 그 부분을 참 잘하신 거 같다.
부임하자마자 "너 어떻게 몸이 호리호리한데 9회까지 던졌냐?"라고 하신 분이었다. 섭섭한 면도 있었지만 감독님은 수장으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타자가 홈런을 쳤을 때 표현을 대놓고 하지 않으시고 속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방수원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부임하자마자 "너 어떻게 몸이 호리호리한데 9회까지 던졌냐?"라고 하신 분이었다. 섭섭한 면도 있었지만 감독님은 수장으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타자가 홈런을 쳤을 때 표현을 대놓고 하지 않으시고 속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방수원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김응용 감독이 가끔 공갈도 치신다. 룰 수첩이 따로 있는데, 심판이 쫄아버려서 그 내용을 보질 못했다. 난 명장이자 지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냥 하는 거 같아도, 뭔가 노리고 생각을 하시는거 같다. 자기 성격대로 하시는 분이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김종모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골든글러브
김종모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골든글러브
작전을 걸면 감독님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반대로 자율야구식으로 놔둬버리면 우리가 뒤집는 경기가 많았었다.
김준환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골든글러브/1987년 한국시리즈 MVP
김준환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골든글러브/1987년 한국시리즈 MVP
심판들한테는 경계대상 1호였다. 항상 김응용 감독 주제가 1번이었고, 상당히 영리하신 분이었다. 기본적인 스트라이크, 볼 판정 외에도, 볼 높낮이로 많이 보는 편이었다. 언쟁을 벌이면 다른 때 같은 경우엔 감독들이 보통 들어가는데 안 들어가신 적도 있었다. 굉장히 수가 많으신 분이다.
장진범 전 심판/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장진범 전 심판/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회사에 대한 불만도 있고 여러 입장은 다 틀리지만 내가 1차 지명으로 왔을 때는 훈련을 3일 하고 하루 쉬고 해서 적응이 잘 안 되었다. 익숙해지니까 적응이 되었는데, 지금 보면 감독님이 성질을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싶다. 화도 내시고 하지만 금방 풀어지신다.
정회열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및 전 KIA 타이거즈 수석 코치
정회열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및 전 KIA 타이거즈 수석 코치
이순철 선배 대신 나와서 처음으로 중견수를 봤다. 하루는 종범이가 1번 치고 내가 2번을 쳤는데, 감독 지시도 없이 종범이는 나보고 "형 무조건 가운데만 쳐"라고 했다. 서정환 코치도 치라고 했고, 1회전에 종범이가 딱 살아나가고, 감독님이 사인도 안내고, 초구 딱 쳤는데 써드 원바운드로 가서 병살을 당했다. 그정도도 야구를 못하냐고 핀잔을 한번 들은 뒤, 2차전에 또 2번을 쳤는데, 종범이가 또 살아나갔다. 이번에도 똑같이 노렸더니 홈런이 되어 버렸다. 감독님은 말 한마디도 안하셨다. 그 이후로는 나도 종범이가 나가서 도루하면, 이윽고 내가 치고 써드로 보내 줬다.
이건열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이건열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엘지에서 타격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FA 미아가 될 뻔 했다. 갈 곳이 없어서 이치훈한테 '메이저 리그로 다리를 좀 놔 달라'고 얘기했다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김응용 감독님이 '양준혁이 와야 우승을 할 수 있다'라고 결단을 내리셔서 그때 삼성으로 갔다. 삼성에 가서 하시는 말씀이 "팀의 리더가 되어 달라."라고 부탁하셨다. 선수를 가장 먼저 생각하신 분이었다.
양준혁
양준혁
하루는 전주 구장에서 쌍방울과 시합을 하는데 지면 야구장에서 자꾸 뭐가 날라왔다. 감독님이 그 덩치에 겁이 많으셨다. 연습생 시절 때는 내가 보안 요원까지 했고 지는 경기가 있었으면 장성에서 내려서 광주까지 뛰어오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경운기를 타고 왔고 나는 뒷정리까지 해야 되니까 제일 늦게 왔었다. 감독님이 대기만성형 선수라고 말해주시니 "보이기 시작하셨구나" 하고 평했다.
송유석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송유석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난 해태에서 가장 오래 선수 생활을 했다.[66] 다른 팀에 가니까 '김응용 감독이 명장이구나' 하고 정확히 느꼈다. 쉽게 말해서 선 위에는 전혀 침범하지 않고 선수를 믿어주는 야구를 했다. 훈련을 질질 끄시질 않았고 내 스스로도 조명이 되었다. 2000년 SK로 이적하면서부터는 어디서든 대한민국 최고 감독은 김응용이라고 한다.
김정수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1986년 한국시리즈 MVP
김정수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1986년 한국시리즈 MVP
감독님한테 한번 달려든 이후 화가 나도 감자(욕)은 안하고 뒤에서 종이를 찢는다. 감독님이랑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햄버거를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이건열 선배가 만루홈런을 치는 순간 햄버거가 목에 걸려 화장실로 가셔서 가슴을 치고 계셨다. 감독님은 선수를 전혀 안 건드시고 오히려 코치들을 건드신다.
최해식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최해식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감독님은 투수를 좋아했다. 특히 젊고 덩치가 있는 왼손 투수. 원래는 야수 버스를 탔는데 어느 순간 투수 버스를 타셨다. 수석 코치 유남호, 투수 코치 이상윤과는 우리끼리도 막 떠들고 다 하는데 감독님이 오시니까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감독님만 타시면 버스에서 말을 못했다. 13년 동안 감독님과 함께 했는데 차분하시기도 하고 급하면 말을 약간 더듬으신다. 시합에서는 약간 소심하신다.
강태원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강태원 전 해태 타이거즈 선수
사장님께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사장님과 함께한 해태 11년 동안 두 번이었던 것 같다. (2005년 삼성 감독 시절)
선동열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및 KIA 타이거즈 감독/다승왕/골든글러브/정규 시즌 MVP
선동열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및 KIA 타이거즈 감독/다승왕/골든글러브/정규 시즌 MVP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하고 처음이자 유일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이종범 전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선수/도루왕/타격왕/골든글러브/정규 시즌 MVP/1993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MVP
이종범 전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선수/도루왕/타격왕/골든글러브/정규 시즌 MVP/1993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MVP
1년 동안 한 마디 하셨다. "열심히 해라!"라고.
송구홍
송구홍
고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이호준
이호준
나를 믿고 게임을 보내 줬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왼손잡이 타자에 대해선 굉장히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지나면서 보면 나를 좋아하니까 쓴소리도 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박재용
박재용
5년 동안 있으면서 말을 딱 한마디했다. 단 둘이 있는걸 불편해하신다. 엘레베이터에 타면서 "밥 많이 먹어라. 그래야 야구 잘한다."라고 하신 게 끝이다.
구한성
구한성
시합 뛰고 이듬해에 군대를 갈 예정이었는데, 감독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허나 해태라는 곳에서 외야수들이 너무 강했다.
당시 원정 게임을 가면 감독님은 아침 7~8시 쯤에 로비에 나와 앉아 계셨다. 선수들 관리를 하셨고, 밥 먹고 항상 사우나를 가셨다.대구에서 아침에 운동을 하다가 들어왔는데, 감독님은 사우나에 계셨다. "뭐 하다 왔냐"라고 묻길래 대답했더니 "아침부터 왜 이리 힘을 빼냐?"라고 하셨다. 김응용 감독님은 야구 선수가 잘 치고 잘 던지면 되니 미리 아셨다.
강상진
강상진
대만으로 전지훈련을 가서 한번은 쉬어야 되는데 안 쉬었다. 성한이 형이 묘수를 제안해서 선동열이 쓰러진 연기를 했다. 감독님은 훈련 올스톱 시키고 숙소로 들어가는 지시를 했다. 이건 이강철이 쓰러져도 될 일이 아니다.
김태완
김태완
먹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쓰신다. "토끼랑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라고 질문할 때, 선수들이 답변을 하고 질문이 이어지자, 김응용 감독의 대답이 "사자는 고기를 먹으니까 이기고 토끼는 풀을 먹으니까 지는 것"이라 했다. 그 이후로 우리 저녁식사는 365일 무조건 고기였다. 또, 친구 영식이가 해태 지명받고 왔는데, 집에서 중국 음식을 시키면 3명이 집에 있는데 보통 우리는 '짜장 3개, 탕수육 하나' 를 시키는데 감독님이 탕수육까지 세 개를 시켰다. 음식도 많이 사 주시고 손 내밀어 보라고 하면 돈도 주셨다.
배영수
배영수
나를 어디 다른 팀에 가지 않게 하려고 못박아 두셨다. 거의 아들 수준으로 예뻐하셨다. 새벽에 불러서 운동하고 맛있는 거 사 주시고 같은 집에서도 산 적이 있다. 투구폼 교정도 시킨 적도 있었다.
박진철
박진철
나는 별로 신경을 안 쓰셨었다. 마르고 말을 안 들었었다. 허나 하와이에서 연습 게임인데, 잘 던졌더니 감독님이 손을 내미셔서 지폐를 주신 적이 있다.
임창용
임창용
대만 전지훈련때는 몸이 약하니까 살을 찌워야된다고 선수들한테 맥주를 주셨다. 감독님에게는 잠재력이 눈에 보이는 선수였다.(방수원 증언)
최향남
최향남
제가 선수할 적에는 배려심이 많은 분이었다. 감독님을 다른 사람들이 보실 때 되게 무섭다고 얘기하는데, 고참들을 많이 아껴주셨다. 동계훈련때 겁을 한번 주시는데, 처음에 들어온 선수들은 되게 겁을 먹는다. 83년도 한국시리즈에서 전 게임을 다 나갔었는데, 아무래도 큰 게임이니까 여러 경험으로 봐서 날 써주지 않았나 싶다.
김일환
김일환
시합을 대타로만 많이 나간적이 있었다. 왼손 타자다 보니까 나를 좋아하신것도 있고, OB에서 1차지명을 받았었는데 남정진 과장이 OB에서 해태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프로 데뷔 이전에 실업야구팀 농협에서 5게임인가 남을 시점에 성적이 좋았고, 시즌 끝나고 농협야구단은 해체가 되었다. 나는 어디 갈 데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이 때 마침 김응용 감독이 콜을 주셨다. 종로 1가에서 협상을 했고, 해태와의 계약 날짜는 1983년 1월 23일이었다.
송일섭
송일섭
선수 생활 할 적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감독님 특징 중에는 믿음을 준 선수에게는 전혀 간섭을 안한다. 말을 안 하면서 끌고 간다. 외부적인건 쇼맨십이고, 감독 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었기에, 나는 그 분 밑에서 선수부터 코치까지 9년정도 했다. 코치 때 하나는 사직에서 지고 광주로 출발했는데 지리산으로 들어갈 적에 운전기사한테 "차 세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열과 나를 불러서 지리산 초입일 때 "사인 낸 거 맞냐?"라고 물었다. "네"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차를 지리산 골짜기에다가 정차시키더니 "내려"라고 말했고 섬진강 휴게소부터 (걸어갔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에 올라올 이야기고 "저 정도 했으니까 아홉 번이나 우승하시는구나" 하고 스스로 느낀다.
서정환
서정환
경기 중에 초반에 안 풀린다면 김봉연 코치님이 소집을 하셨다. 점수만 내자고 했는데,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경기도 있었다. 고참 선수들한테는 굉장히 강하게 하시고, 젊은 선수들한테는 온화하게 하셨다. 어린 선수들을 보고 "쟤가 야구 제일 잘한다"라고 관심을 보이시고 북돋아 주시기도 했다.
양회열
양회열
김응용 감독님이 요근래 "프로팀 창단을 하게 되면 1순위인 줄 알았다"라고 언급했고 원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 다짜고짜 사인부터 하셨었다. 서울에서 야구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오라고 했고 술 먹다가 해태로 가니 작은 선수들 가지고 청룡의 호화 선수들을 이겼고 대타로 수훈 선수도 했었다. 한번은 술 먹다가 감독님한테 걸린 적도 있고 그 다음날에 참 많이 혼났었다.
양승호
양승호
지금도 무서운 분이다. 1차 1번 지명받아서 나름대로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햐루는 담판을 지은 적이 있었다. 담판 이후 김 감독님은 저를 써 주셨다. 내가 감독이고 나 같은 선수가 그렇게 했다면 안 써 주는데 써 줬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쌍방울에서 은퇴를 하고 해태로 와서 김응용 감독님이 써 주셨다. 정말 고마운 대인이다.
장채근
장채근
5.4. 기타
- 호적상으로는 1941년 9월 15일생이지만 실제로는 1940년 음력 3월 1일[67]생으로 평안남도 숙천군[68] 출신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6.25 전쟁 발발로 아버지 손에 끌려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이북에 있었을 때는 축구를 했다고 한다. 1954년에 부산 개성중학교[69]에서도 축구를 했으나 야구부 주장이 와서 "넌 이제 야구 선수다"라고 하는 바람에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상고 시절 한때 유니폼을 똑바로 입지 않기도 하고 학교 대신 번화가에 놀러가는 등 비뚤어지기도 했으나 어우홍 감독의 애정 어린 지도 덕택에 마음을 고쳐먹고 활약하기 시작했다. 박영길이 술회하기를 부산상고-경남고 시합에서 김응용이 홈런을 치면 "에헤이~"하고 환호하며 경남고 1루수의 엉덩이를 딱 때리면서 2루로 달려갔다고 한다.
- 평소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잘 안 하기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선수들에게 정을 줄까 봐 일부러 안 한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가 홈런을 칠 때만 안 할 뿐[70] 경기에서 이긴 뒤엔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은 선수가 홈런 칠 때는 물론 경기에 이겼을 때도 하이파이브를 잘 안 한다.[71] 장성호는 김응용 감독이 팀이 끝내기로 이기면 혼자 덕아웃을 빠져나가 손목 운동을 하면서 흡족해한다고 증언했다.
- 화려한 행사도 싫어하고 약간의 의전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2012년 이종범의 은퇴식 때 초/중/고/대 소속팀들의 관계자와 함께 흙을 붓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때 이종범에게 "야, 뭐 복잡한 게 있냐?"라고 말해서 시청자들을 웃겼다.
- 강영식과 채태인이 예전에 김 감독의 집에서 숙식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두 선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야구를 못할 뻔했는데 김응용 감독이 집으로 데려와 자식처럼 키우다시피 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김 감독이 좋아하던 덩치 큰 왼손잡이 선수였고 더구나 채태인은 까마득한 고등학교 후배였다. 그리고 둘 다 김 감독이 휘하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강영식은 2000년 해태 감독 시절 1년간 데리고 있었고 훗날 삼성 감독으로 온 뒤에는 프랜차이즈 외야수 신동주를 내주는 조건으로 강영식을 데려왔다.[72] 채태인은 감독이 아닌 사장 시절에 데리고 있던 선수였는데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당시 삼성의 지명을 한 것도 사장이던 김응용이 채태인의 지명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 임창정,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카메오로 나온 적이 있다. 극중 경기는 대부분 LG 트윈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이다 보니 특별 출연한 듯. 영화 DVD의 특전영상에 김응용의 NG씬도 2컷이나 들어가 있다?![73]
- KBO 리그 감독 중 김성근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다. 20년 정도 전까지는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코끼리 감독 혹은 김응용을 알고 있었을 정도. 선동열과 이종범이 모두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인터뷰에서 나온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명언은 그 당시 최고의 유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연예인들이 김응용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철옹성 같은 카리스마의 대명사였던 김응용 감독의 이미지가 "푸근한 옆집 아저씨"로 개선되기도 했다.
-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프로 야구 선수 위주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야구 종목에서 딴 첫 메달이자 역대 국가대표팀 가운데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대표팀의 금메달 다음 가는 성적이다.
- 2004년 8월 5일 문학구장. 12-5로 삼성이 앞서 있던 8회 초 삼성 진갑용이 타석에 들어서려고 할 즈음, SK 덕아웃에서 느닷없이 김기태가 뛰쳐나와 백스톱 쪽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삼성 덕아웃으로 달려갔다. 다만 김기태는 싸우러 간게 아니라, 삼성의 덕아웃을 급습하던 브리또를 말리기 위해서[74] 간 것이었다. 그리고 SK 선수들이 그 뒤를 따라 삼성 진영으로 줄줄이 쳐들어가며 벤치 클리어링이 발발하였다. SK 외국인 선수 호세 카브레라가 김응용 감독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포착됐으나, 김응용 감독이 카브레라의 목을 휘감고 제압했다. 당시 64세. 다음날 김응용 감독에게 헤드록을 당한 카브레라는 구토와 어지럼증을 느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삼성 포수 진갑용에게 역시 헤드록을 당했던 SK 포수 박경완 역시 목 부상을 입었다.
- 2009 WBC 감독 선발 문제가 뜨자 선동열 삼성 감독이 김응용 삼성 사장을 대표팀 감독으로 추천하며 자기가 불펜에서 대기하겠다는 농담을 했다.
-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몰래 온 손님이 이종범과 양준혁이 나왔다. 양 구단의 감독으로 우승을 거뒀고 양팀구단을 대표하는 선수라 섭외가 된 듯하다. 그간 섭외가 많았음에도 단독 방송은 처음이라고 한다. 인간적인 모습들이 꽤 나오니 팬이라면 꼭 보는 것을 추천한다.
- 가족으로 아내와 딸 둘이 있다. 아내 최은원[75] 여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나왔고 두 딸이 모두 음악을 전공했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기러기 아빠 신세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홀로 지내다가 해태 말기에는 방세조차 내기 힘든 신인들을 불러들여 자기 집에서 지내게 했다. 그런데 해태 말년에는 해태가 가난한 팀이라 그런지[76] 두 딸의 미국 유학비를 대느라 월급에서 남는 게 거의 없었고 이전에 저축한 돈도 까먹었다 한다.[77] 신인 투수 조지훈과 김강래에게 한우를 사 줬다가 손에 쥔 60만 원짜리 계산서를 들고서 '통장 잔고 확인해 봐야겠다' 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
- 김응용 전 감독이 2012년에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펜스 거리 짧지 않나?"라고 지적을 하였고 한화는 바로 펜스를 뒤로 미는 공사를 하였다. 이후로 펜스 근처에서 공이 잡힐 때마다 응용존이 1승 했다는 드립이 생겼다.
- 애정통일 남남북녀에서 스승의 날을 기리기 위해 양준혁과 김은아가 김응용과 만나게 되었다. 경기도 용인시에 소유한 대지[78]에 농사를 짓고 여생을 보내는 중. 방송을 보던 야구 팬들은 한화를 떠나서 신수가 훤해졌다고... 양준혁이 김은아에게 김응용 전 감독은 뜬금없이 직구를 던지는 걸 좋아한다면서, 김응용에게 고기 사먹게 용돈 달라고 하자 지갑에서 5만 원을 꺼내 줬다. 하지만 밭을 멘다고 사람 쓰면 일당으로 백만 원 정도는 들 평수를 양준혁이 하게 됐다.
- 방송 막바지에서 이북 출신인 김은아 양이 이북식 반찬을 해와 김응용에게 전달하자 눈시울 붉히는 모습을 보여 야구 팬들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이북식 음식을 보자, 김 감독은 어머니와의 추억과 이북식 닭곰탕인 온반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의사가 하루에 한 잔만 술을 하라고 했다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괜찮다면서 여러 번 마시며 고향의 어머니와 가족을 그리워 하는 모습을 보여 시청자를 애잔하게 만들었다.
- 김응용 전 감독의 덩치가 20대에는 지금보다 더 좋아 엄청나게 크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신발사이즈가 310mm이라는 얘기에는 다들 더욱 놀란다고 한다. 하긴 185cm 키에 발도 그만큼 크면 이상한 건 아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300mm대 신발을 신는 사람을 대한민국에서 찾기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놀랄만도 하다. 국내에서는 300mm대 신발이 많이 없는지라 신발을 사야 할 때는 스프링캠프 등 해외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 한번에 몇 켤레씩 잔뜩 사들고 왔다고 한다.
- 선수들의 개인 타이틀을 챙겨주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타율 타이틀의 경우 누적 스탯이 아닌 비율 스탯인지라 자칫하다간 타율을 까먹을 수 있기 때문에 시즌 최종전에는 내보내지 않거나 심지어 자팀 선수의 라이벌 선수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면서 타이틀을 챙겨주는데 김응용의 경우 '진정한 리딩 히터는 마지막 경기까지 뛰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고 일본에서 선수 생활 후 한국으로 건너온 감독들의 타이틀 챙겨주기 움직임을 굉장히 싫어하였다. 김일권이 국가대표 시절 세계 대회에서 수위타자 등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나 김응용은 '쳐서 먹어 임마'[79] 한 마디로 일축하고 김일권을 1번타자로 기용했고 그날 5타수 2안타를 치면서 수위타자 타이틀을 내줬다고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성한, 김종모, 김일권이 술회했다.
- 휘하 선수들에게 고기를 매우 많이 먹을 것을 강조했다. 그러는 한편 본인 또한 고기를 매우 많이 먹었다. 이유야 당연히 운동선수는 육체 노동을 하는 직업답게 단백질 섭취를 매우 중요시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80] 선수 식당에서도 본인이 직접 선수들 상대로 매 끼니마다 잔반 검사를 했을 때 '밥을 남기는 것은 용서를 해도 고기를 남기는 것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휘하 선수들에게 고기를 최대한 많이 사 주고 그걸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먹였다고. 김응용 본인도 고기를 상당히 좋아하며 해태 시절의 제자들에 따르면 햄버거를 많이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 2015년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최초로 그의 공로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제안자는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이며 이날 김응용 전 감독은 나눔 올스타팀의 감독인 염경엽(넥센 히어로즈) 감독을 대신해 1회의 감독을 맡았다.
- 정치 성향은 호남 지역에서 오래 머물러서인지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운 인물이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 선언했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지지하는 사회 각계인사들 모임 '더불어 포럼'에서 공동대표를 맡았다.[81]
-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마운드에 오를 예정이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 김응용 회장…애국가 제창 백지영 그런데 이날 김응용을 능가하는 깜짝 손님이 등장하였다.[82] 2017년 한국시리즈 문서로. 대통령 보안상 김응용 감독을 시구자로 홍보하고 진짜 시구자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에선 타이거즈를 9번 우승시킨 감독이고 한국 야구계에 공로가 큰 사람을 대통령이 병풍 취급 하지 않았냐 하는 비판의 목소리들도 있었다.
- 2019년 12월 10일에는 해태, 삼성 감독 시절 제자, 동시대에 활약했던 야구 원로들과 함께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팔순연 잔치를 열었다. 2020년 4월이 되어야 정확히 팔순을 맞이하지만 프로 야구 시즌 등의 일정으로 야구인이 다 모이기 힘든 점을 고려해 2019년 말로 앞당겨 팔순 잔치를 치르기로 했던 것이다.[83] 여기서 타이거즈VS라이온즈 레전드 매치 기획도 나왔다고 한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해태, 삼성 두 군데서 다 뛰어 본 이순철, 양준혁, 조계현.
-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을 제외하면 한국 야구에서 드물게 야구 인생에서 '다' 성공했다. 이 말인 즉슨, 베이징 올림픽 우승 감독이지만 늘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하는 김경문 감독, 국제전 최고의 감독이지만 한화에서는 죽을 쓴 김인식 감독, 삼성 라이온즈의 통합 4연패와 정규 리그 5연패를 이뤘지만 국제 대회에서는 약한 류중일 감독과 달리 선수 시절도 화려하고 리그에서도 감독으로서 해태의 9번 한국시리즈 우승과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데다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을 꺾고 한국에게 동메달을 안기는 등 KBO 리그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모두 성공했다는 얘기. 심지어 프런트 수장으로서도 삼성 왕조 설계로 크게 성공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해태 선수들이 말하길, 덩치에 맞지 않게 소심한 성격이라고 한다. 그의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강태원, 김일권, 이건열, 장채근, 최해식 등이 밝힌 일화로,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이 자신의 방을 찾아올때 뭔가 불안하다 싶으면 문고리를 걸어놓은 상태에서 문을 빼꼼 연다던지, 경기 중에 뭐가 불안한지 종이를 찢는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종이를 찢다가 경기가 끝나고 나면 오더지가 반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본인은 그런 소심한 성격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선수들을 때리고 폭군처럼 군림했다고 한다. 1980-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에 있으면서 자기 눈에 거슬리면 바로 발길질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져 공포 분위기를 조정하면서도, 막상 중요한 경기에서는 타석에 선 타자를 제대로 못보거나, 마운드의 투수에게 뭐라 말을 못하고 코치만 보냈다고 한다. 이순철이 말하기를 보기에는 굉장히 대범하고 냉혹해 보이는 분인데, 옆에서 보면 무척 여린 사람이더라.라는 평가를 했고 과거의 악연을 이후 화해하면서 이해가 간다는 평을 남겼다.
- 삼성 감독 시절 부산상고 47회 동기생인 정규창 교장이 개성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부산 원정 때 꼭 야구공, 야구 방망이를 들고 모교를 방문했다. 정규창 전 교장이 재학생 당시 김응용 전 감독은 주위 학생들의 도시락을 다 까먹고 시치미를 뚝 뗐다고 술회했는데 이제서야 그때 까먹은 도시락 값을 한다고 웃었다.
- 삼성 사장에 취임할 당시 부산상업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축하 화분을 받았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이참에 야구장 좀 지어 달라고 대통령한테 부탁하는 게 어떠냐는 부추김에 '왜들 그래? (야구장 건설) 그런 것도 다 법규와 절차에 따라 하는거지 지금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시대냐'며 곤혹스러워하기도 했다.
- 본인이 미국 대학팀에서 연수를 받은 덕에, 1983년 초 동계 훈련 기간에 자율 야구의 일환으로 배구공을 훈련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기리그 우승 및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 술을 좋아하여 해태 감독 시절 저녁 식사때마다 맥주 3병~4병을 반주로 들이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8년 시즌 팀의 모기업이 경영난에 처하고 마침 의사의 절주 권고도 받아 이후로는 술을 절제하는 편이다.[84]
- 김영덕 전 감독에게 매우 강했다. 해태 감독 시절 한국시리즈에서 4번 맞붙어 모두 승리했다.[85] 허나 강병철 전 감독에겐 매우 약했는데 강병철 감독이 롯데 감독 시절인 1992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는 2위로 우위에 있었으나 2승 3패로 업셋을 허용했고 강병철이 한화로 옮긴 1994 준플레이오프도 해태는 3위로 우위였으나 2연패로 탈락했다. 강병철과의 대결에선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야구 팬들이 매일 논쟁하는 김응용 vs 김성근 대결에선 모두 승리했다.[86]
- 202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제자들인 김성한, 김종모와 함께 2017 한국시리즈 이후 7년만에 시구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KIA와 삼성의 한국시리즈다 보니 본인이 우승을 했던 팀들의 대결에서 시구를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립적으로 지켜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6. 관련 문서
[1] 음력 1939년 3월 1일, 호적상 생년월일 1941년 9월 15일. 다만 1940년도 입학 연령이지, 실제 생년월일은 1939년이라고 한다. 기사[2] 1913년까지 줄곧 숙천군 소속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평원군에 편입된 것이며, 1952년 북한 정권의 군면리 대폐합으로 다시 숙천군으로 환원되어 숙천군 대성리에 편입되었다.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으로는 평원군 소속.[3] 기사[4] 플루티스트.[5] 現 성지초등학교.[6] 現 개성고등학교.[7] 現 고려대학교로 흡수합병됨.[8] 2000년 10월 30일 오전 10시 해태 구단 사무실에 들러 작별 인사를 했다. 1983년에 해태 감독직을 맡아 2000년까지 무려 18년이나 해태 감독을 맡았다. 1983년에 태어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또한 김응용이 타이거즈 감독을 시작할 때 44세로 젊은 편이었으나 끝날 때는 61세로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다. 요즘처럼 프런트가 주축이 되어 구단을 경영하는 체제라 성적이 조금 안 좋아도 해임되는 시기에는 절대 깨질 수 없는 기록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 류중일이 2011~2014 네 시즌 연속 통합 우승을 이끌었으나 2016 시즌의 급추락으로 바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두 번째로 오래한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이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1년이나 했다. 현대 구단이 1996년부터 KBO에 참가해 2007년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 구단사의 거의 전부를 김재박 감독이 이끈 셈이다. 현대의 말년인 2007 시즌은 김시진 전 감독이 지휘했다.[9] 2000년 10월 30일 오후 2시 입단 기자 회견. 해태와 삼성을 거쳐 무려 22년 동안 감독 생활을 쉬지 않고 해 왔다.[10] 흔히 '야구의 신', '야신'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당시 인터뷰에서는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고 말했다.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인터뷰에서 "저는 야신이라고 안 하고 그냥 신이라고 했었는데, 신도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하며 "김성근 감독이 (포스트 시즌에서) 나한테 이긴 적이 없는데, 거기가 야구의 신이면 나는 뭐냐"며 해명했다. 김응용의 말대로 김성근은 가을야구에서 김응용을 이겨본 적이 없다. 2002년 이전에도 OB 감독 시절이던 1987년 플레이오프와 태평양 감독 시절이던 1989년 플레이오프에서 김응용과 맞붙어서 패배한 바 있다.[11] 1977년 IBAF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대표팀을 이끌고 우승했다.[12] 1983년~1997년 15년간 9번의 우승.[13] 김응용 개인의 준우승은 두 번뿐인데 이는 해태 시절에는 없던 것으로 모두 삼성 감독 시절이었다. 심지어 해태 시절은 정규 리그 1위가 아닌 상태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도 우승했다. KBO 단일리그 도입 후 최초의 2위 우승이 1989년 해태 타이거즈다. 이후 해태-KIA 타이거즈는 12회 진출 12회 우승이라는 한국시리즈 불패 기록을 유지 중이다.[14] 1300패로 최다패 1위의 기록도 갖고 있다. 다만, 감독 생활을 누적 24년이나 한 만큼 누적된 패도 많기 때문에 생긴 기록인 것이다.[15] 2위는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본인을 쓰러트린 김재박 전 감독과 삼성 시절 코치로 본인을 보좌했던 류중일 감독의 4회.[16] 1995년에 4위를 기록했지만, 3위와 승차가 3게임 이상 나게 되면 준플레이오프가 생략된다는 당시 규정상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진 못했다.[17] 양현종, 김성한, 이강철 등과 함께 타이거즈 영구 결번 0순위이기에 39번과 70번 중 어떤 번호가 적합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에 리그 최초의 양번호 결번이 제안되었으며, 타이거즈에서만 9번의 우승이라는 전설적인 업적에 부합하는 제안이라는 의견이 많다.[18] 現 농협.[19] 김봉연은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했는데 1983년부터 김응용 감독 밑에서 말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김봉연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은퇴 후 코치 생활을 하면서 선수 김봉연과 코치 김봉연을 대하는 태도는 천지차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응용의 차기 감독직을 꿈꿨던 김봉연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건넸고 그 이후로 경기장 밖에서 만난 적은 없다고 밝혔다.[20]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김응용이다.[21] 생김새를 보고, 김하성이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많다.[22] 체중은 크라운맥주 시절 많이 늘었다고 한다. 위의 부산상고 시절 사진과 아래의 1965년 사진을 보면 확연히 다른데, 크라운맥주 당시 영업을 뛰면서 맥주를 많이 마셔서 체중이 늘었다고 한다. 그 '영업'이라는 건 선수들이 모여서 명동 등지의 호프집을 다니며 자기들도 돈 내고 마시는 손님인 것처럼 테이블을 잡고 앉아, 경쟁사 맥주를 비하하며("그 맥주는 마시면 설사가 나서 못 먹겠다" 등), "맥주는 역시 크라운맥주가 최고다!" 등의 찬사를 선수들끼리 떠들어 대면서 크라운 맥주를 맛있게 마셔대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 주는 것. 맥주와 안주를 배 터지게 먹고 계산한 뒤 다음날 영수증을 회사에 제출하면 정산해주었다고 한다. 바이럴 마케팅의 오프라인 버전이다.[23] 이 별명 창안자는 당시 동아방송 야구 해설 위원 손희준[87] 이었으며, 2019년 10월 16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언급됐다. 이 썰 외에도 또 다른 썰은 당시 야구 중계를 맡은 해설자가 지어낸 썰로 그 해설자가 경기를 중계하는 도중 김응용 선수가 공을 잡아내는 장면을 보고는 "참~ 체격도 큰 거구의 김응용 선수가 꼭 코끼리가 과자 받아먹듯이 공을 잘 잡아서 아웃시킨다"라고 말하며 표현했고 이것이 코끼리란 별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썰을 말해준 사람은 하일성 해설 위원으로 당시KBS N SPORTS에서 방영된 '한국야구 레전드(現 The 레전드)' 김응용 감독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 썰을 풀게 되었다. 후배 강병철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김응용의 동료이자 절친 박영길도 키가 크고 한 덩치했던지라 둘을 엮어 '코코 브라더스'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24]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김응용은 오히려 자기에게 대드는 배짱을 높게 평가했다는 거다. 이 후 김무종이 부진할 때마다 김응용은 바로 장채근을 투입시켰고, 결국 장채근은 김무종의 뒤를 이어 해태의 주전포수로 활약하게 된다. 어찌보면 대인배스러운 측면. 류중일도 이와 비슷하게 코치시절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응용에게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해 도리어 높게 평가했던 일화도 있다. 류중일 문서로.[25] 당시 먼저 창단했던 양지 축구단과 함께 지금으로 치면 야구판 실미도였다. 그러나 양지 축구단도 창단 3년 만에 해체되었다.[26] 한일은행은 당시 실업 리그 최강팀이었다. 김응용과 같이 뛰던 멤버로 5년 선배인 투수 김영덕, 후배로 3루수 강병철(심지어 똑같은 부산상고 출신이다.) 등이 있었다.[27] 지금은 공식적으로 금지된 사항이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프로 야구에서는 금일봉이라는 것이 있었다. 경기에 이기면 기여도에 따라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의 현금을 선수들에게 이튿날 일괄 지급하는 것이다. 프로 선수들이 1군에만 있다면 경기에 나가지 않아도 최소 1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삼성같 이 돈 많은 기업 구단은 연봉 이외에 이 금일봉을 굉장히 넉넉하게 줘서 모 선수는 연봉에 손을 안대고 금일봉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마침 2000년대 초반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은 김응용이었는데 승리한 경기 이튿날 코치진이 아침부터 출근하여 마치 은행 결산 시간처럼 테이블에 죽 앉아서 감독과 함께 현금 만 원을 다발로 세어서 선수별로 봉투에 넣어 주고 있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28] 보통 구단 대표이사직은 모기업 출신이 맡으면 전무 ~ 부사장 보직이나 김응용은 확실히 사장급 대우를 받으면서 사장으로 재직했으며 이건희 삼성 회장의 배려로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도 참석할 권한을 가졌다고 한다. 야구계에서 워낙 이름값이 높은 사람인지라 이런 인사가 가능했다.[29] 고문 시절에도 스카우트들을 갈궈서 구자욱을 뽑기도 했다.[30] 김재박은 LG 감독을 하면서 5-8-7로 부진했다. 다만 현장 공백은 없었고, 현대와 LG 구단은 성향이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31] 이 사진 속의 10개 구단 감독 중에서 김응용과 직접적인 인연을 가진 인물이 4명이다. 공로패를 전달한 김성근 감독과는 젊은 시절부터 선수와 지도자로 오랜 세월 대결했던 인물이다. 특히 김성근은 1990년대 중반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일한 바 있다. 김기태 감독과는 2001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와 감독 관계로 생활한 바 있고(다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못 하다. 김응용 시기에 김기태는 잉여자원에 가까웠다.) 류중일 감독과는 감독과 코치, 사장과 코치 관계로 생활했다. 맨 오른쪽의 조범현 감독과도 삼성 시절 감독과 코치 관계로 생활했다.[32] 현대자동차와 현대카드 대표이사를 지냈고, 이를 바탕으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이 있다. 허나, 그 이후에는 거의 야인으로 지냈다.[33]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팀 수를 계속 늘이는 것 보다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출산율 저하로 유소년층 인구의 비율이 계속 줄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고, 성적이 안 나오거나 투자 의지가 약해지면 언제든지 해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아마야구의 현실임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엘리트체육에서 사회체육으로 저변을 넓혀야, 학령 인구 감소에도 대응할 수 있고 야구라는 스포츠를 경험한 사람이 팬으로 남고 관련 산업도 생존하게 된다. 반대로 내실을 다진다는 말은 자칫 지역별 소수의 야구 특성화고를 육성하자는 말로 이어질 수 있다.[34] 단, 투구 수 제한 강화는 천차 만별인 각 팀의 선수 층을 감안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적용해 선수 층이 두터운 강팀들에게 유리하다는 비판이 있다.[35] 장 감독과 김응용 회장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오랜 기간 함께한 야구계 대표적인 사제 지간이며 선 감독과는 우승을 함께 이루던 영혼의 배터리였다. 한 다리 다 건너면 다 아는 야구계에서 이런 특수한 관계를 거스르고 장 감독이 격렬한 비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며 이 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장 감독이 대학 야구와 아마 야구를 대표해 총대를 멘 것으로 볼 수 있다.[36] 심지어 이여상은 2013년 개막전 선발 2루수로 뛰었고 시즌 후 40인 외 드래프트로 롯데로 팀을 옮긴 선수다. 백 번 양보해서 아예 2군에만 처박혀 있었거나 확대 엔트리 때 1군 맛만 조금 보다가 소리소문 없이 방출되었거나 하면 이해가 간다. 다만 반론도 있는데 애초에 김응용 감독은 선수단 이름도 잘 못 외우며 개인적인 친분도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이여상은 초반에나 좀 나오다가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쭉 2군에서 뛰다가 롯데로 팔려간 선수인 만큼 김응용과 가까운 사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37]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기에는 수준이 낮고 시즌 일정이 꼬인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럼 프로 2군 선수들이나 후보 선수들을 섞어서 차출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 일정에도 문제가 없고 아마 야구를 위한 선발에도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물론 그렇게 뽑고 탈락했다면 프로 선수 데려가고도 졌냐며 욕을 먹겠지만 적어도 중국에게 한 이닝 6점을 내주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38] 프리미어 12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권을 땄으니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아마 김응용 회장은 더 욕을 먹었을 것이다.[39] 6경기는 심판에게 거친 행동으로 출전이 정지되며 백기성 수석 코치가 대행[40] 전후기 각각 2위[41] 빙그레 이글스에게 업셋 우승[42] 1990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3연패로 패배[43] 1992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2승 3패로 패배[44]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45] 1994 준플레이오프 2연패 패배로 4위 확정[46] 3위 롯데와 3.5경기 차 이상 벌어지며 준플레이오프 무산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47] 이 시즌 KBO 감독 최초로 1000승을 달성한 대위업을 쌓았다. 더 놀라운 건 해태 한곳에서만 1000승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48] 1경기는 심판 판정 항의로 출전 정지되며 유남호 수석 코치가 대행[49] 시즌 중 13경기 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거친 행동으로 1경기 출전 정지로 유남호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 폭행 사고 동기를 유발함으로 12경기 출전 정지로 차영화 코치가 감독 대행[50] 드림리그[51] 양대리그 합산[52]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차출되며 5경기 유남호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53] 드림리그[54] 양대리그 합산[55]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승 4패로 13.5게임 차 업셋 준우승. 감독 경력 첫 준우승으로 한국시리즈 불패 신화 마감[56] 삼성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감독 등극[57] 2003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SK 와이번스에 2연패로 패했고 SK가 2위 KIA 타이거즈마저 3연승으로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4위 확정[58] 감독 경력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자 전설의 9차전 수중전 시리즈로 유명했던 2004년 한국시리즈[59] 감독 경력 첫 최하위[60] KBO 9구단 체제 유일한 최하위[61] 사실 당시의 정면승부는 야구인은 물론이고, 야구팬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벤치의 지시는 당연히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나왔던 발언.[62] 그런데 장성호가 똘기가 좀 심한 편이기는 했다. 항상 실실 웃는다거나, 라면 먹는 바람에 배탈이 나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떨어지는 등의 일이 있었다.[63] 前 삼성 출신 임동규도 자신의 개인방송에서 김응용 회장은 소속 선수들 이름을 잘 몰랐다고 했다. 노쇠했던 한화 시절만 그런 게 아니라 아직 전성기였던 시절에도 그랬다는 이야기다.[64] 김응용은 카리스마로 선수들 휘어잡은 것과 별개로 미국에 다녀온 영향으로 그 시절 감독 치곤 드물게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웠다. 훈련을 많이 시키지도 않았고 야구만 잘하면 사적으로 크게 통제하려 하지도 않았다. 김응용이 사적으로 챙긴 선수들은 강영식, 채태인처럼 싹수가 있거나 혹은 숙소를 구하지 못해서 갈 곳이 없었던 어린 선수들이었고, 이여상처럼 흔해빠진 노망주들은 풀어놓고 잘 하면 서로 좋고 못하면 별 수 없다 정도라서 기억을 못해도 이상할 게 없다. 서술된 강영식과 채태인의 경우에도 당시 이 둘이 숙소를 구하지 못해서 김응용이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챙겨줬던 경우다.[65] 다만 발언을 한 학부모 또한 이여상한테 그렇게 들었다고 하면 될 얘기를 기정 사실인 듯 얘기한 점에 대한 비난도 크다.[66] 1986~1999 14년[67] 양력 4월 8일.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통산 안타 보유자인 장훈과 친구 사이기도 하다.[68] 당시에는 부군면 통폐합에 의해 평원군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김 감독은 '숙천 출신'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69] 부친 김식영은 개성중 서무과장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야구한답시고 공부를 안 하는 아들이 못마땅하여 야구를 관두라는 불호령을 내렸으나 어린 김응용은 "그럼 학교에 안 가겠습니다"라며 3일간 버텼고 결국 부친이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70] 2010 프로 야구 올스타전에서는 양준혁이 홈런쳤을 때는 하이파이브를 했다.[71] 현재 모든 감독은 정규 시즌이나 포스트 시즌이나 경기에서 승리하면 필드로 나와 선수단과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김응용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허나 팬들에게는 늘 모자를 벗고 감사 인사는 했다.[72] 하지만 다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고 트레이드를 통보 받았을 때 김응용한테 찾아가서 삼성 떠나기 싫다고 울기도 했다.[73] 재밌는 건 이때 김성한 당시 코치도 김응용 감독과 같이 출연하였다는 거고, 대단한 연기를 선보이며 인상을 심어 주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밝힌 일화로 김응용이 제작자에게 '출연료는 안 주나?' 했더니 1억 원은 받아야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다가 김응용에게는 1천만 원, 김성한에게는 7백만 원을 입금시켰다고 한다.[74] 당시 브리또는 삼성의 상대 투수였던 케빈 호지스로부터 몸쪽 위협구를 맞을 뻔 했는데 이에 격분해서 방망이를 들고 야구장 내부 통로를 통해 삼성 덕아웃에 쳐들어갔다.[75]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종로구의사회 회장을 지낸 소아과 의사 최억일(崔億鎰) 박사의 차녀다. 여담으로 야구장에는 딱 한 번 가보셨다고 하는데, 옆자리의 관중들이 남편을 향해 거친 욕을 내뱉는 것을 보고는 두 번 다시는 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76] 아무래도 해태가 돈이 없다보니 김응용 전 감독이 9회 우승을 시켜 줬어도 연봉을 많이는 못 줬다. 그나마도 다른 구단 감독들이 우승 감독이 저 정도 받으면 우리는 짜게 받는 거 아니냐 해서 계약금 대신 연봉으로 올려 달라 한 거라고 한다. 2000년 김응용 감독이 받은 연봉은 이름값에 걸맞지 못한 겨우 1억 3,000만 원에 불과했다.[77] 더군다나 그 시기가 1$=1,800₩ 수준의 살인적인 고환율을 자랑하던 외환위기 시절이라는 건 감안해 보자.[78] 다만 집은 근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이다.[79] 안타를 많이 쳐서 타격왕을 하라는 의미.[80] 김응용과 비슷한 사례로 박항서가 있다. 박항서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 베트남에 갔을 때, 베트남 축구 선수들의 식단이 채소밖에 없는 등 너무나도 부실하여 박항서 본인이 직접 사비를 들여가며 식단 개선에 힘을 쓰는 한편 베트남 축구 협회에도 선수단에게 고기를 최대한 많이 배급할 것을 요청해서 현재는 고기가 풍부하게 나오는 등 식단 자체도 많이 좋아졌다.[81] 건달 할배로 유명한 채현국 이사장이 상임고문을 맡았다.[82] 공교롭게도 김응용 전 감독은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적 있다.[83] 공교롭게도 이듬해 연초부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이렇게 다수의 인물이 실내에 한데 집결하는 것이 오랫동안 어렵게 되면서, 시기를 앞당겨 팔순 잔치를 미리 치른 것이 어찌 보면 신의 한 수가 되었다.[84] 허나 2023년 10월 인터뷰 내용을 보면 여전히 술을 즐겨 마시는 것으로 보인다.[85] 다시 말해 현재 KIA 타이거즈의 11회 우승 중 4번이나 김영덕 전 감독이 바친 것이다.[86] 1987 플레이오프에서 3승 2패로 해태가 1987년 한국시리즈 진출, 1989 플레이오프에서는 3연승으로 해태가 1989년 한국시리즈 진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전설의 이승엽-마해영 백투백 홈런으로 감독 경력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한 김성근에게 패배를 안겼다. 김성근은 훗날 인터뷰에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을 회고하며 야구 감독을 하면서 운 게 두 번인데 그 두 번 중 한 번이 이때라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