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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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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 이거슨 리즈 시절!
파일:external/sports.donga.com/32383422.8.jpg파일:attachment/장훈(야구선수)/JangHoon_TokyoDome.jpg
2010년 8월 31일 잠실 LG 트윈스넥센 히어로즈 시구자로 나와서.도쿄돔 지하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모습
이름 장훈(張勳)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 勳)[1]
출생일 1940년 6월 19일
국적 대한민국
본관 인동 장씨
출신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신체 181cm, 85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선수 경력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1959~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
롯데 오리온즈 (1980~1981)
지도자 경력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수석 겸 타격코치(플레잉코치) (1973)
등번호 10번
195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신인왕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없음
196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1. 개요2. 경력3. 일대기
3.1. 유년기3.2. 학창시절
4. 선수시절
4.1.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4.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4.3. 롯데 오리온즈 시절 : 대망의 3,000안타와 500홈런을 달성하다4.4. 기록4.5. 연도별 역대 기록4.6. 각종 기록 및 타이틀
4.6.1. 타이틀4.6.2. 주요기록
5. 재일 한국인으로서6. 성격7. 에피소드8. 현재9. 어록

1. 개요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재일교포 야구선수 장훈 편[2]
"倒れるまで, 死ぬまで" (쓰러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일본에서 활약했던 대한민국 국적의 전 야구선수, 야구해설자, 야구평론가. 한국명은 장훈(張勳)이며 일본명은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이다. 애칭은 '하리상(張さん)' 또는 '하리(張, ハリー)' 일본 히로시마현 출생, 2남 2녀 중 차남.

2. 경력

3. 일대기

아래의 일대기는 1976년 스포츠 잡지인 <주간스포츠>에 수록된 '야구영웅 장훈'(일본판 제목은 배트 외골수)의 내용을 요약했다.[4] 그밖에 <일본을 이긴 한국인>(1995년 출간)의 내용과도 같다. 장훈 옹 일대기에 대해 한 번씩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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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초등학교 시절. 좌로부터 장훈, 어머니 박순분, 작은 누나 장정자, 형 장세열, 뒷줄 가운데는 형의 친구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장상정씨와 어머니 박순분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장훈의 아버지는 1936년에 먼저 일본에 건너가 고물상을 하던 장훈의 작은 아버지의 부름으로 1939년 도일하였다. 이후 장훈의 가족들이 뒤따라 일본으로 건너왔고 1940년 장훈이 출생하였다. 전쟁 중의 식민지 출신으로서 장훈의 가족은 아주 가난하였고, 히로시마 오즈마치의 강가 판자촌(조선인 거주구역)에서 성장한다. 네 살 되던 해 겨울, 집 근처 강둑에서 동네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 하던 중, 갑자기 후진한 소형 트럭에 떠밀려 모닥불 속에 오른손을 처박고 말았다. 이 때의 화상으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심하게 구부러지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때 장훈의 아버지는 잠시 고향의 부모님을 뵙고 온다며 창녕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고 글도 모르는 상황이라 트럭 운전사에게 손해배상은커녕 치료비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5][6] 이후 어려운 형편에도 장훈의 어머니는 3차례에 걸쳐 손가락 복원과 피부이식 수술을 해주었지만, 달라붙은 손가락을 떼는 데도 실패하고, 대퇴부 피부를 이식한 손바닥도 제 구실을 못해서 장훈의 오른손 악력은 왼손의 1/2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원래는 오른손잡이였던 장훈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잠깐 타격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하자면, 좌타자가 스윙을 하면 팔로스루(follow-through)를 할 때 오른손에 힘을 주며 힘있게 배트를 끝까지 뻗어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타구가 힘이 붙어 뻗어나가는데, 장애로 인하여 오른손 악력이 왼손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팔로우 스루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왼손만을 이용한 임팩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3,000안타뿐 아니라 홈런도 500개나 쳤음은 놀라운 일이다. 오른손이 정상이었다면 타율도 훨씬 높고, 홈런수도 더 비약적으로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오히려 장훈의 오른손 장애로 인하여 정상인보다 몇 배, 몇십 배로 피터지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야구계의 전설로 추앙받지 않는가 하는 의견도 있다. 오른손이 정상이었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났어도 그렇게까지 노력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니...(그렇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으로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정이니 만약이니 얘기는 일단 접어두자.)

장훈이 다섯 살 되던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며 전신에 중화상을 입은 큰누나 점자가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못받은 채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폭탄 투하지점에서 장훈의 집은 불과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행히 장훈의 집은 70여m 높이인 야산 자락에 가려져 큰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큰누나는 학교에서 근로봉사로 산에 땔감을 주우러 갔다가 바로 변을 당했다고 한다.[7][8] 그리고 3년 전 잠깐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창녕에 갔다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국교단절로 오도가도 못하던 아버지가 이듬해인 1946년 한국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9]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집안 형편이 더욱 힘들어졌다. 3년간 손가락 화상 - 누이의 사망 - 아버지의 사망이 잇달으면서 가정 형편은 극도로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어를 전혀 못하고 글도 모르는 어머니는 3남매를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전쟁보다 치열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10] 그 때부터 장훈은 "돈을 많이 벌어 맛있는 것도 배불리 먹고 어머니와 형,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강하게 품는다.

사실 장훈이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를 열망했던 것은 어릴 적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히로시마로 원정 온 프로팀의 경기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히로시마 종합 구장[11] 울타리를 기어올라 보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 교진군 선수들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선수단이 숙박하던 여관 옆 나무에 올라갔는데(당시의 대스타였던 카와카미 테츠하루 선수를 보러 갔다고 한다.), 방에서 선수들이 양껏 먹던 두툼한 스테이크와 출전수당으로 오고가는 지폐 다발에 사로잡혀, 어린 마음에 '야구 선수가 되면 저런 음식을 마음껏 먹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겠지.'라는 동경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장훈의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아들이 야구를 한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큰형 장세열[12]과 함께 뒤에서 많은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장훈이 학창시절 입버릇처럼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어머니께 비단 치마 저고리를 많이 사드리겠다"며 얘기하면 "네가 언제 성공해서 비단 저고리를 사주겠느냐." 하고 웃음을 지었다 한다.

3.2. 학창시절

파일:/image/295/2011/12/26/%25B9%25AB%25C1%25A6-1.jpg파일:/image/295/2011/12/27/imagescafwv0u0.jpg
중학교 시절. 맨 윗줄 왼쪽이 장훈. 또래에 비해 체격이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고교시절

초등학교 시절 장훈은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활발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람한 체격 덕분에 감히 장훈의 면전에서 조센징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동네 조선인 동포 학생이 괴롭힘을 당했을 때[13] 한 명도 빠짐없이 때려눕혔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재일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의협심은 대단하였던 모양.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들을 따라 동네야구를 하며 야구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14][15] 한편 장훈은 오른손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운동에 만능이었고, 특히 수영에 능숙해서 여름엔 집 부근 오타 강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유형, 배영, 평영을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수영은 오른손의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종목이고, 야구에 비해 돈이 덜 드는 스포츠라 수영선수가 되려고 했는데 장훈이 다니던 단바라(段原) 중학교에는 수영부가 없었다. 장훈은 형님인 세열에게 무언가 운동을 하고 싶다고 충고를 구하자 형님은 "학교에 야구부도 있는데 야구를 해보는 것이 어때?"라고 권유하여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훈은 중학 시절 남들보다 우월한 체격과 실력을 앞세워 에이스와 4번 타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16]

중학교 졸업 후 히로시마 상고, 고료 고교 등 주변 명문고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행실불량 등의 여러 이유로 악동으로 찍혀 전부 입학을 거부 당했다. 당시 장훈의 모교인 단바라 중학교의 운동장은 한 개 뿐이었고 운동부는 야구, 축구, 유도부 3개나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 사용권을 놓고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기 일쑤였는데, 승자는 항상 주먹 하면 히로시마 중학생 전체 탑 클래스이던 장훈을 앞세운 야구부였다.[17] 그러던 중 어느 날 축구부 주장이 장훈과 말싸움을 벌이다 장훈에게 "조센징 주제에 어디 감히. 입 다물고 꺼져라, 조센징!"이라고 장훈을 디스하자, 장훈이 격분하여 야구 배트로 축구부 주장의 머리를 가격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18] 장훈은 히로시마 상고가 현립이라 학비도 싸고 야구부 성적도 좋아 진학하고 싶어했고, 야구부 감독에게 테스트까지 받고 OK사인까지 받았으나, 위 폭력사건의 소문으로 히로시마 상고의 교장은 장훈의 입학을 불허했다. 장훈은 대신 현립이 아닌 사립학교로 응시만 하면 누구나 들어가던 학교인 고료 고교에 입학하려 했는데, 입시 면접 때 "히로시마 상고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는데 고료 관계자가 응시만 하면 무조건 뽑아주겠다고 해서 응시했다." 하고 너무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면접관에게 호통만 듣고 쫓겨났다고 한다(...).

장훈은 간신히 형님의 주선으로 빈민가 주변 히로시마 최악의 불량 학생들이 가는 마츠모토 상고에 들어갔다. 그나마 이 학교에서도 1년간 착실히 야간부 생활을 잘하면 2학년부터 주간부에 편입시켜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부의 엉망진창 실력에 실망하여, 제대로 된 야구부 활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밤 거리에 나가 폭력배들과 어울려 주먹을 휘두르며 울분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훈이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집어든 야구잡지에서 야구 명문 교토 헤이안 고교와 오사카 나니와 상고에 대한 기사를 보고 헤이안 고교나 나니와 상고로 전학 가고 싶다고 어머니와 형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집의 부엌을 개조하여 밤에 직접 담근 밀주와 암시장에서 받아온 곱창 등을 파는 작고 허름한 호르몬야키 가게[19]를 당국 몰래 운영하고 있었지만 가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20] 형님 세열은 택시 운전을 하던 어려운 상황이라 장훈의 애원을 외면하려 했지만, 동생이 야쿠자가 되어버릴까 걱정하던 형님은 큰 결단을 내리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21]

결국 형님은 장훈이 전학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고, 헤이안고는 학기 중엔 전학생을 받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나니와 상고에 가서 전학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야구부장 나카지마 하루오[22]는 처음엔 "돌아가라" 하고 거절하였으나, 형님이 "동생은 망나니지만 야구 하나만큼은 잘 한다. 테스트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고 통사정하여 장훈은 타격과 피칭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나카지마는 장훈의 실력을 알아보고 "전학시험을 통과하면 받아주겠다."라는 조건을 붙였다. 비록 밤거리 주먹패들과 어울려 지내던 와중에도 장훈은 의외로 학교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전학시험에 어렵지 않게 합격, 정식으로 나니와 상고에 입학하였다. 머나먼 타향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장훈에게 형님은 월급의 거의 절반인 1만 엔(당시 형님의 택시기사 월급은 2만~2만 3천 엔 정도였다고)을 매달 하숙비와 식비로 보내주며 뒷바라지 해 주었고, 뒷날 장훈은 프로데뷔 후 올스타전 MVP 부상으로 받은 오토바이[23]를 형님에게 선물하고 집까지 장만해 주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며 보살핀 형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했다.

나니와 상고 시절 장훈에게 밥을 지어주곤 했다던 옆집 누님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정확히 쌀 한 말을 먹으며 운동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가난에 시달리던 옛날인지라 제대로 된 반찬이 없어서 밥만 죽어라 먹을 수밖에 없었다곤 하지만 흠좀무. 그리고 매월 형님이 보내주시는 1만 엔 중 하숙비 6천 엔을 내고 남은 4천 엔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쓴다고 했지만 월말에는 항상 돈이 떨어져 50엔짜리 한 장을 들고 을 사먹을지 목욕을 갈지 고민할 정도로 궁핍하게 생활했고,[24] 학교 절친인 부잣집 아들 타니모토 이사오[25]단무지 조각에 오징어 조림이 고작이던 장훈의 부실한 하숙집 도시락을 마음 아파하며 배려를 베풀어 한 개 더 싸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어쨌든 정식으로 나니와 상고의 멤버가 된 장훈은 4번 타자에 투수를 맡으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 무렵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던 미즈하라 시게루가 직접 학교로 찾아와서는[26] 장훈에게 "팀에 쓸만한 좌완투수가 없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요미우리에 오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뻐하며 형님에게 편지를 썼는데, "고마운 일이지만 학교는 꼭 마쳐야 한다. 프로는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배움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형님의 답장을 받았고 미즈하라에게 형님의 답장을 보여주며 제의를 사양하겠다고 하자 미즈하라는 "훌륭한 형님을 두었구나.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같이 뛰자"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학업과 야구에 매진하던 장훈은 뜻밖에 투수 생명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게 된다. 2학년 되는 해 6월의 어느 날, 나니와 출신의 포수 카타오카 히로오[27]가 모교를 방문하여 장훈을 불러서는 "내가 받아줄 테니 한번 던져봐라"라고 제의했다. 이날 장훈은 이미 연습 투구 3백 개를 마쳤으나, 대선배가 직접 공을 포구해주겠다 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또다시 3백 개를 던져야 했다. 총 6백 개를 던진 뒤 카타오카에게 좋은 투수라고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그 다음날 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부상을 입었다. 한 달이 지나 타격은 가능해졌지만 투구는커녕 공을 10미터 이상 던지기도 힘든 지경에 놓였다.

박동희 파워블로거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은 어깨가 아작난 것에 대해 어쩌면 좋겠냐고 나카지마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자 대뜸 "차라리 잘 됐다. 자네는 애초부터 투수 소질이 부족했으니까 이 참에 타자로 전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28]라고 답했다고 한다. 미즈하라 감독 밑에서 요미우리의 투수로 성공하려는 꿈이 있었던 장훈은 실의에 빠져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나카지마 선생은 "바보 같은 녀석! 겨우 어깨 좀 고장난 것 때문에 야구 그만두려고 타향까지 와서 찬물에 목욕까지 해가며 고생했느냐?"며 따끔하게 타일렀고, 장타력을 살려 타자를 해보라는 나카지마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결국 타자로 완전히 돌아서기에 이르렀다.[29]

타자 장훈의 실력은 이후 계속 성장하였고 나날이 늘어나는 장훈의 타구 비거리 때문에 인근 주택의 유리창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외야 담장의 그물망 높이를 계속 높여야만 했다(...). 이렇듯 장훈이 타자로서 대성하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장훈은 중학교 시절부터 집 근처 강둑에 타이어를 세워놓고[30] 손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매일 타이어를 배트로 쳤다고 한다.[31] 손바닥의 피 때문에 배트가 미끄러지자 아예 손에 붕대를 감고 치기도 했고, 붕대를 벗겨낼 땐 피범벅인 손바닥에 말라붙어 물로 적셔가며 벗겨내야만 했다. 물론, 그때의 통증은 말도 못했을 것이다.

특히 오른손은 화상으로 인한 부상으로 크게 불편한 걸 생각하면...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하여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타 학교와 나니와 상고와의 폭력 사태로 받은 2년간 고시엔 출장정지가 풀린 3학년 때, 장훈은 긴키(近畿) 대회 예선 11경기에서 5할 타율에 홈런 11개를 뽑아내는 맹타를 휘두르며 프로 스카우터들을 놀라게 했는데, 예선대회 종료 후 어이없게도 장훈은 야구부 내의 폭력사건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휴부 처분을 받았다.[32] 야구부 감독 다케우치[33]한국인 장훈을 고깝게 보고 친 장난질이었다. 이 사건으로 장훈은 다케우치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극단적인 결단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살인자가 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면 어머니께 이만저만 불효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다케우치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접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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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야구단 방문 시

그렇게 염원하던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게 된 장훈은 화풀이로 배트만 휘두르던 중 민단 관계자의 권유로 재일 한국인 고교야구 대표로 선발되어 한국에서 고교팀들을 상대로 원정 순회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장훈의 어머니가 장훈이 한국으로 원정 간다는 얘기를 듣자 "한국에선 재일교포 청년들을 전부 군대로 끌고 간다더라" 하며 한국행을 결사 반대했다. 장훈이 민단에 확인하여 그것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에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아무튼 한국 원정에서 장훈은 4번타자 중견수로 출장하여 변함없는 맹공을 퍼부으며 상대전적 12승 1무 1패로 한국 고교선수들을 초토화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한일 야구의 전력차도 상당하기는 했지만...그리고 장훈은 대회 도중 아버지의 고향 경남 창녕을 찾아 조부모님과 감격적으로 해후했고 무덤 속의 아버지께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장훈은 한국인들의 환대에 감격하며 처음으로 조국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34] 선수단 환영식 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장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일본 놈들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되네"라고 하기도 했다.

4. 선수시절

4.1.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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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나니와 상고 졸업을 앞두고 긴키 대회와 한국 순회경기 때의 맹활약을 기억하는 프로 스카우터들로부터 뜨거운 추파가 들어왔다.[35] 애초 장훈은 내심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고교 시절부터 장훈은 성품이 거친 한마디로 성깔 드럽고 막나가는 선수라는 선입견이 굳어 있었고, 게다가 장훈을 영입하려 했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요미우리 자이언츠 프런트와의 사이가 벌어진 상태여서[36] 끝내 제의를 받지 못했다. 대신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당시로선 거액인 계약금 6백만 엔을 제시하였지만 장훈은 이왕 야구를 하려면 꽃의 에도, 즉 도쿄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도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이던 이와모토 요시유키가 직접 히로시마의 집을 찾아와 장훈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좋은 선수로 키우겠다"라고 간청하여 결국 장훈은 계약금 2백만 엔, 월봉 4만 5천 엔[37]도에이 플라이어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38] 이때 계약금으로 받은 1천 엔 지폐 2천 장[39]을 신문지에 꽁꽁 싸서 품에 안고 형님과 같이 야간열차로 고향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내놓았고, 장훈의 어머니는 "도대체 네가 어디서 이렇게 큰 돈을 벌어 왔느냐. 설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라고 거의 혼절할 정도로 놀라워하자 형님이 "훈이가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번 돈이다"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 계약금 2백만 엔 중 10만 엔만 장훈이 갖고 나머지 금액을 전부 고향 히로시마에 53평 규모의 집을 짓는 데 썼다.[40] 새 집에 이사하던 날 어머니와 형님, 누나가 감격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장훈은 이때 지은 새 집 2층에 자기 방을 만들어 히로시마 원정 경기 때마다 사용했다. 덧붙여 장훈의 소속팀 도에이는 퍼시픽리그 팀에 2군도 이스턴리그 소속이라 센트럴리그 팀에다가 2군도 웨스턴리그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경기를 가질 기회는 시범경기를 제외하면 없었지만(...)

당시 구단주였던 도에이의 사장 오카와 히로시는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41]에 걸려 장훈의 1군 출장이 어렵게 되자 구단주 회의에서 규약 변경을 강력히 주장, 출생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선수[42]는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약을 변경 시키는데 앞장섰다.[43] 규약이 바뀌기 이전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귀화하여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은 장훈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어머니께 상의를 드렸다가 "그러라고 내가 야구를 시킨 줄 아느냐?! 그 따위 짓 하려거든 당장 야구 때려치우고 히로시마로 돌아오거라!!"며 불호령만 들었다고(...). 이에 장훈이 귀화할 수 없다고 설명하자 오카와 구단주는 감탄하면서 "역시 한국 여성은 강하다. 그렇다면 외국인이라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도록 해 보겠다"라며 다른 팀 구단주들을 설득한 끝에 앞에서 얘기한 대로 규약 변경을 실현시켰다.[44]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입단한 장훈이 첫 전지훈련 때 타격 코치이던 마츠키 켄지로를 만난 것은 장훈으로선 큰 행운이었다.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장훈을 개막전 4번타자로 출장할 수 있도록 만들라"고 엄명을 받은 마츠키 코치는 처음엔 새파란 고졸 신인을 개막전 출전, 그것도 4번타자로 만들라는 얘기에 앞이 캄캄했지만 장훈의 스윙을 보고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예감했다. 한편으로 마츠키 코치는 화상으로 불구가 된 장훈의 오른손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도 스윙 만으로 단번에 "오른손이 약해서 팔로우 스윙이 제대로 안된다"라고 지적하며 오른팔로만 토스 배팅을 시키고 오른손으로 샌드백을 두들기게 하는 등 장훈의 오른손 강화를 중심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마츠키는 고교 시절 나름 슬러거로 이름을 날린 장훈을 "프로에서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슬러거 보다는 중장거리 타입의 타자가 유리하다"고 설득하여 그의 타격 정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동계훈련 내내 장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어깨가 아파 세수도 못할 정도로 훈련에 매달렸고, 그의 근성을 알아본 마츠키 코치도 한 마음이 되어 장훈을 강하게 트레이닝 시키며 마츠키 자신의 주특기이던 광각 타법을 전수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열망에 불타던 제자와 그를 최고의 타자로 키워 보겠다던 스승의 의지가 훌륭하게 결합된 셈이다.

이를 토대로 장훈은 비록 4번타자는 아니었지만, 프로 데뷔전인 1959년 4월 10일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시즌 개막전에 6번 좌익수로 선발출장 하게 되었다.[45] 데뷔전에서 잔뜩 쫄아있던 장훈은 당대 최고의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를 상대로 첫 타석 스탠딩 삼구 삼진을 먹고 수비에선 평범한 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이른바 만세를 부르는 등 실수 연발로 죽을 쑤기는 했지만,[46] 다음 날인 4월 11일 개막 2차전에 전날과 같이 스타팅 6번 좌익수로 그라운드에 나선 장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한큐 선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를 날리며 프로 첫 안타를 신고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엔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까지 터뜨리면서 비로소 장훈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이렇듯 장훈은 데뷔 첫해부터 신인답지 않은 비범한 활약을 보이면서 125경기 출장, 115안타, 타율 0.275, 13홈런, 57타점, 10도루의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수상, 프로 무대에 화려하게 첫 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이듬해에는 19세 나이로 최연소 4번타자란 기록을 세우며 3할을 쳤고, 그 다음해인 61년엔 첫 수위타자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61년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한[47] 명장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드디어 사제관계로 만나 그의 뛰어난 지도 하에 팀은 1962년 구단 사상 첫 퍼시픽리그 우승에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 명장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이끌던 난적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제패했고,[48][49] 장훈은 그 해 퍼시픽리그 MVP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이후로도 장훈은 1963~1965년에 슬럼프로 고생하기도 했지만[50] 이를 극복하고 1967~1970년 시즌 4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1970년에는 .383의 타율을 기록, 16년뒤 랜디 바스가 .389로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타율 기록 보유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후 구단이 매각을 거듭하며 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로 팀명이 바뀌던 어수선한 와중에도 굳건히 팀의 중심타자 자리를 지켰지만, 1974년 취임한 나카니시 후토시 감독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며[51]1975년 시즌 종료 후 장훈은 구단 사장이던 미하라 오사무와의[52] 1대 1 담판끝에 "자유계약으로 풀어줄 테니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허락을 얻어 17년간 정들었던 친정을 떠나게 되었다.

참고로 장훈은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시절인 1973년 팀 선배였던 도바시 마사유키 감독이 "나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여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4.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닛폰햄 파이터즈의 유니폼을 벗은 장훈은 당초 한국인 팬이 많은 간사이 지방을[53] 기반으로 하는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당시 감독이던 요시다 요시오와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고 오사카에 집까지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나가시마 시게오의 러브콜을 받고 곧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심하게 되었다.[54] 위에 언급한 대로 장훈은 학창시절 미즈하라 시게루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가 형님의 권유로 계속 학업에 정진하며 미즈하라, 그리고 교진군과의 인연을 잠시 접어두었는데, 결국 장훈은 뒷날 미즈하라 감독과 도에이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고 요미우리 유니폼도 끝내 입었으니 인생사 역시 알 수 없는 노릇... 한 마디로 한신으로 이적 시도하다 같은 홈구장을 쓰지만 다른 리그에 속해있는 교진군으로 이적한 거다. 출근 장소만 같고 직장이 다른 곳에 가는 우리 장훈 선생

나가시마가 1974년 은퇴한 후 외로이 중심타선을 지켰던 왕정치에게 막역한 동갑내기 친구 장훈의 입단은 큰 선물이었고 둘은 OH포를 형성하며 요미우리 타선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장훈이 영입되면서 V9 시대의 주전 좌익수였던 다카다 시게루를 외야도 아니고 무려 3루수로 이동시킬 정도의 대형 영입.

1976년 6월 10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통산 2500번째 안타를 치는 장면. 다음 타자 왕정치는 우월 투런홈런 으로 장훈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장훈은 요미우리 이적 첫해인 1976년과 1977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 타격 2위를 마크하였고, 콩까지마(?) 1978년엔 무릎 부상[55]에도 불구하고 3할 타율을 지키는 등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1979년 시즌 초반 중심성 망막염으로 시력이 나빠지는 바람에 시즌의 거의 절반을 말아먹고 말았다. 결국 병에서 회복되어 복귀하긴 했으나 그해 77경기 출장에 60안타, 타율 0.263에 그치며 데뷔 이후 계속 이어오던 연속 세 자리수 안타 시즌은 20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여담으로 센트럴리그 시절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향이었던 히로시마를 상징하는 팀이긴 했지만 극성맞은 카프 팬들이 고향의 팀으로 오지 않고 도쿄 팀으로 간 장훈을 배신자 취급하며 요미우리 경기 때 장훈 타석만 돌아왔다 하면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 이게 무슨 억지야

4.3. 롯데 오리온즈 시절 : 대망의 3,000안타와 500홈런을 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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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안타 달성 당시.[56] 사진 왼쪽에 등번호 2번 선수는 도에이 시절부터 절친한 후배 백인천이고[57] 사즌 오른쪽의 등번호 7번 선수는 친형 레론 리[58]와 함께 롯데의 외국인 중심타선을 구축했던 레온 리이다.

장훈 옹 답지않은 부진한 시즌을 마무리한 이듬해인 1980년, 예나 지금이나 맛이 가버리면 가차없이 내치는 교진으로부터 장훈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59] 3,000안타까지 불과 39개만 남았던 상황이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3천 안타를 기록한 후 은퇴하고 싶어했던 장훈은 크게 섭섭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롯데에서 3천 안타를 채우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하겠다는 심정으로 이적했다. 비록 나이가 많았고 기량도 하락한 만큼 출장기회를 예전보다 많이 얻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훈은 롯데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

결국 그해 5월 28일, 카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홈경기에 출장한 장훈은 6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상대투수 야마구치 타카시[60]를 우월 투런 홈런으로 두들겨 3천번째 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3,000안타 기념사진[61] 또한 그해 9월 28일 카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더블헤더 홈경기 1차전에서 1회 말 야스키 쇼지의 대타로 출장하여[62] 상대투수 쿠보 야스오[63]의 공을 쳐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로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다.

이후 장훈은 1981년 시즌까지 뛰면서 롯데의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활약했고, 그해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고 23년간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났다.

현역 말기 시절인 1980년 당시의 롯데 오렌지 주스 광고(2분 3초~17초)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친구 왕정치는 장훈에 비해 은퇴는 1년 빨랐으나 헌액은 4년이나 늦었다.

4.4. 기록

프로 데뷔 후 20년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 이상을 기록하였고, 통산 안타는 3085개. 이는 일본 프로야구 1위이자 아시아인 프로야구선수의 단일리그 통산 최다안타 기록이다. 통산 타율은 일본인 선수중(4000타수 이상) 와카마츠 츠토무(전 야쿠르트 감독)의 뒤를 이어 2위이며 1967~70년 4시즌 연속 타격 1위를 포함하여 총 7번의 수위타자를 수상하였다(이치로가 타이 기록을 세움). 요미우리로 이적한 첫 해 1976년에 양대리그 수위타자를 기록할 기회가 있었으나 모종의 계략으로 아깝게 1모 차이로 수위타자를 놓쳤다.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에 상술돼 있다.

181cm, 85kg의 건장한 체격에 걸맞지 않게[64] 발도 빨라서, 1963년에는 41도루로 난카이 호크스 소속이던 히로세 요시노리의 45도루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하여 통산 319도루를 기록했다.[65] 일본리그에서 통산 500홈런 이상, 200도루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장훈과 아키야마 코지(현 소프트뱅크 감독), 기누가사 사치오 단 3명 뿐이고, 통산 300도루 이상으로 범위를 좁히면 장훈이 유일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타율 3할-3000안타-5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66]뿐이다.[67] 2013년 대만 출신의 양다이강이 도루왕을 차지하기 전까지 전신(前身)구단을 포함해 도루왕을 배출한 적이 없던 니혼햄 구단 사상 시마다 마코토와 함께 도루 1위 타이틀에 가장 가까웠던 선수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코지 등 여러 명의 강타자를 배출한 히로시마 지역에서도, 그 대표적인 선수는 장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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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은 장훈 이전에는 에노모토 키하치(전 롯데)와 곤도 카즈히코(전 다이요)[68]가 갖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역시 현재에 와서도 「안타 제조기라고 하면 역시 하리모토 이사오이다」라고 하는 평이 절대 우세하다. 또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타구를 뿌리는 모습에서 광각 타법, 스프레이 타법의 대명사로도 알려져 있다.

반면 공격에서는 S급이었지만 그 빠른 발에도 불구하고 수비는 본인도 인정할 정도로 서툴러 거의 최악 수준의 돌글러브였다. 오죽하면 수비에서도 안타 제조기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외야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책수가 워낙 많았고 그래도 팀 선배였던 오시타 히로시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요미우리 시절, 장훈의 포지션인 레프트 쪽으로 라이너나 땅볼이 굴러가면, 유격수였던 코노 카즈마사(전 요미우리)가 자주 커버를 하러 따라갔을 정도였다. 도에이 시절 중견수를 보던 백인천좌익수 장훈의 좁은 수비 범위를 커버해 주느라 애를 먹어서 어느 날은 "장이형, 형님 연봉 중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을 던졌고, 장훈은 "내가 너 수비연습 시켜주려고 그런거다."라고 웃으며 받아쳤다고 한다. 그는 오른손 장애 때문에 글러브로 라이너성의 공을 잡으면 눈에서 불꽃이 보일 정도로 아프다고 밝혔을 정도니 수비를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수비가 부족한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리그 소속이니 장훈을 외야수로 밖에 써먹을 수 없었고, 요미우리에 왔을 때의 장훈은 노쇠화로 젊었을 때의 스피드도 잃어버리며 더욱 수비에 고충을 겪었던 것...은 아니고 이건 장훈이 선수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기간동안의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즈도 마찬가지였다. 파리그에서도 지명타자제는 1975년에야 처음 생겼기 때문. 대개 OB선수들 능력 후하게 주는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에서조차 장훈의 수비력은 E(7), 어깨는 E(6), 에러 회피는 D(8)을 배정했을 정도인데, 이건 과거작 얘기고 최신작 2016에는 수비력 F(29), 어깨 D(52), 포구[69]는 F(36)를 배정해줬다.

장훈이 세운 수많은 기록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3085안타이다. 유일하게 깰 가능성이 있었던 스즈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일본 리그 내로 한정한다면 앞으로도 거의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인도 이 최다안타 기록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치로가 내 기록을 넘는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는 일본보다 한 시즌 당 경기수가 많기 때문에 단순한 참고기록 밖에 되지 않는다.근데 지금은 경기수차이(통산 400경기 차이 미만)고 뭐고 통산안타수가 1천개 차이다ㄷㄷ 일본기록은 나의 것'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훈 자신도 '안타를 때리는 기술만이라면 나를 포함한 누구도 이치로를 이길 수 없다'며 이치로의 타격 기술에 관해서는 인정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16일, 직접 관전하러 온 장훈 앞에서 결국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기록 포함이지만) 3000안타를 넘어서자,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치로를 극찬했다.[70] 그리고 이치로는 2013년 4000안타까지 밟게된다

4.5. 연도별 역대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59 도에이 플라이어즈 125 454 .275 115 18 5 13 57 48 10 29 .435 .328 .765
1960 106 414 .302[71] 116 25 3 16 56 49 15 26 .508 .351 .859
1961 129 526 .326 159 31 10 24 95 77 18 46 .596 .401 .997
1962 133 528 .333 157 24 4 31 99 89 23 86 .597 .440 1.037
1963 150 626 .280 148 16 7 33 96 90 41 92 .524 .389 .913
1964 129 547 .328 151 21 6 21 72 85 31 78 .536 .426 .962
1965 132 538 .292 133 13 3 23 88 61 29 72 .486 .394 .879
1966 122 493 .330[72] 146 13 2 28 90 67 10 43 .558 .391 .949
1967 120 499 .336 139 18 3 28 88 72 18 66 .597 .439 1.035
1968 114 432 .336 122 12 2 24 65 70 13 61 .579 .437 1.015
1969 129 557 .333 160 27 1 20 67 77 20 71 .519 .421 .940
1970 125 537 .383 176 16 2 34 100 92 16 64 .649 .467 1.116
1971 128 546 .313 150 21 3 26 78 73 18 59 .531 .390 .921
1972 127 548 .358 169 25 4 31 89 93 10 69 .625 .443 1.068
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28 550 .324 143 18 0 33 93 77 12 93 .590 .448 1.038
1974 닛폰햄 파이터즈 120 491 .340 138 20 3 14 62 64 14 82 .507 .452 .959
1975 119 473 .276 113 12 2 15 46 45 6 58 .424 .367 .791
1976 요미우리 자이언츠 130 574 .355[73] 182 35 5 22 93 89 8 51 .571 .417 .998
1977 122 493 .348[74] 153 16 6 24 82 67 3 40 .575 .409 .984
1978 115 456 .309 131 17 1 21 73 53 1 27 .502 .353 .854
1979 77 255 .263 60 7 0 8 32 26 1 23 .399 .333 .732
1980 롯데 오리온즈 102 370 .261 89 9 0 12 39 50 0 26 .393 .317 .710
1981 70 175 .219 35 6 0 3 16 9 2 12 .313 .273 .586
통산 NPB 23년 2752 11122 .319 3085 420 72 504 1676 1523 319 1274 .534 .399 .933
  • 파란색 굵은 글씨는 해당연도 1위 기록, 붉은색 굵은 글씨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기록

4.6. 각종 기록 및 타이틀

  • 통산 출장경기 : 2752경기 (역대 3위)
  • 통산 타율 : 0.31915 (역대 4위)[75]
  • 통산 안타 : 3085개 (역대 1위)
  • 통산 홈런 : 504개 (역대 7위)
  • 통산 타점 : 1676 타점 (역대 4위)
  • 통산 도루 : 319 도루 (역대 20위)
  • 통산 희생번트 : 4개
  • 통산 희생플라이 : 90개 (역대 5위)
  • 통산 사사구 : 1274개 (역대 3위)
  • 통산 사구 : 78개
  • 통산 고의사구 : 228개 (역대 2위)[76]
  • 통산 삼진 : 815 삼진
  • 통산 병살타 : 145개

4.6.1. 타이틀

  • 신인왕 (1959)
  • MVP - 1회 (1962)
  • 수위타자 - 7회 (1961, 1967~1970, 1972, 1974) ※일본 타이 기록[77]
  • 최고출루율 - 9회 (1962, 1964, 1967~1970, 1972~1974)
  • 최다안타 - 3회 (1970년, 1972년, 1976년) - 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1994년부터 시상)
  • 베스트 나인 - 16회 (1960~1970, 1972~1974, 1976~1977)
  • 올스타전 - 18회 (1960~1964, 1966~1978)
  • 올스타전 MVP - 3회 (1960년 제3차전, 1962년 제2차전, 1974년 제3차전)
  • 사이클 히트 1회 (1961.5. 7)
  • 일본시리즈 타격상 - 1회 (1977)
  •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4.6.2. 주요기록

  • 시즌 타율 : .3834 (1970년) ※역대 4위, 달성 당시에는 일본 기록.[78]
  • 4년 연속 수위타자 (1967~1970) ※역대 2위[79]
  •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도에이 : 1970년, 1972년 / 요미우리 : 1976년) ※일본 유일 기록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6회 (1960년 ~ 1962년, 1964년, 1966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일본 기록.
  •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 11회 (1961년, 1962년, 1966년 ~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기록.
  • 9년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1966년 ~ 1974년) ※일본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9회 (1961년, 1962년, 1964년, 1969년 ~ 1972년, 1976년, 1977년) ※역대 2위 타이.
  • 시즌 100안타 이상 : 20회 (1959년 ~ 1978년) ※역대 2위.
  • 시즌 20홈런 이상 : 16회 (1961년 ~ 1973년, 1976년 ~ 1978년) ※역대 3위 타이.
  • 타격 10위권 진입 : 17회 (1960년 ~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타이 기록.
  • 타격 10위권 15년 연속 진입 (1960년 ~ 1974년) ※퍼시픽 리그 기록.
  •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1959년 ~ 1978년)[80]
  • 20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 (1959년 ~ 1978년)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1961년 ~ 1973년) ※역대 3위 타이.
  • 16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 (1959년 ~ 1974년)
  • 9타수 연속 안타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30경기 연속 안타 (1976년 5월 13일 ~ 6월 20일)
  • 13타석 연속 출루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1이닝 2개의 2루타 (1961년 5월 6일) ※일본 타이 기록.
  • 만 32세 2개월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최연소 기록이자 역대 2위.
  • 1733경기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역대 3위.
  • 2185경기 만에 2500안타 달성 (1976년 6월 10일)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70 (73타수 27안타) ※7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통산 타율 3할대·500홈런·300도루 ※사상 유일

5. 재일 한국인으로서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라는 것은 그럴수 없죠.
ㅡ KBS와의 인터뷰.

지금은 한류 붐 등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재일교포도 많아지고 있지만, 장훈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애초부터 국적을 밝힌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에 건너온 후, 죽기 전까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완고한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그 한편으로는, 태어나서 자라고 입지를 세운 일본에 대한 생각도 깊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장하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본의 국위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민족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는 어릴 적부터 한국어로 말하며 자란 관계로 지금도 한국어는 능통하다. 1991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제 1회 한일 야구 슈퍼게임의 중계에서는, 대한민국 TV 방송 측의 야구 해설자로서 출연해, 막힘없는 해설로 한국의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왕정치의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 55개에 근접했을때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조언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고교시절에는 재일 한국인 선발팀에 선정되어 한국으로 원정을 가서 고국의 야구팬들에게 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동대문 야구장이 철거될 무렵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옛날 여기서 엿장수한테 엿도 사먹고 그랬는데"라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같은 재일교포인 프로레슬러 역도산과도 친분이 깊었다. 둘 다 천성이 거칠었던 탓에 술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 하다. 어느 날은 장훈이 역도산에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하자 역도산은 분개하며 "너는 내가 당한 차별을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실 역도산은 스모 리키시 시절 차별을 받았던 트라우마 탓에 일상 생활에서도 한국어를 전혀 쓰지 않았고,[81] 역도산야쿠자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일본인들 중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많다.

당시 일본프로야구계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야구선수가 배트보다 무거운 것을 드는 걸 금기시 하던 시기였는데 장훈은 '체력'을 강조하는 역도산의 권유를 받아 역도산의 레슬링 도장에서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 역도산의 도장이었으니 평범하게 바벨 들어올리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 가라데춉이고 드롭킥이고(...). 본격 프로레슬러 육성 그렇다고 장훈이 야구장에서 가라데춉이나 드롭킥을 시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현재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 보좌관직을 맡고 있다. KBO 창설 당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큰 경기나 행사가 있을 땐 나가시마 시게오와 스승 미즈하라 시게루를 함께 초청하여 모셨을 정도.[82] 특히 일본에서 전성기를 지났거나 여러 차별로 별 활약을 못한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에 뛰게 추천한 이도 바로 장훈 옹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송재박이다.) 일본의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6. 성격

재일 한국인으로서 차별을 많이 받아서인지 성격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고교시절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싸움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형님은 제가 야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될 줄 아셨다"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자신은 그럴 근성이 없어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덤프트럭 운전기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훈의 불같은 성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일본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노무라 카츠야트래쉬 토크의 대응으로 전설이 되었다. 포수들은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너, 새벽에 긴자에서 홈런 세 방 쳤다며?(밤동안 내내 섹스했냐며 까는 거다..) 다리 후들거려서 타석에 설 수나 있냐?", "어젯밤 니 마누라 어떤 남자랑 술먹고 계시더라", "요새 모 술집 아가씨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며?" 등의 음담패설이나 욕설을 지껄이며 타자의 신경을 건드리고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트레쉬 토크라 말하는데[83] 노무라는 특히 음담패설이나 농담 따먹기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헛소리를 남발하는 수법을 쓴다고 한다.[84] 타자들의 신경을 흐트러뜨리는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카즈야의 트레쉬 토크 전술이 통하지 않았던 타자로 세 명을 꼽았는데, 그 세 명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그리고 장훈이었다고 한다. 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오히려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 쳤으며, 장훈은 노무라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어느 날은 장훈도 노무라의 야유에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일부러 크게 헛스윙을 하는 척 하면서 배트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이때 된통 혼이 난 노무라는 그 후로 장훈의 신경을 긁는 짓을 그만두었다고.[85]

은퇴 후 코치, 감독으로 일한 적이 없는데 한국 국적자인 그를 각 구단들이 지도자로 데려오기 꺼렸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사실 그는 몇몇 구단에서 코치, 감독 제의를 받았었다고 밝혔다[86]. 2017년 인터뷰에서 밝히길 일본에서 세 차례, 한국에서 한 차례 감독직 제안을 받았었다고 한다.# 롯데 신격호 회장이 '너 언제 일본 롯데 감독할 꺼냐'라고 혼나기까지 했다는 증언을 봐서 롯데 오리온즈가, 그것도 회장 본인이 나서서(...) 감독직을 주려고 했던 것이 유력. 여담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내에게 절대로 감독하는 것은 말리라고 했다고 한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분명 죽을거라며(!) 걱정하셨다고...본인 스스로 감독보직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한 나가시마, 왕정치 같은 스타선수 출신도 감독 경력 초반부엔 자질 부족이라고 욕만 들어먹었던 것을[87] 생각하면 한국인인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때 일본인들의 더 심한 비난과 인격모독을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친지들도 격한 성격을 가진 그가 지도자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80살이 가까운 고령인지라 앞으로 지도자로 부임할 확률은 더욱 희박해질 듯 하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은퇴 후 30여년 간 줄곧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방송에서의 입담이나 칼럼의 필력은 선수출신 평론가 중에서 으뜸이라는 평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초창기에 KBO 각팀에 재일동포 선수들을 이어주는 등 여러 공헌을 했지만, 한국 프로야구가 성장했던 1990년대에도 1980년대 수준으로 생각, 3군 수준의 퇴물을 소개해줘서 각 구간의 프런트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그가 "괜찮을 것" 이라고 소개해서 한국팀에 입단했던 여러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은 거의 활약을 못하고 방출되었다.

프리미어12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본이 오타니를 완투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며 고쿠보 감독의 안이함을 지적했고, 김인식 감독의 인내력을 칭찬했다.

7.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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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상단의 영상 캡쳐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라운드 1, 2위전에 참석한 장훈의 오른손.
  • 오른손에 화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사진을 보면 오른손의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져있고,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붙어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 오른손을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왼손으로 가리거나 뒷짐을 지고, 식사할때도 오른손은 항상 탁자 밑으로 숨긴다고 한다.[88] 손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1959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후 온 가족이 히로시마에 새로 지은 집에 모여 식사하던 중 장훈이 "이 오른손이 멀쩡했다면 성적이 좀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 박순분 여사가 "저 어린 것을 혼자 내버려 뒀다가 손을 다치게 만들었으니, 나도 참 나쁜 어미다"라며 펑펑 눈물을 흘렸고, 그 일을 계기로 장훈은 다시는 남에게 오른손을 보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야구인 중 가장 존경하는 대 선배 카와카미 테츠하루에게만 유일하게 자신의 오른손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카와카미는 "엇" 하며 놀라더니 "그런 손으로 어떻게..."라면서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나니와 상고 상고 시절의 친구로는 전직 야쿠자이며 화가로 활동중인 야마모토 아츠무가 있다. V시네마[89]화 된 야마모토의 자전적 저서 「나니와 상고의 야먀모토다!」에서는 장훈과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또 야마모토가 야쿠자 생활로부터 손을 씻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장훈으로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라는 설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학창시절 장훈은 그만의 독특한 타격 훈련법을 갖고 있었다. 한밤중에 방안의 불을 끄고 컴컴한 상태에서 타격 자세를 취한 채로 방 한 구석을 응시하면 가상의 야구공이 떠오르고 장훈은 그 공을 향해 스윙을 하는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그 와중에 정말 맘에 쏙 드는 스윙이 되면 귓가에 "퓽"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거슨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배트가 바람 가르는 소리여 장훈은 그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어서 밤새도록 몇 백번이고 스윙을 불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훈이 밤마다 계속 스윙 연습을 하면서 그의 방 다다미는 발자국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고(...). 프로 입문 이후 장훈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낄 때 마다 이 훈련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 요시 그란도 시즌 백인천과는 형-동생 하며 격의없는 의형제로 지낸다.(백인천은 장훈을 요상하게도 '장이형'이라고 부른다.장형도 아니고 훈이 형도 아니고) 도에이 시절 장훈은 백인천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줬고, 한국인에게 척박하기 그지없는 일본야구에서 생존하는 법도 알려줬다. 백인천이 입단후 몇년간 불펜 포수 노릇을 하느라 타격훈련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팀내의 확고한 실력짱, 싸움짱(!)인 장훈이 백인천을 불러 타격훈련을 봐줄때는 그 어느 선수도 백인천을 건들지 못했다고 한다. 장훈은 백인천에게 위협구를 던지는 투수에게 복수하려면 세이프티 번트 후 태그를 하러 들어오는 투수의 발을 사뿐히 즈려밟고 사정없이 밟으라고 알려줬고, 백인천은 이를 실전에서 시전했다.
  • 또한 타격왕이나 MVP 등을 수상하며 일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던 시기에도 자만하지 않고 노력하는 태도로 후배 백인천에게 감명을 받게 한 일화도 있었다. 바로 위에 서술된 장훈 특유의 타격 훈련법과 관련된 일화인데 그는 자신의 스윙이 만족스럽지 못한 날마다 밤에 다른 동료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그 연습을 하곤 했다. 하루는 불 꺼진 숙소 식당 구석에서 혼자 그 타격연습을 하던 차에 자다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식당을 지나가던 백인천이 깜짝 놀라 "아니 장이형, 여기서 지금 뭐하우?"라고 묻자 장훈은 "아 오늘은 스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좀 더 연습한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아니 형님처럼 잘하는 사람이 무슨 이 밤에 그렇게까지 합니까?"라고 하자, "그런 게 어디 있냐? 부족하다면 더 해야지!!"라고 짧게 대답하고 계속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 백인천은 후일에 방송 인터뷰에서 그 날의 일을 회상하며 당시 "아, 저렇게 훌륭한 선수도 만족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항상 노력하는구나. 나도 꼭 그래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날 이후로 자신의 성적이 좋건 나쁘건 부족한 부분이 느껴질 때는 그날 밤 배트를 묵묵히 휘두르던 선배 장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에 뒤쳐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이를 악물고 밤새 훈련에 매진 했었다고 털어 놓은 바 있다. 장훈은 여러 방면에서 직간접적으로 백인천에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선배였던 것이다.
  • 1961년 시즌을 앞두고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 시게루가 불시에 선수단 기숙사를 방문하여 장훈의 방에 들어왔는데, 평소에 장훈은 배트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벽에 일일이 못을 박아 배트를 수평으로 걸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를 본 미즈하라는 "자네처럼 장비를 소중히 여기는 선수는 프로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라며 짧게 장훈을 격려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명감독에게 칭찬을 받은 장훈의 기분이 뿌듯해 진 것은 당연지사.
  • 미즈하라 시게루가 도에이 감독 취임 후에 정규시즌 중 시합 막판에 수비가 약한 장훈을 대수비 요원으로 교체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 자체야 흠이 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이미 이닝이 시작되고 장훈은 좌익수 수비 위치에 가 있던 후에야 심판에게 교체를 통보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장훈도 존경하는 스승님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장훈의 인내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느 날 경기 후반 장훈이 좌익수 자리에 도착한 후 미즈하라가 또다시 교체 사인을 보내자 장훈은 분통을 터뜨리며 도에이가 아닌 상대 팀 덕아웃을 통해 야구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상대 선수들이 어리둥절 한 것은 당연지사. 그것도 모자라 장훈은 그 길로 선수단 기숙사에 가서 홧김에 배트로 기숙사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려버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 지금 같으면 벌금에 출장정지 정도는 약과였을 상황이었지만, 미즈하라는 이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않고 장훈을 계속 선발 좌익수에 4번타자로 기용했다. 차후에 미즈하라는 장훈을 불러서 "이닝이 시작하기 전에 수비를 바꿔줘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경기 후반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이미 이닝은 시작해 있고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수비 교체를 하게 되더라. 자네 기분이 상한 건 미안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다오" 라며 양해를 구했고 장훈은 '그렇게 시합에 몰두하신다니 어쩔 수 있나. 이런 감독님이라면 내 야구 인생을 걸어볼 만 하다' 라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1970년 타율 .383을 기록하여 시즌 최고타율을 갱신할 때 다른 팀이지만 친하게 지낸 미국인 선수 잭 블룸필드[90]의 덕을 본 일이 있다. 블룸필드가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으로 뛰던 1960년대 초반, 장훈은 평소 자기보다 발이 느린데도 기습 번트에 능숙했던 블룸필드를 어느 날 긴자의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초대하여 "세이프티 번트 잘 대는 법 좀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처음엔 '이 자식 뭔 소리야 남의 영업비밀을 알려달라니' 라는 듯한 태도의 블룸필드는 장훈의 정중한 부탁에 팀을 떠나 같은 야구인으로서 식당에서 밥먹다 말고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알려줬다. 블룸필드의 비법은 1. 절대 상대방에게 번트의 낌새를 보이지 말라 2. 타석에 들어섰을 때 스윙을 크게 하며 강공인것 처럼 페이크를 쳐라 3. 번트를 대는 순간 왼발을 오른발과 크로스시켜 1루 쪽으로 내딛으며 몸을 틀어라... 그렇게 하면 1루에 최소 반 발짝 내지 한 발짝은 먼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블룸필드로부터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전수받은 장훈은 이후 번트 안타로 짭짤하게 재미를 봤고, 5타수 4안타 이상을 쳐야 시즌 최고 타율을 경신할 수 있었던 1970년 시즌 최종전에서 3안타를 때려낸 장훈은 5번째 타석에 들어서 1루쪽으로 기습 번트 안타를 성공시키며 오시타 히로시가 1951년 세웠던 0.3831를 3모 넘어서는 0.3834로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블룸필드는 장훈에게 비법을 알려준 이후 종종 아침 댓바람부터 숙소를 찾아가 늘어지게 자고 있던 장훈을 깨워 "하리모토, 아침이나 같이 먹자. 물론 네가 쏘는거임"이라며 장훈의 컨디션을 자주 흐트러 놓았다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짜증을 냈겠지만 블룸필드는 장훈에겐 은인이었던 지라 군말없이 따라 나섰다고 한다...[91]
  • 현역시절 퇴장처분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이언츠 시절에 경찰의 조사를 받는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정차해 있던 요미우리 구단 버스가 경기 중 판정 문제를 이유로 히로시마의 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팬들과 시비가 붙어 "장훈에게 맞았다", "아니, 나는 때리지 않았다"라며 서로 옥신각신한 것이다. 특히, 자이언츠 시절의 사건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받아들이기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지독한 야유를 받았던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있었던 경기에 장훈의 어머니인 박순분 여사가 아들이 히로시마로 원정경기를 하러 오는 데 맞춰 직관을 왔었지만, 참고 넘기기 어려운 팬들에 야유에 감정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고, 경기를 다 못본 채 돌아갔다고 한다.
파일:장훈_터질듯한이가슴을.jpg
* 장훈이 현역 말기에 접어들던 1979년 11월, 장훈의 전기 영화 터질듯한 이 가슴을이 개봉되었다. 이상언이 감독했고 이동진(장훈 역)[92], 하명중(장훈의 형 역), 김애경(장훈의 어머니 역) 등이 출연했으며 장훈 자신과 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도 특별출연 했다. 근데 고라꾸엥 구장 관중이 8만명???[93]
  • 같은 나이에 프로입문 동기로 일본 이외의 국적을 갖고 있으며, 요미우리 시절에는 함께 중심타선 "OH포" 를 형성한 왕정치와는 프로입문 당시부터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다. 1979년 시즌 초반 장훈이 중심성 망막염으로 일시적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남기자 요미우리에서는 장훈을 롯데로 방출하려 했는데, 이제껏 구단에 의견을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는 왕정치가 시즌 종료 후 납회식 때 "하리모토(장훈)가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치게 해 주십시오" 하며, 당시 오너 쇼리키 토오루에게 읍소했다. 쇼리키 구단주가 "왕정치 자네 술 취했나?"라며 불쾌해 하자 장훈이 왕정치의 소매를 잡아끌며 만류했고, 장훈 스스로 "그동안 감사했다. 롯데로 가겠다"라고 선언하여 왕정치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해 주었다.(그리하여 롯데 오리온즈 선수답게 통산 3000 안타를 달성하였다며 일본+대한민국부터로의 롯데그룹으로만이 동 아시아 자본 체계 발전력을 현재로도 향상하기 위해 장훈 본인이 삼천팔십오의 배트라고 불리우는 진정한 장본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장훈은 롯데로 이적했지만 그날의 일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왕정치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오랜 세월의 침체를 극복하고[95]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대망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냈을 때(1999년)에는, "지금까지 왕짱(왕정치의 애칭)을 바보 취급해 온 놈은 모조리 머리를 밀고 사과해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치고 일본 한 시즌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려 할 때, 왕정치 감독이 이끄는 다이에와의 경기에서 사실상 경원당한 것에 대해, "투수도 맞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중략) 그렇게 치고 싶었다면 스트라이크가 두 개 들어왔으니 그걸 쳤으면 됐을 거 아닌가."라고 했는데, 이 발언은 왕정치와 관계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 부인 역시 재일교포이며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장훈 옹은 야구선수가 결혼을 하면 전부 실력이 하락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부인과 각방을 쓴다고 하고 은퇴 이후에도 동침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훈 옹의 방에 종이 하나 있는데 그 종을 울리면 부인이 베개를 들고 동침을 하러 오며 딸들이 다른 방에 있으니 문을 잠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부부간의 일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8. 현재

은퇴 후 줄곧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TV방송에서 연예인 못지않는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진정한 엔터테이너 아래의 예를 보아하니 그의 기믹은 호통치시는 거성의 이미지인 듯.
  • TBS테레비계 선데이 모닝의 코너 「주간 고견코너」에 오사와 케이지와 함께 고정출연하고 있다.[96] 내용은 아무래도 야구 중심이지만, 방송 초기부터 인기를 얻고 있어 방송 분량을 많이 뽑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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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닛폰햄 직속 후배인 신조 츠요시에게는 항상 엄하게 대하는데 "떽!(원래는 불교식 호통소리인 (喝), 일본어로는 가츠)"이라며 꾸짖는 모습은 프로그램의 명물이 되었다. 닛폰햄의 캠프에 갔을 때에는 백네트 뒤에 있던 신조로부터 반대로 "떽!"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장훈은 신조를 꽤 높게 평가하는데, 신조가 2006년을 마지고 은퇴를 발표했을 때에는, "곤혹스럽네요"고 이야기하며 그때만큼은 "떽" 하지 않았다.
  • 그 흔한 타격 타이틀 한 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말도 안 되네요"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후배이니 최근에는 이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 베이징 올림픽 당시 호시노 감독이 한국에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하자,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다. 호시노 감독은 물론이요 같이 따라갔던 다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코치도 같이 박살이 났다. 얼마나 "떽!"을 퍼부었는지 옆에 있던 오사와 케이지씨가 "어유 오늘 무섭군요"라고 한마디 보탰을 정도. 이 영상이 꽤 유명해서 한때 자막판까지 제작되어 돌았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영상이 남아있지 않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깠다.
  •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OB리그)에서 삼진을 당하면 거꾸로 팬으로부터 "떽!"이라 야유를 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이 TV에 나오곤 하면 스스로 "떽!" 하며 꾸짖는다. 오오오!
  • 2005년에는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한지 5년 만에 첫 안타를 때렸다. 본인은 "투수인 호시노 노부유키가 적당히 던진 공을 쳤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일본판 흑마구 호시노 노부유키의 공을 쳤다는 것이다.
  •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인지 남자 선수가 우승을 하거나 은퇴를 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장면이 나오면 불쾌하다는 듯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훌쩍훌쩍 울면 못쓴다! 떽이다!!"라고 하는 투의 코멘트를 날린다. 이런 투의 발언은 장훈 옹의 유행어 내지는 트레이드 마크로 정착된 듯 한데, 이 얘기를 할 때 다른 해설자나 사회자는 킥킥대곤 한다. 한편, 여성에게는 "떽!" 대지는 않지만 가끔 부진을 보이는 선수에게는 "떽!" 대곤 한다. 한 예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던 프로골퍼 미야자토 아이에게 "떽!" 하고 일갈했다.
  • 2005년 NHK배 국제 피겨스케이트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감격에 겨워 통곡하던 오다 노부나리에게는 "반(半) 떽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사회자인 세키구치 히로시를 비롯해 다른 해설자는 장훈의 "떽!"에 실소했으며, 오사와는 반대로 "오오오! 멋진데!" 하고 격찬(?)했다.
  •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이시이 타쿠로가 2006년 5월 11일 대 라쿠텐 전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정말 드물게 "훌륭하다(天晴)!"라고 말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흘린 눈물이니까.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대로 인터뷰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격찬했다. 참고로 이시이 타쿠로는 투수로서 승리를 기록하고[97] 이후 타자로 전향한 선수 중에서 두 번째로 2000안타를 기록했다. 첫 번째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전 요미우리 감독.
  • 야구에 대한 생각은 꽤 보수적이다. 특히 일본프로야구 정상급 선수들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전문가 중 한 명인데 "일본야구에 신세를 졌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나 일본인 메이저리거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1년 간의 출장금지 페널티를 주자는 의견을 서슴없이 내기도. 이러한 입장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이 선수, 저 선수, 그 선수 등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데 대해 가차없이 떽!을 날렸다. 2012년 말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 진출과 일본 잔류를 두고 갈등을 할 때도 대놓고 반대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좀더 힘을 길러서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98] 또한 2013년 WBC 3회 대회에 일본프로야구 노조가 참가 거부를 밝히자 "그동안 노조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들었는데[99], 처음으로 노조의 행동이 맘에 든다."라고 이야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장훈 옹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100] 비슷한 생각으로 2013년 7월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메이커 노릇을 하던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두고 "타율 2할 2푼을 못치는게 선수냐?"는 말을 방송에서 했다가 다르빗슈 유가 트위터로 "가와사키는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그 방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선수를 헐뜯기 위해서?"라며 일갈을 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 언론과 팬들은 다르빗슈가 친정팀 대선배를 대놓고 비판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 이렇듯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에 비판적인 장훈도 우에하라 고지만큼은 칭찬해 줬는데...문제는 그 발언 수위가 높다는 것. “우에하라 공은 美 애송이들이 칠 수 없다"[101]는 명언을 남기셨다. 다만 이점과 위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은 그가 어릴 적 미국의 핵공격에 의해 큰누나를 비롯한 주변인을 잃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일본이 자초한 전쟁이라지만 일본인도 아닌 본인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니 개인감정적으로는 미국에 반감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본인 자서전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 한민족이라는 같은 피가 흘러서 그런지 이승엽에게는 절대로 "떽!" 대며 일갈하지 않았다. 이승엽치바 롯데 마린즈(2004~2005)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2군행의 지시에 대해서는 "승엽이가 컨디션을 되찾으면 수십 승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발렌타인은 눈앞의 승리에 안달났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미쿡 동부의 어느 빨간양말 신은 팀이 2012 시즌에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이때부터 장훈 옹은 "승엽이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언제라도 힘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며 옆에서 많이 격려를 해줬으며, 특히 2006년 교진으로 이적하고 맹활약을 펼쳤을 때 2007 시즌을 앞두고 트리플크라운도 가능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KBS에서 장훈 선생의 다큐를 제작했는데, 이때 모교 후배들이 달려와 자신들에게 "떽!"을 외쳐달라고 했으나 '떽(喝)'의 일본 발음인 '가츠'가 승리(勝)의 일본 발음과 유사해서 KBS 방송 자막엔 '떽'이 아닌 '승리'라는 오역 자막이 나왔다. 한편 이 방송에서 장훈의 한국어를 들을 수 있다. 일본에서 평생을 살아온 재일교포임에도 한국어 발음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의 묘에 성묘하면서 본인은 '인동 장씨'임을 밝혔다.

9. 어록

"현역 시절 3085개의 안타를 쳤지만 단 한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쳤지요. 다시 태어나도 두 번 다시 야구 선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잘 해도 70~80%는 실패했으니까요. 23년간 괴로웠습니다."#
- 2017년 중앙일보 인터뷰中
2할 9푼을 치는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단순하다. 2할 9푼 타자는 4타수 2안타에 만족을 하지만, 3할 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4타수 3안타또는 4타수 4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다
“사람은 누구나 편해지고 싶어 합니다. 잘 안 되면 술도 마시고 싶고 … 누구나 가정을 우선할지, 일을 우선할지 둘 중 하나를 택합니다. 좋은 남편,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말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가정도, 야구도 잘하고 싶다고 모두들 생각하지만 양립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스포츠맨으로서 이기고 싶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2017년 중앙일보 인터뷰中

[1] 통명이다.[2] 참고로 이 영상에는 오역이 하나 있다. 탁구부 아이들이 장훈에게 싸인을 받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승리라고 말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자막이 떴는데, 사실 아이들이 말해달라고 한 것은 장훈의 TV 프로그램 명대사인 '떽(카츠)!'이다. 아래에 자세히 서술.[3] 구단 운영권 매각으로 팀명이 바뀌었을 뿐 '도에이 플라이어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1973년)-닛폰햄 파이터즈(1974년)'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이기 때문에 이 란에는 도에이 플라이어즈로 단독 표기하고 그 외의 후신명은 각주에 표시한다.[4] 일본야구 전문가 박성호 님이 운영하던 홈페이지(www.npb.co.kr)에 게재되기도 하였다.[5] 그나마 일본어가 조금 되는 작은 아버지가 파출소 등을 찾아가 트럭 운전수를 잡아달라 했지만, 조선인이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느냐고 쫓아내며 경찰은 수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충격과 공포다[6] 다친 장훈을 업고 병원에 갔지만, 한복을 입고 일본어도 못하는 장훈의 어머니를 보고 일본 의사는 응급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조선인 차별로 볼 수도 있고, 행색이 워낙 궁핍하니 치료비를 못 받을까 의심이 되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장훈의 화상이 초기치료가 잘 되었다면 조금 더 좋은 예후를 보았을 수도 있다. 치료를 거부당한 후 다행히 마음씨 착한 간호사가 붕대와 약은 챙겨줬다고 한다.[7] 장훈과 작은 누나는 폭발시 어머니가 끌어안아 무사했는데, 당시 어머니의 등 뒤에는 수많은 유리 파편이 박혀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8]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이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전 롯데 감독) 2명뿐이다.[9] 밥반찬으로 갈치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렸는데 밥을 씹지도 않은 채 꿀꺽 삼키고 술까지 마시는 등 민간요법으로 뼈를 빼려 했지만 오히려 식도가 파열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두 달 뒤에 사망하였다. 참고로 국교단절로 인해 당시에는 아버지의 정확한 사인도 알지 못했는데, 후에 장훈이 재일교포 야구단 방문으로 귀국해서 창녕의 조부모를 찾아뵌 후에야 아버지의 사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10] 아버지의 사망 후 그나마 도움이 되던 작은 아버지마저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기차에 치이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11] 정식 명칭은 히로시마 종합 그라운드 야구장이며, 칸논 구장이란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1941년 개설된 구장으로 1950년 히로시마 카프가 창단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카프의 홈경기 위주로 프로야구 경기를 개최하었다. 그 후 1957년 시즌 도중 카프가 신설된 히로시마 시민 구장으로 홈구장을 옮기면서 프로야구 경기는 개최하지 않게 되었지만 2010년을 끝으로 철거된 시민구장과는 달리 현재도 히로시마의 주요 아마추어 야구경기 개최구장으로서 존속 중이다.[12]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장훈에게 8살 연상인 형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13] 입에 슬리퍼를 물리고 네 발로 기게 만들며 놀렸다고 한다.[14] 장훈의 손 상태를 아는 동네 형들은 장훈에게 별 기대를 안하고 글러브와 배트를 지키게 하는 등 심부름꾼처럼 데리고 다녔는데, 어느날 선수가 모자랐는지, 장훈을 선발로 끼워줬다고 한다. (동네 야구이지만) 생전 처음 들어선 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를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장훈의 1959년 프로 데뷔 첫 안타도 우중간 2루타였다.[15] 장훈 본인은 이날 자기는 라이파치로 야구인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라이파치'는 우익수-8번 타자라는 말인데 이 두 가지 단어의 조합은 팀내에서 야구를 제일 못하는 선수를 뜻한다. 리그 수준이 낮을 경우 수비에서 우익수좌익수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실제로 한국 사회인 야구가 그렇다.) 공격에서도 지명타자제도가 없는 경우 투수는 9번 타순에 서는 것이 보통이로, 지명타자제도가 있을 경우 9번 타자는 '그림자 테이블 세터'라고 해서 타격은 나쁘더라도 발이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가 들어가는 경향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8번 타자는 팀내에서 가장 못 치는 타자라는 소리이다.[16] 장훈이 프로야구에서 성공한 후 가족들과 식사하던 중에 형님은 장훈에게 "그 때 단바라에 수영부가 있었다면 네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내가 너 키운거야 임마^^[17] 장훈의 인터뷰에 따르면 대여섯 명과 싸우면서 맞은 적도 있지만, 서너 명 정도는 진 적이 없다고...필살기는 박치기였다고 한다. 강백호의 조상[18] 당시 장훈은 머릴 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 대목에서 조센징이 왜 나오냐?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라고 조언했다고 한다.[19] 장훈의 인터뷰를 보면 귤상자 3개에 흰 천을 덮어 테이블 삼아 장사하는 그야말로 노점 수준의 가게였다고.[20] 장훈의 어머니는 일본어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분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장훈의 어머니가 고기를 받아오던 암시장은 버스로 20여 분 거리였는데, 어머니는 버스비 30엔이 아까워 걸어서 다니며 물건을 떼어오셨다고 한다.[21] 어머니는 장훈이 체격이 좋으니 형에게 운전을 배워서 덤프트럭 운전을 하라고 했다 한다.[22] 야구부 감독이었으나 전해 타 학교와의 폭력사태가 터진 것에 책임을 지느라 감독을 그만두고 야구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23] 자가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이라 오토바이는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형님은 그 오토바이를 출퇴근용으로 10년 가까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24] 한창 먹어도 먹어도 부족한 사춘기 시절이라 장훈의 선택은 항상 빵이었다. 목욕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돗가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는 것으로 퉁쳤다고(...).[25] 이름이 같아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장훈은 타니모토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26] 미즈하라는 2차대전 때 나카지마 선생과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같이 고초를 겪은 전우였다.[27] 당시 릿쿄 대학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주력선수로 뛰고 있었다. 1959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으나 프로의 벽을 넘지 못하고 4시즌만에 은퇴한 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 스카우터로 이름을 남겼다.[28] 사실 장훈 옹도 자서전에서 자신의 팔 혈관은 다른 투수들에 비해 두꺼워서 투구 시 팔이 쉽게 피곤해지고 경기 후에도 팔의 피로가 늦게 풀리는 편이었지만, 도에이 시절 선배이자 팀의 에이스였던 도바시 마사유키는 반대로 팔의 혈관이 가늘었던 투수라고 서술한 바도 있다.[29] 투수를 꿈꾸다가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해서 성공한 케이스로 이승엽이대호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전향한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낸 결실.[30] 택시 운전사인 형님 덕분에 회사에 남아도는 폐타이어를 마음껏 확보할 수 있었다.[31] 사실, 거인의 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식의 훈련법은 절대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훈련법이 왕도였기 때문에 문제였다.[32] 다만, 장훈 혼자만은 아니고 일부 다른 부원들도 휴부 처분을 받았다고.[33] 불과 23세 나이에 감독이 된 자였는데 굉장한 혐한(嫌韓)이었다. 게다가 평소 장훈이 야구는 물론 매사 감독인 자신은 제껴두고 전임 감독 나카지마 야구부장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지함을 곱게 보지 않았다고.[34] 그러나 일부 재일교포 선수들은 "반쪽발이"라는 야유를 듣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았다고... 이런 졸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는 한다.[35] 당시 "관동지역에 와세다 실업고 왕정치가 있다면 관서에는 나니와 상고 장훈이 있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36] 195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끝으로 미즈하라는 더 이상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바로 다음 해인 1956~1958년 3년 연속으로 숙적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니시테츠 라이온즈에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빼앗겼고,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난카이 호크스에게 4전 전패로 깨졌다. 거기다 1958년과 1959년엔 각각 이나오 카즈히사스기우라 타다시, 이 2명의 투수에게 역사상 유례없는 일본시리즈 4승(즉, 최동원의 원조)을 헌납하며 패배했다. 이러니 우승을 원하던 프런트와의 관계가 결코 좋을 리 없었다.[37] 이사비용으로 30만 엔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38] 프로입문 동기이자 친구인 왕정치는 계약금 1천 8백만엔, 월봉 11만 엔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39] 당시 최고액권은 1천 엔이었다.[40] 2층은 살림집으로 짓고, 1층에는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운영하던 호르몬야키 가게를 확장하여 새로 냈다고 한다.[41] 당시 규약은 3명 보유에 2명 출장. 이미 도에이는 외야수 잭 래드라와 하와이 출신의 1루수 스탠리 하시모토를 보유하고 있었다.[42] 장훈의 출생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43]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가 신인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김일융이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해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받았다면 외국인도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됐다.[44] 이 규정은 1982년에 출범하는 KBO 리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만 국적의 소소경이 그 혜택을 본 대표적인 사례.[45] 일본 언론에 따르면 2013년 시즌 개막전 오타니 쇼헤이 이전 가장 최근의 고졸 신인 개막전 출전이라 한다. 무려 54년 전(...)[46] 이날 도에이의 이와모토 감독은 만세를 부른 장훈을 곧바로 교체하여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질책 차원이 아닌 루키가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그리고 장훈은 그날 저녁 숙소에서 2군으로 떨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해소하려 밤 새 불 꺼진 방에서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47] 1960년 교진군미하라 오사무가 갓 부임한 만년 세리그 꼴찌팀 다이요 훼일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빼앗기자(거기다 다이요는 일본시리즈에서 콩라인니시모토 유키오다이마이 오리온즈를 4전 전승, 그것도 전부 1점 차 승리로 꺾고 우승하기까지 했다!) 빡친 교진군 프런트가 미즈하라를 해임시켰다. 미즈하라는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토에이 감독으로 이적한다.[48] 고시엔에서 열린 7차전, 3승 1무 2패로 앞서고 있던 도에이는 9회까지 한신과 0대 0으로 팽팽하게 맞서다가 연장 10회초 선두타자 안타로 출루하여 3루까지 진출한 장훈을 다네모 마사유키가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불러들이며 1대 0 리드를 잡았다. 미즈하라 감독은 수비 강화를 위해 장훈을 좌익수에서 빼고 대수비 요원으로 교체했지만, 10회말 한신의 후지이 에이지에게 동점타를 얻어맞았고 12회초 공격에서 장훈 대신 타석에 들어선 히모토 사치오가 범타로 물러나자 미즈하라 감독은 덕아웃의 선수단이 다 들을 정도로 "내 잘못이다. 장훈을 (교체하지 않고)좀 더 끌고 갔어야 하는건데"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한마디에 장훈은 '감독님이 나를 정말 신뢰하는구나'라며 감명받았고, 다행히 도에이는 후속 타자 사이온지 아키오가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좌월 솔로포를 뽑아낸 데 이어 에이스 도바시 마사유키가 12회말 한신 공격을 틀어막으며 일본 제일을 차지할 수 있었다. 우승 인터뷰 때 미즈하라 감독은 한번 더 "10회말 수비 때 장훈을 뺀 것은 나의 실수였다"라며 장훈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고 한다.[49] 여담으로 이해 일본시리즈는 양대리그 시행 이후 처음으로 양측 다 센트럴리그(한신), 퍼시픽리그(토에이)를 처음 우승하고 치르는 일본시리즈였다.[50] 슬럼프라지만 이 기간 가장 OPS가 낮았던 1965년에도 .292/.394/.486 OPS .870 23홈런 88타점 29도루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타율 .280을 기록하며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한 63년에는 33홈런-41도루로 30-30 클럽에 가입하고 OPS .913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여전히 정상급 타자였다는 것.[51] 1975년 퍼시픽리그가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했고 장훈의 수비가 오른손의 장애 때문에 리그 최악이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이라 나카니시 감독은 장훈을 지명타자로 돌렸다. 누가봐도 합리적 결정이었지만 정작 장훈은 꺼림찍한 기분이었고 이게 타격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해 장훈은 안타 제조기의 명성치고는 다소 부진한 0.275로 시즌을 마친다.[52] 참고로 미하라는 나카니시 후토시의 장인이기도 했다.[53] 수정 전엔 오사카라고 적혀 있었으나 한신 타이거스는 오사카에서 창단한 건 사실이나 이미 오래전인 1961년 효고니시노미야로 연고지를 옮겼으니 간사이 지방이라고 봄이 정확하다. 애초에 오사카에서 인기가 좋긴 하나 오사카 쪽에서 인기가 좋은 건 아니다.[54] 장훈은 요미우리 입단 후 요시다 감독에게 약속을 못지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요시다는 "가고 싶은 곳에 가야지 어쩌겠나" 면서 장훈을 격려했다고 한다. 대신 한신과의 경기에선 적당히 해달라고 부탁...은 개뿔(...) 교진군 리그 2연패로 엿먹임 꿀잼[55] 그 해 주루코치로 부임한 요나미네 카나메가 2루로 들어갈 때 야수의 글러브를 발로 차라는 조언을 했다. 야수의 실책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는데 장훈은 경기 중에 요나미네의 조언대로 실행했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56] 3천번째 안타인 홈런을 날린 장훈은 마음 속으로 베이스를 밟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차분히 홈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니 헬멧까지 벗어 던지고 좋아 날뛰면서 다이아몬드를 일주하고 있더라고 털어놓았다(...).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논 경우... 덧붙이자면 허용투수 였던 야마구치 타카시의 눈앞에서 헬멧을 던지며 날뛴 것이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장훈은 나중에 야마구치에게 사과했다고 한다.[57] 백인천은 1980년 시즌 이후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해 한 해를 더 뛴 뒤 일본을 떠나 1982년 한국프로야구 MBC 청룡감독 겸 선수금의환향 했다.[58] 2018년까지 타율 .320으로 통산 타율 1위를 기록했다. 현재는 아오키 노리치카가 경신. 다만 아오키의 플레이에 따라 향후 순위가 다시 변동될 가능성도 있다.[59] 이후 절친인 왕정치도 1980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다.[60] 1975년 퍼시픽리그 신인왕이자 그 해 일본시리즈 MVP.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에서 어느 야구소년을 필승계투조 투수로 키워냈다.[61] 사진 오른쪽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은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인 야마우치 카즈히로. 장훈과 프로 선-후배 사이로 타격왕 자리를 놓고 다투던 라이벌이었다. 코칭 시 타자를 붙잡고는 쉴 새 없이 타격 이론을 설명한다고 해서 별명이 갓파 에비센이었다.[62] 1회 말 대타였던 이유는 선발 출장한 타자가 갑자기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닌, 상대 선발멤버진 정찰용(즉, 위장오더)으로 선발 타자를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엔 선발투수 예고제 등이 없었던 시기라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를 위장오더로 선발 멤버로 내보낸 후 상대의 선발진을 확인하면 바로 첫 타석에서 대타 교체를 하는 것이 흔했다. 이렇게 위장선발로 주로 나서던 선수의 대표적인 예가 송일수.[63] 킨테츠 버팔로즈한신 타이거스에서 선발투수, 중간계투 등으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 킨테츠, 한신, 소프트뱅크 등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64] 맞지 않게...란 표현은 어색한게 사실 근육이 많으면 각력을 포함한 근력이 센 경우가 대부분이라 발이 빠르다. 실제로 육상선수들 대부분은 길고 호리호리한 우사인 볼트(물론 근육질이다.)를 제외하곤 180대의 근육질이라, 장훈 정도의 키면 핸디캡이 되지 않을 정도이고 탄탄한 근육질이니 달리기가 빠른게 자연스럽다. 물론 저기서 더 근육이 많아 아주 근육돼지가 되면 스피드가 저하되는게 사실이지만 교타자였던 장훈은 스피드에 지장이 올 정도로 벌크를 키웠던 적은 없다. 건장한 체격의 선수들이 느리다는 건 홍성흔이나 김동주처럼 비슷한 키에 100kg에 가깝거나 그 이상의 거구들 얘기지 저 정도면 사실 근육량이 많은 야구선수로서 딱 적당한 몸무게다. 현대 야구에 오면서 점점 체격이 커져서 "건장한 체격(장훈의 체격은 현대야구에선 강타자치고 전혀 큰 체격이 아니다.)의 기준이 올라가 힘 좀 쓴다 하는 타자들은 거의 전부 엄청난 거구들이 되어서 그렇지(심지어 홈런타자치고 호리호리하고 발도 늦은 편이 아닌 이승엽도 장훈보다 체격이 크다.) 장훈 정도면 결코 스피드에 지장을 줄 정치가 아니다. 단 지금의 기준이 아니라 평균 체격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웨이트 트레이닝 기법도 거의 전파되지 않았던 50년대~70년대 일본인들을 기준으로 하면 그들 사이에서 장훈은 엄청난 거구기는 했다.[65] 장훈 옹의 역대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즌에 30-30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율이 0.280에 그치는 바람에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에는 미치지 못했다. 젠장(?)[66] 스탯은 여기에 있다.:# 기록은 타율 3할 2리, 안타 3283개, 홈런 660개, 도루 338개.[67] 참고로 알렉스 로드리게즈도 안타 3115개, 홈런 696개, 도루 329개를 기록했지만, 타율이 2할 9푼 5리로 3할에서 단 5리 부족했다. 스탯은 여기에 있다.: #[68] 텐빙(저울) 타법이라는 타격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자다. 배트를 거의 눕히다 못해 아래로 내리는 자세에서도 신기하게 갖다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박정태보다도 더욱 해괴한 타격 폼의 소유자였지만, 그럼에도 매년 130안타 이상은 꼬박꼬박 찍었다.[69] 2013 이전의 에러 회피(エラー回避)에 해당되는 능력치.[70] 사실 장훈은 야구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능만 믿고 노력을 안 하는 선수들을 혐오하는 수준으로 싫어하며, 이와 반대로 끝까지 일관성있게 언제나 노력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을 보면 본인도 그래왔기 때문에 매우 좋아하는데 이치로가 바로 재능과 그 재능을 뛰어넘는 노력까지 해 온 사람이라, 그야말로 정확히 그런 선수이기 때문에 그의 성향이나 장훈이 그동안 해설을 하면서 가져 온 선수 평가 관점에서도 사실 좋아하면 좋아하지 비난이나 비판할 여지가 없다. 비난은 아니지만 좀 츤츤거리는 감은 없지않아 있다[71] 타율 4위[72] 타율 2위[73] 타율 2위 - 1위와 단 1모 차이[74] 타율 2위 - 1위와 1푼 차이[75] 1위는 아오키 노리치카, 2위는 레론 리, 3위는 와카마츠 츠토무. 단 1위인 아오키는 2018년 기준으로 현역이므로 순위가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76] 1위는 427개의 오 사다하루.[77] 7년 연속 수위타자 기록을 가진 스즈키 이치로가 공동 보유하고 있다. 이치로는 이 기록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78] 역대 1위는 랜디 바스(1986년)의 0.389, 역대 2위는 스즈키 이치로(2000년)의 0.387, 역대 3위는 스즈키 이치로(1994년)의 0.385이다.[79] 역대 1위는 스즈키 이치로의 7년 연속 타격왕 기록(1994~2000)이다.[80] 20년 이상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한 것은 오 사다하루와 장훈 뿐이며, 입단 1년차부터 한정하면 장훈이 유일.[81] 어느 날 역도산이 수제자 김일과 잡담을 하던 중 기쿄(桔梗, 도라지)라는 단어를 꺼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역도산은 김일에게 "기쿄를 모르나? 도라지라는 뜻이다"라고 일러준 적은 있었다. 김일이 그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가 "도라지"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방한했을 때도, 높으신 분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어를 다 잊어버린 척 했다고 한다.[82] 미즈하라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하필 출범 개막전 전날인 1982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나 개막전에 초대될 수 없었다.[83] 국내에서는 이만수진갑용도 현역 시절 특유의 입담으로 선후배동기 안가리고 농락한 것으로 유명하다.[84] 거친 말보다는 이렇게 쓸데없는 말로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속삭임 전술(ささやき戦術)이라고도 한다. 가짜 데드볼 조작으로 악명 높았던 타츠카와 미츠오 또한 이런 속삭임 전술에 능했다고 한다.[85] 노무라 본인은 책 「プロ野球重大事件 誰も知らない”あの真相”」(프로야구 중대사건 아무도 모르는 "그 진실")에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며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걸면 장훈이 너무 섬세하게 배터 박스에서의 위치를 조절하는 바람에 시합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86] 한때 빙그레 감독설도 있었지만 무산됐는데 공교롭게도 86년 이 팀에서 뛴 장훈은 본인의 이름과 한자가 똑같았다.[87] 나가시마는 감독 첫 시즌인 1975년 요미우리의 사상 첫 리그 꼴찌란 치욕을 당한 데다 그 뒤에도 리그 우승 2번 빼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고 왕정치도 교진 감독 기간에 리그 우승 1번만 기록했다. 거기다 다이에 감독 초기의 리빌딩 시절엔 화난 팬에게 날계란 투척사건도 당했고.[88] 고정 출현하는 방송에서도 왼손을 오른손 위로 감싼다던가 오른손을 오므린 상태에서 손등만 보여주는 등 최대한 손바닥 쪽이 보이지 않게 가린다. 참조[89] 도에이(東映)가 제작 발매하는 렌탈 전용의 영화.[90] 1930년생으로 선수 등록명은 블룸.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킨테츠 버팔로즈(1960~1964), 난카이 호크스(1965~1966)에서 활동했고 1962, 1963년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수상했다.[91] 다만 이완 별개로, 위의 통산성적에서 보듯이 선수생활 동안 번트를 잘 대지 않았기에, 통산 번트는 고작 4개뿐이다.(2개 이상 댄 시즌도 없다.) 심지어 번트를 처음 댄 때가 프로 15년차인 1973년이니 말 다했다(...). 다만 통산 번트가 4개라는 건 희생번트가 4개라는 말이다. 장훈은 도에이 시절엔 팀의 주포였기에 희생번트를 거의 대지 않았고 요미우리에 가서도 감독의 희생번트 지시는 거의 안 받았다. 기습번트는 많이 시도해서 성공율이 높았기에 1995년 한일 슈퍼게임 현장에서 전준호에게 기습번트 요령을 알려주면서 "나의 타격왕 7회의 비밀 중 하나는 기습번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율 0.383을 기록한 1970년에는 21번 기습번트를 시도해서 20번 살아나가기도 했다.[92] 1953년생의 배우, 탤런트로 1995년 1월 간경화로 사망했다.[93]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고라쿠엔 구장의 최대 관중 수용능력은 4만 2천명 정도이다(...).[94] 한국명 김경홍. 일본으로 귀화. 롯데 감독을 역임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400승 투수.[95] 1990년대 중반 호크스는 비밀번호나 찍던 막장팀 중에 하나였다. 연패를 밥먹듯이 하던 그런 팀의 감독으로 고생한 오 사다하루에게 공개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으니...[96] 오사와 케이지는 2010년 10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훈 옹의 파트너는 주로 일본프로야구 OB들이 게스트 형식으로 출연하여 매주 바뀌고 있다.[97] 투수로서 통산 1승 4패 기록.[98] 장훈 옹은 오타니가 투타겸업을 선언하자 그의 트리플 크라운급 타격재능에 흠뻑 반하여 160km/h를 던지는 투수로서의 자질도 좋지만 타격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 몇 안 되는 전문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타니라는 선수 자체에 흠뻑 빠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99]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로 일본프로야구 재편문제가 있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을 중심으로 10개구단 단일 리그로 환원하자는 구상이 거론되었다. 이에 후루타 아츠야 선수회장과 긴테쓰의 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고, 선수회가 파업까지 불사하며 격렬히 반대한 것을 의미한다. 장훈 옹은 이 구상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100] 그런데 1960~70년대에 MLB-NPB의 친선경기를 하면 MLB 측에서 MLB에서 당장 통할 선수로 장훈 옹을 꼽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101] 이 기사에 대해 "일본 기사 번역 과정에 문제가 있던거 아닌가, 기자가 방송을 곡해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장훈은 같은 방송 패널인 가네다 마사이치와 함께 "메이저 타자들은 'ヘボ(일본어 "下手"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보면 된다. 서투르다, 어설프다 등의 의미. 젊은이들은 잘 쓰지 않는다.)'" "메이저 타자들은 떨어지는 공 던지면 그냥 아웃"라는 발언을 다르빗슈가 메이저에서 활약한 2012년부터 자주 해 왔다. 한국에서야 저 기사로 처음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지, 오히려 기사에 나온 해당 일자 방송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았다. 장훈이 한두번 저런 발언을 한것도 아니고 해서.[102] 전 요미우리 유격수, 선수회장 역임, 번트의 달인.[103]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능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김별명의 아내와 그의 2세를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는 점에서는 이 두 분의 의견도 어느 정도는 일방적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결국 이는 김별명의 일본프로야구 적응 실패라고 봐야 할 듯. 결국 김도망(...)[104] 축구에서 2부 리그 소속 클럽들은 각자 팀 내 최정예 선수들을 구성하여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리고 이런 2부 리그 클럽들도 2군 팀은 따로 갖고 있다. 당장 대한민국 프로축구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 소속 클럽들도 1부 리그 클럽들과는 별개로 2군 팀과 유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J2리그도 마찬가지. 유럽으로 확대해보자면 잉글랜드 4부 리그 프로 클럽들도 각자 2군 팀을 보유하고 있다.[105] 사실 국내 축구팬들은 예전부터 일본인 선수더라도 미우라에겐 존경을 표해왔다.[106] 미우라가 J리그에서 데뷔했을 당시 소속팀인 베르디는 요미우리-니혼테레비 미디어그룹에서 소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