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3:40:15

이나오 가즈히사

이나오 가즈히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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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3 1954 1955
키노시타 이사무 타케스에 요시마사 카와사키 토쿠지 오타 마사오 나가사카 마모루
<rowcolor=#ffffff> 1956 1957 1958 1959 1960~1963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이나오 카즈히사
<rowcolor=#ffffff> 1964~1967 1968 1969 1970 1971~1972
타나카 츠토무 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시노부 이케나가 마사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rowcolor=#ffffff> 1973 1974 1975~1977 1978 1979~1981
가토 하지메 미우라 키요히로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시타 리츠오 히가시오 오사무
<rowcolor=#ffffff> 1982 1983 1984~1987 1988~1989 1990~1991
모리 시게카즈 타카하시 나오키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rowcolor=#ffffff> 1992 1993 1994~1995 1996 1997~1999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궈타이위안 신타니 히로시 니시구치 후미야
<rowcolor=#ffffff> 2000~2005 2006~2007 2008~2012 2013~2014 2015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마키타 가즈히사
<rowcolor=#ffffff> 2016~2018 2019 2020 2021~2023 2024
기쿠치 유세이 타와타 신사부로 잭 닐 타카하시 코나 이마이 타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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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오 가즈히사의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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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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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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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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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야마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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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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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2)
24대
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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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17)
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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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22)
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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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27대 28대 29대 30대
* 21대 감독인 야마모토 코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레전드인 야마모토 코지와는 이름의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다.
}}}}}}}}}}}}}}} ||

파일:external/sportiva.shueisha.co.jp/inao.jpg
<colbgcolor=#143D69><colcolor=#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24
이나오 가즈히사
稲尾 和久 / Inao Kazuhisa
출생 1937년 6월 10일
오이타현 벳푸시
사망 2007년 11월 13일 (향년 70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체격 180cm, 80kg
프로입단 1956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입단
소속팀 니시테츠 라이온즈 (1956~1969)
지도자 니시테츠 라이온즈 플레잉 코치 (1966~1969)
니시테츠-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감독 (1970~1974)
주니치 드래곤즈 코치 (1978~1980)
롯데 오리온즈 감독 (1984~1986)

1. 개요2. 프로 데뷔 전3. 선수 시절4. 은퇴 이후5. 평가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img.www3.hp-ez.com/img_20130907-222844.jpg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2][3]
(神様, 仏様, 稲尾様!!)

일본프로야구 선수. 니시테츠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투수다.

2. 프로 데뷔 전

규슈(九州) 벳푸(別府)의 어부 가문 출신으로, 가업을 잇기 싫어 야구에 몰두했다고 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지냈다. 이 시절 노 젓기를 익히면서 훗날 그를 명투수로 만들어준 강한 어깨와 허리, 밸런스 감각을 기르게 된다. 마리아노 리베라와 비슷한 사례.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프로로 뛰어봐서 신통치 않으면 가업을 잇는다"라는 조건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이때 난카이 호크스 입단도 고민했으나 오사카행 열차를 타는 대신 집에서 가까운 니시테츠를 택했다.

3. 선수 시절

위키백과 문서

첫 해에 21승 6패, 이듬해에 35승[4] 6패를 거두는 등 8년간 234승을 거두었고, 그 뒤로 3년 연속 30승, 8년 연속 20승[5] 이상에, 한 시즌 평균 300이닝을 던졌는데, 평균자책점이 통산 1점대다.

특히 6년차인 1961년에는 404이닝을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1.69에 42승 14패를 거두어 '일본 야구 1시즌 최다 승 타이 기록'[6]을 세운다. 1961년 니시테츠는 시즌 81승을 거두었는데 이나오 혼자서 팀 승수의 절반이 넘는 승수를 책임졌다. 그리고 이나오는 그해 최저 평균자책점, 최다 승, 최고 승률,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독식했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든 해는 1958년 일본시리즈. 1958년 당시 라이온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대결에서 초반 3연패를 당해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 천하의 이나오도 1, 3차전 선발로 나왔으나 패배를 기록했다. 그중 3차전은 1실점만 한 경기였다. 그 상황에서 이나오 가즈히사는 4, 5, 6, 7차전을 모두 등판(5차전은 구원)하여 모두 승리를 따내 시리즈 4승(2패) 투수라는 대기록[7][8] 세우고 MVP와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니시테츠는 일본시리즈 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을 이룩하였다. 특히 5차전에선 연장 10회 말에 타자로 나와 끝내기 홈런을 치고 헤이와다이 야구장 밖으로 나오자, 한 니시테츠 팬이 이나오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면서 감격에 겨워 울부짖으며 "하느님[9], 부처님, 이나오님(神様, 仏様, 稲尾様 카미사마 호토케사마 이나오사마)!"이라는, 일본 야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도 라이온즈의 올드 팬들은 그때를 안주 삼아 얘기한다고 한다.

노무라 카츠야와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역대 최고의 슬라이더를 가졌다는 이나오[10]였지만 결정구는 슈트로 썼는데, 이걸 간파한 사람은 노무라뿐이었다고 한다. 또 올스타전에서 둘이 퍼시픽 리그 대표로 뽑혔을 때, 노무라는 어떤 타자에게는 슬라이더만 어떤 타자에게는 싱커만 요구하며 같은 리그의 적수인 이나오의 공략법을 찾았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도 결국 어깨 부상으로 인하여 9년차인 1964년에는 1승도 못 거두고 평균자책점도 10점을 넘기는 등 6년 동안 42승밖에 못 올리는 부진에 빠져 1969년 은퇴한다. 이를 두고 "8년의 영광, 6년의 좌절"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6년의 좌절이라는 기간에서 65년 13승 6패 216이닝 101삼진 평균자책점 2.38이었고, 이후 66년엔 11승 10패 185이닝 평균자책점 1.79에 134삼진이라는 스탯을 내놨다. 그 뒤로 10승만 못했다 뿐이지 64년 부상으로 쉰 시즌과, 67년 129이닝, 은퇴 시즌 69년 97이닝을 빼곤 6년간 평균 138이닝을 던졌다.

그리고 69년 97이닝 1승 7패 46삼진[11] 2.78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이 성적을 따지기 전에 이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나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강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상대하기 위해 포크볼을 연마했다.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구질이라고 생각해서 1경기당 몇 개 이내로 포크볼 사용을 극도로 자제했는데 에노모토에게는 포크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나오는 은퇴 후 술회하기를 포수 노무라와의 눈치 싸움에 집중하느라 정작 상대 팀이었던 센트럴리그 올스타 팀 타자들과의 승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무라가 요구한 구종대로 일부러 던지지 않기도 했다고.

참고로 1965년 니시테츠에 입단하여 5시즌 반 동안 103승을 거둔 이케나가 마사아키가 이나오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성장하는가 했지만, 이른바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당하면서 이나오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바 있다. 더구나 이나오는 1970년 니시테츠 감독으로 취임하여 이케나가가 그해 시즌 도중 영구제명되기 전까지 그를 제자로 지도한 바 있다. 그나마 이케나가는 승부조작 자체에 가담한 적이 없고 단지 선배의 강권에 휘둘렸단 점이 인정되어 2005년 4월 사면 복권되었다. 이나오가 세상을 뜨기 전에 복권된 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4. 은퇴 이후

이후 야구 해설, 평론가 및 1970~197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8년~1980년 주니치 드래곤즈 코치, 1984~1986년 롯데 오리온즈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그닥 썩 좋진 못하였다. 니시테츠 - 다이헤이요 클럽 감독 땐 1970~1972년 연속 6위로 리그 꼴찌. 1973년~1974년 땐 전기리그 3위/후기리그 4위를[12] 기록하였다. 다만 이나오가 감독을 맡던 시기의 라이온즈는 검은 안개 사건으로 인해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영구 제명/출장 정지를 당해 팀이 거의 박살나다시피 하고 결국 모기업인 서일본 철도가 경영을 그만 둬 네이밍 스폰서 등으로 겨우 운영을 하던 팀 사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롯데 감독 땐 1984~1985년 연속 리그 2위로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1986년 하위권인 4위에 안착하며 감독직을 그해를 끝으로 사임했다.

그 뒤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지만 철완도 병마는 이길 수 없었는지 2007년 11월 13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별세. 사인은 악성종양이다.

5. 평가

여러모로 한국의 최동원과 유사점이 많은 투수이다. 야구선수가 되기까지 뒤에서 조언해 준 부친을 뒀으며, 프로에서는 혹사에도 불구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을 냈고, 무쇠팔이란 별명으로 한국시리즈/일본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각자 소속 팀을 우승시켰다. 또한 정의감도 투철하여, 검은 안개 사건 당시 일각에서 제기된 '요미우리 흑막설' 등을 일축하며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바라는 한편 조사 협조에 미온적이던 구단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14년간 강렬한 기록을 남기고 사라진 한 시대의 대투수. 뛰어난 성적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 인품도 대단해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스타로 성공을 했었어도 절대로 거만하지 않은 성품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말기 으로 시한부 인생이 된 부친을 위해 연봉을 가불받아 벳푸의 해안가 전망 좋은 집을 사드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13] 그리고 저 일본 야구에서도 유명했던 괴짜인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포용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인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4]

원래 이나오의 등번호인 24번은 오시타 히로시의 3번, 나카니시 후토시의 6번과 더불어 니시테츠 시절의 영구 결번이었지만, 니시테츠 라이온스가 다이헤이요(太平洋)로 매각되면서 이나오 자신은 81번을 쓰고 24번은 재능있는 후배선수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이후 라이온스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켄(平野謙)-마츠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졌다.

2012년 5월 1일,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아 선수 시절 등번호인 24번이 세이부 라이온즈의 첫 영구 결번으로 공식으로 지정했다. 세이부는 니시테츠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이번에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 지정했는데 원래 이전 팀의 영구 결번을 잇지 않는 일본 야구의 관례상[15]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호크스 팬들 들고 일어나겠다[16][17]

6. 여담

빙그레 이글스 초창기에 몇 번 한국에 방문했는데 당시 감독, 코치이던 김영덕[18], 강병철에 의하면 한국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나, 이것은 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본인이 한국계임을 밝힌 적은 없음에도 강병철 감독이 이나오 가즈히사의 한국계라 주장한 근거는 골격이 한국계였다고.


[1] 빅토르 스타루힌이랑 타이이다.[2] 어떤 선수가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을 때 언론에서 "하느님, 부처님, ○○님"이라고 부르게 된 게 바로 이나오 때문이다. #[3] J리그에서 황의조가 리그를 씹어먹고 있을 때 오사카 팬들이 한 말이 "하느님, 부처님, 의조님"이기도 하였다.[4] 9월 18일 다이에이전에서 2-1 완투승으로 최초 퍼시픽리그 선발 20승이란 새 기록을 썼고 그해 23선발승으로 마감.[5] 57년 23선발승, 58년 22선발승, 61년 24선발승.[6] 다른 시즌 최다 승은 1939년 도쿄 거인군러시아계 선수 빅토르 스타루힌(Victor Starffin, 일본 이름은 스다 히로시) 선수가 세운 42승[19](15패, 1.73).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일본 야구가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의 기록이라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많다.[7] 이 시리즈에서 이나오는 47이닝을 소화하여 총 578구를 던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스기우라 타다시가 32이닝 416구를 던짐으로써 또다른 시리즈 4승 투수가 등장했다. 참고로 난카이는 요미우리를 상대로 4연승 스윕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당연히 스기우라의 4승은 4연승이다.[8] 이후에는 옆나라 한국에서 열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최동원이 4승(1패)로 시리즈 4승 투수가 되었다. 시리즈 4승 투수는 한미일 프로야구를 통틀어 이나오, 스기우라, 최동원 이 3명 밖에 없다.[9] 여기서 말한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본 전통 신을 뜻한다.[10] 고인이 된 아오타 노보루(青田昇)는 생전에 "일본에서 진짜 슬라이더를 던진 건, 후지모토 히데오(이팔용), 이나오 가즈히사, 이토 토모히토 단 세 사람뿐이었다."라고 했다.[11] 일본어 위키백과를 따름.[12] 이때 1973~1982년까지 퍼시픽리그에선 플레이오프를 실시. 전후기 리그제로 운영해 각 리그 1위당 플레이오프를 치러 이긴 팀이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얻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전후기 리그 전부 우승 시 일본시리즈 직행.[13] 연봉 가불 협상 때 이나오 부친의 사연을 들은 니시테츠 대표가 이나오의 효심에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흔쾌히 원하는 액수를 내줬다고. 덕분에 이나오 부친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14] 그의 롯데 감독 해임이 오치아이가 롯데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15] 다만, 오릭스 버팔로스킨테츠 버팔로즈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킨테츠의 영구 결번 선수인 스즈키 케이시의 영구 결번을 합병 후에도 유지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선수 본인이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다.[16] 그는 사이타마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고 순전히 후쿠오카에서만 뛰었다. 현역 당시 그의 팬덤은 현재 호크스 구역.[17] 사족으로 라이온스가 과거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팀이라서 그런지 호크스-라이온스와의 시리즈 중 일부는 올드 유니폼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비록 과거에 연고로 하던 팀은 떠났지만, 라이온스의 후쿠오카 시절 역사를 최대한 후쿠오카 팬들에게 돌려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호크스도 마찬가지라서 오릭스 원정 때 난카이 유니폼을 입고 오사카 시리즈를 하기도 한다.[18] 이나오와 같은 해 난카이 호크스 입단으로 NPB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