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7 23:43:08

이시게 히로미치

이시게 히로미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Mr. Leo
ミスターレ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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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000000,#e5e5e5
<rowcolor=#2c9fe8> 초대 제2대 제3대
No.7 이시게 히로미치 No.7 마츠이 카즈오 No.1 쿠리야마 타쿠미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48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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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하마무라 타카시
(浜村孝)
오카무라 요시노리
(岡村佳典)
아라타케 야스히로
(荒武康博)
카와하라 아키라
(土屋紘)
히가시오 오사무
(東尾修)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이즈미사와 아키라
(泉沢彰)
타카하시 후미오
(高橋二三男)
요시다 요시노부
(吉田好伸)
나카지마 히로미
(中島弘美)
야마무라 요시노리
(山村善則)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타무라 타다요시
(田村忠義)
코가 마사아키
(古賀正明)
타치바나 요시이에
(立花義家)
에가와 스구루(6)
(江川卓)
모리 시게카즈(1)
(森繁和)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홍순기
(코노 준키)
(鴻野淳基)
이시게 히로미치
(石毛宏典)
이토 츠토무
(伊東勤)
노구치 히로미(1)
(野口裕美)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오쿠보 히로모토(1)
(大久保博元)
키요하라 카즈히로(1)
(清原和博)
모리야마 료지
(森山良二)
스즈키 켄
(鈴木健)
와타나베 토미오
(渡辺智男)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시오자키 테츠야
(潮崎哲也)
나가마 켄지(1)
(長見賢司)
타케시타 쥰(1)
(竹下潤)
스가야마 켄토(1)
(杉山賢人)
이시이 타카시(2)
(石井貴)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토미오카 히사타카(1)
(富岡久貴)
타카키 타이세이(1)
(高木大成)
타마노 히로마사
(玉野宏昌)
안도 마사노리(2)
(安藤正則)
마쓰자카 다이스케(3)
(松坂大輔)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카야마 히사시(1)
(高山久)
오누마 코지
(大沼幸二)
호소카와 토루(1)
(細川亨)
고토 타케토시
(後藤武敏)
야마자키 사토시
(山崎敏)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와쿠이 히데아키(3)
(涌井秀明)
스미타니 긴지로(3)
(炭谷銀二郎)
키무라 후미카즈(3)
(木村文和)
지명권 박탈(3)(A) 나카자키 유타(3)
(中崎雄太)
마츠나가 히로노리(2)(4)
(松永浩典)
키시 타카유키(2)(4)
(岸孝之)
히라노 마사미츠(1)(4)
(平野将光)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키쿠치 유세이(3)
(菊池雄星)
오이시 타츠야(4)
(大石達也)
토가메 켄(4)
(十亀剣)
마스다 타츠시(1) (4)
(増田達至)
모리 토모야(3)
(森友哉)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타카하시 코나(3)
(高橋光成)
타와타 신사부로(4)
(多和田慎之助)
이마이 타츠야(3)
(今井達也)
사이토 히로마사(1)(4)
(斉藤大将)
마츠모토 와타루 (4)
(松本航)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레이와 시대 ]
{{{#555555,#aaaaaa
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미야가와 테츠(1)(4)
(宮川哲)
와타나베 켄토(1)(4)
(渡部健太)
스미다 치히로(4)
(隅田知一郎)
히루마 타쿠야(4)
(蛭間拓哉)
타케우치 나츠키
(武内夏暉)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A) 이 해 세이부는 드래프트 지명 대상 선수들에게 영양관리비와 같은 명목으로 금전을 제공하는 등의 부정 스카우트 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어 고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박탈당했다.
(6) 지명 후 미입단
}}}}}}}}} ||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2 1983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우수 신인
키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버팔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1~198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타카시로 노부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유미오카 케이지로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5, 198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유미오카 케이지로
(한큐 브레이브스)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미즈카미 요시오
(롯데 오리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마츠나가 히로미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2, 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블루웨이브)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마츠나가 히로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1~198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미즈가미 요시오
(롯데 오리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유미오카 케이지로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5, 198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유미오카 케이지로
(한큐 브레이브스)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유미오카 케이지로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7, 198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후루야 히데오
(닛폰햄 파이터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1~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브레이브스)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마츠나가 히로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NPB 로고.svg 1988년 일본 시리즈 MVP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코마다 노리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보유 기록(NPB)
최다 타석 연속 볼넷 5타석
}}} ||
이시게 히로미치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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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36년 ~ 현재
1대
미야케
파일:일본 국기.svg
(1936~1937)
2대
무라카미
파일:일본 국기.svg
(1937)
3대
야마시타
파일:일본 국기.svg
(1938~1939)
4대
무라카미
파일:일본 국기.svg
(1939)
5대
야마시타
파일:일본 국기.svg
(1940)
6대
이노카와
파일:일본 국기.svg
(1940~1942)
7대
니시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1943~1947)
8대
하마자키
파일:일본 국기.svg
(1947~1953)
9대
니시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1954~1956)
10대
후지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1957~1959)
11대
토쿠라
파일:일본 국기.svg
(1959~1962)
12대
니시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1963~1973)
13대
우에다
파일:일본 국기.svg
(1974~1978)
14대
카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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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980)
15대
우에다
파일:일본 국기.svg
(1981~1990)
16대
도이
파일:일본 국기.svg
(1991~1993)
17대
오기
파일:일본 국기.svg
(1994~2001)
18대
이시게
파일:일본 국기.svg
(2002~2003)
19대

파일:미국 국기.svg
(2003)
20대
이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2004)
21대
오기
파일:일본 국기.svg
(2005)
22대
나카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2006)
23대
콜린스
파일:미국 국기.svg
(2007~2008)
24대
오이시
파일:일본 국기.svg
(2008~2009)
25대
오카다
파일:일본 국기.svg
(2010~2012)
26대
모리와키
파일:일본 국기.svg
(2013~2015)
27대
후쿠라
파일:일본 국기.svg
(2016~2018)
28대
니시무라
파일:일본 국기.svg
(2019~2020)
29대
나카지마
파일:일본 국기.svg
(2021~)
}}}}}}}}}}}}}}} ||

파일:일본프로야구선수회 로고.png 일반사단법인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역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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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bottom: -15px;"
<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야스무라 카즈오
1980~1985
오치아이 히로미츠
1985~1987
이시게 히로미치
1987~1989
오카다 아키노부
1989~1992
오카자키 카오루
1992~1993
<rowcolor=#fff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츠지 하츠히코
1993~1995
이토 아키미츠
1995~1998
카와이 마사히로
1998~2001
타츠나미 카즈요시
2001~2005
코쿠보 히로키
2005~2009
<rowcolor=#fff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이바타 히로카즈
2009~2013
히가시데 아키히로
2013~2015
오오시마 요헤이
2015~2019
마츠다 노부히로
2019~2021
마루 요시히로
2021~
}}}}}}}}} ||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7번
코노 쥰키
(1980)
이시게 히로미치
(1981~1994)
다린 잭슨
(1995~1996)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0번}}}
하마나 치히로
(1992~1994)
이시게 히로미치
(1995)
스즈키 요시히로
(1997~1998)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7번}}}
사토 신이치
(1993~1995)
이시게 히로미치
(1996)
이구치 타다히토
(1997~2004)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78번}}}
코노 타카유키
(1997)
이시게 히로미치
(1998)
나가도미 히로시
(2003~2006)
{{{#ffad00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블루웨이브]] 등번호 87번}}}
타카바타케 미치히로
(1999~2001)
이시게 히로미치
(2002~2003)
아카호리 모토유키
(2005~2009)
}}} ||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40604008296780_view.jpg
이시게 히로미치
石毛宏典 | Hiromichi Ishige
생년월일 1956년 9월 22일 ([age(1956-09-22)]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치바현 아사히시
학력 쵸시시립 쵸시 고등학교 (치바) - 코마자와대학
신체 180cm, 75kg
포지션 3루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4년 드래프트 6위 (롯데)[1]
1980년 드래프트 1위 (세이부)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1~1994)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1996)
지도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군 감독 (1998)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2002~2003)[2]

1. 개요2. 선수 시절3. 은퇴 후4. 평가5. 기타

[clearfix]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80~9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지탱했던 팀의 캡틴이자 내야 사령탑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은퇴 후엔 다이에의 2군 감독과 오릭스의 1군 감독을 역임했다.

2. 선수 시절

파일:external/image.middle-edge.jp/c0a97ede-1ed8-4a3d-8da7-fa9e032d0f54.jpg
고시엔 출전 경력은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반 때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코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팀을 전일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미-일 대학야구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 세이부 측에서 운영하는 프린스 호텔에 입사해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서 뛰었다.[3]

1980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경합 끝에 세이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981년 신인으로 개막 스타팅 라인업(유격수)에 이름을 올렸고 롯데의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지만 오치아이에게 수위타자를 내줬다. 같은 해에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이후 세이부 팀의 리더로 급부상해 많은 활약을 펼쳤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격돌한 1983년 일본시리즈에서 6차전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동점이 되는 내야안타를 날렸고 팀은 연장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7차전을 승리하며 4승 3패로 왕좌 자리에 올랐다. 1986년에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오치아이와 데뷔 시즌부터 각종 고졸 신인 기록은 갈아치우며 신인왕을 차지한 팀 후배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제치고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그 이후, 무릎 부상 경력으로 유격수에서 3루수로 전향하고 주전 유격수 포지션은 타나베 노리오에게 내준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198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다시 유격수로 총 5경기에 출전했고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이 해에 퍼시픽리그 야수 최초로 연봉 1억엔 플레이어가 됐다.

현역 시절의 전반은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키스톤콤비 츠지 하츠히코의 성장과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 등으로 현역 시절 후반에는 2번, 6번 등 다른 타순을 맡기도 했다. 베스트나인은 8회 선정, 준수한 수비력으로 골든글러브(NPB) 10회를 차지했다. 통산 200홈런, 200도루에 200 희생타도 기록한, 공-수-주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이기도 했다.

1994년 시즌을 마치고 사임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으로 추천되었으나 이를 고사하고 FA를 행사해[4] 1995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노쇠화로 인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회 연속 올스타게임 출전 행진도 끊겼고, 연봉도 대폭 삭감. 결국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후

파일:external/blog-imgs-35.fc2.com/ishige_orix_20030424.jpg
은퇴 후에도 다이에에 적을 두고 1997년에는 LA 다저스로 코치 유학을 갔으며 1998년 다이에 2군감독으로 취임하지만, 1년만에 사실상 해임되었다. 1999 년부터 2001년까지는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감독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39년만에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2003년 개막부터 부진하여 20경기(7승 12패 1무)를 마친 후 4월에 해임되었다.

그 후 독립리그 출범에 나서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설립, 간사이 독립 리그 고문 활동 등을 했다. 현재는 아마추어 학교들의 기술 고문을 맡아 부원들을 수시로 지도하고 있다.

4. 평가

선수시절에서는 최강 세이부의 주장으로서 황금시대를 이끌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선수시절 훌륭했던 캡틴이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버린 케이스이다. 캡틴으로서의 리더십과 감독으로서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대비된 케이스이며 똑같이 리더십이라고 불려도 두 리더십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5]

5. 기타

  • 다이에 2군 감독 시절, 주전을 사다리타기가위바위보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해임되었다. 2군으로 내려 간 선수가 다시 컨디션이나 기량이 올라왔다고 보고를 받아도 "아니, 그 녀석은 이제 됐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라고 좀처럼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다양한 타순을 경험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2군에서 주포로 활약해도 1군에서 번트를 지시받았을 때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또한 해고된 원인은 주전 선택이 아니라 다이에 구단의 관리부장의 팀 전력 강화 방안을 듣고 건의한 내용에 있었다고 한다. "(세이부는) 네모토 리쿠오씨가 우선 소재가 좋은 인간을 모았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조직의 일이다 '라는 부분이 다이에의 선수 또는 스카우트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돼서 다이에 구단 측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 오릭스 1군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임 오기 아키라 감독은 선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회의를 여는 대신 지시는 선수에게 개별적으로 전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구단 매니저에게 미팅 장소를 확보시켰다. 이시게는 오기 감독의 방식에 대해 "작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면에서 오기 씨가 9년간 지휘했던 오릭스가 모든 면에서 다소 미지근하게 되고, 그 결과 약해져 갔다"라고 생각했다. 오기 씨는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하세가와 시게토시, 요시이 마사토, 다구치 소 등 좋은 선수를 키워 그들에게 좋은 지도자 이었던 건 모르지만, 모두 미국에 진출시켜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 야구계에게 재산이라고도 할 수있는 인재를 모두 내보낸 건 무슨 생각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오기 씨는 우승 경험도 있는 명장이고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선수에게 개별적으로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은 팀, 조직으로서 과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 비판하였다.[6]
  • 신인왕을 획득한 다음 해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다츠로가 운좋게 신인왕이 된 거라고 평가절하 했다. 히로오카는 후일담으로, "수비는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타격에서 활약하고 의기 양양했다. 좀 더 잘 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자극을 주려 했다."고 했다. 또한 센트럴리그의 하라 다쓰노리와 비교하면서 더 공부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 오릭스에서 감독을 맡던 때 구대성이 투수진 중 한 명 이었다.
  • 2021년 11월 18일에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오타니 쇼헤이가 MVP가 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살바도르 페레즈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가 더 나은 기록을 냈다느니 미국은 백인 넘버 원이라는게 남아있어서 힘들다느니 식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현지 팬들에게 뭇매를 맞았고 이후 오타니가 MVP를 수상한 이후인 11월 20일에 다시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미국은 언제나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 경제도 군사도 그렇다. 미국인이 MVP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식으로 해명을 했다. 근데, 페레즈나 블게주 둘 다 미국인이 아니다.

[1] 입단 거부 후 코마자와대학 진학[2] 시즌 도중 해임[3] 당시 세이부에선 전망이 좋은 프로 유망주들을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 먼저 들여보낸 뒤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는 방식으로 긁어모았다. 현재는 프린스 호텔 사회인 야구부가 해산되었다.[4] 아직도 일본프로야구계 최고의 GM이라 평가받는 네모토 리쿠오가 세이부에서 다이에로 옮겨간 뒤 그를 스카우트 했다. 세이부 시절 동료였던 구도 기미야스와 아키야마 고지도 다이에 유니폼을 입었다.[5] 이시게의 신인시절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시게의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감은 아니다"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6] 다만 이 주장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오릭스 시절 2년연속 최하위를 찍어대다 시즌도중 짤린 것을 전임이었던 오기 아키라 감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키운 선수들을 전부 미국으로 진출시켜 버린다고 비난한 것부터 오류인데 노모 히데오는 오기가 아닌 그의 후임 감독 스즈키 케이시와의 불화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택한 것이고 요시이 마사토의 경우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서 미국에 진출했기 때문에 오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더군다나 오기 재임 동안 오릭스가 약해져 가서 마지막 재임 3년은(2000~2001, 2005) 4위로 B클래스였다고 해도 일단 엄연한 퍼시픽리그 우승 2회 - 일본시리즈 우승 1회를 안겨다준 인물인 데다, 재임 마지막 해인 2001년엔 5할 승률을 기록했고 2005년에도 이시게 이후 3년 연속 최하위이던 팀을 4위로 끌어올린 게 이 정도다. 사실상 오릭스를 박살낸 건 이시게라고 봐도 되는데 본인이 적반하장스럽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