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3:22:57

아다치 미츠히로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한큐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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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9e751f> 1936春夏 1936秋 1937春~1937秋 1938春 1938秋
미야타케 사부로 키타이 마사오 이시다 미츠히코 미야타케 사부로 오다노 카시와
<rowcolor=#9e751f> 1939 1940 1941 1942 1943
아사노 카츠사부로 시게미츠 미치오 아사노 카츠사부로 하시모토 쇼고 텐포 요시오
<rowcolor=#9e751f> 1944 1946~1948 1949 1950~1952 1953
카사마츠 미노루 텐포 요시오 이마니시 렌타로 텐포 요시오 시바타 에이지
<rowcolor=#9e751f> 1954 1955 1956~1958 1959 1960
카지모토 타카오 시바타 에이지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카지모토 타카오
<rowcolor=#9e751f> 1961 1962 1963 1964 1965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66 1967 1968 1969~1971 1972~1973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74 1975~1986 1987~1989 1990 1991
타케무라 카즈요시 야마다 히사시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rowcolor=#9e751f> 1992~1994 1995 1996~1998 1999~2000 2001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코바야시 히로시 카네다 마사히코
<rowcolor=#9e751f> 2002 2003 2004 2005~2007 2008
에드 야날 요시이 마사토 구대성 카와고에 히데타카 카네코 치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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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츠 사토시 카네코 치히로 키사누키 히로시 알프레도 피가로 카네코 치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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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든 딕슨 카네코 치히로 니시 유키 야마오카 타이스케 야마모토 요시노부
<rowcolor=#9e751f> 2023 2024
야마시타 슌페이타 미야기 히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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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dachi_mitsuhiro.jpg
아다치 미츠히로
足立光宏
출생 1940년 3월 10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고노하나구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59~1980)
지도자 한큐 브레이브스 2군 투수코치(1980~1985)[1]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67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MVP)
1966년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브레이브스)
1968년
요네다 테츠야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67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1966년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1.79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브레이브스)
1.75
1968년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호크스)
1.61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4. 은퇴 이후5. 에피소드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한큐 브레이브스 에서만 21시즌 동안 플레이 한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팀 후배인 야마다 히사시와 더불어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던 언더핸드 스로 투수였다.

2. 아마추어 시절

중학교 시절에는 오버핸드 스로 투수였지만 오사카시립 니시고교 1학년 때 팔꿈치 연골 이상으로 1년을 통째로 쉬면서 팔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서서히 투구 각도를 내리며 언더핸드로 전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인 야구 오사카 다이마루에 입단하여 플레이 했고, 1958년 도시대항 야구대회에 출전한 가네보의 보강 선수로 합류하여 호투를 보였다. 비록 준준결승에서 아쉽게 완투패했지만 이를 계기로 아다치는 프로 스카우트 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3. 프로 시절

파일:legend_arm_adachi.jpg

1959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아다치는 1961년 시즌까지 등판 기회는 제법 많았지만 강한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1962년 언더핸드 스로 투수 특유의 밑에서 솟아오르는 속구를 무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5월 24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17탈삼진으로 당시 1경기 최다 기록을 수립했다. 아다치는 그 해 8승을 거두며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의 뒤를 잇는 한큐 마운드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1964년 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수(13승 15패)에 평균자책 2.78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67년 시즌 20승 10패, 평균자책 1.75로 평균자책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한큐의 첫 퍼시픽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함과 동시에 리그 MVP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그 해 한큐는 일본시리즈 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퇴했지만 아다치는 팀의 2승[2]을 모두 거두면서 시리즈 감투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68년 어깨 고장으로 5경기 등판에 그치고 1969년 시즌도 부상 여파로 구속이 떨어지며 2승에 머물렀지만, 싱커를 연마하면서 부활한 아다치는 1971년 19승 8패, 평균자책 2.49라는 좋은 성적으로 건재함을 과시했고 1972년 시즌에도 16승을 거두며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야마다 히사시와 더불어 한큐 황금기의 한 축을 떠맡았다.

1973년 체력 저하로 인해 4승으로 부진했지만, 1974년 동계 캠프때 기존 무기인 커브를 갈고 닦아 2종류의 커브로 세분화하면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법을 익혔고 1976년 시즌까지 각각 10승, 11승, 17승을 거두며 베테랑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또한 한큐가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지도 하에 1975~1977년 일본시리즈를 3년 연속 제패하면서 아다치는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아다치는 이겨내지 못했고, 1978년 시즌 도중 무릎 부상을 당하며 그의 기량은 완전히 하락세로 돌아섰다. 1979년 4경기 등판에 그친 아다치는 1980년 선수 겸 투수 코치로 임명되어 등판기록 없이 시즌을 마감하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아다치의 21시즌 통산 성적은 676경기 출장, 187승 153패 3세이브, 1482탈삼진, 평균자책 2.91 이며, 리그 MVP와 평균자책 1위, 베스트 나인을 각 1회씩 수상하고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4회 받았다.[3]

4. 은퇴 이후

유니폼을 벗은 아다치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의 2군 투수코치로 일했고, 1986년 이후 한큐와 오릭스의 스카우트로 근무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간사이학원 대학 야구부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5. 에피소드

  • 1959년 4월 10일 토에이 플라이어즈와의 시즌 개막전 7회에 구원 등판하며 프로야구 데뷔전을 치뤘고, 3이닝을 던지며 커리어 통산 첫 승의 기쁨을 누렸다. 이날 개막전에서 토에이의 장훈은 6번 좌익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으나 한큐의 에이스 요네다 테츠야에게 첫 타석 삼진을 먹고 수비에서는 만세까지 부른 끝에 게임 중간에 교체됐다.
  • 1964년 3월 26일 토에이 플라이어즈 와의 경기에서 토에이의 강타자 장훈[4]과 시비를 벌인 적이 있었다. 3루 주자였던 장훈이 견제구에 걸려 결국 포수 야마시타 켄과 충돌했고 투수였던 아다치가 너무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장훈은 열이 받아 아다치를 몇 차례 쿡쿡 찔렀다. 한큐의 외국인 선수였던 대릴 스펜서가 만류하려 들자 장훈은 팀 동료 이와시타 코이치 에게서 방망이를 빼앗아 스펜서를 때리려 했다. 한큐와 토에이 선수들이 다같이 뜯어 말리면서 사태는 진정되었고 장훈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으로부터 "야구선수들의 사업 도구인 방망이를 무기로 사용해서야 되겠느냐?"며 꾸중을 들었다.
  • 일본시리즈 에서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이며 이른바 V9 전성기를 구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나름 잘 공략했던 몇 안되는 투수이기도 하다. 시리즈 통산 9승(5패)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공동 3위에 해당되는 기록이며, 특히 요미우리를 상대로 8승 4패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요미우리의 1965~1973년 V9 시절, 한큐는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게 8승 20패로 절대 열세였지만 그 중 5승을 거둔 투수는 바로 아다치였다.
  • 1976년 일본시리즈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와 맞붙은 한큐는 3연승을 거둔 후 내리 3연패 하며 리버스 스윕 위기에 놓였다. 그런 상황에서 36세의 노장 아다치는 막중한 부담을 갖고 7차전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는데,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꽉 채운 5만명의 요미우리 팬들은 맹렬한 응원으로 한큐 선수들의 기를 죽이려 했지만 아다치는 오히려 그래 너희들은 떠들어라, 나는 그냥 던질란다 라는 담담한 마음으로 요미우리 타선을 2실점으로 틀어막고 완투승을 거두며 한큐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 크게 공을 세웠다.
  • 1978년 아다치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었지만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일본시리즈에 촛점을 맞춰 몸을 만들었고, 일본시리즈의 사나이 답게 3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한큐의 시리즈 4연패가 실현되는가 했지만 야쿠르트의 반격으로 승부는 7차전까지 이어졌다. 결국 7차전 6회말, 한큐가 0대 1로 뒤지던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오오스기 카츠오가 아다치의 3구째를 잡아당겨 좌측 폴대 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날렸는데 심판이 이를 홈런으로 판정했고, 감독이던 우에다 토시하루가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심판진에게 그게 왜 홈런이냐며 맹렬히 항의하는 통에 경기는 무려 1시간 19분이나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 아다치는 어깨가 식어버리고 안 좋은 무릎에 물이 차는 바람에[5] 시합이 재개되자 바로 마츠모토 마사시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날 7차전은 아다치의 생애 마지막 일본시리즈 등판이 되고 말았다...
  • 패스트볼 중심의 투구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팀 후배 야마다 히사시가 아다치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아다치는 "아직 직구가 통한다면 싱커는 던지지 않는 편이 좋다" 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은 채 혼자서 싱커 던지는 법을 연구했고, 결국 야마다의 열의에 마음이 바뀐 아다치는 그에게 싱커를 전수해 주었는데 하나 하나 세세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 "나는 이렇게 싱커를 던지지만 투수마다 던지는 법이 다르니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해 보라"며 힌트를 주는 정도로 조언했다.[6] 훗날 아다치는 "야마다같이 젊고 힘 좋은 투수가 싱커까지 던질 줄 알면 내 자리가 위태로울 것 같았다. 한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두 명이나 필요하겠는가" 라며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1] 1980년은 플레잉코치[2] 완봉승과 구원승을 각각 하나씩 거두었다.[3] 아다치는 1972년 퍼시픽 리그 투수부문 초대 다이아몬드 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4] 1940년생 동갑내기이자 1959년 프로 데뷔 동기생이다.[5] 당시 아다치는 무릎에 고인 물을 빼내면서 등판하고 있었다.[6] 야마다는 아다치의 이런 조언에 대해 "오히려 선배가 그 정도로만 알려준 덕분에 내가 갈고 닦은 싱커를 온전히 던질 수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싱커는 아다치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것이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