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1:23:00

니시구치 후미야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24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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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e5e5e5
감독 77 마츠이 카즈오
1군 83 히라이시 요스케(수석코치) 81 토요다 키요시(투수코치) · 93 아오키 하야토(투수코치)
80 시마 시게노부(타격코치) · 91 타카야마 히사시(타격코치) · 82 노다 코스케(배터리코치)
76 아베 마사히로(내야수비·주루코치) · 86 아카다 쇼고(외야수비·1루 주루코치)
2군 74 니시구치 후미야(2군 감독) · 92 키요카와 에이지(투수종합코치) · 79 오제키 타츠야(야수종합 겸 타격코치)
88 오오시마 히로유키(타격코치) · 95 오이시 타츠야(투수종합코치) · 85 에노키다 다이키(투수코치)
90 오사다 슈이치로(투수코치) · 96 나카타 쇼타(배터리코치)
87 쿠로다 사토시(내야수비·3루 주루코치) · 84 쿠마시로 마사토(외야수비·주루코치)
3군 98 아라카와 유타(배터리코치) · 94 오니자키 유지(내야수비·주루코치) · 97 아오키 토모시(육성코치 겸 인재개발총괄)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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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구치 후미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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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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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3 1954 1955
키노시타 이사무 타케스에 요시마사 카와사키 토쿠지 오타 마사오 나가사카 마모루
<rowcolor=#ffffff> 1956 1957 1958 1959 1960~1963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이나오 카즈히사
<rowcolor=#ffffff> 1964~1967 1968 1969 1970 1971~1972
타나카 츠토무 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시노부 이케나가 마사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rowcolor=#ffffff> 1973 1974 1975~1977 1978 1979~1981
가토 하지메 미우라 키요히로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시타 리츠오 히가시오 오사무
<rowcolor=#ffffff> 1982 1983 1984~1987 1988~1989 1990~1991
모리 시게카즈 타카하시 나오키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rowcolor=#ffffff> 1992 1993 1994~1995 1996 1997~1999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궈타이위안 신타니 히로시 니시구치 후미야
<rowcolor=#ffffff> 2000~2005 2006~2007 2008~2012 2013~2014 2015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마키타 가즈히사
<rowcolor=#ffffff> 2016~2018 2019 2020 2021~2023 2024
기쿠치 유세이 타와타 신사부로 잭 닐 타카하시 코나 이마이 타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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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4_seibu.png 파일:2008세이부.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4 2008

파일:NPB 로고.svg 1997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카와사키 켄지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1998, 2002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1998 퍼시픽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1998 퍼시픽 리그 다승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1998 퍼시픽 리그 탈삼진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 퍼시픽 리그 최고 승률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13번}}}
마이크 파글리아룰로
(1994)
니시구치 후미야
(1995~2015)
타카하시 코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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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74
니시구치 후미야
西口文也 | Fumiya Nishiguchi
<colbgcolor=#143d69><colcolor=#fff> 생년월일 1972년 9월 26일 ([age(1972-09-2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학력 와카야마 상업 고등학교 - 릿쇼대학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995~2015)
지도자 한화 이글스 임시 투수코치 (2016)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1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17~2019,2021)[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벤치코치 (2020)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22~)
1. 개요2. 선수 경력3. 통산 기록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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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이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

중학교시절 까지는 유격수와 외야수로 뛰며 야구를 했지만 고등학교 진학 이후에는 투수도 병행하며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고교시절은 철저하게 무명으로 지냈지만 대학 진학 이후 서서히 실적을 쌓기 시작. 당시 릿쇼대학이 속해있던 동도 2부 리그에서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 1993년 추계 리그에서 5승을 기록하며 소속 야구부의 2부 리그 우승에 기여한다. 이때 야구부도 승강전을 통해 1부 리그로 승격되기도 했다. 4학년 춘계 리그를 1부에서 보낸 뒤 다시 2부에서 맞이한 대학 마지막 추계 리그도 우승으로 이끌며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1994년 드래프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세이부 라이온즈의 3위 지명을 받으면서 입단에 합의했다. 등번호는 13번. 이 당시 드래프트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가 1위 후보로 고교 시절 통산 41홈런을 날린 강타자 유망주 키다 쇼이치를 점찍었고 만약 지명에 실패할 경우 리츠메이칸 대학 출신의 투수 카나모리 타카히로와 니시구치 둘 중 하나를 대체 1위로 지명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키다의 교섭권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넘기게 되자 카나모리를 대체 1위로 지명하게 되면서 세이부가 니시구치를 영입하게 된다.[2]

2.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colbgcolor=#004687><colcolor=#191919> 세이부의 에이스 No.13 西口文也
데뷔 시즌인 1995년에는 미국 독립리그로 파견되며 시즌을 시작했다. 여기서 선수 생활 내내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를 연마하고 제2구종으로 쏠쏠하게 던졌던 체인지업을 습득하며 시즌 막바지에 팀에 복귀했고 데뷔 첫 승리투수에 이어 데뷔 첫 완봉승까지 기록하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후 몇 년간은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궈타이위엔-이시이 타케히로의 황금기 선발진의 뒤를 잇는 세이부의 차세대 에이스로 도약. 위력적인 속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무기로 1996년 13완투를 기록하며 16승을 올렸고 97~98년은 2년 연속으로 퍼시픽리그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으며 특히 1997년엔 최다승,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사와무라상, 리그 MVP를 모조리 석권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3] 1998년엔 시즌 초반에 컨디션 난조로 도중에 불펜으로 전향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6월 중순까지 1승 7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6.94로 부진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으나, 재조정 이후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은 끝에 기어이 최다승 타이틀을 얻어내었다. 1999년에도 최다 완봉승을 기록하며 이 해에 입단한 헤이세이의 괴물 마츠자카 다이스케와 함께 팀의 선발진의 간판으로 활약했으며, 당시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둘의 격차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면서 "야구계의 에이스는 마츠자카. 세이부의 에이스는 니시구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2000년부터 니시구치의 고질적인 부상 부위였던 내전근을 다치는데 이 여파로 한달 반 가량을 이탈하고 만다. 이후 복귀해서 어찌어찌 10승과 규정이닝을 채웠지만 그 다음해인 2001년에는 제구 난조에 빠지며 91사사구를 남발해 상당히 고전한 시즌을 보냈다. 2002년에 15승을 거두며 다시 부활하는 듯 싶었지만 2003년, 오른발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평균자책점이 7점대에 육박할 정도로 뛰어 올라 크게 부진하고 말았다.

절치부심한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다시 90년대 후반처럼 좋은 피칭을 선보였다. 2004년은 다시 도진 내전근 부상으로 잠시 팀에서 이탈하긴 했으나 2년만에 10승을 기록했고 팀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였다. 2005년에는 개인 한 시즌 최다인 17승과 데뷔 이후 첫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이 해 8월 27일 대 라쿠텐전에서 정규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여담에서 후술.

2007년 시즌 초반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투구를 보여줬으나 6월 이후 계속해서 패전을 거듭하며 아쉬운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부터는 줄곧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2009년 시즌 종료후 더 이상 세이부에서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한국진출을 희망했지만 박종훈 감독이 마무리투수를 원해 한국이적은 불발되었고 대폭 삭감된 연봉에 재계약했다.

이대로 끝물이 되어가려는 듯 싶었지만 통일구가 사용된 2011년 다시 재기에 성공. 규정이닝에는 4이닝이 모자라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11승 7패 평균자책점 2.57을 기록하며 오랜만에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2년은 5승을 기록했으나 평균자책점이 3.75로 투고타저가 심한 2012년임을 감안하면 평균 이하의 기록을 남겼다.

2013년부터는 출전 기회도 급격하게 줄었고 성적도 매우 나빠져 3년간 1승도 올리지 못했다. 결국 2015년 교류전에서 1경기에 선발 등판한 이후 1군에서 말소. 같은 해 9월 23일에 현역에서 은퇴할 것을 밝히며 21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3. 통산 기록

4. 여담

  • 비쩍 마른 몸매를 가졌지만 역동적인 투구폼을 이용해 강력한 직구와 각도 큰 슬라이더를 잘 던지는 투수였다.
  • 선술했듯이 정규이닝에서 퍼펙트를 달성한 기록이 있다. 9회까지 양 팀이 0:0 스코어를 유지하며 연장 10회에 접어들었고 10회에도 올라온 니시구치는 결국 무사에서 오키하라 요시노리에게 경기 첫 안타를 내주며 퍼펙트가 무산되었다. 이후 볼넷을 하나 더 내주긴 했지만 후속타자들을 모두 막는데 성공하였고 팀도 10회말 이시이 요시토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해 1:0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날 니시구치의 퍼펙트 게임 여부 때문에 묻힌 감이 있지만 상대팀인 라쿠텐 선발투수 이치바 야스히로는 무려 178구를 뿌리며 세이부 타선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니시구치가 10회에도 퍼펙트를 유지했다면 마키하라 히로미 이후 11년만에 퍼펙트 게임이 달성되었을 것이고 역대 최초의 연장전 퍼펙트 게임도 달성되었겠지만 모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4] 이외에도 니시구치는 유독 대기록과 인연이 없었는데 2002년과 이 경기가 있기 몇 달 전에도 노히트를 날려먹은 전례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모두 달성 직전인 9회 2사에 노히트가 깨졌다. 리그는 다르지만 훗날 KBO 리그윌머 폰트가 2022년 4월 2일[5] NC전 정규이닝 퍼펙트를 기록했으나 이쪽도 마찬가지로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대기록 달성에는 실패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10회에도 올라온 니시구치와는 다르게 폰트는 선수 보호 차원에서 10회에는 등판하지 않았고 김택형이 올라와서 볼넷을 내주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팀 노히트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고 1달 뒤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 오노 유다이가 9회까지 정규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다가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10회초 2사에 사토 테루아키가 우중간을 가르는 안타를 때려 니시구치랑 똑같은 상황이 나왔다.
  •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이 2차례[6] 있으나, 정작 일본시리즈에선 7시합 등판, 0승 5패에 그치며 단 한 번도 승리투수가 된 적이 없었다. 은퇴식에서도 일본시리즈 승리투수 기록이 없는 것과 노히트 노런퍼펙트 게임과 같은 대기록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 2010년 LG 트윈스의 외국인 투수 물망에도 올랐으나 최종 선택된 선수는 바로 그 콘돔신 오카모토 신야. LG 팬들 사이에서는 전성기가 지나긴 했어도 한때 세이부의 에이스였고 선발 경험이 풍부하며 속구파 투수였던 니시구치 후미야가 오카모토 대신 LG에 왔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팬들이 꽤 있었던 편.
  • 선수시절 FA권리를 한번도 행사하지 않았다. 단순히 FA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을 넘어 연봉 협상에서 협상을 질질 끈 적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팀에 대한 충성심의 화신격인 선수였다.

5. 관련 문서


[1] 2017 시즌중 기존 투수코치였던 모리 신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교체.[2] 이후 3명의 프로 생활은 극과 극을 달렸는데, 니시구치가 세이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며 182승을 쌓는 동안 키다는 데뷔 후 6년 간 고작 1안타만 친 채 2000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고, 카나모리도 1군 통산 2경기 등판에 그치며 1997년 방출되었다가 대만프로야구 퉁이 라이온즈에서 1년 간 뛰고 1999년 다시 주니치로 복귀했지만 1군 등판 없이 또 다시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여담으로 카나모리는 본인의 일본에서의 현역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나섰다가 시오타니 카즈히코, 신죠 츠요시에게 한 이닝 만루홈런 2개를 얻어맞으며 처절하게 깨졌다.[3] 여담으로 이 해 니시구치는 전년도에 이어 10완투를 기록했으나, 정작 완봉승은 1번도 기록하지 못해서 사상 첫 무완봉사와무라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이후 2015년에 마에다 켄타가 2번째 무완봉승 수상자가 된다.[4] 마키하라 이후 NPB의 퍼펙트는 (2007년 일본시리즈의 주니치 야마이 다이스케-이와세 히토키 합작 퍼펙트를 제외한다면) 이 일 이후 17년이 지난 2021년 4월 10일 사사키 로키가 달성했다.[5] 무려 22시즌 개막전이었다!!![6] 2004,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