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타니 가즈히코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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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타니 가즈히코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SK 와이번스 등번호 10번 | |||||||||||||||||||||||||||||||||||||||||||||||||||||||||||
김기태 (2002~2005) | → | 시오타니 (2006~2006.6.13.) | → | 세라노 (2006.6.16.~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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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시절 | |
시오타니 카즈히코 [ruby(塩谷, ruby=しおたに)] [ruby(和彦, ruby=かずひこ)] | Kazuhiko Shiotani | |
출생 | 1974년 5월 27일 ([age(1974-05-27)]세) |
효고 현 타카사고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신코가쿠엔 신코 고등학교 |
신체 | 196cm, 90kg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2년 드래프트 6순위 (한신)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1993~2001)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2002~2005) SK 와이번스 (2006) |
응원가 | 한신 시절→오릭스 시절[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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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SK 와이번스 소속의 내야수로 KBO 리그 최초의 일본 출신 외국인 타자다.[4]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92년, 신코가쿠엔 신코 고등학교 시절에 포수로서 고시엔에 출전(제7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같은 해 가을에 열린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6순위로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계약금으로 어머니의 무덤을 짓겠다”라고 말했다.
당시 한신의 포수에는 야마다 가쓰히코, 키도 카츠히코, 세키카와 코이치 등이 활약하고 있어 시오타니는 포수로서의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하는 등 2군에서의 선수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1996년 10월 9일의 시즌 최종전이 되는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1회말에 나카니시 키요오키의 대타로 기용되어[5] 프로 첫 홈런이 되는 만루 홈런을 때려내 한신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가 되는 ‘1이닝 만루 홈런 2개’[6]를 기록했다.
시오타니가 입단한 이후에도 같은 포수인 키타가와 히로토시, 야노 아키히로나 요시모토 료 등등이 한신에 이적해 왔기 때문에 1998년에 출전 기회를 늘리기 위해 내야수(주로 3루수)로 전향하는 등 타격이 안정되면서 가끔 정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당시 노무라 카츠야 감독에 의한 아들 노무라 가쓰노리의 기용이나 하마나카 오사무, 이마오카 마코토를 시작으로 하는 젊은 야수들의 활약에 의해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적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사이토 히데미쓰와의 맞트레이드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이적했고 오릭스에 이적할 당시의 기자 회견에서는 “(한신에서)방출되어서 아까웠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 “되돌아보고 싶다” 등의 발언을 했다.
오릭스에서는 2003년에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홈런 8개, 타점 46, 도루 7개, 타율 3할 7리의 성적을 남겼다. 다음해인 2004년에는 홈런 9개, 타점 48, 도루 2개, 타율 2할 6푼 9리의 성적을 남긴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에 의해 계속 오릭스의 선수가 되었지만 2005년에 16경기에만 출전하면서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한신 시절에 달던 등번호 62는 2015년 우에다 카이가 가져갔다.
2.2. SK 와이번스
2006년에는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계약금 500만 엔, 연봉 3,000만 엔에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재일교포 출신 선수를 제외하면 이리키 사토시와 모리 가즈마에 이은 한국프로야구 3번째 일본인 선수가 됐으며, 야수로서는 최초의 아시아인 외국인 선수가 됐다.[7]시범경기에서 타율 1위를 기록한 이후 시즌 개막 2연전에서는 개막전 결승 홈런, 다음날 끝내기 역전 3점 홈런 등 워낙 드라마틱한 홈런을 연달아 쳐내며 최정, 김태균 등을 제치고 SK 와이번스의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성공한 외국인 선수로서의 길을 밟아가는 듯했으나 처음에만 반짝 했을 뿐 서서히 부진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야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 구단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5월 9일 KIA전에서 장문석이 던진 투구에 손가락을 맞아 골절로 전치 8주의 진단을 받고 5월 14일 귀국과 함께 방출당했다. 한국에서의 성적은 타율 0.297, 27안타 3홈런 19타점 1도루. 시오타니의 대체 선수는 투수 제임스 세라노였다.
3. 이후
그 후 2012년, 음식점 매출을 받을 권한을 양도해주겠다고 지인을 속여 현금 550만 엔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사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2006 | SK | 23 | .297 | 27 | 4 | 0 | 3 | 19 | 15 | 1 | 7 | 2 | 12 | .350 | .440 | .789 |
KBO 통산 (1시즌) | 23 | .297 | 27 | 4 | 0 | 3 | 19 | 15 | 1 | 7 | 2 | 12 | .350 | .440 | .789 |
5. 관련 문서
[1] 한신과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는 토리타니 타카시의 첫 번째 응원가에서 가사만 바꾸어 사용했고, 2005년에만 쓰인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응원가는 현재의 오릭스 범용 테마이다. 다만 가사가 다르다.[2] 한신: 男塩谷 今日も行くぞ 電光石火のスイング見せろ(남자 시오타니 오늘도 간다 전광석화의 스윙을 보여라)/오릭스 블루웨이브: 打つぜ塩谷 ここで決めろ 球団一の渋い男(치자 시오타니 여기서 끝내라 구단 최고로 수수한 남자)[3] 오릭스 버팔로즈: 勝ち気な心 その身に宿らせて したたかに狙い澄まして 和彦打ち続けろ(악착같은 마음 그 몸에 머물게 하여 강하게 겨냥해서 카즈히코 계속 쳐라)[4] 최초의 일본 국적 외국인 선수는 장명부, 이영구, 김무종 등 1983년에 줄줄이 입단한 재일교포 선수들이다. 재일교포를 제외한 순수 일본 국적의 외국인 선수는 2003년 두산 베어스의 이리키 사토시가 최초다.[5] 이 경기는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의 주전 멤버였던 나카니시와 키도 카츠히코의 은퇴 경기였기 때문에 나카니시는 원래 1이닝만 등판할 예정이었다.[6] 나머지 1개는 신조 츠요시가 기록했다.[7] 2024년 현재까지도 KBO리그에 재일교포를 제외한 아시아 출신 야수는 시오타니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