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0 22:41:30

장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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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이름 장명부(張明夫)[1]
일본식 이름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2]
생몰년도 1950년 12월 27일 ~ 2005년 4월 13일 (54세)
국적 일본[3]
본적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실옥리[4]
본관 나주 장씨
출신지 일본 돗토리 현 야즈 군 지즈 정
학력 일본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0cm, 90kg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외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1972)
난카이 호크스 (1973~197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8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3~1985)
빙그레 이글스 (1986)
수상 기록
1983년 한국프로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1983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1983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5]
보유 기록
시즌 최다 선발 44경기[6]
시즌 최다 완투 36경기
시즌 최다 투구 427⅓이닝[7][8]
시즌 최다 승리 30승
시즌 최다 완투승 26승
최다 연속 경기 완투승 8승
경기 최다 피안타 승리 16피안타
시즌 최다 패전 25패
시즌 최다 연패 15패
특정팀 상대 연패 10패(vs MBC 청룡)
시즌 최다 피안타 388피안타
시즌 최다 실점 175점
시즌 최다 자책점 145점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34번
공 번 장명부(1983~1984) 팀 해체
청보 핀토스 등번호 18번
팀 창단 장명부(1985) 이광근(1986)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9번
팀 창단 장명부(1986) 조용호(1989)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트리비아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9]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의 투수. 별명은 너구리.

역전패의 명수이자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 기적을 몰고 왔던 수호신이자 무리한 혹사로 비참하게 쓰러진 비운의 투수이다. 등번호는 34번(1983~1984)→18번(1985)→19번(1986).

2. 선수 경력

2.1. 일본 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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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투구 모습.(긴테츠 버팔로즈와 대결한 일본시리즈 당시) [10]

돗토리 현립 돗토리니시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재일교포를 외국인 선수로 분류하는 일본프로야구의 규정[11]에 의해 1968년 지명외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70년 1군 승격 후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입단 후 3년 간 고작 18시합에 등판해 승리기록 없이 3패만 쌓았고, 1973년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그 해, 노무라 카츠야의 밑에서 선발로 뛰면서 7승을 올리면서 그해 난카이의 퍼시픽 리그 전기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후 리그 우승[12]을 결정지은 플레이오프 2, 4차전에서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 일본 시리즈에선 3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5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지만(...) 아무튼 난카이 이적 이후 실력이 만개하면서 에모토 타케노리 등과 함께 난카이의 주전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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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고바 타케시 감독에 의해 김기태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이적하였다. 히로시마에서도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1978년, 1980년 시즌에 15승을 올리고 1980년엔 최고승률 타이틀까지 획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79년과 1980년 히로시마의 일본시리즈 2연패 달성에 공을 세우며 히로시마 황금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그 후로도 마운드의 중추적 멤버로 활약했지만 1982년 3승에 그치며 구단에서 연봉의 대폭 삭감을 통보하자 이를 현역 은퇴 선언으로 맞받아치며 유니폼을 벗었다.

이 당시의 뒷이야기로 1982년 시즌 종료 후 선배인 장훈에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어볼 생각이 없냐고 권유를 받은 장명부는, 고민 끝에 대한민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스승인 고바 타케시에게 대한민국으로 가고 싶다고 털어놓자 고바는 처음엔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장명부의 의지를 이해했고, 결국 "그래, 한국으로 가거라. 그 대신 키야마 에이큐(이영구)도 같이 데려가라"면서 승락했다고 한다. 이영구는 재일교포 2군 내야수로 평소 장명부가 동생처럼 아끼던 선수였고, 고바는 내친 김에 히로시마 구단에서 자리가 마땅치 않던 이영구까지 배려해 준 것이었다. 또한 장명부가 대한민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봉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고바는 모른 척 하고 장명부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묵인해 주었다.

2.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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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원년 시즌이 끝난 후 1982년 12월, KBO가 전력 보강과 야구 활성화의 일환으로 추진한 재일동포선수 영입 계획에 의하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게 된다.[13] 당시 그의 계약 내용은 계약금 1,500만엔(약 4,500만원), 연봉 2,500만엔(약 7,500만원)에 부대 비용(세금, 아파트, 승용차 제공) 6,000만원 등 토탈 1억 8,000만원의 금액을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이던 OB박철순이 2,400만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게다가 당시 2,500만엔의 연봉은 일본프로야구 기준으로도 제법 고액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 시기 일본프로야구 최고연봉 선수가 7,000만엔 정도 받았다. 장명부의 직전 해 일본에서의 몸값도 2,050만엔이었으니 모국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은 셈.[14] 더군다나 히로시마 카프는 모기업이 적자는 면할 정도로만 지원을 적게 해주는 돈 없는 구단이라 연봉을 짠돌이처럼 주기로 소문났으니.. 지금 금전가치로 환산하자면 수십억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금값으로 환산하자면 4억으로 적게 보일 지 모르지만, 1980년대에 "억"의 가치는..... 당시 아파트, 차값이 천문학적으로 뛴 것을 감안해 보면...[15])
입단 계약은 1983년 1월 18일에 마쳤고, 장명부는 1983시즌부터 삼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해에 장명부는 전설을 써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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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훈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장명부는 1983년 시즌 시범경기에 두 차례 등판했다. 한국 프로무대 데뷔전이라 할 수 있는 3월 1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 5회말 무사 만루 상황에서 임호균을 구원하여 첫 선을 보인 그는 일단 5회말은 1실점으로 막아냈지만, 이후 2이닝을 던지며 롯데 타선에 4안타 3사사구로 3실점을 허용했고, 무엇보다 일본 프로야구의 베테랑이란 얘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냥 설렁설렁 던지는 피칭이 야구팬들의 의구심을 살 정도로 형편없는 피칭이었다. 그리고 3월 22일 MBC 청룡과의 인천 시범경기에 선발등판 했는데, 경기 전 김진영 감독으로부터 "오늘은 최선을 다해 던져보라"고 주문을 받았지만 변함없는(...) 대충대충 투구로 일관하며 13안타를 두들겨 맞은 끝에 9대 7로 간신히 승리를 따냈다. 시범경기 동안 2게임 등판에 11이닝을 던져 17피안타에 11실점 이란 기록으로 매 이닝 1점을 내준, 누가 보아도 형편없는 투수로 보기에 충분했다.

김진영 감독으로선 "저놈을 도대체 왜 데려온거야?!" 라고 땅을 칠 만 했지만, 장명부는 MBC와의 시범경기 후 그의 부진에 속을 끓이던 김진영 감독에게 "감독님, 오늘은 저쪽(MBC) 전력 파악하려고 직구만 던진겁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범경기에서 이긴 건 일본야구 까지 통틀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별거 아니거든요?" 라면서 오히려 김진영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말에 김진영은 속으로 '이런 너구리 같은 놈!!'이라 감탄했다고.[16]

그리고 장명부의 진가는 삼미의 시즌 개막전이자 장명부의 공식경기 데뷔전이었던 4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날 장명부는 7이닝 동안 29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를 잡아내었고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10-4로 첫 승리를 이끌었다. 평소엔 설렁설렁 던지는 듯 하다 위기다 싶으면 전력을 다 하여 투구했고, 사이드암과 스리쿼터형의 투구 스타일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며 145km의 강속구[17]와 낙차가 큰 커브, 특히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로 경기장을 지배했다. 그날 김진영 감독이 장명부의 호투에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환호한 건 당연지사.

그날 한국무대 첫승을 거둔 장명부는 대번에 언론과 팬들로부터 너구리라는 별명을 선물받았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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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볼래 이 자식아!! / 내가 뭘 어쨌다고 홍낄낄

그 후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등판하여 닥치는 대로 던졌고, 그야말로 한국 모든 선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투수임을 보여줬다. 한국 최초로 빈볼로 타자들을 견제했고, 벤치 클리어링을 한국에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며, 빈볼을 던진 다음엔 특유의 썩은 미소로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심리전에도 능했다.

결국 장명부는 1983년 한해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427.1이닝, 30승(28선발승),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먼치킨급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19]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52승을 올렸다. 장명부가 선발이었던 경기에서 삼미의 승률은 0.636이지만 장명부가 선발이 아닌 경기의 승률은 고작 0.429. 이는 정말 이게 인간이야 장명부야라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기록임에 틀림 없었다[20].하지만 MVP수상은 하지 못했다. 다승1위,탈삼진1위 평균자책점2위로 수상요건은 충분했지만 홈런1위,타점1위 이만수에게 밀려서 수상하지 못했다. 그 다음해인 84년에는 4관왕 트리플크라운 이만수가 다승1위 탈삼진1위로 2관왕인 최동원에게 MVP를 내준걸 감안하면 장명부가 받아도 이상할게 없었다. 또한 MVP는 정규시즌 성적만 보고 뽑는만큼 최동원의 한국시리즈4승은 해당되지않는다.

사실 그가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운 것은 시즌 전 삼미의 허형 사장이 장명부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30승을 하면 보너스 1억원[21]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한 것에 낚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 농담같은 계약이 설마설마 하다가 그게 진짜로 현실이 되어버렸고, 당황한 허 사장은 그런 약속 안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도 아니라서 구단 운영비에서 이를 충당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결국은 허사장의 사비를 털어 일부를 지급하는 것으로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 일로 장명부는 삼미에 오만 정이 떨어져버렸고, 장명부는 아무리 한국 야구판이 후지다고 해도 어떻게 사장까지 선수를 속이냐고 분개하며 이듬해부터는 고의 태업을 일삼기 시작한다.). 그런데 삼미는 장명부와 관련해 장명부도 속이고, 기자들도 속이고, 심지어는 모그룹인 삼미그룹까지도 속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2]

결국 전 시즌의 엄청난 기록은 몸을 극한으로 혹사시켜 얻은 결과였고, 장명부가 무슨 터미네이터 내지는 마징가Z가 아니었던 이상 몸이 망가질 수 밖에 없었다. 지난 해의 혹사는 이듬해부터 장명부와 삼미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사실 장명부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허리부상으로 고생 중이었고, 거기다 1983년 시즌의 혹사까지 겹쳐 급속도로 구위가 추락하며 1984년 13승 20패란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이듬해인 1985년에는 한 시즌 최다패 기록(25패, 11승)을 세우기도 했다.

2.3. 빙그레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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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격으로 1983년 시즌 이후 보너스 문제로 매년 삼미 측과 갈등을 빚었고 팀이 청보에 매각된 이듬해인 1986년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23][24]

빙그레로 이적한 1986년에는 1승 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만다. 사실 방어율은 4.98로 선발로는 물론 좋다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18패씩이나 할 성적도 아니었다. 시즌을 저런 평자책으로 마치는 선수들은 지금도 널리고 널렸다.[25] 이해 빙그레는 신생팀으로서 타선도 빈약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에이스 이상군조차 2.63의 방어율로 12승 17패나 했으니... 이들을 빼면, 폼이 떨어질 만큼 떨어진 그 해의 장명부만큼도 못해주는 투수들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게 나가는 족족 지면서도 그해 100이닝이나 책임졌다. 참조[26][27]

장명부가 망한 이유는 1983년 시즌의 유례없는 혹사 이외에도, 이후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명부는 1983년 이후로도 계속 혹사당해야 했는데, 1984년 45경기 25선발 15완투 261.2이닝을 기록했으며 1985년에는 45경기 35선발 10완투 246.0이닝을 기록했다. 유례없을 정도로 혹사당한 투수를 쉬지 않고 2년이나 더 굴린 데에는 잘하는 선수가 거의 없는 삼미/청보의 팀 컬러로부터 기인했다. 믿을 만한 선수가 장명부밖에 없을 정도로 다 못 던졌던 것.[28] 결국은 다 못 해서 던질 사람이 없으니 계속해서 200이닝을 넘겨야 할 정도로 혹사당한 것이다.

한 시즌 400이닝이나 굴려졌으니 공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장명부가 못하는 투수로 전락한 건 아니었다. 1984년 최다패를 하긴 했으나 팀내 종합 WAR는 1위였고, 10승을 거뒀다. 1985년은 투수진 WAR 4위를 기록했는데 최다패를 경신하는 와중에도 WAR 수치가 플러스(0에 가깝긴 하지만)를 찍었다. 가장 성적이 나빴던 1986년 성적을 봐도 방어율 4.98이라는 성적은 매우 못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1승밖에 못 한 데에는 타선과 구원투수진의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게 컸다. 이해 WAR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긴 했지만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약간 못 했다고 보이긴 해도 아주 못 했다고 보긴 힘들며 무엇보다도 그해 빙그레가 신생팀으로서 청보보다도 아래인 꼴찌를 했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29]

정확히는 1984년까지는 잘하는 투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혹사로 인해 나머지 2년은 보통 투수로 전락했다고 보는 게 옳다. 기록상으로는 못하는 투수로 보이긴 했어도 그의 소속팀이 다 하나같이 최약체였기에 그런 기록이 나온 것일 뿐, 실제로 못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오류인 것이다.

그의 가장 큰 불운은 늘 하위팀 소속으로 뛰었다는 점일 것이다. 강팀에서 뛰었다면 그 유례없는 혹사도 없었을 것이고, 몇 년 더 리그를 호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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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투수 인스트럭터 시절 성준의 투구폼을 고쳐주는 장명부[30]. 뒤의 인물은 삼성의 2군 감독이던 박창용 씨.

은퇴 후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쇠락했다. 1987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김포국제공항에서 종합소득세 730만 원이 체납된 사실이 밝혀져 혼자만 대한민국에 발이 묶였고, 이후 이혼까지 당했다.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투수를 지도했고 삼성롯데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고교 순회코치 시절에 그가 발굴한 투수 중 한 명이 LG 트윈스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하지만 롯데 투수코치 시절에 팬을 폭행한 흑역사가 있는 데다, 1991년 5월에는 성낙수, 박찬 등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사범으로 구속,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사실상 매장당하고 말았다. 그 해 7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결국 KBO로부터 영구제명된 후 대한민국 입국금지 조치를 당하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빌린 돈을 안 갚는다며 지인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피소당했다.

1991년 12월, 그는 추방 형태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일본에서 건설업과 택시 운전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행적은 찾기 어려웠으며, 김무종이나 주동식 등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1990년대 말에 MBC에서 허수경이 진행했던 '그 사람 그후' 라는 프로그램이 그를 찾아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는데 당시 건축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딱 봐도 얼굴이 푸석푸석한 검은 빛이 도는 등 건강이 안좋아 보였다.

다만 야구의 끈은 놓지 못 했다고 한다. 청각장애인야구팀의 코치를 맡아 무료 봉사를 하고, 세계장애인야구연맹 부회장으로도 있었다고.기사

그렇게 힘든 말년을 보내던 중, 2005년 일본 와카야마 현의 미나베 마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사무실의 소파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건현장 당시 벽에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향년 55세. 엄청난 기록과 실력을 가진 투수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일생이었다.

4. 트리비아

  • 엄청나게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글짓기 시간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주제로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다음 날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갖고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를 시작했다.
  • 일본에서 쓰던 본명은 마쓰바라 아키오(松原 明夫)였지만 결혼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후쿠시 아키오(福士 明夫)로[31], 둘째 아들을 낳은 후에는 후쿠시 히로아키(福士 敬章)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장명부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고.
  • 난카이 호크스 시절 팬이던 후쿠시 치에코와 사랑에 빠지며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걸림돌은 장명부를 탐탁치 못해하던 치에코의 아버지였다. 그는 일본 정부 고위직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는데 장명부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 치에코의 집에 쳐들어와 3일 동안 대치했고, 참다 못한 치에코의 아버지가 장명부를 안방으로 불러서는 "자네는 야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잔뜩 얼어있던 장명부는 "막노동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굶기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무남독녀인 딸을 데려가 호강시켜 주겠다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러한 대답에 보통의 아버지라면 "이 녀석이!! 뭐가 어쩌고 어째?!"라면서 멱살을 잡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치에코의 아버지는 "그래? 무릇 사내라면 그래야지...자존심을 버리면 뭐든 할 수 있다"라며 어깨를 토닥이며 결혼을 허락했다 한다. 장명부의 장인이란 양반도 어찌 보면 대인배였던 듯... 그러나 장명부는 모국에서 바람과 마약으로 장인의 믿음을 철저히 저버렸다 그렇게 결혼에 성공한 장명부는 이듬해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했고, 장명부의 아버지는 "섭섭하다"라고 토로했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서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입장인지라 더 이상 아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 삼미에서 뛰던 시절, 팀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특히 1983년 12승을 거두며 원투펀치를 형성한 임호균과의 사이가 굉장히 불편하여 이듬해 임호균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 김진우와는 견원지간[32]이었다(...). 가장 친한 팀메이트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동료였던 내야수 이영구뿐이었으니 말 다한 셈.[33]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등판한 경기 때 결승타를 치거나 파인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에게 고급 시계 또는 양복 등을 선물하는 등 인심을 쓰는 면도 있었다.
  •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충청남도 아산에 이복 형인 장재현 씨가 살고 있는데 장재현 씨의 집에 장명부의 선수 시절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고 한다.장명부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던 1975년 대한민국 실업 팀과의 친선경기차 방한한 일본 프로 연합팀 멤버로 대한민국에 와서 서로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장명부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참고로 장명부는 대한민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채 쫓겨난 후 세상을 떠났다.
  • 그의 가정사를 추가로 덧붙이자면 본인의 바람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고 인터뷰 한 바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는 상당한 호색한이였고, 자신의 엄마가 몇번째 아내인지도 모른다나. 장명부의 아버지인 장득룡 씨는 92년에 74세를 일기로 작고했는데 이복 형 장재현 씨가 수습하여, 아산시 영민면 영인산 자락에 모셨다고 한다.
  • MBC 청룡내야수 김인식[34]이 장명부의 사구에 가장 많이 맞았는데 김인식은 계속 참다참다가 어느날 또 사구를 얻어맞자 헬멧을 집어던지고 장명부에게 달려들어 원터치를 뜰...려고 했는데, 정작 마주치니깐 20cm 이상 신장 차이가 나는 장명부를 보고서는 그냥 쿨하게 1루로 갔다. 허걱, 너무 크잖아! 장명부를 다룬 다큐에서 이 장면이 나왔다.
  •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삼은 SK 와이번스가 2004년 문학 홈 개막전에[35] 장명부를 시구자로 세우려고 장명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링크삭제됨 연고지역민인 인천시민들에게 아직까지 낯설었던 SK 구단을 홍보하고[36] 이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과의 콜라보레이션 홍보를 위해서라도 장명부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일단 장명부는 1991년 12월에 대한민국 입국 금지를 당하며 추방당했던 데다가 장명부는 은둔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야구계 관계자를 피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장명부의 행방을 아는 재일동포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37] 결국 SK에서는 장명부 대신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주인공인 감사용으로 시구자를 대신했으며 이듬해 4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서야 세상에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 이런 멸시와 차별, 선입견 때문에 일본에선 조센징, 조국에선 반쪽바리로 불리며 단지 '야구만 잘할 뿐이던' 그의 비참한 인생이 계속되었다. 오죽했으면 '내 조국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내 조국은 현해탄[38][39]이다.'라고 말했을까. 그의 설움이 잘 드러나는 명언이다.
  • 한국에서는 장명부의 말로 알려져 있는 '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영화에 등장한 표현이다. 가츠 신타로가 주연했던 영화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표현인 것. 가츠 신타로 명언 봇이라거나, 관련 서적등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는 이걸 한자식 표현으로 바꿔서 落葉不怨秋風이라고 쓰기도하는데, 이 표현은 한국웹에서만 검색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落葉不怨秋風 但靜落爲更始라는 댓구까지 완성된 사례가 보이는데 이것은 네이버 지식인 답변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사실인데 선수협의 기초를 마련한 바 있다.1983년 시즌 후에 일본처럼[40] 한국도 선수들의 협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MBC 청룡의 김재박, 이해창 등 노장 선수들이 만들려고 했으나 구단들이 그 전에 미리 손을 쓴 탓에 실패했다.
  • 한국 프로야구 평균 구속이 136 수준이던 80년대 한국프로야구에 [41] 에 일본프로 출신으로 평속 145의 패스트볼, 최고 149-150을 찍던 구위 + 칼날 제구력 + 완급 조절능력을 발휘했으니 한국야구 타자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68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기록 없음
1969
1970 11 40⅔ 6 0 0 3.07 0 3 - - 38 4 18 32
1971 2 7⅓ 1 0 0 5.14 0 0 - - 6 1 3 6
1972 5 9 2 0 0 8.00 0 0 - - 17 4 4 2
1973 난카이 호크스 27 140⅔ 18 6 1 2.87 7 0 - - 130 10 73 56
1974 26 139⅓ 18 5 2 3.04 9 7 0 - 130 10 43 59
1975 32 188⅔ 21 11 4
(1위)
3.00 11 12 0 - 185 10 60 66
1976 24 115⅓ 17 3 0 3.68 6 7 1 - 120 13 44 23
1977 히로시마 도요 카프 46 100 6 0 0 5.13 6 6 5 - 129 11 45 39
1978 41 230 32 12
(1위)
2 3.60 15 8 0 - 236
(1위)
23 75 94
1979 37 163⅔ 25 4 1 3.57 7 9 1 - 156 24 47 109
1980 31 187 28 8 1 3.95 15 6 0 - 195 28 55 106
1981 35 201⅓ 28 7 1 4.03 12 9 0 - 211 22 81 116
1982 22 111⅓ 15 5 1 4.46 3 11 2 - 113 21 43 7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3 삼미 슈퍼스타즈 60
(1위)
427⅓
(1위)
44 36
(1위)
6
(1위)
2.34
(2위)
30
(1위)
16 6
(3위)
0 388 19 122 220
(1위)
1984 45
(3위)
261⅔
(2위)
25 15
(1위)
2
(3위)
3.30 13 20 7
(4위)
0 261 20 72 145
(4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5 청보 핀토스 45
(3위)
246
(2위)
35 10
(4위)
0 5.30 11 25
(1위)
5 0 304 22 112 128
(3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6 빙그레 이글스 22 108⅓ 17 3 0 4.98 1 18 0 0 130 12 50 48
통산 NPB 15시즌 339 1634⅓ 217 61 13 3.68 91 84 9 - 1666 181 591 785
KBO 4시즌 172 1043⅓ 121 64 7 3.55 55 79 18 0 1083 73 356 541

비록 한 해뿐이었지만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들 중 시즌 최다이닝 등판, 시즌 최다경기 완투,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패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도 희박하며, 절대로 깨져서도 안 된다.[42] 저 기록에 범접하려는 것 자체가 무식한 혹사 없이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것이니...[43]

사실 이런 그의 초인적인 기록은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2년 밖에 안 된 초창기 시절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많이 올라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44][45] 특히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분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는 해도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무쇠 어깨를 가진 '괴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1] 한국에서는 한국명으로 활동하였으므로 등록명으로 본다. 즉 여기선 한국계라서 한국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의 등록명과 똑같이 다룬다. #[2] NPB 입단부터 1978년까지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 1979년에는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라는 이름을 썼다. 작명가의 조언을 받아 바꾼 이름이 바로 이 이름.[3] 부인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참조.[4] 현재의 아산시 배미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참조.[5] 탈삼진 부문은 1993년에 신설[6] 현재의 144경기를 기준으로 해도 무려 전체 리그 경기수의 30.6% 이다(...)[7] 83시즌이 100경기, 정규이닝 900이닝이었으로 사실상 시즌 절반을 던졌다고 보면 된다(...) 2015시즌부터 적용된 KBO의 한시즌 경기수인 144경기로 환산하면 대략 615이닝. 물론 환산을 하지 않더라도, 427.1이닝이 말도 안 되는 기록이라는 점은 명백하나, 100경기 시절에는 지금보다 휴식일이 훨씬 많았으므로 경기수 비례로 환산하여 615이닝 페이스로 보는 것은 오류. 에이스 선발투수가 3~4경기에 한 번씩 등판할 수 있었던 것도, 선발투수가 적어도 4~5일 휴식을 해야 몸 상태가 회복된다는 데 대한 과학적 연구가 미비하였기도 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휴식일도 이유 중 하나이다. 따라서 장명부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투수의 혹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과거의 기록 그대로 놓고 보아야지 지금보다 경기수가 적었다고 하여 이를 경기수에 비례하여 환산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례로 126경기 시즌과 144경기 시즌은, 전자의 경우 팀 수가 9개로 홀수여서 1팀씩 4일 연휴가 가끔씩 돌아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정 및 기간은 완전히 똑같다. 물론 그런거 안따져도 장명부가 엄청난 혹사를 당한건 사실이다.[8] 굳이 환산을 안하더라도 150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최후의 400이닝등판 투수는 1908년의 Ed Walsh(에드 월시) 이후로 없었다.[9] 장명부가 죽은 곳에서 발견된 자필문구. 하단 참조.[10] 패스트볼의 구속이 무려 149km 다.[11] 이 규정은 같은 해에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김일융 사건을 계기로, 재일교포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개정된다.[12] 이것이 난카이 시대 최후의 우승.[13] 위에 언급한 대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팀메이트인 내야수 이영구도 같이 입단했다.[14]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면 이적 첫해인 1983년 기준, 히로시마 카프 투수진 중 키타벳푸 마나부(3300만엔) 단 1명만 장명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 야수진에서도 장명부보다 연봉이 많았던 선수는 야마모토 코지(6500만엔), 카토 히데지(4000만엔), 기누가사 사치오(3200만엔)의 단 3명뿐이었다. 이 3명 전부 타이틀 수상 경력이 있는 당대의 강타자였고, 특히나 야마모토와 기누가사는 히로시마에서 영구결번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걸 생각하면 장명부가 얼마나 입단 당시 큰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15] 당시 국산차 중 가장 비쌌던 현대 그라나다의 풀 옵션 가격이 2천만원이 채 안되던 시기였다.[16] 심지어 삼미와 입단 계약조건을 조율하던 도중에 삼성 라이온즈의 훈련 캠프를 찾아가 "내가 뛰게 될 삼미라는 팀이 작년에 그렇게 시망이었다며? 레알 뛰기 싫다."라고 삼성의 조감독이자 자신과 같은 재일교포인 이충남에게 투덜거렸고 이충남은 '혹시 삼성으로 오려고 이러나?'라면서 일말의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한술 더 떠 장명부는 "여기서 몸도 풀 겸 연습이나 하고 가겠다"라면서 삼성 타자들에게 직접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알고 봤더니 삼성 타자들을 분석하려고 훼이크를 썼던 것(...). 결국 그해 삼성은 장명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고 특히 그해 데뷔한 장효조는 장명부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나 마찬가지 였다. 역시 레알 너구리[17] 당시 한국에선 최고 수준의 볼스피드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당시 최고구속 150km를 넘기는 투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금도 KBO에서 150km넘는 선수는 십수명밖에 안된다.[18] 홈 경기가 끝난 후 한 팬에게 너구리 한 박스를 선물로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다.[19] 참고로 2008년에서 12년까지 5시즌 동안 류현진이 15완투 6완봉을 기록했다(...).[20] 그 해 롯데 자이언츠에게만 2완봉승을 거두었는데 일본 난카이 호크스 시절이던 1975년에는 롯데 오리온즈에게만 3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다[21] 참고로 강남의 60평(약 200m2) 아파트가 5000만원 하던 시절이다.[22] 링크 내용에서 계약잡음을 중심으로 장명부가 고의태업을 했다고 쓰여지기는 했지만, 실지로는 고의태업으로 완전히 몰고 갈 수는 없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아무리 30승을 향한 자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즌 경기 60%를 넘는 경기를 선발투수를 주업으로 하면서 치렀기 때문에 혹사로 인한 여파 또한 감안해줘야 한다.[23] KBS N SPORTS에서 방영했던 프로야구 다큐멘터리인 '더 레전드'에서 배성서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장명부의 빙그레 영입을 반대했는데 이유는 "그런 선수보다는 어린 선수들을 키우자"라는 인터뷰를 했었고, 홍순일 前 주간야구 편집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진호 단장이 영입했으며 "장명부 쓸 수 있겠냐, 내가 보기에 어떠냐 (그래서 제가) 가능할 것 같다."라는 인터뷰가 나왔다.[24] 빙그레와의 입단 계약 당시 2년치 연봉 1억 5천만원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1승을 거두었고(...), 빙그레는 장명부를 방출하며 나머지 연봉 7천 5백만원은 토해놓고 가라고 했지만 장명부는 "나를 스카웃한 너님들도 책임은 있지 않은가? 몰러 배째!"라고 맞대응하기도... 결국 빙그레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의 대인배적인 조치로 탕감되었다고 한다.이게 대인배라는건 FA선수 중도방출해도 줄 연봉은 다 주는게 대인배적인것으로 보이는건가? 당연한 것을 갖고...[25] 다만 당시가 투고타저라 평자책이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었던 데다, 특히 1986년은 1993년과 함께 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꼽힌다. 당시 평균자책점 2~3점대가 기본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장명부의 4점대(도 아니고 거의 5점대...) 평균자책점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26] 장명부가 유니폼을 벗은 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 해 20승 정도만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괜한 욕심내 가지고 30승을 거두는 바람에 망했다고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린 장면은 유명하다.[27] 당시 노진호 단장의 관련 인터뷰가 정말 압권이다. "장명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물 간 투수라 해도 최소한 10승쯤은 올리지 않을까? 크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1승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빙그레 이글스 입장에서는 구단 역사 초창기의 대표적인 선택 실패였던 셈.[28] 게다가 1983년 장명부 다음으로 믿을 만했던 임호균은 1984년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해 버리는 바람에 다른 대안도 없었다.[29] 당시 강팀이었던 삼성이나 해태 소속이었다면 1986년에 1승18패가 아니라 거의 10승정도도 올릴 수 있었다.[30] 이때 그가 달았던 47번은 훗날 한 좌완투수가 달게 되고 그는 타팀에 가서 수호신이자노예가 되었다. 47번 수호신은 여기도 있는데?[31] 흔히 일본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데릴사위의 경우는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기도 한다. 일본 야구계에선 나카니시 후토시가 그 경우에 해당되며,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사위로 미하라 가문에 입적된 바 있다. 그래서 미하라 후토시가 그의 호적상 이름이다.[32] 1984년 시즌 막판 홍문종(롯데), 김일권(해태), 이해창(MBC) 세 명이 치열한 도루왕 경쟁을 벌일 때 장명부는 같은 재일동포인 홍문종이 누상에 나오면 견제를 게을리 하여 베이스를 훔치는 데 은근슬쩍 지원해 줬고, 이에 열받은 김진우는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지원할 사람이 있다 이거야' 라면서 김일권을 밀어주었다. 참고로 당시 장명부는 주자견제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지금으로 치면 거의 봉중근 급) 김진우 또한 1983년 시즌 도루저지율 5할(120회 시도 중 60회 저지)을 기록한 데다 1984년에도 롯데 한문연의 뒤를 잇는 도루저지율 2위의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였다. 덧붙이자면 이해창은 지원해줄 타팀 배터리가 아무도 없어 나름 열심히 뛰긴 했지만 결국 그해 도루왕 타이틀은 김일권에게 내줘야 했다(...).[33] 삼미의 국내 선수 중엔 포수 금광옥과 친했다. 장명부 등판 시에 사이가 안 좋은 김진우 대신 금광옥이 자주 마스크를 썼는데, 포수 리드가 공격적이라며 금광옥을 선호했다고 한다.[34] 흔히 알려진 프로 및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유명한 투수 출신의 김인식과는 동명이인이다. 현재 독립야구단인 연천 미라클 감독직을 역임 중.[35] 'LG의 야생마'였던 이상훈이 SK 유니폼을 입고 LG를 상대로 세이브를 올렸던 기막힌 사연의 경기였다.[36] 인천 야구 팬들에게 장명부가 의미하는 게 상당했기 때문에...[37] 반면 어떻게 보면 라이벌인 김일융은 야구 해설 등으로 너무 세간에 잘 알려졌고...[38] 대마도규슈 사이를 가르는 해협. 지금의 명칭은 대한해협[39] 대한해협이라는 말을 썼으면 좋았겠다라는 주석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이나 재일교포라면 현해탄이라는 명칭이 담고 있는 의미는 이후 세대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40] 일본은 1979년 처음 선수협이 결성되었고, 1985년 노동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지위를 인정받았다.[41] 8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의 평균구속이 140 초반에서 145로 넘어가는 추세였음[42] 단 승리는 보통 1선발들이 우천연기 등으로 인해 보통 32경기까지도 등판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정이 도와준다는 가정 하에 등판 전 경기 승리를 한다면 가능하다. 따라서 반대로 최다패 기록도 가능은 하다.[43] 2018년 기준 선발 투수가 한 해 200이닝을 넘기면 위험한거 아닌가 염려할 정도로 관리를 해준다. 150이닝도 못 넘는 선수도 많다. 장명부는 일반적인 투수가 3년 던질 것을 1년 만에 던진 것이다. 그것도 경기수도 적었던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ㅎㄷㄷ[44] 같은 이유로 최동원, 백인천, 장효조 등의 기록도 폄하되는 경우가 인터넷 상에서는 종종 있다.[45] 그 말대로면 과거 메이저리그에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사이 영, 월터 존슨, 타이 콥, 베이브 루스같은 선수는 못하는 선수로 평가된다. 옛날 기록이라고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그당시 얼마나 잘했느냐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