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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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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영(魏在永 / Jae-Young Wee)
생년월일 1972년 5월 2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학력 인천석천초-동산중-동산고-인하대 [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1차 지명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1995)
현대 유니콘스(1996~2004)
SK 와이번스(2005~2007)
지도자 경력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2012)
저니맨 외인구단 인스트럭터(2018)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대행(2018.05~2018.10)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2019~)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8 2000
1989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유지현 (충암고등학교) 위재영(동산고등학교) 최명진(대전고등학교)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18번
정은배(1992) 위재영(1995) 팀 해체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18번
팀 창단 위재영(1996~2004) 김동현(2005~2006)
SK 와이번스 등번호 68번
공 번 위재영(2005) 김용섭(2006)
SK 와이번스 등번호 18번
제춘모(2003~2005) 위재영(2006~2007) 제춘모(2008~2014)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트리비아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 저니맨 외인구단의 감독대행.

2. 선수 경력

동산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봉황대기 MVP를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대형 투수로 주목을 받았고, 호주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의 엄청난 호투로 쿠바 전 승리투수가 되어 프로와 대학교간의 스카우트 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2] 인하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고교시절의 활약을 그대로 이어가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 후 1995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 지명되어 2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프로 첫 해부터 선발 한 자리를 꿰찬 위재영은 13승 10패 4세이브 ERA 3.60로 신인으로서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아쉽게도 신인왕은 0.288 22홈런을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이동수에게 돌아갔다. 그에 대한 평은 50:50 으로 갈리는데 아마에서의 위명에 비하면 못했다는 평과 태평양이라는 7위 팀에서의 분전을 감안하면 선방이라는 평이 있었다.[3]
데뷔시즌 부터 풀타임선발이라기보다는 유틸리티 투수로의 성격이 더욱 강했고 그때부터 이미 고질적인 허리부상의 전조가 보였다. [4]

그리고 이듬해인 1996시즌, 팀의 이름은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었지만 위재영은 12승 7패 ERA 2.72로 활약을 이어간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와의 상대전적이 좋았던 관계[5]로 1선발로 출격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해 2패만 기록하고 말았다.[6]쉬고 결국 첫 우승은 다음으로 미루게 된다.

1997시즌에는 5승에 그치며 잠시 주춤했으나, 1998시즌에 13승 8패 ERA 3.23을 기록, 이 해 감격적인 첫 우승[7]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1999시즌, 현대팀의 홍보부장이 위재영의 면제를 위해 국군수도병원군의관에게 2,000만원의 뇌물을 건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파문이 일게 된다. 이 때문에 위재영은 한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이후 가진 재신체검사에서 최종 면제 판정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지만 6승 8패 ERA 4.10으로 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시즌을 보내게 된다.[8]

그리고 2000시즌, 제대로 된 마무리가 없어 고심하던 현대는 위재영을 마무리 투수로 전환시키기로 하는데, 위재영은 3승 2패 39세이브[9] ERA 2.09로 기대에 보답하며 팀의 두 번째 우승에 기여한다.

2001시즌에도 4승 2패 22세이브 ERA 1.82로 현대의 뒷문을 지켰으나,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 때문에 한동안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10] 황당한 것은 이 해에 위재영은 5월 한달에만 12세이브를 올리며 지난해 진필중이 세운 월간 세이브 1위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5월외 남은 기간동안 위재영이 올린 세이브는 단 10차례뿐이었다. 같은 해 시즌 10월 7일 마지막 경기에서 수원에서 벌어진 SK 와이번스의 홈경기에서 팀 동료이자 고향 선배였던 선배 김경기에게 홈런을 맞고 말았다.[11]

이듬해인 2002년, 현대는 위재영을 다시 선발로 보내는 대신[12] 결국 당시 신인인 조용준[13]과 호성적을 올리던 신철인을 중심으로 불펜을 재편한다.[14]

하지만 위재영의 구위는 예전만 못했고, 결국 5승 10패 ERA 4.59의 성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5].

2003시즌에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4경기 등판에 그쳤다. 당연히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는 제외됐다. 2004시즌에는 10경기에 등판, 1승 1패에 그치며 완연한 하락세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이 해 2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위재영은 구단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시즌 중반에는 트레이드 요청까지 하게 된다.

결국 시즌이 끝난 후 현대는 위재영을 방출했고, 위재영은 2005 시즌을 앞두고 테스트를 거쳐 SK 와이번스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현대와 연고지 문제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사이가 나쁘던 SK에 구단과의 불화로 이적한 것을 두고 현대팬들에게는 배신자 이미지를 얻게 된다.[16].

그리고 2005시즌, 위재영은 팀의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3승 2패 6세이브 12홀드 ERA 1.89로 부활에 성공한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시즌이 끝나고 3년 8억원에 FA 재계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95이닝이나 던진 과도한 등판의 후유증으로 인해 2006시즌에는 3승 5패 ERA 4.91로 부진했고, 2007시즌에는 아예 전력 외 선수로 분류되어 1군에서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결국 2007시즌이 끝나고 SK에서 방출, 은퇴하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FA 계약 기간 도중 방출된 사상 최초의 사례[17].

3. 은퇴 후

은퇴 후 고향인 인천에서 어린이 야구교실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2년 초 모교인 동산고 코치로 부임했지만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 미비로 덕아웃에 들어가지 못했다.[18] 그리고 2012년 4월 6일,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사기도박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실 현대에서 방출되기 전부터 도박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고 돈을 빌려가서는 제 때에 갚지 않았다는 얘기가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퍼져 있었던 터라...

어찌어찌 일이 잘 해결이 된 모양인지 풀려나 동산고 코치로 복귀하기는 했지만 시즌이 끝난 뒤 해임되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다시 동산고에서 투수코치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정식 코치는 아니었다) 2018년 저니맨 외인구단 인터스럭터로 영입되었다.기사 이후 감독을 맡던 김상현이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면서 5월달부터 10월달까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2019년에 동산고 코치로 복귀했다.

4. 트리비아

  • 팔이 길어 별명이 '긴팔 원숭이'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5 태평양 돌핀스 36 157⅔ 13
(6위)
10 4 0 3.60 142 51 11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6 현대 유니콘스 30 181⅔
(8위)
12
(10위)
7 0 0 2.72
(7위)
159 56 138
(8위)
1997 20 111 5 8 0 0 3.24 105 45 74
1998 26 164⅓ 13
(7위)
8 0 0 3.23 143 69 122
1999 20 116⅓ 6 8 0 0 4.10 126 65 100
2000 54
(7위)
61 3 2 39
(2위)
0 2.09 62 26 71
2001 37 49⅓ 4 2 22 0 1.82 35 19 44
2002 27 104 5 10 0 0 4.59 118 50 74
2003 4 4⅓ 0 1 0 0 6.23 28 5 1
2004 10 28 1 1 0 0 4.71 28 16 14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5 SK 와이번스 57 95⅓ 3 2 6 12
(7위)
1.89 69 44 80
2006 29 36 3 5 0 3 4.19 39 16 25
통산(13시즌) 350 1122⅔ 68 64 71 15 3,27 1035 462 856


[1] 1991학번[2] 고교생이 평균 150km를 던졌다 하니... 당시 초고교급 투수들의 레퍼토리이다. 150넘는 속구와 변화구 1개... 그리고 혹사. 프로에서 폭망[3] 삼성도 이해 드럽게 못했었다. 롯데마해영이나 해태의 김상진 등등 있었으나 아무래도 투고타저 였다 보니 1위 김상호(1965)와의 홈런 수도[4] 실제 그가 풀타임 선발투수로 뛴 것은 96, 98 시즌 2시즌 뿐이다. 95는 선발과 계투진을 오가는 유틸리티 투수, 97/99는 부상 또는 현대 고위층이 병무청에 몇 천만원의 뇌물을 줬다는 등 여튼 좋지 않는 시선에서 면제가 되었긴 했지만 실상 팀내 주장 김경기와 얼마 안되어 시즌 아웃 되었다., 00 팀의 마무리[5] 3승2패 ERA 2.50[6] 1차전에서 홍현우/최해식에게 연거푸 홈런을 맞으며 무너지고 3일[19] 만에 등판한 3차전에서는 4이닝동안 잘 던졌다가 5회초 부터 볼 컨트롤이 안되어 결국에 강판 되고 만다.[7] 당시에는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의 삽질로 인해 현대 투수들은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8] 어찌되었든 현대 마운드는 그 해 선발 정민태와 2년차 막내 김수경(투수), 맏형 정명원 마당쇠 조웅천 이 4명을 빼고 다 털렸었다. 그나마, 기대주였던 최원호 마저 기대 이하.[9] 역대 삼청태현 마무리 중 정명원의 40세이브를 제외한 2위의 해당 되는 기록[10] 이 때 위재영의 공백은 신철인13세이브를 거두며 간신히 메웠다.[11] 이 홈런은 김경기의 커리어 마지막 홈런이었다.[12] 이는 위재영 본인의 요청이기도 했다. 마무리를 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13] 순수 세이브는 진필중이 했지만, 당시에는 2004년 까지 구원승과 홀드(야구)세이브(야구)를 합쳐서 공식 기록을 집필하였다.[14]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의 누적으로 그 반인 55이닝을 던지며 결국, 마무리 투수는 당해년도 신인 조용준에게 넘겨주며 구원 부분 1위를 하여 조용준이 신인상을 획득한다.[15] 3년차 였던 마일영이 그나마 조금은 위재영 보다 잘했었다[16]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간단히, 예를 들어 한화 이글스에서 뛰다가 FA로 해외로 진출한 이범호일본 생활을 마무리를 하고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 했을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 반대가 있다면 기아에서 한화로 건너간 이용규 정도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들은게 배신자 라고 소리를 많이 들은거 외에는 없다[17] 두번째는 한상훈이 있었다[18] 그 와중에 주말리그에서 동산고는 이미 투구를 마치고 교체되어 덕아웃으로 들어간 투수를 다시 마운드에 올렸고 기록석에서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19] 대게 80/90년대 투수들은 한국시리즈를 이렇게 뛰었다,